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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구병의 존재론 강의: 있음과 없음 (2003)
- 윤구병, 보리, 2003. 02 30, P.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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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에 <시대와 철학>에 연재하기 시작하여 1997년에 중단한 ‘존재론 강의’의 한 부분이다. - 2003년 2월 변산 농부 윤구병 (7)
[헌정사] (5)
살아 계실 때 “왜 자네 학위 논문 안*쓰나?”
하고 꾸짖듯이 여러 차례 물으시던
박홍규 선생님 영전에 이 책을 바칩니다.
“못쓰나?”하고 물으셨다면 “실력이 없어서요”
하고 대거리를 할 수 있었을 텐데…… 쩝쩝(못난 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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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구병의 존재론 강의: 있음과 없음 (2003)
목차
책 머리에 7
첫 번째 강의 11
왜 고상한 '존재'와 '무'가 아니고 흔해 빠진 '있다', '없다'인가?
두 번째 강의 51
있을 것은 없고 없을 것만 있는 개 같은 세상
세 번째 강의 75
사람이 '동물'이 되는 자리와 '짐승'이 되는 자리
네 번째 강의 97 [시간론 정체성의 문제]
같으면서도 다르고 다르면서도 같다?
다섯 번째 강의 127 [관심에 의해]
있는 것만 있는 게 아니고 없는 것도 있다.
여섯 번째 강의 153
있는 것이 아니면 없는 것이라고? 천만에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도 있어.
일곱 번째 강의 177
'있는 것'보다 '있을 것'이, '없는 것'보다 '없을 것'이 더 앞선다. 따라서 '당파성'이 '객관성'에 앞선다.
대담: 상생과 공존의 공동체 꿈꾸는 윤구병 선생/김남두 201
추천하는 글: 여럿의 저됨과 더불어 하나됨/이정호 231
윤구병이 걸어온 길 235-244.
*** 내용 중에서 -
첫째 강의: 왜 고상한 '존재'와 '무'가 아니고 흔해빠진 '있다', '없다'인가? 11 [존재론(파르메니데스),]
뒤이어 저는 파르메니데스라는 괴짜가 ‘시간도 없고 공간도 없다’는 말까지 했는 것도 학생들에게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20) - [공간이 없다는 점에서 제논의 2분법의 불가분이, 시간(운동)이 없다는 점에서 제논의 아킬레스와 거북이 경주의 논법이 등장할 것이다.]
“.... 시간과 공간에 얽매여 있는 이 세상은 말짱 덧없는 그림자 같은 것입니다.” / “되게 허무하네요” / “어떻게 생각하면 그렇지요. 중세 기독교 신학에 젖어든 많을 기독교도들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을 ‘헛되고 또 헛되도다’ 하고 중얼거리는 것도 파르메니데스의 탓이 아니라고는 할 수 없어요. 그러나 여러분, 그렇다고 해서 파르메니데스나 제농을 허무주의자나 허무 사상을 퍼뜨리고 다닌 사람들이라고만 생각해서는 안돼요. 여담이지만 제논에 대해서는 이런 말도 있습니다. 제논이 살던 엘레아에 네아르코스라는 독재자가 있었는데, 제논은 네아르코스의 독재정부를 무너뜨리기 위해서 지하 활동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쩌다 들통이 나서 제논은 동료들과 같이 붙들리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네아르코스의 혹독한 고문에 못이겨 다른 동료들이 전부 자백했는데도 제논은 끝까지 동료들을 팔지 않고 버텄대요. 그리고 제논을 죽이기 전에 네아르코스가 직접 고문을 하면서 이제 그만 털어놓으라고 하자 네아르코스에게 ‘아직도 나는 내 혀의 주인이다’라고 마지막 한 마디를 남기고는 자기 이빨로 제 혀를 끊어서 네아르코스의 얼굴에 내뱉었다고 합니다.” (25) - [네아르코스(Néarque, Nearchus, Νέαρχος, 전5세기), 고대 엘레아 도시의 참주.]
문제는 두 개의 공이 서로 맞닿아 있다는데 있습니다. ‘서로 맞닿아 있다’는 말을 수학에서는 탄젠트(tangent), 곧 접선(接線)이라는 낱말을 써서 나타냅니다. 이 탄젠트라는 말은 라틴어 탄게레(tangere)에서 유래한 말인데 ‘닿는다’. ‘만진다’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영어의 콘택트(contact)도 어원이 같습니다. 함께{con} + 닿아 있는 것{tactus}이 콘택트이지요. 같은 어원에서 나온 말로는 영어에 컨틴젠시(contingency)라는 낱말이 있습니다. 프랑스어로는 꽁뗑장스(contingence)이지요. 그런데 이 낱말의 뜻을 살펴보면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연’, ‘우연성’, ‘우발성’이 이 낱말의 뜻입니다. 그러면 맞닿아 있다는 말이 어떻게 해서 우연을 가리키는 말로 탈바꿈했을까요? 우리는 존재론의 영역에서 맨처럼 나타나는 두 괴물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이며, 이 둘이 몸을 맞대서 모순을 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31)
- 참조1, [[그러면 어떤 문제가 생기느냐? 이 사물이 모든 측면에 있어서 딱 구별되어야 해. .. 그 말은 외부 생성 속에 들어가지 않고 자기동일성을 유지할 수 있는 조건을 말하는 거야. 그리고 바로 그곳[idea]에서만, 본래 명사로서 성립할 수 있는 자기 동일적(identical)인 형상이 드러날 수 있고, 나머지는 그러한 개체에 달라붙어(symbebêkos) 있어. 달라붙어 있는 것[색깔]은 변할 수 있어. ... 그걸[색깔] <symbebêkota(우연적 속성)>이라고 해. <symbebêkota>란 무엇이냐? 복잡해. <같이 발을 묶고 함께 걸어간다>는 뜻이야. (49)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시아”, 박홍규(1919-1994), in 형이상학 강의 2: 박홍규전집 3, 민음사, 2004, p 49. (P. 467): 1988년 6월 19일 강의. - [함께 가는 그 함께가 무엇이냐가 문제거리이다. (박:)형상일까? (마:)흐름으로서 영혼일까? - 형상이 관여 또는 분유한다는 쪽은 플라톤, 형상이 처음부터 함께 한다는 쪽은 아리스토텔레스, 흐름의 자기 방식의 축적과 압축으로 자기 생성이라는 쪽은 벩송이 될 것이다. 자기 생성은 토지 위에서이다. 토지의 주장이 유물론이다. (53LMF)]]
- 참조2: [우연성에서 둘이 맞대는 것은 공산에서 형상(대상)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이런 경우가 존재론 또는 우주론의 문제이다. 여기에는 비례중항을 찾는다고 한다. 그런데 우연의 다른 경우가 아자르(hasard)가 있으며, 이런 아자르는 생성에서 주사위(4, 6, 8, 12, 20)의 국면은 둘 사이가 아니라 경우의 수들 중의 하나이다. 아자르론에서 발생론 또는 우주발생론이다. 이 여러 발생을 어떻게 중앙을 잡을 것인가? 비례중항의 문제가 발생한다고 한다. (59TKF).]
“처음 이야기로 되돌아가서 맞닿아 있는 당구공 두 개를 다시 살펴봅시다. 있는 것이라는 당구공과 없는 것이라는 빨간 당구공이 맞닿아있는 점을 우리는 점점이라고 부릅니다. ... 다시 말해서 무규정적인 것{aperon}은 있는 것과 없는 것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고, 그런 점에서 운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그림을 다시 하나 그려보겠습니다.” 그림 7 - [있는것과 없는 것 사이에 무규정적인 분할[분수]들을 설명하였다.] (32)
[무규정적인 것은 있음과 없음 사이로 구별하는 것은 나누셈이 아니라 분수이다. 이런 논의는 무규정(indéterminé)이라기도 하지만 무한계(illimite)이도 하다. 플라톤의 아페이론은 없는 것에 속하는 것이라기 보다 있기는 한데 규정할 수도 없도 특히 한계를 설정할 수 없는 것이다. 이에 비해 그림은 한계 설정안에 있기에 논리적 무규정성이지, 자연의 무한계가 아니다. 이런 구별은 미적분 시대(18세기)를 지나면 분명해진다. (59TKF)]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와 형상 이론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낱말[용어]이 있다면, 그것은 가능태(可能態)와 현실태(現實態)라는 끔찍한 낱말로 번역된 ‘뒤나미스(dynamis)’와 ‘에네르게이아(energeia)’입니다. .. ‘질료(質料)’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휠레(hyle)’인데 이것은 본디 집 짓는데도 쓰이고 배를 만드는 데도 쓰이는 나무, 곧 여러 용도로 쓰이는 목재라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형상(形象)’이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에이도스(eidos)’인데 이 말은 ‘눈으로 본다’는 그리스 동사 ‘에이도(eidō)’에서 나온 것으로 ‘본 것’, ‘모습’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능태’라고 서툴기 짝이 없게 번역된 ‘뒤나미스’는 그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 또는 무엇이 될 수 있는 ‘힘’이라고 보면 됩니다. 다만 그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이 될 수 있는지를 드러나지 않았다는 점에서 크게 보아 무규정적인 것{apeiron}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현실태’라고 번역된 말(이런 말을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쓰나요?), ‘에네르게이아’는 그리스 동사 ‘에네르게오(energeō)’에서 나온 말로 무엇을 ‘한다’는 동사의 뜻을 그대로 이어받아 무엇을 ‘함’, 또는 ‘작용’이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저라면 조금 무리해서라도 아리스토텔레스의 ‘뒤나미스’를 ‘됨’으로, 또 ‘에네르게이아’를 ‘함’으로 번역하고 싶습니다만 주제넘은 것 같아서 이 이야기를 길게 하지 않겠습니다. ... ” (34) - [이 생각이 변형되어, 윤구병, 철학을 다시 쓴다: 있음과 없음에서 함과 됨까지(보리, 2013년 02월)에서 전개될 것이다.]
아무튼 저는 학생들에게 플라톤 철학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어떻게 다른지를 설명하고, 퓌타고라스학파의 입에서 나온 ‘끝(한계: peras)’과 ‘끝이 없는 것(무규정적인 것: apeiron)’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자기 철학 안에 노동(작업, 함: energeia)을 받아들여 이것, 저것을 어떻게 쪼개고(분석하고), 울타리를 두르고(범주화하고), 빚어냈는지, 그리고 이 사부님들의 노력이 베르그송이라는 프랑스 형이상학자(?)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제가 알고 있다고 믿는 대로 이야기하고자 했습니다. .. 박홍규 선생님 밑에서 정신없이 휘들리는 동안 마치 메피스토텔레스 손에 놀아난 파우스트처럼(비유가 너무 거창했나요?) 제 간덩이가 저도 모르게 한껏 부어올랐으니 말입니다. (35-34)
플라톤의 <티마이오스(Timaios: 흔히 ‘우주론’으로 번역됩니다.)> .. 어째거나 이글을 보면 데미우르고스(Demiourgos: 이 이름은 그리스어 동사(dēmō){짓는다}를 의인화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라는 ‘일하는 하나님(?)’이 나옵니다. 이 우주 밖에 사는 우주 마왕은 머리를 짜내서 우리가 사는 이 우주를 만들어 내는데, 대충 훝어보자면 이렇게 만들어 냅니다. 먼저 건축자재가 있어야 하겠지요. 이 건축재료가 무언신지 압니까? 놀라지 마십시오. ‘같은 것{touton}’과 다른 것{heteron}’입니다. (36) ... 앞에서 우리는 ‘같다’, ‘다르다’는 말이 논리적으로 참과 거짓을 가리는 문장에서는 ‘이다’, ‘아니다’와 같은 뜻으로 쓰이며, ‘이다’, ‘아니다’를 뒷받침하는 근거는 바로 ‘있다’, ‘없다’에 있다고 말한 절이 있습니다. (37)
그런데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최초의 하나는 있는 것뿐입니다. 따라서 어떤 것을 하나라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그것을 있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말하는 셈입니다. 아다시피 하나는 단위입니다. 단위(單位)라는 한자 말은 영어로는 유니트(unit)[l’unité]인데 이 유니트라는 말은 라틴어 ‘우누스(unus)’, 곧 하나라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43) - [하나가 말에서 나왔는지는, 단위성립에서 둘이 먼저인지는 1900년대에 논의의 대상이 된다.]
“앞에서 플라톤의 데미우르고스가 ‘되는 것’{gignomenon, genesis, 이 말은 흔히 생성(生成)이라고 번역하는데, 독일 말로 베르덴(werden), 영어로는 비커밍(becoming)으로 번역하는 것으로 보아 되는 것또는 됨으로 번역하는 것이 옳을 듯 합니다.}을 이리저리 버무려 ‘같은 것{touton}’과 다른 것{heteron}’의 띠를 만들고 같은 것의 띠는 밖으로 두르고, 다른 것의 띠는 같은 것의 띠와 엇갈리게 해서 안쪽으로 둘러 이 우주의 질서있는 이야기를 하려다가 같은 것과 다른 것이라는 말에 걸려 곁길로 새고 말았는데요. ..” (43)
떠도는 풍문에 따르면 이 이데아라는 괴물들의 왕은 ‘좋음’의 이데아라는데, 그 밑에 무수한 괴물들이 이 왕을 떠받들고 있다고 합니다. 어떤 놈들은 ‘사람’, ‘개’, ‘소’, ‘말’, ‘지렁이’, ‘바퀴벌레’, ‘쇠똥구리’, …… 같이 천하기 짝이 없는 이름을 지니고 있고, 또 어떤 놈들은 ‘아름다움’, ‘참됨’, ‘용기’, ‘중용’, ‘거룩함’ …… 따위의 제법 그럴싸한 이름들 지니고 있고, 또 다른 놈들은 ‘큼’, ‘작음’, ‘많은’, ‘적음’, ‘삼각형’, ‘동그라미’ …… 같은 시답잖을 이름을 지니고 있다는데, 그 수가 이 우주의 삼라만상에 붙인 이름보다 더 많아서 이 괴물들을 제데로 먹여 살리자면 ‘좋음’이라는 이데아계의 임금이 아무리 마음씨가 곱다 한들 어디쯤까지 좋은 임금님으로 남아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44)
“...그런데 우리는 변강세 군과 이옥녀 양이 다르다는 걸 어떻게 해서 안다고 했지요?” // “그건 첫 시간에 가르쳐 주셧듯이 변강세 군에게 있는 어떤 것이 이옥녀 양에는 없고, 변강세군에게 없는 어떤 것이 이옥녀 양에게는 있기 때문입니다.” (48).. 판소리 가루지기타령에 나오는 변강괴와 옹녀를 연상하고 .. (49) - [있다/없다의 차이와 있는 것/없는 것의 차이가 다르다. 앞의 차이는 전체에 대한 반대이며, 뒤의 차이는 부분에 대한 차이이다.]
