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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양산 백학장원 원문보기 글쓴이: hwd
-빈 주머니
오늘날 타이후 호수는 녹조현상의 진원지다. 물에 영양물질이 지나치게 많아져서 식물성 플랑크톤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것이다. 녹조가 물속에 산소를 다 사용하기 때문에 다른 모든 수중 생물이 질식해 죽는다. 독성을 지닌 이 물은 나실 수도 없다.
조류는 신선한 물을 걸쭉하게 냄새나게 한다. 녹조현상의 주범은 남조균의 한 종류인 미크로시스티스 아에루기노사이다. 이것은 인간의 소화기에 매우 유독하다. 타이후 호수는 매년 여름 심각한 공중 보건 문제를 일으킨다.
이 엄청난 녹조현상은 사람이 만든 인재이다. 특히 농장과 목장의 탓이 크다. 지역에서 식품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매년 질소 약 5만 톤과 인 2,000톤이 호수로 흘러들어가 남조류의 먹이가 된다. 화학비료의 역할은 상대적으로 작다. 축산 폐기물이 주요 원인이다.
21세기의 핵심적 질문 가운데 하나는 ‘전통적’ 농법을 쓰는 작은 농장들만으로 과연 도시 인구를 먹일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다시 말해, 지속가능한 방법으로 도시와 문명을 유지할 수 있느냐는 얘기다. 여기에 대한 대답은 우리의 도시, 경제, 식생활, 건강, 그리고 산다는 것과 먹는다는 것의 의미에 대한 우리의 생각에 달려 있다.
1997년에 벨리즈와 과테말라의 국경 지대에서 혼농임업(임업을 겸한 농업)의 현장 연구가 행해졌다. 이 때 이 책의 저자 중 한 며은 옛 마아의 고원 깊숙이 들어가기 위하여 흙 패인 비포장도로를 운전했다. 숲이 있는 산악 지방과는 달리 이곳의 하늘은 바다처럼 넓고 탁 트여 있었다. 상상했던 것처럼 키가 큰 관목은 없었다. 정글의 꽃도 없었다. 커다란 크로커스(사프란)꽃이 꿀을 흘리며 피어 있지도 않았다. 재구어도 없었고, 원숭이 떼도 없었다. 가끔 가다가 깨진 도자기 조각이 땅에 박혀 있었다. 그것은 이곳 언덕에서 곡물을 키우던 옛 식품 제국의 흔적이었다.
천년도 더 이전의 일이다. 이 땅은 고대 마야인들이 일하던 농경지였다. 풀밭이 길을 삼켜버린 다음에는 몇 시간 동안 빈 들판을 걸어 다녔다. 열대의 햇볕에 살이 익었다. 그때 우리는 나뭇잎을 쳐내는 마체테(멕시코인들이 쓰는 날이 넓고 무거운 칼) 소리를 들었다.
한 무리의 농부들이 늦심기를 위하여 직접 들판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들은 몸을 구부려서 허리 높이까지 자란 관목의 뿌리를 뽑아냈다. 손에 든 칼은 마치 시계추처럼 흔들렸다. 화전민인 이들은 들판의 지력이 소진될 때까지 농사를 지었다. 그리고는 처녀지를 찾아서 이동했다. 인구밀도가 낮은 지역에서 이것은 합리적이며 지속가능한 식량 생산 방법이다. 경작과 경작 사이의 오랜 세월 동안에 숲이 회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구가 불어나면 얘기가 달라진다. 화전민 무리가 빈 땅을 찾아다니며 회복이 덜 된 땅을 다시 경작한다. 이러한 땅은 양분이 없고 생태 다양성이 없는 땅이며 다시 회복할 수도 없다. 머지않아 관목 숲으로 바뀔 것이다.
20년 전 과테말라의 국경 지대는 오래된 숲이 자라는 땅이었다. 생물학적 다양성이 끓어오르는 냄비였다. 그러나 10년 전부터 이곳은 비효율적인 옥수수 밭으로 바뀌었고, 오늘날에는 전혀 쓸모가 없는 가시덤불 들판이 되었다.
지난 1만 년 동안 인류 대부분이 이렇게 먹고 살아왔다. 숲을 베고, 태우고, 농사를 지어서 먹고, 떠나고...... 이러한 자연적 농법은 화학 약품으로 땅을 썩게 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많은 사람의 배를 채우지도 못한다. 90억 명을 먹여야 하는 이 세상에서 화전 농법은 비현실적인 식량 생산 방법이다.
2008년 식량 폭동 때 서방의 잘 사는 나라는 겁을 먹지 않았다. 경제가 발전한 이들 국가에서는 가게 지출에서 식료품비의 비중이 그렇게 크지 않다. 일반 가정은 소득의 약 10%에 그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설령 식료품 가격이 50% 오른다고 해도 생활비에서 끼니를 해결하는데 15%를 쓰면 된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가난한 나라의 실정은 다르다. 그곳의 가정은 간신히 연명하는 데 수입의 절반을 쓴다. 여기서 50% 상승이라는 건 가진 돈의 75%를 내놓는다는 얘기다.
또 서방은 가공식품 소비가 많다. 가공식품의 최종 판매 가격은 생산 원료인 옥수수나 석유의 실제 투입 비용과는 크게 상관없다. 소비자는 원가 변동에 덜 민감하다. 예를 들어, 감자칩 한 봉지 가격 중 포장지, 마케팅, 운송비용으로 1달러가 쓰인다고 했을 때 감자 가격이 5센트 오른다고 해도 그 충격은 크지 않다.
2008년에 진짜 고통을 겪은 건 아르헨티나, 파키스탄, 베트남 같은 나라들이다. 이들은 ‘식량 주권’을 지키기 위하여 긴급하게 곡물 수출 제한 조치를 발표했다. 반면에 에콰도르, 니제르,인도네시아 같은 나라는 다른 방향을 택했다. 자국의 식품 시장을 즉각 외국인에게 열어졌혔다. 수입 곡물이 그들의 빈 곡간으로 흘러들기를 기대한 조치였다.
