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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세페 아르침볼도(Giuseppe Arcimboldo, 1526~1593)는 16세기 후반, 비엔나와 프라하의 신성로마제국 궁정에서 주로 활동한 밀라노 출신의 화가이다. 황제와 왕족의 공식적인 초상화 제작을 주업무로 했던 일반적인 궁정 화가들과 달리 그는 계절, 원소, 직업과 관련된 사물을 조합해 구성한 알레고리적 두상으로 당대에 인기를 끌었고, 오늘날까지 그를 유명하게 만든 것도 이런 ‘조합 두상들(composite heads, teste composte)’이다. | |
[봄] 1573년 캔버스에 유채, 76×63.5cm, 루브르 박물관, 파리 © Photo RMN, Paris - GNC media, Se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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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1573년 캔버스에 유채, 76×63.5cm, 루브르 박물관, 파리 © Photo RMN, Paris - GNC media, Se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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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생애와 작품에 대해서는 정확한 사실이 극히 적다. 14세기부터 16세기 이탈리아 미술가들의 열전인 지오르지오 바자리의 책 [최고의 화가, 조각가, 건축가들의 생애]나, 이 책의 북유럽 판이라고 할 수 있는 카렐 판 만더의 1604년 책 [화가의 책] 모두에 그에 대한 기록이 없다. (1550년과 1568년에 나온 바자리의 책에 포함시키기에 그는 너무 어린 감이 있었을 수도 있고, 책이 나올 때 이탈리아 밖에서 활동하고 있어서 그 내용이 알려지지 않았을 수도 있다. 밀라노가 포함된 롬바르디아 지방에 바자리가 별로 관심이 없었던 것도 한 이유일 수 있다. 이탈리아 미술에 필적하거나 이를 능가하는 북유럽 미술의 성취를 부각시키고 싶어했던 판 만더가, 굳이 아르침볼도에 주목할 이유 또한 없었을 것이다.)
합스부르크의 레오나르도

그의 삶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그가 25년 동안 일했던 궁정에서 고향으로 돌아온 1587년 이후에, 그와 교류했던 모리기아(Paolo Morigia), 로마초(Giovanni Paolo Lomazzo), 코마니니(Gregorio Comanini) 등이 쓴 책에서 발견되는데, 그 내용이 화가의 주장을 받아 쓴 것이라는 데 문제가 있다. 아르침볼도는 미켈란젤로처럼 혈통에 대한 집착이 강했고, 첼리니처럼 자기 자랑이 심했다.
이 글들에 따르면 그는 밀라노에서 대주교를 여럿 배출한 유서 깊은 귀족 아르침볼디(Arcimboldi)가의 후예이고, 오스트리아와 보헤미아의 궁전에서는 ‘자유롭고 독립적인 상상력’을 발휘하여 ‘사실주의적인 세계관과 환상적인 세계관을 성공적으로 종합’한 ‘지적인 알레고리’라는 전무후무한 그림을 창안했으며, 황실의 행사와 축제 기획 및 이에 쓰일 진기한 물건들의 발명에서도 발군의 기량을 발휘한 ‘합스부르크의 레오나르도’와 같은 존재였다. 또 그에 대한 황제의 총애가 깊어, 말년을 고향에서 보내기 위해서 화가는 2년이나 황제에게 간청을 해야 했고, 귀국한 후에도 황제를 위한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 |
[가을] 1573년 캔버스에 유채, 76×63.5cm, 루브르 박물관, 파리 © Photo RMN, Paris - GNC media, Se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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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1573년 캔버스에 유채, 76×63.5cm, 루브르 박물관, 파리 © Photo RMN, Paris - GNC media, Se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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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까지도 믿어졌던 그의 귀족 혈통 주장은 이제 사실과 다른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는 장인 집안 출신이고 그의 아버지 비아지오(Biagio)와 많은 친척들도 화가였다. 그의 ‘자기 홍보’ 내용에 어린 시절에 관한 부분은 빠져 있는데, 신성로마제국의 세력권 내에 있던 밀라노 공국에서 1526년에 출생하여, 아버지에게서 그림의 기초를 배우고, 다른 장인의 작업장에서 도제 생활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1554년 이전에는 독립을 하여 밀라노와 인근의 몬차(Monza), 코모(Como)에 있는 대성당 스테인드글라스나 태피스트리 밑그림, 벽화 작업 등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것으로 추정되는 이곳의 평범한 종교화들이 그를 황제의 부름을 받을 정도의 명성을 쌓게 했는지는 의문이며, 이 시기 작품 중 ‘조합 두상’의 맹아를 보여 주는 작품 역시 발견된 바 없다.
