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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가을 집회]
십자가의 효능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그러면 뛰어내려 보아라!
3. 인격을 확보하고 구속을 이룸 & 4. 인격 안에서 하나 되게 함
2016년 10월 9일 이현래목사님
[고전1:18~31]
“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9 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25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30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31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3. 인격을 확보하고 구속을 이룸
아주 중요한 말씀이다. 이번 가을집회는 “십자가의 효능”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했는데 조금 미진한 것이 있어서 말씀을 하려고 한다.
오늘 본문에 읽은 대로 기독교가 전파된 세계는 희랍세계였다. 시작은 유대나라에서 했지만 전파되고 확장된 것은 희랍세계다. 바울도 희랍세계 안에서 이 글을 쓴 것이다. 그러니까 희랍세계는 지식을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세계라서 철학이 발달했다. 희랍세계는 유럽전체와 인도까지라고 할 수 있다. 아리안족이 살고 있는 모든 곳이 희랍세계다. 그리고 지금은 전 세계가 희랍세계의 영향을 받고 있다. 아주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세계에 기독교가 들어가 있다.
유대 땅에서 시작된 이 복음이 희랍세계로 퍼져 들어갔다. 유대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하면 어떻게 하면 나라가 빨리 회복되어서 로마로부터 독립하고 더 나아가서 전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왕국이 될 수 있는가. 그렇게 하기 위해서 언제 메시아가 오는가 하는 이것이 유대인들의 문제다. 그들은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런 경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애굽에서 종살이를 할 때 아무도 자기들을 구원해줄 자가 없었고 또 자기들 힘으로 빠져나올 수도 없었다. 그런데 모세가 와서 자기들을 건져냈다. 이런 경험을 가지고 있다. 또 그들은 가나안 땅에서 블레셋 사람들 속에서 전쟁을 하면 늘 패하고 했었는데 다윗이라는 왕이 와서 다 평정을 해서 이스라엘을 세웠던 역사적인 경험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의 생각은 언제든지 그런 메시아가 오면 자기들의 모든 것은 회복될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그 모든 것이 다 회복될 것이다. 그리고 회복의 마지막에는 전 세계가 다 유대인들에게 와서 절을 하고 경배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다. 이럴 때 예수님이 오셨으니까 당연히 예수가 메시아라고 한다면 그런 사람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자기들이 보니까 전혀 예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예수를 죽이게 된 것이다. 죄를 졌기 때문에 죽인 것이 아니라 민족을 기만했다는 것이다. 너 같은 촌놈이 와서 우리를 무시하고 제사장 서기관이 다 있는 이런 나라인데 너 같은 사람이 와서 우리 민족을 혼란에 빠뜨리고 현혹시키냐고 해서 괘씸죄로 죽였다고 할 수 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생각하는 것과 제자들이 예수님을 생각하는 것은 다르다. 희랍인들은 항상 지혜를 찾아서 보다 지혜로운 삶을 살자고 하는 사람들이라서 철학이 발달했다. 유대인들처럼 빈궁한 입장에 있었던 것도 아니고 또 역사적으로 종살이를 한 것도 아니고 그들은 지중해 문명이었기 때문에 좋은 여건을 가지고 있었다. 기후도 좋고 생산물도 풍부하고 사람이 살기에 아주 좋은 지역이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더 인생을 즐길 것인가, 어떻게 하면 더 지혜롭게 살 것인가. 이것이 그 사람들의 목표다.
그런데 예수를 전파한 사람들을 보니까 그들이 전파한 것은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이었다.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살고 봐야지 왜 십자가에 못 박혀 죽냐는 것이다. 인류를 구하러 왔다는 사람이 저런 모양이 돼서 무슨 인류를 구원한다는 것이냐 하는 이런 생각이 당연히 나고, 지혜롭지 못한 생각이니까 철학자들의 생각과 비교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래서 나온 말이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했다. 표적은 하늘로부터 온 표적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이 보낸 사람,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 이스라엘을 구할 사람을 찾고 있는 것이고, 헬라인들은 지혜를 찾고 있다는 것이다. 인생을 어떻게 하면 재미있고 의미있게 살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찾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예수는 이런 것에 해당이 안 되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멸시했다는 것이다.
오늘날도 똑같다. 능력이 필요해서 예수를 찾는 사람들은 실망하게 되고 지혜가 필요해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싱겁다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도 인생을 즐길 것이 많고 그것이 아니라도 인생을 잘 살 수 있는 방법이 얼마나 많은데 하필 십자가의 도를 가지고 해야 되냐는 것이다. 십자가의 도는 너무 부끄러운 도이고 약한 사람들이나 하는 것이고 또 지혜롭지 못한 길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전도를 해보면 우리 집에 아들이 세 명인데 두 명은 잘 살고 있고 한 명이 문제가 있으니까 이 아이나 데려갔으면 좋겠다고 한다. 그러니까 좀 시원찮은 사람들은 교회가면 괜찮겠다는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똑똑하고 잘난 사람들은 갈 필요가 없는 곳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세계에 예수가 전파되어서 이런 말이 나오게 된 것이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는 말이 “지혜가 어디 있고 능력이 어디 있냐? 헬라인에게나 유대인에게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다.”는 것이다. 그 사람이 유대인도 분노한 사람이고 헬라인들은 시시하게 여기고 멸시한 사람인데 이 사람이 능력이고 지혜라는 것이다. 이것은 유대인이나 헬라인들에게는 억장이 무너지는 말인 것이다. 믿지 않는 사람이 볼 때는 정말 말도 안 되는 말을 하는 것이다.
우리가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세상에 맞는 말을 전하는 것이 아니고 세상과 맞지 않는 말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전혀 엉뚱한 다른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몸이 아파서 병원에 왔는데 선생님이 예수 믿는 것이나 말하고 주사도 안 주고 약도 안 주고 집에 가서 기도하면 낫는다고 하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이 의사 또라이 아니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초창기에 전문의사 제도가 우리나라에 정착이 안 되었을 때 한 친구가 정형외과를 전공해서 구파발 쪽에 정형외과 간판을 붙이고 개업했다. 사람들이 전문의가 뭔지 모르니까 머리 아픈 사람도 오고 배 아픈 사람도 오고했다. 사람들이 뭔지 모르니까 별의별 사람이 다 온 것이다. 이 친구가 정직하고 고지식해서 배 아픈 사람은 내과로 가시오. 이 병은 저 병원으로 가시오. 하면서 보내고 나니까 정형외과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돈벌이를 못하는 것도 문제지만 사람들이 왔다가면서 ‘이 병원은 이상한 병원이네. 아픈 사람이 오면 다른 데로 보내 버리네...’ 그러니 이상할 게 아니겠는가? 그래서 할 수 없이 간판을 내리고 그냥 일반 의원으로 강남에 와서 빌딩을 하나 짓고 했다. 지난번에 죽었다 했던 그 친구다. 그런 시절이 있었다. 그러니까 불과 얼마 안 되는 사이에도 전혀 다른 그런 세계가 있단 말이다. 그냥 병원에 가면 무슨 병이든 다 듣던 시대였으니까 그랬다.
지금은 배 아픈 데 신경외과에 가서 김OO 형제에게 봐 달라고 하면 안 된다. 가서 안 된다고 하면 ‘아니, 의사가 되어서 이것도 모르냐?’ 해 버린단 말이다. 몰라서 그런 것만도 아닌지만 다 전문가가 있으니까 전문가를 찾아가는 시대이고 이제는 젊은 사람들이 눈을 떠서 어디로 갈지 자기들이 알고 있다. 노인네들은 몰라도 옛날처럼 그런 사람도 없다.
