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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전례원 - 韓國典禮院 - ( jeonyewon ) 원문보기 글쓴이: 壯圃 김창호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하면서 희생자들의 이야기
***임 향한 일편단심/정몽주***
정몽주(1337∼1392)는 고려 말기의 문신으로 고려 삼은 중 한 사람이다. 영천 출생이며 본관은 연일이고 자는 달가, 호는 포은이다. 초명 몽란·몽룡이었고, 시호는 문충이다. 정몽주는 어려서부터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다. 또한 천품이 지극히 높고, 뛰어나게 호매하여 충효를 겸하였다. 1357년(공민왕 6년)에 감시에 합격하고 1360년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이후 예조정랑 겸 성균박사 등 많은 관직을 역임했다.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했으며 1376년(우왕 2년)에 이인임 등이 주장하는 배명친원의 외교방침을 반대하다 언양에 유배되기도 했다. 이듬해 유배지에서 풀려 일본 사신으로 가서 왜구를 단속할 것을 약속 받고 왜에 잡혀간 고려인 수백 명을 귀국시켰다. 1379년에는 이성계 휘하에서 왜구토벌에 참가하기도 했고, 1384년에는 긴장상태에 있던 명나라와의 관계를 회복하는데 많은 공을 세웠다. 1389년(창왕 1년)에 예문관대제학·문하찬성사가 되어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옹립하고, 1390년(공양왕 2년) 벽상삼한삼중대광·수문하시중·도평의사사병조상서시판사·경영전영사·우문관대제학·익양군충의백이 되었다. 이성계의 신망이 날로 높아지자 그를 추대하려는 음모가 있음을 알고 이성계 일파를 숙청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1392년 명에서 돌아오는 세자를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황주에 드러눕자 그 기회에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려 했으나 이를 눈치챈 방원(훗날의 태종)의 기지로 실패, 이어 정세를 엿보려고 이성계를 찾아보고 귀가하던 도중 선죽교에서 방원의 부하 조영규 등에게 격살되었다. 정몽주는 고려에 대한 충절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런 정몽주를 설득하기 위해 이방원이 「하여가」를 지어 보냈는데
하여가如此亦如何(여차역여하) - 이런들 또 어떠하며,
如彼亦如何(여피역여하) - 저런들 또 어떠하리.
城隍堂後苑(성황당후원) - 성황당의 뒷담이
頹圮亦何如(퇴비역하여) - 무너진들 또 어떠하리
吾輩若此爲(오배약차위) - 우리들도 이 같이 하여
不死亦何如(불사역하여) - 죽지 않은들 어떠할까
그에 대한 답변으로 정몽주는 「단심가」를 지어보냈으며 이것은 그의 충절을 대변하는 작품 『포은집』에 실려 전하고 있다.
단심가
此身死了死了 一百番更死了(차신사료사료 일백번갱사료)
白骨爲塵土 魂魄有也無 (백골위진토 혼위유야무)
向主一片丹心 寧有改理與之 (향주일편단심 영유개리여지)
이 몸이 죽어 주거 일백 번 고쳐 주거백골이 진토 되여 넋이 라도 잇고 없고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 줄이 이시랴
1405년(태종 5년)에 권근의 요청에 의하여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부사 수문전대제학 감예문 춘추관사 익양 부원군으로 추증되었다. 1517년(중종 12년)에는 태학생 등의 상서에 의하여 문묘에 배향하고, 또 묘에 비석을 세웠는데, 고려의 벼슬만을 쓰고 시호를 적지 않아 그가 두 왕조를 섬기지 않은 뜻을 분명히 하였다 또, 개성의 숭양서원 등 13개의 서원에 제향되었고, 묘 아래에 있는 영모재, 영천의 임고서원 등 몇 곳의 서원에는 그의 초상을 봉안하고 있다.
선죽교북한 개성직할시 개성시 선죽동에 있는 고려시대의 석교로 고려 태조가 919년 송도(개성)의 시가지를 정비할 때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선죽교는 1392년(태조 1년)에 정몽주가 이방원에 의해 피살된 장소로 유명하다. 원래 선지교였던 것이 선죽교로 바뀌었다고 한다. 고려시대에는 돌난간이 없었는데, 1780년(정조 4년)에 정몽주의 후손들이 난간을 설치하였다. 다리 옆에는 정몽주의 사적을 새긴 비석 2기가 비각 속에 서 있다.
정몽주묘경기도 용인시 모현면 능원리에 있 정몽주가 고려 왕실을 지키려 하다가 개성 선죽교에서 타살된 뒤 1406년(태종 6) 3월, 풍덕군에 묘를 썼다가 후에 이곳으로 옮겨 부인 경주 이씨와 합장하였다. 풍덕군에서 고향인 영천으로 묘를 옮길 때 면례행렬이 지금의 용인시 수지읍의 경계에 이르렀을 때 앞에 세웠던 명정이 바람에 날려 현재의 묘가 있는 위치에 떨어져 이곳에 안치하였다는 전설이 전하고 있다.묘는 단분으로 상석, 혼유석, 망주석, 문인석 등이 종전부터 있었으며 곡담과 둘레의 돌 등은 1970년에 추가 설치한 것이다. 1980년에는 묘역의 민가 3채를 이전하고 신도비각, 재실 등 대대적으로 정화 사업을 실시하였다. 묘역에는 묘표와 신도비가 있다. 묘표는 1517년(중종 12년)에 태학들이 정몽주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중종에게 청원하여 세운 것으로, 조선시대에 세웠음에도 앞면에 '고려수문하시중정몽주지묘'라고 새겨져 있다. 이는 정몽주의 충절을 기리기 위함이었다. 신도비는 1699년(숙종 25년)에 세웠는데 현종 때의 문신 김수증이 비문을 썼고, 글은 송시열이 지었으며, 전액은 김수항이 썼다. 1972년 5월 4일에 경기도 기념물 제 1호로 지정되었고 정재화가 관리한다.
숭양서원정몽주를 제향하기 위해 개성에 세운 조선시대의 서원으로 개성시 선죽동에 있으며 북한 사적 제 51호로 지정되어 있다. 사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이고, 강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이다. 동재와 서재는 각각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지었다. 중심건물인 사당의 지붕은 겹처마와 맞배지붕이고, 강당은 홑처마의 합각지붕이며, 동재와 서재는 사당 ·강당과 마찬가지로 두공이 없는 형식의 맞배집으로 규모가 큰 건물이다. 1573년(선조 6년)에 개성유수 남응운이 유림들과 협의 끝에 정몽주의 충절을 기리고, 아울러 서경덕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선죽교 윗쪽 정몽주의 집터에 문충당을 세웠다. 1575년 문충당에 '숭양'의 사액이 내려 국가가 공인한 서원으로 승격되었고, 1668년(현종 9년) 이후 김육·조익·우현보 등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서 제외된 47서원의 하나로 남아 선현을 봉사하고 지방교육을 담당하였다
임고서원경북 영천시 임고면 앙향리에 있는 서원으로 정몽주를 추모하기 위하여 1553년(명종 8년) 부래산에 창건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603년(선조 36년)에 중건되었다. 1643년(인조 21년)에 여헌 장현광을 배향하고 1727년(영조 3년)에는 지봉 황보 인을 추향하였으나 1871년(고종 8년)에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1965년 복원하여 정몽주만 봉향하고 있으며 1980년 보수·정화되었다. 또한 1990년부터 성역화사업을 추진하여 기존의 서원 옆에 새로이 서원을 세워 웅장한 규모를 갖추고 있다. 임고서원 앞에 거대한 은행나무가 서 있는데 이 은행나무는 이 은행나무는 높이 약 20m, 가슴높이의 줄기둘레가 5.95m에 이르는 수령 이 약 500년의 노거수이다. 이 나무에 대한 전설은 별로 남겨진 것이 없으나 다만 정성껏 차린 깨끗한 음식이나 맑은 정화수를 이 나무 아래에 갖다 놓고 성의껏 기도드리면 부녀자는 생남하고 병자는 소생한다지만, 나무에 해를 주는 자는 크게 벌을 받는다고 한다.