사물이 모여 구성된 사람의 형상

화가는 36세 되던 1562년에 합스부르크가의 막시밀리안 2세(Maximilian Ⅱ)의 부름을 받고 비엔나로 갔다. 2년 뒤인 1564년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는 그를 위해 14년 동안, 그의 아들인 루돌프 2세(Rudolf Ⅱ)가 재위한 기간의 11년 동안 아르침볼도는 궁정화가로 일했다. 이곳에서 그가 처음 한 일은 선대 왕족의 초상화들을 모사하는 일반적인 궁정화가의 업무였다. 그러다가 1563년에, 각 계절의 식물들을 사람의 머리 모양으로 모아 구성한 그 특유의 ‘조합 두상’이 처음 등장했다. | |
[불] 1566년 패널에 유채, 66.5×50.8cm, 미술사 박물관, 비엔나 |
[물] 1566년 패널에 유채, 66.5×50.5cm, 미술사 박물관, 비엔나 |
이 계절 연작에 이어 공기, 불, 흙, 물을 관련된 동물과 광물을 조합해서 나타낸 4원소 연작과 [사서 The Librarian], [정원사 The Vegetable Gardener] 등 특정 직업의 사람들을 그 일에 관련된 물건으로 구성하는 그림 등이 같은 방식으로 그려졌다. 이 작품들은 비슷하게 반복 제작되어, 지금까지 남아있는 그의 작품 대부분은 이런 형식이다. 이런 특이한 그림의 선례나 원천이 무엇인지, 이를 고안한 것이 누구인지, 그것이 궁정에서 왜 그려졌고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와 같은 의문에 대해 정답을 제공할 만한 확실한 근거는 없다. 지금까지 무수한 가설들이 있어왔고, 여전히 새로운 해석이 추가되고 있는 중이다.
이질적인 개별 이미지를 조합하여 새로운 이미지를 만든다는 아이디어 자체는 고대부터 있어온 것이다.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는 나무로 변한 님프 다프네 등, 이질적인 부분들의 결합이라는 상상에 영감을 제공할 많은 주인공들이 등장한다. 고대 신화의 켄타우로스 나 키메라 등도 이질적인 부분들간의 조합으로 만들어진 새로운 생물체들이며, 고대에 만들어진 작은 보석에 이렇게 조합된 이미지가 등장한 경우도 있고, 접시에 남자 성기로 사티로스의 두상을 구성한 예도 발견된 것이 있다. 화가의 고향인 밀라노에서 오래 활동했던 레오나르도는 그의 [회화론]에서 상상의 동물을 그리기 위해서는 여러 동물의 부분을 조합하는 방법을 쓰라고 권하기도 했다. 이 모든 것들이 배경으로 간접적인 영향을 주었을 수는 있으나, 아르침볼도는 이전까지 있어왔던 이런 예외적이고 주변적인 상상과 그 산물들을 회화의 중심주제로 삼아, 여기에 일관되고 지적인 의미의 체계를 담았다는 점에서 현격한 비약을 보여주었다.
