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중군자 장계향의 두들마을 유적해설
#향토사 두들마을 소개 -1-두들마을 개요
노블리스오블리주를 실천한 재령이씨 집성촌 '두들마을'입니다.
두들마을은 퇴계 이황의 학맥을 이은 석계 이시명 (1590~1674) 선생이 1640년 터를 닦은 곳으로
훌륭한 학자와 시인,독립운동가 등이 배출되었습니다.
한국문학의 거장 이문열 작가의 고향마을이기도 한 이곳에는 광산문우를 비롯하여 석계고택,
석간고택. 주곡고택. 석천서당 등 30여채의 전통가옥들과 한글로 쓴 최초의 음식조리서
'음식디미방'의 저자 여중군자 장계향 선생을 기리는 예절관과 유적비, 유물전시관, 전통반가음식전시관,
유교음식교육관 조선 후기 양반가의 전통음식을 맛볼 수 있는 "음식디미방체험관". "전통주체험관"등이
마을의 주산인 광려산 아래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마을 들머리에는 언덕밑에 주남천 (인치천) 흐르고, 마을 안산인 병암산 밑으로 화매천이라는 내가
흐르고 마을 앞에는 '섬들(섬모양의 농지)'있습니다.
시냇물이 산태극,물태극으로 굽이 돌아 산과 맞닿은 언덕머리에 자리했다하여 두들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합니다.
마을 앞을 흐르는 냇가에 서 있는 암벽과 바위에는 석계 선생 넷째 아들 항재 이숭일이 새겼다는
서대. 세심대. 낙기대,동대 등의 글씨가 아직도 뚜렷하게 남아 있습니다.
#향토사 두들마을 - 2 -석계고택 - 경북도민속자료제91호 90.8.7.지정
조선 인조,현종 때의 학자인 석계 이시명(1590-1674)선생과 정부인 안동장씨가 살던 집으로
#향토사두들마을 -3- 石川書堂석천서당
석천서당은 1640년(인조18)에 영해에서 석보로 온 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이 터를 잡고
‘석계초당’을 지어 13년 동안 살았던 곳이다. 1674년에 석계 선생이 안동에서 세상을 떠나자
1676년(숙종2)에 상을 마친 넷째 아들 항재(恒齋) 이숭일(李嵩逸, 1631~1698)이 고향으로
돌아와 선업을 이어왔다.
이숭일이 세상을 떠난 뒤 70여 년 만에 만와(晩窩) 이인훈(李仁壎)의 주도로 퇴락한 초당을
개축하여 ‘석천서당(石川書堂)’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선친인 이시명의 호 ‘석계(石溪)’를
피해서 ‘천(川)’자로 바꿔서 이름을 지었다고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1711∼1781)의 기문에
실려 있다.
좌해(左海) 이수영(李秀榮, 1809~1892) 의 『석천서당중수기(石川書堂重修記)』를 살펴보면
석천서당은 1891년에 다시 한 번 중수를 거쳐서 오늘날의 규모를 이루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향토사 두들마을-5- 유우당-경북도문화재자료제285호 94.4.16. 지정
재령인 이상도(1733-1835)가 건립한 가옥인데.장자인 이기찬의 호를 따라 당호를 유우당이라
하였다.
이 집은 원래 주남리에 있던 것을 후손인 이돈호가 현위치인 두들마을로 이건하였는데,이돈호는
파리장서 사건에 가담하여 독립운동에 이바지한바 있으며, 몽구 이병각시인의 생가이기도하다.
당초 'ㅁ'자형태였으나 이후 기능이 부가되어 '날개집'형태가 되었다.
사대부들의 예학사상과 엄격함.그리고 도덕성을 느낄 수 있는 고택이다.^^
*출처: 영양문화재대관
#향토사 두들마을 -7-원리리도사댁 만석꾼집
1800년대 건립. 두들마을의 좌후측에 남향하여 자리잡고 있는데,인근에서는 이 집을 만석군집
이라고도 부른다.
전면에 세운 3칸 규모의 평대문을 들어서면 마당을 사이에 두고 ㅁ자형의 정침이 자리잡고
있으며 정침의 우측에는 4 칸 반 규모의 초옥인 방아간채가 배치되어 있다.
