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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 위한 사랑노래’ 은은한 송악골 | ||||||||||||||||||||||||||||||
[길-외암마을①] 여행(旅行)생협 구상차 들른 충남 아산 전통마을 | ||||||||||||||||||||||||||||||
길을 나서는 덴 이유가 있어야만 하는 건 아닙니다. 대개는 목적지가 분명하고 구상에 따라 발걸음을 옮기지만 무작정 나서는 때도 있거든요. 행선지나 호불호 따질 겨를도 없이요. 우리네 삶이 그렇듯이 여정도 뜻대로만 되는 게 아니니까요. 연유야 어떻든 무작정 나서다보면 대개는 불안감부터 갖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낯섦에 궁금증을 주체할 길 없는 여행자에게 그 불안은 흥분을 안겨주지요. 수업 빼먹고 딴 짓할 때 가져봤던 그 무엇이라면 좀 쉬울까요? 작정을 벗어나는 것이기에 일탈은 예기치 않은 즐거움을 줍니다. 언젠가 북아메리카 대륙을 승용차로 횡단하던 때의 그 흥분입니다. 끝없이 펼쳐지는 대륙을 이레나 달려 로스앤젤레스에 당도해 들른 식당에서 누군가에게 여정을 말했더니 “미친놈”이라고 하더군요. ‘미친짓’을 무사히 마친 안도감 때문인지 타박이 그리 싫지는 않더이다.
일상에 사용하는 단어인데도 낯설고, 이질적이지만 친근한 시(詩)어들을 떠올리면 딱 그겁니다. 일상어의 비틀기와 파괴로 낯선 단어와 새로운 메시지를 만들어 내는 조율과 창조. 그러니까 시인들이 만들어내는 ‘절창’은 일상어의 일탈로부터 시작되는 셈이지요. 일탈은 예기치 않은 즐거움 선사 어느 서구인이 그랬다지요. 사람들은 보통 낯선 나라를 여행할 때 두려움에 빠진다고. 하지만 자신은 흥분에 젖어든다나요. 낯선 사람의 말을 들으면 마치 천상의 아름다운 선율을 듣는 기분이라나... 새로운 언어와 마주했을 때면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에 빠져든다고... 요즘 꼬마들도 ‘나마스테’, ‘니하오’, ‘모시 모시’, ‘오하이오’, ‘헬로우’ 인사말을 노래로 배우더군요. 시험 잘 보라는 게 아니기만 하다면 낯선 언어를 배우는 건 정말 즐거운 일일 겁니다.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이질의 문화를 접하고 익힐 수 있으니까요. 여행 한 번에 장광설이라니... 무작정 나섰다고는 하지만 사실 이번 여행이 그리 낯선 것만은 아닙니다. 나름의 이유도 있었고요. 여행을 사랑하는 이들이 모여 생활협동조합을 만들자는 취지가 있었으니까요. 물론 필자야 느닷없이 불려나온 건 사실이지만요.
역마살이라고 하지요. 액운인데, 늘 이리저리 싸돌아다니는. 농경문화에서는 그리 바람직하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우리에게는 유목의 피가 흐르고 있다잖아요. 분위기 따지기 좋아하는 이들이 늘 내세우는 그 ‘노마드’라는. 집단의 운명인 게지요. 저 혼자만의 문제나 말썽은 아닌 겁니다. 역마살도 크게 문제될 게 없는 액운인 셈이죠. 애초에 우리 모두는 세상을 싸돌아다니며 살도록 성(性)을 타고 난 게지요. 여행자의 도는 바로 길 위에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 마주하게 된 셈입니다. 목적지는 아산입니다. 그냥 따라 나선 것이니 거기가 어디든 상관없는 것이지만요. 일탈에 더해 여행자는 길 위에 서면 늘 구름 위를 걷는 느낌입니다. 서양인들도 이런 감성을 ‘ON THE CLOUD 9'이라고 표현하죠. 문자가 달라도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죠. 구름 속에 있는 느낌이라는데, 그럼 ‘9’는? 단테의 신곡을 보면 천국에 이르는 여러 계단이 있는데 9번째를 가장 행복한 순간으로 규정합니다. 비틀즈 멤버 조지 해리슨이 87년 ‘클라우드 9’ 노래를 발표했는데 같은 의미죠. 이 이름의 환각제도 있는데, 미식품의약청이 금지약물로 지정하고 있다는 군요.
