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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전하는 시간이 늘어 나면서 달라진 점이 하나 있다면 배철수와 친해졌다는 것이다. 뭐 그렇다고 내가 배철수하고 너나없이 지낸다는 건 아니고 그냥 배철수가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일주일에 한 두 번은 듣게 된다는 말이다.
얼마 전엔 성시경이 그 프로에 출연해서 라이브로 스티비 원더의 ‘I just called to say I love you'를 부르자 배철수가 그 특유의 억양으로 “스티비 형님이 부르시는 거 보다 더 발라드 적으로 부르시네요, 작업용으로 고르라면 스티비 형님 꺼 보다 성시경 씨께 더 어울리겠는데요.”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뭐 나름대로 칭찬이라고 한 것이었겠으나 성시경 나름대로는 나도 소프트 발라드 뿐 아니라 이런 스타일의 노래도 잘 부른다고 라고 들고나온 거 같은 그의 의도-이것도 물론 내 추측에 불과하지만-를 오히려 좌절시킨 한마디 같았었다.
사실 사람한테 칭찬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얼마 전 초등학교 동창 모임에 그 중 한 친구의 남편하고 같이 어울린 적이 있었다. 정확히는 그 남편이 초대한 것이었다. 몇 순배 잔이 돌고 판단력이 좀 흐려진 내 눈에 그 양반이 들어 왔는데 그 분이 눈이 정말 컸다. 나보다 눈이 큰 사람을 오래간만에 만난 내가 궁리끝에 꺼낸 찬사의 말은
“눈이 참 크시네요, 소 띠라고 그러시더리 꼭 소 눈을 보는 것 같습니다.“
역시 몇 잔 술에 판단력이 풀어진 그 아자씨 너무 기분 좋게 웃으시면서 내 말에 맞장구를 치시는 걸로 다음 신으로 넘어 가긴 했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엄청 기분 나쁠 수도 있었을 것 같다.
여하튼
그 날 약간 논란이 된게 음악하는 사람이 오락프로에 나가야 되는가 였는데 성시경 말이
“제가 하루 24시간 꼬박 녹화하는 프로그램에 출연한 적이 있었는데요. 새벽 세시에 여자출연진을 각자 들고 누가 오래 서있나 하는 게임이 있었어요. 그래서 다들 떨어지고 비하고 저가 남았는데 둘다 아랫도리 힘이 좋아서 승부가 안나자 그 날 협찬상품인 쌀 한 부대를 그 위에 더 들고 있게 하더라구요. 제가 음악하는 사람이잖아요. 그런데 새벽 세시에 여자를 들고 또 그 위에 쌀 부대를 얹어서 들고 있는 상황이 정말 좀 그렇더라구요. 예전엔 그런 거 때문에 스트레스를 엄청 받았는데 요즘은 그렇게 해서 내 곡이 한번 더 소개되고 내 뮤직비디오가 크로징으로 쓰인다면 내 음악을 더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고 뭐 그리 나쁘게 생각할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라고 얘기하더라구 요즘 나오는 그런 가수들 보다는 그래도 생각이 좀 있는 거 같기도 했지만 결국 자기합리화에 불과한 거 아닌가 싶기도 하고. 그런데 거기서 우리의 배철수가
“사실은 나도 예전에 오락프로그램에 나간 적이 있어요. 왜 명랑운동회 라고 성시경씨는 기억 못하죠. 변웅전씨라고 나중에 국회의원도 하신 분인데 허허허 웃으시면서 진행...”
명랑운동회 얘기를 하자면 문제의 그 친구 놈이 등장 안 할 수가 없다. 내게 첫 부르스 파트너로 베개를 소개해 주고, 문둥이 취급을 받아 내게 꽁트의 소재를 제공 했던 글마. 언젠가는 이 놈이 어디서 술 먹고는 그 다음 날 시험 보는 내 방에 쳐들어와 자면서 밤새 온 동네가 떠나가게 ‘오바이트’를 외치는 그 놈 머리에 쓰레기통 받치다가 머리가 아프다는 그 놈 말에 ‘맞아 플라시보 이펙트’ 하며 서랍에 굴러다니는 소화제를 주었더니 그 때부터 새벽까지 ‘아이고 배야’ ‘아이고 머리야’ 하면서 밤을 새우는 걸 보고는 그래 책에 쓰인 것 하고 실제 인생은 역시 같지 않다는 진리를 내게 일깨워준 그 고등학교 친구를 만난 것은 고3 때였다.
