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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0422 (월)
- 사릉(思陵)과 석화촌(石花村) ②
- 문화, 여행 (39)
드디어 쌀쌀함이 멀어지는 날씨입니다.
비 소식이 연이어 들립니다.
봄에는 비가 올 때마다 기온이 올라간다고 하던데 과연 그러할지....
“사릉(思陵)” 주변의 이야기 지난번에 이어서 계속입니다.
* 지난번에 소개해 드렸던 “석화촌(石花村)”은 올해는 4월20일부터 개장했는데,
꽃의 상태에 따라 다르지만 통상 6월초까지 개장합니다.
- 입장료 : 대인 4,000원
- 시 간 : 10:00 ~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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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사릉(思陵)
* 우리나라 역사상에서 “정순왕후”라 불리는 사람은 모두 셋입니다
- 즉, 고려 원종(元宗)의 왕비(王妃)인 정순왕후 김씨(靜順王后 金氏 : ? ~ 1236년),
조선 단종(端宗)의 정비(正妃)인 정순왕후 송씨(定順王后 宋氏 : 1440년 ~ 1521년),
조선 영조(英祖)의 계비(繼妃)인 정순왕후 김씨(貞純王后 金氏 : 1745년 ~ 1805년)
- 그런데 오늘 말씀드리려는 <사릉(思陵)>은 조선 제6대 임금 단종(端宗)의 정비(正妃)인
“정순왕후 송씨(定順王后 宋氏)“의 능이므로,
다른 두 ”정순왕후“는 참고로 잠깐씩만 살펴보고 넘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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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려 원종(元宗)의 왕비인 정순왕후 김씨(靜順王后 金氏 : ? ~ 1236년)
- 고려 제24대 왕인 원종(元宗)은 “생애 : 1219년~1274년,
재위 : 1259년~1274년“인데,
저는 보지 않았지만 지난해 MBC에서 방영한 드라마 “무신(武臣)”에
등장했었다고 합니다.
- 그 앞의 제23대 왕은 고종(高宗), 그 다음의 왕은 제25대 충렬왕(忠烈王)으로,
- 원종(元宗)은 고려 역대 국왕 중 묘호(廟號)에 조(祖)나 종(宗)자를 사용한
마지막 왕이며,
- 이후에는 원나라의 지배로 조(祖)나 종(宗)이 아닌 끝에 왕(王)자를
붙여야 했고, 앞에 오는 글자는 원나라에의 충성을 맹세하는 증거인
"충(忠)"자를 넣어야 했습니다.
- 그리고 이때 이후로 "짐(朕)"은 "고(孤)" 또는 "과인(寡人)"으로,
"폐하(陛下)"는 "전하(殿下)"로, "태자(太子)"는 "세자(世子)"로,
"선지(宣旨)"는 "왕지(王旨)"로 명칭이 격하되었을 뿐만 아니라,
각종 관직 용어들의 명칭들도 모두 격하되었습니다.
- 또한 원종은 죽은 후에 원나라로부터 시호(諡號)를 받은
첫 번째 왕입니다.
- 이때는 무신(武臣)들이 세력을 가지고 있던 때로, 재위중인 1270년에는
배중손(裵仲孫)을 중심으로 하는 삼별초(三別抄)의 항쟁이 일어났습니다.
- 무신(武臣) 최충헌(崔忠獻)은 원종의 고모부이자 처외증조부이었고,
그의 비(妃)인 정순왕후(靜順王后)는 최충헌(崔忠獻)의 외증손녀이자
최우(崔瑀)의 외손녀이었습니다.
- 정순왕후(靜順王后)는 경순왕후(敬順王后) 또는 순경태후(順敬太后)라고도
불리는데, 본관은 경주김씨(慶州金氏)입니다.
- 원종의 능은 북한 땅인 황해도 개풍군에 있는데,
정순왕후의 능은 “가릉(嘉陵)”으로 부르며 강화도에 있어 부부가 따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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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조선 영조(英祖)의 계비(繼妃)인 정순왕후 김씨
(貞純王后 金氏 : 1745년 ~ 1805년)
- 영조와 정조, 사도세자, 천주교박해, 수렴청정 등의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등장하는 이 왕비는 또 그 당시의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에서도 꽤 비중 있게
여겨져서 무게감 있는 배우들이 그 역을 맡았습니다.