그러니까 그 시대에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그 때만 어려운 것이 아니라 지금은 더 어렵다. 기독교가 왜 이렇게 변질의 역사를 걸어왔는가 하면 이 문제 때문에 그렇다. 전혀 다른 세계를 전하려니까 그 시대나 지금이나 똑 같은 것이다. 사람들이 안 받아들이고 못 받아들이니까 그것을 좀 쉽게 하고 더 쉽게 하고 하다 보니까 변질되어서 그냥 믿기 좋은 그런 종교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TV에 나오는 방송을 늘 들어보니까 설교의 대부분이 ‘할 줄로 믿습니다.’ ‘축복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이 이야기였다. 결론은 그게 어떤 복을 받으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그게 아니면 효과가 없는 것이다. 말을 해 봤자 별로 효과가 없다.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목사님들이 설교를 할 때 보면 처음에는 무슨 말을 한다. 한 1/3은 성경에 무슨 말씀을 하는 데 이게 힘이 안 난다. 아멘 소리가 별로 없고 그러니까 힘이 안 난다. 그때 병 고치는 이야기를 꺼내면 자기도 열이 나고 듣는 사람도 열이 나고 그런다. 그래서 충만한 집회가 된다. 여러분도 봐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아이고, 저 양반이 안 되겠구나. 안 되겠어서 바꾸는 구나.’ 누가 봐도 그런 생각이 든다. 사람들의 관심이 전부 거기에 있다.
예수를 왜 믿는가? 능력 때문에 믿는 것이다. 병을 고쳐 준다니까 믿는 것이고, 그럴 만한 힘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믿는 것이다. 갓 바위를 왜 가는가? 갓 바위를 가면 뭔가가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가는 것이다. 일 년에 한 번씩은 소원을 들어준다든가 그런다. 여러분도한 번 해 보시라. 한 가지 소원은 들어준다니까 일 년에 한 가지 소원만 성취해도 50년만 간다면 50가지다. 그러니까 그렇게 수지맞는 장사가 어디에 있겠는가? 안심하고 한 번 해 볼 사람은 해 보시라.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에게 와서 무엇을 구하겠는가? 무엇을 내 놓으라면 내 놓겠는가? 길거리에 가서 죽으라고 앉아 있는 게 낫다.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에게 무엇을 내 놓으라 하겠는가? 그런데 바울을 이렇게 말을 하고 있고, 바울은 이것을 지금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 가을 집회에 <십자가의 효능>을 좀 이야기를 하겠다고 했는데 이것은 해 놓고 봐도 좀 모자란 것 같고, 모자란 것 같아서 평생을 해야겠다. 평생이 얼마 안 남았지만 말이다. 그런 생각을 지금 하고 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다.’ 고 한다. 지금 생각하니까 나도 그런 것 같다. ‘다른 것은 알 필요가 없구나. 이것도 지금 시간이 모자라는 구나. 이것을 다 밝히기도, 이것의 효과를 다 밝히기도 시간이 모자라는 구나.’ 이런 생각이 든단 말이다. 그러니까 바울이 고민을 많이 한 것 같은 데 나도 어느 덧 그런 고민을 하게 되었다.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지 아니할 수 없는 그런 때가 왔다. 그러니까 되든지 안 되든지 간에 하는 데 까지 해 보고 약효가 날 때까지 할 수밖에 길이 없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인격을 지키고 인류 구속을 확보하셨다. 구속은 아담이 사단에게 유린당한 인격을 다시 찾아오는 것이다.
이번에 주제가 <십자가의 효능>이지만 중요한 초점은 인격을 지키는 일이다. 인격을 확보해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오른다는 이야기다. ‘하나님 보좌 우편’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생명을 모든 사람들에게 더 나아가 만유에까지 그것을 분배한다는 뜻이다. 통치한다는 말이 세상의 말처럼 군대나 이런 것을 가지고 다스린다는 뜻이 아니라 그것을 나눠준다는 뜻이다. 분배한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사람에게 공급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성품을 공급한다. 하나님의 어떤 성질을 성분을 사람들에게 공급해 준다.’ 이런 뜻이다. 거기에 하나님 보좌 우편이 필요하다.
보좌 우편은 제일 중요한 곳이다. 용상의 오른 쪽이니까 우리가 볼 때는 왼쪽이다. 좌의정이 중요한 이유가 그것인 것 같다. 우의정 보다 좌의정이 더 높다고 한다. 거기는 무엇을 하는 곳인가? 임금을 출납시키는 곳이다. 임금의 성분을, 마음을, 그 소원을 출납하는 곳이다.
그러니까 이것을 맡을 사람은 굉장히 중요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여러 가지 만물들을 창조해 가신다. 왜 창조하고 또 창조하고 하는가 하면 이것만 가지고 안 되겠고, 이것만 가지고도 안 되겠고, 또 이것만 가지고서 안 되기 때문에 그렇다.
‘빛이 있으라.’ 하니까 좋은 데 그것만 가지고서는 안 되겠단 말이다. ‘식물이 나라.’하니까 좋은 데 그것만 가지고서는 안 된단 말이다. 식물은 생명력을 표현하는 데는 좋지만 더 이상은 안 된다. 이래서 물고기를 짓고, 공중에 나는 새를 짓고, 땅에 기는 것들을 짓고, 심지어는 우리가 생각할 때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지어 놓았다. 그것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고민이다. 얼마나 고민하시다가 모기를 지었겠는가? 한 번 생각해 보라. 안 그런가? 얼마나 고민을 하다가 독사를 지었겠는가? 뭔가를 표현해야겠는데 독사가 표현하는 것은 황소가 표현할 수 없고 황소가 표현하는 것은 독사가 표현할 수 없다.
그러니까 모든 것을 만든 이유는 하나님 성품의 어떤 면을 다 나눠주고 싶은 데 나눠주려면 어떤 도구가 있어야 된다. 그래서 그것을 창조하다가 마지막에 사람은 지은 것이다. 그리고 ‘심히 좋다.’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전까지는 좋다고만 했지만 사람을 짓고 난 다음에는 ‘심히 좋다.’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다른 것들은 능력이나 이런 것들을 표현하는 것이 맞지만 그분의 성품과 생명을 표현하는 데는 다 좀 부족했는데 사람을 지어 놓고서는 만족하다는 것이다. ‘아! 사람이면 되겠다.’ 이런 이야기다.
그래서 안식을 했다고 한다. ‘이제는 일이 다 끝났다.’ 그래서 쉬었다. 그리고 그 날을 안식일이라고 정하고 그 날을 지키라고 명령하였다. 그 날을 복 주어 거룩하게 하였다. 그 날은 거룩한 날로 정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소원이 성취된 날이기 때문이다. 일을 하기 위해서 모든 준비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랬으니까 너무너무 기뻐서 그 날을 복 주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이 기뻐서 복을 준 날을 사람들이 지키면 하나님이 얼마나 좋게 생각하시겠는가!
그런데 그 날에 또 무슨 일을 하겠다고 한다. 자기 일을 하겠다고, 아니면 하나님의 일을 고쳐보겠다고 이렇게 하면 얼마나 불쾌하겠는가? 그래서 ‘안식일에 일을 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이렇게 엄격한 계명이 나오게 된 것이다. 안 그렇겠는가? 개미까지 독사까지 모기까지 만들어서 하나님은 욕을 많이 먹는다. 여름에 모기를 만들어서 왜 이것을 만들어 놓았느냐고 얼마나 비난을 받는지 아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해 놓았고 마지막에 사람을 지어서 안식을 하게 되었는데 ‘왜 안식일을 정해 놓았는가, 나는 지금 바빠 죽겠는 데?’ 이렇게 하고 다른 일을 한다든지, 아니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고 ‘이건 뭐 조금 잘못 된 것 같아. 이건 좀 고쳐야 될 것 같아.’ 이러고 껄떡 거리면 얼마나 속이 상하겠는가?
그래서 절대로 못하게 하기 위해서 ‘반드시 죽일지니라.’ 이렇게 엄명을 해 놓은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은 얼마나 귀한 존재인가! 하나님 마음에 딱 들도록 해 놓은 존재란 말이다. 비록 우리가 살다 보면 ‘인간이 저럴 수가 있는가? 저런 인간을 왜 만들어 놓았는가?’ 이런 것도 있고 자기 스스로 생각해도 ‘인간은 뭔가가 부족하다.’ 이런 게 많은 데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그렇지 않고 아주 너무너무 만족하게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포크레인을 만든 사람은 지금도 만족할 것 같다. 별로 변경이 되지 않는 것 같다. 항상 그 기계를 쓴다. 그것은 사람이 천 명이 할 일을 혼자 한다. 지금도 포크레인이 있으면 못 할 일이 없다. 도로고 뭐고 마음대로 만들어 낸다. 그러니까 그것을 처음에 만든 사람은 정말 토목 개발에 노벨상을 받아야 할 사람이다. 그러니까 얼마나 만족하겠는가?
