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순례 다섯째날
아침 6시 연길공항에서 북경행 비행기를 타고 2시간 동안 중국 내륙지역을 가로질러 중국의 수도 북경에 도착했다. 북경은 3천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도시로 고대 전국 시대에 연나라의 수도였다가 원나라 때 몸고족이 중국을 통일한 후에 북경을 수도로 정한 이후 거의 1천년동안 수도로서의 입지를 지키고 있다. 도시 전체가 박물관이라 할 만큼 3천년의 역사의 고도답게 세계적으로 유명한 볼거리들이 무궁무진하여 관광 수입이 엄청 나다고 한다.
정치, 행정, 문화, 산업의 중심지인 북경 시내로 접어드니 평소 우리가 알던 중국이 아닌 듯 현대적인 천마루 같은 건물들과 잘 정비되고 발달된 거대한 도시로 갖춰진 크기는 우리나라 강원도 크기만 하고 인구는 천만 명이라는데 또 놀란다. 북경시민은 아무나 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우수한 명문대학 출신들, 과학자들, 거부들의 기부도 시민권을 가질 수 있으며 인위적으로 도시를 만들고 통제하는 대표적인 사회주의적인 체제로 통치하고 있는 무서운 나라라는 생각이 들며.. 바로 옆에 조그만 나라 ‘대한민국’이 있다라는 생각이 왠지 자꾸 상념으로 맴돈다.
오늘 북경의 기온은 33도, 햇볕은 무척 뜨거우나 그늘로 들어가면 시원한 습기가 없는 건조함이 그래도 무더위를 견딜 수 있는 날씨였는데 무더위에도 만리장성을 보기 위해 인파들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인류가 지금까지 이룩한 업적 가운데서 사람의 손으로 만든 가장 위대한 토목공사라는 칭송을 들을 만한 것은 중국의 만리장성이라고 한다.
만리장성 역사를 살펴보자면, 황해에서 서쪽으로 감숙성까지 장장 2700km나 뻗어 나간 이 성은 확실히 장성이라 부를 만하다. 진시황은 기원전 214년, 취약한 북방의 국경을 지키기 위해 만리장성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북방의 변경은 몽골의 기마족 흉노의 침공을 늘 받고 있었다. 몇 만 명의 죄수들이 교대로 노예처럼 공사에 동원되었으며 전설에 의하면 만리장성이 완성될 때까지 100만 명 이상이 죽었다고 한다. 몇 세기 전에 왕공제후들은 그들의 도시를 방비하기 위해 성벽을 둘러쳤다. 황제가 한 일은 국경지대의 옛 방벽을 연결하여 자기의 제국을 둘러싸는 하나의 방위선으로 완성하는 일이었다. 시황제는 공사가 시작된 지 불과 4년 후에 죽었지만 그의 후계자들이 공사를 계속했다.
만리장성은 수리도 되고 연장도 되었으며 어떤 곳은 높이가 9m나 되기도 하고 200m마다 높이 12m의 탑이 세워졌으며 성벽의 두께가 10m나 되었다.
2000년 이상이나 지난 지금도 북경 북쪽의 산을 누비며 구불구불 뻗어나간 그 장관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위압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유네스코에 등록된 세계적인 문화유산 관광지로 끊임없이 찾는 관광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일행이 만리장성 일부를 체험하러 올라간 사이 초입에 있는사당을 찾았다. 관람하는 이는 나혼자 뿐이어서 호젓하게 요모조모 살펴보았는데 아마도 장성을 쌓다가 죽은 영혼들을 위로하기 위해 모셔논 위패가 무수히 많아 그때의 상황을 어림 짐작해 보며 영혼들을 위해 화살기도를 바쳐드렸다. 황제가 들렀던 흔적도 있는 작은 궁도 보였다.
천주교가 중국에 전래된 시기는 원나라 시기이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1294년 두 명의 외국인 선교사가 들어와 북경시 먼터우고우(门头沟) 호우상위(后桑峪)에서 선교를 시작했다. 그들이 왜 이렇게 북경 시내에서 먼 지역에서 선교를 시작했는지는 지금도 불가사의 한 일이다. 1334년 이곳에서 몇 칸의 민간주택에 북경 최초의 성당을 건립하게 된다. 이렇게 북경에 복음이 들어 온 것은 오래 되었지만 한동안 선교의 흔적이 사라지고 다시 복음의 전래가 시작된 것은 명말인 1582년 이탈리아의 선교사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중국명 利玛窦)가 중국에 와서 선교를 시작 하였는데 이어 1622년 선교사 아담 샬 (Johann Adam Schall von Bell) 이 북경으로 오고 나서 천주교당이 본격적으로 북경성내에 건립되기 시작하였다.
현재에 이르러 북경시내에 東堂,西堂,南堂,北堂,东交民巷堂,南岗子堂,平房堂,东管头堂 총 8개의 성당이 있고 교외에 9개의 성당이 있어 북경 내에는 총 17개의 성당이 존재한다. 원대에 수도를 잡은 이래 수백여 년 그동안 천주교, 기독교, 불교, 도교, 이슬람교 등 각기 다른 지역 다른 종교들도 북경에 들어와 발전하였는데 근대에 와서 그 모습들을 거의 상실하긴 하였으나 북경에 오래산 노인들은 이전에 길에서 승려들 목사나 수녀 신부들의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성당 외부에 별도로 마련된 성모산 혹은 성모정이 있는데 성모산에서 산이란 중국의 전통 정원양식의 인공산을 말한다. 성모상을 이러한 작은 인공산내의 인공동굴에 안치하였고 성모정은 중국식 전각 안에 성모상을 모셔 그야말로 독특한 중국전통과 천주교양식의 만남을 이루게 된다.