(KBS 왕도-김자옥, KBS 목민심서-김영란, KBS 한성별곡-정애리,
MBC 이산-김여진 등등)
- 1757년(영조 34년), 정비(正妃)인 정성왕후(貞聖王后) 서씨(徐氏)가 승하하자
영조는 부왕인 숙종의 유지에 따라 후궁들 중에서 새 왕비를 책봉하지 않고,
1759년 6월 9일, 김한구(金漢耉)의 딸인 “정순왕후”를 왕비로 간택하여
같은 해 6월 22일, 창경궁에서 혼례를 올렸습니다.
- 당시 영조의 나이는 66세, 정순왕후는 15세로 조선 개국 이후 가장 나이 차가
큰 혼인이었고 그가 왕비에 책봉될 때 왕비의 부모 내외는 물론
조부 김선경(金選慶)도 생존하고 있었으며, 심지어 1735년에 태어난
영조의 아들인 사도세자보다 10살이나 어렸다고 합니다.
- 그리고 1776년 영조가 83세, 재위 53년 만에 돌아가자,
정순왕후는 22살에 홀로됩니다.
- 간택(簡擇) 당시의 일화로, 영조는 간택 규수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깊은 것이
무엇인지 물었는데 다른 규수들은 “산이 깊다”, “물이 깊다”는 답을 했지만
유독 정순왕후는 “인심이 가장 깊다”라고 답하여 영조의 눈길을 사로잡았으며,
또 가장 아름다운 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목화꽃은 비록 멋과 향기는 빼어나지
않으나 실을 짜 백성들을 따뜻하게 만들어 주는 꽃이니 가장 아름답다.“라는
말로 영조를 감탄시켰다고 합니다.
- 그리고 왕비 책봉 이후에도 상궁이 옷의 치수를 재기 위해 잠시 돌아서달라고
하자 단호한 어조로 “네가 돌아가서 재면 되지 않느냐”고 추상같이 답하여
어린 나이에도 왕비의 체통을 중시하였던 그의 면모를 알 수 있었다고 합니다.
- 1800년, 정조가 승하하고 아들인 순조가 11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정순왕후는 대왕대비로서 1803년까지 4년 동안 수렴청정을 행하였습니다.
- 정순왕후는 수렴청정을 하는 동안 “정학(正學)이 밝아지면 사학(邪學)은 저절로
종식될 것이다“라며 천주교를 묵인한 정조와는 달리 천주교를 강경하게
탄압하였으며 급기야는 1801년 음력 1월 10일, 사학(邪學 = 천주교)의 엄금을
하교하여 세계 천주교 역사에서 가장 큰 교회박해인 “신유박해(辛酉迫害)”를
일으켰습니다.
- 그런데 이는 단순한 천주교박해가 아니라,
자신의 세력인 노론(老論) 벽파(僻派)의 정적(政敵)인 남인(南人)과
소론(少論) 시파(時派)의 제거를 목적으로 한 숙청이었습니다.
- 이로 인해 남인 출신인 정약용(丁若鏞)의 셋째형 정약종(丁若鍾)과
이승훈(李承薰) 등이 처형되었으며 이미 배교한 이가환(李家煥)도 장살 당했고,
정약용은 유배형에 처해졌는데, 신유박해 이후 정약현(丁若鉉, 정약용의 맏형)의
사위인 황사영(黃嗣永)에 의해 “황사영 백서(帛書)사건”이 벌어짐으로써
조선 내에서의 천주교 탄압은 더욱 거세어졌습니다.
- 그런데 노론(老論) 벽파(僻派)이며 경주김씨(慶州金氏)인 정순왕후는
1802년 정조의 유지에 따라 소론(少論) 시파(時派)이며 안동김씨(安東金氏)인
김조순(金祖淳)의 딸을 순조의 왕비(순원왕후-純元王后)로 책봉하여
향후 고종 때까지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이어지는 계기가 만들어집니다.
- 그러나 정작 김조순이 세력을 얻게 되자 자신의 벽파계열이 숙청되고 영향력도
약화되어 허망한 말년을 보냈고, 수렴청정을 거둔 1년 뒤인 1805년 1월 12일,
창덕궁 경복전에서 승하하였습니다.