정침은 정면 9칸.측면 5 칸 규모의 ㅁ자형 건물이다.사랑채는 중문칸의 좌측에 자리잡고 있는데,
평면은 마루방을 중심으로 좌우에 1칸과 2칸씩의 온돌방을 연접시켰으며 전면에는 퇴칸을 두었다.
안채는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건너방과 안방을 연접시켰으며 안방의 전면에는 부엌을 연접
시켜 우익사를 이루게 하였다.^-^
*출처:영양문화재대관.
#향토사 두들마을 -9-두들 책사랑-북카페
두들마을 북카페"두들 책사랑"은 영양출신 문인들의 작품과 역사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멀티미디어 자료실과 휴게실이 조성되어 아늑한 공간에서 문학작품 감상과 차를 마시며 문학의
향취를 느끼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곳이다.
#향토사 두들마을 -11-두들마을8경<광려산-병암산-낙기대-세심대-동대-서대-석찬서당-광록초당>
1.두들마을8경의 제1경'광려산'
경북영양군석보면원리 두들마을 뒤에 있는 '광려산'은 일월산의 낙맥으로서 산상에 수천평이나 되는
넓은 잔디 광장이 있다.
봄,여름,가을이면 주변에 기화요초가 피어 그 경치가 매우 아름답다.
연중 사계절을 통하여 자연탐방 산책로로 유명할 뿐만 아니라 각종 운동경기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또 이 곳에서 마을을 굽어 내려다 보면 고색창연한 옛 한옥이 즐비한 마을을 한 눈에 살펴 볼 수 있다.
이 산은 남향으로 주남천.화매천 건너편 병암산을 바라보고 있으며 마을 중심부가
중대로서 끝자락에 낙기대.세심대,석천서당.광록정이 있고 동쪽에 '동대', 서쪽에 '서대'가 있다.
마을 전체가 일목일초,일구일학이 모두 이름 없는 것이 없어,옛부터 재령이씨 일문이 번성해서 세거해 온
자취를 볼 수 있다.^^
*출처: 석계선생문집 및 영양군발행'명가순례'
2.두들마을8경의 제2경'병암산'
경북영양군석보면원리 두들마을 안산인 '병암산'은 높이 약130m되는 단애로 이루어진 야산으로,산 전체가
기암괴석으로 형성되어 있다.
흡사 병풍을 펼쳐 놓은 것처럼 마을을 둘러 싸고 있으며,온갖 식물과 희귀한 산새들이 서식하며,철 따라 이름
모를 각종 화초들이 뽑내어, 산 아래 흐르는 화매천 강물에 취영 되고 있다.
화매천 물은 낙동강 상류천인 반변천으로 흘러 가며,강물에는 온갖 담수어들이 노닐고.녹음 짙은 여름에는
넓은 강변과 푸른 강물이 한데 어울려 장관을 이루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약50년전만 해도 이 산자락에 있던 울창한 송림은 석보면의 관문 역할을 하기도 했다.^^
*출처:석계선생 문집 및 항재집.
3.두들마을8경의 제3경'낙기대'
'낙기'는 사서삼경의 하나인 '시경'의 '형문(누추한 집,오막살이 집)'이란 시에 나오는 말로서
衡門형문 - 오막살이 집 -
세상 사람들은 부귀영화를 찾아 헤맨다. 그들은 좋은 집을 짓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좋은 부인감을
맞이하는 것을 행복으로 여긴다. 그러나 그런 것은 모두 부질없는 것! 참으로 즐거운 건 그런 것을 잊고
자연과 하나 되어 살아가는데 있다.
세속의 눈으로 보면 가장 초라하지만, 진리의 눈으로 보면 가장 넉넉하다. (시경강설)
1
衡門之下(형문지하) 오막살이 집이지만
可以棲遲(가이서지) 편안히 쉴 수 있고
泌之洋洋(필지양양) 샘물이 졸졸 흐름이여
可以樂飢(가이락기) 굶주림마저도 즐길 수 있네
부(賦)다. 형문(衡門)은 나무를 가로대 만든 문이다. 문의 깊은 집에는 아(阿)·숙(塾)·당(堂)·우(宇) 등이
있거늘 이에 오직 형목(衡木)만을 두었다. 서지(棲遲)는 놀고 쉬는 것이다. 필(泌)는 샘물이다. 양양(洋洋)은
물이 흐르는 모양이다.
