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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예화 스크랩 1809.02.12 미국 제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 출생
저스트 포~유 추천 0 조회 189 15.01.14 10:2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1809.02.12  미국 제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 출생

 

 

 

 

 

 

 

 

1862.05.20  홈스테드법 서명 :  http://blog.daum.net/gjkyemovie/11347143

1862.09.22  노예해방 예비선언 :  http://blog.daum.net/gjkyemovie/11350983

1863.01.01  노예해방 효력발동 :  http://blog.daum.net/gjkyemovie/11342901

1863.02.25  국립은행법 서명 :  http://blog.daum.net/gjkyemovie/11344463

1863.10.03  추수감사절 공표 :  http://blog.daum.net/gjkyemovie/11351354

1863.11.19  게티즈버그연설 :  http://blog.daum.net/gjkyemovie/11353634

1865.04.14  피격 :   http://blog.daum.net/gjkyemovie/11345956

1865.04.15  사망 :  http://blog.daum.net/gjkyemovie/11345984

1865.12.18  노예제도 폐지 :  http://blog.daum.net/gjkyemovie/11354680

 

         

 

 링컨 :  http://blog.daum.net/gjkyemovie/11299657

 

 

 

 

 

 

 

 

 

 

 

링컨 탄생 200주년에 읽는 링컨 전기

 

'대통령이 된 통나무집 소년 링컨' 출간

(서울=연합뉴스) 황희경 기자 = 12일 에이브러햄 링컨 전 미국 대통령의 탄생 200주년 맞아 청소년용 링컨 전기인 '대통령이 된 통나무집 소년 링컨'(비룡소 펴냄)이 출간됐다.

전기문으로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아동문학상인 뉴베리상을 세 번이나 수상한 청소년 논픽션 작가 러셀 프리드먼의 1988년 뉴베리상 수상작이다.

1809년 2월12일 가난한 개척자의 아들로 태어나 정규 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지만 독학으로 변호사가 됐고 미국의 16대 대통령이 된 링컨의 삶과 업적이 다양한 사진 자료와 함께 소개된다.

노예제도에 반대하기는 했지만, 남북전쟁 초기까지 그다지 노예제도 폐지에 적극적이지 않았던 링컨의 모습과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라는 구절로 유명한 1863년 게티즈버그 연설이 당시에는 별로 주목받지 못했고 오히려 혹평을 들었다는 일화 등 기존의 위인전에서 접하기 어려운 내용도 담고 있다.

이밖에 링컨이 남긴 말과 글, 주변 사람들의 증언, 당시의 신문 기사 등 100여개의 관련 자료도 함께 수록됐다.

 

 

 

 

링컨[ Abraham Lincoln ]

1809. 2. 12 미국 켄터키 호젠빌~1865. 4. 15 워싱턴 D. C..

남북전쟁에서 승리해 연방(聯邦)을 보존하고 노예를 해방시킨 미국의 제16대 대통령.

 

 

링컨은 미국의 여러 영웅들 가운데 미국인에게나 다른 외국인에게 독특한 매력을 느끼게 한다. 이러한 매력은 그가 누추한 집안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극적인 죽음을 맞은 남다른 인생경력을 가지고 있고 매우 인간적이고 따뜻한 인격의 소유자이며, 연방의 구원자, 노예 해방자로서의 역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는 데 있다. 특히 링컨은 민주주의를 대변한 웅변가로서 끊임없는 존경을 받아왔다. 그는 연방이 그 자체로도 구할 가치가 있을 뿐 아니라 전세계 국민들에게 중요한 자치(自治) 이념을 실현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구할 가치가 있다는 견해를 폄으로써 전세계 사람들로부터 호응을 받았다.

 

 

링컨의 초기생애

1809년 2월 12일 켄터키의 호젠빌에서 남쪽으로 4.8km 떨어진 외딴 오두막에서 태어났다. 2세때 그의 가족은 이웃마을인 노브크리크에 있는 한 농장으로 이사했다. 어렸을 적 기억은 주로 그 집과 연관되어 있다. 아버지 토머스 링컨은 1637년 잉글랜드에서 매사추세츠 주로 이민온 직공(織工) 견습공의 후손이다. 토머스는 선조들보다 훨씬 가난한 편이었으나 억센 개척민이었다. 그는 1806년 6월 12일에 낸시 행크스와 결혼했다. 그녀는 '굽은 어깨와 야윈 가슴에 신앙심이 깊은 여성'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 두 사람 사이에서 새러·에이브러햄·토머스가 태어났는데, 토머스는 어릴 때 죽었다.

 

1816년 12월 링컨 가족의 켄터키 농장이 소송에 걸리게 되자 토머스는 가족들을 이끌고 인디애나 주의 남서부로 이사를 갔다. 링컨 가족은 엉성한 통나무 구조물에서 출발해 하나씩 살림을 펴나갔으며 집 주위의 땅도 사들였다. 그의 나이 9세 때인 1818년 가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으나 다행히 2년이 채 안되어 아버지 토머스 링컨은 재혼했다. 그의 2번째 아내 새러 부시 존스턴 링컨은 딸 둘과 아들 하나가 딸린 과부로 원기와 애정을 가지고 가정을 꾸려나갔고, 토머스 링컨의 아이들을 모두 친자식처럼 대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에이브러햄을 귀여워해 그는 후일 그녀를 '천사 엄마'라 불렀다.

 

새어머니가 링컨에게 책 읽는 습관을 붙여주었는데, 그가 어떻게 해서 배움을 열망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다. 부모는 거의 문맹(文盲)이었고, 링컨 자신도 정규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다. 후에 이웃들의 말로는 링컨이 책 한 권을 빌리기 위해 수km를 걸어가곤 했다고 하지만 그 자신은 "어린시절에 배움을 자극하는 것이 전무했다"고 말했다. 아마 링컨은 어릴 때 많은 책을 읽지는 못했지만 책을 여러번 통독했던 것 같다. 이 가운데 집에 있는 유일한 책이었을 성서에는 처음부터 꽤 친숙했던 것 같다.

 

1830년 3월 링컨 가족은 일리노이 주로 2번째 이사를 했다. 일리노이에 도착한 뒤 농부가 될 마음이 없던 링컨은 여러 가지 일에 손을 댔다. 그는 아버지의 새로운 농장을 경작하는 한편 선원이 되어 배를 타고 미시시피 강을 따라 뉴올리언스까지 항해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법률 쪽을 공부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이미 문법·수학을 독학한 상태였던 그는 법률책을 파고들어 1836년 법률시험에 합격했고, 이후 변호사 일을 시작했다.