- 정순왕후의 능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내에 위치한 원릉(元陵)으로 영조와 함께
묻혀있는데, 영조의 정비인 정성왕후의 능은 서오릉(西五陵)의 홍릉(弘陵)입니다.
* 정순왕후(貞純王后)가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여했다는 설도 있고 아니라는 설도 있는데,
어쨌든 무서운 사람이었음은 사실인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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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조선 단종(端宗)의 정비(正妃)인
정순왕후 송씨(定順王后 宋氏 : 1440년 ~ 1521년)
* 수양대군(首陽大君)과 세조(世祖), 단종(端宗)의 폐위(廢位)와 죽음
그리고 사육신(死六臣) 등의 이야기는 워낙 잘 아실 터이므로 생략하고
정순왕후와 <사릉(思陵)>에 대한 이야기만 간략히 올립니다.
- 정순왕후는 “여산(礪山) 송씨(宋氏) - 여산은 자금의 전북 익산시 근처”로
전북 정읍에서 태어나서 어릴 때 한성부(漢城府)로 이사하였다가 왕후가 되는데,
남편인 단종의 죽음(1457년) 뒤에도 1521년(중종 16년)까지 82세를 살아서,
세조, 예종, 성종, 연산군, 중종의 다섯 임금을 더 봐야했습니다.
- 정순왕후의 집안은 다음과 같습니다.
할머니 : 순천김씨(順天金氏)로 김종서(金宗瑞)의 대고모(大姑母) 뻘이 되는데,
즉 김종서의 조부인 김태영(金台泳)의 누이이고
* 대고모(大姑母) = 고모할머니 = 아버지의 고모
아버지 : 후에 여량부원군(礪良府院君)이 되는 송현수(宋玹壽)이며
어머니 : 후에 여흥부부인(驪興府夫人)이 되는 여흥민씨(驪興閔氏)인데,
어머니는 또한 단종을 왕위에서 물러나게 한 수양대군의 1등공신인
한명회(韓明澮)의 처(妻)와는 친사촌간이어서 안타깝습니다.
- 상당히 뛰어난 미모를 가졌다고 알려진 정순왕후는 1454년 음력 1월 22일,
열다섯의 나이에 한 살 아래의 단종과 혼인하여 왕비가 되었으나, 1455년 단종이
수양대군(세조)에게 왕위를 일임하고 상왕(上王)이 되자 왕대비(王大妃)가 되어
의덕대비(懿德大妃)의 존호를 받았으나, 1457년 사육신이 추진하던 단종복위
운동이 발각되자 상왕(上王) 단종은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되어 영월로
유배되었고, 의덕왕대비는 군부인(郡夫人)이 되어 궁에서 쫓겨났습니다.
- 그리고 이어서 숙부(叔父)인 금성대군(錦城大君)이 다시 역모의 죄를 받고
처형되고 이에 따라 영월에서 단종도 폐서인(廢庶人)이 되어 죽음에 이르게 되자
왕후는 관비(官婢)의 신분으로 격하되었는데, 왕후의 미모를 탐내던
신숙주(申叔舟)가 그를 자신의 종이나 첩으로 달라고 했다가 물의를 빚기도
했다는데, 세조는 비록 노비이지만 아무도 범하지 못하도록
대비를 “정업원(淨業院)”으로 보냅니다.
- 원래 관노비는 관청에 소속되어 노역을 담당해야 했지만 그녀에게 노역까지
시키지는 않았던 것으로 전해지는데, 왕비는 단종이 죽은 후 머리를 깎고
정업원의 비구니가 되어서 남편 노산군의 명복을 빌다가 사망하게 됩니다.
- 평생을 그곳에서 보내다가 1521년 82세의 나이로 죽은 뒤, 단종의 친누이
(친누나)인 경혜공주(敬惠公主)의 남편인 해주(海州) 정씨가(鄭氏家) 묘역에
묻혔는데, 처음에는 일반인의 묘이었으나 중종 때 단종이 대군(大君)으로
복위되면서 왕후도 대군부인으로 복위되었다가, 1698년(숙종 24) 단종의 복위와
함께 정순왕후로 추상(追上)되고, 묘를 높여 <사릉(思陵)>이라고 하였습니다.