이 시가는 은거(隱居)하면서 스스로 즐기며 달리 구함이 없는 사람의 노래이다. “ 형문(衡門)이 비록
초라하나 또한 능히 놀며 쉴 수가 있고 샘물로 비록 배부를 수는 없으나 또한 능히 즐기며 굶주림을 잊을
수 있다.”고 했다.
2
豈其食魚(개기식어) 어찌 먹는 물고기가
必河之魴(필하지방) 꼭 하수의 방어라야만 하나?
豈其取妻(개기취처) 어찌 부인으로 취하는 여인이
必齊之姜(필제지강) 꼭 제나라의 미인이어야만 하나?
부(賦)다. 강(姜)은 제나라 공실의 성으로 미인을 지칭한다.
3
豈其食魚(개기식어) 어찌 먹는 물고기가
必河之鯉(필하지이) 꼭 하수의 잉어여만 하나?
豈其取妻(개기취처) 어찌 부인으로 취하는 여인이
必宋之子(필송지자) 꼭 송나라의 미녀여만 하나?
부(賦)다. 자(子)는 송(宋)나라의 공실의 성(姓)으로 역시 미인을 말한다.
衡門 三章이니, 章 四句이다.
‘굶주림을 즐길 수 있다[可以樂飢]’에 대하여 《집전》에서는 “구경하고 즐거워하면서 굶주림을
잊을 수 있다.” 하였다.
만일 그 도가 즐길 만하다면 의당 바깥 환경은 필요 없을 텐데, 어찌하여 굳이 샘물을 구경한 뒤에 즐
거워하는 것인가?
[서유구가 대답하였다.]
‘나무를 가로 대어 만든 문[衡門]’이 비록 하찮고 누추하지만 또한 놀고 쉴 수 있으며, 샘물은 비록 배부를
수 없지만 또한 굶주림을 잊을 수 있으니, 상황에 따라 편안히 여기고 밖에 구함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만약 반드시 샘물이 있은 뒤에야 즐거워한다고 한다면 융통성이 없는 것 같기 때문에 신은 “샘물을 빼고
즐거움을 말해서는 참으로 안 되지만 샘물에 구애되어 즐거움을 찾는 것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기기식어(豈其食魚)’와 ‘기기취처(豈其取妻)’에 대하여 《집전》에서 해석한 것이 없는 것은 어째서인가?
음식과 남녀는 사람의 큰 욕심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세상에 구함이 없는 것을 말하려고 하여 굳이 음식과
색(色)을 말한 것인가?
[이명연이 대답하였다.]
원유(元儒) 주공천(朱公遷)이 이에 대하여 논하기를, “음식과 색(色)은 타고난 욕망인데 이와 같이 말
하였으니, 자기 자신을 위하는 것에 모두 완전하기를 구하고 구비되기를 요구하지 않는 것이다.
본분에 따라 행하고 그 밖의 것을 원하지 않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 말이 《집전》에서 다 해석하지 못한 뜻을 보충할 수 있습니다.
[이상은 진풍 형문편(衡門篇)에 대한 문답이다.]
詩經 《國風》陳風 (시경, 국풍, 진풍) 편
"낙기"는 '형문/누추한 집'의 싯귀에서 취한 것이다.어진 사람이 세상에 등용되지 못하자 몸을 숨기면서
부른 노래이다.
선비는 먹는데 배 부름을 구하지 아니하고 자연을 즐기며 배고품을 잊고,삶의 지혜를 찾았다고 볼 수
있다.
선비는 가난한 처지에도 편안한 마음으로 도를 지켜 즐긴다. 은자는 편안한 마음으로 자기분수를 지키고
만족할 줄 앎에 뜻을 두고 평생토록 변심하지 않는다는 안분지족.안빈락도를 덕목으로 삼고,궁불실의를
본령으로 실천한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고 여겨 진다.
경북영양군석보면원리 두들마을 중대앞 주남천 언덕암벽에 '낙기대'가 있다.
