晉陽途中詠野梅(진양도중영야매) [辛亥春]
진양 가는 길에 들판의 매화를 노래하다 신해년(1611, 광해군3) 봄
野外梅花草裏開(야외매화초리개),
들판의 매화가 풀숲에서 피어나니
細風吹送暗香來(세풍취송암향래)
산들바람이 그윽한 향기를 날려 보내네
世人不貴和羹實(세인불귀화갱실)
세상 사람들은 국에 간맞추는 열매를 귀하게 여기지 않으니
誰肯移渠近地栽?(수긍이거근지재)
누가 그 나무를 옮겨 가까이 심으려 하랴
출처=간송집 제2권
간송 조임도는 1585년 함안군 검암리(劒巖里, 지금의 伽倻邑 儉巖里)에서 사도시 첨정(司䆃寺僉正) 입암(立巖) 조식(趙埴)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5대조는 생육신의 한 사람인 어계(漁溪) 조려(趙旅)이다. 어계 조부 금은(琴隱) 조열(趙悅)이 고려말기 공조판서(工曹判書)의 관직을 버리고 함안에 낙향하여, 군북면(郡北面) 원북(院北) 마을 일대에 정착하여 산 뒤로부터 그 자손들은 대대로 함안에 많이 살게 되었고, 간송의 조부 때 다시 검암으로 옮겨 살았다.
간송은 8세 때 임진왜란을 만나 아버지를 따라 고향을 떠나 합천(陜川)에 가서 피난하였다.
14세 때는 정유재란을 만나 아버지를 따라 경북 청송으로 피난 갔다가, 다시 영주ㆍ봉화 등지로 옮겨 다녔다. 그 때 봉화에서 반천(槃泉) 김중청(金中淸)에게 배웠는데, 김중청은 월천(月川) 조목(趙穆)의 제자였다. 월천은 퇴계의 뛰어난 제자였으니, 이때부터 간송은 퇴계의 학통에 닿을 수 있었고, 이때부터 퇴계를 존모하기 시작했다.(〈墓碣銘〉, 《澗松別集》)
15세 때 여름에는 반천을 따라, 퇴계가 공부하던 청량산에 들어가 독서하였다. 이해 겨울에 다시 의성으로 옮겨가 살았다.
16세 때는 의성에 살던 두곡(杜谷) 고응척(高應陟)에게서 《대학》을 배웠는데, 두곡 역시 퇴계의 제자로 성리학에 깊은 조예가 있었다.
17세(1601년) 때 다시 인동으로 옮겨가 살았다. 간송의 아버지가 자주 이사를 다닌 이유는, 간송으로 하여금 문헌의 고을인 경상좌도 일대에서 두루 유학하여 간송의 학문을 폭넓게 만들어 주려는 의도 때문이었다. 이때 간송은 비로소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을 뵙고서 스승으로 삼았다. 그 때까지 간송의 이름은 기도(幾道)였는데, 여헌이 ‘기(幾)’자가 적극적이지 못하다고 지적하였으므로, 간송의 아버지는 아주 적극적인 뜻을 가진 ‘임(任)’자로 바꾸어 지었다. ‘유도(儒道)를 적극적으로 책임진다’는 의미였다.
19세 때 검암으로 돌아와 곤지재(困知齋)를 짓고, 시냇가에 두 그루의 소나무를 심고서 ‘간송(澗松)’이라고 자호하였다. 그리고는 “시냇가의 소나무 사랑하나니, 날씨가 추워져도 그 모습 변치 않기 때문이라네.〔爲愛澗邊松, 天寒不改容.〕”라는 시를 지었으니, 소나무의 절조를 본받으려 한 것이었다.
20세(1604) 때 향시에 합격하였고, 어버이의 뜻을 거스르기 어려워 과거공부를 계속하였다.
23세 때 함안의 용화산(龍華山) 아래 배 위에서 한강(寒岡) 정구(鄭逑)를 뵈었다. 이때 한강은 배를 타고 함안 도흥(道興) 나루 부근의 물속에 담가두었던 비석 석재를 찾기 위해서 배를 타고 왔다. 낙동강과 남강의 합류지점인 용화산 아래에서 머물고 있었는데, 인근 고을의 많은 선비들을 찾아가 만났다. 이때 여헌 장현광과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 등도 함께 있었으므로, 간송은 부친의 안내로 이 분들에게도 인사를 드렸다.