한번도 같은 반이 아니었고 뭐 서로 둘 다 그리 뛰어난(이쪽으로든 저쪽으로든) 학생이 아니었던 그놈과 내가 친구가 된 걸 설명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한 놈 고3 때 반친구가 필요해 진다. 그 반친구는 두가지 에피소드로 기억되는데 둘다 술과 관련이 되어진다. 체구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시골 출신답게 제법 뚝심도 있었고 마음 씀씀이도 괜찮았던 그 놈이 내게 우리 고3 도 되고 공부도 좀 해야 되는데 스트레스도 풀 겸-공부도 하기 전에 풀 생각부터 먼저 한다-가끔 만나서 공부 얘기도 하고 밥이나 먹는 모임이 하나 있는데 나 보고 거기 들어오라고 해서 들어간 곳에서 문제의 그 부르스 사부 친구를 만난 것이었다.
주제하고는 한 참 벗어나는 것이지만 그 반친구하고 있었던 일화도 집고 넘어가자. 한번 연기된 고3 소풍을 기어코 간 날이었다. 앞 장면은 기억이 안 나는데 여하튼 장위동 쯤 있는 어느 야산을 일마와 내가 걸어가고 있었는데 익히 이 놈의 술버릇을 아는 놈들은 이미 사라지고 역시 우유부단한 내가 남아 이 놈을 달래서 자취방에 데려다 주려는데 시골출신 답게 힘이 장사인데다가 술기운 까지 가세한 글마한테 오히려 끌려 다니던 형상이 기억난다. 그리고 장면이 바뀌어 버스 안이다. 그 놈은 교복 나는 삼년 내내 입고 다니던 교련복, 이렇게 입고 있는 두 학생이 버스에 서 있는데 한 놈 입에서는 연신 육두문자가 나온다. 옆에서 조금 순진해 보이는 또 다른 학생 하나가 뭐라고 얘기를 하지만 그 친구는 들은 체도 않는다.
지금도 그렇지만 이럴 때 승객들의 반응은 그 당시에도 역시 ‘뭐 내 자식 아니니까5A1? 로 우리 두
사람은 버스 속에서 철학적 의미 그대로 소외를 경험하게 된다. 다시 장면이 바뀌어 길음시장 안에 있는 그 놈의 외할머니인가 친할머니인가 하시는 할머니한테서 몇 천원을 받아 시장안 골목 어느 약국에 들어갔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그래도 좀 나이 들어 보이지만 그 당시 그 새파란-다시 생각해 보니 술 때문에 얼굴이 빨갰었던 거 같다- 얼굴로 교련복을 입고 들어가 그 약사 분 한테 ‘저 아저씨 술 깨는 약 좀 주세요’ 했을 때 그 분이 날 보며 짓던 그 한심해 하던 표정도 기억난다. 그로부터 약 일년 뒤 또 다시 실연을 하여- 소풍 날의 폭음도 실연 때문이었다, 뭐 무슨 연례행사 쯤 되는 것 같다-입영을 하던 말 그대로 입영전야에 또 쇼쇼쇼 가 한 판 더 있었었지만 그 얘기는 그만 줄이자.
여하튼
그 한얼회-이 이름 내가 지었다-에서 고3들이 모여 처음에는 그래도 학원이 어디가 좋네 머 이러면서 떡볶이 먹고 잘 나갔다. 그런데 사람이라는게 디립다 공5BA罐? 하겠다고 해도 딴 마음이 생기게 마련인데 우리 모임의 원래 취지가 ‘공부하면서 쌓이는 스트레스도 좀 풀고’가 아니었던가! 만남이 거듭되면서 어디서 배웠는지 담배를 피워 무는 놈도 하나씩 늘어났고 중국집 그 누런 사기 컵에 가방에 몰래 숨겨 가지고 들어 온 소주를 따라 마시는 놈들도 하나씩 생겨나기 시작했다. 왜 해보셔서들 알겠지만 나쁜 짓이라는 건 참 배우기도 쉽고 재미있는 것 아니겠는가. 꼬리가 개를 흔든다더니 어느새 모임에서 공부 애기는 뒷전이 되고 짬뽕 국물에 소주 마시는 모임으로 변질이 되어 버리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그렇게 나쁜 애들은 아니었고 기냥 담배 좀 피고 술 좀 마시고 까부는 -그게 불량스러운 것의 척도인가?-고등학생 들이었다고 기억된다.
이들 하고 멀어지게 된 것도 참 철없는 얘5B1? 중에 하나다.