* <사릉(思陵)>이라고 “생각 사(思)”를 쓴 까닭은
정순왕후가 단종을 사모(思慕)하며 일생을 보냈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라고 합니다.
- 그러나 <사릉>은 다른 왕후의 능에 비해 규모도 작고 석물제도(石物制度)는
단종의 능인 <장릉(莊陵)>과 마찬가지로 난간(欄干)과 무석(武石)을 생략하여
즉, 병풍석(屛風石)과 난간석(欄干石)도 없이 문인석(文人石)과 석마(石馬) 만이
있을 뿐입니다.
- 또 주변 능역의 숲 역시 규모가 작은 편인데, 그러나 <사릉> 숲의 소나무들이
아주 울창하여 크지는 않아도 멋진 숲을 볼 수 있으며,
한때 <사릉>의 소나무는 단종의 <장릉>이 있는 동쪽 방향으로 굽는다는
전설이 있어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 또 <사릉> 옆에는 문화재청이 관리하는 양묘장(養苗場)이 있어 다양한 수종의
식물을 감상할 수도 있는데, 여기서는 문화재 복원과 보수에 필요한 나무들을
기르고 있습니다.
- <사릉>은 위에서 말씀드린 대로 해주정씨(海州鄭氏) 집안의 사적인 재산이므로
공개하지 않고, 관리인의 허락을 받아야만 둘러볼 수 있습니다.
* 또 하나 기구(崎嶇)한 일은, 정순왕후는 단종을 죽인 세조(1417~1468) 보다
53년이나 더 오래 살았는데, 세조의 능인 광릉(光陵)이 바로 가까이인
남양주시 진접읍 광릉수목원 옆에 있다는 것입니다.
* 한편 우리나라의 무속(巫俗)의 신들, 즉 한국무(韓國巫)에서는 슬프고 기구한
삶을 살았거나 억울한 죽임을 당한 분들을 신(神)으로 모시는데,
- 정순왕후도 “송씨부인(宋氏夫人)”이라 하여 모시고 있으며,
단종도 영월지역에서 “마을신” 또는 “무신(巫神)”의 한분으로 모시고 있습니다.
- 또 “송씨부인(宋氏夫人)” 이외에도 무속의 신들에는 “장보고(張保皐)”,
“경순왕(敬順王)”, “공민왕(恭愍王)”, “최영(崔瑩)장군”, “남이(南怡)장군”,
“김시습(金時習)”, “임경업(林慶業)장군” 등등이 있습니다.
* 한편, 단종의 친누나인 경혜공주(敬惠公主)와 남편 정종(鄭悰)의 삶도
정순왕후만큼 기구한데, 다음에 시간 있을 때 살펴봅니다.
- <사릉>은 말씀드린 대로 해주정씨 땅이기 때문에 경혜공주의 아들인 정미수(鄭眉壽)를
비롯한 정씨들의 묘가 능 안에 같이 있는데, 정작 경혜공주와 남편 정종의 묘는
고양시 덕양구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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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광해군(光海君) 묘와 그 주변
- <사릉(思陵)>의 뒤쪽으로는 시내를 끼고 좁고 긴 골짜기가 펼쳐지는데,
그 중간쯤의 야트막한 산비탈에 <광해군과 부인 문화 유씨(文化 柳氏)의 묘>가
좁은 땅에 초라하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 조선왕 중에는 연산군과 광해군은 폐위되어 “왕(王)”에서 “군(君)”으로
격하되었기 때문에 “능(陵)”이 아니고 “묘(墓)”입니다.
* 그런데 <광해군>의 묘는 서울 도봉구 방학동에 있는
<연산군과 부인 거창 신씨(居昌 愼氏)의 묘>보다 훨씬 더 초라하고 쓸쓸합니다.
- 또 바로 맞은편의 산비탈에는 선조의 후궁이자 광해군의 생모인
“공빈김씨(恭嬪金氏)”의 묘가 있는데, 당초에는 광해군이 즉위 후 생모를
“공성왕후(恭聖王后)”로 추존하고 능 이름도 “성릉(成陵)”이라고 불렀는데,
광해군이 폐위 된 후에 “공빈 김씨”도 “빈(嬪)”에서 “서인(庶人)”으로 격하되어
묘 이름도 그냥 “성묘(成墓)”라고 부릅니다.
