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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과 닐 암스트롱 |
1969년 인류 최초로 달에 착륙한 미국의 비행사 닐 암스트롱이 지난달 25일(현지시간) 세상을 떠났다는 보도를 보았습니다. 향년 82세이니 아직 여생이 많이 남아있을 법한데 별세했다니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어마지 않습니다. 그의 죽음에 애도사를 바친 오바마 대통령은 “닐 암스트롱은 미국 영웅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인물이다. 닐이 처음으로 달 표면에 발을 내디뎠을 때 결코 잊을 수 없는 인류 성취의 순간을 만들었다”고 고인을 기렸다는 보도도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1969년 7월 20일 ‘고요의 바다’에 착륙하는데 성공한 당시 38세의 닐은 “인간에겐 작은 발걸음이지만, 인류에겐 위대한 도약”이라는 명언을 남겼다는 기사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갔습니다. 살아생전에도 과묵하고, 차분한 성격의 닐은 만인의 존경을 받았던 전문 우주항공사였으며, 생애의 대부분을 우주항공사라는 전문직의 업무에만 몰두하면서 외도를 모르면서 살았다는 칭찬을 받기도 했습니다. ‘가장 위대한 미국의 영웅’이라는 명성 때문에 정치계에 끌어드리려는 큰 유혹이 있었지만, 일체를 거부하고 전공분야의 일에만 정력을 기울였다는 점이, 사후에 더욱 전 세계인의 흠앙을 받는 이유의 하나라고 생각되기도 합니다. 조금만 유명세를 타도 금방 정계에 뛰어들어 권력과 명예를 누리려는 세속적인 인간들과 다른 그의 정신이 정말로 아름답고 멋졌습니다. 다산 정약용을 닐과 비교하려는 생각이 듭니다. 다산은 애초에 과거공부에 열중하여 문과에 합격하면 관계로 뛰어들어, 권력과 힘을 얻어 세상을 한번 개혁해보려는 욕망을 지녔습니다. 그래서 28세에 문과에 급제하자 바로 벼슬길에 올라 학자이자 개혁군주이던 정조를 보필하여 나라를 통째로 뜯어고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다산의 뜻이 펼치게 돌아가지 못하여, 끝내는 고관대작에 오르지도 못하고 모함하고 질투하는 반대파들의 참소에 걸려, 감옥에 들어가 국문을 당하고, 끝내는 변방으로 유배되어 18년의 긴긴 세월을 모진 고난 속에서 보내야 했습니다. 세상은 돌고 돌아 57세의 다산은 귀양살이에서 풀려나 500여 권에 이르는 저술을 안고 고향으로 돌아 왔습니다. 그해가 1818년인데 1819년 겨울, 나라에서 다산의 전문지식을 활용하려고 벼슬에 오르는 길을 열려고 했으나 반대파의 저지로 무산되었고, 1823년 9월28일 62세의 다산에게 다시 승지(承旨)벼슬의 후보로 낙점되었으나, 또 그 반대파의 저지로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자신의 의지와 아무런 관계없이 그의 재등용이 논의되었으나, 그는 끝내 벼슬에 오를 길이 막히고 말았습니다. 타의에 의한 벼슬길의 막힘, 그래서 다산은 더 유명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벼슬할 마음을 단절하고 학문에 생애를 걸었기 때문입니다. 이래서 다산은 학자와 사상가로서의 독실한 정신으로 75세의 생애를 마쳤습니다. 그런 결과로 고관대작을 지내지 못했지만, 오히려 다산은 그의 학문적 수준과 사상의 위대함 때문에 훨씬 더 세상에서 추앙받는 현자(賢者)의 위상을 확보하였습니다. 미국의 국회의원이나 주지사를 지내지 않은 닐, 그런 고관대작보다는 전문 우주항공사의 이름이 더 빛나는 점을 생각하면 외도에 맛을 들인 오늘의 지식인들이 한번쯤 생각할 일이라 여겨집니다. 박석무 드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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