2학기 들어 무슨 시험에서 나하고 그 부르스 사부가 장학금을 받았다. 그러자 그 한얼회에서 나온 의견이 ‘야 우리 이제 시험도 얼마 안 남았으니 마음도 잡을 겸 그 돈 가지고 교외선 타고 어디 가서 야영하고 오자. “ 지금 생각하면 아니 기차타고 가서 텐트치고 노는 거 하고 시험 앞두고 마음잡는 거 하고 무슨 관계인가 라고 하겠지만 그 당시 우리는 아무도 그 말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고 기타를 빌리고 텐트를 빌리고 하여 들뜬 마음으로 일영(아마도) 어딘가의 계곡으로 놀러를 갔었다. 기억나는 건 별로 고체연료에 얇은 돌을 올리고 고기 굽는데 익지 않았던 기억 그리고 밤에 추워서 불피우고 그 주위에서 자고 일어 났더니 얼굴이 전부 검댕이 투성이었던 것 정도가 생각난다.
여하튼
그 여행의 목적대로 공부에 일로매진? 하고 있던 어느 날 학생부에서 나를 찾았다. 아니 나 같은 범생이를 왜 학생부에서 찾아 하는 마음으로 갔더니 나보고 어느 어느 날 어디로 놀러 갔었느냐는 확인이었다. 속으로 이야 별걸 다 아네 하며 확인을 해 주었더니 교련담당이신 그 선생님 왈 ‘이 새끼가 제일 나쁜 놈이네’하시며 신체부위를 무작위로 때리시더라구. 사연인즉 야영한 날 조리를 위해 칼을 가져갔는데 낚시가 취미시지만 도구 관리를 안 하시는 아버님 덕분에 우리 집에 있는 녹이 좀 슨 나이프-재크나이프라고 까지 하기는 뭣하고 그래도 접었다 폈다는 되는 -중 하나를 들고 갔는데 이걸 내 친구 중 한 놈이 가져갔는데 이 게 그 놈 반에서 돌고 돌다가 어느 그 반 친구가 가지고 있다가 그 놈-의정부 깡패였다고 기억한다. 우리 반에도 한 친구 있었는데 결국 그쪽으로 풀렸다가 요즘은 술 도매상으로 엄청 잘나간다고 저번 반창회 때 2차를 몽땅 쏘았다는(치과의사는 죽었다 깨어도 못하는) 전설이 들리기도 한다.- 이 지네 동네에서 싸우는 도중에 그 칼을 사용하게 되었고 문제의 범행도구의 행적을 찾다가 내가 학생부로 끌려가게 된 것이었다. 예비고사를 한달인가 앞두고 매일 학생부에 나가 반성문-그런데 뭘 잘 못했는지 알아야 쓰지-쓰기를 삼일인가 사일, 얘는 공부 좀 하는 학생이라는 담임선생님의 비호로 영 못마땅해 하는 학생부 선생님의 시선을 뒤로 하고 학생부실을 나올 수 있었다.
이 사실은 당연히 집으로 통보 되었고 공부한다고 집을 비운 그 나날들이 사실은 친구 놈 자취방에서 뒹굴기 위한 거짓말이었다는 걸 안 우리 엄니 당근 친구들과의 만남을 블록 하셨고 뭐 그리 잘한 것도 없는 나로서도 머 글마들이 줄리엤도 5BE틈祁? 반대를 무릅쓰고 만날 필요는 없었고 대학 들어가서 만나도 되었었고. 그런데 out of sight, out of mind 라고 그걸 계기로 모임이 끊어지게 되니까 다시 모임이 이어지지도 않게 되고 그렇게 고삐리로서의 학창시절은 끝나게 되었다.
.자 이제 대학에 들어가야 되는데
갑자기 고등학교 시절 에피소드가 또 하나 떠오른다.
이학년 때인가 생전 안하던 전체조회가 열리더니 건강이 안좋으셔서 인사만 하고 들어가시던 교장선생님께서 마이크를 붙잡고 한탄을 하시는 것이었다.
내용인즉
요즘 우리 학교 앞에서 버스가 안서고 자꾸만 정류장을 지나친다는 불평이 있어서 교장인 내가 직접 버스회사 사장한테 전화했더니 그 사장 왈
??고등학교 학생들은 버스를 타도 버스비를 안내서 버스를 안세우니 학생들 교육 좀 잘 시키시라고...
그러시면서
내가 교육계에 투신한지 사십년 가까이에 오늘 처럼 부끄러웠던 적은 없었다는 얘기를
덧붙이면서 한 숨을 푹 쉬시더라구.
