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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역사인물 스크랩 무인열전(1) 부분노
天風道人 추천 1 조회 32 13.08.21 02:1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

????????????????????????????부분노

????????????????????????대제국 고구려의 기틀을 닦은 용장

???????????????????행인국과 선비족 정벌한 고구려 창업기의 명장


??부분노(扶芬奴)는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東明聖王)과 제2대 임금 유리명왕(琉璃明王)을 보좌하여 고구려 창업 초기의 기틀을 다진 대표적 장수였다. 그는 동명성왕의 명령에 따라 군사를 이끌고 행인국을 쳐서 고구려의 영토로 만들었고, 유리명왕 때에는 선비족을 토벌하여 속민으로 만들었다. 특히 부분노 장군이 유리명왕과 더불어 선비족을 토벌할 때에는 처음부터 무력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탁월한 지략으로써 적을 공략하여 그가 단순한 용장이 아니라 병법에도 통달한 지장이라는 사실도 알 수 있다. 또 이에 따라 <손자병법>을 비롯한 고대 중국의 병법서들이 이미 기원전인 고구려 건국 이전에 우리나라에 들어와 연구되고 실전에 응용되었다는 역사적 사실도 알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부분노 장군이 언제 어디에서 태어났는지, 그의 출신부족이나 가계가 어떤지는 알 수가 없다. 그에 관한 기록이 너무나 빈약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삼국사기>에 겨우 두 차례 등장하는 기록만 가지고 보더라도 그의 공로가 매우 크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시조 동명성왕 재위 6년(서기전 32년) 조에 이렇게 나온다.

??- 겨울 10월에 왕이 오이((烏伊)와 부분노를 시켜 태백산 동남방에 있는 행인국을 치고 그 땅을 빼앗아 고을을 만들었다. -?

??부분노와 함께 행인국을 정복한 오이는 동명성왕- 추모성왕(鄒牟聖王)이 북부여에서 졸본부여로 망명할 때에 그를 수행한 세 사람의 심복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나머지 두 사람은 마리(摩離)와 협보(陜父)라고 기록은 전한다.

??부분노에 관한 기록은 매우 빈약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공로가 결코 미미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그의 활약상을 보다 상세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동북아시아의 격변기였던 당시의 시대적?정치적 배경을 살펴보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또한 이를 위해서는 동명성왕의 고구려 건국사를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동명성왕의 사적과 고구려 건국에 관한 기록으로는 고려시대에 편찬된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 일연(一然)의 <삼국유사>, 이규보(李奎報)의 <동명왕편>,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 조선시대에 편찬된 <세종실록> ‘지리지’, 또 재야 사학자들과 이른바 강단파 또는 관학파 사학자들 사이에서 진위 논쟁이 그칠 줄 모르는 <환단고기> 같은 책들, 그리고 중국의 여러 사서가 있다.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의 이름은 고주몽(高朱蒙)으로 가장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의 정확한 이름은 추모이다. 추모와 주몽 외에 중모(中牟)?추몽(鄒蒙)?중해(衆解)?도모(都慕) 등으로도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부여말로 ‘활 잘 쏘는 이’ 또는 ‘우두머리’를 가리키는 추모를 한문자로 표기하다가 보니 여러 가지로 음역된 것이다.

??고구려 사람들은 그들의 시조 이름을 추모라고 불렀다. 고구려의 황성이었던 만주 집안시에 있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줄여서 광개토태왕의 훈적비 첫머리에 이렇게 새겨져 있다. ‘예전에 시조 추모왕께서 나라를 세우실 때에 북부여로부터 나오셨는데, 천제의 아들이시고, 어머니는 하백의 딸이시다. 알을 깨고 세상에 나오셨는데, 나실 때부터 성스러운 덕이 있으셨다(惟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 出自北夫餘 天帝之子 母河伯女郞 剖卵降世 生子有聖德).’ 또 대사자 모두루(牟頭婁)의 묘지명에도 ‘시조 추모성왕이 원래 북부여에서 나왔는데, 하백의 외손이며 일월신의 아들이다(始祖鄒牟聖王 元出北夫餘 河伯之孫 日月之子).’라고 했으니, 고구려 사람 자신들의 기록이 가장 정확하지 않겠는가.