“...그러니까 뭉뚱그려 말하자면 다른 것{heteron}은 동시에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인지는 이미 앞에서 말씀드렸지요? 그렇습니다. 바로 있는것과 없는 것사이에 들어서 이 둘을 맺어주면서 동시에 떼어놓는 무규정적인 것바로 그것입니다.” (50, 첫째 강의 마지막 문단) - [사이에 있는 것은 수학적으로 분수들 소수이든 표시할 수 있다. 진실로 무한계인 것은, 두 경계 사이 바깥일 것이다. 이런 문제가 제기된 것은 1830년 이래 수의 무규정적인 수들에 대한 정의를 하기 위해서 등장할 것이다. 무리수, 파이, 허수, 복소수, ε, א등처럼 규정할 수 없지만 한정된 범위 또는 움직이는 무한계를, 좌표가 아니라 그래프로 보여 줄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59TKF)
# 둘째 강의: 있을 것은 없고 없을 것만 있는 개 같은 세상 51-74. [생성론(플라톤),]
저는 여기에서 파르메니데스와는 달리, 없는 것이 없는 이 우주 안의 삼라만상을 환상[환타지]으로 돌리지 않고, 죄다 구원하려고 한 플라톤의 우주론을 설명해 나가는 수밖에 없는 궁지에 몰렸습니다. (53) - [파르메니데스가 없는 것은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플라톤은 이 없는 것이 없는 세상(코스모스)을 구원하기보다 모두 다 아름답고 착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왜 아름답지 않은 또는 착하지 않는 것이 있을까를 문제 삼지 않았을까? - 둘째 강의는 왜 여기가 ‘개같은 세상’인가가 주제일 것 같다.]
“먼저 플라톤의 생각부터 따져 들어가 볼까요? 플라톤의 형이상학(그냥 존재론이라고 불러도 됩니다.)에는 없는 것(없음 바로 그것)만 빼고는 다 있습니다. 첫째, 이데아라는 괴물[이미지]들로 나타나는 있는 것이 있고(이것은 우주 밖에 있는 것으로 그려집니다). 둘째, 이 이데아들과 같은 것들이 있고(이것은 우주 안에 있는데 이데아를 본떠 만든 한계{peras}, 형태가 있는 모든 것을 가리킨다고 보면 됩니다.). 셋째, 이데아들과 같은 것들이 우주 안에 있게 하는 힘이있고(이것은 우주를 제작하는 데미우르고스로 표현됩니다.) 넷째, 끊임없이 다른 것으로 될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이것은 됨, 되는 것을 가리키는 gignomenon, genesis 같은 말로 나타나는 데, 생성{werden, becoming}으로 흔히 번역됩니다.)(54-55) - [이 네 단계는 폴리테이아편의 선분의 비유에서 왔다고 할 정도로 닮았고, 게다라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인론을 자연학(Physics)(제2권 3장)과 형이상학(Metaphysics)(제1권(Alpha) 3장)에서 전개된다. - 생각하는 기술에 유사성이 있다.]
이데아라는 말이 희랍어 ‘에이도(eidō)’에서 나왔다는 것, ‘에이도’라는 말은 ‘눈으로 본다’는 말이므로 본디 ‘이데아’는 ‘눈으로 본 것’. ‘모습’, ‘형태’의 뜻을 지니고 있다는 것, 우리의 눈이 감각기관 중에서 가장 많은 일을 하면서 우리가 어떤 것을 머리에 떠올리때는 주로 눈에 비친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는 것, 그래서 우리가 삼라만상이라고 할 때 우선 눈에 보이는 것을 가리킨다는 것, 그런 까닭에 ‘이데아’라는 말은 나중에 이것저것 온갖 것을 가리키는 말로 바뀌었고, ‘종류’, ‘어떤 것’, ‘머리에 떠오르는 것’ 따위의 뜻을 덧붙여 지니게 되었다는 것은 여러분도 잘 아는 사실입니다. (55) - [AI: 이데인(idein / ἰδεῖν): 고대 그리스어 동사(부정사형)로 ‘보다(to see)’ 또는 ‘알다(to know)’라는 뜻 // 이데아(idea / ἰδέα): 이데인(idein)이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명사로, 원래는 ‘보이는 것’, ‘모습’, ‘형태’, ‘(사물의) 모양’을 뜻했습니다. // eidō(εἴδω / οἶδα), 뜻: ‘보여지다’, ‘알다(to know)’. 설명: idein과 같은 어원을 공유하는 동사의 기본형(직설법 현재) 중 하나입니다. 고대 그리스어에서 이 단어의 완료형인 *oida(οἶδα)*는 ‘내가 이미 보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알고 있다’라는 뜻으로 확장되어, 일상적으로 ‘알다(to know)’라는 의미로 가장 많이 쓰였습니다.]
“저는 아가 정의된 삼각형, 정의된 원은 일정한 크기가 없고, 따라서 공간을 차지하지 않는다고 이야기 했습니다.(이 때의 공간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물리적 공간을 뜻합니다.) 그리고 바뀌지도 않습니다.(시간이 그것에 어떤 영향력도 미치지 못한다는 뜻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정의된 원, 정의된 삼각형이 현실에서 볼 수 있는 어떤 동그라미, 어떤 세모꼴보다 더 완전한 것, 가장 완전한 것이라고 믿고, 이것에 의지해서 현실의 동그라미나 세모꼴의 불완전함을 파악하지 않습니까? 만일에 이 완전한 원과 완전한 삼각형이 우리가 현실에서 겪는 것처럼 시간과 공간의 영향을 받아 변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렇게 되면 완전한 것에서 불완전한 것으로 바뀌는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59) - [정의된(définit), 한정된(définit), 완전한(complet, parfait) 등은 같은 의미일까?] / [규정된(déterminé), 유한한(fini), 무한계한(illimité) .]
그림 12
..... 사람으로 있는 것 1
.... .. 정의된 사람 2
.... .. .. 눈에 보이는 사람 3
.... .. .. .. 남자 4
.... .. .. .. .. 남자어른 5
.... .. .. .. .. .. 정상적인 남자 어른 6
.... .. .. .. .. .. .. 나이가 마흔 살 된 정상적인 남자 어른 7.
.... .. .. .. .. .. .. .. ⋮
.... .. .. .. .. .. .. .. .. 사람꼴도 제대로 못 갖춘 어중이떠중이 n. (62)
- [플라톤의 정치가(Le Politique, Πολιτικός)편에서, 인간의 정의 “깃털이 없고 두 발로 걷는 동물(깃털 없는 이족보행 동물)”]
“따라서 이데아의 세계에도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있다고 보아야 하므로 이 둘 사이를 갈라 놓는 경계선, 곧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제3의 것, 무규정적이라고 부르는 것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데아의 세계에는 여럿이 있을 뿐 아니라, 이 여럿으로 드러나는 있는 것과 없는 것의 공존에서 생겨나는 모순도 있을 것이고 우연도 있을 것이므로, 이데아의 세계도 우리가 사는 우주와 마찬가지로 여럿과 운동, 그리고 그에 따르는 시간과 공간도 있다고 보아야 할것입니다. 이러한 사태가 의미하는 건 무엇일까요?” (65) - [모순은 삶과 죽음처럼 동시에 놓을 수 없는 것에서 쓰이는 용어일 것이다. 현상계 또는 표면에서는 여럿 사이에는 대립(l’opposition), 반대(le contraire), 우연(la contingence), 우발사건(l’accident), 아자르(le hasard) 등이 있을 것이다.]
“외진 산골이나 낙도에서 살고 계시는 일자무식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들께 여쭈어 보면, ... ‘그것이 뭣이 그렇게 어렵다고 머리를 싸매고 앉었다냐. 아, 있을 것이 있고, 없을 것이 없는것이 좋은 것이고, 거 뭣이냐, 없을 것이 있거나있을 것이 없으면 나쁜 것아녀?’ ...”(67) - [있다-좋다, 없다-나쁘다로 짝을 짓는 것이 항상 그런 것이 아니다. 이득이 될 경우거나 편리할 경우에 좋은 것이고, 손실이 생기거나 문제를 일으키면 나쁘다. 그런데 (병이)있다가 나쁘고, (위험이)없다가 좋다. 대상의 지시작용, 관계의 표명작용, 심정의 기호(의미)작용에 따라 다르다. ]
그렇다면 착취는요? 전쟁, 이기심, 탐욕, 증오는 어떻습니까? 모두 없어야 할 것, 맞지요? 그러면 이렇게 생각해도 되겠네요. ‘있을 것, 있어야할 것이 있는사회, 곧 자유롭고 평등하고 평화롭고 우애있고 사랑이 가득한 사회는 좋은 사회고 거꾸로 없을 것, 없어야 할 것인 억압과 착취와 전쟁과 이기심과 탐욕과 증오로 들끓는 사회는 나쁜사회다. 뿐만 아니라 있을 것, 있어야 할 것이 없는사회, 곧 자유도, 평등도, 평화도, 우애도, 협동도, 사랑도 없는사회는 나쁜사회다.’ (67) - [‘있어야 또는 없어야’라는 대상에 대한 규정적(조건적)(나중에는 가능적) 또는 심성의 노력(의지)에 대한 것은 나쁘다 좋다는 말로 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즉 존재와 무라는 모순을 설정하는 것이 벩송은 착각이라 한다. 규정적, 가능적, 심성의 노력적인 일들 또는 방식에는, 즉 기획, 의도, 바램 등에는, 좋다 나쁘다는 상황과 개체에 따라 다르다. 즉 생물학에서 독식물과 단식물의 구별은 인간에 의한 것이 아닌가. 존재(시간, 화두)라는 화두 다음에서 행위와 결부된 것은 마치 선문답과 같다. 선문답이 파라독사와 닮은 것은 누구에게는 맞는 것 같은데 타인과 타자에게는 맞지 않는 것 같기 때문이다. 중국은 선문답이 혜능(慧能, 638-713) 이후인데, 서양에서는 고대 에피메니데스 다음으로는 러셀의 이발사 역설(1901년 발견, 1902년 프레게에게 보낸 편지)에서 파라독사의 논의로부터 이다. (59TLA)]
플라톤에 따르면 이데아의 세계만이 ‘없는 것이 없는’ 곳입니다. 이와 달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 안에는 있는것도 있고없는것도 있는데, 이 둘이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한데 엉켜 있습니다. (69) - [현재의 현상에서 관심 있는 것도 관심 없는것도 있다. - 관심에서 ‘없다’는 말이 성립한다. (벩송, EC, 4장)]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의 대화록 안에서 ‘사람들은 알면서도 일부러 나쁜짓을 저지르지는 않는다. 모르기 때문에 나쁜짓을 저지르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런 생각을 옳다고 받아들이면, 이 세상의 모든 악과 죄는 없는 것, 빠진 것(결핍)과 연관되어 생겨납니다. 소크라테스의 모름은 앎이 없는것, 지혜의 결핍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따지면 우리가 악, 나쁜 것이라고 이야기한 억압. 착취, 증오, 탐욕, 고통 같은 것은 모두 ‘자유가 없는것’, ‘고른 분배가 없는것’, ‘사랑이 없는것’, ‘욕망의 절제가 없는것’, ‘즐거움이 없는것’ 따위로 바뀌게 됩니다. (70) - [없는 것이 아니라 달리 있는 것이 아닐까? (벩송, EC, 제4장)]
실제로 플라톤의 철학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알려진 플로티노스의 유출설은 이와 같은 제[윤구병] 해석을 뒷받침하기도 합니다. ... 마치 해에서 볕과 빛이 사방으로 뿜어져 나가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 하나인 있는것과 가까이 있는 것들은 하나인 있음으로 가득 차서 없는것이 거의 없는데, 이 하나로부터 차츰 멀어질수록, 그래서 하나인 있는것이 미치는 힘이 약해질수록있는 것보다는 없는 것이 더 많아지고, 있는 것이 빠진 만큼 이 세상에는 악과 죄가 늘어난다는 것이 아우구스티누스가 받아들인 플로티노스의 생각이었습니다. (71) - [플로티노스의 유출설: 일자에서 물질(무규정) 사이에 상향하는 길과 하향하는 길이 있는데, 상향은 일자(정체성, 보살)를 만들려는 길로, 하향은 세상(상황들, 하생경)에 휩쓸리는 길로 보입니다.]