 

 

링컨의 대초원 변호사

1837년 링컨은 뉴셀럼보다 변호사 일이 더 많은 일리노이 주의 주도(州都) 스프링필드로 이사했다. 처음에 그는 존 T. 스튜어트와, 다음에는 스티븐 T. 로건과 동업했고, 1844년부터는 윌리엄 H. 헌던과 같이 일했다. 거의 10세 연하인 헌던은 링컨보다 책도 많이 읽었고 법정에서 능숙했으며, 대체로 견해가 극단적이었으나 이 동업은 더할 수 없이 완벽한 것이었다. 스프링필드로 옮겨온 지 몇 년 안에 링컨은 열심히 일해 매년 주지사나 순회판사의 연봉보다 많은 1,200~1,500달러의 돈을 벌었다. 그는 스프링필드에서 변호사 일을 했을 뿐 아니라 순회법정이 열리는 곳을 따라다녔다. 매년 봄과 가을에 그는 말이나 마차를 타고 이 마을 저 마을로 인구가 적은 대평원을 수백km 여행했으나 대부분 재판의 규모는 작았고 보수도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러나 1850년부터 서부에 철도가 부설되기 시작하면서 여행은 쉬워졌고 변호사 일도 수입이 좋아졌다. 링컨은 여러 철도회사를 위해서 일했으며 은행·보험회사·금융회사의 소송을 비롯해 특허신청이나 형사소송도 담당했다. 법조계에 들어온지 20년쯤 되어서는 정치에 관련된 사건의 변론에도 두각을 나타내 일리노이 주에서 가장 저명하고 성공적인 변호사 대열에 올랐다. 그는 치밀함과 현실적인 상식을 갖추어 항상 소송의 핵심을 꿰뚫어 보았을 뿐만 아니라 매우 정직하고 어떤 경우든 공정성을 잃지 않는 것으로 정평을 얻었다.

 

 

링컨의 개인생활

알려진 바로는 링컨이 진정으로 사랑한 여성은 메리 토드였다. 명랑한 성격에 재치있고 교육도 많이 받은 메리는 켄터키 주 상류층 출신으로, 스프링필드에 있는 그녀의 친척들은 그 도시에서 귀족이라 할 만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메리가 링컨과 교제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링컨은 때때로 과연 그녀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까 생각했지만 결국 1842년 11월 4일 이 두 사람은 결혼했다.

 

링컨은 아들만 4형제를 두었으나 장남인 로버트 외에 3형제(베이커, 윌리엄 월러스, 토머스)는 어른이 되기 전에 죽었다. 링컨은 자녀 교육을 주로 메리에게 맡겼으며, 그녀는 엄격하면서도 관대한 태도로 아이들을 길렀다. 링컨은 일과 아이들 문제에 모두 관심과 애정을 가졌다. 링컨 부인은 때때로 두통으로 고생했으며 남편이 순회재판 일로 오랫동안 집을 비울 때는 강한 불안감과 외로움을 느꼈다. 그녀는 링컨이 대통령으로 당선된 뒤에 아들 월러스의 죽음으로 정신적인 고통을 맛보았고, 남북전쟁으로 켄터키 주의 친구와 친척이 적으로 취급받는 아이러니를 겪었으며, 백악관의 안주인으로서는 부당한 언론의 비판에 시달렸다. 결국 남편이 자신의 곁에서 저격당한 10년 뒤인 1875년 그녀는 정신이상 진단을 받았다. 그러나 결혼 초기에 남편을 격려하고 그의 야망을 북돋았으며, 그후에는 남편의 관용과 인내의 자질을 단련시키는 역할을 했다. 링컨은 아내와 함께 스프링필드와 워싱턴에 있는 장로 교회에 다녔으나 어떤 교파에 속한 적은 없었다. 오히려 젊은시절에는 종교에 대해 다소 회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특히 대통령이 되어 남북전쟁이라는 고통스러운 짐을 떠맡게 되자 종교관념이 깊어졌으며, 점차 필연을 신(神)으로 인격화시켰다. 또한 자신을 '하느님의 도구'라고 겸손하게 표현했고 모든 역사를 하느님의 사업으로 보았다.

 

 

 

링컨의 초기 정치활동

링컨이 처음 정치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는 앤드루 잭슨이 대통령으로 있었다. 링컨은 잭슨주의자들이 '보통사람(common man)을 위한 정치'를 내세운 데는 공감했으나 경제사업에서 연방정부가 손을 떼야 한다는 견해에는 반대했다. 그는 후일 "정부의 합법적인 목적은 국민이 필요로 하기는 하지만 개개인의 능력으로는 전혀 해낼 수 없거나 잘할 수 없는 일을 하는 것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는 당시 저명한 정치가인 헨리 클레이와 다니엘 웹스터를 매우 존경했다. 이 두 사람은 연방정부가 국가은행 설립, 보호관세 제정, 운송시설 개발을 비롯한 국내 개량사업 추진 등을 통해 기업을 장려하고 국가자원을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링컨이 보기에는 일리노이 주와 서부 전체가 경제개발에 연방정부의 원조를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었고 이 때문에 그는 클레이와 웹스터가 속한 휘그당에 입당했다.

 

링컨은 1834~40년 일리노이 주에서 휘그당 의원으로 4번 당선되었다. 주의회 의원으로 있는 동안 철도·고속도로·운하 등 대규모 건설계획에 노력했으나 1837년의 공황과 그로 인한 경기침체 때문에 계획은 대부분 무산되었다. 의원으로 있는 동안 그는 노예제에 반대했지만 노예제 폐지론자는 아니었던 것 같다. 1837년 올턴의 노예제반대 신문편집인인 엘리자 러브조이가 군중들에게 살해된 사건에 대해 일리노이 의원들이 주 폐지론자들을 비난하고 노예제를 지지하는 결의를 상정했을 때 링컨은 기권을 했다. 대신 그는 동료들과 함께 노예제가 "부정과 악정에 기초한 것"이지만 "노예제 폐지를 법으로 공포한다면 노예제가 가지고 있는 악폐가 줄어들기보다는 늘어날 것"이라는 내용의 선언서를 발표했다.