볼리비아는 양다리를 걸치는 도박을 했다. 그들은 관세를 없애는 동시에 밀 수출은 금지했다. 부르키나파소와 페루, 러시아에서는 거리 폭력이 발생했다. 아이티의 한 시위자는 텔레비전 카메라에 대고 이렇게 말했다. “정부가 국민들 끼니도 못 챙긴다면 당연히 물러나야죠” 민중은 결국 총리를 몰아냈다.
늘어나는 거리 폭력에 겁을 먹은 인도 정부는 값비싼 바스마티 품종의 쌀을 제외한 모든 쌀의 수출을 금지했다. 바스마티 쌀도 최소 수출 가격을 톤 당 630달러에서 1,000달러로 올려버렸다. 세계 제2위의 쌀 수출국이라는 인도의 위상이 무색해졌다. 인도에서 쌀을 수입해 먹던 방글라데시 같은 나라는 무척 곤란한 상황에 처했다.
인도의 쌀 수출 금지 조치는 위기를 안정시키려는 의도로 행한 것이었지만, 발작 증상을 보이는 시장의 올가미에 걸려서 또 다른 도미노를 넘어뜨렸을 뿐이다. 쌀의 국제 가격은 더 올랐다. 방글라데시는 당황했다. IMF와 세계은행이 나서서 진정할 것을 촉구하며, 개방 무역에 대한 신뢰를 담은 무미건조한 성명을 발표했다. 다시 말해, 모두가 공황상태에 빠진 것이다.
이것은 18세기에 벌어졌던 일과 매우 흡사하다. 그때는 프랑스만의 위기였지만, 2008년의 경우는 전 세계를 쉽게 뒤흔들 수 있는 문제였다는 점만은 다르다. 2008년에 IMF와 세계은행은 ‘자유 시장은 능력 있고 이롭다’는 그들의 니케아 신조(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결정된 것으로 기독교의 원칙을 정립했다)를 반복했다. 위기의 규모가 다른 것 말고 18세기 위기와 21세기의 위기가 다른 점은, 오늘날은 전 세계가 거의 애덤 스미스의 이론을 맹신한다는 데 있다.
우리는 빵 관리법의 보장을 오래 전에 버렸다. 호밀 흑빵의 가격을 묶어놓는 봉건적 제도로 되돌아갈 길은 없다.
2008년 위기에서 가장 문젯거리가 되는 사실은, 그 해의 농업 수확량이 농업혁명 이후 최고 수준이었다는 것이다. 미국 옥수수, 아시아의 쌀, 아프리카 카사바 농사가 모두 기록적 풍작이었다. 공급은 충분했다. 2008년 말을 향하여 국제 유가가 진정되고 경기 후퇴로 시장이 냉각되자 식품 가격ㄷ3h 덜 고통스러운 수준으로 가라앉았고, 폭동은 멈추었다.
이쯤 되면 질문이 생긴다. 만약 2008년 농사가 흉작이었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가격은 고공 행진을 유지하고, 시위대의 분노도 식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미국 중서부나 중국 북부에 연이어 가뭄이 덮친다든가, 지구 기온 상승 때문에 흉작이 여러 해 이어진다면 어떻게 될까?
2008년 우리는 운이 좋았다. 태양은 빛났다. 비는 적절한 때에 적절한 양만 내렸다. 하지만 지구가 비정하게 나온다면 어떻게 될까? 여름 가뭄 때문에 잉여 식량이 생산되지 못했다면? 그래서 67억 명의 인구가 빈 빵바구니를 보고 공포에 질린다면? 과거의 식량 폭동은 새 발의 피로 여겨질 엄청난 일이 벌어질 것이다.
-돈 : 홍차와 기근
태평양 서쪽의 바닷물은 동쪽보다 따뜻하다. 동남아시아의 습기를 잔뜩 머금은 바다 공기는 태풍으로 발전한다. 반면에, 태평양 동부의 바다 공기는 너무 차가워서 많은 수증기를 잡고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비교적 건조하다. 에콰도르와 페루의 일부가 사막인 이유도 이 때문이다.
1960년대에 기후학자 야콥 비에르크네스는 흥미로운 사실을 알아챘다. 어떤 해에 페루 앞바다의 물이 따뜻하게 바뀌면 남아메리카에는 폭우가 쏟아지고 호주와 아시아에는 가뭄이 든다는 사실이었다. 이러한 이상기후 현상을 엘니뇨라고 한다. 지구촌 전체의 날씨가 마치 거울에 비춘 것처럼 반대로 돌아서는 현상이다. 북아메리카가 온난한 겨울을 보내는 동안에 열대 지방의 땅바닥은 쩍쩍 갈라진다.
실론 섬에 가뭄이 닥쳤던 1876년에 칠레 산티아고의 8월 평균 대기압은 기상 관측을 시작한 이래 가장 낮은 수준으로 떨어졌다. 바타비아에서는 정반대의 일이 벌어졌다. 레바논에서부터 뉴질랜드까지 과학자들은 자신이 속한 지역의 계절별 기압을 꼼꼼히 기록했다. 그런데 항상 변덕스러운 동아시아 몬순이 불어오지 않았다. 매년 나일 강 홍수를 일으키는 아라비아 몬순도 사라졌다. 1877년 나일 강의 수위가 낮아졌다. 이집트는 밀 농사를 망쳤다. 중국 황허강 유역을 지나는 구름도 2년 동안 비를 뿌리지 않았다. 북아프리카와 마드라스에 이어 브라질에서도 기근을 겪었다. 중국의 산시와 웨이 지역에서는 수십만 명이 죽었다.
