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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시학 2018년 가을호>
시인/ 오세영
멀리 있어 아름다운, 멀리 있어 슬퍼지는,
멀리 있어 응답 없는 그것이 하늘의 별.
세상엔 실성한 자도 있네, 별에게도 편질 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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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시는 어렵다/ 박구경
1.
멸치 몇 마리로 국물을 내
국수를 말아 먹는다
국수 속엔 국수를 닮은 이야기가 있고
그 사람들이 있고
그 사람들의 그 사람들이 거듭 얽혀 있다
국수,
짧고 긴 생명의 이야기들처럼
2.
쓸수록 어렵고 힘든
시의 본령
자르고 토막 내고
겹쳐진 의미와 말들을 거둬내고
너무 짧아져
여백의 미에 낙서하고픈
짤막한 또는 한줌
뭘 하자고 처음 생각했던가?
촌철살인
나이 먹어가며 하나씩 버리고
정리하는 것과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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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과 장물아비/ 김영순
봄이면 따라비오름
초여름엔 사려니숲
유채꽃 종낭꽃 찾아 벌통도 따라 간다
이사에 이골난 차를 끌고 가는 유목의 피
나더러 장물아비라고?
미필적 고의라고?
나는 단지 벌통을 꽃 곁에 놓았을 뿐
꽃 속의 꿀을 훔친 건 저들의 짓 분명하다
벌의 몸을 통과해야 꽃물이 꿀이 되듯
내 가슴을 관통한 저 못된 그리움아
좌판도 흥정도 없이
야매로 팔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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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날의 우주와 사다리와/ 유희경
책을 꽂다 보면
떨어진 소리를 듣게도 된다
돌아보면
떨어진 것은 없고
나는 사다리 위에 있고
지난날은 아득해지고
그것은 밤도 낮도 아니고
아무것도 모르겠어 이제
중얼거리게 된다
책을 꽂다 보면
바닥은 얇아지고
푹, 꺼져버릴 것만 같고
떨어진 것만 같은 것들의
떨어진 소리가 들리지만
떨어진 것은 없다
떨어지지 않은 그것은
그것은 읽은 것도 아니고
읽게 될 것도 아니며
우주도 아니고 그런데도
우주일 것만 같고
사다리 위에서
나는 멀어진 것만 같다
아무것도 모르겠어 이제
이렇게 중얼거리며
나는 다시 책을 꽂는 것이다
책을 꽂다가 꽂을 것이 남지 않으면
아무거라도 하나
떨어뜨려보고 싶은 마음이
사다리보다 높은 곳에서
아슬아슬하게
떨어지지는 않고
떨어진 소리를 내며
나와 멀어지는 것이다
지난날처럼 지난날 우주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아무것도 모르겠어 이제
와 닮은 소리를 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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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아지는 나와 늘어나는 물건들/ 반연희
죄송합니다 나로 가득찬 방이 좁아 당신을 초대하지 못합니다 찻잔이
된 내가 오른쪽 손잡이로 흘러내리는 나를 따릅니다 뜨겁게 타오르다
눌어붙은 나를 지울 수 있을까요 나는 천장에 매달려 눈을 뜨고 잡니다
방 안 가득 내가 환해집니다 꺼졌다 켜지는 일을 반복합니다 그래도 당
신이 오시겠다면 당신을 켜드리겠습니다 나는 끊임없이 흔들리며 시간
을 밀어냅니다 당신을 끄는 법을 아직 배우지 못했습니다 식지 않은 나
는 따뜻하게 앉아 있습니다 구김 없이 빳빳한 나를 만들 수 있을까요 나
를 껴입을 또 다른 내가 줄지어 걸려있습니다 구겨진 어제를 털어서 펴
두었습니다 당신이 정 오시겠다면 나였던 어제를 깔고 오늘의 나를 덮
을 수 있겠죠 멈춰진 말의 두께가 두꺼워집니다 내 발들은 문을 닫고 이
미 걸어온 길을 감췄습니다 버리고 싶은 나도 있지만 나를 버릴 수 있을
까요 당신이 보지 않는 곳에 못난 나를 숨겨둡니다 나를 숨길 또 다른 내
가 늘어나는군요 먼지 속의 나는 그대로 있습니다 나에게도 빛나던 시
절은 있었겠죠 우울해하지 마세요 곧 새로운 내가 배달 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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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도송(悟道頌)- 파도/ 무산 조오현
밤늦도록 책을 읽다가 밤하늘을 바라보다가
먼 바다 울음소리를 홀로 듣노라면
천경(天經)그 만론(萬論)이 모두 바람에 이는 파도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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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緣)- 헤어짐도 인연이다/ 김제현
오다가다 옷깃은 공연히 스치며 돌부리에