백과사전적인 수집의 기록, 황제에게 바치는 시각적 송덕문

르네상스를 전후한 시기에 그림의 도상이나 형식을 만든 것은 화가 혼자만이 아닐 때가 많았고, 주문자와 (지식인인) 제3자의 영향이 더 큰 경우도 있었다. 아르침볼도의 경우, 밀라노에서 활동할 때부터 인문주의적 지식인들과 교류가 있었으나, 이와 같은 그림을 그린 것은 궁정에 들어간 이후가 거의 확실하므로, 이에는 궁정의 후원자인 막시밀리안 2세가 (지시까지는 하지 않았을지라도)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16세기 중반부터 막시밀리안의 아버지인 페르디난드 1세(Ferninand Ⅰ)는 왕실 안에 ‘지상 모든 존재의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백과사전’이라고 할 수 있는 수집을 시작했고, 이는 ‘지혜의 저장고(Archives of Wisdom)’라고 불렸다. 이 수집품은 그의 아들 막시밀리안 2세와 손자 루돌프 2세에 의해 더 확충되었고, 17세기에는 중간계층과 교회, 수도원에까지 퍼지는 전유럽적 유행이 되었다. 후에 ‘예술의 방’이라는 뜻의 쿤스트카머(Kunstkammer) 혹은 ‘놀라운 방’이라는 뜻의 분더카머(Wunderkammer)라는 이름을 얻게 될 이 수집 공간 안에는, 자연이 만든 것(naturalia)과 사람이 만든 것(artificialia)의 표본들이 수집, 분류, 전시되었다. 이는 자연과학과 예술에 대한 군주의 관심과 교양을 과시할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소우주로서, 대우주인 세계 자체를 통제할 수 있는 군주의 주권을 상징하는 기능을 했다. 이런 맥락에서 아르침볼도의 작품은 ‘2차원적 쿤스트카머’ 즉 황제의 수집 행위의 회화적 기록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 |
[사서] 1562년경 캔버스에 유채, 97×71cm, 스코클로스터 성, 스웨덴 |
[베르툼누스] 1590년 패널에 유채, 68×56cm, 스코클로스터 성, 스웨덴 |
아르침볼도가 이러한 소장품의 구입과 기록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지만, 정상적이고 흔한 것은 빼고 (다리가 셋 달린 닭, 나무에서 솟아난 사슴 뿔 등처럼) 기형적이고 이국적인 것을 특별히 선호했던 합스부르크 황제의 수집품과 비교하면, 아르침볼도 그림의 형상을 구성하는 것들은 너무 평범한 감이 있다. 이런 의미에서 그의 그림은 수집품을 기록했다기보다 수집과 분류, 전시의 기준이 된 논리 즉 우주의 원리를 형상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그가 그린 네 계절 봄, 여름, 가을, 겨울은 네 원소인 공기, 불, 흙, 물에 각각 대응되며 이는 인생의 네 단계인 유년, 청년, 장년, 노년 및 인간의 네 기질인 다혈질, 담즙질, 우울질, 점액질과도 조응되는 것으로, 화가는 사물들이 ‘부조화 속의 조화(discordia concors)’를 이루고 있는 그림들로 자연 질서 자체의 알레고리를 만들어 낸 것이다.
폰테오(Giovanni Battista Fonteo) 등 당시 궁정의 학자, 문인들은 그의 이런 그림을 정치뿐 아니라 우주 질서에까지 주권이 미치는 황제에 대한 송덕의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보았다. 황제는 이런 그림들을 유럽의 다른 궁정의 군주에게 선물하기도 했는데, 화가는 그림 안에 소장자 가문의 문장을 삽입하여 그 의도에 호응을 보이기도 했다. 화가가 밀라노에서 그려 루돌프 2세에게 보낸 4계절 식물의 조합 [베르툼누스 Vertumnus]는 이런 용비어천가의 절정이다.