이 대 글자는 '석계 이시명'선생의 넷째 아들인 조선조 숙종때의 학자 '항재(휘 숭일)선생이 각자 했다고
전해 진다.^^
*출처: 석계선생문집 및 시경
4.두들마을8경의 제4경'세심대洗心臺'
'세심洗心'이라는 말은 '易經역경' "계사상전繫辭上傳"의
"성인이차세심 퇴장어밀聖人以此洗心 退藏於密"에서 나왔는데,
"심중의 더러움을 씻어 낸다"는 뜻이 담겨 있다. 마음속의 더러움이란?
"일신의 안위와 재물을 탐하고 권력에 아부하는 인간의 속성이라 할 것"인데
이런 마음을 씻어 내고, 안분지족安分知足과 安貧樂道안빈락도를 실천하며
수신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세심대洗心臺'는 두들마을 들머리에 흐르는 주남천 언덕위에 자리 잡고 있는데,
명인지사,선비,은자들이 대자연을 감상하던 곳으로서 특히 '세심대'에서 동쪽을
향하여 조망하면 눈 앞의 30리 전방 산천경관을 한 눈에 굽어 볼 수 있어 심신이
상쾌하여 잡념을 잊고 마음을 씻을 수 있는 곳이다.
조선조 숙종때의 학자 항재(휘 숭일)선생이 언덕 바위에 각자했다고 한다^^
*출처 석계선생문집 및 역경.
5.두들마을8경의 제5경'東臺동대'
경북 영양군 석보면 원리 두들마을 동쪽에 있는 언덕이다.
석계 이시명 선생의 넷째 아들이며 조선조 숙종때의 학자
항재(휘 숭일)선생이 언덕 바위에 각자했다고 한다^^
6.두들마을8경의 제6경'서대西臺'
경북 영양군 석보면 원리1리 두들마을 서쪽 언덕이다.
조선시대에는 西臺서대 인근에 관청인 광제원이 있었다.
현재의 행정구역은 원리1리로서 면사무소.경찰파출소.보건소,교회 등이 소재하고 있다.
7.두들마을8경의 제7경'석천서당'
영양석천서당은 경북도문화재자료79호(1985.8.5.지정)로
석계 이시명(1590~1674) 선생이 1640년(조선 인조 18년) 영해부에서 석보촌으로
이주하여 두들마을 중대위에 띠집'초당'을 지어 유생과 아들들을 강도한 곳이다.
*영양군문화재대관 및 석계선생문집
8.두들마을8경의 제8경'광록정廣麓亭'
원리리광록초당/광록정은 조선인조18년(서기1640년)
석계 이시명이 터를 잡은 두들에 넷째 아들인 항재 이숭일이 건립한 정자로
수차례에 걸쳐 중건과 중수를 거듭하다가 1926년에 현재의 규모로 중건하였다.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1칸반 규모의 팔작기와집인데 주위에는 방형의 토석담장을
둘렀으며 우측담장의 전면에는 사주문을 세워 정자로 출입케 하였다.
평면은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 1칸씩을 연접시킨 후 전면에는 반칸 규모의 퇴칸을
두었으며 대청의 전면에는 사분합문을 설치하여 마루방을 이루게 하였다.
가구는 오량가의 소로수장집이며 처마는 홑처마이다.
*영양군문화재대관 및 석계선생문집
#향토사 두들마을 -21-전가보첩傳家寶帖
전가보첩(傳家寶帖,석보면 원리리 석계 이시명 종가)석계 이시명의 부인(夫人) 장씨는 안동인이니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의 맏딸이다.
일찍이 총명하고 재예(才藝)가 뛰어나서 10세 정도에 학문과 기예가 뛰어났으며, 시사(詩詞)가
비범하고 서예도 스스로 능하니 신사임당(申師任堂)과 비할 만하다.장부인(張夫人)이 출가한 후에는
부도(婦道)를 극진히 하고 서예 등에 힘을 썼다.
석계 선생이 만년에 부인(夫人)이 쓴 학발시첩(鶴髮詩帖)을 부인의 둘째 아들 존재(存齋)와 셋째 아들
갈암(葛庵)에게 보이면서 이르되 “이것은 너의 어머니의 어릴 때 글이라 너희가 마땅히 받아서 보장하라”
하므로 비로소 부인의 서첩(書帖)이 있음을 알았다.