* 이곳의 지명(地名)인 “송릉리(松陵里)”는 소나무가 많은 동네에
“성릉(成陵)”이 있어서 붙었다고 합니다.
- 이렇게 서로 가까이에 묘가 있는 것은, 광해군이 죽을 때
”어머니 발치에 묻어 달라“고 해서 이렇게 배치되었다고 합니다.
- 광해군의 친형인 “임해군(臨海君)”의 묘도 바로 근처에 있는데
즉, 친어머니인 “공빈”과 두 친아들인 “임해군”과 “광해군”의 묘가 서로 가깝게
삼각형 구도를 이루고 있어 잠시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 그런데 “임해군(臨海君)”은 광해군의 친형이기는 하지만, 성질이 난폭하여
세자에 책봉되지 못했었는데, 광해군 즉위 후 일부대신들과 명나라에서 왕으로
즉위시킬 것을 주장하자, 이를 불안해 한 광해군에 의해 나중에 폐비(廢妃)가
되는 선조의 계비인 인목왕후(仁穆王后)의 아버지인 김제남(金悌男), 그리고
인목왕후(仁穆王后)의 소생(所生)인 영창대군(永昌大君)과 함께 역모죄로 몰려
진도(珍島)에 유배되어 사사(賜死)되었습니다
* 흥미로운 것은 지난 2013. 02월 한국사능력검정시험을 준비하는 학생들에게
가장 존경하는 조선시대 왕을 묻자, 학생 중 32%가 “광해군”을 들었다고 하던데,
이는 “세종(30%)”, “정조(15%)”, “성종(7%)“를 앞지르는 것으로 우리의 상식을
뒤엎는 결과가 나와서 놀라게 했는데,
- 이는 요즈음의 청년실업 등 사회문제로 “대동법(大同法)”과 같은
개혁정치를 펼친 광해군에 대한 인식이 변했고.
- 또 지난 2012년 09월에 개봉하여 천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영화 “광해”의 인기가 반영된 것이라는 분석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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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양조씨(豊壤趙氏)”의 시조(始祖)의 묘
- 그런데 “공빈묘”인 “성묘”는 유명한 명문가인 “풍양조씨(豊壤趙氏)”의
시조(始祖)이며 고려개국공신인 “조맹(趙孟)”의 묘 바로 뒤에 있습니다.
- 원래 조선시대에는 왕실의 묘가 들어서면 일반인들의 묘는 옮겨야 하는 법인데
선조임금이 “공빈”의 외가 쪽이 “풍양조씨”이기에 그대로 두라고 해서
지금도 함께 있습니다.
- “풍양조씨”는 조선말에 “안동김씨”와 함께 큰 세도를 휘둘렀는데,
제23대 순조(純祖)의 아들인 추존왕(追尊王) “익종(翼宗)”의 비(妃)이고
제24대 헌종(憲宗)의 생모이며 풍양조씨인 “신정왕후(神貞王后) 조씨”가 나중에
“조대비” 시절에 흥선군 이하응(李昰應)과 가까워 고종임금을 세우게 됩니다.
* “풍양”은 지금의 남양주시 진건읍, 진접읍, 오남읍과 별내면, 퇴계원면 일대를
아우르는 지역으로, 그래서 남양주시가 넓으니까 남양주시는 “풍양출장소”를
별도로 운영하며 위 5개 지역주민들의 민원 등 일부 업무를 처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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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순왕후(定順王后) 뒷이야기 ]
- 정순왕후가 등장하는 소설로는 <2005년 간행된 “김별아”의 “영영이별 영이별”>,
<2003년 간행된 “임중웅”의 “왕비열전”> 등등 여럿이 있습니다.
- 드라마로는 <KBS - 한명회>, <KBS - 왕과 비>, <MBC - 파천무>,
<JTBC - 인수대비> 등이 있습니다.
* 지금의 흥인지문(동대문) 밖 숭인동과 창신동, 청계천 8가 일대에는
정순왕후의 자취가 간간이 남아있습니다.