‘우리는없는 것을 두고 무엇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 ... 이것에는 무엇이 있고저것에는 무엇이 있길래이것과 저것은 서로 다르게보이느냐, 이것과 저것에 있는 같은 것은 무엇이고, 다른 것은 무엇이냐, 무엇때문에 같고, 무엇때문에 다르냐, 같은 까닭은 어디에 있고, 다른 까닭은 어디에 있으냐, 이를테면 이 기타 줄은 크기를 지니고 있고 크기를 지닌 모든 것이 그러듯이 이 기타 줄 안에는 무한히 많은 질(무한히 다른 소리의 성질)들이 엉켜있는데, 이 소리들을 하나하나떼어 내서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낼 길은 없겠느냐, 이 기타 줄에서 크기를 없애버리면, 그리고 이 소리와 저 소리가 뒤엉켜 있는 것을 풀어내고(분석하고), 뒤어켜 있게 하는 힘을 없애서 하나하나고정시켜 움직이지 못하게 하면, 이 기타 줄에 숨어 있는 소리들이 하나하나 구별할 수 있는 모습으로 드러나지 않겠느냐, 그렇게 겉으로 드러난 것, 한계 지어진 것, 하나하나의 끝을 모두 살피면, 이 세계의 실상을 한꺼번에 파악할 수 있지 않겠느냐 ……’ (73) - [하늘의 천장은 현의 줄과 같아서 점을 찍는 곳에 따라서 소리가 다를 것이라는 상상을 플라톤이 했을 것 같다. 마치 기나긴 현 또는 현들의 각각에서 점을 찍으면 소리가 달리 나는 것과 같다. 이 현의 소리는 결이다. 현에서 점도 결이다. 천문과 음악에서 결은, 수와 원자와 다른 방식으로 다루어야 한다는 것을 아마도 플라톤은,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었을지라도, 알았던 것 같다. 플라톤이 조화중항을 찾으려 했다고 후세 철학자 또는 수학자들이 추측하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 ... 플라톤의 이데아 세계는 없는것이 없는우리가 감각을 통해서나 이성[지성]을 통해서나 파악할 수 있는 사물들의 모든 성질{quality}들이 하나도 뒤엉켜 있지 않고, 저마다 분명한 한계를 드러낸 채 따로따로 떨어져 다 갖추어져 있는 세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플라톤은 자기가 파르메니데스의 하나로 있는, 그래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사실들을 모두 헛것으로 돌려버리는, 있는 것이라는 괴물로부터 벗어났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플라톤은 파르메니데스의 품 안에서 벗어나는 순간 자기의 이론이 모순을 끌어안을 수밖에없다는 것을 몰랐던 듯합니다.” (74) - [플라톤은 이데아들이라는 있는 것들로만 되어있다고 생각했겠지. 그런데 이것들이 각각으로 있을 수 있는 조건 또는 상황은 무엇인가? 각각이 있을 수 있는 바탕으로서 하나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바탕의 하나(얼) 각각의 하나(혼)은 서로 다른 것인가? 또는 하나(혼)들의 전체가 하나(얼)인가? 아마도 기하학적으로 전체의 하나인 무한한 공(구球)과 부분인 것처럼 보이는 중심 점으로서 하나와 차이는 무엇인가? - 이것은, 점과 공 사이는 모순이라기보다 파라독사(?). (59TLC)]
*
셋째 강의: 사람이 '동물'이 되는 자리와 '짐승'이 되는 자리 75 [공간론(아리스토텔레스),]
“앞에서 잠깐 비추었듯이 모든 운동의 한계는 모순이 끝나는 곳입니다.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서로 관계를 맺지 않고 따로 떨어져 있으면 모순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따로 떼어 놓는 작업, 이것을 최종 분석이라고 부릅시다. 가장 좋은 것과 가장 나쁜 것, 가장 큰 것과 가장 작은 것, 가장 아름다운 것과 가장 추한 것…… 이 짝들이 양 극단이고, 운동은 이 양극단의 한계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은 이미 설명했습니다. ..” (78) - [양 극단은 모순이 아니겠지.]
이제 제가 삼각형 하나를 그려 보겠습니다.
그림 14 : [삼각형]
이것도 물론 삼각형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정의된 삼각형과는 여러모로 다릅니다. 먼저 이 그림의 삼각형은 크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 .../ 이와 달리 정의된 삼각형은 어떤 임의의 크기도, 어떤 임의의 각도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여럿 중의 하나가 아니라 하나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공간의 규정을 벗어납니다. (79) - [이데아는 공간에 있지 않다. 추상화된 도형인데, 실재한다고 한다. 그럼에도 정의된(definit, 페라스를 갖는) 삼각형이다. 왜냐하면, 원이나 오각형과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나], 사람, 동물, 생물, 있는 것이 저마다 차지하고 있는 공간을 추상공간이라고 하는데, 이 추상 공간도 모두 같은 것이 아니라 추상의 차원과 성격에 따라 다릅니다(참조 그림15). (81) - [그림 15는 중심에나를 두고 동심원으로 넓어지면서 그리는 동그라이의 범위가 사람, 동물, 생물, 있는 것등으로 커나간다. 그러면 있는 것 바깥은? 그런데 이런 식으로 계단식 또는 동심원식의 포함관계를 설명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항목에 관한 것으로 후대의 논리학자들 중에 어떤 이가 항목들의 논리적 크기를 정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항목(용어)의 크기를 규정한 것은 정의에 있다. 류와 종이며, 류보다 큰 것은 상위류이고 종보다 작은 것은 하위 종인 셈이다. 이런 논의는 존재론에 관한 것이라기보다 논리적 구축(construction)에 관한 것으로, 플라톤에서 고르기아스편의 레토릭에 대한 논의에 해당할 것이다. 그러면 모든 것을 생산하는 중심과 모든 것을 포함하는 외부는 어떻게 다를까를 이항관계로 설명한 이는 제르곤(Joseph Gergonne, 1771-1859)이며 논리적 체계에서 항목들이 존재인지, 기호인지, 상징인지, 단위인지에 대한 논의는 19세기말 단위설정에 대한 논의에서 전개되었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물음이 떠오릅니다. 여러 구성 요소로 이루어져 있는 복합체를 살필 때 전체인 하나를 다치지 않고, 그것을 이루는 부분들 하나하나를 살펴볼 길은 없을까? 구조와 기능을 함께 파악할 방법은 없을까? ... 물질의 가장 작은 단위, 하나가 발견되면 입자 물리학자들은 우주의 만물이 입자들로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다시 말해서 모든 자연현상을 물질의 기본 단위로 환원할 수 있다고 믿겠지요. .. [그러나] 그 테두리를 벗어나면 이 관점은 보편성[일반성]을 잃습니다. 생물학이 물리학으로 환원될 수 없고, 사회학이 생물학으로 환원될 수 없고, 철학이 사회학으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84) - [그림15를 참조하여 조성방식(천문과 음아의 결에서)에는 물리학>생물학> 사회학> 철학> 심리학(선불교) 등으로 계층화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역으로 환원이 안된다고 한다. 왜? 학문의 영역이 다르기 때문인데, 이 다름은 단위와 범위를 조건, 정의, 협약, 한계 등에 따라 미리 규정하였기 때문이다. (59TLC)]
“철학은 가장 큰 하나를 보면서 동시에 가장 작은 하나도 놓치지 않고, 모든 하나를 빠짐없이 보려는 학문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말일까요? 그러나 이 ‘지나친 욕심(?)’은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저만 가진 것은 아닙니다. 철학의 역사는 이런 욕심장이들의 탐욕스러운(?) 얼굴들이 철학의 출발점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줄지어 늘어선 모습을 보여줍이다. .../ ... 있다, 없다는 말이 우리 사고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낱말이라는 사실은 철학자들이 나타나기 훨씬 더 앞서서 우리 인류가 가장 큰 하나인 있는 것에서부터 가장 작은 하나인 없는 것에 맞닿아 있는 것에까지 머릿속에 담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입니다....”(85) - [모든 자료들을 가지고 탐구해야 한다는 생각은 벩송쯤에 와서 일 것이다. 일정한 자료들을 근거로 체계 또는 틀(도식)의 정합성을 만들기에도 힘겨웠다. 그러나 비유클리드 기하학 이후에 틀이 중요하기보다 생각의 두 방법(구성술, 조성술)의 차히를 알면서 정합적인 하나의 전체를 안다는 것은 포기한 것 같다. 각 학문은 각자의 길을 간다. 사유의 놀이 영역에는 각각의 규칙과 약속이 있는 것 같다. 사람들이 연대하는 것은 소통이고, 동등이 아닌 평등은 협업과 공동체를 향한 길일 것이다.]
우리가 ‘있는 것이 있다’ 또는 ‘있는 것은 있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순간[찰나], 있는 것은 어떻다, 무엇이다라는 규정을 받게 되는데 이렇게 되면 있는 것은 규정되는 것{definiendum, 정의된}이 되고, 있다나 있는 것이다는 규정하는 것{definiens, 정의하는}이 되어 우리의 의식 안에 있는 것이 됩니다. ...(85-86) - [규정된 것 determiné규정하는 것 determinant 이런 구별에서 수동성과 능동성은, 자아에서 신체와 의식으로 이중화 현상에 닮았다.]
“... 서로 나란히 설 수 없는 둘의 더불어 있음, 곧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이어져 있다.’ ‘한 공간 안에 있다’는 모순에서 운동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사정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학{puysica}에서 ‘첫째 원인인 있는것은 스스로는 움직이지 않으면서 다른 것이 운동하게 한다’는 식으로 이야기하게 됩니다.” (87) - [이어져 있다에 대해 두 가지 방식이 있다. 시간과 공간에서 다르다. 철학사는 시간에서 지속 또는 연속성(duree, continuation)을 쓰고, 공간에서는 계속성(succession)이다. - 1890에서 1910년 사이에 실재성을 논하는 방식의 차이에서 실재성에서 현실에서는 모순이 아니라 대립과 반대가 있을 뿐이다. 실재성은 생성이며 (자발성)운동이며, 생명은 운동성이며, 정지에서 운동으로 가지 않는다. 따라서 모순을 이야기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이래로 신학자와 현상학자는 정지가 먼저라고 하는 착각에 빠졌다는 것이다.]
분해는 보통 물리적인 공간에서 이루어진다고 보아도 됩니다. 어떤 물건을 분해해 놓을 때 분해된 것들은 서로 다른 실재 공간에 놓여 있어서 서로 다른 부품들이 같은 자리를 차지할 수 없습니다. / 그러나 분석의 경우는 다릅니다. 분석이 이루어지는 공간은 이론으로만 따지면 무한합니다. 분석은 물리 공간에서도 이루어지고 화학 공간, 생물공간, 사회공간, 경제공간, 예술공간, 언어공간…… 어디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92) - [나누기의 두 가지, 수학에서 analyse, (décomposition, dissociation) ]
불을 예로 들어 봅시다. (92) ... 연금술사[구화학자]의 후예들인 근세 화학자들만 하더라도 불에 타는 것에는 플로지스톤{phlogiston}이라는 태우는 물질이 따로 있어서 불이 붙고 열이 난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불타는 현상이 급격한 산화 현상이고, 산소가 있어서 나무에 불이붙거나 쇠가 달구어진다는 것이 밝혀진 것은 현대에 이르러서입니다. (93) -
헤시오소드의 이야기에 따르면, ... 앞일을 잘 내다 보고 인간들을 깊이 사랑한 프로메테우스{Prometheus}가 올림포스 산꼭대기에서 불을 훔쳐 빈 갈대에 숨겨가지고 사람들에게 가져다 주었다고 합니다. (93)
그리고 헤시오도스 뒤에 아이스킬로스라는 희랍 비극 시인이 <불을 가져온 프로메테우스>, <묶인 프로메테우스>, <풀려진 프로메테우스>라는 비극 삼부작을 통해서 불과 인간의 문명에 대해 감동적이고 대단히 깊이 있는 분석을 해냈는데, ... (93)
불에 대한 분석은 신화 공간에서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옛 인도에서도 세계를 구성하는 네 가지 기본 요소로 흙과 물과 불과 바람을 드는 사상가들이 나타났고, 그리스에서도 엠페도클레스라는 철학자가 마찬가지로 이야기를 했으며, 고대 중국에서도 오행(五行)이라 하여 나무와 불과 흙과 쇠와 물의 상생ㆍ상극 관계로 우주의 모든 변화를 설명하려는 시도가 오랜 전통으로 지속되었습니다. .. 유리 조상들도 그분들 나름대로 불을 분석했는데, ... (예를 들어 남자의 생식기를 ‘불’과 ‘불알’로, 생식기가 자리잡고 있는 곳을 ‘불두덩’으로, 생식기에 나는 거웃을 ‘불꽃’으로 불렀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불을 생식의 원천, 생명의 근원으로 파악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94)
플라톤도 <티마아오스>에서 불에 대한 체계적 분석을 시도하고 있는데 희미한 흔적, 다시 말해서 잠재적으로 있는 숨은 불에서부터 기하 도형(삼각형)으로 구성된 불, 우주의 네 가지 큰 구성요소인 불, 우리가 감각을 통해서 파악하는 불, 사물을 인식할 때 대상에서 빛으로 바꾸어 우리에게 오고 우리의 눈에서 역시 빛으로 바뀌어 대상에서 가서 서로 만나 사물들의 모습이나 색깔을 알아보게 하는 불, 논리 공간에서 기하학의 입체 도형으로 드러나는 불, 이데아로 있는 불 ……이렇게 여러 공간에서 불의 특징을 살핍니다. (94)
나중에 따로 다루려고 생각합니다만 이론과 실천의 문제에서 어떤 이론이 번번이 실천에 이러지지 못하고 공리공론으로 그치고 마는 것은 이 이론 공간이 차지하고 있는 자리를 제대로 매기지 못해서 생겨나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95, 셋째강의 마지막 문장)
(59TLD)
네 번째 강의: 같으면서도 다르고 다르면서도 같다? 97. [시간론(아우구스티누스),]
저(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 제11권 제10장부터 제31장까지 나오는 시간에 관한 논의를 발췌해서 학생들에게 읽어 주었습니다. (99) - [내가 언젠가 형님의 이 번역을 전부다 옮겨 놓았는데 어디인지 모르겠다. 형님은 어느 신부의 번역을 바탕으로 다시 번역했다고 했었는데... 그 때 자료는 사라져버린 천하루밤에 있을라나?]