사태는 더 나빠졌다. 빅토리아 여왕 시대가 끝나갈 즈음에 사악한 엘니뇨가 세 차례 발생하여 자연의 순리를 거꾸로 뒤집었다. 벼랑에 매달린 아시아 농부들의 손을 밟아 떨어뜨리는 꼴이었다. 늘 그렇듯, 굶주림 끝에는 질병이 창궐한다. 쇠약해진 사람들은 말라리아, 선페스트, 이질, 천연두, 콜레라 같은 병에 걸렸다. 대략 5,000만 명이 죽었다. 그렇게 인적자원을 대량으로 잃고 나서 제3세계로 가는 문을 열었다.
희생자들 가운데는 실론의 타밀인도 있었다. 역사를 들여다보자. 엘니뇨는 아시아를 여러 차례 뒤흔들었지만 19세기의 이때처럼 많은 인명을 앗아간 경우는 없었다. 그 이유는 많은 인구가 제국주의적 국제 교역 체계에 의존했기 때문이다. 만약 희생자가 차 같은 수출 작물을 재배하지 않고 예전부터 해오던 대로 다양한 작물을 길렀더라면, 적게나마 생산한 식량을 자신도 먹고 거래를 통해 지역에도 공급했을 테고, 설령 가뭄이 들더라도 재앙으로까지 이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수백만 명이 힘든 시간을 겪었고, 살아 남은 자는 모든 것을 다시 일으켜 세워야 했다. 식민지 일꾼에겐 애석한 말이지만, 빅토리아 여왕의 교역 제국에서 전통적 농업이 있을 자리는 없었다. 실론 홍차 값으로 영국 화폐가 지불되고, 제국의 농산물은 바다를 가로질러 세계를 살찌웠다.
1876년 가뭄이 실론을 강타했을 때, 타밀인 일꾼은 그들이 의존해 살고 있는 농업 체계가 얼마나 취약한 것인지를 가장 직접적인 방식으로 깨달았다. 농사를 망치거나 임금이 줄어들면 먹을 것도 내다 팔 것도 없는 형국이었다. 만약을 대비해 비축해둔 식량조차 없었다. 비슷한 재앙이 제국 전역에 걸쳐서 일어났다. 영국 동인도회사가 인도 내륙 깊숙이 세운 세인트조지 요새에서 영국은 마을 주민에게 전통적 혼합 농경을 그만두고 목화만 재배하도록 강요했다. 목화 값으로는 현금을 주었다. 현금은 새로운 제국주의 경제의 혈액이었다. 인도의 목화 농부는 이 돈으로 이웃 지역의 곡물을 살 수 있었다. 하지만 가뭄으로 목화 농사를 망치고서 보니 곡물 가격은 하늘로 치솟아 있었다. 지역 수요 때문이 아니라 해외 구매자 때문이었다. 영국이 인도의 곡물을 싹쓸이한 것이다. 배고픈 세계 시장에서 부족한 곡물은 자연스럽게 가장 높은 가격을 부르는 곳으로 갔다. 인도 농민은 그들이 항상 먹고 살았던 식랴을 사지 못하게 되었다. 살 수 있는 가격의 범위를 벗어나 버렸으니 말이다.
자유시장이 결국 지역의 구매력을 약화시켜 기근을 만들어 냈다. 물론 식품의 자유로운 이동이 항상 대량 아사 사태의 원인이었던 것은 아니다. 중세 유럽에서는 병충해 피해로 흉작이 들면 우마차를 동원하여 종종 이웃 지역에서 곡물을 들여오곤 했다. 논리적으로만 따지면 운송 방법이 발달한 현대에서 가뭄이 든 나라로 빠르게 식량을 보내야 한다. 증기기관차는 기아 지역에 즉각 식량을 배달하는 진보된 인류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여야 하는 것이었다. 미국 제18대 율리시스 그랜트도 그렇게 믿었다. 그는 1877년의 암담한 기간 동아네 아시아를 순방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미국에서 기근을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 미국처럼 국토가 넓은 나라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긴 합니다만, 기근이 있으려면 전 국토에 기근이 들어야 합니다. 만약에 한 주에 흉작이 들더라도 다른 주에서 작은 비용으로 순식간에 공급량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랜트는 아시아에 필요한 건 철도라고 생각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전신선과 철도망이 비탄에 빠진 농민을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반대였다. 오히려 이것이 가난한 지역의 식량을 멀리 앗아갔다. 그랜트가 깨닫지 못했던 점이다. 통신의 발달은 국제 곡물 시장을 하나로 묶었다. 곡물 거래인은 현재 곡물 가격이 가장 높은 곳이 어디인지를 알았다. 그들은 곧바로 주문을 입력하여 가장 부유한 시장인 그곳으로 곡물을 보냈다. 기차가 곡식을 실어 날랐다.
1876년 11월 30일에 마드라스에서 인도 정부로 편지 한 통이 배달되었다. “기차가 곡물을 수송하면서 모든 곳의 곡물 가격이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습니다. 정부도 이러한 사실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을 것입니다.” 아시아 차밭의 일꾼은 이제 같은 식량을 두고 유럽인과 경쟁해야 했다. 심지어 성공을 거둔 원주민 농부도 입에 풀칠하기 힘들었다. 식품이 쉽게 이동할 수 있게 된 결과였다. 1896년 인도 고다바리 지역에 또 한번 기근이 닥쳤다. 그곳의 한 관리는 풍년이었음에도 곡물 가격이 거의 천문학적이었다면, 그 이유는 가격이 “인도 다른 곳의 상황에 전적으로 영향을 받기 때문”이라고 했다.
중국 차나무를 실론에 싣고 런던 피커딜리 광장에서 홍차를 판매한 세계 교역 체계는 대혼란을 초래했다. 환경 파괴와 사회 붕괴와 그리고 수천만 명의 죽음을 남겼다. 윌리엄 딕비는 1876년 마드라스 기근을 직접 목도한 동시대인으로 다음과 같이 썼다. “19세기 대영제국이 벌인 이 일을 50년 후 역사학자는 어떻게 병기할까? 인도인 수백만 명의 죽음은 결국 인재였다고 말하지 않을까? 아마도 역사의 커다란 오점으로 남을 것이다.”