(1) 영도교(永渡橋)
- 청계천(淸溪川)은 조선시대에 자연하천(自然河川)을 치수사업(治水事業)을 통하여 만든
일종의 인공하천(人工河川)으로 “개천(開川)”이라 불렸던 곳인데,
당시에는 다리가 24개 있었으나 현재의 청계천에는 22개의 다리가 놓여 있습니다.
- 현재는 광화문의 시작지점부터 <모전교>-<광통교>-<광교> ----- <영도교>------
<무학교>-<두물다리>-<고산자교>의 22개 다리 중에서 <영도교>는 17번째에 있는데,
인도(人道) 전용다리입니다.
- 이 다리는 조선 초에는 <왕심평대교(旺尋坪大橋)>라고도 하였는데,
이 다리에는 단종에 얽힌 슬픈 이야기가 전합니다.
즉,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영월로 귀양 갈 때 단종비 정순왕후가
이 다리까지 배웅 나와 이별하였는데, 이후 다시는 만나지 못하고 영영 이별하였다고
하여 <영이별다리> 또는 <영영건넌다리>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 성종 때 이 다리를 보수하여 한자명으로 <영도교(永渡橋)>라고 하였는데,
영미동(永尾洞)에서 내려오는 하천 끝에 놓인 다리라는 의미와 창신동에 있던
영미사(永尾寺) 승려들이 다리를 가설하였다고 하여 <영미교(永尾橋)> 혹은 <영미다리>
라고도 불렀고 또한 안암동 영도사(永導寺)의 승려들이 다리를 놓았다고 하여
<영도교(永導橋)>라는 명칭도 있었다고 합니다.
- 고종 때는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이 다리의 석물(石物)을 궁궐에 쓰는
석재(石材)로 징발함에 따라 나무다리로 바뀌었는데, 나무다리들이 장마 때마다 유실되곤
하여 띄엄띄엄 징검다리를 놓아 건너다니면서 한때는 <띄엄다리>라는 명칭이 붙기도
하다가 1933년 나무다리를 헐고 콘크리트로 교체공사를 할 때 교각 하부 구중(溝中)에서
“관음보살목각좌상”이 출토되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 그리고 2005년 청계천이 복원되면서 새로 <영도교(永渡橋)>가 가설되었는데,
강원도 영월의 동강에서 일부 석재를 가져와서 완성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 이곳은 지금은 종로구 숭인동(崇仁洞)과 중구 황학동(黃鶴洞) 사이의 황학동 162번지에
해당되는데, <황학교>와 <다산교> 사이에 있습니다.
(2) 정업원(淨業院)
- 단종이 노산군이 되어 영월로 유배된 후에 정순왕후가 노비의 신세로 전락하자,
신숙주 등이 그녀를 첩이나 종으로 달라는 말이 있었는데,
세조는 그녀를 “신분은 노비이지만 노비로서 사역할 수 없게 하라”는 명을 내려
아무도 범하지 못하도록 <정업원(淨業院)>으로 보냅니다.
- 당초 세조는 정순왕후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겨 성안에 집을 마련해준다 하였지만
왕후는 남편이 유배된 영월 땅이 보이는 동대문 밖에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재목을 내려 집을 지어주라 명했는데 그곳이 <정업원>이라고 합니다.
- <정업원>은 아직 고려 풍습이 남아있던 조선 초기 자식이 없는 후궁이나
결혼 후 남편을 잃고 혼자 살아야 하는 왕실의 여인들을 위해 세웠던 절을 의미합니다.
- 지금은 그 자리에 영조임금이 세운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라는 비석이 있는데,
즉 <정업원 옛 터>라는 뜻입니다.
- 지금은 이 <정업원 터> 바로 옆에 비구니 스님들이 있는 청룡사라는 절이 있는데,
초대 주지(住持)로 고려 말 공민왕의 비(妃)인 혜비(惠妃) 이씨(李氏)가 망국(亡國)의
슬픔을 안고 스님이 되어 머물던 곳이고 또 태조 이성계의 딸 경순공주(慶順公主)도
이곳에서 비구니로 살았다고 하는데, 정순왕후 역시 이곳에서 스님으로 머물렀다는 설도
있습니다.