알아 보니
우리 학교 앞을 지나가는 노선 중에
상계동, 창동 이쪽으로 가는 버스에 특히 짖궂은 놈들이 많이 탔었는데
일마들이 버스에서 내릴때 버스비를 달라고 차장언니가 얘기하면
'뒤에' '뒤에' 하면서 한 열댓놈이 내리고
마지막에 내리는 놈에게 앞에 차비를 얘기하면
큰 소리로
'내가 뭘!' 하고는
지 차비만 낼름 내고 내린다는 것이었다.
거기다가 ㅆ 자로 시작되는 낱말까지 더해서 말이지.
언놈이
졸업하고 미팅을 하다가 마침 그 버스를 같이 타고 다니던 어떤 여고출신을 만났는데
출신고등학교를 말하자 마자
일어나서 뒤도 보지 않고 나가더라나
갑자기 버스하고 관련된 일화가 또 하나 생각났다. 일학년 때 기술 방학숙제가 자동차부품을 가져 오는 것이었는데 -기술실이라고 따로 교실이 있었는데 거기에 있는 부품으로 자동차 삼십대는 만들 수 있다는 것이 그 선생님의 큰 자랑이셨다. 그런데 이 숙제가 우리 학년에서 끝났으니 그 이유인즉 -그 선생님의 육성으로 들어보자- "야 이노무 자식들아 내가 자동차 부품을 가져오랬더니 천장에 붙어 있는 버스손잡이를 뜯어서 가져오면 어떻게 하냐, 오늘 내가 무슨무슨 버스 회사 상무라는 사람한테 전화 받았다. 우리 회사 버스 손잡이 남아 나는게 없다고 거기 고등학교는 애들한테 도둑질 가르치냐고." 여하튼 그 이후로 그 숙제는 끝이 났다. 또하나 일화가 기억난다. 우리 학교에서 멀지 않은 곳에 미아리 텍사스라는 곳이 있었다
나 같은 앞 번호에 범생이 들은 잘 몰랐지만 좀 나름 놀던 아해들은 거기도 다니고 그랬었는디..
그 중에 몇 반인지는 모르지만 우리반 은 아니었던 친구하나가 텍사스 전투에서 내상을 입어 보건소를 드나들게 되었는디
그 당시에는 몰랐지만 그 당시 잠깐 본 그 아이 증상으로는 요도염은 지나 조금 더 진행된 화류병으로 생각되는디
여하튼
그 아이가 수업이 끝나-그래 봐야 오후 서너시 것지만- 그 당시 하교길을 양측에 절친들이 부축하고 내려 오는디 아뿔사
그 광경을 선생님이, 그것도 교장선생님이 목격하시고 그만 이 착한(상대방이 기분 나빠할 까봐 장화도 안 신었던) 학상을
불러 세웠다
"아 학상!!!"
그 당시 그걸 멀리서 바라 보고 있었던 나는 물론 주위가 숙원해지며
야.. 삼학년 까지 잘 참으며 다녔는데 마지막에 고비를 못 넘기고 저노마가 짤리는구나
하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 교장센세이 말씀하시길
"아이고 고삼이 되가지고 얼마나 공부를 열씨미 했으면 이렇게 걷지도 못하고... 이 돈 가지고 택시타고 가게나" 하심서 거금 만원(아마도) 을 주시는 걸 보구
주위에 있던 우리 학상 일동 뒤집어 지는 줄 알았다...