 

1847년 링컨은 연방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이 기간(1847~49) 동안 그는 주로 민주당 대통령 제임스 K. 포크를 비난하고 멕시코 전쟁의 영웅인 휘그당의 재커리 테일러를 대통령으로 선출되도록 하는 데 힘썼다. 그러나 테일러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음에도 그는 아무런 관직을 얻지 못했다.

 

연방의원에서 물러난 뒤 5년 동안 그는 정치에 별로 관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새로 지역적 위기가 일어나자 다시 정치가로 두각을 드러낼 기회가 생겼다. 1854년 링컨의 경쟁자인 민주당의 스티븐 A. 더글러스는 루이지애나 매입지 전체에 노예제를 허용하고, 캔자스와 네브래스카 준주(準州)에 '주민주권' 원칙에 따라 노예제 도입 여부를 그 지역 주민에게 맡기는 법안을 통과시키려고 했다. ' 캔자스-네브래스카 법'으로 불린 이 법안은 일리노이 주를 비롯한 옛 노스웨스트 지역의 주에 격렬한 반대를 일으키게 했으며, 공화당이 등장하고 휘그당이 급속히 해체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어 수천 명의 휘그당원과 함께 링컨도 공화당에 들어갔다(1856). 당시 정치적 논쟁의 초점이 되고 있던 노예제 문제에 대해 링컨과 더글러스 두 사람은 근본적으로 견해가 달랐다. 더글러스는 노예경제가 준주에 적합하지 않으므로 노예제가 준주로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의회가 법안을 제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링컨은 더글러스와는 달리 의회가 준주에 노예제가 도입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링컨은 국가가 어떤 형태로든 결국 통합될 것이지만 준주는 자유주가 되어야 하며 가난한 사람이 보다 나은 삶을 살아가기 위한 안식처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논쟁을 통해 그는 전국적 인정을 받았으며 곧 1860년 대통령 선거의 후보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1860년 5월 18일 링컨은 시카고에서 열린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3차에 걸친 투표 끝에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 공화당이 단결한 데 반해 민주당은 분열되었고, 총 4명의 후보자가 나선 대통령 선거에서 링컨이 승리를 거두었다(1860. 11. 6). 그는 최남부에서 거의 득표하지 못했고 일반투표에서도 40%가 못 되는 표를 얻었지만 표가 분산되었기 때문에 선거인단 투표에서 압승을 거둘 수 있었다.

 

 

대통령 링컨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 사우스캐롤라이나 주가 연방 탈퇴를 선언했다. 남부 주들의 연방 탈퇴를 막기 위해 의회에서는 여러 가지 타협안을 제시했다. 가장 중요한 것이 크리튼던 타협안으로 이것은 이미 노예제가 실시되고 있는 주에 대해서는 노예제를 허용하되 새로 연방에 들어올 준주는 노예제를 허용하는 노예주와 노예제를 금지하는 자유주로 나누도록 하자는 안이었다. 링컨은 이 타협안의 첫번째 부분에는 반대하지 않았지만 두번째 부분은 단호히 거부했다. 그는 노예제 확대 원칙의 허용은 지역적 분열을 일으킬 것이며, 대농장주들로 하여금 미국 남부 경계를 넘어서까지 새로운 노예주를 얻는 데 박차를 가하게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연방의 분열을 막으려는 링컨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우스캐롤라이나 주를 따라 6개 주가 연방을 탈퇴했고, 이들 7개 주는 ' 남부연합' 정부를 결성했다.

 

링컨이 대통령에 취임하기 전에 이미 연방 분열의 위기가 보이고 있었다. 당시 북부와 남부의 관심은 찰스턴 항구의 섬터 요새에 집중되어 있었다. 아직 건설중이던 이 요새는 로버트 앤더슨 소령이 이끄는 미국 군대가 수비하고 있었는데, 남부연합은 요새의 소유권을 주장하면서 항구의 다른 요새들로부터 그곳을 위협했다. 링컨은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섬터 요새의 식량이 곧 바닥날 것이므로 지원을 하지 않으면 군대를 철수시켜야 할 것이라는 보고를 받았다. 그는 반대되는 2가지 조언을 받았다. 스콧 장군, 국무장관 윌리엄 H. 슈어드 등이 요새를 포기할 것을 요청한 반면, 많은 공화당원들은 약함을 보이는 것은 당과 연방에 매우 좋지 않은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링컨은 섬터 요새와 플로리다 주의 피컨스 요새에 보낼 2개의 원조부대를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링컨이 보낸 파견대가 섬터 요새에 도착하기 전에 남부연합 정부는 앤더슨 소령에게 요새에서 즉시 철수할 것을 요구했으며, 앤더슨 소령이 이를 거부하자 마침내 1861년 4월 12일 동틀 무렵 찰스턴 항구에 있는 남부연합의 포대는 발포를 개시했다.

 

7월 4일 의회에서 행한 연설에서 링컨은 "당시 남부연합 정부의 공격으로 교전이 시작되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남부연합은 링컨이 자신들에게 전범(戰犯)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우기 위해 교묘하게 조정하여 첫 발포를 하지 않을 수 없게 했다고 말했다. 링컨에게 전쟁 원인의 책임을 돌리는 역사가도 있지만 이러한 비난은 사실을 완전히 왜곡하는 것인 듯하다. 연방을 지켜야겠다는 입장이 확고했던 링컨은 이를 위해 남부연합에 강경히 맞서기로 했으며 섬터에서도 이러한 입장을 고수하는 편이 낫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링컨의 원래 목적은 전쟁을 일으키는 것도 평화를 유지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연방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전쟁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생각이었으며, 만약 전쟁이 일어난다면 단기전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링컨은 육해군 총사령관으로서 첫번째 중요 결정을 내려 섬터 요새에 군대를 파견하고 자원병 모집을 요청하며 항구봉쇄를 명령하는 등의 조치들을 취했다. 그러나 그러한 결정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는 전략안과 명령체계가 필요했다. 스콧 장군은 링컨에게 버지니아에서의 접전을 피하고 미시시피 강을 장악하여 남부를 거대하고 튼튼한 포위망으로 좁혀 들어가는 전략을 제시했다. 그러나 링컨은 다소 소극적이고 가능한 한 피를 흘리지 않으려는 스콧의 '애너콘다'(구렁이) 작전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으며 전쟁에서 이기려면 적극적으로 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결국 그는 스콧의 의견을 무시하고 버지니아 전선으로 바로 진군할 것을 명령했다. 하지만 이 결과 벌어진 불런 전투(1861. 7. 21)에서 북군은 패주하고 말았다. 그뒤 연일 불면의 밤을 보낸 끝에 링컨은 군사정책에 대한 일련의 각서를 내놓았다. 그의 기본 생각은 몇 개의 전선에서 동시에 공격을 개시하고, 미주리, 켄터키, 버지니아 서부, 테네시 동부로 군대를 이동시켜 그곳에 있는 연방 지지자들의 지원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구상은 해상봉쇄와 함께 링컨 전략의 핵심을 이루었다.