* 경순공주(慶順公主)
태조의 계비(繼妃)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의 소생(所生)으로,
무안대군(撫安大君) 방번(芳蕃)과 의안대군(宜安大君) 방석(芳碩)의
동복(同腹) 누이동생입니다.
(3) 동망봉(東望峰)
- <정업원>의 동쪽에는 <동망봉>이라는 작은 산봉우리가 있는데,
“동쪽을 멀리 바라보는 봉우리.“라는 뜻입니다.
- 노산군인 단종의 억울한 죽음을 알게 된 정순왕후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이곳 <동망봉>에
올라서는 동쪽을 바라보며 땅을 치고 가슴을 치며 통곡했는데, 이 정순왕후의 통곡소리는
인근 부녀자들의 마음도 사무치게 하고 아랫마을까지 곡소리가 들려와 마을여인들도
함께 울어 즉, 동정곡(同情哭)을 했다고 전해집니다.
- 후일, 영조가 친히 <동망봉(東望峰)>이라는 글씨를 써서 바위에 새기게 하였는데,
일제강점기 때 <동망봉> 근처 지역이 채석장으로 쓰이며,
그 바위는 깨어져 나가버렸다고 합니다.
- 최근에 서울 종로구 낙산 근처인 이곳 <동망봉> 남쪽에는,
<동망정>이라는 이름의 정자가 새로 들어서 있다고 합니다.
(4) 금남(禁男)의 시장 = 여인시장(女人市場)
- 궁에서 쫓겨난 왕비는 끼니를 연명할 거리가 없어 걸식까지 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래서 왕비를 동정한 부녀자들이 끼니때마다 푸성귀를 가져다주곤 했는데,
궁에서 이를 못하게 말리자 왕비가 살고 있는 초막 근처에 여자들만 드나드는 시장을
열어 물건을 사는 척 모여들어서는 왕비에게 먹을거리를 가져다주는 “금남(禁男)의 시장”
또는 “여인시장(女人市場)”이 동대문 밖에 들어섰다고 합니다.
- 현재 동대문구 숭인동에는 중국의 장수인 관우(關羽)를 신앙하기 위하여 건립된
묘당(廟堂)인 <동묘(東廟)>가 있습니다.
이 근처는 좀 허름한 물건들 위주의 벼룩시장이 성황을 이루는데,
이 <동묘> 길 건너의 “숭신초등학교” 인근에 정순왕후와 관련된 <금남의 시장>
즉 <여인시장> 터를 알리는 표지석이 있습니다.
(5) 자줏골 빨래터
- <정업원>의 비구니가 된 후에 정순왕후는 왕실에서 데리고 나온 시녀 셋과 함께
염색(染色)하는 일을 하며 살아갔다고 합니다.
- 일설에는 그녀가 세조의 비(妃)인 정희왕후(貞熹王后)의 배려로 그다지 큰 경제적 어려움
없이 살아갔다고 하지만, 대부분의 기록에는 그녀가 세조의 도움 받기를 거부하고 자신의
삶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평생 염색물을 들이는 일을 하며 살아갔다고 전해집니다.
- 정순왕후는 생계를 위해 마침 제용감(濟用監)에서 심부름 하던 시녀의 염색기술을 도와
자줏물을 들이는 염색업으로 여생을 살았다고 합니다.
- 정순왕후는 “지치”라는 식물의 뿌리를 이용해 비단에 물을 들이고, 이 비단을 바느질하여
댕기, 저고리, 깃, 고름, 끝동 등을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았다고 합니다.
- 위에서 말씀드린 <동망봉> 뒤편으로 현재 한국불교 태고종(太古宗)에서 운영하는
“보우승가대학(普愚僧伽大學)”이 있는데,
그 뒤편에 남아있는 <자줏골 빨래터>가 바로 그곳이라고 합니다.
- 그곳에는 지금도 “자지동천(紫芝洞泉)”이라는 글자가 바위에 새겨져 있는데,
이는 곧 “자주동 샘”이라는 뜻이고, 우물이 아직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 사람들은 이곳을 흔히 “자줏골빨래터”라고 불렀는데,
여기서 자주색 물을 들이면 저절로 잘 들었다고 합니다.
* 샘터 앞에는 조선시대 정치가이며 실학자로 <지봉유설(芝峯類說)>의 저자인
“이수광(李睟光 : 1563~1628)”의 거처였던 <비우당(庇雨堂)>이
현재 복원되어 있습니다.
