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헌의 소설1- 조용헌
소나무를 전문적으로 찍어 온 사진작가 배병우(57). 그는 전국의 여러 소나무 가운데 경주 왕릉의 등이 굽은 소나무를 최고로 친다. (19)
추사 김정희로부터 시작된 삼전지묘는 대원군을 거쳐 차강(此江) 박기정(1874~1949)으로 이어진다. (21)
시인 김지하의 스승은 청강(靑江) 장일순(1928~1994)의 난을 그리게 된 것도 차강과의 인연이 계기가 되어서이다. 장일순의 조부 장경호는 원주의 알아주는 부자였다. 서화를 좋아하던 장경호는 봄가을로 차강을 원주로 초대해서 달포씩 머무르게 하였다. 이때 어린 손자 장일순이 사랑채에 머무르던 차강으로부터 난을 배우게 된 것이다. (21)
전국에 사랑방 문화가 아직 살아 있는 곳은 없는가. 찾다보니까 안동시 안락동에 자리 잡은 ‘향산고택(響山古宅)’이 눈에 들어온다. (22)
중년에 시작해서 두 다리 성한 한 1,000군데의 산을 올라가 보는 것이 천산 대학 커리큘럼의 전부이자 핵심이다. (24)
한국에서 높이 500미터 이상의 산들을 추려 보면 대략 4,400군데 정도 된다고 한다. (25)
특히 기억에 남는 영산홍은 대전시 송촌동에 자리 잡은 소대헌 고택의 영산홍이다. (28)
서울 구기동 수기터널 앞에 살롱이 하나 있다. 이름 하여 ‘김종규 살롱’이다. (20)
김종규 살롱의 정기 모임은 매주 수요일 저녁 구기동의 삼성출판박물관 6층에서 열린다. 여기서 각종 강좌도 열린다. 동국대 김상현 교수가 《삼국유사》를, 러시아 대사를 지낸 이인호 교수가 러시아사를 , 방송 작가로 유명한 신봉승 씨가 《조선왕조실록》을, 동양철학의 대가인 김충렬 교수가 동양 고전들을 강의하였다. (31)
산에 가면 무엇이 있는가. 연하(煙霞)가 있다. 연기와 노을. 한국의 산 아래로는 골짜기가 있기 마련이고, 그 골짜기에는 계곡물이 흐르기 때문에 아침저녁으로 안개가 느긋하게 피어오른다. (34)
산중월 다음에는 수중월(水中月)이다. 물속에서 일렁거리는 달을 즐기는 차원이다. 달을 보기 위해서 하늘을 보는 것이 아니라, 물을 바라보면서 월인천강(月印千江)의 이치를 음미한다. 수중월을 보려면 배를 타야 한다. 수중월을 즐기는 사람이 어디 없는가 하고 수소문을 해 보니 장성군 삼계면의 ‘함동호수’에서 호젓하게 수중월을 즐기는 처사가 하나 있었다. 수월 처사(水月處士) 김형규 씨이다. 함동호수는 둘레가 12킬로미터이다. (39)
전남 장성에 있는 세심원(洗心院)과 경북 청도에 있는 ‘호골 영토산방(湖骨嶺土山房)’ 사이에는 요즘 영.호남의 풍류가 왔다 갔다 하고 있다. (42)
주말이면 고수들을 찾아가서 같이 밥도 먹고 차도 마시면서 이야기를 듣는 것이 바로 학습이요, 인생 공부이다. 한국에도 이만한 대학 하나는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45)
몸이 찌뿌드드하거나 감기. 몸살 기운이 있다 싶으면 바위산에 오른다. 서너 시간 정도 바위산을 오르락내리락하다 보면 몸과 마음이 개운해지고 삶의 의욕이 생긴다. (46)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바위를 주식(週食)할 수 있는 인생은 상팔자(上八字)임이 틀림없다. (46)
산악계에서 암벽 고수 (岩壁高手)로 알려진 김용기(56) 선생이다. 20대 중반부터 시작해서 약 30년 동안 전국 바위산의 암벽을 모조리 타 본 사나이이다. 《한국 암장 순례》(전 2권)는 그가 전국 300개의 바위 절벽을 어떻게 오르내렸는지를 기록한 보고서이다. (47)
“50억 빚이 있는 사람이라도 밧줄을 감고 천 길 낭떠러지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으면 그 근심을 잊어버린다. 섹스도, 골프도, 술도, 어떤 도박을 해도 근심을 잊어버릴 수 없지만 암벽을 타면 잊어버릴 수 있다. 바위에 매달려 있을 때면 부귀(富貴)와 빈천(貧賤)의 차별이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30년 암벽 인생의 철학은 ‘岩壁忘憂’였다.(47)
필자가 인도 여행 도중에 만났던 석송(石松)이라는 인물이 있다. 그가 해 주었던 ‘현애살수(懸崖撒手: 절벽에서 손을 놓아라!)’ 이야기가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다. (49)
이집트 출신의 안토니우스(Antonius, 250~356)는 가톨릭의 유명한 성자이다. ‘최초의 은수자(隱修者)’, ‘사막이 교부(敎父)’로 알려진 인물이다. (51)
홀로 있어도 외롭지 않은 사람은 공부가 된 사람이다. (51)
매화에 관심이 많다 보니까 전국에 있는 매화 소장가들을 수소문해서 그 집을 방문하고 다녔던 적이 있다. 그 과정에서 알게 된 집이 충북 옥천 이원면에 있는 옥매원(玉梅園)이다. 매화 애호가들 사이에서는 소문난 매화 농원인데, 35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59)
춘설헌은 남종화(南宗畵)로 유명한 의재(毅齋) 허백련(1891~1977)이 1958년에 지은 화실이자 살롱이다. 무등산 계곡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증심사(證心寺) 조금 못 미쳐 오른쪽 개울을 건너 150미터쯤 가면 나온다. 시내와 가까우면서도 숲 속에 있는 듯 한 느낌이 드는 곳이다. (60)
차를 좋아했던 의재는 시간 나는 대로 무등산에 올라가 차 밭을 가꿨다. 술 대신에 차를 많이 마셔야 나라가 흥한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61)