그런데 거기서 어떤 사람이 ‘야! 이거 뭐 잘못 만들어진 것 같은 데...’ 해서 자기가 만들어 본다고 해서 그것보다 못한 것을 만들어 놓으면 그것은 얼마나 속이 상하겠는가? 그와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내가 보기에는 땅 파는 데 포크레인만큼 더 좋은 기계는 없을 것 같다.
하나님이 보실 때는 ‘하나님 자신을 만유에게 분배하는 데는 사람 이상 더 좋게 만들 수 없다.’ 이렇게 생각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자부심이 생긴다. 그렇지 않은가? 나는 구조상으로 만들어지기를 하나님을 표현하는 데는 아주 딱이다, 딱... 그러면 ‘아무개는 능력이 많으니까 할 수 있고, 아무개는 이러니까 할 수 있는데 나야 능력도 없고 이러니까 못하는 게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이것은 능력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다. 전혀 관계가 없는 일이다. 존재자체가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이것이 복음이다. 이것을 전파하는 것이 복음이란 말이다. 그러니까 이 인격을 회복하는 일이 첫째로 중요한 일이다. 십자가 효능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인격을 확보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전달하고 희생을 전달하고 이것이 중요한 게 아니고, 하나님이 창조했다가 잃어버린, 빼앗겨버린 인격을 되찾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다.
그러니까 목숨을 걸었다. 아니라면, 다른 것이라면 그것이 아니고도 얼마든지 있다. 하나님이 자기의 사랑을 표현하는 데 이 독생자가 십자가에 죽어야겠는가? 생각해 보라. 사랑이 얼마나 좋은 것인데 무자비하게 아들이 십자가에서 죽어야 되겠는가? 말이 안 되지 않는가? 좋은 술은 잔도 좋아야 한다. 몇 백만 원 짜리 포도주가 있는 데 그런 것을 뚝배기에 따라 마신다면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그게 무슨 맛이 나겠는가?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너무너무 소중하게 생각을 한다. 왜? 사람 속에는 인격이 있기 때문이다. 그 인격은 너무 소중한데 이것을 빼앗겼다. 이것을 구하기 위해서 독생자를 희생할 가치가 있는 것이지, 아니 뭐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이것을 전하려고 그럴 필요는 없다. 다른 방법이 얼마든지 있으니까, 사람이 만족 할 만큼 해줄 수 있는 일은 얼마든지 있다.
그러니까 첫째 문제는,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인격을 되찾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역사를 통해서 퇴색되어 버렸다. 이것은 퇴색되어 버리고 다른 것만 십자가의 복음이라고 전파가 되고 있다. 그 가장 중요한 것을 빼버리고 기타의 것을 가지고 기타 것을 가지고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고 있다. 우리가 중요한 것은 그것을 회복하는 길이다. 다시 돌아오는 길이다.
여러분이 왜 다른 교회를 가지 않고 여기를 왔느냐 하면 이것 때문에 왔다. 다른 교회에 사랑이 없는가, 희생이 없는가. 봉사가 없는가. 얼마든지 다른데 다 있고 더 잘하는데도 많다. 그런 것은 오히려 천주교가 개신교보다 더 잘한다. 그런 거 하고 싶은 사람은 천주교 가면 된다.
인격 확보, 인격을 확보하는 것은 구속을 이루는 일이다. 구속이라는 말은 원위치로 되돌아간다는 말인데 원위치가 어디인가? 인격이다. 원위치가, 내가 돌아가야 할 곳이 어디냐 하면 그 인격이다. 우리는 무엇을 빼앗겨버렸는가 하면 인격을 뺏겼다.
사탄은 무엇을 빼앗으려고 선악과를 주었는가? 이것을 빼앗으려고 선악과를 주었다. 네가 이것을 먹는 날에는 네 눈이 밝아져서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 같이 될 것이다. 그 하나님 같이 되려고 나갔으니까 인격이 없어졌다. 인격으로는 하나님이 될 수 없다. 인격은 인격이다. 인격으로 어떻게 신격이 되겠는가?
소가 어떻게 개가 되겠으며 개가 어떻게 소가 되겠는가. 불가능하다. 소라는 말은 소격이라는 말이다. 개라는 말은 개 격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격이 바꿔질 수는 없는 것이다. 천하 만물의 모든 것이 다 격이 있는데 그 격이 바꿔지지는 않는다. 사람도 사람이라는 격이 바꿔질 수가 없다. 그런데 하나님 같이 된다고 했으니까 이것을 버리고 간 것이다. 그러니까 인간은 자기 격을 버리고 엉뚱한 것을 찾고 있는 것이다.
자기 격을 버리고 개가 지금 자기 격을 버리고 다른 것을 지금 찾고 있다. 염소가 되려고 한다든지 사슴이 되려고 한다든지 그러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얼마나 힘이 들겠는가. 해도 해도 안 되는 일을 계속 하는 것이 저주다. 저주라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고 해도 분명히 안 될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저주다.
시지프스의 신화가 그것이다. 바위를 굴려 올려봤자 도로 떨어질 것이다. 그것을 알지만 명령이 내려져서 올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죽도록 힘을 써서 올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올려서 꼭대기에 올라가면 똑 떨어져 버린다. 굴러 떨어져 버리면 다시 또 내려가서 천신만고 끝에 끌어올려야 한다. 이것을 저주라고 한다. 헤도 안 될 일이다. 그러면 아담은 자기가 해도 안 될 일을 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사람이 자기가 해서 잘 할 일을 하면 쉽다. 자기가 해서 안 될 일을 하면 어렵다.
김연아가 자기는 왜 성공을 했는가? 자기는 잘하는 것을 했다. 해보니까 잘 되서 했다. 김연아를 보고 있으면 신기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자세히 봐보면 신기가 있다. 그냥 연습을 해서 되는 것 하고 신기가 있어 되는 것과는 다르다. 신기는 자기도 모르게 나오는 것이다. 그것을 천재라고 한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이 흉내 내기가 어렵다. 그것은 아무리 가르쳐줘도 안 되는 것이다. 아사다마오는 왜 실패했는가?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했단다. 참 유명한 말을 해놓았다. 하고 싶은 것을 했기 때문에 실패했다는 것이다. 하고는 싶은데 소질이 없다는 말이다. 취미는 있는데 소질이 없다는 말이다. 이것이 사람을 잡는 것이다. 소질 없는 취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 사람을 잡는 것이다. 소질이 있는 것을 하면 쉽고 남은 어렵다고 하는데 자기는 안 어렵다. 그래서 사람도 자기 소질에 맞는 것을 했으면 쉬울 것인데 하나님이 사람을 만들 때 어려운 것을 만들어 놓았겠는가. 쉽게 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을 것인데 자기가 못할 것을 하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봐라. 여러분이 인생에 고민이 있다든지 고통이 있다든지 잘 생각해보라.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인지, 자기가 할 수 없는 일인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 같으면 금방 아이디어가 떠오르고 금방하기가 쉽다. 남이 못해도 자기는 한다. 그런데 자기가 할 수 없는 일은 밤새 고민을 해도 안 된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안 될 것은 안 된다. 그것만 금방 구별해서 살아도 짐을 반은 놓는다. 오늘 여기 와서 내 말을 자세히 듣고 확실히 실천해보면 인생고의 반은 없어진다. 절반은 없어진다. 될 것은 열심히 하고 안 될 것은 포기하면 되는데 될 것은 접어놓고 안 될 것만 열심히 한다면 인생 낭비하고 고생하고 그것이 지옥이지 지옥이 딴 데 있겠는가. 멀쩡하게 잘 살던 사람이 지옥에 가겠는가. 안 될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니까 세상을 살면서 지옥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인격을 확보하는 일은 너무 당연한 일인데 이것을 빼앗긴 것이다. 하나님 같이 되려고 하다가 이것을 빼앗겼다. 그러니까 구속은 뭐냐 하면 아담이 사탄에게 유린된 것, 속아서 유린당한 이것을 다시 찾아오는 것이다.