다음 날에 들어 보니 그 돈 가지구 택시두 타구 뭐도 사먹었다다 어떻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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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대천 여행에 대한 얘기를 해야 되는데 날리는 눈을 보니 갑자기 예전 기억이 떠올라 한 꼭지-정말-만 더하고 가자. 남녀가 모여서 하는 모임치고(경노당을 포함해서) 그 안에서 남녀상열지사 가 없는 모임은 거의 없다. 더구나 한창때의 나이에다가 도덕적인 구속도 없으니 없는게 더 이상할 것이다. 그 써클내에서도 당연히 온갖 추문? 들이 난무했는데 그중에는 내 부르스싸부도 끼어있었다. -내가 울 마누라 말 마따나 분명 미성숙하긴 했던게 그 와중에도 변변한 스캔들 하나 만들지 못했다. 글마가 좋아하던 여학생이 하나 있었는데 왜 그런 경험들 한번씩은 있을텐데 그 모임에 모든 구성원을 포함해서 당사자 두 사람도 누가 누구를 좋아한다는 사실은 다 알지만 정작 그 당사자는 얘기를 안하고 있는 그런 상황 말이다. 갑돌이하고 갑순이하고는 좀 뉘앙스가 다른 뭐 그런 시츄에이션 말이다. 여하튼 네 싸부가 좋아하던 여학생이 있었는데 그 기간이 제법 오래갔었다. 내가 어쩌다가 그 여학생이랑 연대 100주년 축제를(아카라카축제라고 응원단 공연인데 본교학생들도 보기 힘든거라고 표 구해준 친구가 자랑하던 기억이 있다) 둘이 갔다가 글마한테 한달이상을 닦인 생각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런데 왜 같이 갔었는지 그것도 딸랑 둘이 갔었는지는 정말 기억이 안나네.. 애니웨이 81년 겨울에 글마하고 그 여학생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서 장충체육관에 농구, 아마도 농구대잔치,를 보러 간 적이 있었다. 왜 그 때는 그렇게 셋이나 다섯 머 이렇게 짝 안 맞혀서 잘 다녔던 거 같다. -여자가 부족해서 그랬나? 이유는 잘 모르겠다. 그렇게 좋아하던 여학생이랑 같이 농구장을 갔으니 얼마나 신이 났겠는가. 그노마가 신이 나서 떠드는데- 일마가 얼마나 재미가 있는 친구인가 하면 나는 물론 명함도 못내밀고 울 마누라 표현을 빌리자면 자기가 세상에 태어나 그렇게 웃기는 사람을 처음 보는 걸 떠나서 사람이 저렇게 재미있게 말을 할 수가 있구나 라고 했다. 그러던 놈이 세월이 가더니 요즘 만나면 나처럼 뭐 그냥 그렇고 그런 아저씨가 되어 버렸다. 뭐 시간을 이길 장사가 있겠는가. 그렇지 않아도 말 잘하는 놈이 기분까지 업 되어서 셋중에 가운데 앉아서 신나게 떠드는데 앞에 앉아 있던 어떤 아저씨가 돌아서며 하는 말 "재미있게 노시는데 정말 미안한데요 정말 너무 침이 튀어서 그러는데 딴 데다 대고 얘기하시면 안될까요" 그 양반은 점잖게 얘기했지만 그렇지 않아도 뒤집어 지고 있던 그 여자애하고 나는 완전히 까물어 치고 말았다. 그 와중에도 글마 "예 미안한데요, 제가 구강구조가 좀 특이해서 그러니까 이해하시고요 제가 반대쪽 보고 얘기할께요." 라고 대답하고는 천연덕 스럽게 말을 이어가더라구. 여하튼 시합이 끝나고 거리에 나섰는데 경기전에 약간 꾸물꾸물하던 날씨가 변하여 함박눈이 내렸는데 그 사이에 이미 제법 쌓여 있었다. 한참 때인데 그냥 갈 수가 있겠는가 거기서 한남동 까지 남산을 걸어서 넘어 갔는데 글마 나한테 조용히 얘기하더군 "야 좀 떨어져서 따라와라" 내가 방자는 아니지만- 왜냐면 앞에 가던 그 여학생이 계속 호선아 좀 빨리 오라고 몇 번인가 불렀다.- 한남동까지 내리는 눈을 맞으면서 가는데 '이게 뭔 짓이여' 라는 말을 한 골백변은 했을거다. 그렇게 내가 몸 바쳐서 도와 주었건만 결국 그노마 좋아한다는 얘기 한번 못하고 그냥 끝나고 말았다. 여하튼 이 여학생하고 시집 가기 전까지 연락도 되고 결혼식장에도 갔는데 -어느 날 곰팽이에 다른 내 동기 놈이 전화를 하더니 그녀가 시집 간다는 얘기를 하면서 막 웃더니 그런데 남편이 누군지 아냐면서 하는 말이 글쎄 이호선 이란다 이호선 내 이름이 그렇게 흔한건 아닌데 동명이인을 만났다니 좀 신기하긴 했다. 결혼이후 못 보다가 아산스파비스에서 그 여학생을 십년 만에 우연히 만났는데 두 이호선이 인사하고 연락처를 적으려는데 입은거라고는 수영 빤쓰 뿐이라 이메일을 외웠는데 아니나 다를까 샤워하고 나오니 영 기억이 안나더라구. 남편이 어디 교수이고 친정아버님이 일년 선배 곰팽이 회원 대학원 지도교수라서 알아 보려면 못 알아 볼 것도 없겠지만 언젠가 한번 보겠지 하는 생각으로 지내고 있는 중이다. 더 늙으면 억지로 찾아 보려나 모르겠다. 뭐 아직은 그래도 젊은 모양이다. 추신: 다시 생각해 보니 이 정도로도 그녀의 신상정보를 알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불쑥 들어 남의 얘기를 이런데다 써도 되나 하는 우려가 들긴 했지만 뭐 둘이 연애를 한 것도 아니고-사실 또 뭐 연애가 아니라 더한 걸 했으면 이 나이에 뭐 또 어떤가 - |
드디어 제목에 있는 에피소드가 등장하는 대천여행에 관한 야그다.