다석 유영모, 지운 김철수, 효당 최범술, 함석헌 등이 자주 찾아와 며칠씩 묵어가곤 하였다. 《25시》의 작가 게오르기우도 두 번이나 춘설헌을 방문했다. 의재가 지닌 동양적인 풍모와 식견에 반해서였다. (61)
그동안 이러한 살롱들을 돌아다녀 보았다. 강릉의 대청헌(對淸軒), 경북 처오 삼신산 자락의 호골영토산방(湖骨嶺土山房), 나주의 배나무 과수원 사이에 있는 죽설헌(竹雪軒), 광주 너브실의 애일당(愛日堂), 경주 황룡골의 수졸헌(守拙軒), 장성 축령산 중턱의 세심원(洗心院)이다. 화순 안양산(安養山) 자락에는 40년간 소나무를 즐겨 그려 온 계산(溪山) 장찬홍(張讚洪)선생의 소요당(消遙堂)이 근래에 문을 열었다. (64)
관점과 취향에 따라 다르겠지만, 필자가 꼽는 남한의 10대 명산은 이렇다. 지리산, 설악산, 계룡산, 한라산, 오대산, 가야산, 월출산, 속리산, 북한산, 태백산이다. (67)
마음이 울적할 때마다 계산이 자주 보러 가는 소나무는 무등산 뒷자락인 화순군 동면에 있는 암간송(巖間松)이다. 30명쯤 앉을 수 있는 마당 바위가 있고, 그 옹색한 바위벽 틈새에서 어렵게 자란 수령 800년가량의 소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71)
목포에서 제주도 가는 5시간 코스의 배만 타 보다가 사흘 밤낮으로 섬 하나 없는 대해를 항해한다는 것은 독특한 체험이었다. (73)
예부터 매는 6가지 취미인 ‘응마주색난석(鷹馬酒色蘭石)’ 가운데 첫 번째 취미에 들었다. (78)
현재 국내에 매를 훈련시켜 꿩이나 토끼를 사냥하는 풍습이 남아 있는 곳은 전북 진안군의 백운면이다. 내륙 오지인 이곳은 해발 400미터에 눈이 많이 오는 지역이라서 매가 꿩을 잡기에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79)
푸레독은 옹기이면서도 독특한 격조를 풍긴다. 쌀이나 곡식을 저장하던 용기로 이용되었다. (81)
푸레독 전문가 중 한 사람이 장영필(張榮弼)씨이다. ‘장영필의 푸레독’은 독특한 품격을 풍긴다. 특히 푸레독의 뚜껑을 나무로 만든 점이 인상적이다. (81)
펜을 이용해서 그림을 그리는 김영택 화백. 대략 50만 번의 손질이 간 그의 ‘펜화(?)’를 보고 있노라면 펜이 지닌 정밀성과 그림이 지니는 깊이가 모두 느껴진다. (85)
지리산에는 옛사람들이 올랐던 8대(八臺)가 있다. 대(臺)는 높은 언덕이라서 전망이 좋은 곳에 해당한다. (87)
8대를 올라야 지리산을 안다. (87)
얼마 전에 호주의 해변에서 발견된 향유고래의 토사물도 용연향의 재료이다. 무게는 14.75킬로미터이지만, 가격은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무려 7억 원이 넘는다. 금값보다도 비싼 엄청난 가격이다. (89)
필자는 자단으로 만든 목가구느 여러 차례 구경했지만, 화류로만 만든 제대로 된 화류장은 그동안 눈으로 보지 못했다. 그 지적을 받은 뒤 국내에서 화류로 만든 화류장을 주가 가지고 있는지를 추적했다. 수소문 끝에 광주 무등산 자락인 소태실에서 화류목만 사용하여 목가구를 만드는 화류 소목장이 살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만나 보니 조기종(54) 장인이었다. 그는 주로 화류목으로 만든 책상인 화류서안(樺榴書案)을 만들고 있다. (93)
서울에서 일본 관광객이 많이 찾아가는 곳은 서소문의 ‘고려삼계탕’이다. 종로구 체부동에 있는 ‘토속촌’은 노무현 대통령이 다녀갔다고 해서 유명해진 곳이다. (97)
인삼 대신 홍삼을 사용하고, 여기에다 검정색 오골계를 배합한다. 강남 도산공원 입구에 있는 ‘가온’의 조태권 사장이 사용하는 방법이다. (97)
연어는 바다가 가까운 울진과 삼척 등지의 하천에서 많이 잡히지만, 은어는 바다와 멀리 떨어진 내륙 깊숙한 오지에서나 볼 수 있다. 봉화, 영주, 안동이 그런 곳이다. (98)
은어의 특징은 수박 냄새이다. 비린내는 없고 향긋한 수박 냄새가 나기 때문에 민물고기의 여왕으로 대접받는다. (99)
얼마 전에 소설가 윤대녕과 같이 하룻밤 자면서 ‘필독 해소법’에 대하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윤대녕은 바다낚시이다. 바닷바람을 맞으면서 밀물과 썰물의 흐름을 타다 보면 굳어 버린 마음과 몸이 풀린다고 한다. (102)
소설과 황석영. 그는 타고난 강골이라서 여간해서는 필독에 시달리지 않지만, 푸는 방법은 전국을 돌아다니는 것이다. 1980년대 초 신문에다 수년 동안 ‘장길산’을 연재할 때의 일화가 유명하다. 트럭에다가 신문 연재에 필요한 자료를 몽땅 싣고 전국을 이곳저곳 돌아다니면서 원고를 썼다. 한 장소에서만 머물며 쓰면 답답하기도 하고 생각도 잘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문제는 자료였다. 그때만 해도 인터넷이 없을 때라서 자료 뭉치를 트럭에다 직접 싣고 다닐 수밖에 없었다. (102)
최인호의 필독 해소법은 등산이라고 알려져 있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거의 매일 청계산을 오른다. 머리를 많이 쓰는 사람에게는 등산만 한 운동이 없다. 생각을 가지런히 정리해 줄 뿐만 아니라 머리로 올라간 상기증(上氣症)을 내려 주기 때문이다. (103)
한승원은 전남 장흥에서 ‘해산토굴’을 지어 놓고 산다. 해산토굴 앞으로는 고흥반도가 건너다보이는 ‘득량만’이 보이는데, 이 득량만 주위를 돌아다니다 보면 가슴이 풀린다고 한다. 차, 포도주, 생선회가 그의 3대 보양식이다. (103)