저는 운동과 시간에 대한 제 이야기의 실마리를 아우구스티누스의 < 고백> 에서 찾기로 했습니다. / 저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 제 11권 제10장부터 제31장까지 나오는 시간에 관 한 논의를 발췌해서 학생들에게 읽어 주었습니다. [다음 긴 문장들은 <고백>에서]
“시간이 길다 함은 동시적으로 있을 수 없는 많은 운동의 흐름이 길다 함이요,…… 따라서 시간이란 순수하게 현재일 수 없고, 과거란 미래에게서 밀려나는 것. 미래란 과거에 뒤따르는 것……”(제11장) (99)
“도대체 시간이 무엇입니까? 아무도 묻는 이가 없으면 아는 듯하다가도 막상 묻는 이에게 설명하려 들자면 말문이 막히고 맙니다. 그러나 제법 안답시고 말을 하자면 이렇습니다. ‘흘러가는 무엇이 없을 때 과거의 시간은 없을 것이고, 홀러오는 무엇 이 없을 때 미래의 시간도 없을 것이며, 아무것도 없을 때 현재라는 시간도 없을 것 이다……”(제14장) (99)
"주여, ……과연 미래와 과거가 있는 것이라면 그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나이다. 아직 미치지 못하나 적어도 한 가지 알고 있는 것은, 어디에 있든지 거기에 미래와 과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현재로서 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미래로 어디에 있다 친다면 거기에는 아직 있지 않는 것(아직 없는 것)이요. 과거로 있다고 친다 해도, 거기에는 이미 있지 않는 것(이미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과거가 사실로 얘기될 때에 그것은 과거가 되어 버린 사실 자체가 아닌 기억에서 좇아 나오는 것일 터이요. 이 경우에 그 사실들이 감각을 거쳐 지나가면서정신에다 자취와 같이 찍어 놓은 그영상들에서 얻어진 말들일 것입니다. 이를테면 내 어린 시절은 다시는 있지 않는 과거의 시간, 현재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추억을 더듬어서 이야기할 때, 나는 그 영상[이미지]을 현재 보는데, 이것은 아직 내 기억에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그러면 미래를 예언하는 경우에도 이와 비슷하여,아직 있지 않는 사 물의 영상이 벌써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지. 주여, 나는 모른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아는 것은. 흔히 우리는 미래의 우리 행동을 앞서 생각하는데, 이 경우에 예견은 현재요. 예견하는 바 그 행동은 미래이기에 아직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행동으로 접어들어 예견하던 것을 몸소 하기 시작할 때, 그 때에야 비로소 행동이 있다 할 것이니, 그 때는 미래에 있을 것이 아닌 현재에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100)
아무튼 미래의 예견이 제아무리 아리송한 것이라 할지라도 있는 것이 아니면 보여질 수 없고, 이미 있는 것이면, 미래도 과거도 아닌 것입니다.
이러므로 미래의 것이 보인다 하는 경우에, 보이는 것은 아직 없는 것, 곧 앞으로 있을 그것이 아니라, 바로 그 있는 까닭과 상징일 것입니다.그러기에 보는 이들에게는 미래가 아니요, 현재일 것이니, 이리하여 정신에 개념화하는 미래가 예언될 것입니다. 이 개념이 있으므로 예언하는 그이들이 현재로 직관하는 것입니다. 많은 실례 가운데 하나를 골라 말해 보겠습니다. (100)
나는 먼둥이 트는 것을 보고, 해가 떠오르리라고 예언합니다. 이 경우에 보는 것은 현재요, 예언하는 것은 미래입니다. 이미 있는 해가 미래가 아니라. 아직 없는 그 떠오름이 미래입니다. 그러나 떠오름 그것마저 지금 내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정신으로 상상함이 없다면 예언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필경 미래란 아직 있지 않는 것이고, 아직 있지 않다면 없는 것이며, 없다면 보일 수도 전혀 없으나, 다만 미리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미 있고 보이는 현재의 것에서 가능한 것입니다." (제18장) (101)
“이제야 비로소 똑똑히 밝혀진 것은 미래도 과거도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따라서 과거, 현재, 미래라는 세 가지 시간이 있다고 말한다면 옳지 못하고, 차라리 과거의 현재. 현재의 현재, 미래의 현재, 이렇게 세 가지 때가 있다 하는 것이 그럴 듯한 것입니다. 이 세 가지가 영혼 안에 있음은 어느 모로 알 수 있으나 다른 데서는 볼 수 없으니, 곧 과거의 현재는 기억이요, 현재의 현재는 목격함이요. 미래의 현재는 기다림입니다.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세 가지 때를 내가 볼 수 있고. 사실 셋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제20장) (101)
“아까 나는 흘러간 때를 재어 본다고 말하였습니다. 곧 이 때가 저 때에 견주어 두 갑절이라느니, 또는 이 때나 저 때나 같다느니 하면서 무엇이건 시간의 부분을 따져서 말하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말하자면 흘러가고 있는 시간을 재어 보는 것이니. 누가 우리에게 ‘어떻게 그걸 아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대답하겠습니다. ‘재 보기에 아는 것이오. 그러나 없는 것은 절 수 없는데, 과거와 미래는 있지 않는 것(없는 것)이다.’ 그러나 공간이 없거늘 현재의 시간인들 어떻게 잴 수 있겠습니까? 그러기에 지나가는 동안에 재는 것이니, 지나가 버린 뒤면 잴 것이 없어서 놓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재는 동안의 시간은 어디로부터, 어디로 해서. 어디로 지나가는 것입니까? 미래인 어디로부터 현재인 어디로 해서 과거인 어디로 흐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결국 아직 없는 것(미래)에서 공간이 없는 것(현재)을 거쳐 이미 없는 것(과거)으로가는 것입니다.그러나 시간이란 어떤 공간으로 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시간을 들어 말할 때 보통 길다는 둥, 두 배, 세 배 길다는 둥, 아니면, 똑같이 길다는 둥, 이런 식으로 표현하는 것은 역시 시간의 공간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면 지나가는 시간을 어느 공간으로 재어 보는 것이겠습니까? ‘어디로부터’ 지나가는 그 미래로 재겠습니까? 그러나 아직 없는 것은 젤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디로 해서’ 지나가고 있는 그 현재로 재겠습니까? 그러나 공간이 없는 것은 재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또 ‘어디로’ 지나 그 과거로 재겠습니까? 그러나 이미 없는 것은 젤 수도 없는 것입니다.” (제21장) (102)
“내가 알고자 하는 것은 인간이 물체의 운동을 재고, 이를테면 저 운동이 이 운동보다 두 배 길다고 할 수 있는 터무니, 곧 시간의 본질과 그 본성입니다. 가령 ‘하루’라고 말할 때, 그것은 해가 지구 위에 머무는 동안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낮이 반이고, 밤이 반이니 말씀입니다.) 그것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도는 전부를 가리킵니다.……이와 같이 하루가 태양의 운동, 곧 동에서 동으로 한 바퀴 도는 데서 이루어지는 것이니만큼, 내가 묻는 것은 운동 자체가 하루이냐, 또는 운동이 완성되는 기간이냐, 아니면 두 가지 다이냐 하는 점입니다. 첫째 경우가 하루라면 태양이 겨우 한 시간밖에 안 될 거리를 움직였다 해도 하루여야 할 것입니다. 둘째 경우라 치고 해뜨기부터 다음 해뜨기까지를 단 한 시간의 짧은 시간으로 잡는다면 역시 하루가 될 수 없고, 하루를 채우기 위해서는 태양이 스물네 번을 돌아야만 할 것입니다. ‘두 가지 다’인 경우라 하더라도, 하루라고 할 수 없는데. 그 까닭은 태양이 단 한 시간 만에 한 바퀴를 다 돌아 버리든, 태양은 멎은 채로 아침부터 그다음 아침까지 태양이 회전을 완성할 그 동안을 시간이 흐르든. 어느 것도 하루라고 일컬을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102)
그러기에 내가 지금 알고 싶은 것은 하루라는 것보다 태양의 회전을 재는 시간입니다.
만일 태양의 회전이 열두 시간 만에 다 되는 경우라 친다면 우리는 평소보다 절반 이 모자라는 기간에 다 돌았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두 개의 시간을 비교하면서 이것은 단위 시간, 저것은 두 배 시간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태양이 언제는 단위 시간에, 또 언제는 두 배의 시간에 동에서부터 동으로 돈다고 해도 말씀입니다. (102)
누구도 나에게 시간이란 천체의 운동이라고 말하지 말기 바랍니다. 그 옛날 어느 분이 싸움을 승리로 이끌고자 태양이 멎기를 빌었을 때,태양은 섰지만 시간은 가고 있었기에 말입니다. 꼭 필요하던 그 시간 동안에 전투는 계속되고 끝났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간이란 그 어떤 연장[길이] 같이 생각됩니다만 정말 내가 이것을 알고 있는지?……” (제23장) (103)
“‘시간은 곧 물체의 운동이다.’ 라고 누가 말한다면 주께서는 내게 궁정하라고 명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명하시지 않습니다. 듣건대 어떤 물체든지 시간 안에서 움직인다 하고, 당신께서도 말씀하시다시피, 물체의 운동 자체가 시간이라고는 듣지 못하였고, 또 그렇지 않다고 하십니다. (103)
어떤 물체가 움직일 때 운동을 시작하기부터 그치기까지 얼마 동안 움직이는지를 나는 시간으로 계산하게 됩니다. 그리고 언제부터 시작했는지도 모르게 움직이고만 있으면서 언제 그칠지 모를 경우라면 나는 그것을 보기 시작한 때부터 보기를 끝마치는 시간까지밖에는 계산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지켜보는 시간이 길면 그 시간이 길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나 어느 만큼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이와 같이 물체의 운동이 다르고, 얼마 동안인지를 재는 것이 다른 이상, 이 두 가지 중에 어느 것을 시간이라고 불러야 할지 모를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물체란 여러 모양으로 움직이는 때가 있고, 또 맞는 때가 있는 것으로서, 그럴 때 우리는 물체의 운동뿐만 아니라 정지 상태도 시간으로 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움직이는 시간과 멎는 시간이 같다.’ ‘움직이는 시간보다 멎는 시간이 두 배, 또는 세 배다.’ 이 밖에도 무엇을 놓고 더, 또는 덜 정확한 가늠을 할 때나 미리 짐작할 때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시간은 물체의 운동이 아닌 것입니다.” (제24장) (103)
“물체의 운동이 얼마 동안인지, 얼마 동안에 여기서 저기로 다다랐는지. 결국 시간 안에서 움직이는 것을 시간 아닌 무엇으로 계산할 수 있겠습니까? (103)
그렇다면 그 시간을 나는 무엇으로 재는 것입니까? 마치 대들보의 길이를 팔뚝 길이로 재듯이, 짧은 시간으로 긴 시간을 재는 것입니까? 아닌 게 아니라 우리는 긴 음절의 길이를 짧은 음절의 길이로 계산하고, 두 배가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시간의 정확한 양이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짧은 구절이라도 장단을 길게 뽑아서 부르면 오히려 긴 구절을 빠르게 부르는 것보다 더 오래일 경우가 있는 까닭입니다. 시나 각운이나 음절이 모두 이와 같습니다. (104) [천문과 음악의 지속은 너비가 아니다]
내가 시간을 연장으로 보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하겠습니다. 그러면 무엇의 연장이냐고 물으면 나는 잘 모릅니다. 아마도 내 영혼의 연장일 성 싶습니다. (104)
내 주이시여, 내가 막연히 ‘이것은 저것보다 길다.’ 또는 자신 있게 ‘저것보다 이것이 두 배다,’라고 할 때 나는 무엇을 헤아리는 것입니까? (104)
시간을 재고 있는 줄은 알지만 그것은 미래가 아닙니다. 아직 있지 않으니까요. 현재도 아닙니다. 어떠한 길이로 연장되어 있지 않으니까요.과거는 더욱 아닙니다. 이미 있지 않은 것이니까요. 그러면 도대체 무엇을 잰다는 것입니까?”……(제26장) (104)
“목소리가 울려 난다고 하자. 아직도 소리는 있다. 그러나 뚝 그치자 침묵이다. 그 소리는 지나갔으니 이미 목소리는 없다. 울리기 전에는 미래였으니 젤 수 없었다. 아직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104)
지금도 잴 수 없다. 이미 없으니 말이다. 소리가 나던 그 때에는 아직 잴 만한 것이 있었으니 잴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때에도 소리는 멎지 않은 채 지나가고, 또 지나가던 것이다. 그러면 그 당장에는 재기가 더 수월했던가? 현재란 아무런 길이가 없지만 지나가는 것은 시간의 어느 길이로 연장되기 때문에 계산이 가능한 것이다. (104)
그러면 그 당장에 가능했다고 치고, 마침 다른 소리가 울려 나기 시작했다고 치자. 소리는 아직 나고 있다. 음조가 헷갈림 없이 그냥 그대로……이렇게 소리나는 동안에 재어 보자꾸나. 소리가 끊어진 다음이면 벌써 과거! 잴 수 있던 것이 다시는 없을 것이니 통째로 재어 보고 얼마라고 말하자꾸나. 소리는 아직 나고 있다. 이것을 재려면 시작한 순간부터 그쳐 버린 끝까지라야 한다. 잰다는 일은 어느 시작에서부터 끝날 때까지 그 사이를 재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아직 끝나지 않은 소리는 길다느니, 짧다느니 할 만큼 잴 수 없는 것이고, 여느 것과 같으니, 또는 꼽절이 아니니, 어떻느니 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또 아주 끝나버린 뒤면 벌써 없는 것이 되고 만다. 그러니 무슨 수로 재 볼 수 있단 말인가? 시간을 잰다고 하지만 그건 아직 있지 않는 것도, 이미 없는 것도, 동안으로 연장됨이 없는 것, 그리고 한계를 가지지 않는 것도 아니다. 말하자면 미래나 과거나 현재나 지나 가는 시간을 재는 것이 아니로되, 그러나 시간을 재는 것이다. (105)
……소리는 하나가 울려 난 다음에야 다른 하나가 울려 나기 마련인지라, 앞소리가 짧고, 뒷소리가 길 경우에, 나는 그 짧은 것을 어떻게 붙잡아 둘 수 있는가? 무슨 수로 긴 것에 맞추어 재보고 갑절밖에 안 된다 이를 수 있는가? 짧은 음이 끝나지 않고서는 긴 음이 시작도 못 한 그때가 아닌가? (105)
긴 음을 잰다니 그 현재를 재는 것인가? 끝난 것이 아니면 못 재는 게 아닌가? 그 끝나는 것은 곧 지나가는 것이다. 그러면 내가 재는 것이 무엇인가? 어디에 짧은 음이 있길래 이것으로 재어 보며 어디에 긴 음이 있길래 이것을 잰다는 것인가? (105)
두 가지가 다 소리났고, 날아갔고, 지나가 버려 이제는 있지 않지만 나는 계산을 하고, 누구나 청각으로 느낀 바를 믿는 것처럼 자신을 가지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시간으로 따진다면 이 음은 홀음이고 저 음은 곱절이라고. 소리들이 이미 지나가고, 끝나지 않았다면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러고 보면 내가 잰다는 것은 이미 없는 것들이 아니라 내 기억에 박혀서남아 있는 무엇을 헤아림인 것이다. (105)
내 영혼아, 결국 네 안에서 내가 시간을 재는 것이로구나. 사실이 이런 것을 너 아니라 하지 말아라. 너, 지닌 인상들이 잡다하다 해서 스스로 헷갈리지 말아라. 내 다시 말하노니, 네 안에서 시간을 재느니라. 지나가는 사물들이 네 안에 이루어 놓은 인상 - 곧 그것들은 지나가도 남아있는 그 인상 - 을 나는 지금 있는 것처럼 재는 것이니, 인상이 생기기 위해 지나가 버린 그 사물을 재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곧 시간이요. 아니면 나는 시간을 재는 것이 아닐 것이다. (106) [혼 안에 시간이 있다.]