이성계의 王씨 멸족
고려왕조의 마지막 임금 34대 공양왕은 원주로 내쳐젔다가 다시 간성으로, 간성에서 또 다시 삼척으로 옮겨젔다. 그의 두 아들과 같이 유배의 길에 오른 공양왕은 쓸쓸한 죽음의 날을 기달리고 있었다. 비록 이성계의 압력에 의하여서였지만, 우왕과 창왕을 왕명으로 강화에서 죽인 바 있는 공양왕은 자기 죄를 생각하며 모두를 체념하였다. 그래도 왕으로서의 품위를 지키려 애를 썼다. 밖에서 “전교를 받으시요”하는 정남진의 굵은 음성이 들려 왔다. 끝까지 공양왕을 따라 왔던 몇명의 시녀들은 이미 소리없이 울고 있었다. 이성계의 구구절절 긴 어명은 치사스런 변명이었다.
“내가 여러 사람의 추대로서 임금자리에 나가게 된 것은 이 또한 하늘의 이치인데 그대가 이제 관동지방에 살게 되였고, 같은 왕씨 성들은 각각 편안함을 얻어 생업에 종사하고 있는 바, 이제 동래현령 김가행과 염장관 박중정등이 모반을 도모하여, 그대와 그대 친족의 명운을 맹인 이홍무에게 점첬으나, 일이 탄로되어 죄를 실토하였다. 그대는 알지 못하고 일이 여기에 이르렀거니와, 대간과 법관등이 연이어 상소하기 무릇 12차례에 걸첬으며, 대소 신료들의 상소 또한 막을 길 없어 내 이제 할 수 없게 되어 그대에게 죽음을 내리게 하니 그대는 모름지기 나의 고충을 알아 주기 바라노라.”
죽는자 앞에서 구질구질한 변명의 어명을 읽고 나니 금오랑이 포교 두 명을 재촉하여 방으로 몰려 들어 왔다. 공양왕은 “내가 자진을 할 터이니 저리들 물러 가라.” 하였지만 포교들의 올가미는 이미 공양왕의 목위에 얽혀저 있었다. 두 왕자들은 이를 보고 흐느끼고 있었으나 그들도 또한 올가미로 개 끌리 듯이 허무한 죽음을 당하였다.
같은 날, 거제도에 귀양을 가 있는 수 천명의 왕씨들은 바다에 던저져서 수장을 당하였다. 이쯤 되니 정도전 등은 이왕 죽일 바에야 중요한 왕씨 일문 뿐만이 아니라, 왕가 성을 가진 자는 모조리 없애야겠다는 계획 아래, “이번에 위에서 왕씨 성바지들에게 새로 섬 하나를 마련하여 길이 영주의 고향을 삼아, 편안케 하고자 하니 왕씨들은 강화 해안에 모두 모이라. 기일 안에 모이지 않는 자는 크게 벌을 받으리라.” 이러한 방문을 장안 곳곳에 써 붙혔다. 그러지 않아도 불안에 떨던 왕씨들은 “이제야 살판 났다./ 죽이지는 않겠지/ 몇 해 귀양살이 하다가 풀려나면 살 수가 있다.” 생각을 하고 희망을 안고 모두 강화도 해안에 모여 들었다. 수 십척의 배가 등대하고 있었는데 왕씨들은 모두 배에 올랐다. 얼마 후에 자기들이 어복에 장사지내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 왕씨들을 보내는 친지와 일가들의 모습이 저 멀리서 아물 아물 하였다. 그 때에 돌연 배 안에서 이상이 생겼다. 누가 했는지 일시에 배밑창의 널판이 여러장 떼어지며 바닷물이 용솟음을 쳐서 올라 왔다. 아비규환이었다. 허나 어찌하랴! 수 천명이 또 수장 되였다.
그 날 밤 태조 이성계의 꿈에 왕건 태조가 칠장 곤룡포를 입고 나타나 호통을 치는 것이었다. “내가 삼한을 통합함에 공이 이 백성 위에 크게 군림하였거늘 네가 내 후예들을 모조리 없애려 하니 내 반드시 큰 보복을 행하리라.” 하고는 홀연히 사라지는지라. 태조는 크게 두려워 하여, 강비의 아들 방번의 장인 왕우로 하여금 고려 왕씨들의 제사를 받들게 함으로 오직 한 사람, 사돈 왕씨의 목숨을 붙이게 하였다. 한편 산속으로 도망을 처서 숨어 있던 왕씨들은 대개 <全>씨나 <玉>씨나 <虛>씨나 <田>씨 <龍>씨 등으로 성을 적당히 개칠을 하여 바꾸어 그 목숨을 부지할 수가 있었다. 그렇기에 오늘날 까지 살아 남은 진짜 왕씨는 몇이 아니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남아 있는 왕씨는 대개가 이성계의 아들 방번의 장인 왕우의 자손뿐이라고 한다. *****
비교적 평화적(?)으로 새 나라를 연 태조 이성계. 짜고 치는 고스톱마냥 신하들의 청을 못 이긴척 받아들여 불안의 씨앗이 될 지도 모를 고려 왕씨들을 전부 수장시켜버린다. 뿌린대로 거둔다고 후에 피눈물 흘리게 되는게 왕씨들의 원한 때문은 아닐런지? 죄없는 사람들을 그리 죽였으니 말이다.
태조는 한 동안 유지했던 고려라는 국호를 조선으로 바꾸고, 떨떠름한 개경 대신 새로운 도읍지도 선정하여 이사갈 준비를 하며 차근차근 나라 기틀을 세워가기 시작한다.모든 것이 그의 뜻대로 될 것 같았으나 그는 결정적인 실수를 하나 저지른다. 장성하여 공을 세운 범같은 아들들을 제끼고 신덕왕후 강씨 소생의 철부지 막내를 세자로 책봉해버린 것이다. 아들들의 반발은 당연히 예상가능한 것이었지만 자신이 왕이니 큰 문제는 없을거라 생각한 모양이다.
태조와 정도전의 조합. 환상의 콤비인 것은 분명한 듯 하다. 조선 개국 초의 아이디어들은 거의 대부분이 정도전의 머리 속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닌듯 싶다. 이 책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된 건 명나라 측에서 정도전을 껄끄럽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위협적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잘난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실록에 실린 제1차 왕자의 난에 대한 설명은 뭔가 찜찜하다. 역사라는 것은 승리자의 입장에서 서술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승리자 태종의 입장에서 쓰여졌으니 어쩌면 당연한건지도 모르겠다. 덧붙여 정도전에 대한 평가가 한없이 깎여내려간 것도 말이다.
1차 왕자의 난으로 조정을 장악한 정안군은 그래도 얼굴에 철판이 깔리진 않았는지 둘째 형 방과를 왕으로 세운다. 의외였던 건 보통 사극에서 자주 본 것처럼 권력의 비정함에 환멸을 느낀 태조가 스스로 왕좌를 넘겨준게 아니라 사실은 정안군 측근들의 압박으로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물러났다는 대목이었다.