의자 생활을 하면 자연히 골반이 좁아진다. 골반이 좁아지면 전립선을 압박하면서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반대로 앉아서 생활하면 자연스럽게 양반 자세나 가부좌로 앉게 된다. 양반 자세나 가부좌를 틀고 앉은 방바닥 생활은 은연중에 골반을 넓혀주는 효과가 있다. 골반이 넓어지면 전립선에 물론 좋다. (106)
“익은 감만 나무에서 떨어지는 게 아니라 땡감도 떨어지는 구나!” (114)
유명한 올갱이 식당하면 충북 옥천이 에 있다. 옥천은 근처의 무주, 보은, 영동의 일급수에서 채취한 올갱이가 집하되는 곳이기도 하다. 옥천 읍내 시장통에 자리 잡은 ‘미락올갱이’ 집이 바로 그곳이다. (117)
옛날 뜻이 높은 선비들은 중년의 나이가 되면 경혈에 대한 공부를 반드시 하였다. (120)
발바닥에는 혈(穴)이 하나 있다. ‘湧泉穴용천혈’이 그것이다. ‘샘물이 솟는 구멍’이란 뜻이다. 위치는 발바닥을 가로로 삼등분에서 3분의 1이 되는 지점의 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다. 용천혈을 자극하면 등 뒤의 신장을 자극하게 되고, 신장에 잠재되어 있는 선천지기(先天之氣)가 생식기 쪽으로 이동한다. 양기가 강화되는 것이다. (121)
신랑의 첫날밤에 대비해서 양기를 강화시켜 주는 의례가 바로 발바닥에 있는 용천혈을 자극하는 것이었다. 그래야 양기가 샘처럼 솟을 게 아닌가. (121)
메밀은 한자로 ‘교맥(喬麥)’이라고 한다. 열기를 식히고 풍증에 효과가 있는 식품이다. 메밀의 잎과 꽃에서는 혈압 강하제인 루틴을 추출한다고 알려져 있다. (123)
다녀간 목포를 출입하면서 목포의 별미(別味)를 정리해 보니 3가지로 압축된다. 홍어, 세발낙지, 민어이다. (124)
목포 사람들은 여름 생선회로 민어를 최고로 친다. 다른 생선들은 여름에 날것으로 먹기가 부담스럽지만, 민어만큼은 날씨가 더워지는 육칠월에도 배탈 걱정을 하지 않고 먹을 수 있는 선어(鮮魚)로 여긴다. (125)
전국의 유명한 보신탕집을 찾아다니다 보니 눈에 띄는 곳이 88고속도로 담양 톨게이트 근처에 있는 ‘무정식당’이다. 광주 일대의 미식가들은 다 알고 있는 집이다. (129)
요가에서 비중 있게 생각하는 자세가 머리서기 자세이다. 정수리를 바닥에 대고, 두 팔로 뒤통수를 감싸며, 두 다리는 하늘을 향해 똑바로 쳐드는 자세이다. 이렇게 매일 하면 환정보뇌(還精補腦)가 된다. 아래로 누설되는 정액이 되돌아와 뇌를 보강해 줌으로써 장수를 하게 만든다고 한다. (135)
지천태의 철리(哲理)를 일깨워 준 석명은 제주도에 산다. 고수(高手)가 사는 곳에는 사람이 몰리기 마련이다. 많은 요가 사범들이 제주도를 다녀간다. 작년에는 국제요가아사나대회에서 5연패를 한 인도의 챔피언인 매헤쉬 찬드고얄도 석명을 만나러 제주도에 왔었다고 한다. (135)
그러다가 가을이 무르익으면 다른 나무 잎사귀들은 다 떨어졌는데, 유일하게 붉은색의 감만 저 높은 가지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독야홍홍(獨也紅紅)’이다. (136)
청도반시가 최근에 더 유명해지게 된 계기는 감을 숙성시켜 와인을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감 와인’이다. 색깔은 화이트 와인이면서 맛은 레드 와인의 떫은맛이 난다. 말하자면 화이트 와인과 레드 와인을 합쳐 놓은 묘한 맛이다. (137)
어떻게 하면 천하 3대 명주를 한번 맛보고 죽을 것인가를 고민(?)하던 와중에, 민속주 전문가인 허시명(47) 선생으로부터 ‘백화주’를 만드는 집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게 되었다. 김제에 있는 경주 김씨 김수연(82) 옹 집안이다. 100가지 꽃을 따서 만드는 백화주는 이 집안에서 13대째 내려오는 가양주(家釀酒)이다. (144)
최근 한옥과 관련된 책들이 많이 나오고 있는 추세도 한국인들이 아파트에 어느 정도 신물이 났다는 증표가 아닌가 싶다. 그러한 책 중의 하나인 《한옥에 살어리랏다》를 보니까, 한옥에 대한 문화인들의 갈증을 해소해 주고 있다. (146)
40년 가깝게 돌을 연구한 ‘돌 박사’ 오윤성(71) 선생은 화강암보다 한수 위의 돌이 맥반석이라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맥반석은 약 40여 종의 광물질이 포함된 ‘약돌’이라고 한다. (149)
섬진강은 ‘정관수술’을 하지 않은 강이다. 섬진강에는 하굿둑이 없다는 말이다. 낙동강, 영산강, 금강은 하굿둑이 막혀 있다. 하굿둑이 막혀 있으면 바닷물이 강으로 들락거리지를 못한다. 바닷물이 들락거려야 살아 있는 강이다. 민물과 바닷물이 교차해야 다양한 고기들이 서식한다. 둑을 막아 놓으면 남자에게 정관수술을 한 것과 같아서 생명의 씨를 뿌리지 못한다. 섬진강은 하굿둑이 없기 때문에 고기들이 많이 올라온다. (151)
경상도를 돌아다녀 보니까 진주와 더불어 음식 좋은 곳이 바로 통영이다. 통영 요리의 주특기는 바닷가에서 나오는 해물 요리이다. (155)
다실에 관심이 많아서 다실을 가지고 있는 집들을 찾아 전국을 다닌 적이 있다. 그중에서 인상적인 곳이 제주대학교 현해남(52) 교수의 집안에 있는 다실이다. 제주 지내에서 좀 벗어난 한라산 자락에 집이 위치하고 있어서 우선 전망이 좋다. 7평 정도의 다실은 벽이 통유리로 되어 있어 멀리 바다가 보인다. (158)