82년 연말인가 83년 연초인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그 겨울에 대천으로 소위 엠티를 가게 되었다.
학생때니 당연히 완행을 타려고 용산역에 모였는데 이상하게도 내 부르스 싸부가 나타나지 않는 것이었다. 우리는 일마를 애타게 기다리다가- 글마가 그당시 엠티에 절대 필수픔인 내 기타를 빌려 갔다가 그 날 들고 오기로 했었다- 뭐 핸드폰이 있던 시절도 아니고 하여 어쩔수 없이 기차를 타고 가면서 유치뽕짝한 게임을 하고 있었는데
천안쯤 지나고 있는데 갑자기 객차 통로에서 글마가 기타를 메고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모두 신기해서 아니 어떻게 된거냐고 물었더니 약속장소로 오다가 아무래도 시간을 못 맞출 것 같아 서울역으로 바로 가서 거기서 특급을 타고 천안에서 우리의 완행열차를 기다렸다가 탔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특히 나는 그 기발한 생각에 모두 감탄을 금치 못했으나 사실 문제의 발단이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는 것은 아무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
반가운 인사가 끝나고 여행에 관한 경비를 담당하고 있던 여자 후배가 회비 납부를 촉구하자 그 노마의 변명이 예정에 없던 급행을 타고 오느라 지금은 회비를 다 낼 수가 없다는 것이었고 책임감에 불타고 있던 이 여자 후배 상당한 불만을 나타내기는 했지만 머 뾰족한 수단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대천에 도착하여 적당한 민박집을 찾아서 들어 간 우리는
-갑자기 그로부터 몇 년후 또다시 겨울에 찾아갔던 대천에 또 다른 민박집에 걸려 있던 표어가 생각난다. '엄마 아빠 모기 잡고, 너와 나는 않물리자- 보령군보건소' 여름에는 화사한 색까리었을 흰 회벽에 붙인 그 표어가 겨울바람에 휘날리는데 얼마나 을씨년 스럽던지.
여하튼
그곳에 들어가서 밥 해먹고 이런 저런 구라 풀다가 엠티에 빠질 수 없는 싱어롤을 하려다가 문제점을 발견해고 말았다.
기타는 있는데 가져온 노래책이 그만 영 이상해서 부를 수 있는 노래가 불과 몇 곡이 안되었던 것이다.
각 써클마다 하나씩 있는' 왜 음감이 있어서 멜로디로만도 기타 코드를 잡을 수 있어 업된 분위기의 끊김이 없이 반주를 할 수 있는 오부리 맨이 2차로 오는 팀에 속해 있어 달리 방법도 없었던 우리는 내가 칠 줄 아는 몇 곡 그리고 내 싸부가 칠 줄 아는 노래 몇 곡을 부르고 나니 영 뭐 더 부를 노래가 없어져 업렸다.
그래서 뭐 할 일도 없었던 우리는 낮술을 한잔 두잔 씩 하게 되었고 장난감을 빼앗긴 듯 표정의 어느 여자후배의 부아를 더욱 돋우는 일이 있었으니 우리 옆 방에 들은 어느 다른 써클에서 기타반주에 노래를 부르는데 거기 기타맨이 아주 직여주는 반주를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급기야
"아니 오빠들은 기타도 못치면서 노래책도 안가지고 오고 뭐하는 거야"
라는 힐난에
"야 왜 아까 '모두 다 사랑하리' 도 멋있게 쳐 줬잖아"
라는 내 싸부의 변명은
"그거 벌써 세번이나 불렀잖아"
라는 사실 앞에 한없이 작아지는 그대 가 될 수밖에 없었다.
여하튼
그렇게 한잔 두잔 마신던 술판이 이어지다가
젊은 남녀 모임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얘기는 남녀관계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런 저런 얘기 중에
요번 여행경비 관리하던 그 여자 후배와 그 후배와 잠시 만남을 가지던 어떤 남학생(그 당시에는)의 얘기로 이어지게 되었다.