유명한 분들이 많다. 석가모니도 있고 공자님도 있고 소크라테스도 있고 유명한 분들이 많다. 좋은 말씀을 많이 했고 좋은 방법도 많이 주고 많은 가르침을 줬다. 그런데 이것은 아니었다.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아오는 것은 아니었다. 좋은 교훈이었다. 교훈을 말한다면 지혜로 말한다면 성경이 말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나은 지혜가 있다.
불교의 목표는 어쩌면 지혜를 얻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리석음, 이것을 다 벗어버리자. 예를 들어 다 벗어버리고 우매한 것, 어리석은 것은 다 탐심에서 온 것이다. 탐심을 버리면 이런 것은 다 없어진다. 그런 것을 없애고 깨닫고 하는 것이 아주 세목적으로 연구해 놓았다. 대단하다. 그러니까 그렇게 수양할 사람은 거기 가서 해야겠더라. 그래서 자기 문제가 무엇인지 알아서 하나씩 하나씩 해결해가도록 평생에 하다가 될지 안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해결해 가려면 거기를 가야겠더라. 구체적인 방법을 다 해놓았다.
그런데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모른다. 잃어버렸다는 말도 없다. 원래 그렇지 않았는데 무엇인가 업이 와서 쌓아져서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업을 벗어내야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완전히 다 벗은 해탈의 길로 가자는 얘기이다. 해탈의 길이 어디까지인지 다 모르지만 하나님이 창조할 때 다 필요해서 창조해놓은 것이 있는데 그것을 찾지 않고 해탈해서 어디를 가겠는가. 내가 내 길이 아닌 다른 길에 가서, 개가 개가 안 되고 송아지가 되었다고 하자. 송아지가 되어서 지혜로우면 뭐가 되는 것인가? 개가 되는 것인가? 송아지는 짖을 수가 없다. 송아지는 사람이 와도 짖을 수가 없고 도적이 와도 짖을 수가 없다. 그러니까 그 송아지는 개가 되기 전에는 도적이 오면 짖을 수가 없다. 다른 방법이 없다. 기술도 없고 지혜도 없고 개가 되면 자동적으로 짓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필요해서 만들어 놓은 인격은 다른 것으로는 안 된다. 다른 지혜나 지식이나 이런 것으로 대체가 안 된다. 그래서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지만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한다는 것이다. 그런 것은 안 되는 일이다. 무시해서가 아니라 안 되는 일이다. 그렇지 않은가? 연필을 가지고 붓글씨를 쓰겠는가. 연필을 가지고는 붓글씨를 못 쓴다. 붓이라야 붓글씨를 쓸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지난번에 예수께서 십자가에 뛰어내렸느냐 못 내렸느냐를 얘기했다. 이번에 신문에 광고할 때 그렇게 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그러면 뛰어내려봐 그러면 우리가 믿겠다. 했는데 이것을 보고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아직은 반응이 하나도 없다. 어째서 좀 시끄러워야 되는데 아무 반응이 없는지 모르겠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뛰어내렸다면 모든 사람이 다 그를 믿고 천황으로 추대했을 것이다. 당장에 하나님 나라가 나타난 것 같았을 것이다. 이적으로 한 나라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지금도 하나님 나라는 이적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십자가에 뛰어내렸다면 대축제가 벌어졌을 것이다. 천국축제라고 벌어지지 않았겠나. 거기서 예수를 따라다니던 사람들, 제자들은 기고만장했을 것이고 제사장들, 서기관들, 예수 죽이려고 하던 사람들은 코가 납작해졌을 것이고 그 앞에 당장 엎드려서 죄를 사죄하고 용서를 빌 것이고 우리가 보지 않아도 무슨 광경이 벌어졌을지 뻔하다. 정말 천지개벽 같은 사건이 발생했을 것이다. 그런데 못 뛰어내렸다. 못 뛰어 내렸다. 못 뛰어 내렸다. 못을 박아 놓았는데 뛰어내리면 사람이냐? 사람이 아니다. 못 박아 놓았는데 훌렁 날아가 버렸다. 그러면 사람이 아니다. 그것은 신이든지 그런 종류이지 사람은 아니다.
그러니까 구속은 사람의 인격을 되찾는 것인데, 신이 어떻게 인격을 찾겠는가. 신은 신격이고 사람은 인격이고 그렇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신격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고 인격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인격을 찾으려면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사람이 아니고는 인격을 찾을 수 없다. 그러니까 뛰어내리지 못한 것은 너무 당연한 것이다. 너무 당연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 안에 포함되는 것이다. 뛰어내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인류 구원을 위해서 안 뛰어내렸다면 우리는 거기 포함될 수가 없다. 예수님은 뭐가 됐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아무것도 안 되는 것이다. 그냥 구경만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혔더니 뛰어내리더라. 야~ 놀라운 일이다. 이것밖에 안 된다. 정도는 좀 다르겠지만 금강산 보고 와서 놀란 것이나 그 사람을 보고 놀란 것이나 매 한가지다.
그러니까 뛰어내릴 수 있었음에도 안 뛰어내렸다면 그것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구속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일이다. 그러나 뛰어내리지 못한 것은 절대적으로 구속과 관계된다. 그분 자신이 구속이 되어야 우리도 구속이 된다. 그분 자신도 그 안에 있어야 나도 그 안에 있다.
그 나라가 이적으로 이루어진다면 하나님은 살마이 구속되기를 기다리지 않고 직접 그 나라를 만들었을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구속된 참 사람의 인격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인격은 그 나라의 성립요소이고 설립기술이며 동력이다. 그러므로 구속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구속 없이 세워졌던 하나님 나라들은 예외없이 역사의 웃음거리로 사라졌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 나라가 인격을 찾는 것이 이적으로 이루어진다면 이적으로 이루어질 일이라면 지금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 하나님이 이적을 행하실수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찾아올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왜 못 찾아오는 것인가? 인격은 이적으로 찾아올 문제가 아니다. 홍해바다는 이적으로 가르지만 만나와 메추라기는 이적으로 주시지만 인격을 되찾아오는 것은 이적으로는 되찾아올 수 없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속아서 인격은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그러면 사라져 버리면 어디서 찾겠는가.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는 이적으로 올 것이라는 생각은 허황된 생각이다. 인격이 있어야 하나님 나라가 되는데 인격은 이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구속 없이 하나님 나라는 없다. 이적으로 인격을 찾는 것이 이루어진다면 하나님 나라는 이적으로 와야 한다.
사람들은 어느 날 갑자기 이적이 일어나서 이 땅에 천지개벽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 때문에 이천년 동안 기독교사에서는 많은 해프닝이 일어났다. 몇 년도에 온다고 하면서 흰옷을 입고 올라갔다가 도로 내려온 사람들, 우리나라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지만 세계에서는 여러 군데에서 그런 일이 생겼다. 생겼다가 다 해프닝이 되고 말았다.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가 이적으로 되어 진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을 읽은 사람들이 그것을 전부 이적이라고 생각을 하니까 하나님 나라도 이적으로 임한다고 생각을 하고 있다. 어느 날 갑자기 수직적으로 하늘로부터 내려온다고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것이 얼마나 허황한가.
만일에 하나님 나라를 그렇게 할 수 있다면 하나님이 그렇게 하면 되지 뭐하려고 이렇게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겠는가. 속 썩이는 인간들을 뭐 하러 땅위에 놔두고 있겠는가. 한순간에 만들어 버릴 것인데 그렇지 않은가.
하나님 나라는 구속된 참 사람의 인격으로만 이루어지기 때문에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구속된 사람은 참 사람이다.그 인격은 그 나라를 설립하는 그 나라의 요소이다. 성립요소이다. 배추김치는 배추가 성립요소이듯이 하나님 나라는 인격이 성립요소이다. 그리고 기술이기도 하다. 그 인격이 없이는 하나님 나라가 되지도 않고 또 만들 수도 없다. 그러니까 이 인격은 하나님도 기다려야 되는 일이다. 왜? 그것을 찾아올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사람이 애굽에 있을 때 모세라는 사람이 없어도 될 것 같으면 무엇 때문에 사백년을 있겠는가. 모세가 아니면 안 되기 때문에 사백년을 기다린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류의 구속이 왜 늦어졌겠는가. 그것은 예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석가모니로도 구속이 안 돼. 공자님으로도 구속이 안 돼. 적어도 예수님보다 오백년 전에 오신 분들이다. 그런데 안 돼, 그러니까 하나님도 예수가 올 때까지 기다렸던 것이다.