발부리는 공연히 채이나 더구나 비오는 날 우산은
아무나 같이 쓰랴
미워하지 마라 미워하지 마라
악연도 인연이거들
풀지 마라 거두지 마라
인연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널 만나고 헤어지고 하면서
예까지 왔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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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린 사랑/ 강현주
거미줄에 걸린
노란 낙엽을 본다
사랑이 가듯 소리 없이
떠나는 중이라고 한다
추락을 결심하고 떨어지려는 순간
그가 백허그를 하더란다
앞이 캄캄하더란다
떨켜 같은 손 꼭 붙잡혀 입맞춤 할 때
잘박잘박 햇살이 불러준 노래
떨어지는 것들은 낮아지는 것이니
사랑이 저물 때 마지막은 없는 것
마지막은 참말 없는 것
시간을 붙잡히고 생각을 멈춘 찰나
꿈꾸고 싶었을 거야 한 번이라도
얼굴 부비며 두근거리고 싶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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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 신동혁
연필로 그린 공중은 아름다워요
유리공장과 슬픈 양떼
지붕만 남은 목소리
이런 것들을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커튼이 걷히고
내가 아직 구름이었을 때
새들이 부딪히는 나의 창문,
연필은 괜찮아요
그러니 울지 않아요
내가 빛나는 거미줄이었을 때
공중은 연필만큼 부드러워서
날마다 무도회가 열렸어요
내가 그린 얼굴 위로
먼지가 쌓이는 시간
이런 것들을 사랑이라고 믿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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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시학 2019년 봄호>
무안 갯벌/ 김선태
세발낙지, 짱뚱어, 칠게, 석화, 꼬막, 바지락 같은 명사들과
드넓다, 질펀하다, 거무튀튀하다, 말랑하다, 짭조름하다 같은 형용사들과
기어다니다, 뛰놀다, 헤엄치다, 도망치다, 숨바꼭질하다 같은 동사들과
뽈뽈, 팔딱팔딱, 벌벌, 스멀스멀, 숭숭, 꾸물꾸물 같은 부사들이
함께 어울려 한바탕 걸판진 말들의 잔치를 벌이는
그 잔치판에 사람들을 아낌없이 초대하는
바다생명들의 자궁
무안 갯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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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각형에서 원까지/ 이지엽
1. 삼각형
불안한 꿈들이
파편처럼 떠다녔다
스물에서 서른 시절
사랑했다
쓸쓸했다
꽉 쥐면 핏물 배어도
차마 놓을 수 없던 시(詩)
2. 사각형
반듯하게 잘라서
차곡차곡 가지런히
책상과 태극기
방과 집, 빌딩과 거리
엄연한 불혹의 질서가
세상을 지배한다
3. 원
가장 강한 것은
직선이 아니라 원
둥근 것에 수렴된다
여자 지구(地球)
이순(耳順) 하늘
골목길
휘파람소리에
자꾸 목이 마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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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숨소리/ 김금용
어둠이 빽빽하게 들어찬 지하방
수정체를 키우자 빛의 숨소리가 들린다
어둠의 벽이 단단하다지만
천장이 위아래로 통하는 계단에선
깨진 빛의 등살이 어깨를 친다
연필심만한 빛 하나가 길어지다가 짧아진다
바늘구멍만한 원이 되다가도
중심에서 멀어지면
알량미 크기의 빛살이 내 양말에 들러붙는다
마취바늘이 죽음의 밑바닥까지 흘러들 때
깜깜한 눈 속으로 새들어오는 빛의 숨소리
통증을 깨우는 삼각뿔로 고이는 빛
삶 자체가 기적인 줄 몰랐던 어둠 속
가는 빛살 한 줌 주먹에 쥐고
지하 계단을 오른다
하얀 입김 내뿜으며 길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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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성 쌍둥이에 관한 보고서/ 이종섶
오뚝이와 눈사람은 이란성 쌍둥이, 헤어져 살아도 피는 물보다 진해
넘어지고 쓰러져도 우뚝 서는 나날, 오뚝이는 바로바로 일어섰으나 눈사
람은 꼬박 일 년이 걸렸다 생김새는 달라도 유전자는 같아서 누운 몸 다
시 세우는 습성은 사라지지 않았다 어린아이 장난감 취급을 받아도 꿋
꿋하게 제 자리를 지키며 맡은 역할 끝까지 감당하는 생애, 오뚝이와 눈
사람에게는 사람들이 믿고 싶어 하는 희망찬 내일이 있었다 생일이 언
제인지 죽을 날이 언제인지 아무도 모르는 쌍둥이의 비밀, 몸을 일으키
기 전에 마음 먼저 일으킨다는 신념 하나로 견딜 수 있었다 서로 다른 세
상에 놓인 탓에 쓰러뜨리면 일어서고 쓰러뜨리며 또 일어서는 동생 세
우면 쓰러지고 세우면 또 쓰러지는 누이, 살아가는 방식은 다르나 복제