??추모성왕이 뒷날 고구려의 국모로서 여신으로 신격화된 유화부인(柳花夫人)의 아들로 태어난 것은 서기전 58년 음력 5월 5일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단군(檀君)이라는 설도 있고, 해모수(解慕漱)라는 설도 있고, 또 해모수의 둘째아들 고진(高辰)의 손자 불리지(弗離之)라는 설도 있는데 정확한 사실은 상고할 수가 없다. 다만 여기에서 말한 단군은 고조선을 세운 우리나라의 국조 단군왕검이 아니라 고조선이 망하고 부여 등 열국이 일어서자 그 나라의 임금이 모두 왕호를 단군이라고 칭했는데, 그 가운데 한 명이라는 뜻이다. 또 해모수는 북부여의 시조로 알려진 인물이다.

??유화부인은 본래 하백의 딸이었는데 어느 여름날 해모수, 또는 해모수를 자칭하는 바람둥이에게 정조를 빼앗기고 임신을 하게 되었다. 그 아들이 바로 서기전 58년에 태어난 추모였다. 유화가 몸을 버려 임신을 하자 사내는 ‘천제의 자손은 함부로 서민과 혼인할 수 없다’는 핑계를 대고 달아나버렸다. 그러자 하백은 가문의 망신이라면서 유화를 집에서 내쫓아버렸다. 처녀가 아이를 배자 사내는 달아나고 아비는 집에서 쫓아내자 유화는 더 이상 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래서 우발수 깊은 강물에 몸을 던져 죽으려고 했는데 지나가던 어부가 그 광경을 보고 물에서 건져 동부여의 금와왕(金蛙王)에게 바쳤다.

??금와왕이 어찌된 일이냐고 묻기에 유화는 할 수 없이 해모수라는 사람에게 정조를 빼앗겨 임신하고 부모에게 쫓겨난 사정을 이야기했다. 금와왕이 그 말을 듣고 자세히 살펴보니 비록 버림받은 여자라고 하지만 자태가 그지없이 아름답기에 자신의 후궁으로 삼을 욕심이 생겼는지 궁궐로 데리고 가서 방 하나를 주어 머물게 했다. 그렇게 해서 유화는 달이 차자 추모를 낳게 되었던 것이다.

??추모는 태어나면서부터 말을 할 줄 알았고, 또 골격이 튼튼하고 외모가 영특하게 생겼기에 보는 사람마다 장차 왕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러자 금와왕이 뒷날 자신과 자기 아들의 왕위가 위태로울까 두려워하여 일찌감치 죽여 후환을 없애려고 했다. 그러나 여러 유력자, 곧 부족장들이 한결같이 천제의 아들인 해모수의 혈육이라는 이처럼 비범한 아이를 죽여서는 안 된다고 반대하므로 죽이지 못 하고 유화부인에게 돌려주어 기르도록 허락했다.

??유화의 아이는 무럭무럭 잘 자라났는데 어려서부터 활을 매우 좋아했고 잘 쏘았다. 파리가 귀찮게 굴어서 잠을 잘 수 없다면서 어머니에게 활을 만들어달라고 하여 유화가 장난감 같은 작은 활을 만들어주자 그것으로 파리를 쏘는데 백발백중이었다. 나이 일곱 살이 되자 스스로 활을 만들어 궁궐 안팎을 돌아다니면서 무엇이든 보이는 대로 쏘는데 역시 백발백중의 신기(神技)였다. 마침내 신궁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퍼지고 그는 추모라고 불리게 되었으니 이는 부여말로 활을 잘 쏘는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2천여 년 전 당시의 무기라면 칼과 창과 도끼, 그리고 활이 고작이었고, 특히 멀리 떨어진 거리에서 적이나 짐승을 명중시킬 수 있는 명궁은 무리의 우두머리가 될 수 있는 자격을 충분히 갖춘 것이었으므로 추모는 ‘우두머리’란 뜻도 되었다.