하지만 인류 역사의 이러한 대참사가 빅토리아 황금기에 일어났음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 시대를 생각하며 윌리엄 제임스의 실용주의를 떠올릴 뿐 거대한 무덤을 잊고 있다. 경제 ‘발전’이 기후의 변덕과 만나 세상에 치명적 타격을 입혔다. 이 모든 것은 아마도 다시 일어날 일일 것이다.
현대 세계의 풍광은 기근 직전의 아일랜드나 스리랑카와 매우 흡사하다. 우리는 농경지 대부분을 극소수 작물을 기르는 데 쓴다. 하지만 수확량을 늘리는 방법은 과거와 달라졌다. 기도와 똥과 도랑에는 더 이상 의존하지 않는다. 이제는 농기계와 화학비료와 농약과 GPS 장치가 달린 스프링클러를 사용한다. 그 결과, 곡물저장탑과 슈퍼마켓 선반은 풍성해졌다. 우리의 아랫배도 함께 불어났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녹색혁명은 예수의 ‘오병이어의 기적’을 현실로 이루어 냈다. 식품 제국은 더 이상 자연의 질소에만 의존할 필요가 없어졌다. 소달구지와 범선의 느린 속도도 극복했다. 식품 제국은 대륙과 대양을 가로질러 확장되고 있다.
20세기 중반에 과학계는 농작물 유전학 연구를 시작했다. 그들은 촘촘히 실어도 빠르게 자라는 품종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작물은 양상추 뿌리나 브로콜리 잎사귀처럼 먹을 수 없는 부분을 키우는 데 생장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았다. 노먼 E. 볼로그도 그 노력에 앞장선 과학자였다. 그의 고향은 아이오와 주의 옥수수 곡창 지대였다. 1940년대 멕시코에 연구소를 연 그는 록펠러 재단의 지원을 받아서 밀과 옥수수의 새로운 우수 종자를 개발하는 일에 착수했다. 볼로그는 밀 줄기의 구조적 문제를 ‘교정’하길 원했다. 연약한 밀 줄기는 무거운 알곡을 지탱하지 못했다. 초기 유전학자들은 밀의 이러한 특성 때문에 애를 먹었다. 알곡이 풍성히 달려도 채 익기 전에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퍽퍽 쓰러졌다. 비료가 상황을 더 악화시켰다. 왜냐하면 양분 과잉 상태에서 지나치게 많은 열매를 맺은 밀은 심지어 새파랄 때 주저앉기도 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볼로그의 연구팀은 난쟁이 품종을 개량했다. 난쟁이 품종의 생산량은 화학비료의 도움으로 중대되어, 헥타르 당 기존 최대의 약 4.5톤이었던 것이 9톤까지 늘어났다. 이 성과로 볼로그는 노벨상을 받았다. 난쟁이 밀과 쌀은 멕시코에서 말레이시아까지 전 세계의 가난한 시골로 퍼져나갔다.
농업 생산성을 두 배로 높인 볼로그가 세계의 굶주림을 해결한 듯 보였다. 단일 특화 작물 재배는 상식이 되었다. 세계 어디에서든 볼로그의 씨앗만이 심어졌다. 연구 시작 50년 만에 그이 씨앗은 무수히 많은 전통 품종을 들판에서 몰아내어 식물학 도감으로 들어가게 만들었다. 한때 식물학성 다양성이 들끓던 세계의 여러 지역이 거대한 단일 재배지로 바뀌었다. 예를 들어, 중국의 농토는 단일 작물의 넓은 바다가 되었다. 토착 품종 벼가 자라는 논은 마치 바다의 섬처럼 떠있다. 그리스에서는 1930년부터 1960년 사이에 사실상 모든 토착 밀 품종이 사라졌다. 오늘날, 사람과 가축이 먹는 거의 모든 곡물은 볼로그와 그의 학파가 꼼꼼한 현장 실험을 통해서 만들어낸 것이다.
그런데 볼로그의 씨앗은 유전자 잠식 말고 다른 문제도 발생시킨다. 더 직접적이고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 볼로그의 작물은 자연 퇴비나 거름만으로는 이것이 자라는 데 필요한 영양을 다 공급하지 못한다. 다수확 작물을 기르는 농장은 다량의 화학비료를 사용해야 한다. 과거 1950년대에 일본은 볼로그가 개발한 벼를 심었다. 그런데 1950년부터 1974년 사이에 비료를 만드는 에너지 비용을 400퍼센트 상승했다. 농기계 기름 값은 12배 올랐다. 하지만 쌀 가격은 50% 상승에 그쳤다. 수학적으로 따지면 그만 두어야 옳았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다른 방식으로 정리해보자. 논에서 생산된 전체 칼로리 에너지를 그것을 생산하는 데 들어간 에너지와 비료하면 이해가 빠르다. 1950년에 일본은 1칼로리를 투입하여 1.27칼로리를 얻어냈다. 1974년이 되자 이 비율은 0.38칼로리로 떨어졌다. 이후로 우리는 많은 온실 채소를 기르기 시작했다. 이것은 에너지 비율로 최악일 것이다. 북쪽에 있는 많은 나라에서 온실 재배는 흔한 일이다. 예를 들어, 미국 동북부 메인 주에서 기른 토마토가 12월 보스턴의 슈퍼마켓에 꾸준히 진열된다.