이해 노파(蘆坡) 이흘(李屹)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다. 노파는 본래 남명의 제자인 내암(來庵) 정인홍(鄭仁弘)의 문인이었는데, 1613년 계축옥사(癸丑獄事)로 인하여 정인홍과 노선을 달리하였다. 노파의 다른 사위가 성박(成鑮)인데, 성박은 부사(浮査) 성여신(成汝信)의 아들로 내암의 적극적인 지지자였다. 간송도 직접 간접으로 젊은 시절에는 내암과 관계가 적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27세(1611년) 때 정인홍이 퇴계의 문묘종사를 배척하였는데, 함안 사람 가운데서도 정인홍의 지시를 받아 퇴계를 공척(攻斥)하는 상소를 작성하기 위한 소회(疏會)를 준비하는 사람이 있었고, 간송에게 참석을 강요하였다. 간송은 《맹자》의 〈방몽장(逄蒙章)〉을 인용하여 자신은 참여할 수 없다는 뜻을 밝혔다. 당시 정인홍의 세력이 대단하였으므로, 선비로서 자신의 지조를 잃지 않은 사람이 드물었다. 그런데도 간송은 참여하지 않으니, 당시 사람들이 천인벽립(千仞壁立)의 기상이 있다고 추앙하였다.
32세 때 참된 학문을 하기 위해서, 과거를 완전히 포기하고 독서에 전념하였다.
34세(1618년) 때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 조정의 6품 이상의 관원들의 수의(收議)가 있었다. 간송은 신자(臣子)로서 대비(大妃)를 폐출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폈다. 이로 인하여 대북파(大北派) 세력들을 피하기 위해서 칠원현(漆原縣)의 내내(柰內)로 피신하여 상봉정(翔鳳亭)을 짓고 살았다.
43세(1627년) 때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간송은 고을 사람들에 의해서 의병장으로 추대되었으나, 그 뒤 병으로 사퇴하고 말았다.
47세 때 봉화로 가서 스승 반곡(盤谷) 김중청(金中淸)의 장례에 조문하고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도산서원 상덕사(尙德祠)를 참배하였다. 이때 예안 안동 등지의 퇴계학파 학자들과 결교하여 교유의 폭을 넓혔다.
49세(1633년) 때 칠원현 내내에서 영산현(靈山縣) 용산(龍山) 마을로 옮겨 살았다. 강 건너 함안의 용화산 기슭에 합강정(合江亭)을 지어 독서와 영시(詠詩)로 유유자적한 생활을 하였다.
50세 때 추천을 받아 공릉 참봉(恭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때 여러 선비들의 추대로 김해 신산서원(新山書院)의 원장을 맡았다. 신산서원에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을 배향하려고 노력하였는데, 여헌에게 자문을 구하였다.
53세 때 남한산성을 지키지 못하고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북쪽을 바라보며 통곡하였다. 이해 여헌의 부음을 듣고 설위(設位)하여 통곡하였다.
59세 때 창원에 우거하고 있던 미수(眉叟) 허목(許穆)을 방문하였으나 만나지 못했다. 미수가 일찍이 용화산 청송사(靑松寺)로 간송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70세 때는 의령 현감(宜寧縣監)으로 있던 동토(童土) 윤순거(尹舜擧)가 간송을 방문하였다. 돌아가 간송을 진유(眞儒)라 칭송하였다.
75세(1659년) 공조 좌랑(工曹佐郞)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78세 때 어사 남구만(南九萬)이 여러 선비들의 공론을 듣고 간송을 등용할 것을 계청(啓請)하였다. 조정에서 특별히 쌀과 콩을 내리자, 간송은 진사(陳謝)하는 소(疏)를 올려 규간(規諫)의 뜻을 14개조로 개진하였다.
1664년 80세를 일기로 고종(考終)하자, 조정에서 미포(米布)로 부의를 내렸다. 함안의 아호(鵝湖) 선영의 동쪽에 안장하였다.
1666년 사림들의 건의로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에 추증되었다. 1721년 사림들이 함안군 송정리(松亭里)에 송정서원(松亭書院)을 건립하여 간송을 향사하였다.
간송은 평생 벼슬하지 않고 학문연구와 유림활동만 한 순수한 선비로서 일생을 보냈다. 그러나 세상을 등진 결신(潔身)ㆍ장왕(長往)의 자세는 아니었고, 우국연민(憂國憐民)의 사상을 늘 확고하게 지닌, 적극적으로 현실에 참여한 선비였다. 이런 점은 남명의 일생과 아주 흡사하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