??추모가 그처럼 어려서부터 비상하게 빼어난 재주를 보이자 그는 이내 주위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때 금와왕에게는 아들이 일곱이나 있었는데 무엇을 하고 놀아도 추모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 했다. 맏아들 대소(帶素)가 부왕에게, “아버지! 저 과부의 자식 추모를 하루 빨리 죽여 없앱시다! 일찌감치 후환을 없애자구요!” 하고 졸랐다. 하지만 중앙집권도, 절대 왕권도 확립되지 않은 열국시대 당시에 여러 부족장의 반대를 무시하고 추모처럼 비상한 인물을 마음대로 죽일 수는 없었기에 금와왕은 기회를 보아 무슨 구실이든 붙여서 죽여 없애려고 추모에게 왕궁의 마구간에서 말먹이는 천한 일을 시켰다. 그때 추모의 나이 19세였다.

??어쩌면 부분노는 추모가 이처럼 부여왕국에서 매일같이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위태로운 젊은 시절을 보낼 때의 친구였는지도 모른다. 추모의 목숨을 노리는 대소 등 왕자들의 의도가 갈수록 노골화하자 하루는 어머니 유화부인이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얘야, 장차 왕자들이 너를 해코자할 터이니 일찌감치 방도를 마련해 둠이 좋지 않겠느??? 냐?”

??이에 추모가 어머니의 말씀이 있기 전부터 그런 사정을 알고 있었기에 방법을 강구했다. 왕궁의 마구간에서 다른 여러 말은 더욱 많이 먹여 살찌게 하고, 오로지 준마 한 마리만은 바늘로 혀 밑을 찔러 잘 먹지 못하게 하니 그 말이 자연히 비쩍 마르게 되었다. 어느 날 금와왕이 마구간을 시찰했는데 말들이 모두 잘 먹어 피둥피둥한 것을 보자 추모에게 말들을 잘 돌보았다면서 칭찬하고는 가장 마른 그 말을 상으로 주었다.

??그해 10월에 고조선 때부터 이어져 내려온 제천대회(祭天大會)가 있었다. 추모가 일부러 잘 먹이지 않아 상으로 받은 그 말을 타고 사냥대회에 참가했다. 금와왕은 혹시 추모가 많은 짐승을 잡아 자기 아들들의 기를 죽일까봐 일부러 화살 한 대만 주었다. 하지만 말은 타고난 준마요 사수는 타고난 신궁이 아닌가. 추모가 말달리며 쏘면 쏘는 대로 명중시키니 추모 혼자 화살 한 대로 잡은 짐승이 금와왕의 일곱 아들이 잡은 짐승보다도 더 많았다. 대소가 질투와 시기심을 참지 못해 동생들과 합세하여 기어코 추모를 죽여 없애려고 했다.

??어머니 유화부인이 이를 알고 추모에게 일러 한시바삐 먼 곳으로 달아나도록 재촉했다. 그해에 추모는 21세. 그런데 그 지난해에 예씨(禮氏)를 아내로 맞았는데 부인은 그때 임신 중이었다. 홀어머니 유화부인과 신혼이나 마찬가지인 아내 예씨, 그리고 아직도 뱃속에 든 아이를 두고 떠나는 발길이 차마 떨어지지 않았지만 당장 목숨부터 구해야 할 다급한 처지였기에 추모는 황급히 망명길을 재촉했다.

??그는 평소부터 따르던 오이?마리?협보 세 명의 심복만 이끌고 부여의 도성을 빠져나와 남쪽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추모가 도성을 빠져나간 사실을 안 금와왕과 대소 부자는 군사들을 풀어 그의 뒤를 쫓게 했다. 추모 일행 네 사람이 군사들의 추격을 받으며 달아나다가 큰 강물에 앞길이 가로막히고 말았으니, 그 강이 사서에 따라 엄호수?엄체수?엄리대수?개사수 등으로 나오는데, 아마도 지금의 압록강 동북쪽의 한 지류로 추측된다.

??강을 건너려고 했지만 배도 없고 다리도 없었다. 이에 추모가 채찍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이렇게 소리쳤다.