인격은 그 나라의 요소이다. 구속이 없으면 나라가 없다. 구속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이것도 법적으로 구속을 받는 줄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예수를 믿으니까 하나님이 나를 구속해준다. 이것은 상업적이고 법적인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생명하고 관계가 없다. 이러니까 하나님 나라가 안 되는 이유인 것이다. 구속 없이 세워졌던 하나님 나라들 하나님 나라라고 했던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그런데 다 해프닝이었고 웃음거리가 되었다.
또한 인간을 개선시키겠다고 제시된 방법들은 많았다. 그러나 하나같이 행위를 개선시킨다는 것이다. 물론 모든 헛된 것을 버리고 순수하게 되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헛되다는 것들은 어디서 온 것들인가? 위치가 이탈 된 데서 온 것이다. 그런즉 위치를 바루지 않고 무엇을 비우며 무을 고칠 수 있을 것인가? 이런 일은 끝이 없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통하여 바른 위치에 섰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보좌 우편으로 올리셨다.
또 인간을 개선시키겠다고 나온 사람들은 많았다. 고치겠다고 나온 사람들도 많았다. 그리고 다 순수하게 돼야 된다고 했다. 공자님도 순수한 인간을 석가모니도 순수한 인간을 다 그렇게 지향하고 있다. 그런데 위치가 이탈 된 사람을 어떻게 순수하게 하겠는가. 위치가 이탈 됐는데 어떻게 순수하게 하겠는가? 위치가 발라져야 순수하던지 말든지 할 수 있다. 그래서 순수하다고 하는 기준 자체가 위치가 없으니까 애매한 것이다.
개는 개 대로 순수하고 소는 소대로 순수하다. 그런데 개똥하고 소똥은 냄새 자체가 다르다. 그렇지 않는가 그렇다고 해서 순수하지 않는가? 개똥보다 소똥이 구리다고 해서 소는 순수하지 않고 개는 순수한가? 그렇지 않다. 개는 개 대로 순수하고 소는 소대로 순수하다. 그래서 사람이라는 위치가 있어야지 구리던지 안 구리던지 순수한 것이 있지 사람이라는 위치가 없는데 무엇을 가지고 순수하다고 할 수 있으며, 무엇을 또 비어 있다고 하겠는가. 그 위치 자체가 없는데! 사람인지 아닌지 이것이 없는데.......그러므로 위치를 바르지 않고는 무엇을 비우고 무엇을 깨끗하게 하고 무엇을 개선시키겠냐는 것이다.
영어를 못하면 영어를 가르치면 되고, 수학을 못하면 수학을 가르치면 된다. 하지만 무엇을 모르는지 모르는데 무엇을 가르치겠는가. 무엇이 필요한지도 모르고 무엇을 모르는지도 모르는데 무엇을 가르치겠는가. 선생은 무엇이 필요한지 모르고 있고, 학생도 무엇이 필요한지 모르고 있는데 그러면 무엇을 가르치겠는가. 각자 자기 생각에 좋을 대로 할 것이다. 창세기 6장에 있는 말씀이 너무 재미있는 말씀이다. 각자 자기 생각에 옳을 대로 하였더라 고 한다. 끝이 없는 것이다. 이것을 해봐도 끝이 안 나고 저것을 해 봐도 끝이 안 난다.
예수님이 하신 것은 아무 일도 한 것이 없다. 결국 십자가를 졌다. 3년 반이라는 시간 동안 뭔가를 하긴 했는데 마지막에 결국 십자가로 갔다. 그런데 거기가 인생의 바른 위치였다. ‘사람의 바른 위치가 아~ 저것이구나!’그것 밖에 없다. 아무것도 없다. 가르침이 굉장히 중요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별로 없다. 아무것도 없다. 그 정도는 딴 데도 다 있다. 그러니까 그분에게 중요한 것은 십자가에 못 박혀있는 그 위치다.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위치
그러므로 이위치를 우리에게 보여준 것이 예수님이 자기 생명을 준 것이다. 다른 말씀을 할 때는 자기 생명은 준 일이 없다. 그냥 말로만 했다. ‘그것은 나도 하겠다.’ 이럴 수 있는 것이다. ‘사탄도 할 수 있겠다.’ 그런 말은 나도 하겠다. 이런 것이다. 그런데 사탄이 못 한 것이 이것이다. 이 위치에 서지 못하는 것이다. 자기 위치에 서지 못한 것이다.
인생은 다시 시작해야 한다.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신 대로 다시 나야 한다. 뱀(사탄)에게 물려 죽었기 때문이다. 광야를 지나던 이스라엘은 장대에 달린 놋 뱀을 보고 독사의 독이 사라져서 다시 살아났다. 이와 같이 사단의 독으로 죽은 인생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보면 살아난다. 마귀의 독(하나님 같이 된다는 속임수)은 멸해지고 영생(새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이다(요3:14~15참).
그래서 인생은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백지가 어디냐? 여기가 백지고 또 기초가 어디야? 어기가 기초다. 여기서 다시 시작해야 된다. 이것을 거듭난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다시 시작한 것을 보고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이 그랬다.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이 말은 다시 나지 않으면 그런 말이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왜 그런가? 사단에게 죽었기 때문에 사단이 먹으라고 한 것을 먹어서 죽었기 때문에 “네가 이것을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했다. 정녕 죽으리라 했는데 안 죽은 줄 생각하지 말라. 정녕 죽으리라할 때 죽은 것이다. 하나님과 관계에서 끊어져 버린 것이다. 하나님하고의 생명이 끊어진 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죽은 것이다. 하나님에 대해서 죽은 것이다. 다른 것은 다 아는데 하나님에 대해서 모르지 않는가. 모든 것을 다 안다. 얼마나 머리가 좋으면 무슨 별을 몇 년을 날아가서 오차가 1M 밖에 안 된다고 한다. 이것은 상상도 못 할 일이다. 사람의 머리가 정말 대단하다. 그런데 한 가지 모르는 것이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모른다. 그 생명을 모른다.
이것이 뱀에게 물려 죽었다는 이런 뜻이다. 광야를 지나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어느 골짜기를 가다가 독사가 있는 골짜기를 만났다. 독사를 만나서 다 죽게 됐다. 그럴 때 모세가 구리로 뱀을 만들어가지고 장대에 매달아 놨다고 한다. 그리고 이것을 처다 봐라 그러면 산다. 그랬다. 그 장대에 매달린 구리 뱀을 보고 살아났다는 것이다. 참 신기한 일이다. 그런데 도대체 이것이 무슨 일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도대체 어떻게 독사에 물린 사람들이 구리 뱀을 보고 살아나느냐는 것이다.
와~ 지난밤에 전에 바깥에서 무엇을 하다가 뭐에 물렸는지 모르겠다. 여기 한군데 물렸는데 아직도 흉터가 있다. 따끔하더니 얼마나 아픈지 동동 구를 만큼 아팠다. 어떻게 아프던지 조치를 하기는 했는데도 계속 아팠다. 그 다음날 팅팅 부어서 애 먹었다. 그 무엇인지도 모르는 놈이 한방 쏘았는데 그렇게 아픈데 독사에 물리면 얼마나 아프겠나. 아픈 게 문제가 아니라 독이 퍼져서 죽는다. 뱀에게 물려 죽었다는 것이다.
사탄을 보고 뱀이라고 했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이상한 것이 많다. 창세기 3장에서 뱀이라고 했는데 광야를 지나 또 뱀에게 물려 죽게 되었다. 그래서 구리 뱀을 만들어 놓았더니 그것을 보고 살아났다는 것이다. 구리 뱀을 보고 어떻게 살아났는지 모르겠는데 창세기 3장에서 사단을 뱀이라고 묘사한 것은 이상한 인연이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잘 모르지만 요한계시록 가면 또 뱀이 또 나온다. 옛 뱀이라고도 하고 붉은 뱀이라고도 하는 뱀인데 붉은 뱀이라는 말은 독이 오를 때로 올랐다는 말이다.
