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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상수훈
(마태복음 5:3~10)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성경은 내게 딱 맞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신비스런 구절만
갖고 와서 기도문으로 삼고, 액자로 걸어놓고, 그렇게 되고
싶다고 백날을 기도해도 소용이 없다.
내가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어야 하는 것이다.
자격을 갖출 덕목은 그 구절 앞쪽이나 뒤쪽에 실천사항들이
나열되어 있다.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생활신천.
하지만 내가 죽으면 죽으리라 하고 진심으로 기도드리는 것은
어떨지 모르겠다. 그런 기도나 바램은 하나님아버지 아니더라도
하늘이 들어주시는 것을 역사에서도 볼 수 있다.
숙종시절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가 숙종 대신 죽겠다고 했을 때
정말 숙종이 살고 명성왕후가 죽은 예가 있다.
산상수훈에서는 아랫부분에 실천사항들이 기록되어 있다.
산상수훈에 말씀하신 의롭고 좋은 성품들은 타고나는 것도 있고
살면서라도 마땅한 자에게 하늘이 주시는 성품들이다.
영의세계법으로 알려주신 '의로운 자'에게 주시는 복의값이다.
타고나는 것과 가르침으로 만들어진 것은 깊이 들어가면 다르다.
'타고나는 것'은 내가 그런 사람인줄도 모르고 행한다.
'가르침으로 만들어진 것'은 이렇게 하면 그렇게 된다고
알고 행하는 것이다.
그럼 누군 의로운 값을 타고 나고, 누군 벌 받을 값을 타고나고
불공평한 것 아니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내가 태어나는 것은
윗 조상부터 선악값이 계산돼서 '나' 라는 존재로 태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공평한 것이다. 그가 나다.
다윗이 밧세바로 인해 죄를 저질렀을 때 밧세바의 첫 아들이
죽는 벌도 받았지만, 나라가 둘로 쪼개지는 벌은 솔로몬도
아니고 르호보암 때 내려졌다. 불공평하네?
르호보암은 무슨죄로? 다윗이 솔로몬이고 르호보암이다.
인간적으로 볼땐 다윗은 다윗이고, 솔로몬은 솔로몬이고,
르호보암은 르호보암이지만, 신께서 보시는 관점은 다르다.
갸가 갸다. 유전자가 같다.
인간들은 좋은 성품과 나쁜 성품 미지근한 성품 등 다양한 성품이
있는데 이런 것은 타고 나기도 하는 것 같고, 자라면서 형성되기도
하는 것 같다.
좋은 가르침과 나쁜 가르침도 있는데 잘 분별하기 힘들 수도 있다.
좋은 가르침 같은데 결과가 나쁠 수가 있고,
나쁜 가르침 같은데 결과가 좋을 수도 있고
인간세상인데도 인간들의 생각으로 이해가 안될 때가 많다.
내 몸이 내 것이 아닌 것 같고, 내 마음이 내 것이 아닌 것 같고,
내가 계획을 세워도 그 뜻을 이루는 곳은 하늘인 것 같다.
나도 전에는 어떻게 하면 내가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될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복음성가 "심령이 가난한 자는" 이라는 것을 주야장창
불러대곤 했다. 그렇게라도 하면 될까 싶어서.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데 우리는 남편쪽이나
내쪽이나 온유하지 않은가보다. 양쪽다 물려받은 땅이 없다.
그래서 고민도 했다. 나는 왜 온유하지가 않을까?
내가 아는 사람들은 그래도 땅들이 있어가지고 우리더러
그 땅에서 집짓고 같이 살자고 하는데 그 땅을 내가 사는 것
아닌 이상 빌붙어 살고 싶지는 않다.
'산상수훈' '팔복' 이 부분은 예수의 가르침이라고 해서
교회에서 설교로 써 먹는 아주 유명한 문구이다.
예수는 창조주 신 본체가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셨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예수의 말씀에는 4차원 5차원의 세계가 있다.
3년을 같이 살던 제자들도 예수가 말하는 것을 못 알아듣는
것이 허다했다. 지들끼리 물어본다. 무슨 말씀이냐고.