그런데 우리가 침묵을 재는 경우는 어떤가? 이 침묵이 저 소리 있는 시간보다 갑절이나 계속되었다 할 경우는 어떤가? 마치 소리가 울려 나는 것처럼 재 보기 위해서 생각을 연장시키는 것이 아니겠는가? 침묵의 동안을 시간의 길이로 측정해 보려고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가 흔히 소리와 입을 멈춘 채 시나 시구나 어떤 논문, 또 운동의 폭을 생각으로 뇌어보고는 마치 소리를 내어 외운 듯이, 그 얼마 동안이 피차 다른지를 시간의 길이로 따져서 말하는 것이다. (106)
누가 약간 긴 소리를 내어 보고자 얼마나 길지 미리 생각으로 정했다고 치자. 그 사람은 분명히 시간의 길이를 침묵 속에서 거친 다음에 기억에 머물게 하고 소리나는 그 음을 내기 시작하여 미리 정해 둔 그 끝까지 이어가는 것이다. 아니 차라리 ‘소리를 내었다.’ ‘소리를 낼 것이다.’ 끝내 버린 것은 이미 ‘소리 낸 것’이고, 남은 것은 ‘소리 낼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현재의 뜻이 미래를 과거로 옮기고. 과거는 또 미래가 작아짐에 따라 커 가다가 미래가 완전히 없어지고. 모든 것이 과거가 되어 버리기까지 그 끝장을 보게 되는 것이다.” (27장) (106)
“그러나 아직 채 있지도 않은 미래가 어떻게 작아지고 없어진다는 말인가? 이미 있지 않은 과거가 어떻게 커 간단 말인가? 이는 곧 그것을 하는 영혼 안에 세 가지가 있기 때문이다. 곧 영혼은 기다리고, 지켜보고, 기억함으로써, 기다리는 것이 지켜보는 것을 거쳐 기억한 것으로 옮겨지게 하는 것이다. (106)
미래란 아직 있지 않은 것임을 누가 부정하겠는가? 미래의 기다림은 진작부터 마음 안에 있는 것이다. 과거란 이미 있지 않은 짓임을 부정할 이 누구겠는가? 그러나 과거의 기억이 마음 안에 있는 것이다. 순식간에 흘러가 버리는 현재가 시간의 길이가 없다는 것을 누가 부정하겠는가? 그러나 지켜봄이 남아 있어 이로써 현재이던 것이 없어짐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러고 보면 아직 없는 미래가 오랜 시간일 수 없고, 다만 미래의 오랜 기다림이 오랜 미래일 것이요, 이미 없는 과거가 오래일 수 없고 다만 과거의 오랜 기억이 오랜 과거일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시를 읊조린다고 치자. 내가 시작하기 전에 나의 ‘기다림’은 시 전편에 뻗친다. 그러나 막상 시작하자, 벌써 그 몇 구절을 과거로 따돌리려고 할수록 그것은 내 기억 안에 들게 되고, 이리하여 내 행동의 존재는 두 군데에 걸치게 된다. 그 하나는 이미 읊조린 것을 ‘기억함’이고, 또 하나는 읊조릴 것을 ‘기다림’이다. 이 때 ‘지켜봄’ 은 현재인 것으로, 미래이던 것이 과거가 되려고 이를 거쳐 가는 것이다. (107)
이렇게 연거푸 진행될수록 ‘기다림’ 이 짧아지는 반면 ‘기억’이 길어지고, 드디어는 ‘기다림’이 아주 없어지고 나면, 모든 행위가 끝나 ‘기억’으로 옮겨지고 마는 것이다. (107)
시 전편에서 이같이 되는 일은 그 각 부분, 심지어는 그 각 음절에서도 마찬가지다. 더 긴 행위에서도 그러할 것이니, 저 시 역시 그 한 부분일 따름이다. 인간의 전 생애에서도 이와 같을 것이니, 그의 모든 행위는 인간 생활의 한 부분이요. 인류의 모든 역사에서도 또한 그러할 것이니, 이것은 저마다 인간 생활의 한 부분일 따름인 것이다.” (제28장) (107)
학생들에게 읽어 준 이 긴 인용문에 가끔 나타나는, 색으로 강조해 준 부분과 괄호 안의 글은 제 소행인데, 최민순 신부가 애써 잘 번역해 놓은 글을 군데군데 고쳐서 읽어 준 탓도 제게 있습니다. ... 제 머릿속에는 서양 철학사에서 시간과 공간의 문제를 놓고 머리를 싸맨 많은 철학자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습니다. 저는 다시 파르메니데스에서부터 출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107-108) - [내가 과거에(‘천이틀밤’에) 이 긴 문장을 입력한 적이 있는데, 의식과 신체의 연관으로 보려 하지 못했었다. 이번 수학사를 읽으면 추론의 구성과 구축, 혼의 조성과 생성을 구별해서 읽으면 매우 흥미롭다는 것도 알았다. (59TLH)]
그러나 [‘]이미 없는 것은 잴 수도 없는 것입니다.’에서 우리는 아우구스티누스가 파르메니데스의 충실한 제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잰다는 것은 시간이 공간화할 때만 가능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주 어려운 문제에 부딪히게 됩니다. 시간이 공간화할 수 있는 것인지, 만일 공간화할 수 있다면 그 근거는 어디에 있는 것인지, 공간화되는 것이 시간의 본질적인 측면인지, 아니면 부수적인 측면인지……”(109)
“그러지요. 아무리 작은 크기를 가진 것이라 할지라도 크기를 가진 모든 것은 나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의식의 칼날을 세워 쪼갤 때 나누어지지 않는 것은 없지요. 그렇다면 ‘크기를 가진 것은 나눌 수 있다.’는 말은 어떤 뜻을 지니고 있을까요? 다시 말해서 왜 크기를 가진 것은 나누어질 수밖에 없을까요?” (111)
“자 이제부터 우리는 있는 것만 있고[,] 없은 것은 파르메니데스의 세계, 하나의 세계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 없는 것[다른 것]과 더불어 있는 현상세계로 들어서게 됩니다. 이 세계는 모순[차이]이 가득 찬 세계이고, 이 모순에 따라 하나가 여럿으로 갈라지고 그 여럿이 이런저런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우리의 감각과 의식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변화와 운동의 세계입니다...”(113) - [비감각의 정신(의식)에서 감각의 의식(지성, 오성, 이성)의 세계에서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생각해 보십시오. 있는 것만 있고 없는 것은 없는 세상에는 거짓도 없고 잘못도 없습니다. 세상에 없는 것은 우리 의식에도 없습니다. ...(114) - [전자의 세계는 기독교가 생각하는 천국이지, 그런데 그런 세계를 선의 이데아로 포장한 것이 중세 카톨릭 교리였다.]
‘모순을 회피하라’이것이 학문하는 사람 앞에 걸린 첫째 금줄입니다. 아이를 낳은 집 대문에 쳐 놓은 금줄 말입니다. (117)
“있는 것만이 없는 것이 되지 않으므로 저됨을 지킬 수 있다고 전에 말하지 않았습니까?” / “바로 맞혔습니다. 있는 것만이 하나로 있으므로, 그리고 하나로 있는 것만이 크기를 가지고 있지 않아서 여럿으로 나누어지지 않으므로 저됨을 지킬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121) - [저됨(생성인데)이란 자기동일성의 유지일 것인데, 현상에서 정체성의 유지는 있는 것이 없는 것이라기보다 변화 중에서도 달리 있을 수 있다는 것인데.. 수는 불변인데 비해 점은 직선 위에서라기보다 원 위에서 같은 크기의 점이라도 질적 변화이라는 것이다.]
“... 그런데 있는 것은독립된 점{point}이 그렇듯이 관계 속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아예 없는 것도없기 때문에 관계맺을 실마리조차 없습니다. 관계 속에서 한편으로는 저됨을 잃으면서 그 나름으로 저됨을 지켜 나갈 수 있는 크기를 가진 것처럼 없다는 규정아닌 규정을 받는 어떤 것, 곧 없는 것(존재화한 무)밖에 없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나는 논리 공간에서 동일률을 보장해 주는 가장 기본이 되는 문장(명제)은 ‘없는 것이 없는 것이다’라고 발표했는데, 그 발표가 이루어지 자리에서 이 이야기를 이해한 사람이 없었으리라는 느낌을 가졌습니다.” (124-125) [“저됨을 지켜 나갈 수 있는 크기를 가진 것” - 생성(저됨)은 다른 문제거리일 것이다.]
다섯째 강의: 있는 것만 있는 게 아니고 없는 것도 있다. 127 [현실 세계(플로티노스)]
그런데 저마다 다른 이런 하나들의 존재론적 특성이 무엇이냐하는 것이 늘 문제입니다. 자, 살펴봅시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는 감각을 기준으로 삼을 때 ‘고유명사의 세계’입니다. 하나도 같은 것이 없습니다 하나도 같은 것이 없다는 말은 바꾸어 말하면 하나와 같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 우리가 수학에서 1을 기본 수로 정할 수 있는 것은 모든 1이 같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어느 하나{1}도 서로 같지 않다면 우리는 어떤 하나{1}를 기준으로 수학의 체계를 세울 수 있겠습니까? 감각과 연관된 세계에는 엄밀한 뜻에서 서로 같은 것이 하나도 없으므로 어느 하나도 기본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129)
예로부터 동양에서는 가장 크기가 작은 물질을 ‘티끌{미진(微塵)}’로 보았던 듯합니다. 그런데 부처님 말씀 가운데 ‘티끌 하나속에 우주가 들어있다{일미진중함시방, 一微塵中含十方}’는 구절이 있습니다. 손톱만한 크기의 운모에 책 몇백만 권 분량의 정보가 들어가는 기억소자{memory chip}가 곧 상품으로 나올 것이라 하니, 그런 뜻으로 이 말씀을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저는 이 구절 속에 더 깊은 뜻이 있다고 믿습니다. 안팎으로 무한한 이 우주에 있는 모든 것들이 어느 하나 홀로 떨어져 있지 않고 서로 모든 방면으로 이어져 끝없이 소용돌이치며 출렁거리고 있는 모습이 이 구절을 읽는 순간 제 마음의 눈 앞에 홀연히 떠오르던 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130) - [형님이 선정에 들 때도 있었구나.]
‘입만 벙긋해도 틀린다{개구즉착, 開口則着}’ ... / ‘하나인 있는 것과 아예 없는 것은 크기를 가진 여럿과 운동의 두끝을 이루면서 시간과 공간의 규정을 받는 현상세계를 초월해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것들과 연관해서 비유를 써서 하나{일자(一者)} 또는 하나님{유일신(有[唯]一神)}이라든가, 스스로 움이지 않으면서남을 움직이는 것{kinoun akineton}이라 든가, 검고 또 검은 것{현지우현(玄之又玄)}이라든가, 검은 어둠{흑암(黑暗)}이라든가, 끝도 없음{무극(無極)}이라든가 하는 여러 가지 말로 나타내려고 애쓰지만 그 둘가운데 어느 것도 우리 의식 속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말도 안 되는 말을 할 수밖에 없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31)
하나도 같은 것이 없는 현상 세계에서 같은 것을 찾아 다른 것과 나눌 수 있는 길이 없겠느냐, 만일에 같은 것이 없다면 먼저 닮은 것, 비슷한 것부터 찾아볼 수 없겠느냐를 두고 고민하던 플라톤이 결국 시간과 공간을 벗어난 형상{idea}의 세계에서 현상세계에 있는 모든 하나의 근거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합니다. (132-133)
“자, 파르메니데스가 이야기한 하나로 있는 것은 우리의 사고로 파악할 수 없다는 점에서 헤겔이 논리학에서 이야기한 그대로 아예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현상 세계에 있는 이것저것, 우리가 오관으로 파악하는 삼라만상을 미망의 세계로, 백일몽으로 돌려 버리지 않으려면, 이것들을 있는 것과 닮은 것, 있는 것과 비슷한 것으로 규정할 수 있어야 하는데, 보다시피 현상세계에서는 하나를 찾을 수 없다. ...” (133)
“...그러니까 저마다 고유명사로 우리의 감각 대상이 되는 시간과 공간 속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 삼각형, 저 삼각형, 이 소나무, 저 소나무는 시간과 공간을 벗어나 형상의 세계에 하나로 있는 삼각형 바로 그것, 소나무 바로 그것과 같거나 닮았다는 뜻에서 삼각형, 소나무라는 일반명사로 추상[기호화]될 수 있고 이렇게 해서 최초의 하나가 나타나면 이 삼각형 저 삼각형 이 소나무 저 소나무는 특정한 크기와 자리와 변화된 모습에 아랑곳 없이 감각적인 특질을 벗어나 하나씩 헤아릴 수 있는 것, 곧 여럿속의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 이것이 현상 세계를 구제하려는 플라톤의 전략을 저 나름으로 엉성하게나마 재구성해 본 것입니다. (134)
현상세계를 구제하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전략은 스승인 플라톤의 전략과 조금 달랐지요. (134)
이 현상 세계를 보는 관점은 둘이다. 없는 것, 여럿, 질료, 가능태쪽으로 시선을 집중하면 감각과 연관된 고유명사의 세계가 펼쳐지고, 있는 것, 하나, 형상, 현실태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이성과 연관된 일반명사의 세계가 열린다. (135)
신플라톤주의자로 알려진 플로티노스의 현상세계 구제 방법론 (135)...