나는 물론 내 싸부도 알 고 있었던 그 남학생을 가지고 그 여자후배를 살살 놀리던 내 싸부는 지 장난에 스스로 흥이 났던지 얘기 끝에
"결국 너가 남자 하나 잡은거젆아" 라는 폭탄선언을 하였고
-자세한 내용은 후에 얘기하자
"내가 뭐 어떻게 한게 있다고 그래, 그 사람이 자기 혼자 그런거 가지고"
라며 대들던 그녀가 순간 조용해 졌고
옆에서 흥미진진하게 지켜보던 내가 뭔가 심상치 않은 느낌에 쳐다 보니 그녀가 들고 있던 노래책에
뚝뚝 물이 떨어지고 있던 것이었다.
사태파악이 아직 안되어 말을 이어가던 글마를 손짓으로 제지하고
"어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었던 내 싸부도 말을 그치고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른 후
고개를 들지 않고 있던 그녀
얼굴을 숙인 채 지갑을 열어 얼마인가(한 이천원 쯤 되었던 거 같기도 하고)를 꺼내 내게 주며
"오빠 맥주 열병만 사다 주세요"
어 이거...
하고 있던 나는 잠시 머리를 굴리다가
"이걸로는 두병도 안되는데"라고 대답을 하였고
나와 더불어 잠시 생각을 하던 그녀
"그럼 소주로 돈 되는데로 사다 주세요"
-애고 졸려서 나머지는 다음에...
왜 그 후배 여자아이가 남자 하나 잡았다는 얘기를 듣게 되었나 에 관한 야그다.
그 후배가 일학년 때 다른 어떤 내 친구가 자기의 친구를 소개시켜 줬고 잠시의 만남 후 헤어진 그 소개 받은 남자애는 실연의 아픔을 안고 해병대에 자원입대를 하였고 해병대에서 아픈 배를 부여잡고
훌륭히 훈련 받던 그 실연남은 휴가나와서 겨우 받은 진찰에서 그 아픈 배가 단지 밥을 잘 못 먹어서가
아니라 훈련 중 받은 외부의 타격으로 인한 '장파열'로 밝혀져 의병제대 로 이어지게 되었고 그 후배는
결국 남자 하나 잡은, 결과적으로는 일찍 제대 시켜 준 은인으로 남게 되었다.
어찌 어찌 사태는 수습이 되었지만 그 방에 계속 남아 있을 수가 없었던 그 친구, 즉 내 싸부는 어딘가의 다른 방으로 피신을 하였고 우찌 우찌 나도 그 방에 합석을 하게 되었다.
피난인지 위리안치 된건지 모를 그 방에서 우리는 이차로 도착한 팀에 존재하는 기타리스트가 연주하는 반주에 맞춰 흥겨운 싱어롱 시간을 즐기는 우리 팀의 노래를 귓전으로 들으며 놀러와서는 일찍 자는게 최고라는 말도 안되는 그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다 파마한 머리는 매일 감아야 한다는 이상한 논리로 세면대로 나간 그 놈은 더운 물을 얻으로 주인 아저씨에게 가게 되었고 거기서 어디 학생들이냐는 질문을 듣게 되었다.
S대 라는 우리의 대답에 그 아자씨 ,왈 역시 S 대생들은 다르다, 놀러 와서도 이렇게 일찍 일찍 자고 얼마나 좋으냐, 놀러와서 저렇게 시끄럽게 노래 부르고 노는 애들하고는 질적으로 다르다, 라는 자기의 직업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상한 대답을 듣게 되었다. 얼마나 학생들의 기타소리에 질렸는지 알만했다.
여하튼 일찍 잠이 든 덕분에 우리는 다른 애들과 달리 아침바다를 보러 나가게 되었고
그 바다에서 다시 한번 작은 에피소드를 보게 되었다.
아침에 나간 바다에서 괜히 이리저리 다니던 우리는 어제 밤 이후 헤어졌던 우리의 동행을 만나게 되었고 거기에서 끔찍한 비보를 듣게 되었다.
우리의 후배 둘이, 남자 하나 잡았던 후배와 그의 친한 친구 하나, 민간인 출입금지 구역을 무단 출입하여 경계근무 중이던 군인에게 체포되었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하나 우왕좌왕 하는 사이에 우리의 품으로, 사지에서 구사일생한 후배의 전언에 의한 전말을 이렇다.