어찌됐건 얼떨결에 왕이 되어버린 정종. 보통 사극의 연약한 이미지와 다르게 격구를 좋아하는 무인기질이 강한 사람이었다. 태조에게도 효성스러웠고 자식을 낳지 못한 부인 정안왕후와도 끝까지 금슬이 좋았다고 하니 성격도 좋은 모양이다. 전체적으로 둥글게 둥글게 산 사람인 듯 싶은데 살았을 때야 편히 살았는지 모르겠으나 죽어서 한 동안 왕 대접을 받지 못했다고 하니 조금은 불쌍하기도 하다.
2차 왕자의 난을 끝으로 대충 주변 정리가 다 된 후 세자로 책봉된 정안군. 사병정리를 끝으로 왕이 될 준비를 모두 끝마치게 된다.
공민왕이 내시 최만생과 자제위 홍윤에 의거 살해되고
신돈의 비첩 반야의 소생인 10살인 강녕대군을 우왕으로 세움
(태후 홍씨와 시중 경복흥의 반대속에서 공민왕의 고명대신 이인임에 의거 )
# 이인임의 세도 심복 임견미 염흥방 지윤 근비(이임의 딸 이임은 염흥방의 가노) 숙비(통제원의 여종인 용덕 ) 소향비 연쌍비
최영의 등장 (71세) 좌시중 이성계(53세) 우시중 최영의 서녀로 영비 -왕후로
친명과 정명으로 갈라짐
친명--이성계등 (신진 기병군벌)
정명--우왕 최영 (훈구 보병군벌)으로 결국 요동공략에 나섭니다
이성계의 4불가론에도 불구하고 요동공략이 결정되고
좌군통도사 조민수 우군통도사에 이성계
조민수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
좌시중 조민수 우시중 이성계 우왕이 내시들을 동원하여 이성계 조민수 변안열등 공격음모하려는 음모가 발각되어 퇴위 6/9일좌시중 조민수에 의거 창왕이 보위로 --정비(안극인의 딸)의 제가를 얻는다
(당시 명덕태후 홍씨 후비로 혜비 익비(홍윤 함안의 겁탈) 정비등)
#7월 전제개혁이 당시의 현안
그러나 이색 이임 우현보 변안열 왕안덕등은 전제개혁안에 대하여 반대
탄핵으로 조민수는 창녕으로 귀양가고 한산군 이색이 좌시중 여전히 이성계 우시중
선왕복위음모--이임 우현보 변안열 왕안덕 --정비에게 고하여 우왕을-여흥으로
10월 하정사로 (이색 밀직부사 이숭인 서정사 방원) 방우도 밀직사 강희백따라 명경으로
좌시중 --칠성부원군 이임으로
팔관일의 음모가 발견됨 (김저 정득후 곽충보 조방흠 변안일 이임 우현보 왕안덕등 관여함)
--우는 강능 창은 강화 이임과 자 귀생은 -원리 유배
1389년 11/15일 정비의 추인으로 공양왕 등극
(어머니 왕씨=복녕옹주 아내노씨=순비 순성군=세자)
좌시중에 심덕부 우시중에 이성계 그리고 변안열과 왕안덕을 중히쓴다
석보스님 하윤 민제(개성부윤)의 등장
공양앙에 의거 구공신녹권(이성계 심덕부 정몽주 설장수등 총 9명)
이성계 특별대우 심덕부 우대 나머지 7명
이성계진영의 인사들 정도전 조준 심덕부 이방원(박석명 하윤 이숙번 마천목 송기신 바우 민제 칠점선(영신옹주)
반대세력 운곡 원천석 정몽주 이색 조견(조준의 동생) 방우
우왕 창왕에 대한 참수 (이성계는 빠지고 공양왕이 지시?)
우왕복위사건
(일부는 죄가있슴에도 불구하고 신임 좌시중에 의거 고위직에 변안열 왕안덕등)
그런데 그 무렵 김저와 정득후 등이 이성계를 죽이고 우왕을 복위시키려다가 발각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대호군(大護軍. 고려 공민왕 때 대장군大將軍을 고친 이름. 무관직 가운데 둘째번 계급 - 서열 2위인 계급 - 으로 종 3품이다 : 옮긴이)을 지낸 김저는 부령을 지낸 정득후와 모의하고 예의판서(예의/학교/과거/교빙과 관련된 일을 맡은 관청인 예의사禮儀司의 으뜸 벼슬로 정 3품이다 - 옮긴이) 곽충보를 매수하여 이성계를 죽이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곽충보가 이성계에게 고발하는 바람에 김저는 붙잡히고 정득후는 자살한다. 그리고 김저를 국문(鞠問. 중대한 범법행위가 발생하면 범인을 체포한 다음 왕명王命을 따라 위관委官을 정하고 위관의 주재하에 국청鞠聽에서 범인을 심문하던 일 - 옮긴이)한 결과 변안열, 이림, 우현보, 우인열, 왕안덕, 우홍수 등이 공모했다는 자백을 받아내고는 그들을 모두 척결한다. 그러나 척결된 이들이 한결같이 반反 이성계파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우왕 복위사건은 폐가입진의 명분으로 창왕을 폐위하기 위한 전초전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서기 1389년 11월의 이 사건으로 반 이성계파가 대거 축출되자, 창왕은 곧 폐위되어 강화도로 보내졌다. 그리고 그 다음달인 12월 신종의 7세손인 공양왕이 즉위하자 왕명을 받은 대제학 유구에 의해 … 죽음을 맞이한다.”
1392년 7/17일 이성계 왕위에 오르다! 이성계는 드디어 왕위에 올랐습니다. 공민왕의 후비(後妃)였던 대비 안씨로 부터 옥새를 건네받고, 1392년 7월 17일 개경의 수창궁에서 드디어 보위에 오른 것이었습니다.왕씨가 아닌 이씨가 수창궁을 차지하는 것을 본 개경사람들은 멸시의 눈으로 새왕실을 바라보았습니다. 민심은 험악하여져 갔고, 수많은 뜻있는 신하와 선비들이 이성계의 즉위식에 참여하지 않은채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습니다. 지난 강의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이러한 민심으로 인하여 턔조 이성계는 선뜻 '임금'을 칭할 수 없었습니다. 잠저(潛邸:왕이 임금에 오르기전에 살전 사가)에서 수창궁을 출퇴근하며 "감록국사(監錄國事)"라 칭하며, 정무를 돌보았습니다. 겨우 신하들의 만류로 한 달 만에 이런 과도체제는 끝이 났지만, 그만큼 개경의 민심이 신왕조에 대해 부정적이었습니다.