그림 18: 이 그림에서 보면 ... [동심원으로 중앙의 초점이 ①이고 이를 둘러싼 원들이 ② ③ ④ ⑤ 이며 바깥이 ⑥이다.](137)
①-하나(있음, 있는 것, hen), [중심점]
②-생각(정신, nous),
③-생명(영혼, psyche),
④-자연(생성, physis),
⑤-질료(없는 것= 비존재, hyle)
⑥-아예 없음(허무, ouk, 아예 없는 것) [바깥] (138)
그림20 [플라톤의 우주는 바깥에서 안으로, 위의 플로티노스의 우주와 역행이다.]
①-있는 것(형상, 제작자), [바깥
②-정신(nous),
③-생명(psyche),
④-몸(soma),
⑤-흔적(ikne)
⑥-없는 것(아예 없는 것이 아닌 것) [중심점] (138)
“하나이신 있는 것이 생각을 낳고, 생각이 삶을 낳고, 삶이 자연을 낳고, 자연이 질료를 낳았습니다. 파르메니데스 옹 말씀 그대로 하나이신 있는 것은 가득 차서 빠진 것이 하나도 없는 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은 하나에서 나왔고, 그 때문에 늘 하나를 지향하지만, 생각속에는 빠진 것이 있습니다. 제 아버지가 신을 ‘생각의 생각’이라고 규정하셨을대 앞생각{noesis}과 뒷생각{noeseos}은 같은 것이겠습니까, 다른 것이겠습니까? 저더러 말하라 하면 저는 다른 것이라고 대답하겠습니다. 그러면 앞생각과 뒷생각사이에는 틈이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대체 이 틈은 어디에서 생겨난 것입니까? 틈은 빈 데를 뜻합니다. 무엇인가 빠져있을 때 빈틈이 생깁니다. 틈이 있으면 하나로 있던 것이 둘로 갈라집니다. ...”(146) - [플로티노스의 생성과 변화의 과정을 신학에 적용한 것이리라.]
감각을 징검다리로 삼는 보통 사람의 생각에서부터 고도로 추상화한 사유에 이르기까지, 언어학자[소쉬르]가 찾는 음소{phoneme}나 형태소{meorpheme}에서 생물학자가 찾는 생명의 단위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각이 하나를 찾기에 그처럼이나 애를 쓰는 까닭은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를 찾지 못하면 생각은 생각이기를 그치지요. 하나를 읽은 생각은 의식 불명 상태에 빠지니까요. (147)
‘태초에 있는 것밖에 없는 것도 있었다.’ / ‘없는 것은 하나인 있는 것을 둘러싸고 있었다.’ / ‘하나의 힘이 넘쳐흘러 없는 것을 밀어내고 둘레에 생각의 고리를 만들었는데 이 생각의 고리는 하나와 맞닿아 있어서 늘 하나를 지향한다. 이 하나이자 여럿인 생각의 고리에서 최초로 운동 가능성이 나타났다.’ (149) - [다시 파르메니데스로 돌아가지 않아야 할 것이다. 생명은 있는(운동, 지속) 것에서 나온다. 괴테도 태초에 ‘운동’이 있다고 파우스트 폄에서 고민했다.] - [형님의 결정적 오류, 있는 것이 있고, 그리고 운동가능성이 나온다고 보았다. 벩송은 운동이 있고, 운동하지 않은 상태를 생각하고 그것을 있음(정지)라고 불렀다고 생각한다. 있는 것이 밖에 무엇인가가 있다는 생각은 사유의 추상적 추론에서만 가능하다. 그게 발견된 것은 1880년대 파라독사에서 현존의 이중성과 다중성 때문이었다. 그런데 나로서는 나가르주나 이래로 인식론에서 선승들이 추론에서 이분법이 있으나 그것이 허상이라고 불이(不二)라고 하면서 추론의 최상이 하나이지만 하나 밖에 무를 만들지 않는다. 무를 만들면 그게 허상이 되기에 ‘불이’라고 하면서 ‘공즉시색’이라 할 것이고 이를 실행하는 것이 먼저(삶이 먼저)라고 하여 대승의 기반을 만들었을 것이다.]
당사자들은 인정하려 들지 않을지 모르지만 제 생각에 플로티노스는 서양 중세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모든 위대한 신학자와 철학자들에게 숨은 영감의 원천이었습니다. 플로티노스의 제자인 포르피리오스(234-305)뿐만 아니라 아우구스티누스(354-430)도 토마스 아퀴나스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스피노자도 헤겔도 벩송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50) - [들뢰즈의 표현에 따르면 플라톤도 플로티노스도 이중성(용수의 이중성처럼)이 있다. 하나는 아우구스티누스, 아퀴나스, 스피노자, 헤겔의 방향이 있고, 다른 하나는 포르피리오스 보나벤투라, 라이프니츠, 벩송으로 가는 다른 길이 있다. 즉 한쪽은 수학의 연역적 추론을 언어논리에 맞추고, 다른 하나는 역학의 귀납적 종합을 거쳐서 생물학의 조직화를 통해 조성과 발생의 사실들을 표현한다. (59TMG)]
모순율이 깨지면 동시에 배중률도 공리 구실을 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 이 사태는 다만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식논리학이 설 자리를 잃는 것으로 마무리되지 않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식논리학이 무너지면 파르메니데스가 주춧둘을 놓고 플라톤이 그 위에 기둥을 세운 그리스 존재론의 전통이 한꺼번에 와르르 주저 앉을 위험이 있다는 사실이 눈에 선하지 않습니까? (151) [우리 형님도 기이할 정도로 존재론의 동일률을 선전제로 갖고 있다. 동일성의 사실 자체가 다중성임을 알게 되는 것도 1880년대 이후의 직관론들에 있을 것이이다. - 참조: 브륑슈비크(1869-1944)의 수학 철학의 여러 단계들(1912), 제7권 수학적 지성과 진리(L’intelligence mathématique et la vérité), 제20장 직관의 근대적 용어(La notion modern d’intuition), pp. 427-456.
20장 A단원, https://cafe.daum.net/milletune/S7Vq/34
20장 B단원, https://cafe.daum.net/milletune/S7Vq/35
20장 C단원, https://cafe.daum.net/milletune/S7Vq/36 ]
여섯째 강의: 있는 것이 아니면 없는 것이라고? 천만에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도 있어. 153 [자연론(현상론, 생명론 – 근대론?)]
이 기회에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서양존재론 전통의 맥을 짚어 가면서 ‘존재’와 ‘운동’의 문제를 중심으로부터 파고들자는 욕심을 부렸으니까요. ... 더 이상 ‘모순’을 회피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이제 모순속에 빠져들어 모순을 극복할 길을 찾아야 했습니다. (155) - [동일율에서 설명을 하기 위해 모순율을 불러오는 것이 벩송이 보기에 착오(악순환) 또는 착각이다.]
“선{line}이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옛 퓌타고라스 학파의 전통에 따르면 끝이 두개인 것은 선분이라고 정의됩니다.” / “그렇지요? 그리고 선{line}에서 두 끝사이에는 끝이 없는 것{apeiron}이 들어 있지요? 따라서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점이 두 개있고, 그 두 개의 점이 관계를 맺으면 그 두 점 사이에서 끝이 아닌 것, 곧 끝이 없는 그 무엇, 다시 말해 크기가 생겨나고, 길이로 나타나는 끝이 아닌 그 무엇과 두 개의 끝을 서로 연관시켜 우리는 그것을 선분으로 정의 한다고 말합니다.” (156) - [이 논의는 ①나눗셈과 분수셈의 차이에 대한 오해에서 오는 것 같다.② 점과 점사이를 점들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고, 그 사이의 점들은 각각의 고유성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 현의 점, 하늘의 호의 점이다. 이 점들 사이의 크기(소리, 시간)는 지상의 선분의 크기(헤아리리)와 다르다.]
“원 둘레의 모든 점은 한정된 것{perperasmenon}이므로 이 한정된 것의 집합도 역시 한정된 어떤 것이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러나 원주율을 측정하려는 현새 수학은 아직까지도 한정된 측정치를 내놓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반복되는 수의 계열조차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그래서 초한수라 부른다]. (160) - [한정된(defini)인데, 여기서 제한된(limite)가 되어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원어는 유한한(finite) 이구나. / 또는 (“not infinite, limited”, participle). 말하자면 한정된(defini)로 쓰지 않는다고 한다.]
“앞에서도 잠깐 비쳤지만 그걸 이른바둘이 가지는 모순, 둘에서 생기는 원시 우연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우선 모순의 측면을 적극적인 것으로 원시 우연의 측면을 소극적인 것으로 나누어 놓고 생각해 봅시다. (161) - [[박홍규: [아리스토텔레스 자연학 1권 191 에서 “우발적으로”(par accident, kata sumbebēkos)이라 쓰고, 2권 4장 195에서 “행운과 우연”(he tukhē kai to automaton)이란 개념을 쓴다. (46RMA)] // <<그리고 바로 그곳[idea]에서만, 본래 명사로서 성립할 수 있는 자기 동일적(identical)인 형상이 드러날 수 있고, 나머지는 그러한 개체에 달라붙어(symbebēkos) 있어. 달라붙어 있는 것[색깔]은 변할 수 있어. .. 그걸[색깔] <symbebēkota(우연적 속성)>이라고 해. <symbebēkota>란 무엇이냐? 복잡해. <같이 발을 묶고 함께 걸어간다>는 뜻이야. (49) - “고별강연(1984)”>>]]
“그러니까 선생님 말씀에 따르면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흔히 있는 것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엇인 것, 다시 말해 규정할 수 있는 어떤 것이고, 없는 것이라고 부르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 다시 말해 어떤 방식으로도 규정하지 않는 어떤 것이라는 이야기이지요?” “그렇지요” (163) - [일상이란 사물들의 세계를 의미한다. 아무것도 아닌 것: 관심에 없는 것이된다.]
“그렇다면 없는 것은 빠진 것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 “맞습니다. 없는 것이 갖는 특성 가운데 두드러지는 것 하나가 바로 빠진 것, 결핍이지요” // “그것뿐만이 아니지요, 빠진 것이 있다는 말은 있을 것이 없다함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그리고 있을 것은 반드시 과거에 있었던 것만을 가리키거나 지금 있는 것만을 가리키지는 않습니다. 과거도 없었고, 현재에도 없지만 머지 않아 있게 될것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 (163)
앞에서 여러 차례 밝혔듯이 있음이나 없음은 우리의 사유공간 속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지 있음이나 없음을 규정할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있음이나 없음을 두고 우리는 있다, 없다는 말도 할 수 없습니다. (164) - [사유의 존재는 사물의 현존이 아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여럿과 운동속에서는 있는 것도 없는 것도 모두 상대적 규정일 뿐이고, 있는 것이 없는 것과 다르지 않으며 없는 것이 있는 것과 다를 바도 없으며, 있는 것이 없는 것이요 없는 것이 있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는 극단의 가능성까지도 인정할 수 있겠지요. 불교의 경전의 하나인 “반야심경”에 나오는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 시색(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이라는 말도 그런 뜻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불교식으로 이야기하자면 모든 것이 모든 것과 관계를 맺어 순간순간 바뀌는 이 연기(緣起)의 세계에서 ‘늘 머무는 것{常住상주}’은 하나도 없고 모든 것이 덧없이{無常무상} 생겨났다가 없어졌다 하겠지요. (165-166)
따지고 보면 공간도 시간도 관계의 이름입니다. 공간이라는 관계의 그물 속에서 질(quality)은 저마다 따로 떨어져서 고정된 모습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있는것이라고 부르는 것은 공간 관계 안에서 흩어진 모습으로 드러나는 질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러나 시간이라는 관계의 그물 속에서 질들이 서로 엉켜 있습니다. 이를테면 앞에서도 예를 들었듯이 하나의 기타 줄에는 무한히 많은 소리들이 한데 엉켜서 이어진 음의 계열을 이루는데, 30센티미터의 기타 줄 안에 엉킨 채로 들어있는 저마다 다른 이 소리들의 무한한 계열을 어떤 무모한 사람이 하나하나 따로 떼어 내어 공간 속에 늘어놓으려고 든다고 칩시다. (167) - [천문과 소리의 질적 운동: 소리의 조율과 조성은 수와 원자와 다른 것이다.]