뱀에게 물려 죽었는데 장대에 매달린 것을 보고 살아났다는 것을 예수님은 자기 안에서 인용을 했다. 요한복음 3장15절에서 인용을 했다.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거듭난다는 말을 하면서 그 말을 했다.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 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했다. 예수님이 이것을 딱 인용하니까 뱀이 사탄이라는 것이 들어난다. 이 사건 자체는 우리가 알 수가 없다. 무슨 사건인지 모르겠는데 예수님께서 자기로 딱 해석을 하셨다. 그런데 그것을 쳐다보니까 독사의 독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자, 우리가 예수를 자세히 보면 사탄에게 물린 독이 우리한테서 빠져나간다. 십자가를 자세히 보면 무슨 독이 빠져나간다. 하나님 같이 된다는 속임의 독이 빠져 나간다. 우리도 하나님 같이 된다는 것을 몰랐다. 성경에 그런 말이 있는데 ‘내가 언제 하나님 같이 될려고 했는고! 아담이나 그랬지 내가 언제 그랬노.’ 이렇게 생각이 된다. 그런데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보면 하나님 같이 된다는 것이 속임수라는 것이 드러난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뛰어 내려 봐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다.” 그런다. 이 말이 왜 나왔겠나? “하나님 같이 된다.”는 이것이 있었기 때문에 나온 말이다.
그러니까 그 말 하는 것을 딱 들어보면 ‘아, 우리가 하나님 같이 되려고 했구나!’하는 그것이 드러난 것이다. 그리고 생각해 보면 집에 들어가서 내가 하나님 같이 되려고 했는 것이 없었는지, 뭐 안방에 들어가서 없었는지, 부엌에 들어가서 없었는지 자세히 살펴보기 바란다. 도처에서 모든 곳에서 자기가 다 하나님 같이 되려고 한다. 하지 못해서 그렇지, 할 수만 있다면 자기가 하나님 같이 되려고 한다. 뱀에게 물려 죽은 것이다. 인격은 없고 죽은 것이다. 그런데 광야를 지나면서 이것을 딱 그림으로 보여줬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그 말씀을 하셨다.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왜 이야기 하느냐 하면, 영생을 얻게 하려고, 독이 빠져 나가고 -독은 죽음이었다. 네가 이것을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했다.- 그 죽음이 빠져 나가고 생명이 들어오게 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전하는 것이다. 십자가는 끝내는 것이고 다시 시작하는 곳이다. 우리가 십자가를 자세히 보면 우리 안에서 무엇인가가 사라진다.
우리 찬송가에 그런 찬송이 있다. 내가 십자가를 볼 때 나의 맘에 큰 고통 사라져 이런 노래 있었다. 큰 고통 사라진 정도가 아니고 우리 인생에 근본적인 문제가 사라졌다. 여러분 혹시 문제 해결 안 되어서 답답하면 호박만한 이것 생각하지 말고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바라보라. 그러면 솔~솔~ 빠져 나간다. 그냥 솔솔 빠져 나간다. 그러니까 요 조그만 머리로 생각하지 말고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바라보라. 골짜기에서 장대에 달린 구리 뱀을 바라보고 살아난 것처럼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보면 우리가 산다는 말이다. 죽음은 없어지고 생명이 온다. 불평은 없어지고 감사가 온다. 신기하다. 불평하던 것이 싹 사라지고 속에서 뭐가 나오나 하면 감사한 것이 싸악 살아올라 온다. 신기하지 않은가.
오늘을 맑다고 해서 오늘 저녁은 달이 밝을 것이니까 달밤에 나가서 한 번 생각해보라. 복잡하거든 한 번 생각해보라. 그러면 단순해진다. 고통스럽거든 생각해보라. 단순해진다. 뭐가 안 되거든 생각해보라. 안 되는 것이 하나도 없다. 다 된 것뿐이다. 인생이 언제 됐는가? 아무것도 없었던 것인데 되고 안 되고 할 것이 없다. 다 된 것뿐이다. 생각할수록 신기한 세계다. 우리에게 왜 시간을 주는가? 이런 것을 생각하라고 시간을 준 것이다. 불평불만하라고 시간을 준 것이 아니라 이런 것을 생각하라고 시간을 준 것이다. 시간을 해 주었는가? 시간 많은 사람들은 뭣 하러 시간이 많은가? 이런 것을 생각하라고 시간을 많이 준 것이다. 젊은 학생들에게 물어보면 다 바쁘다고 한다. 말 한마디 듣고 가라고 해도 바빠서 못 듣겠다고 한다. 뭘 하느라고 바쁜 것인지 이렇게 좋은 것이 있는데도 그것을 모르고 바쁘다고 한다.
사단의 독으로 죽은 인생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보면 살아난다. 여러 가지 드러난 행실들의 문제는 무엇인가? 송장에게서 냄새나는 것과 같은 그런 문제들이다. 이것이 빠져나가지 않기 때문이다. 사단의 독으로 죽은 인생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보고 살아난다. 보고 있으면 절로 바꾸어진다.
이제 예수 안에서 인격은 확보가 되었다. 사람은 저것이 사람이구나. 참사람이 확보되었다. 늘 구속을 얘기해도 그것이 심각하게 들어오지 않는 이유는 내가 생각해보니까 참 사람이 보이지 않아서인 것 같다. 얼른 보기에 십자가에 못 박혀 있는 그 사람만 보이고 진짜 사람이 보이지 않아서인 것 같다. 표면적으로는 못 박혀있는 사람이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비참한 사람이다. 그런데 그 이면에 있는 사람을 보면 참사람이다. 그 사람을 얘기한 것이다. 그 뒤에는 참사람이 있고, 그 참사람은 아름다운 사람이다. 그 사람에게로 내가 돌아간다고 생각하면 쉽게 돌아가지 않겠는가! 그 피가 철철 흐르는 사람에게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니까 끔찍해서 보지 않으려고 하고 고개 돌리고 생각하는 것이다. 피가 철철 흐르는 데로 가라는 말이 아니고 그 뒤에 있는 참사람이 있다. 우리가 잃어버린 참사람이 있다. 우리가 그 사람에게로 돌아가야 된다. 우리는 가면 피 흘리는 데가 없다. 예수께서 피 흘린 것으로 다 끝나고 우리는 가서 피 묻을 필요가 없다. 다 완전하게 해놓았다. 신부를 맞이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다 준비해놓았다. 방도 다 준비해놓고 도배도 다 해놓고 장판도 깔아놓고 불도 다 넣어놓았다. 나는 몸만 가지고 들어가면 된다. 그것이 복음이다. 복음이 다른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시는데 가시덤불을 가지고 오라고 하겠는가? 남의 땅이라도 가지고 오라고 하겠는가? 뭘 가지고 오라고 하시겠는가? 사탄의 독에 쌓인 사람은 예수를 보면 살아난다. 우리 인간에게 있는 모든 문제들은 사탄의 독이다. 근원에 뿌려놓고 간 독이다.
그리스도만이 능력이고 지혜다. 사람을 원위치로 회복해서 영생을 얻게 하는 사람을 참 행복에 이끄는 능력이고 지혜다. 지혜가 있으면 뭘 하는가? 참 행복하게 살지 못하는데... 능력이 있으면 뭘 하는가? 행복하지 못하게 하는데... 어떤 사람은 자기와 관계없는 것만 찾고 있는 사람도 있다. 다시 말하면 자기 행복과는 관계없는 것만 찾고 있는 사람이 있다. 지식욕에 빠져서 아는 것이 재미있는 사람도 있다. 참 답답한 사람들이다. 시간이 너무 많은 사람들이다.