* 제용감(濟用監)
- 조선시대 모시, 마포(麻布), 인삼(人蔘) 등의 진상과 나라에서 내려 주는
의복, 능단(綾緞)에 관한 일 등을 맡아보던 기관으로
또한 각종 옷감의 채색, 염색, 직조 등을 관리하던 곳이었습니다.
* 지치
- 우리나라 산과 들에 흔하게 자라는 여러해살이 풀인데,
“지초(芝草)”, “자초(紫草)”, “자근(紫根)” 이라고도 부릅니다.
- 우리나라와 중국에서는 예로부터 자색(紫色)은 권위를 상징하게 되어 왕복(王服)이나
높은 신분의 사람이 입는 옷에 사용하였는데, 특히 우리나라는 고구려-백제-신라 모두
품위(品位)를 색으로 제도화하였는데 역시 자색(紫色)이 최상위의 색이었다고 합니다.
- “지치”는 예전부터 뿌리를 자주색 염료로 썼는데,
한방(韓方)에서는 뿌리를 자초(紫草)라고 하여 약재로 써서, 토혈, 코피, 소변출혈,
홍역에 효과가 있고, 화상, 동상, 습진, 발진, 피부궤양 등에 소독약으로
외용(外用)하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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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순왕후 추모문화제 ]
- 서울 종로구는 2008년부터 매년 4월 하순, 동대문구 숭인동의 <동망봉>과
<숭인공원>, 종로구 동숭동의 <마로니에공원> 등지에서
단종을 그리며 60여년을 홀로 지내다 간 정순왕후의 절개와 충절을 기리는
<단종비 정순왕후 추모문화제>를 개최하여 지역축제로 이어가고 있습니다.
- 내용은 궁중제례(宮中祭禮) 의식에 따른 추모제향(追慕祭享), 추모 굿인 진혼무,
추모공연으로 판소리, 추모연주, 추모시 낭송 등으로 구성되는데,
주최는 종로구가 하고 제례(祭禮)는 “종묘제례보존회(宗廟祭禮保存會)”가 맡고
추모 굿과 추모 공연은 사회 각계애서 참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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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으로 마치는데, 너무 길어서 지루하셨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학장님. 잘 읽었습니다. 한국 역사를 두루 섭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산 송씨의 여산은 호남 고속도로 전라북도 경계선으로 들어 가면 바로 여산 휴게소가 있는 곳입니다. 임해군에게는 아들이 하나가 있었는데 이진왜란 중에 일본에 포로로 잡혀가서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일본의 유명한 승려가 되어 세상을 마쳤는데 그의 무덤을 서쪽으로 행하도록 하라고 유언하였다는 이야기를 히로시마 출장시에 들은 기억이 납니다. 건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호남고속도로를 탈 때마다 여산휴게소에 들르곤 했는데, 최근에는 장거리 여행을 거의 하지 않아 안 가본 지가 한참 되었습니다. 벌써부터 화순 쪽에 가려고 했는데 자꾸만 지연됩니다. 임해군의 아들에 대한 이야기는 조선왕실 야사에서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광해군, 임해군의 그 당시는 참으로 슬픈 일도 많았고 또 안타까운 일들도 많았던 시기였다고 느껴집니다.
일전에 말씀드렸다시피 단종의 정비셨다 노비로 강등된 그녀의 일대기는 드라마 소재로 너무 좋은 소재일 것 같은데.비극으로요.ㅎㅎ 세상 살며 별로 생각치 못한 분을 학장님께서 상세히 소개해주셔서 맘이 짠하고 이분을 다시 생각하게되는군요.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역사소설이나 드라마에서는 일반인의 여인들도 등장하지만 궁중의 여인들이나 또 왕비들도 많이 등장하는데 가장 애틋하고 안타까운 인물 중의 한분이 정순왕후인 듯 합니다. 그런데 위의 본문에서도 언급했듯이 지금까지는 비공개이었던 사릉과 또 구리시 동구릉의 숭릉과 서울 노원구 태강릉(태릉)의 강릉을 얼마 전부터 공개한다고 하더군요. 틈나는대로 어서 한번 가보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