이에 부인의 학발시 3장과 또 오언시 이절(二絶 : 聖人吟, 蕭蕭吟)을 석계(石溪)의 벽사(碧紗) 한 폭 위에
손수 글을 쓰며, 둘째 며느리인 의인(宜人) 박씨가 또한 뛰어난 손재주가 있어 채선(彩線)으로 이자획
(二字劃)의 수(繡)를 놓으니, 이는 오래도록 전하자는 뜻이었다.
다시 사면(紗面)의 여백에는 팔룡(八龍)을 수놓으니, 문채(紋彩)가 빛나고 기이하며 고아해서
세상에 드문 가보를 이루었다.
대개 이것은 부인이 유자칠인(有子七人)으로 용주(龍洲) 조향이 일찍이 이석계에게 치서(致書)할새
팔용이정강론(八龍鯉庭講論)을 한다 하는 말이 일시 전송(傳傳誦)하였으므로 팔용의 수(繡)를 놓은
것이다.
석계의 필적과 장부인의 시문과 박부인의 수회(繡繪)가 모두 미려하여 이르기를 이씨삼절(李氏三絶)이라
하고 재령 이씨(載寧李氏)의 가보를 이루어 지금까지 이른다.
부인의 <학발시(鶴髮詩)>3장을 청풍자 정윤목(淸風子 鄭允穆)이 보고“이것은 중국인의 필법이 아닌가?”
하고 크게 탄복하여 칭찬하였다 한다. 이에 부인의 필첩을 만들새 부인의 시인 <경신음(敬身吟)> 과
<기아손급희우희(寄兒孫及稀又稀)> 등 여러 편은 전하여 내려오되 부인의 손때가 없었으므로 글씨를
잘 쓰는 사람에게 청하여 이를 정서하고 따로 일첩을 만들어 소첩과 같이 한 함에 보관하여 내려 왔다.
정조 말년에 문숙공(文肅公) 채제공(蔡濟恭)이 봉명(奉命) 하고 영남의 고적을 갖추어서 정전(庭前)에
비달(備達)할새 부인의 서첩도 그 중에 들어서 포장(褒奬)을 받았다.
이 때 채문숙 공이 <학발시(鶴髮詩)>를 보고 이르되 “시삼백편(詩三百篇)에 부인의 작품들이 비록
많지마는 일찍 이와 같은 것이 없었다.”하고 극구 칭찬하였다. 부인의 총명 재예는 길이 성군현상
(聖君賢相)들의 사랑을 받음이 이와 같았다. 지금까지 석계의 종가에 전하여 내려온다.
주남리 남악정 (남악초당)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80호-
*조선 후기의 문신 갈암 이현일의 정자
*갈암 선생이 과거에 응시하는 것을 포기하고 오직 성리학을 연구하는데 전념하기 위해
泣領 및 延逢湫
영양군청의 동쪽 관문인 읍령(영양군의 호칭) or 울치재(영덕군의 호칭) 및 '연봉추
--------------------------------------------------------------
영덕군 영해면 원구리 난고종택 사전답사 하였습니다.
국가민속문화재 제271호. 입향조이며 임진 선무원종공신삼등(宣武原從功臣三等) 군기시판관인 남의록(南義祿)의 손자이자
만권당 이야기
*만권당-문창성=규성
문창성:규성-지혜가 많고 공부를 잘하며 학문이 청명하고 문예가 월등하다.
북두칠성중의 여섯째 별을 이르는 말로 학문을 맡아 다스리는 별이라 하여
붙은 이름이다.
*집안에 만 권의 책이 있으면 문창성이 비치어 귀한 자손이 나고 대대로
글이 끊어지지 않는다 한다.
그러하되 책이 많다는 것만으로 무엇을 이루지는 못하니, 힘써 읽고 익혀야
하늘도 도우니 이뜻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하여 책을 모으고 읽고 익히는데
노력하였다.^^
*文士문사(글월문.선비사)의 시간에 금 목 수 화 토, 다섯 위성이 있는데,
규성에 모인다고 하였다. 규성은 북두칠성의 여섯째 별로 그 모양이 文문
(글월문)을 닮아 또 文昌星문창성이라 불리우는데, 이것은 글(文문)이
번창한다(昌창)는 뜻이다. 여기서 조선시대에 서적들을 보관하는 곳을
'규장각'이라 이름한 까닭이 있었다.^^
*출처:장계향 조선의 큰어머니/정동주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