볼로그는 농부와 해충 사이의 ‘군비경쟁’에 불을 댕겼다. 비자연적인 풍작을 해충은 알아차렸다. 그리고 자신의 몫을 원했던 만큼 해충 발생이 증가했다. 농부는 ‘화학 무기’로 앙갚음 했다. 1950년대 새로운 작물에 창궐한 끝동매미충을 예로 들어보자. 아시아 농부들은 지체 없이 맹독성 살충제를 뿌렸다. 이것은 끝동매미충뿐만 아니라 해충을 잡아먹는 거미도 죽였다. 무엇보다 끝동매미충은 화학 공격에서 살아남았다. 하지만 끝동매미충의 천적은 그러지 못했다. 해충의 공격은 더욱 거세졌다. 더 안 좋은 소식은, 살충제 남용으로 해충이 농약에 내성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항생제 남용과 같은 결과였다. 일본은 1970년대 들어 어떤 살충제도 효과가 예전 같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후로 화학자들은 끝동매미충의 유전자와 끊임없는 경주를 벌여왔다.
하지만 만약 한 가지 작물로 들판이 뒤덮이지 않았다면 농약의 떨어진 약효를 탓할 필요가 없었다. 다양한 작물을 기르며 농약 사용을 자제하는 농장에서는 거미나 새 같은 자연 천적이 벌레를 없애는 역할을 대신한다. 지평선까지 밀밭만 펼쳐진 순수한 단일성 속에서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 농업전문가가 쓰는 흔한 전략은 볼로그가 만들어낸 작물을 더 크고 더 세고 더 효용 있게 개선하는 것이다.
한 무리의 생태학자들이 연구를 시작했다. 병충해로 인해 생태계 혼란이 일어났을 때 왜 어떤 때에는 지속적 피해를 입지 않는가하면, 다른 때에는 붕괴하고 마는지 그 이유를 알아내기 위한 연구였다. 그들은 그 원인을 캐기 위해 플로리다의 에버글레이즈 습지부터 캐나다 온타리도 북부의 북방침엽수림에 이르는 다양한 장소를 연구했다. 그리고는 생태 붕괴의 재앙이 임박했을 때 나타나는 세 가지 경고 신호를 파악했다. 환경적 죽음을 알아보는 일종의 진단 키트인 것이다. 그것은 명쾌하고 아주 단순한 신호이기 때문에 직관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첫째, 생태계의 생물량이 너무 많은 상태이다. 풀과 나무로 가득한 장소는 불이 나거나 아니면 사악한 벌레의 관심을 받기 쉽다. 생산성이 덜한 땅은 불에 탈 땔감이 부족하고 벌레도 지루해한다. 푸르른 땅이 거친 땅보다 더 취약하다.
둘째, ‘연결성’과 관련이 있다. 만약 식물이 마구잡이 덤불 숲에서 엉망진창으로 섞인다면 화재와 벌레는 더 빨리 퍼질 수 있다.
셋째, ‘단일성’이다. 만약 덤불숲이 양치식물의 단일 품종으로 이루어져 있다면, 이 양치식물을 먹는 벌레는 단지 운이 없는 몇 개 개체가 아니라 숲 전체를 먹어버릴 것이다. 그래서 생물다양성이 낮을수록 취약성은 높아진다.
플로리다 대학교의 생태학자인 버즈 홀링이 이 세 가지 경고 신호를 명확히 정리했다. 홀링의 생태계 이론에 따르면, 생물량과 연결성이 둘 다 높아져 있지만 다양성은 떨어진 상태에서 생태계는 필연적인 붕괴를 맞는다고 한다. 불씨 한 톨이나 배고픈 귀뚜라미의 울음소리에 무너진다는 것이다.
농업에 있어 보편적 법칙을 보면 효율적 농업을 하는 들판은 필연적으로 생물량이 많고, 밀도가 빽빽하며, 재배 작물이 단일화되기 때문이다. 볼로그가 만든 교잡종은 이 과정을 더욱 극단으로 몰아갔다. 아일랜드인들이 1845년에 알아차린 바대로, 생산성이 높고 빽빽이 심어진 감자 밭은 도리어 굶주림을 가져왔다. 나쁜 날씨와 나쁜 병균이 다가오고, 또 정부가 식량 안보보다 수출을 촉진하는 정책을 펼 때 사람들은 더욱 굶주린다.
유전자 변형은 결국 도구이다. 관개수로나 화학비료, 냉장 기술과 마찬가지다. 이것 모두가 인류 문명을 먹이고 60억 인구가 살아있게 해주었다. 하지만 도구는 잘못 쓰면 몽둥이가 된다. 망치로 못이 아니라 엄지손가락을 내리치는 게 된다는 말이다.
-시간 : 공정무역과 유기농, 슬로푸드
공정무역 농장은 욕심 많은 도시의 지주나 회계사가 소유한 플랜테이션이 아니라 소규모 가족농원을 의미했다. 간단히 말해서, 공정무역 커피는 생산 농부를 착취하지 않고 그들의 인격을 존중한다는 의미였다. 말 그대로, 무엇보다 ‘공정’한 상품이었다.
‘막스 하벨라르’ 이후로 많은 공정무역 상표가 등장했다. 그리고 ‘막스 하벨라르’가 론칭한 1988년부터 세계 공정교역 상품 시장은 팽창하여 쌀, 코코아, 설탕, 꿀, 오렌지 주스, 신선한 과일, 꽃, 목화, 축구공 등을 포괄하게 되었다. 2007년에 공정무역 제품은 도합 34억 달러의 매출을 올렸다. 대부분의 개발 경제학자는 공정 무역이 과테말라나 케냐 같은 나라의 특정 지역 상황을 개선해왔다는 데 동의한다. 그럼에도 그 성공의 이면에는 역설이 존재한다.