세도나에 가보니 미국 사람들은 지자기의 소용돌이 현상을 ‘보텍스(Vortex)’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었다. 보텍스에 노출되면 건강해지고 영성이 개발된다는 주장이다. (161)
고려시대부터 손꼽혔던 우리나라의 유명한 옻나무 생산지는 3군데로 알려져 있다. 이북의 태창, 강원도의 원주, 그리고 함양의 마천이다. 이 3군데는 ‘옻칠’로 유명한 지역이기도 하다. (162)
남원에는 삭녕 최씨(朔寧崔氏)가 유명하다. 세종 때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한 최항(崔恒)의 후손들로서 8명의 한림학사와 5명의 옥당 벼슬을 배출하였다. (168)
현재 남원 고속버스 터미널 근처의 옥계서원에는 둘째 딸이 상품으로 받았던 벼루가 보존되어 있는데 요즘도 축문을 쓸 때는 이 벼루가 사용된다. (169)
소설《혼불》을 쓴 작가 최명희가 이 최씨 집안사람이다. (169)
산청군 생초면 일대는 남한에서 가장 잘생긴 문필봉인 ‘필봉산(筆峰山)’이 보이는 곳이라서 옛날부터 인물이 많이 배출 된 곳으로 유명하다. (172)
경북 안동시 임동면 수곡동에는 아기산(鵝岐山)이 라고 하는 유명한 문필봉이 있다. (177)
전주 교동 일대의 ‘한옥마을’은 그러한 부자들이 살았던 기와집들이 모여 있다. 대략 700여 채의 한옥 중에서 가장 압권은 ‘학인당(學忍堂)’이다. 학인당은 일제시대 호남 판소리의 중심이었다. 당시 내로라하는 명칭들인 임방울, 박녹주, 김연수, 박초월, 김소희와 같은 스타들이 수시로 이 집에 와서 공연을 하였다. (191)
대전 도룡뇽에는 이들 삼세칠효가 공부했던 건물인 민씨 집안의 ‘사교류’가 남아 있다. 요즘도 매년 방학이 되면 후손인 민황기(50)씨가 문중의 청소년들을 데려다 놓고 집안의 가풍과 효를 가르치는 공간으로 사용한다. (193)
대구에 가면 남평 문씨들이 고서들을 모아서 만든 인수문고(仁壽文庫)를 볼 수 있다. 인수문고는 1910년 나라가 망한 뒤에 세워진 문중 문고(門中文庫)를 볼 수 있다. 인수문고는 1910년 나라가 망한 뒤에 세워진 문중 문고(門中文庫)로서, 우리나라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문중 문고이다. (194)
인수문고는 해방 이전부터 전국의 호학(好學)하는 명사들이 즐겨 찾았던 살롱이기도 하였다. 보름이고 한 달이고 간에 편안하게 머무르면서 책을 볼 수 있도록 문씨들이 편의를 제공하였다. 현재에도 고서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소문들 듣고 방문하면, 후손인 문태갑(77) 씨가 내방객을 맞이한다. (195)
호남에서 명문가로 꼽히는 집안은 전남 창평에서 집성촌을 이루며 살아온 ‘창평 고씨(昌平高氏)’들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 고경명과 그의 두 아들인 고종후, 고인후가 모두 순절(殉節)하면서부터이다. (196)
또 다른 후손이었던 고정주(1863~1933)는 의병을 일으키지 않고 다른 길로 갔다. 학교를 세워 인재들을 양성하는 길이었다. 그 학교가 바로 ‘창홍의숙(昌興義塾)’이다. 현재는 창평초등학교로 되어 있다. (196)
양동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지닌 집이 경주 손씨종가인 서백당(書百堂)이다. 무려 540년이라고 하는 역사의 풍상(風霜)을 견뎌 온 집이다. 마당 한쪽에 서 있는 540년 된 향나무가 이 집의 무게감을 잘 보여 준다. ‘서백당’이라는 당호(堂號)는 ‘하루에 참을 인(忍)자를 백 번씩 쓴다’는 듯에서 비롯되었다. 서백당 후손을 그만큼 인내심이 있고, 신중해야 한다는 가르침이 담겨 있는 당호이다. (199)
작은 부자들은 근검절약하여 재산을 모으지만, 큰 부자들은 근검절약하다가도 돈을 써야 할 상황이 발생하면 미련 없이 후하게 쓰는 스타일이다. 예를 들어 10군데에다 돈을 썼다고 한다면, 그중에 1,2군데는 나중에 돌고 돌다가 몇 배 또는 몇 십 배의 이익으로 다시 돌아온다. 돌고 돌아서 결국 자기에게 다시 돌아오는 ‘재물의 스리쿠션 법칙’은 인간의 이성으로 계산하기 어려운 참으로 미묘난측(微妙難側)한 세계이다. 한 달 후에 2,3단계를 거쳐 돌아오는 수도 있지만, 10년이 지난 후에 여덟, 아홉 단계를 거쳐 몇 십 배의 크기로 환원되는 수도 있다. (200)
지난 해 신라 명필 김생(711~791)의 글씨가 8세기의 진품으로 확인되었다. 김생 글씨를 그동안 가보로 보관해 왔던 이화여대 정재서(56)교수가 바로 온양 정씨 집안으로서, 북창 정렴의 15대 종손(從孫)이다. 정 교수가 《山海經산해경》을 번역한 것도 집안 가풍의 영향이다. 정재서 교수의 동생인 정재겸(53)과 정재승(50)도 단학 도인(丹學道人) 권태훈 옹의 제자였으며, 현재 계룡산 상신리에 칩거하고 있다. (203)
좋은 묏자리를 찾으면 그 자리에 쓰기 위해서였다. 10년을 돌아다녔지만 끝에 명당자리를 찾지 못하고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집이란 경남 의령군 정곡면이다. (213)
영남에서 A+급 집안을 꼽는다면 퇴계를 배출한 진성 이씨, 경주 양동에는 우재 손증돈의 월성 손씨, 회재 이언적을 배출한 양동 이씨, 학봉 김성일을 배출한 내앞(川前)의 의성 김씨, 서애 유성룡을 배출한 안동 하회마을의 유씨, 충재 권벌을 봉화 닭실마을의 안동 권씨, 경주의 최 부잣집, 일두 정여창을 배출한 함양 개평마을의 하동 정씨 등이 있다.