???“나는 황천(皇天)의 아들이요, 어머니는 하백의 딸인 추모왕이다. 나를 위해 갈대를 연결??? 하고 거북을 뜨게 하라!”

??그리고 활을 들어 강물을 치자 이내 갈대가 연결되고 수많은 거북이 물위에 떠올라 다리를 만들어주었다. 추모 일행이 그 다리를 건너자 이내 뒤따라온 부여 군사들이 뒤따라 건너려다가 모두 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

??일행이 강을 건너 모둔곡을 지나가다가 세 사람을 만났다. 한 사람은 삼베옷을 입은 재사(再思)요, 또 한 사람은 장삼을 입은 무골(武骨)이요, 나머지 한 사람은 수초로 만든 옷을 입은 묵거(?居)였다. 추모는 이들이 성이 없었으므로 재사에게는 극씨(克氏), 모골에게는 중실씨(仲室氏), 묵거에게는 소실씨(少室氏)라는 성을 내려주고 이들에게 일렀다.

???“내가 바야흐로 천명을 받아 나라를 창건코자 하는데 마침 그대들을 만났으니 어찌 천우??? 신조라 아니하랴!”

??그리고 그들을 수하에 거두어들이고 다시 길을 떠나 마침내 졸본천 흘승홀성에 이르렀다. 졸본은 곧 홀본이요 흘승홀이니 이는 오늘날 만주 땅 환인으로 비정된다. 왜냐하면 추모가 고구려를 건국한 곳이 바로 그곳 졸본이었기 때문이다.

??추모가 부여에서 망명할 때부터 이끌고 온 오이?마리?협보 세 사람과 도중에 포섭한 재사?무골?묵거 세 사람은 추모를 추종하는 세력, 적어도 씨족의 우두머리로 추측되고 이들이 바로 고구려 건국에 핵심적 역할을 한 개국공신으로 보인다. 그런데 여기까지는 아직도 부분노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렇게 졸본부여에 다다른 추모의 망명 집단은 오늘의 혼강인 비류수 강변에 마을을 이루어 근거지를 마련한 뒤 새로운 나라를 세워 국호를 고구려라고 하고, 나라 이름에 따라 왕성(王姓)을 고씨(高氏)라고 했다. 그런데, 추모대왕이 정말로 북부여의 시조 해모수의 아들이었다면 그의 본성은 해씨가 맞을 것이다. 그런데 고씨로 창씨를 한 까닭은 무엇일까. 하지만 이 책은 전문적인 역사연구서가 아니고, 필자 또한 깊이 공부한 바가 없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는 고명하신 사학자들의 숙제로 돌리고 이야기를 계속한다.

??하지만 동부여, 또는 북부여에서 쫓겨 온 젊은 망명객에 불과한 추모가 이들 소수의 추종세력만으로 고구려 건국이라는 역사적 위업을 이룩했다고 볼 수는 없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시조 동명성왕 조는 이 대목에서, ‘주몽이 졸본부여에 이르렀더니 왕이 아들이 없었는데 주몽을 보매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고 그의 딸로써 아내를 삼게 하였고, 왕이 죽으매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는 말도 있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당시 주몽의 나이 22세라고 했다.

??또 <삼국사기> ‘백제본기’ 시조 온조왕(溫祚王) 조에는, ‘주몽이 북부여로부터 난을 피해 졸본부여에 이르자 부여 왕에게는 아들이 없고 다만 딸만 셋이 있었다. 주몽을 보자 비상한 인물임을 알고 둘째딸을 그에게 시집보냈다. 얼마 뒤에 부여 왕이 세상을 떠나므로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 그리하여 아들 둘을 낳으니 맏이는 비류(沸流)라 하고 둘째는 온조라고 했다’고 하여 추모가 새로 얻은 부인이 졸본부여 임금의 둘째딸이라고 좀 더 자세히 나온다.??? 그러나 추모성왕의 고구려 건국이 이처럼 오로지 새장가를 잘 간 덕분에 식은 죽 먹듯이 손쉽게 이루어졌을 리는 만무하다. 동부여 임금과 왕자들에게 미움을 받아 죽을 고비를 넘기고 간신히 도망쳐온 불과 21세의 젊은이가 아무 밑천도 없이 그저 인물 하나만 잘난 덕에 아들 없는 졸본부여 왕의 사위가 되고 왕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즉위하여 아무 문제도 없이 국호를 고구려로 바꾸고 시조가 되었다는 동화나 전설 같은 이야기를 어찌 믿을 수 있단 말인가. 이 비밀을 푸는 열쇠가 같은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즉위조 뒷부분에 이렇게 실려 있다.