공정무역은 라이선스 즉 인증 제도이다. 만약 강제력이 없다면 인증은 무용지물이다. 지난 2000년, 미국의 커피 체인점, 스타벅스는 공정무역 인증 커피를 선보였다. 이상주의자들은 이 같은 행보에 박수를 보내면서 대기업과 소비자 그리고 인권의 행복한 삼자 결합에 크게 기뻐했다. 어쩌면 세계 식품 제국이 실제로 선한 힘일 수 있다는 희망을 갖기도 했다. 하지만 10년이 지난 지금, 스타벅스의 이 실험은 아무리 좋게 말해도 서투른 짜깁기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사람들은 알게 되었다.
커피 포장지에 공정무역 로고를 박기 원하는 커피 제조자와 판매자는 원래 사용하는 원두의 최소 5퍼센트를 공정무역 제품으로 구입해야 했다. 그런데 스타벅스가 공정무역 단체들과 계약을 시작하면서 이 원칙이 무너졌다. 미국 공정무역 컨소시엄인 트랜스페어가 스타벅스에 예외를 인정한 것이다. 이 카페라테 거인의 공정무역 원두 구입량이 최근까지도 전체 원두 구매의 5퍼센트를 상당히 밑도는 수치였음에도 불구하고 매장에 공정거래 포스터를 붙여놓았던 것이다.
공정무역 운동의 이상, 즉 노동자 역량 강화, 소비자의 추가 지불액을 공동체 프로젝트에 재투자하는 것, 합당한 수준의 최소 가격 보장은 점점 희미해져 갔다. 영국 리즈 대학교의 공정무역 전문가인 앤 탤런타이어 박사는 케냐 농업 시장을 깊이 연구했다. 그녀에 따르면, “공정무역에서 역량 강화의 성패는 누가 구매를 하는지와, 또 구매자인 이들이 공정무역의 초기 가치를 얼마나 계승하고 있느냐에 전적으로 좌우 된다”고 한다.
예를 들어, 공정무역 커피는 항상 소규모 가족 농장에서 생산해 왔다. 하지만 오늘날 공정무역 인증 단체는 ‘소규모’의 조건을 완화하여 플랜테이션 농장의 커피콩도 받아들이라는 압력을 받고 있다. 다른 품목에서는 벌써 여러 해 전에 인증 규정이 완화되었다. 현재 공정무역 바나나와 홍차, 포도주는 모두 플랜테이션 상품이다. 대규모 홍차 생산자는 가족 농장에서 구매하지 않는다. 영세 재배자가 무리를 이룬다 해도 선진국의 과일 바구니를 충분히 채울 만큼의 바나나를 기르지 못한다.
캘리포니아에서 미국 유기농 식품 인증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20세기 초부터 캘리포니아는 산업적 원예 농업의 심장이었다. 캘리포니아 과수원이야말로 집약적 기계화 농업의 선봉이었다. 그곳에는 화학비료와 기업 자금의 보슬비가 내렸다. 1970년대 오일쇼크로 농약과 비료의 값이 오르자 이러한 화학물질을 쓰지 않는 농업은 유행이 되었다.
카슨의 책과 오일쇼크 때문에 초창기 유기농 농부는 주로 화학 물질을 쓰지 않은 데 초점을 맞추었다. 하지만 유기농법이란 공장에서 만든 질소 비료를 쓰느냐 아니면 소똥 거름을 뿌리느냐의 문제, 항상 그 이상이다. 대중은 유기농을 ‘지속가능성’ ‘자연 존중’ ‘다양성’ ‘균형감’ 등의 단어를 이해한다. 이것을 다 포괄하는 말은 아마도 ‘자연적 온전함’일 것이다. 유기농은 새로운 융합이 아니다. 1920년대 독일의 급진적 교육 개혁가인 루돌프 슈타이너는 ‘생명 농업’의 원칙을 세웠다. 그는 농장이 반듯이 “그 자체로 하나의 온전한 유기체여야만 하는데 이것은 ..... 자연을 모방하며, 자연 환경과 조화를 이루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생명 농업을 하려는 농부는 여러 가지 작은 단계적 일들을 해야만 한다. 예를 들어, 경작지 주변에 덤불을 두고 새의 서식지가 되게 하는데, 그럼으로써 해충 개체수를 낮게 유지할 수 있다. 해충이 적다는 것은 살충제를 덜 뿌려도 된다는 의미이다. 더불어 탐욕스레 질소를 해치우는 곡식 작물과 질소를 고정하는 콩과 식물을 함께 심어서 토양의 건강한 화학적 균형을 유지하고, 그럼으로써 비료의 사용을 줄일 수 있다. 슈타이너는 이 방법을 이미 1920년대에 썼다. 화학적 합성물을 너도나도 땅에 쏟아 붓기 직전이다. 그러니까 슈타이너의 사상은 오늘날 유기농의 맥락과는 다소 다르다. 그는 농장을 농산물 공장이 아니라 환경의 일부로 보는 방법을 설명했다. 이러한 농장만이 미래에도 계속해서 식량을 생산할 수 있는 것이다.
미국의 연방 유기농법은 1990년 유기농식품생산법의 입법과 함께 시작되었다. 유기농 상표 난립과 제멋대로인 기준을 하나의 체계로 통일하기 위하여 마련한 법률이다. 1980년대에 너도나도 유기농을 표방하며 많은 부작용이 잇따랐던 것이다. 하지만 유기농 식품생산법의 구체적 실행 방안을 놓고는 험악한 분위기의 논쟁이 뒤따랐고, 이것이 정리되기까지는 또 다른 10년이 걸렸다. 2001년 4월 21일에 미국은 마침내 변화의 큰 틀을 마무리 짓고 먹을거리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이제 ‘유기농’이라는 말은 업체의 주장을 담은 형용사가 아니라 식품 법률 용어가 되었다.