예수를 보면 살아난다. 예수를 보면 살아난다. 독으로 죽은 사람은 독으로 풀어야 된다. 독으로 푸는 사람은 독 없는 뱀을 보고 살아났다. 광야에서 뱀에 물렸는데 장대에 매달린 놋뱀은 독이 없다. 독 없는 뱀으로 교체된 것이다. 사람을 문 뱀은 독이 있는 뱀이었다. 장대에 매달린 뱀은 독이 없는 뱀이다. 독이 없는 뱀을 통해서 독이 없어진 것이다. 이런 비유 같은 얘기다.
4. 인격 안에서 하나 되게 함
예수와 우리는 선악과 때문에 만들어진 종교와 율법과 상식에 의해 하나될 수가 없다. 그러므로 그가 얻으신 것이 무엇이든지 우리의 것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당연히 높이 오르셨고 구속을 이루셨지만 그와 우리는 하나가 아니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보고 단지 찬양하고 영광만을 그에게 돌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얻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다음은 우리가 이 인격 안에서 하나가 된다.
두 가지 방면으로, 하나님과 내가 하나되고 물론 예수와 내가 하나되지만 예수와 내가 하나되므로 하나님과 내가 하나된다. 또 사람과 사람이 하나되고 이웃과 내가 하나된다.
예수와 우리는 선악과 때문에 만들어진 종교와 율법과 상식에 의해 하나될 수가 없는 사람들이다. 그런 것이 다 가리고 있다. 성막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첩첩이 가려져있다. 바깥 대문이 있고 휘장이 있고 또 안에 휘장이 있고 겹겹이 들어가도록 되어있다. 그 말을 이런 것들이 장애물들로 가려져있다는 뜻이다. 종교 때문에 가려지고, 지식 때문에 가려지고, 율법 때문에 가려진다. 율법 안에서 내가 예수를 만날 수가 없다. 종교 안에서 내가 예수를 만날 수가 없다. 그분만큼 내가 종교적일 수 없고, 그분만큼 내가 율법적일 수 없다. 그러니까 그분과 내가 만날 수가 없다. 상식적으로도 오병이어를 가지고 5천명을 먹이는 사람과 어떻게 만나지겠는가? 하나가 되겠는가? 불가능하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모르고 그런 것을 가지고 하나되려고 했다. 그 안에서 기도를 해서 하나가 된다든가 율법을 지켜서 하나가 된다고 생각했다. 이런 식으로 생각했으니까 저주받은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해도 해도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종교생활을 많이 해보신 분들은 경험이 있어서 다 아실 것이다. 마지막 타령은 그것밖에 없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늪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겠는가? 이것밖에 나오지 않는다. 하면 할수록 이것밖에 나오지 않는다.
이런 것으로는 우리가 하나될 수가 없다. 그분이 아무리 구속을 이루고 하나님 보좌우편에 가셨다고 해도 나와는 관계가 없는 일이다. 단지 그분을 존경하고 숭배하고 찬양하는 일밖에 안 된다. 그러면 그분이 하신 일이 나에게 아무 효과가 없으니까 종교가 되는 것이다.
그는 당연히 높이 오르셨고 구속을 이루셨지만 그와 우리는 하나가 아니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보고 단지 찬양하고 영광만을 그에게 돌리고,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기적적으로 이 땅에 그분이 다시 오셔서 우리 모든 삶을 다 회복시켜 줄 것이라고 믿는 것이 대부분의 신앙이다. 그것 외는 아무것도 떠들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에 그분에 어떤 모습으로 오신다면 우리는 그분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성경에 약속한 모든 것이 이루어질 날이 올 것이라고 생각해왔던 것이다.
그가 성령으로 잉태 되었고, 물 위로 걸으셨으며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고,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고, 죽은 자를 살리실 때 우리는 구경만 한 자들이었고 소문만 들은 자들이었던 것이다. 보면 볼수록 알면 알수록 그는 나와 같지 않았고 높고 멀기만 했던 것이다.
그가 성령으로 잉태 되었고, 물 위로 걸으셨으며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고, 오병이어로 5천 명을 먹이고, 죽은 나사로를 살리실 때 우리는 구경만 한 자들이었다. 우리가 그때 살았다고 생각해보자. 우리는 구경꾼들이다. 나사로를 살릴 때 그 집에 구경 온 사람들이 많았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보면 볼수록 알면 알수록 그는 나와 같지 않은 것만 보았다. 여러분 전에 교회에 다닐 때 예수를 처음부터 믿었는데 나와 같지 않는 것만 알았다. 나와 같은 것은 하나도 없으니까 아예 본 일이 없고 들어보지 않았다. 더군다나 만일 안다면 내 아담과 같은 것을 아는 것이니까 철저히 못하게 금지했다. 그것이 예수를 모욕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내 꼬라지와 예수를 맞추면 되겠는가? 안 된다. 모독하는 것이다. 그래서 종교에서는 철저히 못하게 막았다. 나와 더 멀수록 거룩하고 더 높을수록 더 거룩하고 나와 다를수록 더 거룩한 그분만이 계속 들어왔다.
그러나 십자가는 그와 우리를 한자리에 못 박고 함께 죽게 함으로써 그 안에 내가, 내 안에 그가 있도록 역사한 것이다. 할렐루야! 그가 이루시고 얻으신 모든 것은 그의 것이므로 또한 그 안에 포함된 모든 자들의 것이다. 그와 내가 하나이므로 한 자리에서 함께 누리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십자가는 그와 우리를 한자리에 못 박았다. 함께 죽게 했다. 예수님만 못 박은 것이 아니고 온 인류를 함께 못 박았다. 사람이냐, 천사냐? 사람이냐, 신이냐? 하는 이 세계에서 사람이 못 박힌 것이다. 모든 사람이 못 박힌 것이다. 나는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았지만 모든 사람이 함께 못 박힌 것이다. 왜? 사람을 못 박은 것이니까 모든 사람이 못 박힌 것이다.
그래서 이상하게 그 안에 내가, 내 안에 그가 있도록 역사한 것이다. 내가 그 안에 들어가려고 해서 된 것이 아니고 그분이 내 안에 들어오려고 해서 된 것이 아니라 십자가가 그렇게 만들어버렸다. 한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 인해서 모든 사람이 다 십자가에 못 박히게 만들어버렸다. 누구든지 다 뛰어내리지 못한다. 꼭 못을 박혀보아야 알겠는가? 주먹을 맞아보아야 알겠는가? 못 박혀 보지 않아도 알겠다. 뛰어내리지 못할 것도 못 박혀보지 않아도 알겠다. 다 안다. 왜? 나한테 있는 것이다. 그것이 나니까. 그것이 남이 아니고 나다.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참 신기한 일이다. 예수님이 마지막에 기도할 때 그렇게 기도하셨다. 아버지여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 같이 저들도 다 하나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옵소서라고 했다. 도대체 어느 세월에 이루어질지, 어느 천년에 이루어질지 모르는 일이다.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 같이 저들도 다 하나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옵소서. 저들끼리나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라고 해도 어려운데 저들도 다 하나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옵소서라고 했다. 저들끼리 하나되라고 해도 안 되는데, 하나님과 하나된다는 것이 말이 되는 일인가? 그런데 그렇게 마지막 기도를 하셨다. 그리고 그날에는 너희가 알게 될 것이다. 내가 너희 안에 너희가 내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 것이라고 했다. 오늘 지금 우리가 알게 된다. 이것을 십자가가 했다. 십자가가 저절로 이루어버린 것이다. 참 신기한 일이다.
그가 이루시고 얻으신 모든 것은 누구 것인가? 우리 것이다. 그와 내가 하나라면 그분 것이 내 것이요 내 것이 그분 것이다. 내 것은 내 것이요 네 것은 네 것이 아니고, 내 것은 내 것이요 네 것도 내 것도 아니고, 우리는 하나다. 원래 우리는 하나로 지어졌다. 아담을 지을 때 하나로 지어졌는데 우리가 하나로 지어졌다는 것을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아무리 봐도 다른 사람을 보면 나와 이 사람이 하나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어디가 틀려도 다 틀린다. 절대로 하나라고 할 수가 없다. 아무리 선택이 비슷해도 하나가 아니고, 생긴 것이 비슷하게 생겼어도 하나가 아니다.