??- 일설에는 시조 비류왕은 그 아버지가 우태(優台)이니 북부여왕 해부루(解扶婁)의 서손이요, 어머니는 소서노(召西奴)이니 졸본 사람 연타발(延?勃)의 딸이다. 처음 우태에게 시집가서 아들 둘을 낳았는데 맏이는 비류요 둘째는 온조였다. 우태가 죽은 뒤 졸본에 홀로 살다가 그 뒤 주몽이 부여에서 용납되지 못하여 전한(前漢) 건소(建昭) 2년(기원전 37년) 봄 2월에 남쪽 지방으로 도망쳐 졸본에 이르러 도읍을 정하고 구호를 고구려라 하였으며, 소서노에게 장가들어 왕비를 삼았다. 주몽이 나라의 기초를 개척하며 왕업을 창시함에 있어서 소서노의 내조가 매우 많았으므로 주몽이 소서노를 특별한 사랑으로 두텁게 대하였고 비류 등을 자기 소생처럼 여겼다. 그 뒤 주몽이 부여에서 낳은 예씨의 아들 유류(孺留:琉璃)가 오게 되매 그를 세워 태자를 삼았고, 그 뒤 주몽의 뒤를 잇게 되었다. -

??추모가 소서노를 처음 만났을 때 추모는 21세, 소서노는 29세. 나이도 8세 연상이요, 게다가 두 아들까지 딸린 과부였지만 추모가 소서노를 만난 것은 가뭄에 단비를 만나 격이었다. 그녀의 아버지 연타발은 졸본부여의 유력한 호족이었을 뿐만 아니라 으뜸가는 부자였기 때문이었다. 추모로서는 연타발 부녀의 영향력과 재물이 절실히 필요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아무리 절세의 영웅이라도 대업을 이루기 위해서는 많은 인재와 재물이 필요한 법인데, 추모는 그 두 가지를 모두 갖춘 연타발과 소서노 부녀를 만났던 것이다.

??동부여에 본부인이 있는 유뷰남이라는 사실을 밝혔는지 총각이라고 속였는지는 모르지만 추모와 소서노는 혼인을 했고, 결과적으로 추모는 소서노의 재물을 풀어 사람들을 모으고 궁실을 세우고 성벽을 쌓는 등 한 해 동안 전심전력하여 마침내 고구려를 건국했으니 그때가 기원전 37년 10월이었다.

??추모라는 걸출한 젊은 영웅이 졸본부여 땅에서 일어나 고구려라는 새 나라를 세웠다는 소식이 사방으로 퍼져나가자 수많은 씨족과 부족이 찾아와 신민으로서 보호받기를 자청했을 것이고, 수많은 용사와 재사도 찾아와 대왕의 신하가 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부분노도 이? 무렵 추모대왕의 장수로 발탁된 것은 아니었을까.

??추모대왕은 고구려 건국 직후부터 자신이 오래 전부터 품어보고 키워오던 원대한 굼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으니, 그것은 바로 단군왕검의 대조선과 천왕랑 해모수의 대부여를 잇는 천손(天孫)의 나라, 대제국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그는 고조선의 유민들이 여기저기 뿔뿔이 흩어져 세운 수십 개의 나라를 합쳐 다시 하나의 대제국으로 아우르고자 했다.