그림과 함께 보낸 시들을 통해 밀라노의 시인들은, 그림이 나타내는 로마 신화 속 계절의 신 베르툼누스가 황제 루돌프 2세이며, 그가 대자연의 풍요와 새로운 황금시대를 한 몸에 구현하고 있고, 계절이 영원히 순환하는 것 같이 합스부르크 왕가의 혈통도 영원할 것이라고 썼다. 사물이 조합된 형상이 머리 모양을 이룬 것도 ‘세계의 머리(caput mundi)’ 로마의 영광을 되살릴 새로운 로마인 신성로마제국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했다. 황제는 이 작품을 받고 1592년에 화가에게 팔라틴 백작(Count Palatine)의 작위를 하사해 특별한 만족을 표시했다.
진지한 농담, 역설의 유희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기괴하기도 한 이미지에 권력에 대한 아첨의 의미가 담겼고, 이를 대한 당사자 역시 불쾌해하지 않았다는 것이 지금 보면 이상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유머 감각과 아량은 상류 계급 사람들이 갖춰야 할 미덕 중 하나였고, 르네상스 시대에는 ‘추한 외모 속에 담긴 아름다운 내면’과 같이, 엉뚱한 외관에 담긴 심오한 진실이 ‘진지한 농담(serious joke, serio ludere)’으로 높이 평가되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이해가 되는 면도 있다. 최대의 국제적 종교 전쟁이 될 30년 전쟁의 전야였던 당시 유럽은 정치, 종교, 철학 등 거의 모든 영역에서 기존 체제가 도전을 받던 불안정한 시대였는데, 합스부르크 궁정의 군주와 학자, 예술가들은 희한하고 신비로운 이미지들로 이런 불안정성, 불확실성을 과장되게 연출하여 이를 유희의 차원으로 만들어 즐기면서, 불안에서 벗어나려는 역설적인 면모를 보였다고도 할 수 있다. | |
당시 이탈리아의 한 시인은 아르침볼도를 ‘박식한 이집트인(dotto egiziano)’이라 하며, 그가 상형문자와 같이 신비의 지혜를 담은 상징을 창조했다는 뜻을 담아 그의 지적인 면을 강조했다. 화가 자신도 조합 두상의 형식으로 만든 자기 모습인 [자화상 (종이로 이루어진 사람) Self-portrait (The Man of Papers)]에서, 붓이나 물감이 아니라 ‘종이’로 자기 이미지를 구성함으로써, 자신의 인문주의적 면모를 부각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이런 면 자체가 전형적인 매너리즘 시대 화가의 특징이며, 그의 작품에서 조명되어야 할 또다른 측면은 그 회화적인 성격이다.
16세기 중후반에 제작된 매너리즘 미술은, 전성기 르네상스의 ‘아름다운 방법(belle maniera)’을 중심으로 한 방법 자체를 모방하고 인용하여 만들어진 ‘방법의 미술(arte di maniera)’이었다. 매너리스트들은 자연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의 예술을 모방하는 인위적인 미술이었고, 이들에게는 ‘무엇을’ 그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그리느냐가 중요한 문제였다. 화가들은 자기만의 양식을 만들기 위해 기술과 창의성을 극단적인 단계에 이르도록 발전시켜 시각적, 개념적으로 복잡하고 특이한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아르침볼도는 이런 의미에서 매너리즘적 자기 양식을 만들었을 뿐 아니라 이에서 더 나아가, 4계절과 4원소 연작과 같은 ‘조합 두상’을 통해 초상화, 정물화, 알레고리화가 혼합된 ‘정물 초상화(Still-life Portrait)’ 혹은 ‘인물 형상의 정물화(Anthromorphic Still-life)’라는 새로운 회화 장르를 창안했고, [정원사]와 같은 ‘뒤집을 수 있는 두상(Reversible Heads)’ 혹은 ‘왜곡 초상(Anamorphous Portrait)’도 시도했다.
