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유산 종주는 지리산 화대 종주. 설악산 서북능선 종주와 함께 우리나라 3대 산악 종주라고 한다.
나는 산행에 발을 들여놓은 지는 얼마 안 되지만, 산꾼들로부터 위의 3대 종주에 대해 몇 번씩이나 들은 바가 있어서 나도 언젠가는 3대 종주를 다 해봐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있던 차에 이번에 ○○산악회에서 덕유산 종주를 한다기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산행 신청을 했다.
물론 백두대간 종주에 대해서도 수없이 얘기는 들었지만, 그건 내 형편에 도저히 엄두를 못 낼 것 같고, 3대 종주라도 꼭 해보자는 생각이었다.
덕유산 종주 산행 일 주일 전에 춘천 마라톤에 참가를 하여 풀코스를 뛰었고, 3주 전에는 설악산 대청봉에도 올랐기 때문에 덕유산 종주를 위한 체력 훈련은 충분히 했다고 생각했다.
대한민국 마라토너들에게 ‘가을의 전설’이라 불리는 춘천 마라톤에서 당당히 풀코스를 완주했기 때문에 나는 이미 가을의 전설이 되어 있었는데, 덕유산 종주까지 마친다면 이것도 또하나의 가을의 전설이라 할 수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나는 가을의 전설 2관왕이 되는 것이라고 스스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누가 알아주거나 말거나!)
나는 그래서 ‘위대한 도전’에 나선다는 마음으로 덕유산 종주 산행에 참가하게 되었다.
산행 코스는, 육십령을 들머리로 하여 구천동 계곡까지 31km를 행군해야 하는 고단한 여정이다.
칠흙같이 어두운 새벽 두 시에 육십령을 넘기 시작한다.
육성철 작가가 10여 년 전에 쓴 백두대간 종주기『그곳에는 새로운 인생이 있다』라는 책 49 페이지에 육십령의 유래가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 육십령. 이곳은 예부터 영호남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이다. 예전에는 이 고개에 도적들이 많아 60명 이상 떼를 지어야만 안전하게 넘어갈 수 있었다고 해서 육십령이란 지명이 붙었다고 한다. 산꾼들 중에는 20여 년째 육십령 휴게소를 지키고 있는 조정자 할머니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얼굴이 눈에 익으면 공짜로도 재워준다는 할머니의 넉넉한 인심 때문인지는 몰라도, 육십령으로 신혼여행을 온 사람까지 있었다고 한다. ----
바람이 문제였다. 덕유산의 새벽 찬바람과 힘겹게 싸우며 산을 오른다.
멀리 산 아랫쪽 민가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을 바라보노라니 "내가 시방 잠 못 자고 이게 뭐하는 짓인가“ 라는 한심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산행 시작 후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지만 서봉이라는 데에 올랐다.
그런데 서봉에서 여성 회원 한 분의 몸 상태가 수상하다.
내가 걱정이 되어 물어보니 머리가 어질어질하다는 것이다.
전날 낮에 장거리 운전을 한 데다가 저녁에도 일이 있어 쉬지 못하다가 산행에 나섰다는 것이다.
장거리 산행을 앞두고 컨디션 조절을 못 한 것이다.
내가 이 여성 회원을 업고서 가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고.....
초콜렛이나 간식을 좀 잡수시라고 했다.
몸 상태가 안 좋으면 잠시 쉬었다 가면 좋을 텐데, 찬바람이 미친 듯이 불어대고 있으니 쉴 수도 없어서 천천히 걸으시라고 했는데, 과연 이 회원은 무사히 완주할 수 있을 것인지.....
동이 틀 무렵 남덕유산에 도착하여 몇몇 회원들을 만나서 사진을 찍는데, 찬바람에 오들오들 떨어가며 겨우 사진을 찍었다.
남덕유산 정상에서 내려와 삿갓봉을 향해 갈 무렵 어느 아주머니가 우리에게 길을 묻는다.