☞ 되어진다
성경의 좋은 문구를 가져다가 주야장창 주문식 기도로
써먹어도 아무 소용 없으며, 천만번 쓰고 외우고 난리를
쳐도 아무 소용없다. 산으로 들어가 죽을 때까지 기도를
드리고 또 드려도 아무 소용이 없다.
내가 그렇게 되질 않는다. 왜냐하면 내가 태어날 때 갖고
태어난 성품이 따로 있다. 좋은 가르침으로 좋은 성품을
드러낼 수는 있지만 그런 것도 진짜가 아니다.
내가 왕이 되기 전에 '왕이 될 상'이라고 해야 진짜지
왕이 되고 나서 왕이 될 상이라고 하는 것은
가짜다ㅡ '관상' 이라는 영화에서 세조가 한 말.
하지만 신께서 그런 기도를 시키시고 그런 복을
주실 때는 기도가 되어진다. 삶이 되어진다.
내가 스스로 심령이 가난할 수가 없다.
내가 무엇을 위해 애통해야 하는지도 잘 모른다.
내가 스스로 온유할 수도 없다.
내가 스스로 의에 주리고 목마를 수도 없으며
그런 것이 무슨 뜻인지도 모른다.
내가 스스로 긍휼히 여길 수가 없다.
하지만 "불쌍하네 쯧쯧쯧... " 하고 불쌍히 여기는
척 하는 사람도 있고, 불쌍히만 여기는 사람도 있고,
아예 불쌍히 여기지도 않는 사람이 있고,
무엇을 도와주면 나중에 돌려 받을 수 있는지
계산해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갖고 태어난 사람은
불쌍한 사람을 볼때 무조건 긍휼히 여기고
내 것을 줄 수가 있는 사람이다.
내가 스스로 마음이 청결할 수가 없다.
내가 스스로 화평하게 할 수가 없다.
내가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이런 성품은 태어날 때 갖고 태어나는 것이다.
어디서 글을 읽었거나, 누가 가르쳐줘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되니까, 그렇게 하면
이렇게 된다고 했으니까를 알고 시작하는 것은 ,
그런 것도 좋은 것이고 바람직하지만 근본은 아니다.
뱃속 깊은데로 가면 완전 자기 것이 아니다.
본전을 찾고 싶어할 수도 있다.
누군가에게 들은 적도 없고 가르침을 받은 적도 없는데
그냥 그렇게 되어지는 사람이 있다.
누군가를 도울 때도 내것을 다 줘도 아까운 마음이 없이
무언가 나중에 갚으라는 바람도 없이 순순히 되는 사람이 있다.
마음에 사심이 없다. 나중에 세월이 흘러 그 은혜가 갚아지지만
그것 조차도 바램이 없는 사람이 있다.
그런 자가 심령이 가난한 자이다.
옛날 강릉에 어느 다 망한 양반 가문의 노모와 김선비가 있었다.
이들은 끼니때우기도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
어느날 노모가 집에서 노비로 살고 있다가 망하면서 뿔뿔히 흩어진 자들의
노비 문서가 남아있길래 그 노비 문서를 그 노비들이 보는 앞에서 태우든지
해서 그들을 면천시켜주라고 했다.
아들이 노비문서를 갖고 노비들이 모여살고 있는 전라도 어느 마을에
당도해서 그 문서를 불에 태우며 면천을 시켜줬다. 그 노비들이 너무
감사해서 돈을 거둬 2천냥을 마련해주었다.
이것을 갖고 집으로 가던 김선비가 금강쯤 왔는데...
1500냥이 필요한데 구할 수도 없고, 못 구하면 그 집 아들이 형장 이슬로
사라지게 생겼는, 그래서 아버지가 강물에 빠져 죽는다는 것을 그의 아내와
며느리가 말리면서 서로 죽겠다고 옥신각신 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들의 사정을 듣고난 이 선비가 갖고 있는 2천냥을 다 주고 떠났다.
누구시냐는 물음에 강원도에 산다는 것만 말해주고 이름은 안 알려주고
그냥 자기 갈 길을 갔다.
1500냥이 필요하다는데 1500냥만 주고 500냥은 자기네가 쓰지
2000냥을 다줬다. 자기들은 무얼 먹고 살려고. 끼니거리도 없는데.
집에 와서 설명을 하니 그 어머니도 잘했다고 하고.