 

1861~64년 링컨은 자신의 생각을 장군들에게 명령하기를 잠시 망설이면서 지휘요원과 지휘조직에 대한 실험을 했다. 1861년 11월 그는 스콧의 사임을 받아들이고 조지 B. 매클렐런을 총사령관에 임명했다. 그러나 몇 달 뒤 매클렐런의 지휘권을 포토맥군에만 한정시켰다. 링컨은 매클렐런이 내놓은 '반도회전'(半島會戰) 계획의 타당성에 의문을 던지면서 계획을 바꿀 것을 계속 요청했으며, 리치먼드 주변에서 벌어진 '7일전투'(1862. 6~7) 뒤에는 계획 포기를 명령했다. 그리고 나서 버지니아 사령관으로 존 포프, 매클렐런, 앰브로스 E. 번사이드, 조지프 후커, 고든 미드를 차례로 임명했지만 어느 누구에게도 만족하지 못했다. 한편 헨리 W. 핼럭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는데 그는 중요한 결정은 내리기를 피했다. 거의 2년 동안 북군은 효과적인 단일 명령체계를 가지지 못했다.

 

결국 링컨은 서부전선에서 총사령관감을 물색했다. 그는 율리시스 S. 그랜트가 지휘한 빅스버그 회전을 칭찬했다. 북군이 빅스버그를 함락시킨 지(1863. 7. 4) 9일 뒤 그는 그랜트에게 "더할 나위 없는 당신의 활약에 고마움을 표합니다"라고 썼다. 1864년 3월 링컨은 그랜트를 중장으로 승진시키고 북군 총사령관에 임명했다. 마침내 링컨은 대규모 합동공격이라는 자신의 구상을 실현에 옮길 적임자를 찾았다. 이제 북군의 병력과 물자는 육군장관 스탠턴이, 대통령에 대한 자문 및 장군들과 대통령 사이의 연결은 참모총장 핼럭이 각각 맡았으며, 모든 군대는 총사령관 그랜트의 지휘하에 있고 그 가운데 포토맥군은 미드가 맡았다. 이와 같이 링컨은 전면전의 방대한 전략을 실행에 옮기는 데 있어 모든 물자와 병력의 동원을 담당하는 최고사령부의 창설을 주도했다. 그는 군대를 총지휘하는 데 있어 해가 갈수록 수완과 효율성을 발휘했다. 전쟁을 치른 경험이나 전쟁에 대한 훈련이 없었기 때문에 그가 해낸 일들은 더욱 놀라운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경험 부족은 불리하다기보다는 오히려 유리하게 작용한 듯하다. 그는 케케묵은 군사이론에 구애받지 않고 군사적 천재성이라 말할 수 있는 현실적 통찰력과 상식을 적용하여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 남북전쟁).

 

인간의 자유라는 대의에 대한 링컨의 깊고 진지한 헌신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에 그는 종종 노예제를 주제로 유창하게 연설했다. 예를 들어 1854년 준주로까지 노예제가 확장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 대해 더글러스가 무관심하다고 비난하면서 "나는 노예제가 그 자체로 가공할 만한 불의이기 때문에 그것을 증오한다. 나는 노예제가 우리의 공화적 규범이 전세계에 정당한 영향력을 미치는 것을 막고, 자유로운 제도의 적들에게 우리들을 위선자라고 비웃을 여지를 주기 때문에 그것을 증오한다"라고 공언했다.

 

처음에 링컨은 노예제 폐지정책을 채택하는 데 주저했다. 그는 400만에 이르는 흑인들이 해방되어 국가의 정치·사회 생활에 들어올 경우 일어날 수 있는 문제점을 염두에 두었으며, 무엇보다 폐지론을 내세울 경우 경계주(境界洲:남부 노예주 중 연방탈퇴보다는 타협으로 기운 주)들이 남부연합에 합류하지 않을까 우려했다. 그럼에도 노예제 반대 감정이 높아졌을 때 그는 자신이 작성한 노예해방령을 들고 나왔다. 그의 제안에 따르면 각 주는 노예소유주에게 보상을 하고 노예를 해방시킬 수 있으며, 연방정부는 노예해방에 드는 재정적 부담을 주와 나누어 가진다는 것이었다. 또한 해방은 점진적으로 행해지며 해방된 노예는 해외로 집단 이주시킬 것이라는 점도 덧붙여졌다. 연방의회는 링컨의 안을 실행에 옮기는 데 드는 비용을 표결에 붙이고자 했으나 경계주들은 모두 이 안을 거부했으며, 흑인 지도자들도 자신의 동료들이 해외로 보내지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의 점진안이 결국에는 통과될 것이라는 기대를 버리지 않았던 링컨은 별개의 조처에 착수해 예비선언(1862. 9. 22)을 거쳐 1863년 1월 1일 최종적인 노예해방령을 발표했다. 그가 전시의 대통령 권한 행사로 정당화시킨 이 유명한 선언은 남부연합이 실제로 통제권을 행사할 수 있는 지역만 대상으로 한 것이며, 연방에 충성한 노예주나 연방정부가 점령하고 있던 남부연합의 영토에는 해당되지 않았다. 전쟁기간 동안 노예해방령에 의해 직접적·간접적으로 자유의 몸이 된 노예는 20만 명이 채 못 되었지만 그것은 하나의 상징으로 대단한 의미가 있었다. 노예해방령은 링컨 행정부가 연방의 회복 외에도 자유를 명분으로 내세웠음을 의미했고 이 때문에 연방정부의 대의는 영국과 유럽 대륙의 자유주의 언론으로부터 차츰 확고한 지지를 받게 되었다.

 

링컨 자신은 그가 취한 조치가 일시적인 전쟁수단 외에 어떤 합헌성을 가지는지 확신하지 못했다. 전쟁이 끝난 뒤 노예의 자유를 보장하는 추가조치가 없었더라면 노예해방령으로 자유를 얻었던 노예는 옛날 신분으로 돌아갈 위험이 있었을 것이다. 노예제를 전면적으로 금지하는 수정헌법 제13조가 연방헌법의 한 부분으로 추가됨으로써 이러한 조치가 이루어졌으며 링컨은 이렇게 연방헌법을 변화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뒤 수정헌법 제13조는 각주에서 잇따라 승인을 받았다.