충청도에서는 사계 김장생을 배출한 연산의 공산 김씨. 우암 송시열을 배출한 회덕의 은진 송씨, 명재 윤증을 배출한 논산 노성리의 파평 윤씨 집안이다. 호남에서는 하서 김인후를 배출한 장성의 울산 김씨, 제봉 고경명을 배출한 창평의 고씨, 송강 정철의 지실 정씨, 고봉 기대승을 배출한 광주의 기씨, 고산 윤선도를 배출한 해남 윤씨 등을 꼽을 수 있다. (216)
필자가 전국을 돌아다니다 보니까 이러한 3가지 조건을 갖춘 곳이 눈에 띈다. 바로 경남 진주시 지수면(智水面)이다. 방어산(防禦山) 자락이 명 전체를 소쿠리처럼 감싸 안고, 진주로 흐르는 남강이 면 전체를 휘감아 도는 지형이다. (218)
허준이 거처하였던 정자인 ‘지신정’은 지금도 동네 뒤편에 단아하게 보존되어 있다. (219)
영남에서 4대 길지(吉地)를 꼽는다면 다음과 같다. 경주 양동(良洞), 안동의 하회마을, 안동 내앞, 봉화의 닭실이다. (222)
두들마을 입구 오른쪽 바위 벽에는 ‘낙기대(樂飢臺)’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배고픔을 즐기는 대’라는 뜻이다. (224)
계령 이씨는 조선 후기 당쟁사를 놓고 볼 때 가장 탄압을 많이 받았던 집안에 속한다. 그 원인 가운데 하나는 석보면 두들마을 출신인 갈암(葛庵) 이현일(1627~1704)때문이었다. (234)
한 정권을 강하게 비판하는 이문열 씨도 두들마을의 ‘재령 이씨’가 아닌가! (225)
숯 장사 출신인 전덕기와 조선 최고의 양반이던 이회영은 ‘헤이그밀사사건’을 같이 주도한 사이였다. 헤이그밀사사건은 상동교회 설교 단상 밑에 있던 20평 규모의 지하실에서 모의된 사건이었다. 아쉽게도 전덕기는 ‘105인사건’으로 인한 고문 후유증으로 1914년에 일직 죽었다. 그는 이승만과는 을해(乙亥)생 동갑이었고, 김구보다 한 살 위였다. 만약 그가 살아 있었더라면 광복 후에 김구와 이승만의 대립도 중간에서 조절될 수 있었다고 보는 시각이 많다. 광복절이 되면 생각나는 인물이다. (231)
설치미술가 전수천(60). 그는 지난 2005년 가을, 흰색 천으로 15량(440미터) 길이의 열차 전체를 감싸고 미국 대륙을 동에서 서로 횡단한 바 있다. 뉴욕에서 로스앤젤레스까지 5,450킬로미터, 약 1만 4,000리의 거리에다 7박 8일의 일정이었다. ‘움직이는 그림(Moving Drawing)’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달리는 설치미술행사였다. 미국인들도 감히 생각해 보지 못한 뜻 깊은 행사를 한국 사람이 시도한 것이다. (236)
삼마디 홀에는 라즈니쉬가 남긴 유언이 영어로 비석에 새겨져 있다. ‘I was never born. I never died. I just visited this world from 1931 to 1990.’ 번역하면 이렇다. ‘나는 결코 태어난 적도 없고, 나는 결코 죽는 적도 없다. 나는 단지 이 세상을 방문했을 뿐이다. 1931년에서 1990년까지.’ (240)
배병우는 20년 넘게 소나무 사진만 찍어 온 사람이다. 그가 처음 소나무에 눈뜨게 된 계기는 1985년 동해안의 낙산사(洛山寺)에 들르면서부터였다고 한다. (244)
이번에 소더비 경매에서 팔린 사진도 신라 55대 경애왕(924~927)의 능 옆 도리솔을 찍은 것이라고 한다. 포석정을 지나면 나타나는 왕릉이 바로 경애왕릉이다. (245)
양익 스님은 종인 스님, 허주 스님과 함께 우리나라 3대 무술승(武術僧)으로 꼽히던 인물이다. (246)
양익 스님의 알려진 제자는 경주 골굴사의 적운, 서울 호압사의 원욱, 불무도(佛武道)를 보급하는 안도, 보령 백운사의 법찬 김해 모은암의 정산 스님 등이 있다. (250)
머리가 샤프한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덕이 부족하거나 이기적인 경우가 많다. 끊고 맺음이 너무 분명해서 때로는 쌀쌀맞기도 하다. 그래서 흔히 머리 좋은 사람들이 복이 부족한 사태가 발생한다. (253)
의기는 의로운 일을 하고 간 기생이다. 진주성에서 왜장 게아무라를 껴안고 남강에 투신한 논개(論介)와 평양성에서 김경서(1564~1624) 장군과 협력해 왜장의 목을 벤 계월향(桂月香)을 꼽을 수 있다. 논개와 계월향은 조선 여인의 충절(忠節)을 상징한다. (267)
천민에 속했던 기생의 초상화가 남아 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사대부들이 계월향의 충절을 그만큼 높이 평가했다는 증거이다. (267)
국내 정치권에서 ‘장자방’이라고 불리는 인물은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장을 지낸 윤여준(68) 전 의원이다. (270)
윤자방의 부친인 윤석오(1912~1980)의 경력도 눈여겨볼 만하다. 만석꾼의 아들로 태어나 벽초 홍명희와 위당 정인보 분하에서 수학하다가, 고하 송진우의 추천으로 돈암장에 들어가 이승만 대통령의 인사 담당 비서를 맡았으며, 1948년 정부 수립 당시에 정부 인사를 총괄하였다. 윤자방의 지인지감(知人之監) 능력은 부친으로부터 훈도받은 바다 크다. (271)
지난 20년간 방외지사들을 만나기 위하여 산골짜기와 시골동네를 돌아다니면서 ‘한국에서 이 분야를 필자처럼 훑고 돌아다닌 사람은 없을 것이다’는 자만심을 품었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예용해(1929~1995)선생을 알게 되면서 그 자만심이 확 꺾였다. 알고 보니 예 선생은 필자보다 수십 년 앞서서 전국을 훑고 다닌 이 바닥의 대선배였다. (272)