그 뒤로도 가난하게 살다가 어느날 노모가 돌아가셨다.
그래서 아들은 좋은 묘자리라도 찾아서 장사해드리고 싶어서
이곳 저곳을 찾던 중 어느 좋은 곳을 고르게 됐다.
보아하니 주인이 있는 산 같았다.
그래서 그 마을에서 제일 큰 기와집을 찾아 산에 대해 물어보면서
하루밤 신세를 지게 됐다.
그 집에서 후한 대접을 받는 중 어느 여인이 울면서 말하길
"이 분이 몇년 전에 우리집을 살려주신 분"이라고 했다.
그때 1500냥을 받고 옥중생활도 면하고 잘살게 되기도 했던
그 남자와 아내가 부모는 살던 곳에 사시게 하고 둘은 그 선비를
찾아 일부러 강원도로 와서 살았다.
그래서 오는 손님들마다 후하게 대접을 하면서 아내는 문 밖에서
이 손님이 그 선비인가 살짝 보아왔던 것이다.
그렇게 그들은 만났고 그 남자와 아내는 집이며 땅이며 모든 재산을
그 선비에게 넘겨주고 자기들은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갔다.
이 선비는 그것을 감사로 받지 않고 돌려주려고 사람을 그 곳으로
보냈지만 그들은 선비가 또 찾아올까봐 종적을 감추었다.
그래서 그 선비는 그 재물을 그냥 받을 수밖에 없었다.
무언가 나중에라도 받으려고 하지 않고 그냥 무작정 그들을 살리기
위해 선행을 하는 자가 '심령이 가난한자'이며 천국이 그의 것이다.
이런 긍휼을 베푸는 선비가 긍휼이 여기는 자이며 긍휼히 여김을
받는다. 타고난 성품이다.
나도 과거에 생활이 힘들어서 남에게 돈을 빌리기도 했지만
오지랍 떠느라고 누구를 300만원을 남에게 빌려서 빌려준적이 있다.
그것도 좋은 성품이라고 볼 수 있지만, 10여년 지난 가운데
아직도 그 돈을 돌려받지는 못하고, 그 300은 내가 갚아버리고.
나는 그래도 내가 힘들때마다 그 돈 300 안주나?
한달에 10만원씩이라도 달라고 할까?
내가 괜히 오지랍 떨어가지고 그러네... 라는 생각을 가끔은 한다.
나는 천국이 내 것이 아닌 것이다.
내 심령은 가난하지가 않다.
☞ 실천과 결과물
"네가 청결하고 정직하면(실천사항)…
처음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해진다(결과물)"
(마태복음 5:11)
나(예수: 선한 성품)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나' 라는 문자를 예수 사람으로 읽어버리면 답이 없다.
예수 태어나기 이전에도 이런 법은 통했었는데 예수라는
사람을 알고부터라고 읽어버리면 답이 없다.
특히 예수를 믿는다는 것 하나로 기독교인들이 욕먹고
박해받는다고 알고 있고 믿고 있고, 그래서 타인들이
기독교인들을 향해 손가락질하고 악한 말을 할 때
"아싸~ 나는 이제 복이 있을 것이니까 기뻐하고 즐거워
해야겠다 하늘에서 상이 클 것이다" 라는 아주 잘못된
착각은 하지 말아야 한다.
행함과 믿음이 일치하지 않는 기독교인들은 욕먹어도 싸다.
이런 것은 사람이라면 누구나에게 해당되지만 기독교인들은
더 욕을 먹는다.
다른이들보다 더 낫게 살아야 하는 법칙 때문에.
예수가 하나님이라고 믿는다면...
창세전이나 후부터 시작된 예수의 성품,
하나님의 성품, 선한 성품으로 읽어야 한다.
'선한 성품'을 발휘하고 사는데도, 누군가 그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거슬러 악한 말을 할 때에는 오히려 선한성품을 발휘하고
사는 사람에게 복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무슨 결과물들이 바로바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나중에나 알 수 있게 된다.
어느 강사의 간증을 들었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죽을 쒀가며 가난한 자를 거두었었다.
그러다 돌아가시면서 유언을 남기길 자녀들이 거주하는 곳
몇 키로 반경에 굶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것이다.