 

링컨 대통령이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서는 국민의 지지를 얻어야 했으므로 남북의 재통합에 앞서 무엇보다 북부가 어느 정도 의견일치를 보아야 했다. 그러나 북부는 나름대로 이해를 갖는 다양한 집단들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링컨은 이해가 다른 집단과 개인으로부터 가능한 한 많은 지지를 자신의 행정부로 끌어모아야 했다. 연방을 위해서 다행히도 그에게는 대통령으로서 남다른 정치적 기술이 있었다. 그는 동료 정치가에게 호소하고 그들의 입장에 서서 이야기하는 데 훌륭한 솜씨가 있었으며, 개인적 차이점에 구애받지 않고 모든 적대자들로부터 충성을 얻는 재능이 있었다. 그러나 야당은 여전히 활기차고 강력했다. 야당인 민주당은 전쟁의 계속을 주장하는 당원과 평화를 주장하는 당원('독사')으로 분열되었으며 이들은 때로 남부와 연합하기도 했다. 링컨은 수정헌법 제13조가 의회에서 통과될 수 있도록 평화파 민주당원의 지원을 얻기 위해 애썼으며, 가능한 한 그들을 무마시키려 했다.

 

링컨은 민주당의 활동에 대처하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지만 자신이 속해 있는 공화당 내에서도 당의 분열과 경쟁자들의 도전으로 그에 못지 않은 어려움이 따랐다. 공화당은 경제원칙에서는 상당히 일치하여 링컨이 이전 휘그 당원 시절부터 지지해온 핵심 안건들인 보호관세, 전국적 은행체계, 국내 개량사업, 특히 태평양 연안에 이르는 철도 건설에 대한 연방정부의 원조 등을 법으로 제정했다. 그러나 전쟁수행과 목적에 관련된 여러 문제에 대해서는 크게 '급진파'와 '보수파'로 나누어졌다. 링컨 자신은 보수파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으나 급진파 의원들 가운데도 친구가 있었기 때문에 양쪽에 지도력을 유지하도록 노력했다. 그는 1860년 대통령 선거전에서 같이 경쟁했던 사람들도 각료로 임명하고 모든 중요 정당세력에서 각료를 선택했다. 링컨은 현명하게 보수파와 급진파를 각각 대표하는 슈어드와 샐먼 P. 체이스를 입각시켜 내각의 위기를 극복했으며 대립관계에 있던 두 사람을 공식적 조언자로 삼았다.

 

의회 안에도 파벌간의 반발이 있었으며 그것은 훨씬 더 심각했다. 중대 현안은 남부의 ' 재건작업'(남부의 연방 재편입 작업)이었다. 루이지애나 주, 아칸소 주, 테네시 주 같은 연방탈퇴주에서는 주로 연방군에 의해 재건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는데 링컨은 1863년말 이러한 남부주에 대해 소위 '10%안(案)'을 제시했다. 이 안은 유권자의 10%가 연방정부에 충성을 서약하는 주에 대해서는 새로운 주정부의 설립을 승인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급진파는 링컨의 안이 너무 관대하다고 여겨 거부하고 대신 유권자의 과반수가 충성 서약을 하는 주에 대해서만 주정부 형성과 연방재가입을 받아들인다는 ' 웨이드-데이비스 안'을 제출했다. 링컨이 이 안을 거부하자 안의 발의자인 웨이드와 데이비스는 링컨을 비난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미 링컨은 '통일당'(공화당의 새로운 이름)의 대통령 후보로 대통령 재선을 노리고 있었는데 웨이드와 데이비스의 성명서는 링컨의 후보지명을 취소시키려는 공화당 내의 움직임을 분명히 드러내준 셈이었다. 그는 조용하고 끈기있게 이러한 움직임이 사라지기를 기다렸지만 당의 분열은 점점 더 악화되었다. 훨씬 이전에 공화당 내 한 파에 의해 후보지명을 받은 존 C. 프리몬트는 이미 선거운동에 나서고 있었다. 급진파의 지도자들은 링컨이 보수파인 몽고메리 블레어 체신장관을 해임한다면 프리몬트의 출마를 포기시키겠다고 약속했다. 결국 프리몬트는 물러났고 블레어도 사임했다. 이로써 공화당은 다시 단결하여 1864년 대통령 선거를 맞이하게 되었다.

1860년 선거 때와 마찬가지로 1864년에도 링컨은 자신의 선거운동에서 직접 선거전략을 맡았다. 국민 대다수가 공화당에 표를 던졌고, 링컨은 일반투표에서 과반수인 55%를 차지해 민주당 후보 매클렐런 장군을 누르고 재선되었다.

 

처음부터 링컨은 전쟁의 주목적이 '이른바 탈퇴한 주'를 가능한 한 빨리 이전처럼 연방과 '적절하고 실제적인 관계'를 맺도록 하는 데 있다는 믿음을 간직해왔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갈 무렵에도 그는 패배한 남부에 대해 구체적이고 통일된 정책을 세우지 못했다. 루이지애나나 테네시 같은 주에 대해서는 전쟁중에 자신이 제시한 10%안에 따라 새로운 주 정부를 세우도록 촉구했으나, 버지니아나 노스캐롤라이나 같은 주에 대해서는 전쟁을 일으킨 주 정부를 일시 유지시켜 평화상태를 회복시키는 수단으로 삼으려 했다. 기록에 의하면 그는 전후 남부로 간 북부 출신의 '이방인'(카핏배거)에게 남부 통치를 맡기는 것에 반대했다. 링컨은 남부인 스스로가 새로운 주 정부를 세우기를 원했으며, 그 과정에서 백인과 흑인이 서로 옛날의 관계에서 점차 벗어나 새로운 관계를 맺기를 바랐다. 그는 해방노예에 대한 교육안이 흑인이 새로 얻은 신분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데 핵심적인 것이라 생각했다. 또한 어떤 흑인들 "예를 들면 지식수준이 매우 높고 특히 우리와 함께 용감하게 싸웠던 흑인들"에게는 즉시 선거권이 주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865년초에 와서는 재건문제를 놓고 일어난 링컨과 공화당 내 극단주의자의 견해차가 그 전해보다 더욱 커졌다. 일부 급진파는 남부에 대해 잠정적으로 군정(軍政)을 실시하고, 남부 대농장주의 영지를 몰수해 그들을 해방된 흑인에게서 분리시킬 것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또한 그들은 남부의 정치 권력을 대농장주로부터 지난날의 노예에게 넘겨주도록 요구했다. 1865년 4월 링컨은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자신의 입장을 바꿈으로써 급진파와의 견해차를 좁혔다. 그는 버지니아 주의 전시의회가 전쟁이 끝난 뒤에도 계속 남아 있도록 허용한 것을 철회하고 스탠턴의 남부 군정안을 원칙적으로 승인했다. 4월 14일 각료회의가 열렸을 때 법무장관인 제임스 스피드 장군은 링컨이 급진파 쪽으로 기울고 있다고 결론 짓고 "그가 어느 때보다 우리 견해에 가까워진 것 같다"고 말했다. 따라서 링컨이 재임 임기를 마저 채웠더라면 그의 재건정책은 달라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가능성은 추측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1865년 4월 14일 저녁 그는 워싱턴의 포드 극장에서 관람중 존 윌크스 부스에게 저격당해 다음날 아침 사망했다.