된 DNA는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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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시학 2019년 여름호>
봄눈/ 정끝별
삼월에 눈은 샴페인처럼 솟아
세상 속으로 사라진다
하늘 아래 한 송이 늦눈처럼
땅 위 한 싹 꽃눈처럼
원고지 한 칸 모눈처럼
눈에 두고 온 것이 있어
길을 잃고 종일 눈을 맞았다
눈에 두 이야기가 쓰였다
한 이야기에서 다른 이야기가 돋았다
지는 눈에 피는 눈이 내렸다
시리도록 눈이 부셨다
사월에게 갈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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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소(適所/ 한이나
무작정 떠나는 길도 있다
양수역 연꽃 진 자리 저수지 부근
두물머리 다리 밑
강이 반쯤 얼은 그곳에 고니 떼지어 있을까
어스름 둑길을 걸으면서
적소란 내가 만든 문장 밖의 길임을 알았다
나는 없는 곳에서만 있는 것을 본다
닿을 수 없는 허공의 길로 날아가는 새떼
끌고 온 길을 되감아 언제 돌아가나
뒤늦은 후회로 잔뜩 웅크린 빙판 길
만나지 못하고 돌아가는 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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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군 쌍치면 운북리 운항마을/ 고성만
돌담에 피고 지는
달개비꽃 같은 마을
빨치산이 모종처럼 빼곡했다는 능선 아래
피의 냇물 흘렀다는 골짜기
지팡이 짚은 할아버지 힘들게 차에 오른다
북쪽에서 내려온 구름은 낮게 깔리고
버스는 죽은 사람 이름 기억하듯 느리게
한두 군데 시장 들러
여러 군데 병원 앞에 선다
타고 내릴 승객이
그 할아버지 한 분이라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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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시학 2019년 가을호>
다시, 봄/ 오승철
허랑방탕 봄 한철 꿩 소리 흘려놓고
여름 가을 겨울을 묵언수행 중이다
날더러 푸른 이 허길
또 버티란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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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을 켜는 사람/ 나희덕
심장의 노래를 들어보실래요?
이 가방에는 두근거리는 심장들이 들어 있어요
건기의 심장과 우기의 심장
아침의 심장과 저녁의 심장
두근거리는 것들은 다 노래가 되지요
오늘도 강가에 앉아
심장을 퍼즐처럼 맞추고 있답니다
동맥과 동맥을 연결하면
피가 돌듯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하지요
나는 심장을 켜는 사람
심장을 다해 부른다는 게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지만
통증은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지만
심장이 펄떡일 때마다 달아나는 음들,
웅크린 조약돌들의 깨어남,
몸을 휘돌아나가는 피와 강물,
걸음을 멈추는 구두들,
짤랑거리며 떨어지는 동전들,
사람들 사이로 천천히 지나가는 자전거바퀴,
멀리서 들려오는 북소리와 기적소리,
다리 위에서 노래를 부르는 동안
얼굴은 점점 희미해지고
허공에는 어스름이 검은 소금처럼 녹아내리고
이제 심장들을 담아 돌아가야겠어요
오늘의 심장이 다 마르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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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등/ 신덕룡
안개가 몸을 지워버렸다
몸이 스스로를 품어 안개가 되었다
눈만 남았다
고개를 들지 못하고 공중에 떠 있는
풀려버린 몸을 심지 삼아
가까스로 불 밝히고 있는 눈이다
벌겋게 충혈된 채 길고 긴 밤이 다하도록
다닥다닥 붙어있는 지붕과 좁은 비탈길 따라
다족류의 종족들이 모여 사는 길목을 지키는 중이다
자박자박 들고나는 발소리에
놀란 눈을 치켜뜨거나
아직 돌아오지 않은 식솔들이 있는지
불 꺼진 창문을 기웃거리며
동 트기 전까지 지루한 자리싸움을 하게 될 것이다
크게 뜬 눈으로도 볼 수 없는 곳
바람보다 멀리 날아가 둘러보고도 싶지만
새처럼 가볍게
여기, 떠날 마음은 아니라고 중얼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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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우편함/ 정희경
매미가 자지러지게 하늘로 오르더니
수만 필 말을 몰아 소나기 달려온다
먼 길을 요금별납으로 온 『눈물이 참 싱겁다』*
『컵밥 3000 오디세이아』*는 말 허리에 묶여 있다
웅크린 젊음들이 저벅저벅 걸어 온 날
