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개포초 홍순길 교장 "영어를 학교로 끌어오자" 자기 방에 영어교실 마련
'사교육 1번지' 강남서 사교육 줄이기 팔 걷어
"왓츠 디스(What's this)?"
"웨어 아 유 맘(Where are you, Mom)?"
여름방학 첫날인 지난 20일 오전 서울 강남구 개포초등학교 교장실에서는 때아닌 학생들 목소리가 낭랑하게 울렸다. 손님 접견이나 회의용으로 썼을 커다란 탁자 위에는 컴퓨터 다섯 대가 놓여 있었고, 컴퓨터 앞에는 학생들이 헤드셋을 끼고 앉아 영어 듣고 따라 말하기 연습을 하는 중이었다. 간혹 학생들 목소리가 기어 들어간다 싶으면 "자신 있게, 큰 소리로 해야지! 그냥 들은 대로 따라 하면 돼요"라며 학생들을 독려하는 교장선생님 목소리가 어김없이 들려왔다.
"교장실에서 공부한다고 하면 누가 감히 수업을 빼먹겠어요? 방학이라고 대충대충 하지 않도록 내 방에다 영어교실을 차린 거지…."
교장실 한쪽에 영어 학습실을 꾸려 놓고 방학 첫날부터 직접 학생들의 영어 수업을 챙기고 있는 이는 이 학교 홍순길(60) 교장이다. '사교육 1번지' 서울 강남구의 아파트단지 안에 위치한 이 학교에서 사교육을 줄여보겠다고 교장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것이다.
"올 연초에 학부모 설문조사를 해 봤습니다. 전교생 520여명 가운데 444명의 학부모가 응답했는데, 한 달 사교육비가 1억6300만원입디다. 학생 1인당 평균 월 36만원이 드는 셈이죠."
홍 교장은 이런 사교육비를 어떻게 하면 줄일 수 있을까 고민하다 '영어를 학교 안으로 끌어들여야 한다'는 답을 얻었다고 했다. 전체 사교육비의 절반에 가까운 금액(7300여만원)이 영어 한 과목에 집중돼 있었기 때문이다.
서울대 재학 중이던 딸이 해준 얘기도 가슴에 박혔다. "아이들한테 '공부하는 법'을 가르쳐 주라고 하더군요. 요즘은 서울대 학생들도 스스로 공부하고 학점 따는 걸 버거워한다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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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올 여름방학, 교장실에 영어 교실을 차린 홍순길 교장이 1학년 학생을 가르치고 있다. 홍교장의 영어 교실엔 전교생의 25%(520명 중 130명)가 참가 신청을 했다./오종찬 기자 ojc1979@chosun.com
홍 교장 스스로도 학원 공부의 한계를 절감한 경험이 있었다. 행여 학교 공부가 부족하지 않을까 열심히 학원을 보냈던 큰아들은 고1 이후 급격한 슬럼프에 빠졌다. "혼자서 공부를 해 본 적이 없으니 공부하는 맛을 몰라요. 고교 1학년까지는 곧잘 했지만, 나중엔 공부에 대한 흥미를 완전히 잃어버리고 말았죠. 둘째딸은 학원 근처에도 안 보냈습니다."
그래서 개포초등학교가 이번 방학에 운영하는 영어 교실은 학생 1인당 하루 한 시간씩, 딱 닷새 동안만 영어 공부하는 법을 가르친다. 이후에는 각자 자기 실력에 맞는 프로그램을 따라 스스로 공부하도록 했다. 대신 학생들의 학습량과 실력 향상도는 온라인 프로그램을 통해 모두 기록되기 때문에 학교에서는 학생 개인의 상황에 맞게 수시로 점검을 해준다.
홍 교장은 이 온라인 영어 학습 프로그램을 학교 예산으로 구입했고, 학생들에게는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 이번 방학 동안 전교생 520명 중 130여명이 영어 교실 참가 신청을 했다.
"철저히 회화 중심으로 구성된 프로그램이 좋아서 교육청에서 받은 예산을 쪼개 구입한 겁니다. 학교가 사교육에 투자한 거 아니냐고 비난할지 몰라도, 이 정도 모험도 감행하지 않으면 우리 아이들을 영영 사교육에 빼앗길 수밖에 없지 않겠어요?"
홍 교장의 이런 자신감은 평소 학생, 학부모와의 관계에서 쌓인 신뢰에서 나온다. '벌레 기르는 선생님'으로 더 유명한 그는 교장실 한쪽에 어항 대여섯 개를 늘어놓고 물벼룩이며 배추벌레 등을 기른다. 틈날 때마다 학생들을 교장실로 불러 현미경으로 물벼룩의 심장을 찾아보기도 하고, 애벌레가 번데기를 거쳐 흰 나비가 되는 과정도 보여 준다. 지난 학기 초에는 전교생에게 개구리 알을 분양해 직접 개구리를 길러 보도록 하기도 했다.
5학년 아들을 둔 학부모 서경민(40)씨는 "교장실을 놀이터처럼 들락거리는 아이들 모습을 보면서 학교를 믿고 맡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학교가 알찬 프로그램만 제대로 운영한다면 사교육을 완전히 없애진 못 해도 줄이는 건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