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 홍 신
The Red Shoes (1948)
감독: 마이클 포웰, 에머릭 프레스버거
배우: 안톤 월브룩, 마리어스 고링, 모이라 쉬러
때로는 누가 주인공인지 헷갈리는 영화를 만날 때가 있다. 안데르센의 <빨간 구두>를 모티브로 만든 발레영화 <분홍신>이 그렇다. 액면으로 보자면 분홍신을 신고 죽을 때까지 춤을 춰야하는 운명에 빠진 발레리나 빅키 페이지(모이라 쉬러)가 주인공처럼 보인다. 그러나 마이클 파월은 빅키의 비극적 운명을 소개하기에 앞서 그녀를 세계적인 아티스트로 거듭나게 만들고자 열의를 다 바치는 발레극단의 제작자, 레르몬토프(안톤 월브룩)의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선보이는데 영화의 많은 시간을 할애 한다.
때때로 의중을 알 수 없게 선글라스를 끼고 등장하는 레르몬토프는 발레리나 빅키 페이지와 작곡가 줄리안 크라스터의 천부적인 재능을 발굴해내고 여기에 안데르센 원작의 동화 <빨간 구두(분홍신)>을 테마로 발레극을 만든다. 비교하자면 <블랙 스완>에서 관능미를 잠재적으로만 가지고 있는 니나(나탈리 포트만)를 발굴해내는 발레 극단의 연출가 토마스(뱅상 카셀)과 닮은 꼴이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분홍신>과 <블랙스완>은 예술의 완성을 서로 다른 관점에서 접근한 영화이다.
<블랙 스완>이 예술의 기술을 뛰어넘는 관능미의 힘을 강조했다면 <분홍신>은 기량을 언제고 갈고 닦아야 하는 숙업에 좀 더 촛점을 맞춘 영화이다. <블랙 스완>의 토마스가 니나에게 자위를 하고 오라는 숙제를 내준 반면 <분홍신>의 레르몬토프는 사랑 따위에 빠진 발레리나는 필요 없다는 태도로 발레 극단의 에이스인 이리나 보론스카야를 내쳐버린다. <분홍신>의 주인공인 빅키 페이지는 사랑에 빠지는 순간 발레극단에서 퇴출당한다는 것을 잘 안다. 그녀는 두 가지 운명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오로지 예술만을 생각하며 장인정신으로 기량을 완성해가는 고독한 삶을 선택하거나, 혹은 최고의 발레리나가 되는 야망을 버리고 평범한 로맨스의 삶을 살아가거나. 전자는 레르몬토프의 삶이고 후자는 천재 작곡가이자 지휘자인 줄리안 크라스터의 삶이다. 당신 앞에 이 두가지의 삶이 놓여진다면 어떤 것을 선택할까?
확실한 건 낭만주의적인 천재성의 신화를 예술가에게 덧씌운 <블랙 스완>보다는 죽을 때까지 기량을 연마해야하는 운명을 예술가에게 부여한 <분홍신>의 묘사가 더 설득력 있다는 것이다. 예술은 무협소설과는 달라서 신비의 비서 하나로 모든 장애물을 건너 뛸 수 없다. 바이엘과 체르니를 거치지 않은 피아니스트가 어디 있겠는가! 재밌는 건, 정작 예술의 주술적인 마력을 강조하는 건 낭만주의적인 <블랙 스완>이 아니라 <분홍신>이라는 점이다. 그러니까 <분홍신>이 그리는 예술가는 예술에 운명적으로 매료당하고, 그리하여 완벽한 예술을 성취하기 위해 끊임없이 기술을 연마해야하는 존재이다. <블랙스완>이 조금 먼발치에서 예술에 대한 판타지로 만들어진 호러영화라면 <분홍신>은 무대 바로 위에서 예술의 현실적인 운명의 무게를 다룬 호러영화에 해당하지 않을까, 둘 다 무섭기는 마찬가지고.
지금의 수준으로보면 매우 원시적인 그래픽 기술로 합성한 공연장면이지만 공연의 완성도는 기술적 완성도를 초월하여 큰 감동을 준다. 주인공인 모이라 쉬러는 실제 발레리나였고 <분홍신>이 첫 영화데뷔작이다. <분홍신> 의 공연 시퀀스에는 무려 53명의 발레리나들이 동원되었다. 분홍신의 마력이 댄서를 사로잡아버리고 댄서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춤을 추기 시작한다. 행복한 일상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춤추기를 포기해야만 한다. 댄서가 드디어 분홍신을 벗어던지고 춤의 악마적인 마력에서 벗어나는 순간, 그럼에도 분홍신은 사라지지 않고 또다른 댄서를 향해 다가온다. 아무런 대사 없이 음악과 몸짓으로만 발레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공연 장면은 이 영화의 백미이자 영화의 또다른 축소판이며, 예술에 대한 거대한 메타포이다.