있는 것이 없는 것으로, 또 없는 것이 있는 것으로 바뀌지 않는 세계에는 참된 변화와 운동이 없습니다. 우주 안에 있는 이러저러한 것들은 바뀔 수 있으나 우주는 바뀌지 않습니다.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란 이러한 세계관의 반영입니다. 우주는 있는 것을 대표하는 하나, 곧 영원불변한 하나의 단위로 설정되는 것입니다. ... 이 우주는 하나의 세계, 하나님의 세계입니다. 그러나 그 우주는 그 사람들의 우주고 당신들의 우주입니다. 내 우주에는 있는 것도 없고, 없는 것도 없습니다. 거꾸로 말해도 상관없습니다. 내 우주에는 있는 것도 있고없는 것도 있습니다. 표현은 다르지만 마찬가지 말입니다. (168)
아시다시피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은 살아있는 시간(참된 운동)이 아니라 의식 속에 고정된(매장된) 시간 의식입니다. 이 점에서는 그 전통을 이어 받은 후설(Husserl)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이론에서 살아있는 움직이는 것은 모든 살아 움지이는 것을 움직이지 못하게 핀으로 고정시키는 의식일 뿐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과거를 이미 없는 것으로 미래를 아직 없는 것으로 못 박습니다. (170) - [나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천국이라는 움직이지 않는 삶을 먼저 염두에 두었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하였다고 본다. 바울부터 하늘나라라는 허구를 실재한다로 만들었다. 플라톤은 하늘을 허구가 아니라 질적운동을 하는 영원이라 보았기에 실재한다고 보았다. (59UKB)]
‘너는 지금 불가능한 일을 시도하려 하고 있다. 사유와 추론이 이루어지는 의식 공간에 한 발짝만 들어서도 의식의 칼날 아래 토막 나고 산산이 저며져서 형체조차 찾을 길 없는 것을 제물로 삼 네 이론을 정당화하려고 하고 있다니, 바로 이런 오만을 경계 하여 옛날 불가(佛家)에서 한 말이 있지 않더냐. 개구즉착(開口卽錯),입만 벙긋해도 틀린다. 차라리 입을 다물려무나.’ (171) - [개구즉착은 모순(삶과 죽음)이기 때문에 입 닫아라라기 보다, 이중화의 길이 서로 대립되거나 반대되기 때문인데, 앞으로 가다가 거꾸로 가야 하거나, 또는 준다고 했다가 받아가는 경우일 것이다.]
우리는 앞에서 파르메니데스로부터 시작된 서구 철학의 오랜 전통을 짐짓 받아들여 과거는 이미 없는 것으로 미래는 아직 없는 것으로 쳤습니다. (172) - [있다 없다의 표현의 착오일 것이다. 이다 아니다의 지시어가 공통감각의 항목(용어)이고 있다 없다는 관심의 표출 언어일 것이다.]
우리가 지난날이다, 과거다, 있었던 것이다, 없었던 것이라 이렇게 못박는 그 무엇은 스스로 아직도 흐르고 있고, 또 앞으로도 흐를 것이지만 우리 의식은 그것을 고정시켜 완고하게 기억 속에 가두고자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기억에서 벗어나 끊임없이 요동치고 반란을 일으키는 과거의 모습을 직관하는 힘을 점점 잃어가고 있습니다. 과거는 추억과 반성의 영역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미 그렇게 되어 어쩔 수 없는 그런 것이 아니고 스스로 움직여서 현재와 미래의 모습까지도 바꾸어 낼 힘을 지닌 살아 생동하는 그 무엇입니다. (174) - [그 무엇은 살아 생동하는 그 무엇, 이것은 자율적이고 자발적으로 드러낸다. 그것을 기호로 삼는 것이 사건이다.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건(다곱성)으로부터 다음측정을 하는 것이다.]
내가 무던히도 골려 주었던 초등 동창이야. 이말 속에서, 그리고 그 말을 하는 우리의 의식 속에서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자연스럽게 넘나듭니다. 그런데 이런 일은 우리의 우식 속에서만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유전정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생명체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과거입니다. 살아 움직이는 미래입니다. (174-175) - [지구 속에 마그마가 움직이고 있듯이, 물체안에는 충력(impeto)가 있고, 생명체 속에는 도약(elan)이 있다.]
그 학생은 못내 불만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않았지만, 저는 그 학생에세 ‘자네의 그 표정을 만드는 힘도 자네의 과거일세’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마지막 문단, 175) - [삶의 노력이 그 힘 그 모습을 만든다.]
일곱 째 강의: ‘있는 것’보다 ‘있을 것’이, ‘없는 것’보다 ‘없을 것’이 더 앞선다. 따라서 ‘당파성’이 ‘객관성’에 앞선다. 177 [(사회론, 변역(變易)론)]
지난번 말씀드렸던 국립대학 대학원 교환 교수 노릇을 끝으로 저는 강단을 떠났습니다. 제가 몸담고 있던 학교에 사표를 내고 서해안에 있는 조그마한 시골 동네 산자락에 묵어가는 밭을 사서 농사를 직기 시작한 것입니다. (179)
그러나 이러한 지속이나 변화가 미래의 영역, 곧 있을 것과 없을 것과 관계를 맺으면 사실 판단은 가치 판단으로 바뀌는 계를 맞습니다. ... 이를테면 있었던 것이 없다고 할 때 이 변화는 무엇인가 빠져있다는 결핍을 나타나 수도 있고 군더더기가 없어졌다는 뜻에서 평형을 나타낼 수도 있고 이러한 관계의 변화를 낳을 수 있는 여러 차원(현실, 심리, 판단 …)의 달라진사태를 확인할 수 있겠지요. 없었던 것이 있다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180)
[학생이] 강의 발표 요지를 분명히 책가방 안에 넣고 왔는데 찾아보니 없더라고요. ‘기분이 안 좋다’ 이것도가치판단이 아닙니까? (180)
그러나 이러한 모든 가치 판단은 이제부터 말하려는 미래의 영역, 곧 있을 것과 없을 것의 관계 속에서 생겨납니다. 우리는 과거의 존재를 있었던 것으로, 현재의 존재를 있는 것으로, 미래의 존재를 있을 것으로 나타냅니다. 또 과거의 비존재를 없었던 것으로 현재의 비존재를 없는 것으로 미래의 비존재를 없을 것으로 나타냅니다. (181) - [‘것’이라는 표현은 기호화의 방식이며, 책이다또는 책이 아니다(지시체)와 다른 표현이고, 있을 수나 없을 수, 또는 ‘있을 수 있을’이나 ‘없을 수도 있을’과도 다른 표현이다(여기서 수를 가능성으로 읽지 말고, 있는 방식 또는 표출로 읽어보시라. 사실들 속에서 관계 방식으로 현존과 양태의 차이가 보일 것이다).]
이미 꺼낸 말이니까 먼저 사실 판단에서 가치 판단으로 전환하는데 아직 없는 것으로 규정된 미래가 어떤 구실을 하느냐에 대한 설명을 마저 하기로 합시다. (183)
다만 앞에서 우리가 살펴본 서른 여섯 개의 판단 형식이 모두 있음과 없음에 연관된 이른바존재 판단인데, 여기에는 사실 판단도 있고, 가치 판단도 있고, 헤겔이 말하는 긍정(임)과 부정(아님), 칸트가 이야기하는 여러 판단 형식들이 빠짐없이 대응한다는 것만 눈여겨보면 뒤겠습니다. / 말하자면 우리는 지금까지 과거-과거, 과거-현재, 과거-미래, [/] 현재-과거, 현재-현재, 현재-미래, [/] 미래-과거, 미래 현재, 미래-미래라는 세 가닥으로 꼬인 세 개의 밧줄이 다시 하나로 꼬여 역동적으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지속과 변화의 흐름 속으로 우리를 끌어들이고 잇어서, 현재에서 과거로, 현재에서 미래로, 또 과거에서 현재로, 과헉에서 미래로, 그 뿐만 아니라 미래에서 과거로, 미래에서 현재로 넘나드는 통로로 안내되는 길목에 서 있음을 이 서른여섯개의 판단 형식을 통해서 살펴보았던 셈이다. (192-193) - [헤겔의 3가지를 하나로 모으고 또 세가지를 하나로 모으는 백과전서에서 구성한 방식을 시간에다 적용한 것같다. 이러한 구축은 실재성이 아니라 구도상으로 상징들(symboles, signes)의 결합방식으로 보인다. ] - [[각 판단이 12개로 하여 세 판단으로 36판단들 만들었다. 주역은 판단들 8개를 중첩하여 64괘를 만들었던 것이고 기호화(signification)에 속한다.]]
.. .. 우리가 지속과 변화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현상계의 법칙과 의식의 법칙을 문제 삼는 것은 그러한 문제들이 모두 살기 좋은 세상 만들기와 잇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여러분들에게 익숙한 개념의 틀 안에서 이문제들이 어떻게 구체 상황들과 연관을 맺는지 힘이 닿는대로 밝혀 나가도록 합시다.” (193) [현상계(변화)와 의식계(지속)의 이원성은 데카르트로부터 일 것이고, 이로부터 사실들에 대한 자연의 이법을 다루는 방식에는 진위 결정이 첨가될 것이다. 다음에는 인간과 결부된 사건들의 현상에는 가치를 물을 것이다. 지성(오성, 이성)은 데카르트 이래로 원리보다 법칙을 구하려 방법을 찾아나설 것이다.]
그리고 보기를 들어 우리가 몸담고 사는 사회가 좋은 사회냐 나쁜 사회냐를 판가름하려면 있을 것과 없을것의 관점에서 현재 우리 사회에 무엇이 있고, 무엇이 없느냐를 면밀히 살펴야 한다고 했습니다. (194)
있을 것만 있고없을 것은 없는사회는 그대로 온전히 지속되어야 합니다. 어떤 변화도 마다하는 극단의 보수주의가 이런 사회에서는 가장 바른 노선입니다. 있을 것이 많이 있고없을 것이 많이 없는사회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지속에 더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 (195) - [사회는 제도 또는 체제와 더불어 논의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 사회가 좋은 사회가 되기 위해서 있을 것이 무엇이고, 없을 것이 무엇이냐, 그것이 실제로 있느냐, 없느냐, 있으면얼마나 있고, 없으면얼마나 없느냐를 꼼꼼히 살피지 않고 보수주의가 좋으니 진보주의가 좋으니, 수구니, 개량이니, 혁신이니, 혁명이 하고 말로만 내세우는 것은 다 부질없는 짓이지요. (195) - [대상에 대해 이다 없다의 경우와 현실 세계에서 있고 없고의 현상의 경우, 삶에서 필요와 충족과 연관된 사건들에서 있어야 또는 없어야 하는 상황들의 경우가 다르다. 셋째의 경우에서 ‘얼마나’라는 계량적 제도인지 ‘조화로운’이라는 질적인 것인지를 다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침펜치의 권력제도와 보노보의 조화세상이 다르다. ]
떡갈나무가 꼭같은 형태의 잎을 자동 시계처럼 찍어내는 데는 떡갈나무 나름의 삶의 경제[아낌]가 작용합니다. 나중에 더 자세히 이야기할 자리가 있겠지만[다음 책에서] 미리 귀띔해두는 것도 나쁠 것 같지는 않군요. 만일에 떡갈나무가 같은잎만 지속ㆍ반복해서 찍어내지 않고 순간순간 다른형태의 잎을 피워낸다고 칩시다.(여기에서 내가 같은이라는 말과 다른이라는 말을 강조하는 데에는 뜻이 있습니다.) 이것은 요즈음 우리 경제계에서 유행하는 이른바 ‘다품종 소량화 정책’에 해당할 텐데, 왜 이런 일이 한 개체나 한 종의 단위에서 생존전략으로 채택되지 않느냐 하는 데는 큰 까닭이 있습니다. 그 까닭은 나중에 우리가 흔히 양, 질, 척도라고 부르는 같음과 다름, 저됨(동일성)과 남됨(차별성), 이어짐과 끊어짐, 크기와 모습들을 포괄해서 다룰 때 밝히기로 하고 여기에서는 보수성이 모든 생명체가 살아남기 위해 생명력을 배분하는 방식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는 중요한 특질이라는 것남 이야기하기로 합시다. 인간 의식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보수성도 정치 경제학의 틀 속에서 간단히 해명될 특질이 아니고 물질과 생명의 관계, 생명체 상호 관계까지 포함한 더 큰 틀 속에서만 제대로 밝혀질 수 있습니다. (197)
많은 사람들이 믿는 것과는 달리 생명체에게, 그리고 특히 본능으로 전화한 생체기억에 의존해서 살 길을 찾는 생명체들과는 달리 의식에 주어진 외부 세계의 기억에 의존해서 살길을 찾는 인간에게 가치판단이 사실판단에 앞선다는 것은 이런 사정을 반영합니다. (199) - [의식에 주어진 지각작용에 의존해서 인간은 다음측정을 하면서 산다. 그래서 삶에서 사실(le fait 주어진 것)보다 사건으로(se faisant, [보살로 또는 부처로]) 향한 노력을 한다. 그 노력에 가치라는 개념을 부여하여 욕망이라 한다. 욕망은 스스로를 만들고자하는 노력이라 탐욕 또는 탐만치가 아니다. (59UTE).]
이런 말을 하면 지나치다고 나무랄지 모르지만 사실판단이 가치판단에 앞선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내가 보기에는 모두 하나님이나 부처님 경지에 있거나 삶이 무엇인지, 죽음이 무엇인지 모르는 멍청이들이에요. (200)
어느 시대에 누가 맨 먼저 그 말을 섰는지 모르겠으되, ‘당파성이 객관성에 앞선다’는 말이 새삼스럽게 가슴을 울리더군요. (본문 마지막 문단; 200) [위계질서보다 상부상조가 먼저이고, 비례중항보다 조화중항이 먼저이다. 이런 견해는 공화 추구가 객관과 진리 증명보다 먼저이다. (59UKE)]
# 대담: 상생과 공존의 공동체 꿈꾸는 윤구병 선생/김남두 201-230
# 추천하는 글: 여럿의 저됨과 더불어 하나됨/이정호 231-234
# 윤구병(尹九炳, 1943-): 윤구병이 걸어온길 235-244.
전남 함평, 서울대 철학과,
1943년 2월 24일 전남 함평 밤골에서 윤상인(쉰여섯)과 송순남(마흔둘)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브나로드 운동의 영향을 받은 아버지는 순사가 지키는 가운데 마을 사람들에게 한글을 가르쳤다. 아버지는 김구 선생의 함평지역 독립운동자금 모금책이기도 했다.