 

 

 

링컨에 대한 평가

링컨이 마지막 숨을 거둘 때 스탠턴은 "이제 그의 이름은 역사에 영원히 남게 되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은 링컨을 순교자라고 생각했다. 암살은 성 금요일에 일어났고, '암흑의 부활절'이었던 그 주 일요일에는 수백 명의 연사가 링컨의 죽음에 대해 연설했다. 그들 중 어떤 사람은 암살이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힌 날에 일어난 것은 우연이 아님을 보이기도 했다. 또 어떤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을 위해 죽었듯이 에이브러햄 링컨은 조국을 위해 죽었다"고 말했다. 따라서 링컨이 죽은 시기와 상황은 그의 명성을 더욱 높이고 그를 성인의 지위로까지 올리는 역할을 했다.

 

링컨은 인간이면서 동시에 신화가 되었다. 그의 전설은 상상력이 풍부한 문학작품이나 민간전승·시·연극·소설·일화 등에서 보여지며 전기나 역사책 같은 사실성에 입각한 글들에서도 발견된다. 전설에서의 링컨은 변화무상한 신(神)과 같아서 거의 모든 숭배자들을 만족시키는 데가 있다. 그는 꾸밈없는 신사인 동시에 초자연적인 민첩함과 교묘한 솜씨를 갖춘 존재였으며, 권위를 휘두르고 약한 자를 옹호한 동시에 평범한 이웃이며 친구였다.

 

인간으로서의 링컨은 신화로서의 링컨과는 평가가 다르다. 살아 있을 때부터 그의 명성은 커지기 시작해 죽기 직전에는 그 위대한 자질이 이미 사람들 사이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예를 들어 남북전쟁이 한창일 때 〈워싱턴 크로니클 Washington Chronicle〉지는 확실한 판단, 감정의 냉정함, 목표를 향한 단호함, 최상의 도덕적 원칙, 강렬한 애국심 등의 면에서 그가 워싱턴과 닮았음을 발견했다. 〈버펄로 익스프레스 Buffalo Express〉지는 링컨이 뛰어난 중용과 격정에 사로잡히지 않음을 지적하면서 "워싱턴이라도 권력을 위한 권력의 행사에 그렇게 무관심하지는 못했을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링컨의 사상과 그가 한 말의 정수는 세심하게 쓰여진 여러 책에서 검토되고 재차 언급되었는데, 그 중심 주제는 자치문제와 약속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특히 남북전쟁이 일어난 뒤로 이상적 자치에 대해 거듭 언급했으며 자신의 말을 꾸준히 발전시켰다. 섬터 요새가 함락된 뒤 의회에 보낸 최초의 교서에서 그는 북부와 남부 사이의 문제가 미국의 장래문제를 넘어서 "입헌공화국 또는 민주주의, 다시 말해 국민에 의한 국민의 정부가 그 자신의 내부 적으로부터 영토를 보전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를 제기한다"고 단언했다.

 

그리고 마침내 게티즈버그에서 다음과 같은 말로 끝을 맺는 최상의 연설을 했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에게 남겨진 위대한 과제, 즉 명예롭게 죽어간 용사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헌신했던 대의를 위해 우리도 더욱 헌신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들의 희생이 결코 헛되지 않도록 우리의 결의를 굳건히 다지리라는 것, 하느님의 가호 아래 이 나라가 자유롭게 다시 탄생할 것이며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는 이 세상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다짐해야 할 것입니다."

 

 

R.N. Current 글 | 河尙潤 참조집필

 

 

 

/네이트 백과사전

 

 

 

 

 

1863.1.1 링컨대통령이 노예 해방 선언을 공표하다


1863년 1월 1일 오후 2시 백악관 집무실. 그의 손은 긴장으로 떨리고 있었다. “내 평생 이 선언서에 서명하는 것보다 더 옳은 일을 한 적은 없습니다. 이 일로 내 이름과 영혼이 역사에 길이 새겨질 텐데, 서명할 때 손이 떨리면 앞으로 이 서류를 본 사람들이 내가 주저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요.”  

 

  

 

훗날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을 낳은 서명 

“1863년 1월 1일부터 미합중국에 대하여 반란 상태에 있는 주 또는 어떤 주의 특정 지역에서 노예로 예속되어 있는 모든 이들은 영원히 자유의 몸이 될 것이다. 육해군 당국을 포함한 미국 행정부는 그들의 자유를 인정하고 지킬 것이며, 그들이 진정한 자유를 얻고자 노력하는 데 어떠한 제한도 가하지 않을 것이다.” 미국의 제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아브라함 링컨)은 남북전쟁이 한창이던 1863년 1월 1일자로, 위와 같이 시작되는 노예해방선언(Emancipation Proclamation)을 공표했다. 바로 전 해인 1862년 9월 22일 그는 노예해방예비선언(Preliminary Emancipation Proclamation)을 공표한 바 있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140여 년 후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정확히 말하면 흑백 혼혈인)이 탄생했다. 링컨 대통령이 서명한 노예해방선언서 사본 1부가 2005년 11월 뉴욕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68만 8000달러에 낙찰되기도 했다. 선언서 원본은 미국립문서보관소에 보관되어 있는데, 노예해방선언을 공표하고 1년 뒤인 1864년에 전쟁 비용을 모금하기 위해 필라델피아에서 15부의 사본을 만든 것. 이러한 사실을 통해서도 우리는 노예해방선언서가 공표 당시부터 크나큰 역사적 의미를 지닌 것으로 평가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일리노이의 이류 변호사가 신의 도구로 쓰이다니." 