<삼봉 정도전 영정>2. 왕씨들의 죽음, 그 보복... 구왕조의 왕족인 "왕씨"들은 개경에서 모두 쫓겨나 강화도와 거제도에 집단거주케 하고 감시하게하였습니다. 세월이 일,이년 지나 태조는 새왕조에 공이 있는 왕씨들은 개경에 살도록 하는 조처를 내리는 등 왕씨에 대한 '연금'을 해제하려는 조치를 취하고자 시도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태조의 의향을 간파한 당대의 실력자이자 신왕조의 "대주주" 정도전은 왕씨말살계획을 세웁니다. 대간들을 부추겨 '나라와 왕실을 위하여 공양군(공양왕) 부자와 왕씨들을 제거하시라'는 등의 상소를 빗발치게 올리게 함으로 조정의 공론을 조작하였습니다. 몇번이나 거부의 뜻을 분명히 했던 태조는 차츰 신권에 밀려, 결국 조정의 논의에 붙이게 하였습니다.정도전 일파가 장악하고 있던 조정의 논의결과야 불문가지였습니다. '왕씨들을 말살하라'는 결론,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삼척에서는 공양군 부자의 목이 베어졌고, 강화와 거제에서는 왕씨들 수백명이 수장당하였습니다. 이러한 피의 살육으로 왕조를 시작한 조선왕조는 야사에 전해오는 것처럼 태조왕건의 영혼이 복수하는 것인지 몰라도 형제간의 살육등으로 그 나날이 험난하기만 하였습니다. 3. 조선왕조의 대주주 "삼봉 정도전" 자, 방금 이야기하였던 당대의 실력자이며, 조선왕조를 창업함에 있어서 태조만큼이나 많은 "지분"을 보유한 대주주 정도전은 누구입니까? 사실상 왕조 창업후 7년간은 태조이성계는 그야말로 상징적인 존재에 불과하였고, 모든 정사는 정도전이 맡았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정도전은 적이 많았습니다. 우선 한 신하가 왕을 능가하는 권력을 쥐고 있다는 점에서 수많은 시기자들이 있었으며, 신왕조 창업에 결정적인 공로를 세운 것으로도 수많은 고려의 유신들을 적으로 만들수 밖에 없었습니다. 뿐만아니라 그의 출신이 비천함이(외가쪽이 천민출신임) 그에게 열등감을 갖게 만들었고, 이를 비웃는 무리들에게 보복을 마다하지 않으니, 그들이 모두 적이 되었습니다. 결정적으로 세자를 새워 대통을 이음에 있어, 수많은 전처 한씨 소생의 왕자들을 제치고, 후처 강씨 소생의 막내왕자 방석의 손을 들어 줌으로 전처 소생의 대군들을 모두 적으로 만들었습니다. 일한 업적에 비해 조선왕조 내내 정도전만큼이나 평가를 받지 못했던 정치가도 없을 것입니다. 우선 정도전은 조선왕조 500년의 사상적 철학의 기반을 다져놓은 사람입니다. 그는 고려말 불교의 폐해를 목도하였고, 불교를 대신할 왕조의 통치사상으로 "성리학"을 택하였고, 강한 숭유억불책을 사용함으로서 단시간내에 나라안에서 불교의 영향력을 없앴습니다. 도심에 자리잡고 있던 절들은 모두 깊은 산 속으로 쫓겨났고, 그것을 대체할 사상으로 집권층에는 성리학을 제시하였고, 하층민에게는 '무속'을 제시하였습니다. 둘째, 그는 조선경국전등의 법전을 지어 받침으로서 조선의 관제등을 기획하였고, 조선의 통치체제의 설계도를 그렸으니 후일 성종대에 가서 "경국대전"이라는 조선 나름의 법치를 할 수 있는 기초를 닦아 놓았습니다. 셋째, 그는 계룡산이다, 인왕산이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새도읍 예정지를 북악산을 주산으로 하는 지금의 한양으로 정하고, 신도시 건설을 총지휘하였으며, 수많은 궁궐문과 궐내전각들, 도성문들, 거리의 이름들을 손수 지음으로 오늘날의 서울을 만들었으니, 조선왕조의 모든 상징들이 그의 손을 거쳤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넷째, 그는 군사력 강화를 위하여, 직접 군사를 모아 진법을 훈련시켰고, 농민도적출신의 명나라 황제 홍무제(주원장)이 전왕조때와 마찬가지로 새왕조를 업신여기며, 여러가지 무리한 요구와 꼬투리로 위협하자, 자주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명나라로 부터 독립하자는 차원에서 요동정벌이라는 거대한 계획을 세우고, 군사력 강화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습니다. 이 군사력 강화의 와중에 왕자들과 대신들이 사사로이 가지고 있던 사병을 혁파하고, 이를 중앙군으로 관리하는 "사병혁파"를 실시하게 되었는데, 바로 이것이 방석을 세자로 세웠던 일과 함께 그를 몰락케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됩니다. 4. 왕자들의 쿠테타 왕위계승에서도 밀리고, 이제는 자신을 보호하는 자위수단인 사병마저 나라에 빼앗기게 된 왕자들은 더이상 밀릴 수 없다고 판단하였습니다. 향후 아버지 태조가 승하한후 동생 방석이 보위에 오르고, 정도전이 그대로 남아있다면 계모 왕후 강씨와 함께 전처소생인 자신들을 가만히 놔두지 않을것이 자명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이씨의 나라에 미천한 출신 정도전이 활개를 치는것만해도 아니꼬왔던 판국에 이제는 자신들의 목숨까지 위태로울 지경에 이르었으니, 가만히 있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특히나 왕조창업에 정도전만큼이나 공이 컸던 태조의 다섯째 아들 정안군 이방원의 반발을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거기다가 정도전과 그 측근 남은 등이 왕자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왕자들을 각 지방의 지방관으로 내려보내려 한다는 소문과 함께 태조가 병석에 누워있는 사이, 세자의 훗날을 위해 왕자들을 제거하려는 음모를 남은의 집에 모여 꾸미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자, 더이상 미룰수없다고 생각한 정안대군은 드디어 거사를 실행합니다. 1398년 8월 정안대군 방원은 이숙번, 조영무, 민무구, 민무질 등의 측근과 30여명의 사병을 일으켜 새벽이 송현에 있는 남은의 집을 기습합니다. 왕자들을 제거하려는 회의를 하다가 새벽에 어이없이 허를 찔린 정도전은 그곳에서 이방원의 칼에 목이 날아갔고, 남은은 도망쳤습니다. 이나라 조선왕조를 기획하고 연출한 자로 볼때 실로 어처구니 없는 허망한 죽음이었습니다. 정도전의 목을 벤 방원은 내친김에 경복궁으로 내달렸습니다. 첫 승기로 세를 불린 방원군은 또다시 궐을 기습하여, 궁중 호위군인 갑사의 무장을 해제하고, 최고의결기구였던 도평의사사(도당)을 접수하여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동틀무렵 도당의 관원들을 위협하여 임금께 '세자를 폐하시고 맏아들 영안군 방과를 세자로 삼으시라'는 주청을 드리게 하였습니다. 모든 권력이 방원이 접수하였음을 깨달은 태조는 어린세자를 살리기 위해 도당의 의견을 들어 윤허하였습니다. 그리고는 폐세자 방석과 방석의 동복형인 방번을 궐에서 나가서 살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궐밖을 나온 폐세자 방석과 방번은 방원의 측근인 이거이의 칼에 목숨을 잃고 맙니다. 임금의 사위 이제도 강씨소생의 남편이라 하여 죽었고, 겨우 도망쳤던 남은도 잡혀와 목이 베어졌습니다. 5. 피로 물든 정권교체 딱 하룻만에 세상이 바뀐 것이었습니다. 이제 정도전의 자리에 이방원이 들어선 것이었습니다. 그때까지도 방석과 벙번의 죽음을 알지 못했던 태조는 뒤늦게 사랑하는 아들과 사위, 그리고 평생을 함께하였던 친구이자 공신들의 죽음을 접하고는 이방원의 잔인함에 치를 떨며, 평생 그를 미워하게 되었을뿐 아니라 자신의 무력함을 원통하게 여겨 그 원한으로 병이 더욱 깊어지게 되었습니다. 정도전과 이방원의 대결은 바로 신권주의자와 왕권주의자의 대결이었습니다. 정도전은 신하들이 권력에서 정치를 하여야 한다는 근대적인 정치가였습니다. 바로 입헌군주제하의 정권을 담당하였던 내각총리처럼 정치를 하였던 것이 그였습니다. 그는 이것이 향후 가장 안정적이고 선진적인 정치체계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태조도 이러한 그의 정치를 묵인하여 주었습니다. 정도전은 이러한 정치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 다루기 어려운 전처소생의 장성한 왕자들을 젖혀두고, 막내 방석을 세자로 세웠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방원과 같은 왕권주의자에게 결국은 패배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조선왕조 초기 왕권과 신권의 다툼에서 왕권이 승리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요동정벌과 같은 정도전의 위대한 계획이 물거품이 되고 만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으며, 향후 조선은 한반도 안에서 웅거하는 나라가 되고 말았습니다.