1947(다섯) 고구마 밭에서 딴 데 정신이 팔렸다가 (일하는 이의) 쇠스랑에 머리를 찍혔다.
큰형은 양정고보를 졸업하고 철도청에 취직했다. 돈암동 큰형님 집에 있으면서, 촌놈이라 놀리는 서울 아이들을 마구 패서 열아홉살 형수님이 날마다 항의 받았고 1년 뒤 시골로 쫒겨 내려 갔다.
1949(일곱) 둘째 형이 서울 청파초등학교 교원이 되자, 식구들 모두가 서울로 삶터를 옮겼다. 윤구병은 청파 초등학교에 입학 했다. 아버지는 강릉으로 제천으로 다니면서 포목장사를 했다. 똑똑한 지식들을 보면서 아버지는 아들들이 팔도 도지사가 되는 꿈을 꾸기도 했다.
1950(여덟) 청파초등학교 2학년에 한국전쟁이 났다. 서울역 인민위원장을 하던 큰형은 9.28소복 때 북으로 가다가 죽은 것으로 알고 있다. 둘째형, 셋째형도 사회주의 운동을 하다가 죽었다. 넷째형은 고향 집에서 죽었고, 다섯째 형과 여섯째 형은 의용군으로 나갔다가 죽었다. 아버지는 자식들 공부 가르친 것을 두고두고 후회했고 남은 자식들은 농사꾼으로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1951(아홉) 1.4후퇴때 아버지와 세 아들은 인천에서 배를 타고 군산으로, 군산에서 다시 목포로, 목포에서 뱃길로 함평까지 내려갔다. .. 4년 동안 학교에 가지 않고 목포 뒷개로, 무안군 몽탄으로, 목포시 연동으로, 무안군 명산으로, 함평군 송정으로 떠돌아다녔다.
1954(열두살)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고종 사촌형이 학비를 대 준 덕분에 학다리 중앙 초등학교에 3학년에 편입했다.
1955(열세) 작은 아버지가 교장으로 가 있는 명산으로 옮겨 명산 초등학교에 다녔다.
1958(열여섯) 큰 형수가 있는 몽탄으로 옮겼다. 몽탄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응당받아야 할 도지사 상을 정미소 집 아들에게 빼앗기고 졸업식자에 가지 않았다. 이 무렵부터 아버지는 다시 아들에게 공부 욕심을 품기 시작하셨다. - 기차 통학(표 없이 차타기 곡예들)
1959(열읽곱) 약국하는 동네 친구의 다섯 살 위 누나에게 첫사랑을 느꼈다. 누나가 빌려주는 책들을 읽으며 좋은 책과 나쁜 책을 알게 되었다.
1960(열여덟) 도시로 가는 친구 앞에서 마신 막소주 한 사발에 인사불성이 되었고, 톨스토이의 인생독본을 읽고 자살하고 싶은 열망을 접었다.
전국에서 20명 밖에 뽑지 않는 ‘학원 장학회’ 6기로 선발되어 고등학교 학비와 학용품비 걱정을 덜었다. 대학교 등록금과 학비도 장학회에서 대 주었다. [이 장학회가 4.19 혁명에서 주는 것일 것이다.]
중학교 3학년 말 시험 치는 날, 아버지와 학교 선생님게 긴 편지를 남기고 가출했다가 사흘만에 플이 죽어 돌아왔다.
1961(열아홉) 학다리 고등학교에 들어갔다. 호주머니에 소주병 하나 꽂고 오징어 한 마리 뒷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방학때 무전 여행을 했다.
1962(스물) 2학년 여름 방학때 출가할까 싶어서 수덕사에 머물렀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전국 고등학교 학력 경시 대회에 참가할 아이들이 예비시험을 치고... 경희대에 올라와 시험을 보고 전국에서 모여든 학생 가운데 국어 시험에서 2등을 했다. 덕분에 한해 앞당겨 졸업장을 받았다.
1963(스물하나) 서울대학교에 들어갔다. ... 여름 방학때 학원 장학회 장학생 모임에 갔다가 ..공부하기로 마음먹고, 영어, 불어, 독어, 희랍어, 라틴어를 독학으로 공부했다.
1965(스물셋) 나보다 여섯 살 위였던 일곱째 형이 자살했다.
3학년이 되면서 학기중에 군대 가지 않아도 되는 조건 때문에 학생 군사 교육단을 지원했다.
1967(스물다섯) 대학교를 졸업했다. 장교로 복무하기 시작했다.
1969(스물일곱) 큰누밈 집에 머물고 있던 ..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5월말 2년 3개월 군복무를 마치고 제대했다.
유학 준비생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 명색만 무역회사인 곳에 취직해서 여덟달을 동안 일했다.
1970(스물여덟) 철학과 대학원에 입학햇다. ‘우산 장학회’에서 2년동안 한 달에 2만원씩 지원해주기로 해서 걱정없이 공부를 했다.
1972(서른) 대학원을 졸업했다. 박홍규 선생이 육군사관 학교 강사자리를 주선했으나 하숙비와 교통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강의료 때문에 포기했다.
한국 프리태니커 회사에 들어갔다. 1979년까지 일하는 동안 봉급 4만원에 술집 외상값이 20만원이나 되는 때도 있었다. 사외보 <배움나무>를 만들었다.
학원장학회에서 만난 김미혜의 남동생을 데리고 있으면서 공부를 도와줬다. 김미혜가 자신을 꼬이기 위해 동생을 미리 보내 놓은 것이라고 지금도 믿고 있다.
1973(서른하나) 4월 28일 김미혜(스물다섯)와 혼인했다. 나흘뒤 “풍랑에 배 뒤집혀 몰사할까 두렵다”는 핑계로 신부는 버려두고 한국 브리태니커 사장과 흑산도와 홍도로 여행을 다녀왔다.
1974(서른 둘) 2월 13일 첫딸 나래를 얻었다.
1974(서른 넷) 둘째 아이를 가진 아내를 놔 두고 송광사에서 잠깐 동안 행자 생활을 했다.
편지에 찍힌 우체국 소인을 보고 아내가 아이 손을 잡고 찾아왔다. 같이 산을 내려왔다. 12월 6일 아들 누리가 태어났다.
월간 <뿌리깊은나무> 초대 편집장이 되었다.
1978(서른여섯) 기획력이 바닥났다는 이유로 월간 <뿌리깊은나무>를 그만두었다.
1879(서른일곱) 공부 욕심이 남아 있어서 서울대 철학과 대학원 박사과정을 입학했다.
1981(서른아홉) 3월에 충북대 철학과 교수 공채 시럼을 봐서 합격했다.
1982(마흔) 1년동안 교수로 살면서 전두환 독재에 대한 울분을 키웠다. 차라리 막노동을 하고 살겠다는 작정으로 난곡에 방을 얻었다. 지도교수 박홍규 선생의 만류로 교수직을 그만 두지 못했다. 그 뒤 15년 동안 철학교수로 살았다.
전집 <어린이 마을>(웅진출판)을 기획했다. [현 소설가인 김영현(1955-)이 편집책임자였다.]
1983(마흔), 이오덕 선생님의 권유로 대학 선생으로는 처음으로 ‘한국 글쓰기연구회’ 회원이 되었다.
1987(마흔다섯) <배움나무>에 실었던 글을 모아 책 눈먼 뱃길(종로서적)을 펴냈다.
1988(마흔여섯) 어린이에게 줄 좋은 책을 출판하려고 ‘보리기획’을 만들었다.
1989(말흔일곱) 진보적인 소장 철학자들과 함게 ‘한국철학사상연구회’를 만들었다. 처음에 공동대표를 맡았고, 나중에 이사장을 맡게 되었다.
1990(마흔여덟) 한국철학사상연구회에서 계간 <시대와 철학>을 창간했다.
청소년들에게 주는 책 꼭 같은 것보다 다 다른 것이 좋아(푸른나무)를 펴냈다.
보리기획에서 전집 <올챙이 그림책>을 만들었다.
1991(마흔아홉) 보리기획이 출판 등록을 하여 보리출판사가 되었다.
1992(쉰) 책 몸가는데 마음 간다(철학과현실사)를 펴냈다.
장선우 감독의 꼬임으로 영화 ‘화엄경’에 거지 왕초로 잠깐 출연했다. 연기력이 없어서 다음 출연 제의는 받지 못했다.
1993(쉰하나) 책 조그만 내 꿈 하나(보리출판사)를 펴냈다.
1994(쉰둘) 어린이의 생태 감수성을 길러주는 과학 전집 <달행이 과학동화>를 만들었다.
1995(쉰셋) 서울대학교 교환교수로 있으면서 변산에 터를 잡기 시작했다. ... 산살림, 갯살림, 들살림이 두루 가능한 자리를 알아볼 수 있었다. 변산에 자리를 잡고 공동체를 꾸리기 시작했다.
책 실험학교 이야기(보리출판사)를 출판했다.
보리출판사는 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는 월간지 <작은책>을 창간했다.
1996(쉰넷) 충북대학교 철학교수를 그만 두고 완전한 농사꾼으로 살기 시작했다.
1997(쉰다섯) 변산에서 농사를 짓는 동안, 겨울을 나는 산짐승들 이야기를 담은 그림책 우리끼리 가자(보리출판사)와 정겨운 집짐승들을 담은 그림책 심심해서 그랬어(보리출판사)를 펴냈다.
1989(쉰여섯) 변산공동체학교를 열러 중등과정 이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변산 공동체학교 이야기를 담은 잡초는 없다(보리출판사)를 펴냈다.
1999(쉰일곱) 농촌의 봄을 담은 그림책 우리 순이 어디 가니(보리출판사)를 펴냈다.
2000(쉰여덟) 넉넉하고 푸근한 산골 마을의 가을을 담은 그림책 바빠요 바빠(보리출판사)를 펴냈다.
2002(예순) 농사일에 전념하고 싶었지만, <작은책>의 편집 책임을 맡게 되면서 어쩔 수 없이 서울에 자주 올라와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2003(예순하나) 살아온 세월이 행복하고 고마웠다고 돌아보고 있다. ... / 이제는 잘 죽을 준비를 해야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여기까지 있음과 없음(2003)에서 “윤구병이 걸어온 길”(pp. 235-244)에서 발췌.(59UKC)]
(28:10, 59UKE)
# 대담: 상생과 공존의 공동체 꿈꾸는 윤구병 선생/김남두 201-230
윤규병: 날마다 오전은 정보 교육[교과교육: 국어, 철학, 수학, 인문학, 영어, 한문, 사회학, 자연학, 체육, 컴퓨터, 제2외국어, 음악, 풍물], 오후는 살림교육으로 이루어지는 데 살림교육을 노작교육이라고도 하지요. 노작교육은 월요일에는 효소 담그기, 화용일에는 요리, 풍물, 갯벌탐사, 수요일은 목공과 그릇 빚기, 목요일에는 농사일, 금요일에는 가축돌보기이지요. (208-209)
윤구병: 약초나 효소 덕택으로 작년부터는 사정이 나아지고 있습니다. 5년 동안 적자였는데, 작년 말부터 소출과 집필활동을 합해서 8백만 원쯤 흑자로 돌아섰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더 나아질 것이라 믿습니다. (221)
윤구병: 작년[1999] 2월 독일 베를린 근처의 불코프(Wulkov)와 에꼴레아(Ökolea) 생태공동체를 다녀왔듭니다. 그런데 그곳에 가서 물어보니까 마찬가지였어요. 거기에서는 자유 베를린 대학 철학과 교수인 프리츠 빌머(Fritz Vilmer)가 뜻을 같이하는 제자들과 7년 동안 세미나를 했다고 합니다. 공동체에서 발생할 수 있는 온갖 어려움을 이겨 나갈 길을 모색하는 열띤 토론 과정을 거쳐서 베를린 근교로 집단 이주를 하여 함께 생활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그 공동체를 방문해 보니 현재 우리 공동체에 남아 있는 식구 수와 비슷하거나 적거나 그렇습니다. 그동안 들어온 사람들 가운데 스무 명 가운데 한 명 꼴로 남아있다고 하더군요. 왜 그러냐고 하니까 역시 인간관계의 어려움 때문이라고 합디다. (228)
윤구병 하나 재미있는 것은 지난 6년간 하루도 같은 일을 한적이 없다는 거예요. 공자님 말씀하셨던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대학] 곧 날로 새롭고 또 새롭다는 말처럼, 타성에 젖어서 쳇바퀴 돌 듯 하는 삶에서는 조금씩 조금씩 벗어나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을 빼면 지금 가장 행복하게 살고 있는 셈이지요. / 김남두 오랫동안 좋은 말씀 고맙습니다. (마지막 두 문단, 230)
# 추천하는 글: 여럿의 저됨과 더불어 하나됨/이정호 231-234*
“철학은 가장 큰 하나를 보면서 동시에 가장 작은 하나도 놓치지 않고, 모든 하나를 빠짐없이 보려는 학문이다” (232)[원문 85쪽]
“철학하는 사람의 과제는 바로 이 가장 큰 하나인 있는 것과 가장 작은 하나인 그 무엇을 양극단에 두고 이 두끝, 한계 사이에 우주 전체의 삼라만상이 어떻게 배열되는지, 차례로 하나하나 겹쳐서 우주의 전체 구조와 그 구조에 따르는 기능을 밝혀내는 일이다.” (232) [원문 85쪽]
차가울 만큼 냉정하고 치밀한 선생의 논리적 분석이 나에게 종교적 감으로까지 와 닿는 것은, 서 있을 수밖에 없는 ‘하나’가 ‘모순’을 끌어안은 채 오히려 그것을 동력으로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하는 그 지점부터 윤구병 존재론의 진수가 느껴졌기 때문일까. 선생의 혀 차는 소리가 귀를 맴돈자 / 청년 윤구병 선생님의 하나 같은 몸 마음을 빌 뿐이다. (마지막 두 문단, 234) (59UKF)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