예용해는 한국 민속 공예의 대부였다. 그는 불과 34세 때인 1963년에 《인간문화재》라는 책을 썼다. 지금부터 44년 전이다. 표지에다가 손으로 일일이 삼베를 붙인 호화 장정이다. 값싸게 만들지 않았다. 그때 벌써 장인들이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가를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인간문화재’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정립한 인물이 바로 예용해이다. (273)
그런가 하면 국립민속박물관의 창설에도 선생이 발 벗고 나섰고, 낙안읍성(樂安邑城)의 문화재 지정에도 예 선생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273)
미국 워싱턴의 스미소니언 박물관에는 최태진 장인이 만든 가야금이 지난 1982년부터 전시되어 있다. 용인 민속촌 앞에 위치한 그의 작업실을 가보니 담벼락과 지붕 위에 온통 판자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다. 오동나무 판자들이다. (274)
최태진 씨는 60대 후반임에도 얼굴이 훤하다. 55년동안 가야금을 만들면서 세상 근심을 모두 잊은 얼굴 표정이다. 입신의 경지에 오른 장인의 얼굴은 이런 모습인가! (275)
내가 만나 본 기업가들 중에서 교보문고를 창립한 대산(大山) 신용호(1917~2003)도 두 토끼를 잡는 판단을 내린 사람이다. 신용호는 가정 형편이 어려워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하였다. 독학이 그의 학력의 전부였다. 오로지 책이 그의 선생이었다. (279)
조용헌의 소설2- 조용헌
북쪽에는 높이 1,192미터의 팔공산(八空山)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고, 남쪽에도 높이 1,084미터의 비슬산(琵瑟山)이 포진하고 있다. 높이 1,000미터가 넘는 산은 고산(高山)에 해당한다. 더군다나 팔공산이나 비슬산과 같은 뾰족하게 생긴 바위산은 풍수에서 ‘화체형(火體形)’으로 진단한다. 화기가 많은 산이라는 뜻이다. 동서쪽에서도 역시 산이 가로막고 있다. 한국 대도시 가운데 대구처럼 1,000미터급의 높은 바위산이 둘러싸고 있는 도시는 없다. 대구가 유일하다. (16)
북한산의 인수봉, 진안의 마이산과 함께 희양산은 우리나라 ‘3대 대머리 산’의 하나이다. 철모처럼 생겼다는 말이다. (29)
전남 장성에 사는 변동해(53). 그는 군청에 근무하는 평범한 공무원 이었지만 평소부터 가슴에 품어왔던 연하벽을 누를 수 없어서, 지난 1999년에 장성의 축령산 자락에다가 ‘세심원(洗心院)’이라고 이름붙인 황토 집을 지었다. (35)
이런 조건의 지명을 갖춘 곳 중의 하나가 강원도 홍천군 공작산(孔雀山) 일대이다. 이 일대에는 동굴약수, 샘골, 옥수암골이라는 지명이 있다. 뿐만 아니라 공작산에서 내려오는 산봉우리 하나는 이름부터가 ‘약물산’이다. (36)
전북 고창의 소요산(消搖山)은 바위 속에 유황(硫黃) 성분까지 들어 있어서 화기가 더 강하게 느껴진다. 유황 성분이 있는 바위산은 지혜를 개발시키는데 최고의 산이다. 화산은 불교의 고승이나 기도객들이 선호한다. (39)
‘금산(金山)’은 모양이 바가지나 철모처럼 둥그런 산이다. 경기도 양평에 있는 칠읍산(七邑山)이 필자에게는 인상 깊은 금산이다. (39)
말티재 닿기 전에 저수지가 있고, 이 저수지 옆을 보은 사람들은 ‘대궐 터’ 라고 부른다. 그 이유는 세조가 데리고 온 500명의 수행원들이 여기에서 묵었기 때문이다. 그 유명한 ‘정이품송’ 도 세조가 법주사의 복천암을 찾아오던 길목에 서 있던 것이었다. (43)
강원용 목사의 자서전《빈들에서》(전 3권)를 읽어보면 횡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강 목사의 부친은 평소 풍수도참설을 신봉한 나머지, 해방 전에 고향인 함경도를 떠나 강원도 횡성으로 전 가족을 데리고 이사를 했다. (48)
조선시대 풍수가들이 영남과 호남의 수세(水勢)를 논하면서 ‘영남은 낙동강 하나로 물줄기가 모아지니까 여론이 통합되고, 호남은 금강․만경강․동진강․영산강으로 강줄기가 분산되어서 여론이 나눠진다’고 진단한 것이 바로 그 같은 논리에서 나왔다. (51)
술, 담배를 많이 하고 감정의 기복이 심한 남자의 정액은 색깔이 누리끼리하게 탁하다. 막걸리 색깔처럼 틉틉하다. 반대로 담백한 생활을 한 사람은 물처럼 맑다. 정액 색깔을 보면 심신의 건강을 비롯해 생활 상태가 그대로 나타난다. (65)
인생을 살면서 건곤일척(乾坤一擲)의 승부를 걸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해서는 그 사람의 타고난 기가 어느 정도인가에 따라 결과가 좌우된다. 합궁 간격이 짧으면 비례해서 기가 약한 자손이 태어난다. (66)
우리나라에서 대표적인 북향집이 충남 아산의 설아산(雪峨山)자락에 있는 ‘맹씨 행단’이다. 조선 초기 명재상이었던 맹사성(1360~1438)대감의 집이다. 이 집은 고려 말에 건축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특이하게도 북쪽을 향하고 있다고 해서 인구에 회자됐다. (70)