그 아주머니가 춘천에서 오셨다길래 내가 “제가 일 주일 전에 춘천마라톤 달렸지요” 라고 하니 그 아주머니가 “저도 그날 춘천 마라톤 뛰었어요. 제가 마라톤 매니아입니다”라고 하여 반가운 마음에 잠시 마라톤 이야기를 하다가 헤어졌다.
날씨는 여전히 춥고 바람은 여전히 사납게 불어댄다.
시간은 이제 8시가 지나 9시가 가까워오고 있는데, 춥고 배고프고 .... 참 힘들다!
삿갓봉 대피소 취사장에 도착하니 먼저 도착한 어느 남성 회원이 라면을 끓여주어서 참 고맙고 맛있게 먹었다.
그런데 아침을 먹다가 바람의 ‘질’에 대해 잠시 토론이 있었다.
내가 “덕유산의 바람이 차기는 하지만 설악산 대청봉의 바람보다는 약간 못 한 것 같다” 라고 하자 어느 여성 회원께서 “아니예요. 대청봉 바람보다 여기 덕유산의 바람이 더 차요. 대청봉의 바람은 따뜻하기라도 하지. 덕유산 바람은 너무 차요” 라고 한다.
글쎄, 대청봉의 바람은 따뜻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시간이 지날수록 ○○산악회 회원들과 보조를 맞추기가 힘들어지고 조금씩 뒤처지기 시작한다.
몇 달 전 대토에 가입하고 몇 번 산행에 참가하여 느낀 바로는, ○○회원들은, 남자든 여자든, 다들 산행 실력이 뛰어나서 나같은 사람은 따라가기가 좀 힘들다는 것이다.
중봉이 가까울 무렵 내가 “덕유산 종주도 이렇게 힘이 드는데, 지리산 화대 종주는 더 힘들겠군” 이라고 푸념하자 어느 회원께서 “화대 종주 뭣하러 하려고 하십니까? 무릅 다쳐요. 그저 산행은 5~6시간 짜리가 딱 좋은 겁니다” 라고 한다.
물론 그 말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꼭 한 번은 지리산 화대 종주 그리고 설악산 서북능선 종주를 하고 싶다.
악전고투 끝에 설천봉에 도착하니 오후 세 시가 되고 말았다.
설천봉에 오후 두 시까지 도착 못 하면 곤돌라 타고 하산해 달라는 주최 측의 요청이 있기도 하였지만,
이제는 더 이상 걸을 힘도 남아 있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곤돌라를 탈 수밖에 없다.
곤돌라에서 내려서 보니 새벽에 서봉에서 위태로운 모습을 보였던 여성 회원이 보인다.
그 여성 회원이 용케 컨디션을 회복해서 완주한 것을 보니 반갑기도 하고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내가 산행 마무리를 걸어서 끝내지 못하고 곤돌라를 타고 하산해서 좀 부끄럽기는 하다.
내가 덕유산 종주 산행 떠나기 전에 직장 동료들에게 “내가 덕유산 종주하고 오겠다. 그러면 나는 춘천 마라톤 가을의 전설에 이어 덕유산 가을의 전설까지 나는 ‘가을의 전설 2관왕’이 된다. 앞으로 나를 ‘가을의 전설 2관왕’으로 불러 달라” 라고 실컷 떠벌리고 왔다.
그런데 엄밀히 따지면 나는 막판에 곤돌라를 탔기 때문에 완주했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직장에 복귀해서는 직원들에게, 곤돌라 얘기는 쏙 빼고, 당당히 “나 덕유산 종주했고 따라서 나는 가을의 전설 2관왕이 되었다”라고 선포했다.
이번 덕유산 종주 산행에 참가하신 ○○회원님들은 덕유산의 모진 추위와 배고픔을 이겨내고 완주하셨으니 다들 가을의 전설이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바램이 있다면, 앞으로 또 지리산이나 설악산 등을 종주하려거든 추운 날씨를 피해서 했으면 한다.