이 강사도 죽을 쒀서 먹여가면서 살았다.
그런데 누군가 손가락질을 하면서 그까짓 죽을 먹이냐
어쩌냐 하면서 흉을 보고 놀리고 괴롭혔다고 했다.
그래도 그것을 피해가면서 끝까지 하던 어느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했다.
"오늘 내가 너의 예배를 받았다!"
이날은 그 흉보고 놀리고 괴롭히던 그 사람도
"당신은 진짜다!" 라면서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렸다고 했다.
선한일을 한다고 사람들이 무조건 다 칭찬하고
다 존경하고 다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무언가 속셈이 있을거야!, 오버하는거 아냐?
잘난척하는거 아냐? 그까짓거 하면서 유세떠네!
해가면서 손가락질하고 방해하고 흘겨볼 수도 있다.
그래도 진심이면 끝까지 할 것이고, 가짜면
기분나빠서라도 중간에 그만둘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교회에서 예배시간에 똑바로 서서 찬송을 부르고
손을 들고 눈물을 흘리며 감정에 복받쳐서 찬양을 하고
똑바로 앉아서 기도를 하고, 딴짓하지 않고 똑바로 앉아서
설교를 듣고 예배시간 처음부터 축도까지 다 온전하게
드리면 나의 예배를 주께서 받으시는 것인줄 알았다.
주께서 찾으시는 그 한 사람
그 예배자가 되나? 했다.
☞ 산상수훈 숙제
이 부분부터가 인생들이 신경써야 할 실천사항들이다.
선하고 의로운 성품을 타고나는 것이야 하늘의 뜻이지만
듣고 배운 것을 실천하는 것도 아주 바람직한 일이다.
그들로 인해 좋은 사회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웃기는 것은 이런 설교를 백날 들어도 빛이 어떤 삶인지,
소금이 어떤 삶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지 않으면 모르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세상의 빛이던지 말던지 소금이던지
말던지 아무 상관이 없다.
그것은 그냥 문자일 뿐이다. 그냥 자기들은 믿음으로
세상의 빛인줄 알고 있고 믿음으로 소금인줄 알고 있다.
종교안에서의 성품과 밖으로 나가서의 성품이 달라도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고 살고들 있다.
(마태복음 5: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세상의 소금이나 세상의 빛이나 '너희의 착한 행실'이라고 한다.
요한계시록에도 세마포 옷을 입혀주는데 그 세마포는
'옳은 행실'이라고 해도 종교믿음과 종교행함으로 알고 있다.
(계시록 19:8)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아멘.
그런데 성경책은 신비스러운 책이지 도덕책이 아니라고 한다.
창조주신께서는 계속 '정직' '의인' '바름' '착한 행실'을
원하시는데.
(마태복음 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이 율법이라는 것을 성경책으로 읽어버려도 안 된다.
지금은 번역을 한다고 이리 바꾸고 저리 바꾸고,
전의 성경책엔 있었던 문구가 이번 성경책엔 없기도 하고
개역성경, 개역한글, 공동번역, 새번역, NIV, KJV,
현대인의 성경 해가면서 만들어내는 성경책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시절에 지금처럼 성경책이라고 해서
돌아다닌 것이 아니었다.
'율법'은 '각 나라법'으로 창세기 시절에는 없었다.
그래서 자기의 소견대로 행했다고 한다.
왕이 탄생되기 전에는 부족장들이 법이었을 것이고,
왕이 탄생하고는 왕이 법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가정법, 학교법, 직장법, 사회법, 종교법,
나라법, 국제법들이 있다. 문서로 기록되어 있는 것도
있고 구전으로 내려오는 것도 있고 관습으로 내려오는
것도 있다. 내게 주어진 법대로 살아야 한다. 율법.