조선시대의 불교
고려 왕국의 34대 마지막 왕인 공양왕은 조선이 개국하자 원주로 피난을 갔다가 현 왕릉이 있는 자리에 왕비(순비노씨)와 함께 연못에 몸을 던져 자결하였다는 슬픈 운명의 왕이 있다.
공양왕이 원주에서 삼척으로 귀양 간다는 그 곳에서 살해 당했다는 이설(異設)도 있다. 공양왕 4년(1392)7월, 이성계가 즉위하고 8월에 공양왕을 폐하여 공양군(恭讓君)으로 강봉(降封)하고 강원도 원주로 귀양보내 감호(監護)하다가 태조3년(1394)3월에 삼척으로 귀양지를 옮긴 다음 한 달 뒤인 4월에 자객을 보내 살해했다는 설이 있다. 그래서 삼척의 공양왕 릉은 강원도 기념물 제71호로 지정되어 있다.
하지만 경기도 고양에서 자진(自盡)하였다는 정설로 받아들여 1970년 원당동 공양묘를 사적 191호로 지적하였다. 그래서 능이 두 개가 있다.
수륙재
불교의 윤회설 근거 망자의 왕생 발원의식
조선 왕조의 태조가 진관사에서 수륙재를 올려 건국 전후에 희생된 영가들의 천도를 빌었다.
조선 왕실의 국가적 수륙재가 개설된 공식적인 사찰로 수륙재와 왕실의 각종 재를 봉행하는 사찰도 정례화 되었고 지금까지도 수륙도량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동해 삼화사가 수륙재 여는 사사(寺社)로 지정됐다.
고려조가 망하고 조선조가 들어섰을 때 고려조에 충성을 하던 많은 선비들이 개성(두문동)으로 들어갔다. 두문동(杜門洞)은 오늘날 경기도 서쪽 기슭에 지리잡은 옛 지명이다. 고려초에 충성하던 그들이 조선조에 충성을 하기란 썩 내키지 않는 일이다.
그속에 빗장을 잠그고 나오지 않았던 역사의 한 사건, 두문동 두문불출(杜門不出)이란 말은 아마도 사마천의 사기에 등장하는 공자건 두문불출(公子虔杜門不出)에서 유래하는 말로 여겨진다. 두문동으로 들어가서 나오지 않은 선비들은 조선조 태종때에 이르러 모두 불타 죽는다.
왕실 또한 예외는 아니엇다. 왕실의 일화 중에는 관음보살과 관련된 이야기가 많다. 세조가 상원사에 갔을때 백의(白衣)관세음보살이 현현했다고 한다.
조선 개국에 반대한 사람들-----.
고려중기에 퍼진 "십팔자득국(十八字得國-이씨가 왕이 된다는 뜻)"의 예언은 고려 숙종으로 하여금 오얏나무를 심게 한 후 베게 하는 행동을 만들었다.
이렇게 하면 이씨가 저주받아서 왕씨가 계속 승통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숙종 사후 예종, 인종때 인물인 이자겸이 집권하면서 신하가 왕보다 더 높은 권세를 휘두르자 다시 그 소문을 퍼지게 되었고, 이자겸은 그 예언만 믿고 일으켰다가 결국 비운의 죽음을 맞이한다.
그 뒤에도 무신란에 이의민은 십팔자득국의 참언으로 경주민란을 지원하여 자신의 신라왕이 되고자 했다. 이렇듯 십팔자득국의 참언은 고려말기에도 끈질기게 생명력을 유지하며 내려왔고, 위화도 회군 이후 집권한 이성계가 등장하자 그 예언은 전국으로 퍼져 조정에서 억압할 방법이 없었다. 오히려 막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왕이 될 야심을 품은 이성계가 민심은 천심이라는 이유로 자신이 왕위를 오르는 정당성을 만들려고 했는지도.. 이성계가 문하시중에 오르고, 우왕과 창왕을 폐위하고 허수아비인 공양왕을 올리면서 사실상 그는 국왕이나 다름이 없었다. 신진사대부였던 정몽주는 처음에는 이성계를 돕다가 이성계가 고려를 무너뜨리고 왕위에 올라갈 생각인 것을 알자 그에게 저항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이성계의 아들인 이방원에게 피살됨으로써 조정내에서는 반발세력이 없어졌다. 하지만 민간에서는 달랐다. 조정에서 물러난 대신들이나 불교국가였던 고려를 유교사회로 만들어 억압할 움직임이 보이자 불교계와 유신들은 조직적으로 저항했다. 어떤 야사에는 고려가 망하자 의병이 일어났다는 말까지 있었을 정도였다. 우리도 잘알다시피 두문동에 은거한 고려의 유신들이나 왕씨들의 멸족된 사실(이미 조선사 이야기에서 얘기한 사실들이다.)은 조선창업에 반대한 세력이 적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사례일 것이다. 조선실록 또한 그 부분을 완전히 감추지 못했다. "우현보, 이색등 56명이 당을 만들어 반란을 꾀한다"는 유사의 상언이 있었으나 당시 태조는 되도록 그들을 죽이지 않으므로써 인심을 얻고자 했다. "나는 오히려 그들을 불쌍히 여겨 목숨을 살려두고자 한다. 우현보,이색,설장수들은 그 직첩을 회수하고 폐하여 서인으로 삼아 바다로 귀양 보내 죽을 때까지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게 하며, 우흥수, 이숭인등 9명은 그 직첩을 회수하고 곤장 1백 대를 때린 후 먼 지방으로 귀양 보내라 최을의,박흥택 등 25명은 직첩을 회수하고 곤장 70대를 때린 다음 먼 지방으로 귀양 보내며 김남득, 이실등은 직첩을 빼앗고 먼 지방으로 방치하도록 하고, 성석린, 정희등은 각각 그 고향에 안치하도록 하라." (태조실록 1년 7월) 우리는 조선의 건국 세력이 신진사대부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여기에 적힌 사람들 모두 신진사대부라는 점을 볼때 조선의 개국은 당시 신진사대부들에게도 환영의 대상은 아니었다. 그리고 두문동에 들어간 72현 대부분도 성리학을 공부한 신진사대부들인 점을 보면 조선의 개국이 그다지 순탄치 않았음이었다. 더구나 조선라는 국호도 1년뒤인 1393년에 제정되었고, 그대로 관제가 쓰여진 점을 본다면 저항세력을 무마할려고 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조선에 대한 반대세력은 유독 신진사대부뿐만 아니었다. 조선 개국으로 인한 피해자는 다름 아닌 불교계였다. 최근에 강명관 부산대 교수가 쓴 <조선의 뒷골목 풍경>이란 책을 보면 당취(흔히 땡추)에 대한 기록이 나와있다. 구체적으로 금강산파와 지리산파로 당취결사조칙이 보이는데, 금강산파는 세종조의 선교종 통합정책에 반발한 불교세력이었고,지리산파는 조선의 국책에 참여했다가 회의를 느껴 금강산파에 들어갈려고 했으나 금강산파가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자 지리산으로 들어가 따로 조직을 만들었다. 자세한 내용은 직접 책을 참고하도록 하고, 이렇게 그들이 뭉쳐던 것은 조선의 배불숭유 정책때문이라는 것은 대충 짐작이 갈 것이다.