따뜻한 봄날이나 초가을쯤이 좋을 듯싶다.
그런데 나는 가을의 전설 3관왕이 될 수도 있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덕유산 종주 마친 다음 날, 즉, 11월 1일에 서울 중앙마라톤이 열렸는데, 만일 중앙마라톤이 일 주일 뒤에 열렸더라면 나는 여기에도 출전하여 가을의 전설이 되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나는 명실공히 ‘가을의 전설 3관왕’이 되었을 거라는 말씀이다.
신은 나에게 가을의 전설 3관왕까지는 허락하지 않으셨다. 2관왕에 만족하자.
덕유산 산행을 마치고 집에 와서 자는데 밤새 기침을 하였다. 기침.콧물감기에 걸린 것이다.
감기는 그대로 와이프한테 옮겨졌다.
와이프가 핀잔을 준다. “덕유산 가서 겨우 감기나 얻어 왔느냐” 라고...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 학교에서 교지가 발간되었다.
교지에 선생님들이 감명 깊게 읽었던 책들의 제목이 실리기도 했는데, 당시 나의 담임선생님이 감명 깊게 읽었다는 책 이름이 안병욱 교수가 쓴『네 영혼이 고독하거든』이었다.
나는 그때 약간 충격을 받은 것 같다. 왜냐하면 나의 담임선생님은 성격도 좀 거시기하고 외모도 좀 거시기해서 그런 고상한 책하고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가 이 책 제목을 지금까지 또렷이 기억하는 것은, 일단 제목이 너무 멋있었기 때문이었고, 그래서 영혼이 고독하면 어쩌란 말인가? 라는 의문 부호가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도 언젠가는 이 책을 꼭 읽어봐야지’ 라고 마음만 먹고 살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른 최근에서야 이 책을 어렵사리 구해서 읽을 수가 있었다.
이 책이 처음 나온 것은 놀랍게도 1971년이었고, 내가 손에 쥔 책은 1985년에 발행된 것이었다.
글자 인쇄도 옛날 책답게 세로로 되어 있어서 마치 고((古)문서를 읽는 기분이다.
그리고, 영혼이 고독하면 어쩌라는 것인지 책 속에 해답이 나와 있었다.
내가 고등학교 1학년이던 1979년에 품었던 의문이 무려 36년 만에 풀린 것이다.
책 57 페이지에 실린 글을 인용해본다.
------「 네 영혼이 고독하거든 산으로 가라」고 독일의 어떤 시인은 노래했다.
인생이 우울해지면 산으로 가는 것이 좋다. 룩작을 메고 조용한 산길을 정다운 친구들과 같이 걸어가면 인생의 우울이 어느 새 안개처럼 사라지고 만다.
삶에 지치고 생에 권태를 느꼈을 때에는 산에 오르는 것이 좋다.
이마에 땀을 흘리면서 산의 정상을 향하여 전진할 때에 우리는 생의 용기를 느끼고 삶의 건강성을 다시 찾을 수 있다.
정신이 피곤하고 인생이 무거운 짐으로 느껴지면 산을 찾아가라. 맑고 깨끗한 산의 정기는 우리의 정신적 새로운 활력소를 불어 넣는다. 「왜 산에 올라가는가. 산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영국의 등산가 G 말로리(1886~1924)는 이렇게 말했다 .... 이하 생략 .... -------
이번 덕유산 종주 산행으로 가을의 전설이 되신 회원님들께 축하의 말씀을 드리며 내 영혼이 고독해질 때마다 ○○와 함께 열심히 산으로 가리라 다짐한다.
---- 새벽창가에서 ----
첫댓글 영혼이 고독하거든 산으로 가라.
삶에 지친 인생에게 좋은 메시지로군요.
헐레벌떡님 산행 후기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뜀꾼들은 영혼이 고독해지면 달리기 한판 하러 나가면 되겠지요.
산을 좋아하는군요
산행기가 아주 길고 시간을 투자 하셨내요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