유목의 피, 노마드의 운명이란... 하늘 가장 높은 곳에 떠있는 구름을 적란운이라 하죠. 그 아름답고 하얗게 빛나는 걸 부를 때 가장 큰 숫자인 9로 표현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믿거나 말거나. 삼천포로 빠지고 말았군요. 구로 어딘가에서 출발했습니다. 생협 카페 쥔장과 통성명도 제대로 못하고 목례 뒤 부랴부랴 여정에 올랐는데 벌써 아산 어딘가를 달리고 있습니다. 귀농한 어느 분을 만나러 간다는데, 일행 중 한 분이 전화통화를 하더니 면사무소 앞 어느 식당이 좋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가는 날이 장날’인 건 나만 겪는 일은 아닌 모양입니다. 철제문 자물쇠가 덩그렁합니다. 발길을 돌려 찾아간 덴 청국장집. 일탈에는 이처럼 예상 밖 즐거움이 있습니다. 막걸리 한잔에 고소한 청국장 정도. 잠시 아련한가 싶더니 안내자의 재촉이 여간 아닙니다. 안내자는 바쁩니다. 어디에 들르고, 농촌체험은 몇 시부터 하고... 조금은 부담스러울 만큼 재촉을 해대 의아했는데 몇 시간도 안 돼 이해하게 되더이다. 그분의 소소한 질문과 제안은 기자처럼 대책 없는 이들 때문에 나온 노심초사였던 것이죠.
각설하고, 귀농자 따라 맨 처음 찾은 곳은 고구마 밭. 2백평 남짓. 귀퉁이에 서너 고랑을 파고 고구마를 심었는데 넝쿨이 제법입니다. 밑이 잘 들었는지 궁금했는데, 쥔장 한 두둑만 캐랍니다. 때가 이르니 좀 더 두자는 거죠. 우리 때문에 한 두둑은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귀농자 부인이 느닷없이 이방인의 노동을 즐겁게 해줍니다. 고구마를 캘 때가 됐느냐고 물으니 대답이 가관입니다. “내가 그걸 어찌 압니까?” “귀농을 했는데 왜...” 질문이 끝나기도 전인데 즉답입니다. “남편이 가자고 해서 왔어요.” 허를 찌릅니다. 고정관념을 깬 것이죠. “농사짓는 게 아니냐”는 질문에도 촌철살인입니다. “짓죠, 남편이.” 참 재미있는 분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저더러 되레 “고구마 잘 캔다”고 칭찬입니다. 귀농자의 엄숙을 깨는 부인의 태도가 어여쁩니다. “남편이 가자고 해서 왔어요” 고구마는 밑이 덜 들어 몇 순을 캐다 말았습니다. 10월 중순이 수확 철이니 아직은 좀 이르다 싶습니다. 손가락처럼 가느다랗고 빨간 고구마를 한 움큼 집어 들고 밭을 나서려는데, 귀농자 부인 참깨를 수확해야 한답니다. “농사도 모르면서 그걸 어찌 아느냐”는 다그침에 손가락으로 밭두둑 위쪽을 가리킵니다.
거기 노인 한분이 웃고 있습니다. 참깨는 수확해야 할 때라는 것입니다. 조금 더 귀농자 부인을 놀려야겠다 싶어 “참깨는 언제 수확하는 것인 줄 아느냐”고 물으니 “들어서 안다”며 망설임 없이 설명합니다. “참깨 주머니가 처지면 쏟아지기에 지금 해야죠.” 농사일이 뭔지 모르고 관심도 없는 이에게도 자연은 현자가 되도록 가르치는 모양입니다. 황금빛 사막이 오아시스 너머 저 멀리 “연금술사가 있다”고 일러주듯이요. 그러니 무뚝뚝한 남편 따라 관심조차 없던 농촌으로 이주해 온 이 여성은 이제 막 농사의 이치를 깨달아 가는 셈입니다. <다음 글에 계속>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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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여행에 생명의 숨길을 불어넣어 주시네요 ㅎㅎ
여행이 제 살길을 부여하지요.
여행길, 사진 에세이 두 번 다녀온 것처럼 즐거워집니다.
여행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글이군요
기자라는 호칭이 어울리는 화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