우리 뒷집에 6.25전쟁 통에 일란성쌍태아가 태어났는데 어느 놈이 큰놈인지 어느 놈이 작은 놈인지 구별을 못한다. 자기 식구들만 알고 있다. 어느 놈이 먼저 나온 놈인지 귀 뒤에 약간 다른 점이 있다고 한다. 얼마나 똑같이 생겼는지 다른 사람은 모른다. 이놈들이 크면서 얼마나 둘이 싸우는지 박 터져라 싸웠다. 어디가 달라도 다 다르다. 아무리 일란성쌍태아라고 하더라도 그래도 어딘가 다른 데가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라는 것을 의식할 수가 없다. 아무리 하나가 되라고 해도 안 되는 것이다. 다른데 어떻게 하나가 되겠는가? 내 생각과 네 생각이 다르고, 내 계획과 네 계획이 다 다르다. 지식이 많을수록 더 달라진다. 취미가 다르고 생각이 다르고 모든 것이 다 다르다.
그런데 십자가 안에 오면 모든 것이 하나다. 취미가 어떻든지 취향이 어떻든지 계획이 어떻든지 간에 다 하나다. 하나님은 사람을 만들 때 그렇게 만들어놓았다. 똑같이 만들어놓은 것도 아니고, 똑같은 것을 하라고 만들어놓은 것도 아니고, 다 똑같이 좋아하라고 만들어놓은 것도 아니다. 각양각색으로 만들어졌는데 하나다. 다 소나무만 좋아하겠는가? 다 잣나무만 좋아하겠는가? 다 각자 다르다. 천지만물이 다 다르다. 그런데 하나다. 사람도 다 다른데도 하나다. 본질에서 하나다. 겉은 다 달라도 하나다. 우리가 모양이 다르게 생겼어도 전혀 상관이 없고 취미가 달라도 상관이 없고 계획이 달라도 상관이 없다. 다 똑같은 계획을 하자는 말도 아니다. 다 똑같은 취미생활을 하자는 말도 아니다. 마음대로 해도 하나다. 십자가 안에서 우리가 다 하나다. 참 신기하다. 하나가 되려면 뭔가 일치해야 된다. 그런데 저절로 하나다. 십자가 안에 오니까 저절로 하나다. 내가 그 안에 그가 내 안에! 그가 얻으신 것은 우리가 공짜로 얻은 것이다.
그가 십자가에 달렸을 때 함께 못 박혔다면 뛰어내리지 못할 때도 함께 했으므로 그가 보좌에 오르실 때 우리도 함께 오른 것이다(롬6:8참). 우리와 그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하나다. 하나로 알고 살아야 된다.
십자가에 함께 있는 사람은 보좌 우편에도 함께하는 것이 당연하다. 할렐루야! 천하 인간에 이런 복음은 없다.
십자가에 함께 있는 사람은 보좌 우편에도 함께하는 것이 당연하다. 이상한 일이 아니다. 우리는 거기에 올라가보려고 얼마나 힘을 쓰고 애를 썼는가? 올라갈 수 있는 곳인가? 죽었다 깨어나도 못 올라갈 곳이다. 십자가는 놀라운 역사를 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놀라운 역사이다. 원수들이 죽이려고 못 박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역으로 이용해서 우리를 구원하는 도구로 이용했다. 언제든지 그렇게 한다. 사탄은 선수를 친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역이용해서 또 구원의 길을 만들고 또 역이용해서 구원을 길을 만들고, 늘 그렇게 해왔다.
씨름하는 사람이나 유도하는 사람도 그렇다고 한다. 상대방이 들어온 것을 잡아서 넘긴다고 한다. 내가 쫓아가면 안 된다고 한다. 옛날에 이봉걸과 이만기가 천하장사 씨름을 할 때가 있었다. 이봉걸이가 키도 크고 힘이 훨씬 세다. 처음에는 사람을 들어버린다. 들었다가 어떻게 하는가? 들었다가 어떻게 할 수가 없는데 내릴 때 이만기가 딱 잡아챘다. 들었다가 놓을 때 번번이 진다. 자기도 모르게 넘어져버린다. 내가 그것을 보면서 안타까워서 속으로 저것을 저렇게 할 게 아니고 쫓아오면 확 눌러버리면 되는데 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코치가 그렇게 해서 다음에는 이길 수가 있었다. 자기가 먼저 설치면 안 된다. 가만히 있다가 대들면 아무래도 몸이 크니까 밑에 있을 것이다. 대들면 그때 확 눌러버리면 된다. 원체 크고 힘이 세니까 일어나지 못한다. 그 다음부터는 천하장사에서 우승을 했다.
하나님은 먼저 가서 선제공격을 하지 않고 오면 그놈을 이용해서 꽉 눌러버리면 지는 것이다. 사탄은 예수를 죽이면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를 구원하는 길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다. 하나님의 지혜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지혜다.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이다. 부르심을 입은 자에게는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이니라. 하나님에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있고 하나님에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신나는 일이다. 매일 역전승을 보고 있다. 9회말 역전승, 9회말 홈런을 보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지루하게 볼 필요 없고 계속 홈런 들어가는 것만 보여주면 된다. 10초만 보면 쉽게 들어간다. 골인하는 재미있는 것만 보여줄 때가 있다. 들어갈 때보면 신기하게 들어간다. 그것을 보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면 너무너무 재미있고 너무너무 신기하다. 분열은 어디서 왔는가? 선악과 때문에 왔다. 그 결과로 바벨탑이 생겼다. 분열이 생겼다. 새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하나로 가는 길이다. 분열이 왜 왔는가? 인격이 없고 선악과만 있으니까 분열이 왔다. 인격은 같은데 다른 것이 다 다르다. 그래서 우리는 다 다른 줄 알았다. 인격은 다 하나다. 똑같은 것이다. 인격 안에 들어오니까 우리는 새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하나로 간다. 하나가 되는 길로 가는 것이다. 남편과 아내의 길로, 하나님과 어린양의 길로, 왕과 백성의 길로 간다. 요한계시록 마지막에 가면 남편과 아내, 하나님과 어린양, 그리고 왕과 백성, 이것이 종착역이다.
선악과가 빠져나가면 우리는 하나로 된다. 왜? 인격이 생기니까. 인격은 하나다. 두 개의 인격을 만들어놓지 않았다. 두 가지 인격은 없다. 흑인이나 백인이나 인격은 하나다. 이 인격 안에서 우리는 하나니까 이 십자가로 말미암아 되찾은 인격은 우리가 하나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다른 방법으로 하나되려고 아무리 해도 안 된다. 친해보고 아무리 해도 안 된다. 그리고 섭섭해 하는 병 많다. 아스피린 먹고 낫고 나면 재발하고 재발한다. 섭섭한 사람은 늘 섭섭하다. 이 사람이 섭섭하게 하고 나면 저 사람이 섭섭하게 하고, 저 사람이 섭섭하게 하면 이 사람이 섭섭하게 한다. 늘 남에게 괴로움을 당하는 사람은 항상 괴롭다. 이 사람이 괴롭게 하면 또 다른 사람이 괴롭게 하고 이 사람이 안 하면 저 사람이 하고 교대해서 한다. 세상이 나를 괴롭게 하려고 태어난 것처럼 생각된다. 그런데 세상이 나를 괴롭게 하려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다 나를 도우려고 있다. 우리가 인격 안에서는 다 나를 도우려고 있다. 친구를 사귀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저절로 사귀어진다. 내가 하나인데 자기가 하나가 안 되겠는가? 내가 하나로 만나는데 자기도 하나로 만나질 것 아니겠는가.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주 예수님이 와야 된다. 우리 안에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고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그러면 모둔 문제가 다 해결된다.
우리 다 함께 하자.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 기 도 ]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당신이 행하신 일은 우리가 놀라지 않을 수 없고, 우리가 신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생각을 멈추고 주님 하신 일을 보기만을 원하고, 당신이 행하신 일만을 깊이깊이 알게 되기를 원합니다.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주여,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알게 하여 주옵시고, 어서 속히 오셔서 우리 안에 거하기를 원하고 어서 속히 오셔서 이 백성을 구원하시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이것이 우리의 영원한 소원입니다.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우리 모든 형제들이 다 주 예수 오시기를 대망하도록 주께서 역사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