또 하나 유명한 북향집이 전북 고창에 있는 인촌 김성수 생가이다. 이 집도 북쪽을 향하고 있다. 집터 앞으로는 바닷물이 보인다. (70)
대구는 기운이 뭉친 도시이다. ‘북팔공(北八公), 남비슬(南琵瑟)’의 산세가 큰 언덕을 형성하고 있다. 북쪽으로는 팔공산이, 남쪽으로는 비슬산이 둘러싸고 있다. 세계의 여러 대도시를 가 보았지만, 대구처럼 인구 250만에 달하는 대도시를 해발 1,000미터급의 아름다운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경우는 보지 못했다. (72)
풍수가의 입장에서 보면 ‘비슬산’이라는 명칭도 매우 음악적(?)이다. 비(琵)는 고대악기인 ‘비파’를 뜻하고, 슬(瑟)도 ‘큰 거문고’를 뜻한다. 산 이름만을 가지고 분석한다면 비슬산은 비파와 거문고가 숨겨져 있는 산임을 추측할 수 있다. 그렇다면 비파와 거문고는 비슬산의 어디에 숨겨져 있단 말인가? 필자가 보기에 거문고는 폐사지인 대견사(大見寺) 터 일대에 있다. (73)
요즘 여수가 2012년 세계박람회 후보지로 주목받고 있다. ‘빛나는 물’이 일렁거리는 곳에서는 세계인이 모여 진귀한 물건들을 박람(博覽)할 만하다. 듣자 하니 삼성의 이건희 회장도 여수에 땅을 사 놓았다고 한다. 소라면 사곡리 궁향마을 일대의 2만 5,000평이다. 이곳은 저녁에 지는 햇빛이 일품인 지점이다. 부동산에 대해서 대단한 감각을 가지고 있다는 통일그룹은 이 회장보다 한발 앞서 여수에 300만 평의 땅을 사 두었다. 화양면 장수리 일대이다. 이곳에서는 고흥의 외나로도가 절경으로 바라다보인다. (75)
아들에게는 어머니의 영향이 절대적이다. 딸은 아버지를 닯는 수가 많고, 아들은 어머니를 닮는 수가 많다. 물론 100퍼센트 그렇다는 것이 아니고 경향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그래서 ‘며느리 잘못들이면 아들농사 망친다’는 말도 나왔다. (109)
그의 저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더불어 숲》, 《강의》등을 읽다 보면 인간과 세계에 대한 통찰과 달관이 행간마다 배어있다. 내가 보기에 신 선생은 20년 감옥 생활을 하면서 완전히 도인(道人)이 되어 세상에 나온 것 같다. 언뜻 보면 상극(相剋)처럼 보이는 마르크시즘과 동양 고전을 서로 회통(會通)시키는 ‘화쟁지도(和諍之道)’를 닦았다고나 할까. 동양의 여러 고전을 해석한 《강의》라는 책을 읽어보면, 이 양반이 《주역》에 대해서도 깊은 내공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따지고 보면 《주역》이야말로 동양의 오래된 사회변혁 이론이 아니던가! (118)
감나무 꼭대기에 감이 하나만 달랑 남아 있고 나머지 가지에는 다 떨어진 상태와 같다. 하나 남은 감은 절대로 따 먹으면 안 된다. 잘 보존해서 내년에 종자로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군자(君子)는 따 먹지 않고 보존하지만, 소인(小人)은 이것마저 따먹어 버려서 후일을 기약하지 못한다. (119)
난리가 났을 때 어디로 피란을 가야 살 수 있는지에 대한 대안이 바로 십승지이다. 봉화 춘양 일대, 상주 우복동, 풍기 차암 금계촌, 합천 가야산 만수동 일대, 무주의 무풍, 부안 변산의 호암, 남원의 운봉 등이 십승지로 꼽히던 곳이었다. (123)
바닷가의 멸치 어장에는 공중에 갈매기가 모여들 듯이. 갈매기가 모여들기 시작하면 바다 속에 멸치가 많이 모여 있다는 징표이다. 여기서 갈매기는 여자이고, 멸치는 재물이다. (128)
특히 복이 없는 여자와 술을 먹은 상태에서 교접을 자주 하면 상대방 여자의 좋지 않은 업(嶪, karma)이 들어오기 때문에 자신의 복이 그만큼 감소되기 마련이다. (129)
고천문학(古天文學) 전문의 천문가인 서울교대의 이용복(李瑢馥)교수에 의하면 아랍의 천문학은 그리스와 바빌로니아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137)
술사가 미래 예측(未來豫測)을 위해 동원하는 방법은 크게 3가지로 압축된다. 첫째는 다양한 정보 수집이다. (138)
둘째는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원리를 알아야 한다. (139)
셋째는 직관력이다. 직관력은 머리가 맑고 감각이 예민해져야 나온다. 술, 담배와 고기, 불규칙한 생활 습관에서는 직관력이 나올 수 없다. (139)
국내에서는 하금곡(河錦谷) 선생이 《맹자》에 정통하다고 알려져 있다. 금곡 선생이 《맹자》를 가르치는 동유학당(東儒學堂)에는 주로 4,50대의 중년 식자층들이 와서 고전 강의를 듣는다. (144)
누구에게나 인생에서 두세 번은 대운이 찾아온다. 중요한 것은 본인의 준비이다. 여름 장마철이 되면 소나기가 내리기 마련이고 이때 어느 정도의 그릇을 준비하느냐에 따라 각기 다른 용량의 빗물을 받는다. 찻잔을 준비한 사람은 찻잔만큼의 빗물(운)을 받고, 드럼통을 준비한 사람은 드럼통 크기만큼 받을 수 있다. (144)
금곡 선생에 의하면 운을 받는 방법은 이렇다. 첫째, 말이 적어야 한다. 말이 많으면 들어오는 대운을 받지 못한다. (145)
둘째, 수식어가 적어야 한다. 수식어가 많으면 말이 길어진다. 결론만 간단하게 말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145)
셋째, 찰색(察色)이다. 얼굴 색깔이 좋아야 운을 받는다. 화를 많이 내거나 걱정이 있거나 욕심이 많으면 마음 상태가 얼굴 색깔에 반영된다. (145)