<분홍신>의 모티프가 된 안데르센 원작의 동화는 지금 다시 읽어보면 굉장히 끔찍한 이야기다. 빨간 구두의 저주에 걸린 소녀가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한 빨간 구두의 춤을 추게 되고 결국 사형을 집행하는 망나니의 도움으로 두 발을 자른 뒤에야 춤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더욱 무서운 건, 그녀가 두 발을 자른 뒤에도 빨간 구두는 그녀 앞에서 춤을 추었다는 사실이다! 도끼질을 당해도 빨간 구두가 춤을 추는 것을 멈추지 않았듯이, <분홍신>의 쇼는 계속 된다. <선셋대로>의 광기어린 결말을 떠올리게 하는 <분홍신>의 마지막 씬은 영화의 콘티뉴이티를 벗어나면서까지 빅키 페이지가 분홍신을 신게 만든다. 원래의 공연장면에서 빅키 페이지는 하얀 발레화를 신고 있다가 분홍신을 신게 되지만 어쩐 일인지 마지막 공연장면에서 빅키 페이지는 분홍신을 이미 신은 상태에서 무대를 향해 출발한다. 이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은 빅키 페이지도, 줄리안 크라스터나 마이클 파월도 아닌 바로 분홍신인 것이다.
제작사의 재정난과 작품이 너무 예술성에 치우쳐져 있다는 편견으로 인해 <분홍신>은 영국에서 개봉되는 운명에 놓이게 된다. 미국에서는 단 한곳의 극장에서만 실험적으로 상영되는데, 폐기처분의 위기에 있는 이 영화는 무려 110주 동안이나 연속해서 상영되는 기록을 세우게 된다. <분홍신>은 결코 멈추는 일이 없이 춤을 추기 시작했고, 결국 유니버설사가 미국배급권을 사들여 <분홍신>은 절찬리에 상영되기에 이른다. 더욱 드라마틱한 사건은 <분홍신>에 대한 평론가들의 비평이다. 대중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을 때는 <분홍신>의 공연장면을 극찬하던 평론가들이, 대중들이 <분홍신>에 열광하자 애써 공연장면의 예술적 성취를 무시하는 태도를 보여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홍신>은 댄스영화의 클래식으로 영화의 전당에 길이 기억되고 있다. <분홍신>은 영화 안에서나 영화 바깥에서나 위대한 예술이 주는 마력같은 힘을 잘 보여준다. 댄서는 사라져도, 춤은 계속된다.
상영시간: 133분
첫댓글 몇 주 전인가 EBS에서 하더군요..좋은 영화 좋은 소개 감사합니다!
예전에 이탈리아 영화 빨간구두가 생각나네요. 굉장히 강열한 인상을 받았던 영화인데,,,꼭 한번 봐야겠네여
어릴때 이 영화 본 생각납니다. 아름답고 슬픈 영화...
장미빗 신발...감사합니다..
블랙스완은 봤었는데 이것도 찾아봐야 겠군요 감사합니다
나쁜남자 보리스 그 매력만으로도 완전 사랑하는 영화입니다. 선글라스낀 중년의 남자가 아이돌보다 더 마력이 철철 넘쳤더랬습니다 ㅋㅋ
감사 합니다^^^^
한때 동화를 원작으로 한 영화를 모아본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제목만 보고 제일먼저 구입한 dvd 인데....아무도 찾지않아 구석에 숨겨져있던 dvd 였죠..
영화를 보면서 이렇게 아름다운 영화가 왜 한국에선 관심을 끌지 못할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지요...
몇년전부터 뮤지컬영화가 다시 부상하면서 이 영화가 조금씩 알려지게되어 감사하네요..
무대에서의 공연작품으로의 분홍신..... 정말 환상적이지요..
제목만 눈에 익었던 작품인데 소개글을 읽고나니 꼭 보고싶어지네요
감사합니다
기억이 가물가물 꼭 다시 볼래요.
색다른 감동입니다~~~
소개글이 찾아서 보고 싶은 마음을 주네요^^*
재미있을 듯 하네요 꼭 봐야겠어요.
이거 우리나라에선 공포영화로 나왔었는데 카페에 영상자료 있나요?
제목 만으로도....흥미있는....
매우 좋아요
흥미있네요~ 한번 감상해 봐야 겠네요~
고전영화 재미와 감동이 있죠
제목만 보고는 한국영화라고 생각했는데.. 고전이군요!
고전영화네요 . 꼭 한번 보고 싶습니다.
아름답고 섬뜩한 동화였죠
보고싶어요~!!!요즘은 고전영화가 끌리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