??즉위 원년에 대왕은 군사를 이끌고 가장 가까운 말갈족을 쳐서 멀리 쫓아버리고, 그 다음에는 비류수 상류의 송양국을 복속시켰다. 추모대왕과 활솜씨를 겨루어 상대가 되지 않자 송양 왕이 항복하고 나라를 바쳤던 것이다. 대왕은 그 땅을 다물도라고 개칭했는데, 다물이란 고구려말로 ‘옛 땅을 되찾는다’는 뜻이라고 하니 이런 사실만 두고 보더라도 추모성왕의 원대한 포부를 잘 알 수 있다.

??대왕이 망명 동지인 오이와 부분노에게 명령하여 태백산 동남쪽에 있는 행인국을 쳐서 그 땅을 영토에 편입시킨 것은 첫머리에 밝힌 바와 같이 재위 6년째인 서기전 32년의 일이었다. 또 재위 10년 11월에는 장수 부위염(扶尉厭)을 보내 북옥저를 쳐서 없애고 영토로 삼는 등 쉴새없이 국토를 확장하고 백성을 늘려 힘차게 부국강병의 길을 달렸다. 기록에 상세히 나오지는 않지만 이러한 다물 사업에 오이?마리?협보?재사?무골?묵거 등 이미 이름이 밝혀진 개국공신들과 더불어 부분노 장군의 활약도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은 서기전 19년 9월에 재위 19년 만에 세상을 떴다. 그때 그의 나이 불과 40세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명성왕 19년 조에 이르기를, ‘여름 4월에 왕의 아들 유리가 부여로부터 그 어머니와 함께 도망하여 돌아오니 왕이 기뻐하여 태자로 삼았다’고 했는데, 그리고 5개월 뒤에 동명성왕이 세상을 뜬 것이다. 광개토태왕 비문에는 동명성왕의 죽음에 관해, ‘세상의 지위를 싫어하시니 이로 인하여 (하늘에서) 황룡을 보내어 내려와서 왕을 맞이하였다. 왕이 홀본의 동강(東岡)에서 황룡에게 업혀서 하늘로 올라갔는데, 세자 유류왕(儒留王)에게 고명(顧命)하여 도(道)로써 나라의 정치를 일으키게 하였다’고 새겨져 있다.

??유리명왕이 즉위하기 전의 사정을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유리명왕 즉위조는 이렇게 전한다.

??- 유리가 어려서 거리에 나가 놀면서 참새를 소다가 물 긷는 부인의 물동이를 잘못 쏘아 깨뜨렸다. 그 부인이 꾸짖기를, “이 아이는 아비가 없기 때문에 이렇게 못되기 구는구나!”하였다. 유리가 부끄러워하며 돌아와서 어머니에게 물엇다. “우리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며, 지금은 어디에 계시지요?” 어머니가 대답하기를, “너의 아버지는 보통 사람이 아니란다. 그러므로 나라에서 용납되지 못하고 남쪽 지방으로 도망가서 나라를 세우고 임금이 되었단다. 떠날 때에 어미에게 이르기를, ‘당신이 만일 아들을 낳거든 나의 유물이 일곱 모진 소나무 밑에 묻혀 있다고 일러주오. 만일 이것을 발견하면 곧 나의 아들이 틀림없을 것’이라고 하신 바 있다.”고 하였다. 유리가 이 말을 듣고 곧 산골로 들어가서 찾다가 그것을 찾지 못하고 지쳐서 돌아왔다. 유리가 어느 날? 마루 위에 있었는데 기둥과 주춧돌 사이에서 무슨 소리가 나는 듯하여 가서 보니 주춧돌이 일곱 모로 되어 있었다. 곧 기둥 밑을 뒤져서 부러진 칼 한 동강이를 찾았다. 드디어 이것을 가지고 옥지(옥지)?구추(구추)?도조(도조) 등 세 사람과 함께 졸본으로 가서 부왕을 보고 부러진 칼을 바쳤다. 왕이 자기가 가지고 있던 부러진 칼 동강이를 꺼내 붙여보았더니 완전한 칼로 연결되었다. 왕이 기뻐하여 그를 세워 태자를 삼았던 바, 이때에 와서 왕위를 잇게 되었다. -

??왕위를 이었다는 때가 바로 서기전 19년이었다. 그렇게 하여 부분노 장군은 동명성왕에 이어 유리명왕을 섬기게 되었던 것이다.??