고려말 불교의 부패를 누누이 지적했던 신진사대부(심지어 정도전은 아예 불교를 석가의 잡소리라고 몰아붙였다.)가 조선의 국교를 불교로 할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이성계의 스승이 무학대사이고, 신진사대부들도 적지 않이 불교계 인사들과 교분이 있어서 불교계 인사들은 그렇게 몰아붙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막상 조선이 건국되자 곧 기대는 깨지게 되고 지금 교회처럼 시내에 자리잡고 있던 불교의 사원들이 모두 산으로 쫓겨가게 되고, 점차 조정의 핍박을 받게 되자, 조선에 대한 불만세력이 만들어지게 되고, 금강산이니 지리산으로 뭉쳤을 가능성이 많다. 그 세력은 조선 자체를 부정하는 세력이었고, 조선을 어느때든 전복시킬 움직임을 지니고 있었다. <숙종실록>에는 운부라는 승려가 거병하여 궁궐을 공격할 목적으로 승려를 모아 모의하다가 발각되었고, 조선의 3도적이라 불리는 장길산또한 불교세력과 연계하여 조선을 전복하고자 했다. 물론 모두 실패했지만, 당시 불교계가 얼마나 반체제적인 존재임을 보여주는 사례일 것이다. 그들은 정몽주의 후손을 왕위에 올릴 생각까지 했다니, 조선이 개국된지 300년이 넘은 당시에도 그런 세력이 남아있다는 게 신기하지만, 조선이 개국하고 난뒤 불교의 핍박과 설움을 생각한다면 아니라고 볼 수 없을 것이다.
'불가살(不可殺)↔'불(火)가살(可殺)
조선이 개국되면서 고려말의 관련전설 숭유억불정책이 한창이던 시절,
어느 촌부의 집에 중이 하나 나타났다. 그 여자의 남편은 중을 관가에 고발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 중은 그 여자의 오라비였다. 여자는 오라비를 벽장에 숨겨놓고 남편에게 중을 하나 잡 아놓았다고 하였다.
벽장을 열어보고 자신의 처남인 것을 안 남편은 혈족을 팔려는 아내에 대해 혐오감을 느낀다.
아내를 유인한 남편은 아내를 우물에 빠뜨려 버리고, 한편, 벽장에 몸을 숨긴 처남은 너무나 심심한 나머지 밥알로 동물을 만들고 그 동물은 생명을 지니게 된다.
어느 정도 쇠붙이를 먹고 커진 불가살이는 밖으로 나가버렸는데, 그것이 바로 불가살이인 것이다.
전설에 등장하는 괴물. 불가살이라고도 한다.일반적인 생김새는 곰의 몸에 물소의 눈, 코끼리의 코, 호랑이의 발톱(혹은 호랑이의 손), 코끼리의 꼬리를 하고 있다. 전승에 따라 여기에 날개가 추가되거나 그냥 코끼리 코에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있는 곰의 모습이라고 하기도 하고 드믈게는 검은 벌레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도 한다.
쇠를 먹으며 자라고, 때문에 몸은 단단하기 그지없으며 털이 바늘처럼 뾰족하다. 게다가 거대화 된 상태에서 돌로 만든 성벽따위를 부수는건 일도 아니며 어떤 도검으로도 벨 수 없는 강한 육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불가살(不可殺)이'(죽일 수 없다)라는 이름이 붙었다. 유일한 약점은 불(火). 불가사리라는 이름은 '불(火)가살(可殺)'(불로 죽일 수 있다)이기도 하다.
불가사리가 등장하는 전승이 약 20개 가까이 되는데 그중 하나에서는 탁발을 하던 승려가 밥알을 이겨 불가사리를 만들고, 그 집의 주인에게 "불가살이화가살(不可殺以火可殺, 죽일 수 없지만 불로 죽일 수 있다)"이라는 글을 남겼다 한다.
나중에 불가사리가 쇠를 삼키면서 난동을 부리고 각종 무기를 써도 죽지 않자 나라에서 최후의 방법으로 불가사리에게 불을 붇였다. 불로 태워 죽이려 하였으나 죽지는 않고 오히려 불이 붇은 채로 난동을 부려 온나라가 불바다가 되었다고 한다.
나라에서 불가사리를 잡는 이에게 많은 포상을 준다고 하자 집주인이 승려에게 받은 부적을 불가사리의 몸에 붇였다. 그제서야 지금껏 먹었던 쇠를 죄다 쏟아내고 사라졌다고 한다.
'송도 말년에 불가사리'라는 말이 있다. 무식하고 패악한 자를 빗대는 표현, 혹은 무언가 나쁜 일이 일어나기 전에 보이는 불길한 징조를 가르킬 때 쓰인다. 고려가 망할 무렵 송도(개경)에 불가사리가 나와서 소란을 피웠다는 이야기에서 나온 말이다. 여기서 볼 수 있듯 불가사리는 혼란한 사회상을 반영한 괴물이다. 주식이 쇠붙이(무기)인 점에서도 전란에 시달리는 민초들의 고통을 엿볼 수 있다.
생김새가 비슷한 이수약우나 나쁜 꿈을 먹어치우는 맥과 유사하게 취급되기도 한다.혼란한 사회상을 반영한 대가가 쇠를 먹는 점, 곰, 호랑이, 코끼리 등의 맹수 들이 섞인 모습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악한 요괴라고 생각하나 사실 순진하지만 정의감이 강한 요괴라고 한다.
불가사리는 쇠, 구리, 대나무 뿌리를 먹고 살며 악귀를 쫓는다는 전설 속의 동물로 생김새는 곰의 몸에 코끼리의 코, 코뿔소의 눈, 호랑이의 발, 쇠톱같은 이빨, 황소의 꼬리를 가졌으며 온몸에는 바늘 같은 털이 나 있고 암컷에만 줄무늬가 나있어 이것으로 암수가 구별된다고 합니다.
전설에 의하면 고려말에서 조선초, 나라가 어수선할때 나타났다고 합니다. 쇠란 쇠는 모두 먹어버리며, 아무리 활과 창으로 죽이려 해도 죽일 수 없었는데, 한 현자가 불로 죽이면 된다고 알려줘서 죽일 수 있었다고 하는군요.
죽일 수 없다고 하여 불가사리(不可殺-불가살), 불로 죽일 수 있다고 하여 불가사리(火可殺-화가살)이라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악몽을 물리치고 사기를 쫓는 능력이 있다고 하여 굴뚝에 새기기도 하였습니다. 경복궁 아미산의 굴뚝 밑부분에도 이 불가사리가 새겨져 있는데 이것 역시 굴뚝을 통해 사된 것이 침입하는 것을 막으라는 뜻이 담겨져있다고 합니다.