넷째는 현관에 들어갈 때 신발을 가지런하게 벗어놓아야 한다. 신발 벗어 놓는 상태를 보면 그 사람의 평소 마음가짐이나 수신(修身)상태를 파악할 수 있다. (145)
미국 성인 잡지 <플레이보이>모델을 했던 여자들 가운데 50세를 넘긴 경우가 드물다는 외신 보도가 있었다. 마릴린 먼로는 1962년 36세에 죽었고, 제인 맨스필드는 34세에 교통사고로 죽었고, 페이지 영은 약물 과다 복용으로 30세에 갔다. 이브 마이어는 1977년 비행기 추락 사고로 46세에 죽었고, 앨런 루이스 말리고는 40세에 살해됐다. 얼마 전에는 안나 니콜 스미스가 39세에 갔다. (152)
깊은 공부에 들어가려면 성욕을 컨트롤해야 하는데, 인간은 이 성욕 앞에서 무너지기 때문에 깊은 공부가 어렵다는 한탄이기도 하다. (234)
그렇다면 성욕을 조절하면서 명철보신(明哲保身)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육식을 줄이고 매일 거꾸로 물구나무서기를 하거나 요가의 쟁기 자세를 취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쟁기 자세나 물구나무기를 하면 하단전의 정액이 머리 쪽으로 다시 돌아가서 환정보뇌(還精補腦)가 된다. 머리가 시원해지면서 성욕이 컨트롤 된다고 한다. (235)
신독은 ‘홀로 있을 때 삼간다’는 의미인데, 《중용(中庸)》의 핵심 사상이다. 다른 사람이 보거나 보지 않거나 항상 똑같은 마음가짐을 한다는 게 바로 신독이다. (236)
중국번이 전쟁터에서 자식들에게 보낸 편지가 있다. 이 편지 묶음을 《증국번가서(曾國藩家書)》라고 부른다. (237)
인간의 욕망을 인수분해(因數分解)하여 보면 ‘재색명리(財色名利)’가 된다. 돈과 섹스 그리고 명예욕이다. (240)
조선시대 사제 관계 가운데 인구에 회자되었던 사례는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1548~1631)과 우암(尤庵) 송시열(宋詩烈, 1607~1689)의 관계이다. (242)
‘관수유술(觀水有術) 필관기란(必觀其瀾).’ 물을 바라보는 데는 방법이 있으니, 반드시 그 물결치는 지점을 보아야 한다. 이것은 《맹자(孟子)》에 나오는 말이다. (246)
‘필관기란’을 줄이면 ‘관란(觀瀾)’이 된다. 경북 경산군에는 ‘관란서원(觀瀾書院)이 있다.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인 원호(元昊)의 시문집이 《관란유고(觀瀾遺稿)》이고, 조선 중기 이승증(李承曾)의 시문집이 《관란문집(觀瀾文集)》이고, 조선 후기 고회(高晦)의 문집이 《관란재유고(觀瀾齋遺稿)》이다. (247)
누구에게나 궁은 찾아온다. 궁할 때는 고독(孤獨)하다. 인기 떨어지고 돈 떨어지고 권력 떨어지면 사람이 찾아오지 않는다. 겪어 본 사람들에 의하면 그 고독을 견디기가 그렇게 어렵다고 한다. (251)
원래 ‘방화수류’라는 문구는 북송의 유학자인 정명도의 ‘춘일우성(春日偶成)’이란 칠언절구에서 유래했다. ‘운담풍경근오천(雲淡風輕近午天) 방화수류과전천(訪花隋柳過前川) 방인불식여심락(傍人不識余心樂) 장위투한학소년(將渭偸閑學少年)’.‘구름은 맑고 바람은 가벼운 한낮에 꽃을 찾고 버들을 따라 시냇물을 건너간다. 사람들은 나의 즐거운 마음을 모르고, 한가함을 탐내 소년처럼 논다고 말한다’는 뜻이다. (252)
최 부잣집에서 자식들을 교육시킬 때 강조하였던 내용이 바로6연(六然)이다. ‘6가지를 그래야 한다’는 가훈이다. 자처초연(自處超然, 사람을 대할 때는 평화로운 마음으로 만나라), 대인애연(對人靄然, 사람을 대할 때는 평화로운 마음으로 만나라) 무사징연(無事澄然, 일이 없을 때는 맑고 고요하라), 유사감연(有事敢然, 일이 있을때는 과감하라), 득의담연(得意淡然, 뜻을 얻었을 때도 담담하라), 실의태연(失意泰然, 실패했을 때도 태연하라)이 그것들이다. (256)
사실 이 6가지는 어느 한 가지도 만만한 경지가 아니다. 그래서 역대 최 부잣집 자식들은 매일 아침에 일어나면 먹을 갈아 붓으로 6연을 쓰는 훈련을 받았다. (257)
얼마 전 두바이의 지도자 셰이크 모하메드(58)가 한국에 다녀갔다. 그는 불모지인 모래땅에다가 ‘중동의 뉴욕’을 세웠다. (259) “혹시 어르신의 좌우명이 있으십니까?”하고 물으니까 “삼지(三知)를 알아야 하네! 지족(知足), 지분(知分), 지지(知止)가 그것이야!”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족함을 알고, 자기의 분수를 알고, 그칠 줄을 아는 것’이 바로 변 선생의 좌우명이었던 것이다. (260)
아궁이에서 불을 때다 보니까 덤으로 장작을 태우는 묘리를 깨달았다. (271)
첫째, 장작은 도끼 맛을 본 놈이 잘 탄다. 원목보다는 도끼로 한번 손을 봐야 잘 탄다. 사람도 엄한 스승과 상관 밑에서 한번 훈도를 받을 필요가 있다. 둘째, 혼자서는 안 탄다. 장작은 여러 개가 포개져야 잘 탄다. 인간도 서로 얽히면서 성숙된다. 셋째, 젊은 놈이 아래서 받쳐야 한다. 아궁이 밑바닥에 젊은 장작을 깔아야 불이 오래 지속된다. 늙은 장작이 밑에 있으면 불이 쉽게 사그라져 버린다. 넷째, 아궁이에 깊이 넣으면 안 된다. 앞에서부터 달궈야 한다. 서두르지 말고 서서히 달궈야 함을 의미한다. 다섯째, 너무 많이 뒤적거리면 안 된다. 뒤적거리면 불이 중간에 꺼져 버리는 수가 있다. 어느 정도까지는 지켜봐야 하는 것이다. (2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