아르침볼도의 작품은 대표적인 학자인 카우프만(Thomas DaCosta Kaufmann)의 입장에 따라 대체로 정치적 알레고리로 해석되어 왔는데, 1978년에 롤랑 바르트는 언어학적 시각을 새롭게 도입해 그의 작품 구성 방법을 은유, 환유, 알레고리와 같은 수사학의 다양한 방법에 대응시키고, 그의 작품을 ‘시각적 수사학’의 측면에서 조명했다. 이러한 해석을 통해 그의 작품이 가진 ‘역설(paradox)’의 측면이 부각되었다. 아르침볼도 작품의 ‘부분’은 자연주의적으로 묘사되었으나, 그것이 모인 ‘전체’는 환상적인 이미지이다. 그의 작품을 보는 관람자의 눈은 가까운 거리와 먼 거리 사이를 끊임없이 이동하며 다양성과 단일성, 닮음과 닮지 않음, 존재(~인 것)와 외양(~인 듯한 것) 사이를 부유하면서 이미지를 해체하고 조합한다. | |
아르침볼도는 인문주의적 궁정의 기대에 부응하면서도 자신만의 예술적 창조력을 발휘하여, 착각의 원리에 기반한 외관의 이중적인 의미에 대한 매너리스트적 유희와 농담을 펼쳐 보였다. 사실 회화라는 것 자체가 착시에 기반하고 있다. 동그랗게 칠해진 빨간 물감 덩어리를 사과로 ‘착각’을 해서 보아주는 사람이 있어야만 회화라는 예술이 성립 가능하다. 그의 회화는 이런 즐거운 혼동을 극대화해서 만든 그로테스크하면서 유머러스하고, 복잡하면서 공허한 마법의 세계이다.
생전에 그의 작품은 전 유럽의 궁정을 중심으로 인기를 얻었고, 화가가 말년을 보낸 밀라노에서 유명해지기도 했으나, 17세기 들어 급속히 잊혀지지 시작했고, 18~19세기 동안에는 미술사에서 완전히 무시되었다가, 20세기 들어 매너리즘 미술의 재평가와 더불어 연구의 대상이 되기 시작했다. 1937년에 알프레드 바(Alfred H. Barr Jr.)가 기획한 뉴욕 근대미술관(MoMA)의 전설적인 전시 “환상적인 미술, 다다, 초현실주의(Fantastic Art, Dada, Surrealism)”는 그를 다다와 초현실주의에 영감을 준 환상과 역설의 대가로 조명했다.
1987년 베네치아에서 열린 전시 “아르침볼도 효과(Effetto Arcimboldo)”를 통해서 그의 위상은 ‘모더니티의 선구자’로 높아졌다. 이후로는 그가 만들어낸 이미지가 광고, 음반 커버, 애니매이션 등의 미디어에도 자주 등장하면서, 그의 작품이 갖는 시대를 초월한 근대성과 다층적인 의미가 대중들까지 매료시켰다. 2007~8년에 파리의 뤽상부르 미술관과 비엔나의 미술사 박물관을 순회하며 열린 전시 “아르침볼도 1526~1593”는 사실상 그의 첫번째 개인전으로, 그의 생애와 작품에 대한 여러 오류를 바로잡고 최신의 연구 성과를 집약하는 계기가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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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종이로 이루어진 사람)] 1587년 종이에 연필과 잉크, 44.2×31.8, 팔라초 로소, 제노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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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김진희 / 미술평론가
- 연세대학교 신학과,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졸업. 1999년부터 전시기획과 문화예술행정 분야에서 일하면서, 관람자의 눈에 근거한 미술 비평을 시도해 왔다. 미술, 역사, 제3섹터에서의 활동에 관심이 있고 이들의 접점을 찾는 중이다.
발행일 2010.12.10
이미지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RMN), 루브르 박물관, 비엔나 미술사 박물관, 스웨덴 스코클로스터 성, 시립 알라 폰초네 박물관, 제노바 팔라초 로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