관련전설 숭유억불정책이 한창이던 시절, 어느 촌부의 집에 중이 하나 나타났다. 그 여자의 남편은 중을 관가에 고발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 중은 그 여자의 오라비였다. 여자는 오라비를 벽장에 숨겨놓고 남편에게 중을 하나 잡 아놓았다고 하였다. 벽장을 열어보고 자신의 처남인 것을 안 남편은 혈족을 팔려는 아내에 대해 혐오감을 느낀다.
아내를 유인한 남편은 아내를 우물에 빠뜨려 버리고, 한편, 벽장에 몸을 숨긴 처남은 너무나 심심한 나머지 밥알로 동물을 만들고 그 동물은 생명을 지니게 된다.
어느 정도 쇠붙이를 먹고 커진 불가살이는 밖으로 나가버렸는데, 그것이 바로 불가살이인 것이다.
두문불출(杜門不出)
두문불출(杜門不出)은 '세상과 인연을 끊고 출입을 하지 않음'을 뜻하는 사자성어로, 이 말에는 고려의 멸망과 조선의 건국에 얽힌 역사가 숨어 있으며 특히 개성상인을 탄생시키게 되는 사건이숨겨져 있는데...두문불출에 얽힌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볼까요?때는 고려 말 조선 초 이성계가 역성 혁명을 일으킨 뒤 고려의 유신 72명이 새 왕조를 섬기기를 거부하고 경기도 개풍군에 있는 두문동에 깊숙이 들어가 죽도록 나오지를 않았다고 하는데...바로 이러한 고사에서 유래한 말이 두문불출(杜門不出)입니다.그래서 두문불출은 집에만 있고 바깥으로 나다니지 않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 우리 모두에게 두루 쓰이고 있답니다. 특히 조선 개국 당시 개성 사람들은 그야말로 역성혁명에 끝까지 저항했는데...저항 핵심 세력들은 개성 광덕산 인근 두문동으로 들어가 새 왕조 참여를 거부했답니다. 이 때문에 두문불출(杜門不出)이라는 말마저 생기게 되지만, 개국 세력들은 산에 불을 질러 이들을 흩어지게 했답니다.
그러나 개국 세력들은 이것으로도 분에 안 찼는지 개국 후 100여 년 동안 개성 사람들이 과거를 치르는 것을 금하게 했는데...개성 뿐만 아니라 서북송탐(西北松耽)이라 해서, 개성 외에 서북 지방과 탐라 등도 그 대상이 됐답니다. 궁여지책으로 결국 개성 사람들은 관계 진출을 포기한 대신 상업을 선택하게 되는데, 조선시대, 혹은 우리 역사를 통틀어 가장 조직력이 끈끈하고 생활력이 강했던 개성상인의 출발점이었답니다. 이후 이들은 방방곡곡에 뿌리를 내렸는데 대개 밑천이 따로 필요 없는 장돌뱅이, 보부상 형태였답니다.
죽음의 골짜기 두문동의 유일한 생존자
고려가 망하고 새 왕조인 조선이 들어서자 고려의 충신들은 선비된 도리로 두 왕조를 섬길 수 없다 하여 모두들 관직을 버리고 집을 떠나 두문동 골짜기로 숨어 들었습니다.
한 번 이곳에 들어간 사람은 두 번 다시 바깥 출입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훗날 두문불출(杜門不出)이란 말이 생겨나기도 한 이곳은 오늘날까지 망국의 한을 품고 스스로 유랑민을 자처했던 충신들의 슬픈 성지로 남아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이 숲속의 은둔자들을 '두문동 72현'이라 불렀습니다. 그런데 원래 이곳에 숨어 들어간 고려의 충신은 모두 73명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한 명은 어떻게 됐을까요?
조선 왕조를 건립하고 첫번째 과거시험을 치르는 태조2년의 어느 시절, 문과는 물론이고 무과시험장도 썰렁하게 비운 채 '충신들은 다 두문동에 있다.'는 소문과도 같이 모두들 두문동 산속으로 들어가 초막을 짓고 도피농성을 벌이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소문이 백성들 사이에서 떠도는 이상 조선 개국은 정당성을 확보하기 어려운 상황이므로, 몇 차례 그들을 회유하기 위해 조정 대신들이 다녀오기도 했고 갖은 협박도 해보았지만 두문동 사람들이 꿈쩍도 하지 않자, 결국 조정은 그들을 설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마지막 통첩을 하게 되었습니다.
"끝까지 반항하면 이 마을 전체를 불태워 없앨 것이다. 이곳에 남아 죽음을 택하던지 조선의 신하가 되든지 결정을 내려라. 시한은 단 하루 뿐이다."
최후통첩이 있던 그날 밤, 두문동 선비들은 마지막 회의를 열었습니다.
"우리들 중 누군가는 살아 남아서 후세 사람들에게 오늘의 이야기를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살아서 나가겠다고 대답하는 사람이 없자, 결국 전체의 의견을 모아 한 사람을 선택하기로 했는데 그가 바로 조선왕조 5백년 역사상 가장 으뜸가는 정승으로 꼽히는 '방촌 황희' 이었습니다.
두문동 대학살이 있던 날, 황희는 눈물을 흘리며 관군들 앞으로 나왔으며, 그리고 5백년 고려왕조의 마지막 충신인 두문동 72인은 끝내 투항을 거부한 채 모조리 불에 타 죽고 말았습니다.
황희는 역사적으로 자기를 죽이고 백성을 위해 오욕의 삶을 살아야 했던 선택된 변절자였습니다.
'그는 늘 원리원칙대로 행동했고, 무엇이 진정 백성을 위하는 일인지 깊이 생각했으며, 정승으로 몇 십년을 지내면서도 끼니를 거르는 일이 허다할 정도로 검소했다.'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황희의 인물평입니다.
이러한 그의 생활태도는 바로 두문동 선비들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으려는 일생일대의 책임감과 홀로 살아 남았다는 죄책감, 그리고 변절자란 오명을 벗으려는 안간힘이 아니었을까요?
아마도 72명의 동지들을 죽음의 골짜기에 남겨두고 홀로 살아 나와야 했던 절박한 현실이 그를 역사에 길이 남을 명재상으로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는 60년에 걸친 관직생활을 했지만 그 세월이 결코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조선 건국 초기에는 국왕과 종종 마찰을 일으켜 4년간의 유배생활 외에도 두 차례의 좌천 경험이 있었고, 아예 파직까지 당하는 정치적 시련도 세 차례나 겪었습니다.
황희는 태조, 정종, 태종, 세종을 거쳐 문종 2년 2월 8일, 병으로 갑자기 죽게 되니 당시 그의 나이 90세 이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 문종편에는 황희정승의 죽음을 전하며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그는 늙어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으며, 항시 한쪽 눈을 번갈아 감아가며 시력을 길러 비록 잔글씨라도 읽기를 꺼리지 않았다. 늙었는데도 기력이 강건하여 홍안백발을 바라보면 신선과 같았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그를 송나라 문노공에 비교하기도 하였다.'
그가 두문동의 변절자로 정치를 시작하여 이 십여 년간 정승을 지내며 가슴 속에 한결같이 간직한 것은 '백성을 위하는 마음' 그것이었습니다.
황희는 조선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정승자리에 있으면서 모든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던 흔치 않은 정치가였습니다.