당시 오하이오 주 국회의원 당선자로 링컨을 경멸했던 제임스 가필드라는 인물은 이렇게 말했다. “일리노이의 이류 변호사가 미래의 모든 세대가 기억할 만한 말을 하는 신의 도구로 쓰이다니, 이는 세계 역사상 가장 뜻밖의 사건이네.” 가필드의 말은 사실이었다. 링컨은 지방에서 하찮은 사건만 맡으며 수임료 수입도 변변치 않은, 시쳇말로 별 볼일 없는 변호사였다.

 

 

 

프렌시스 박넬 카펜터작 <노예해방선언서 최초의 낭독-1864>
가장 왼쪽에 수염을 길게 기른 이가 에드윈 M.스탠턴, 왼쪽에서 세 번째가 링컨

 

 

 

예컨대 링컨은 1855년 6월 특허권 분쟁에 관한 중요한 소송에서 변호인단 일원으로 참여하게 되었는데, 같은 측 변호사 조지 하딩은 링컨을 “허름한 행색에 발목까지 내려오지도 않는 바지를 입고, 손잡이 끝에 동그란 공이 달린 파란색 목면 우산을 든 볼품없고 깡마른 꺽다리 촌놈”이라며 비하했다. 역시 같은 측 변호사인 에드윈 M. 스탠턴(Edwin M. Stanton)도 “왜 저 긴팔원숭이를 끌어들였느냐”라며 공공연히 링컨을 무시했다. 링컨의 진정한 리더십은 바로 이 에드윈 M. 스탠턴을 중용한 데서 잘 드러난다. 1861년 대통령 당선 이후 링컨은 변호사 시절부터 자신을 무시해온 정적 스탠턴을 공화당 인사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전시 국방장관으로 임명한 것이다. 링컨은 스탠턴이 정직하고 엄격하며 원칙을 밀고 나가는 스타일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고, 스탠턴은 과연 링컨의 기대대로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는 링컨 특유의 포용과 통합의 리더십을 말해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손꼽힌다.

 

 

 

새 엄마의 사랑 속에 닥치는 대로 책을 읽다 

링컨의 생애를 말하는 데 어린 시절의 ‘설화적인 가난’을 빼놓을 수 없다. 무능력한 아버지, 자애롭고 강한 정신력을 지닌 어머니, 그리고 극빈. 링컨의 아버지 토머스 링컨은 ‘이름을 서툴게 사인할 때 외에는 글자를 써본 적이 없는’ 사실상의 문맹이었고, 목수와 농장 일꾼으로 전전하는 처지였다. 반면 어머니 낸시 행크스는 어린 링컨에게 성경을 읽어주고, 읽고 쓰는 법을 가르쳤으며, 진심 어린 사랑으로 돌본 현명하고 자애로운 어머니였다. 그러나 링컨이 아홉 살 때 그녀는 세상을 떠났고 링컨은 새 어머니를 맞이하게 된다. 다행히도 새어머니 사라 부시 존스턴은 링컨을 친자식처럼 사랑하며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제대로 가르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그렇다면 링컨의 아버지는 그의 생애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링컨의 아버지 토머스는 재치 있는 이야기꾼이었다. 남달리 흉내를 잘 냈고 남이 들려준 이야기를 기막힐 정도로 잘 외웠으며, 밤마다 손님이나 이웃들과 이야기 나누는 것을 좋아했다. 이런 아버지의 영향 때문이었는지 링컨은 어른들에게 들은 이야기를 흥미롭게 각색해 친구들에게 들려주어 넋을 빼놓곤 했다. 링컨은 이런 이야기꾼으로서의 자질에 더해 ‘전설적인 독서욕’으로 닥치는 대로 책을 읽는 아이이자 젊은이였다. 새어머니는 그런 링컨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특별히 배려하고, 스스로 그만둘 때까지 계속 책을 읽을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주었다.

 

스물두 살 때 집을 떠난 링컨은 뱃사공, 가게 점원, 장사꾼, 우체국장, 측량기사 등으로 일하면서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고 지독한 열성으로 주경야독했다. 스물다섯 살 때 법조인이 되기로 결심한 이후에도 링컨은 철저히 독학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나중에 법조인을 지망하는 젊은이에게 이렇게 조언했다. “책을 구해서 읽고 공부하게. 책을 이해할 줄 아는 능력은 어디서나 다 똑같네. 성공하고야 말겠다는 결심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늘 마음에 새겨두게.” 성공하겠다는 굳은 결심과 의욕, 그리고 엄청난 지식욕과 독서욕이 젊은 링컨이 지닌 단 두 가지 자산이었던 셈이다.

 

 

 

노예들 편에 서다가 상원 선거에서 낙선하다 

링컨의 장례행진 때 연주된 곡의 표지


그렇다면 정치인으로서의 꿈은 언제부터 꾸었을까?

링컨은 자신이 시민들에게 존경을 받을 만한 사람임을 증명하겠다는 야망을 일찍부터 품고 있었다. 그는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기(1837년 취득 및 개업) 전인 1832년에 생가먼 카운티에서 주 의회 의원 후보로 출마했다가 낙선했고, 결국 2년 뒤에 다시 출마해 당선됐다. 이후 8년 동안 유능한 서민 정치가로 활동했는데, 시골뜨기 출신의 변호사이자 서민 정치인에서 일약 전국적 지명도를 얻은 정치인으로 도약한 것은 1858년 일리노이 주 상원의원 선거에서 민주당의 스티븐 더글러스와 벌인 공개 논쟁 덕분이었다. 당시 논쟁에서 노예제도에 대한 링컨의 입장은 그것이 미국 독립선언서의 정신에 위배된다는 것이었다.