우리는 거기가 출입금지구역인지 몰랐다. 좀 호젓한 해변을 거닐고 있는데 어디선가 나타난 일군의 군인들에게 제지되어 그들의 대장-내 생각에 분대장쯤-에게 인계되었고 얘들이 간첩인 것 같다는 우리 나이 연배의 사람에게는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혐의로 취조를, 현장에서 즉석으로 받게 되었단다.
학생증을 비롯한 증거물을 내세우며 확실한 신원을 밝히는 우리 후배들에게 이런 건 간첩들이 얼마든지 위조가 가능하다며-낄낄 거리는 글마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본부로 끌고 가자는 군인들의 협박과 살려주세요 라는 애걸이 잠시 오간 뒤에 내려진 우리 재판장님이신 분대장님의 선고는 간첩혐의를 벗기 위해서는 유행가를 하나 불러 너희들이 대한민국 국민임을 증명하라는 것이었다.
결국 그 호랑이 굴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우리의 어여쁜 후배 둘은 그 웃음을 참느라 배가 아파 죽을 똥을 참는 그 국민의 방패 앞에서 대천의 넓은 바다와 밝은 햇빛을 바라 보며 자신들이 대한민국 국민임을 주민등록증이 아니라 노래 한소절로 증명해야만 하는 절대절명의 순간을 맞게 되엇던 것이었다.
그 말을 듣던 우리는 급히 물어 보았다. 그래서 뭘 불렀니.
대답인 죽 "사람이 그 와중이 되니까 생각나는 노래가 하나도 없더라구요, 그래서 억지로 생각해 내 낸 노래가"
-하늘에 구름 떠가네, 보라색 그 향기도...
너무 불러 지겹다는 그 노래가 그들의 생명을 구하는 비장의 무기로 등장할지 그 누가 알았으리요.
여기서 내 싸부는 그 후배들의 생명의 은인이 되었고 의기양양하게 여인숙으로 돌아 온 우리 앞에
다시 하나의 비보가 기다리고 있었다
지난 밤 계속되는 음주가무로 신났던 우리의 동행들은 급기야 이성을 잃고 뭐 우찌 되겠지 하는 심정으로 여비에 손을 대었고 알콜의 신이 우리 곁을 떠난 후 알게 된 것은 여학생들의 비상금을 뒤져도 여비가 모자란다는 것이었다.
갑자기 신이 난 내 싸부는 그들의 만행을 비난하며 본인의 한약을-여드름 치료를 위한 한약이 따로 있다는 것을 그 때서야 알았다- 내다 팔면 충분히 여비를 마련할 수 있다며 만일 팔 수 없다면 그 동네에 있는 친척이라도 알아 보겠다고 기세 좋게 장담하였다.
그래서 이십여명의 나머지 인생을 책임지는 막중한 임무를 띤 우리는 대천읍내로 행하게 되었다.
미션임파시블을 행하기 앞서 수신을 하기 위해서 우리는 목욕탕에 들어갔고 거기서 드디어 우리의 제목인 명랑운동회가 나오게 되었다.
목욕재계를 마치고 나온 나는 탈의실에 걸려 있는 테레비에서 나오는 일요일의 간판프로인 명랑운동회를 보게 되었다.
프로가 끝나갈 즈음 경품 추첨이 있었고 그 당시로는 지금의 벤쯔에 버금가는 칼라테레비를 받은 아이 업은 아주머니를 우리의 변웅전 의원님이 인터뷰를 하게 되었다.
변: 축하드립니다. (업은 아이를 가리키며) 몇개월이나 되었지요
아줌니: 6개월 되었는디유
변: 언제 결혼하셨나요?
아: 예, 일년 되었는디유
변: 얼마나 되셨다구요?
-이때까지도 눈치가 없는 나는 왜 변웅전 아나운서께서 다시 재차 질문하는 지 알 수가 없었다.
아: 일년 되었다니께유
변: 예!, 결혼하신지 일년 되셨는데 6개월된 애가 있군요, 예, 일년되셨는데 6개월된 애가 있군요.
이상으로 명랑운동회 를 마치겠습니다. 시청자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요.
그때서야 상황을 알아 챈 나는 쏟아지는 웃음속에서도 저 아줌니 좀 그렇겠네 하는 생각이 들었다.
----끝
추신: 사실 그 여비를 우찌 마련하였는지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그리고 아마도 그 아이업었던 아줌니는 변웅전 의원님의 여의도 국회 입성에 가장 큰 걸림돌로 작용하지 않았을까 궁금하다.
첫댓글 옮기는 김에 하나 더 올립니다...
나름 재미있으셨는지 모르겠네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