그는 왕이 아니라, 자신의 명성이 아니라, 바로 백성을 위하여 온 마음을 기울였기에 명재상으로 남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후세 사람들은 그가 죽은 뒤 '세종 같은 임금에 황희 같은 정승이 있었기에 조선에 태평성대가 있었다.'는 말로 역사상 가장 훌륭한 파트너쉽을 이루었던 세종과 황희정승 시대를 그리워 했다고 합니다.
주) 이 자료는 신협에서 대출하고 있는 도서(제왕들의 책사 : 조선시대편, 신연우.신영란 공저)에서 발췌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 옮긴 글(송강재철)
황희정승과 두문불출(杜門不出) 이야기
두문동(杜門洞)은
지금의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 광덕산(光德山) 서쪽과
만수산 남쪽에 위치한 곳으로, 조선 건국을 반대하고,
고려의 신하로 남기를 맹세한 충신들이 모여 살던 곳입니다.
태조 이성계가 등극하면서
고려의 신하들을 위로하기 위한 과거장(科擧場)을 설치하였으나,
그들은 절개(節槪)를 지켜 과거장에 나가지 않고
개성의 북쪽 고개 마루에 조의(朝衣)와 조관(朝冠)을 걸어놓고,
만수산(萬壽山)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두문불출(杜門不出)하면서
고려 왕조에 대한 절의(節義)를 지켰다고 합니다.
후에 그들이 넘은 고개를 부조현(不朝峴), 조의관(朝衣冠)을 걸어 둔 곳을 괘관현(掛冠峴), 함께 은둔하였던 곳을 두문동(杜門洞)이라고 불렀는데, 73명이 모두 이곳에 들어와 마을의 동·서쪽에 모두 문을 세우고는 빗장을 걸어놓고 밖으로 나가지 않았는데
이성계는 이들을 끌어내기 위해 두문동에 불을 질렀지만
단 한사람(황희)을 제외하고 모두 죽음을 맞았다고 합니다.
이때 죽은 사람과 그 후에 죽은 사람등 72명을 두문동 72현이라고 하며
이때부터 한곳에 오래 머무르며 문밖출입을 하지 않는 것을
두문불출(杜門不出)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두문불출(杜門不出)이라는 고사성어의 어원이 여기에서 시작했다고 전해지며
원래의 뜻 그대로 번역하자면
두문동(杜門洞)에서 나오지 않고 세상과의 왕래를 끊다" 입니다.
(요즈음은 집에 콕 박혀 있다, 라는 뜻으로도 쓰입니다)
조선 건국초기에는 두문동(杜門洞)에 대하여 말하는 것조차 금기하였다가,
후세에 절의의 표상으로 숭앙되어,
350여년이 지난 1783년(정조 7년)에는 왕명으로
개성의 성균관(成均館)에 표절사(表節祠)를 세워 배향하게 하였습니다.
이로써 겨우 기록으로 남길 수 있었고, 제사를 모실 수 있었습니다.
72명의 이름은 현재 모두 밝혀지지는 않았고,
신규(申珪), 신혼(申琿), 신우(申祐), 조의생(曺義生), 임선미(林先味),
이경(李瓊), 맹호성(孟好誠), 고천상(高天祥), 서중보(徐仲輔),
성사제(成思齊), 박문수(朴門壽), 민안부(閔安富), 김충한(金沖漢),
이의(李倚), 배문우(裵文祐) 등의 이름이 밝혀져 있습니다.
조선 태조의 회유와 억압에도 의기를 꺾지 않고 미동도 없이
두문불출하던 72현은 두문동에서 황희만을 조선조정으로 보냈습니다.
고려조에 출사한 황희이지만 그의 인물됨과 창창한 앞날을 생각한
두문동 사람들이 새로운 왕조를 위해 일할 수 있도록 내보냈다고 합니다.
이렇게 두문동의 고려유신들이 젊은 황희를 출사시킨 것은
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 (창랑지수청혜 가이탁오영)
- 창랑(滄浪)의 물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고
滄浪之水濁兮 可以濯吾足 (창랑지수탁혜 가이탁오족)
-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내 발을 씻으리라
<굴원의 어부사 中>”란 어부의 말에 깨달음을 얻었던 굴원의 바로 그 마음,
백성들을 생각하는 그 마음 때문이라 생각 합니다.
본시 관직에 뜻을 두지 않았던 방촌 황희는 서른여덟의 나이까지 근 십년간은 면직과 복직을 거듭하면서 주관과 소신을 굽히지 않고 강직하고 청렴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다 태종이 즉위하면서 그의 능력이 인정되었고 병권을 국왕에게 귀속시키는 등의 공적을 쌓으면서 태종의 신임을 받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충녕대군(세종대왕)이 세자로 책봉되자 이를 끝까지 반대하였고
이에 태종의 미움을 받아 삭탈관직 되어 교하지방(지금의 경기도 파주시)에
유배되었다가(1418년) 교하가 서울과 너무 가깝다는 이유로 남원으로 옮겨져서 5년의 유배생활을 더하게 됩니다. 이때 황희는 춘향전의 무대가 되는 광통루(지금의 광한루)를 만들었습니다.
태종 이방원이 아들 세종에게 황희를 일컬어
"그만한 인물이 없으니 반드시 중용하라" 는 당부를 합니다.
1422년(세종 4년) 복직되었으며 환갑의 나이에 강원도 관찰사로 민심을 수습하고 행정을 안정시켰으며, 64세 되던 해(1426년) 이조판서와 우의정,
이듬해인 1427년에 좌의정에 올랐으나 그해 9월 모친상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반구정에 머물다가, 1431년 69세에 영의정으로 나라의 부름을 받습니다.
이로부터 18년간(1449년까지)을 영의정으로 세종을 보필하였으며 백성들의 존경을 받으며 조선의 세종 조를 태평성대로 이끌었던조선의 청백리 명재상으로 역사에 깊이 새겨 집니다.
그러나 황희 정승 일생에서 몇 가지 수치는 바로 두문동에서 나온 것과 자신의 사위 서달이 시골 아전 표운평을 죽인 사건을 덮으려 하다가
파직을 당한 것과(세종9.6.12~21),제주 감목관 태석균이 잘못하여 말을 죽게 하여 사헌부에 갇히자 황희는 그를 구명하는 일을 하다 파직된 일이라고 합니다(세종12.11). 황희를 더욱 골치 아프게 했던 것은 박포의 처와 간통을 했다는 소문입니다.
박포는 '제 1차 왕자의 난'의 공이 자신에게 미흡하게 돌아오자 불만을 품
으나 오히려 이 사실을 알게 된 이방원에 의해 유배되는데 얼마 후
'제 2차 왕자의 난'이 끝난 후 방간의 배후에 있었다는 이유로 참수됩니다.
- 1차 왕자의 난(1398 무인정사):
이방원이 무안대군 방번,의안대군 방석,정도전,남은,심효생 등 제거)
- 2차 왕자의 난(1400 박포의 난):
회안대군 방간, 박포 등의 측근세력 제거)
이때 박포의 아내는 도망 나와 황희의 집 마당 북쪽 토굴 속에 숨어
여러 해 동안 살았는데 황희가 이 때 그녀와 간통하였다는 얘기가 소문으로
전해지기도 합니다.
위 사실이 조금은 과장된 부분이 있다하더라도 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점 등으로 미루어 보아....... <출처 : 인터넷에서 발췌>
[참고] 야사(野史)와 정사(正史)는 다를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