(사무엘상 8:11~20)
"이르되 너희를 다스릴 왕의 제도는 이러하니라
그가 너희 아들들을 데려다가 그의 병거와 말을
어거하게 하리니 그들이 그 병거 앞에서 달릴 것이며
그가 또 너희의 아들들을 천부장과 오십부장을
삼을 것이며 자기 밭을 갈게 하고 자기 추수를 하게
할 것이며 자기 무기와 병거의 장비도 만들게 할 것이며
그가 또 너희의 딸들을 데려다가 향료 만드는 자와
요리하는 자와 떡 굽는 자로 삼을 것이며
그가 또 너희의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에서
제일 좋은 것을 가져다가 자기의 신하들에게 줄 것이며
그가 또 너희의 곡식과 포도원 소산의 십일조(VAT)를 거두어
자기의 관리와 신하에게 줄 것(분깃/녹봉)이며
그가 또 너희의 노비와 가장 아름다운 소년과 나귀들을
끌어다가 자기 일을 시킬 것이며, 너희의 양 떼의
십분의 일을 거두어 가리니 너희가 그의 종이 될 것이라
그 날에 너희는 너희가 택한 왕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되
그 날에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응답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니
이 부분은 창조주신이 삐져서 이젠 말도 안할 것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이제 왕에게 권한을 넘긴다는 것이다.
이런 왕권도 주께서 만드신 법이다.
아브라함시대 때에 주변에는 벌써 왕들이 있었다.
그만큼 아브라함족속들이 나라가 될 만큼 크게
성장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부족국가이다 아직은.
백성이 사무엘의 말 듣기를 거절하여 이르되 아니로소이다
우리도 우리 왕이 있어야 하리니
우리도 다른 나라들 같이 되어 우리의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니이다
하는지라
이스라엘은 레위기 시절에 율법이 생겼다.
하지만 이럴 때도 영의세계에서는 창조주신의 명령대로
'두루마리 법'이 돌아다니면서 복과 징계를 내리고 있었다.
예수는 창조주 신으로서 율법 자체이다.
영의세계에서 두루마리로 돌아다니며 계산하시도록
하신 분이 예수시다.
(마태복음 5: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다행이다. 이 계명 중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그같이 가르치는 자는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라
천국에서 작다고 한다. 지옥에 안가는 것이 어디냐.
이 계명이라는 것이 성경책이라고 한다면 기독교는 큰일났다.
글귀들을 이리 바꾸고 출판하고 저리 바꾸고 빼고 넣고 하면서
출판하고 했으니, 개역성경, 개역한글, 공동번역, 새번역,
현대인의 성경, NIV, KJV, 해가면서.
성경책이 지구상에 없다고 해서 창조주신께서 큰일 나시고,
이 인간들을 처리 못하시는 것이 아니다.
(마태복음 5: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태복음 5: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이 부분을 어찌할꼬. 예수가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기독교에서 갖고 와가지고 기독교인들에게 한 것인양
떠들어댔는데 누가 서기관이고 누가 바리새인이란 말인가.
그 시대 서기관은 고대 히브리 사회에서 기록하는 일에 능숙한
사람을 가리키기도 하며(삿5:14; 렘52:25) 왕의 명령을
백성에게 전달하는 사람을 뜻하기도 한다(삼하 8:17; 20:25).
그러나 구약시대의 후반부 특히 포로 생활 이후와 신약성경에서
서기관은 유대인들의 율법에 능한 사람 혹은 율법 교사나 해석자를
뜻하였다.
그래서 에스라는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서기관이었다(스 7:6; 대상 27:32).
유대인 저자들은 서기관들이 이스라엘 민족의 훈육 선생이었다고 말한다.
그들은 마을마다 다니며 토론회를 열고 질의응답 시간을 갖는 것을
통해 자기들의 직무를 수행하였다.(지금의 무료 법률상담 같은 것)
바리새인은 율법에 뛰어난 자들이다.
기독교인들은 알아서들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의가 뛰어나보자.
그런데 기독교인의 상대 대상인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도대체
누굴 말하는 것이지? 이스라엘의 서기관과 바리새인?
기독교식으로 율법(성경)에 뛰어났다고 비유할 대상이
신학자들, 목사들인데.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이것을 기독교식으로 풀면 기독교인들의 의가 신학자들이나
목사들보다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가 되는데.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의가 뛰어나게 해달라는
중언부언 기도는 백날해도 소용없다. 실천이 중요한 것이다.
(마태복음 5:21)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율법귀절을 이리빼고 저리빼도 지옥간다는 말씀은 없는데..
형제에게 '라가'라 '미련한 놈' 이라고 욕하는 자들은 지옥불에
들어간댄다.