캘리포니아 대학교 산타크루즈 캠퍼스의 사회학자인 E. 멜러니 뒤퓌는 미국 농무부가 젖소에 성장 호르몬 투약을 승인하면서부터 유기농 유제품이 시장에 대규모로 풀리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재조합소 성장 호르몬’ 즉 RBGH는 합성 호르몬이다. 이것을 젖이 나오는 포유동물에 접종하면 산유 촉진 효과가 있다. RBGH를 쓰는 목적은 젖소의 병이나 충치를 치료하기 위함이 아니다. 전적으로 상업적인 이유 때문이다. 그 우유를 마시는 사람에게도 전혀 이로울 게 없다는 얘기다. 따라서 생화학 농업 대기업인 몬산토가 이 호르몬을 미국의 낙농업계에 공급했을 때 의식 있는 소비자는 거부감을 나타냈다.
이 논쟁을 더 잘 이해해 보자. 유기농 식품을 찾는 소비자는 사실 두 부류이다. 한 그룹은 오늘날 만연한 온갖 농약과 가축 항생제, 화학 첨가물 등으로부터 자신의 몸을 지키고 싶어 한다. 다른 한 그룹은 산업적 농업 자체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여기서 나온 먹을거리도 원칙적으로 나쁜 것일 수밖에 없다고 본다. 유기농 식품을 구매하는 대부분의 사람은 아마도 이 두 부류 사이의 어디쯤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마침내 유기농 식품의 정의를 내린 미국 농무부는 지속가능성을 전체적으로 고려하기보다는 단순히 생산에 투입된 재료의 성격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 결과 유기농은 농부가 비료로 무엇을 쓰며, 가축에게 무엇을 먹이며, 해충을 무엇으로 죽이는지의 문제가 되었다. RBGH와 같이 명백하게 비자연적인 성분은 금지되었다. 하지만 젖소가 사는 곳에 관해서는 많은 말을 하지 않아서 오로라 유업도 유기농으로 인정되었던 것이다.
미국 정부가 내린 ‘유기농’의 정의는 결코 ‘지속가능성’과 같은 것이 아니다. 하지만 루돌프 슈타이너의 정신을 계승한 많은 농부는 유기농과 지속가능성을 다로 떼어 생각하지 않는다. 슈타이너주의자들은 오로라 목장과 같은 사육 시설에 반대한다. 갇혀서 곡물 사료를 먹는 가축은 ‘유기농’이고 뭐건 간에 기존의 것과 같다고 주장한다. 미국 유기농 인증 제도의 문제점은 우리의 건강과 지속가능성, 동물보호, 기후 변화 등과 관련한 많은 문제에 여전히 의문점을 남기고 있으며, 그 모든 것을 ‘생산 투입 재료’라는 잘 맞지 않는 잣대로 잰다는 데 있다.
오늘날 베네치아는 다른 종류의 식품 제국의 심장이다. 바로 ‘슬로푸드’라는 문화이다. 이것은 육두구를 교역하는 대신에 뉴스레터와 토론회로 교류한다. ‘생태적 미식’ 운동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들은 산업 식품 체계를 원래로 되돌리기 위해 노력한다. 슬로푸드 운동의 브레인은 카를로 페트리니이다. 전직 포크 음악 페스티벌 기획자인 그는 1989년 국제슬로푸드협회를 만설립했고 지금도 여전히 이 조직의 최고대변인이자 전략가로서 활동한다. 페트리니 추종자는 그를 슈퍼마켓 문짝에 ‘반박문’을 못 박은 현대판 마르틴 루터로 생각한다.
페트리니는 슬로푸드 운동을 이탈리아 시장에서 맥도날드를 몰아내기 위한 십자군 운동으로 시작했다. 패스트푸드는 단지 올바른 맛과 식사의 즐거움을 앗아갈 뿐만 아니라 문화를 파괴한다고 보았다. 그는 전통 요리를 만드는 데 쓰이는 지역 토착 품종의 파프리카나 돼지고기 같은 전통 식재료 자체가 사라질 것을 우려했다.
슬로푸드는 말하자면 보수적 철학이다.
지역식품, 이것은 슬로푸드가 꿈꾸는 ‘새로운 시골’의 핵심이다. 소비자는 유기농 제철 청과물과 생태 농장의 고기를 구매한다. 그럼으로써 땅의 환경 수용력을 넘지 않고 자족할 수 있다. 이러한 이상은 인류가 길게 꼬아온 식품 교역 역사에 대한 포기 선언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모순도 많다. 예를 들어 이런 것이다. 슬로푸드는 이탈리아 캄파니아 지방의 다양한 치즈를 세분한다. 그런데 식품은 영향을 주고받으며 항상 바뀌어왔으므로 지역 구분이란 어떤 의미에선 무의미하다. 먹는다는 것은 미국 버몬트의 멕시코 레스토랑에서 이탈리아 발폴리첼라 지방의 와인을 따르는 것만큼이나 유동적이다. 아마존 밀림이나 뉴기니의 이름 모를 강을 따라 올라가 만나는 고립된 부락이 아니라면, 순수한 지역 토착 음식 같은 건 없다. 식료품을 뒤섞는 건 인류의 본성이다.
-결론
영국 정부의 과학 수석보좌관인 존 베딩턴 교수는 2030년경 세계 인구가 83억 명을 돌파하면 세계의 식량 수요는 50퍼센트 급등할 것이며, 물 수요도 30퍼센트 늘어날 거라고 2009년 언론에서 밝혔다. “설상가상인 겁니다” 그는 말한다.
최근에는 보수적 성향의 학술지조차도 지구의 기후 변화 시 식량 생산량 추산치를 너무 낙관적으로 잡고 있다는 데 동의한다. 사실, 식량 생산량 감소 현상을 처음부터 알아차리기는 힘들다. 지구온난화로 고위도 지역의 식물 생장 기간이 길어지면 일시적으로 세계 식량 창고가 가득차게 된다. 많은 전문가가 그렇게 예측한다. 하지만 그런 다음에 지구 기온이 2도 이상 올라가면 대부분의 땅은 모기 습지나 불모지로 변한다. 십중팔구 그럴 것이다.