집 나간 닿소리들의 『혈색이 돌아왔다』*
* 김진숙, 최영효, 임성구 시조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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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워야지/ 곽문연
숫고래는 암고래를 만나기 위해
팔천 키로 심해를 유영한다
그리워야지
왜가리 한 마리
산정호수 위에 내려온 산 그림자 더듬는다
차가운 물에 오래 발을 담그고
환영인 줄 알면서도
그리워야지
날마다 빛으로 다가오는 얼굴
빛 너머 서 있어도 전율로 돋는데
눈을 감아도 눈을 떠도
한 생을 운행할 듯
사무쳐야지
그리워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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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금/ 안은숙
눈금만큼 제자리를 지키는 것들도 없다
어떤 무게가 얹혀도
눈금에서 꿈쩍도 않는 표식
무게쯤은 바르르 떠는 바늘에게나 준다
달력에 숫자들로 있던 눈금엔
요일의 불행이 얹혔다 갔다
날짜들, 굵직한 일들은 눈금 속에서
달을 바꾸곤 했다
몇 백 년을 흐르지 않고 견디는 돌다리의 간격처럼
건널 수 있는 눈금도 있다는 것
빨간 무게가 가득 매달려 있는
늦가을 가지들
자잘한 열매들의 푸른 무게와 붉은
무게의 계측이 끝나면 저절로 떨어지는 눈금들
한여름부터 무게를 재면서 왔다
떨어뜨리는 것도
제 무게를 아는 것들만이 할 수 있는 일
길을 가다 문득 나는 제자리에 멈추어 선다
딛고 있는 눈금을 모르니
내 무게를 모른다
다만 바르르 떨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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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 끝에/ 김선희
비울 것도 없어요
드릴 것도 없어요
풍성했던 상처와
비탄도 지나갔어요
고난도 받을 만큼만
자기가 받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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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바다/ 윤효
간밤 해일이 다녀갔습니다.
바닷가 즐비한 횟집들의 수족관을 부수고 활어들을 모두 바다로 데려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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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시학 2019년 겨울호>
꽃의 시작/ 김현정
판도라 상자가 열리면 폭발이 시작된다
언제나 뇌관을 누른 것은
태양이 아니라 당신의 상상이다
초록은 오늘부터 미친 노래가 되고
취한 새들이 바람의 등에 실려
더 높이 더 멀리 날개를 뻗는다
얼어붙은 이야기가 풀려 나가고
삐걱거리는 의자가 먼지를 털어내면
엉덩이들이 순식간에 달려온다
틈새를 파고 들던 곰팡이들이
배를 까집고 투신 한다
3월의 생살이 터지려는 난장
다시 봄이다
또 다시 당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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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끄러지는 것/ 배경희
종일 비가 내린다 월요일이 흥건하다
발을 놓을 때마다 미끄러진 시간들
자신을 믿을 수 없어 한없이 어두워진다
고개를 들어봐도 너머는 안 보이고
비에 젖은 시간들이 모든 것을 지워도
다음날 햇살이 들면 잎들이 붉어지듯
다 젖은 발자국도 햇빛에 눈을 뜰까
매일의 반복 속 미끄러진 자신 앞에
미래란 두려운 거야 빗물을 이제 이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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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깨끗한 것은 안 보인다/ 임재춘
못 보는 것은 부끄럽다
난 유리를 못 보았다
통유리였는데 테두리만 찾아
열고 안으로 들어가려했다
오랜만에 반갑다고
얼른 카페로 들어가려는 버릇이
내 입술을 부딪치게 했다
투명한 유리에
입술무늬가 찍히니 비로소 보였다
너무 깨끗한 것은 안 보일 수도 있다는 걸 몰랐다
쑥스러움을 던져버리고
안 보이는 것들을 사랑할까
태연하게 안부며 얘기를 풀어놓는 입술이
아프게 부풀어 올랐다
쓸쓸한 기분이 내딛는 발길
가로등이 환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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풋잠/ 홍오선
꽃이 피고 지는 것을
그 꽃이 어찌 알까
한껏 치켜세운
꽃대의 극점 끝에
아무도
눈치 못 채게
한순간이 가는 것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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