성경을 잘 읽어야 한다. 율법글귀 보다 욕하는 죄가 더 크댄다.
(마태복음 5:23)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아무리 신께 예물을 드리고 제사를 드리고 예배를 드리고
고사를 드리고 절을 천만번을 해도 내 형제(가족, 친척, 친구,
이웃, 사회, 나라)에게 원망들을 일을 만들어 놓고 사는 것은
신께서도 안 도와 주신다. 어떤 법에 걸릴지 모른다.
살면서 적을 만들면 안 된다.
하지만 누구든 거의 깨닫거나 철들기 전까지는
내가 누구에게 원망들으면서 사는지도 잘 모른다.
그래서 무조건 예배만 잘 드리면 천국가는지 안다.
무조건 예수만 잘 믿으면 천국가는지 안다.
(마태복음 5:27)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인간은 간음이라고 하면 육체적으로의 직접적인 관계를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영의세계법은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은 놈이나 같다고 한다.
그래서 인간들끼리는 서로 손가락질 하면서 저놈은 나쁜놈이야
라는 것 자체를 하지 말아야 한다. 직접 간음한 놈이나,
남은 모르게 젊잔은 척하면서 안그런 척하면서 음욕을 품은
놈이나 혼난다고 하는데 혼남의 크기가 같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5:29)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이 말씀은 이렇게 혼난다는 것이다.
눈이 혼날 짓을 하면 눈이 혼날 것이고(혼남의 크기는 작게~
크게까지 다양하다), 손이 잘 못하면 손이 혼날 것이다
(혼남의 크기는 작게~크게까지 다양하다).
그래도 온 몸이 혼나는 것 보다 눈 하나 혼나는 것이 낫고,
온 몸이 혼나는 것 보다 손 하나 혼나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5:31)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려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이혼도 인생들이 함부로 말할 것이 못되는 것이,
이혼한 자들을 정죄하면 그 이혼이 내게로 올 수도 있다.
내가 경험할 뻔 했다.
어떤 사람은 이혼하게도 하신다.
어떤 사람은 이혼을 못하게 하신다(내가 경험했다).
이혼 당한 사람이 잘될 수도 있다.
이혼 당한 사람이 잘못될 수도 있다.
이혼 사유의 결과물이다.
(마태복음 5:33)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네 머리로도 하지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쓸데없는 말들, 허황된 말들, 괜한 큰소리, 헛소리,
쓸데없는 맹세, 거짓말, 지키지 못할 말들을 하지 말고
정직한 말, 지킬 수 있는 말들만 하라.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원수를 주께 맡기자. 내가 갚겠다고 달려들었다가 내가 당해야
하는 처지면 내가 당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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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41)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신께서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답다(합당하다)고 하신다.
내 옆에 존재하는 자들은 나에게 복을 줄 수도 있고
화를 줄 수도 있는 존재들이다. 사람이 재산이라는 생각으로
사람들에게 잘하라.
"생각해보면 내게는 길 만이 길이 아니고 내가 만난 모든 사람들이
길이었다" 라는 좋은 글귀도 있다.
(마태복음 5: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예수의 제자들과 그 앞에 모인 백성들에게 하신 말씀인데
기독교에서 갖고 와서 굳이 기독교인도 해당된다고 떠들어서
기독교인도 저렇게 살아야 욕을 들 먹는다.
친한 사람끼리만 사랑하면 무슨 소용이 있냐
친한 사람끼리만 문안하면 무슨 소용이 있냐
친한 사람끼리만 나눠먹으면 무슨 소용이 있냐
세리처럼 하면 무슨 소용이 있냐
이방인처럼 하면 무슨 소용이 있냐
그들보다 못하면 예수 믿는 것들이 더 나쁘다 소리 듣는다.
그들하고 비슷하게 하면 예수 믿으나 안믿으나 똑같다
소리 듣는다. 그들보다 훨씬 더 칭찬받게 잘해야 한다.
게다가 나에게 다시 갚을 수 없는 사람에게 해야 상이 된다.
내 몸을 불살라 내어 줬어도 사랑(사심없는)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마태복음 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이런 실천 사항들을 잘 행하고 사는 인생들을 보시고 영의세계법으로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다" 라고 말씀해 주시는 것이다.
그냥 말씀만 하시나? 포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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