??부분노 장군이 다시 사서에 등장하는 것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유리명왕 11년, 서기 9년이다.

??그해 4월에 유리명왕이 여러 신하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선비(鮮卑)가 지세가 험한 것을 믿고 우리와 화친하려 하지 않으며 정세가 유리하면???? 나와서 노략질하고 불리하면 들어앉아 지키므로 우리나라에 걱정거리가 아닐 수 없소. 만??? 일 이 선비 오랑캐들을 무찌르는 사람이 있다면 내가 큰 상을 내리겠소.”

??그러자 부분노가 나서서 말했다.

????“선비는 지세가 험하고 튼튼한 나라로서 사람들이 용감하지만 미련한지라 힘으로 싸우??? 기는 어렵고 계략으로써 굴복시켜야 합니다.”

??유리명왕이 말하기를,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겠소?” 하니 부분노가 이렇게 대답했다.

????“첩자로 하여금 적의 성안에 들여보내 거짓말로 우리 고구려는 땅이 좁고 군사가 약하??? 므로 겁이 나서 감히 선비를 치지 못한다고 하면 놈들이 틀림없이 우리를 만만히 여겨 수??? 비를 게을리 할 것입니다. 소장이 그 틈을 타 정병을 거느리고 지름길로 가서 산속에 숨??? 어 적의 성을 노리고 있겠습니다. 이때 대왕께서 약간의 군사를 오랑캐의 성 남쪽으로 보??? 내시어 싸움을 걸게 하신다면 놈들은 반드시 성을 비우고 멀리 쫓아올 것입니다. 이때 소??? 장은 정병을 이끌고 놈들의 성으로 쳐들어가고, 대왕께서는 날쌘 기병을 거느리시고 놈들??? 을 양쪽에서 공격한다면 반드시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유리명왕이 부분노의 계략에 따라 선비족 토벌군을 일으켰다. 선비족이 고구려 군사를 얕잡아보고 성문을 열고 출전하자 부분노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재빨리 군사를 거느리고 성문 안으로 짓쳐 들어갔다. 그러자 소수의 고구려 군사를 추격하던 선비족이 이것을 보고 크게 놀라 다시 성으로 되돌아왔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부분노가 성안에서 수많은 적군을 목베어 죽이고, 유리명왕은 강병들을 거느리고 성밖에서 달려드니 선비족은 앞뒤로 협공당하게 되자 마침내 항복하고 고구려의 속민이 되었다.

??전쟁이 끝난 뒤에 유리명왕은 전공이 으뜸인 부분노에게 상으로 식읍을 내리니 부분노가 사양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 모두 대왕의 빛나는 무위(武威) 때문이지 제게 무슨 공로가 있겠습니까?”

??그러자 유리명왕은 식읍 대신 황금 30근과 좋은 말 열 필을 부분노에게 상으로 주었다.

??이 기록을 잘 살펴보면 당시 부분노 장군은 용장이었을 뿐만 아니라 병법에도 통달한 지장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적국에 간첩을 들여보내고, 아군이 약한 듯이 보이는 허허실실의 전법 등이 모두 <손자병법>을 비롯한 병서에 나오는 전략과 전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나라는 삼국시대 초기 또는 그 이전부터 <손자병법>등 중국의 병법서들이 들어와 연구되고 실전에 응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부분노 장군은 이렇게 <삼국사기>에 딱 두 차례만 등장하고 기록에서 사라져버렸다. 그런데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부분노 장군이 선비족을 토벌할 당시 그의 나이가 50세 안팎이었을 것으로 추산된다. 왜냐하면 부분노 장군의 나이가 40세에 세상을 떠난 동명성왕과 비슷하다고 보면 유리명왕 11년에 그의 나이가 50세가 약간 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더 이상 그에 관한 기록은 없지만 부분노는 백전노장으로서 유리명왕을 도와 고구려 창업기의 부국강병책을 추진하는데 큰 공로를 세웠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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