남당 성당
북경 내 성당의 건축 양식은 유럽의 성당 건축양식과 거의 비슷하다. 주로 로마,고딕양식이 위주가 되고 있다. 다만 서양의 성당 건축 양식이 주로 동쪽을 향하고 있는 반면에 북경의 성당들은 중국 전통적인 풍수사상에 의해 남쪽을 향하고 있다.
동당 성당 입구
왕푸징대가(王府井大街)에 있는 동당은 1655년 청의 순치제 때 두 명의 외국인 선교사의 주택지로 제공된 토지에 선교사들이 건립한 작은 성당이 원형이다. 이 성당은 지속된 지진과 전란에 의해 파괴되었다가 1904년 중건되었다가 1980년경 다시 중수되어 문을 열게 되었다. 특이한 것은 동당의 지리적인 위치 때문에 건물이 서쪽 방향을 향하고 있다는 점이다. 건축양식은 로마식이며 성당내부는 바티칸공의회 이전의 제대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서 명동성당과 비슷한 건축양식과 모양을 갖추었으나 관리를 하지 않아 어수선 하고 먼지 쌓인 조화의 제대 꽃은 차라리 치워버렸으면 하는 생각을 하며 왠지 성당에서 느껴지는 거룩한 기운을 느낄 수가 없었다. 미사 드리는 중에 문전에서 구경하는 무리들이 많이 있었고 중국인인지는 모르나 몇 명은 우리와 함께 전례에 참석하여 성체를 영하는 모습도 보인다.
북경 중심지에 위치한 4백년 된 고딕풍의 동당성당 東堂(王府井大街)에서 미사를 봉헌하였다.
독서 봉독하시는 채효석 유스티노 형제님
다음 일정은 북경에 와서 즉석 제안한 것이 있었는데 중국의 대형 극장에서 공연하는 중국 정통 고전 뮤지컬을 모두의 동의를 얻어 관람을 하였다. 뮤지컬명은 ‘금면왕조’인데 북경 올림픽 총감독이자 영화 사탕 수수밭으로 국내에 잘 알려진 명감독 '장예모'의 작품이다. 중국다운 화려한 안무, 웅장하고 다채로운 대형화된 무대가 빠르게 전개되며 출연진도 아주 많았고 뮤지컬과 서커스가 혼합된 고전극으로 마지막 무렵에는 무대에 4백 톤의 물을 이용해 대홍수를 입체감 있게 표현한 장면은 관람객들을 충분히 압도하는 연출은 장관이었다. 모처럼 초대형 뮤지컬을 감동 있게 보았다.
실제로 살아있는 공작을 머리에 올려 놓고 무용을 하는 장면이다.
대홍수를 입체감있게 연출
저녁식사는 북한이 외화벌이로 운영한다는 평양 옥류관으로 안내되었다. 북경에 가면 특히 한국 사람들 꼭 한번은 들린다는 음식점으로 평양냉면을 먹어보기 위해서이고 코스 요리로 중국식 원형탁자에 놓여진 음식은 우리의 음식과 입맛에 맞춰진 흡사한 형태였다.
놀라운 것은 음식 써빙하는 젊고 고운 아가씨들의 모습인데 한결 같이 곱게 뒤로 빗어 넘긴 똑같은 생머리 길이와 보라색원피스와 높은 하이힐을 신고 음식을 나르는데 표정이 참 예쁘고 고와서 한참을 바라보았다. 공연 중 꽃다발을 선사할 수 있는데 우리 돈 1만원을 지불하여 꽃을 구입, 마음에 든 아가씨에게 선물할 수도 있단다. 노래, 춤, 연주도 잘했지만 모습이 참으로 곱고 예뻤다.
가이드의 설명은 옥류관에 파견된 북한 여성들은 북한의 고위급 간부 자손들만 뽑혀서 이곳을 올수가 있다고 하고 또 실수를 하게 되면 곧바로 소환되므로 늘 노심초사 실수를 하지 않으려고 고생한다고 들었다. 빠르면 3개월 안에 잘하면 3년 정도는 북경에서 지낼 수 있지만 다시 선발되어 나오기는 하늘의 별따기라고 하는 설명을 들으니 다양한 춤과 간혹 북한방송을 통해 본 꾀꼬리 같은 음색의 노래와 여러 악기를 다루는 솜씨는 일품인데 왠지 측은하고 즐겁지만은 않은 심정으로 관람을 하고 음식을 먹고 아쉬운 맘으로 숙소로 돌아왔다.
마지막 날에 일행은 함께 모여 그간의 여러 가지 중국 교회 복음화를 위한 성지순례의 현장을 보고, 느낀 점 등을 나누며 순례 후의 소회를 나누는 시간을 갖고 잠자리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