이제는 단기적 처방도 효과가 없어 보인다. 오존 수치를 고려하는 새로운 방법도 무용지물일 판이다. 사람들은 여전히 아이를 낳고 있다. 이 추세가 계속된다면 2050년 전에 세계의 곡물 소비는 56퍼센트, 가축 소비는 90퍼센트까지 증가해 버린다.
우리의 식품 체계는 하나로 묶여 있다. 역사상 유래가 없다. 현대 농업 업계는 브라질의 가뭄을 중국의 손해로, 이릉 다시 뉴저지의 빈 쇼핑카트로 바꿔놓을 잠재력이 있다. 완충장치는 없다. 어떤 파라오의 옥수수 창고도 연이은 흉년을 이겨내지는 못한다. 지구의 토착 작물은 기업의 이윤에 밀려 사라지고 있다. 토양을 지지해준 고대의 그물망이 엷어지는 것이다. 우리의 식품 체계는 ‘담수’와 ‘냉장’에 중독되어 갈지자걸음을 걷는다. 만약 통통한 실험실 작물이 구름 같은 해충 떼에 먹힌다면, 그걸로 끝이다.
지속가능한 식품 제국이 존속하기 위한 조건은 첫째, 작고 다양성 있는 농장이 그 대부분을 차지해야 하며 둘째, 식품을 공급받는 소비자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생물지역주의’라고 한다. 하지만 생물지역주의 모델이 60억 명의 인구를 안전하게 먹이기 위해서는, 즉 리스크를 분산하기 위해서는, 이것이 국제교역망 안에 자리를 잡아야 한다. 세계 식품과 지역 식품은 서로의 약점을 상쇄한다. 지역 식품은 에너지를 절약하며 먼 곳에서 일어난 재난에 직접적인 영향을 덜 받게 한다. 세계 식품은 경제적으로 효율적이며 우리의 식탁에 망고와 연어를 올릴 수 있게 한다. 각 지역을 어느 정도 전문화하기 위해서라도 이러한 국제적 식품 체계는 필요하다. 이를 통해 국제 교역은 토지의 비효율적 사용을 막는다. 왜냐하면 지역에서 효율적으로 기를 수 없는 작물은 멀리서 싸게 구입해 오는 편이 낫기 때문이다. ‘세계’와 ‘지역’의 이러한 조합은 생물지역주의 체계가 제한적으로 안착된 형태라고 하겠다. 이것은 현대 식품 제국을 유지할 수 있는 최선의 희망이다.
만약 사람들이 소비 활동에 쓰는 노력의 작은 일부라도 먹을거리에 관해 생각하고 신경 쓰게 할 수 있다면, 우리는 현대 식품 제국이 역사의 뒤안길로 처참히 사라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리라. 공동체 지원 농업, 농장 직거래 장터, 가족 텃밭 등의 작은 발걸음이 우리를 더 안전한 길로 안내해 줄 것이다.
그 길로 접어든다면 도시와 가까운 교외에서 가축을 키워야 한다. 여름에는 풀을 뜯기고 겨울에는 지역의 건초를 먹인다. 농부들은 가축에게 약물을 투약하고 축사에 가두고 싶은 유혹을 뿌리쳐야 한다. 도축을 끝낸 고기는 도시의 시장까지 몇 킬로미터만 실어가면 된다. 이웃 농장에서는 사탕무와 곡물과 나무를 기를 것이다. 곡식이 자라는 들판에는 가축의 분뇨를 뿌린다. 영양분의 균형이 유지되기 때문에 토양은 망가지지 않는다. 단년생 작물보다 다년생 작물을 심는 편이 환경 보존에 유리하다. 왜냐하면 다년생 작물은 뿌리를 더 깊이 빽빽하게 내려서 지하수를 효과적으로 빨아올리기 때문이다. 화학비료는 갈수록 비싸진다. 많이 쓰고 싶어도 쓸 수가 없다. 농부들은 농약을 퍼붓는 대신 새와 같은 천적의 활용에 기댈 것이다. 농장의 다양한 식물군이 새떼를 끌어들인다.
이러한 농장을 운영하려면 비용이 많이 든다. 특히 인건비 부담이 크다. 하지만 실행하기는 힘들지만, 할 수 없는 일도 아니다. 시골에도 이제는 보수가 괜찮은 직업이 많아져야 한다. 소비자는 단순한 구매자가 아니라 공동체 지원 농업의 개념으로 이러한 농장을 후원한다. 참여 소비자는 한 작물을 일정 비율로 구입하거나 혹은 선주문을 넣는다. 하지만 밀과 쌀과 옥수수는 여전히 멀리 있는 기업 플랜테이션에 의존해야 할 것이다. 또한 글래스코나 몬트리올의 지역 농장은 아보카도를 생산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혁명적인 계획임은 틀림없다.
변화의 속삭임은 이미 들려오고 있다. 예를 들어, 캐나다 온타리오 주의 농촌 마을 메퍼드에는 ‘100마일 마켓’이 있다. 인근에서 생산한 천연의 시골 지역 식품만을 파는 가게이다. 바버라 케이 씨가 주인장이다.
“식료품점을 대신할 생각은 없었어요.” 케이의 말이다. “우리 가게에는 오렌지도 없고, 청소용품도 없는 걸요.” 오렌지 주스는 없지만 지역 우유는 있다. 1파운드에 1.99달러밖에 안 하는 인스턴트 스테이크는 없지만 풀만 먹여 키운 소의 등심과 지역 아이스크림은 있다. 메퍼드 인근의 농부와 커피 로스터, 양봉인, 치즈 장인 등이 생산한 상품을 위탁판매 형태로 가게에 진열해 놓는다. 그 대가로 케이는 일정 비율의 수수료를 취한다. 소규모 생산자는 소비자의 장바구니와 가까워진다. 이것은 손바닥 식품 제국을 운영하는 간단하고 효율적이며 지속가능한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