 

반면, 더글러스는 미국 각 주와 준주 시민들이 노예제를 택할지 배척할지 결정해야 한다는 자치권을 강조했다. 링컨은 이렇게 말했다. “자치주의는 옳습니다. 이는 절대적이며 영원합니다. 그러나 노예제 문제에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제 오랜 신념은 제게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고, 인간이 다른 사람을 노예로 만드는 것과 관련된 도덕적 권리는 있을 수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선거에서 링컨은 패했지만 인상적인 연설과 토론, 그리고 확고한 신념으로 많은 사람을 매료시켰고 결국 1860년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 후보로 지명됐다. 민주당 계열 신문들은 “삼류 서부 변호사, 조잡하고 어색한 농담을 뒤섞어 무식하게 연설하는 사류 웅변가를 공천한 공화당은 그들의 지성이 점점 더 낮아지고 있다는 증거를 보여주었다”고 조롱했지만, 1860년 11월 6일 미국 국민은 링컨을 선택했다.

 

 

 

이듬해 3월 링컨이 취임한 지 한 달 후에 남군의 공격으로 남북전쟁이 발발했고, 북군은 수세에 몰렸으나 1862년 9월 노예제 폐지를 공언한 노예해방예비선언을 통해 국내외 여론을 유리하게 이끌면서 전세를 역전시켰다. 그리고 1865년 4월 9일 남군 사령관 로버트 리 장군이 항복함으로써 남북전쟁이 끝났다. 당시 링컨은 1864년 대선에서 재선에 성공해 연임 중이었다.

 

 

"우리는 적이 아니라 친구이고 동지입니다." 

남군이 항복한 지 며칠 뒤인 1865년 4월 14일 금요일 저녁 8시가 조금 지난 시각, 링컨 부부는 워싱턴에 있는 포드 극장으로 우리 미국인 사촌 Our American Cousin]이라는 연극을 관람하러 마차에 올랐다. 그리고 10시 12분경, 포드 극장 특별석에서 존 윌크스 부스가 대통령의 뒤통수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그리고 약 9시간 뒤인 4월 15일 아침 7시 22분, 링컨의 사망이 최종 언도되었다. 그로부터 40여 년이 지난 1908년, 코카서스 산맥 북쪽 어느 마을에서 부족장이 톨스토이에게 부탁했다.

 

“그는 천둥 같은 목소리로 말했고, 떠오르는 해처럼 웃었으며, 바위처럼 확고하게 행동했습니다. 그의 이름은 링컨이고, 그가 살았던 나라는 미합중국이라고 합니다. 그곳은 너무 멀어서, 젊은이가 걸어서 거기에 닿을 때면 노인이 되어 있을 거라고 합니다. 그 사람에 대해 말씀해주십시오.”  그로부터 한 세기가 지난 1963년 8월23일, 마틴 루터 킹은 이렇게 연설했다. “한 세기 전, 한 위대한 미국인은 노예해방선언문에 서명했습니다. 우리는 오늘 의미심장하고 상징적인 그 자리에 서 있습니다. 그 역사적 선언은 불의의 불길에 고통을 받던 수백만 흑인 노예들에게 희망의 등불로 다가왔습니다. 긴 예속의 밤을 끝내는 환희의 새 아침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2008년 11월 4일, 미국 제44대 대통령 선거 당선자 버락 오바마는 당선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젊은이와 노인, 부유한 이와 가난한 이, 민주당원과 공화당원, 흑인과 백인과 히스패닉과 아시아계와 미국 원주민, 동성연애자와 이성애자, 장애인과 비장애인, 모든 미국인이 대답을 해주었습니다. 미국은 붉은 주(공화당 우세 주)나 푸른 주(민주당 우세 주)의 집합도 아니고 단순한 개인들의 집합체도 아니라는 메시지를 세계에 보냈습니다. 지금은 물론 앞으로 언제까지라도 늘 우리는 미합중국일 것입니다. (중략) 미국이 오늘날보다 훨씬 더 분열되어 있었을 때 링컨이 말했듯이, 우리는 적이 아니라 친구이고 동지입니다.”

 

 

 

포드 극장에서 공연을 관람중인 링컨에게 방아쇠를 당기고 있는 존 윌크스 부스

 

 

 

 

 

링컨의 노예해방을 두고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전략적 판단의 결과라는 평가가 있다. 또 그가 노예해방 자체보다는 중앙집권적 연방주의를 관철시키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는 평가도 있다. 모두 일리 있는 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평가를 인정하더라도, 링컨 이후 미국 역사가 ‘미합중국(The United States of America)’의 역사로서 강대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 그리고 노예해방 이후 지난한 굴곡과 투쟁 과정을 거치며 인권 신장의 역사를 이루어올 수 있었던 것은 링컨이라는 ‘거인의 어깨’가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필자가 추천하는 덧붙여 읽으면 좋은 책 

이 글이 많이 빚지고 있는 도리스 컨스 굿윈의 [권력의 조건](21세기북스)은 방대한 분량(829쪽)만큼 매우 상세하게 링컨의 삶을 정치 역정과 리더십, 그리고 많은 동시대 인물을 중심으로 들려준다. 특히 이 책의 원제 ‘Team of Rivals’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당선자가 새 정부 인선에서 보여준 리더십과 관련해 자주 회자됐다. 즉 정치적 라이벌도 마다하지 않고 능력에 따라 적재적소에 기용해 위기를 극복하려는 진정한 실용의 리더십, 포용과 통합의 리더십을 의미한다.


 

권력의 조건링컨링컨의 진실

 

 

 

브렌다 하우겐의 [링컨: 하나 된 미국을 꿈꾼 위대한 대통령](아이세움)은 길지 않은 분량의 어린이용 전기 도서지만, 링컨에 관한 전기적 지식이 시대 배경과 함께 잘 정리되어 있어 성인이 읽어도 좋다. “링컨의 삶과 시대에 관해 알고 싶은데, 쉬우면서도 잘 정리돼 있는 책 한 권만 추천해달라”는 요청을 받는다면, 필자는 이 책을 추천할 것이다. 단, ‘미국의 자라나는 새싹들’을 위한 ‘위인 전기’ 성격을 띤다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 토머스 J. 딜로렌조의 [링컨의 진실](사회평론)은 노예해방자로서의 자애로운 위인 링컨보다 철저한 중앙집권주의 정치가로서의 링컨을 집중적으로 조명한 책이다. 현실 정치인 링컨이 씨름했던 과제와 시대적 정치 상황을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위대한 인물’이라는 명성에 가려진 링컨의 현실적 면모를 균형 있게 살펴보고자 한다면, 이 책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표정훈 / 출판평론가
글쓴이 표정훈은 출판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며 [책은 나름의 운명을 지닌다], [하룻밤에 읽는 동양사상] 등의 저술서와 [고대 문명의 환경사], [자연, 그 경이로움에 대하여] 등 다수의 번역서로 독자들과 만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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