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太宗武烈王> ○<太宗武烈王>立. 諱<春秋>, <眞智王>子伊湌<龍春>[一云<龍樹>]之子也.[『唐書』以爲<眞德>之弟, 誤也.] 母, <天明>夫人, <眞平王>女; 妃, <文明>夫人, <舒玄>角湌女也. 王儀表英偉, 幼有濟世志. 事<眞德>, 位歷伊湌, <唐>帝授以特進. 及<眞德>薨, 群臣請<閼川>伊湌攝政. <閼川>固讓曰: “臣老矣, 無德行可稱. 今之德望崇重, 莫若<春秋>公, 實可謂濟世英傑矣.” 遂奉爲王, <春秋>三讓, 不得已而就位. 태종 무열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이름은 춘추이며, 진지왕의 아들인 이찬 용춘[용수라고도 한다.]의 아들이다.[「당서」에는 진덕왕의 아우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잘못이다.] 어머니는 천명부인이니 진평왕의 딸이다. 왕비는 문명부인이며 각찬 서현의 딸이다. 왕은 풍모가 영명하고 당당하였으며, 어려서부터 정치에 뜻을 두었다. 그는 진덕왕을 섬겨 이찬의 직위를 지냈으며, 당 나라 황제가 특진을 제수하였다. 진덕왕이 사망하자 여러 신하들이 이찬 알천에게 섭정할 것을 요청하였다. 알천은 굳이 사양하며 “나는 늙었고 이렇다 할만한 덕행도 없다. 지금 덕망이 두텁기로는 춘추공 만한 이가 없다. 그는 실로 세상을 다스릴 영걸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마침내 그를 받들어 왕으로 삼으려 하니 춘추가 세 번이나 사양하다가 마지 못하여 왕위에 올랐다. ○元年, 夏四月, 追封{尊}王考爲<文興大王>, 母爲<文貞>太后. 大赦. 五月, 命理方府令<良首>等, 詳酌律令, 修定理方府格六十餘條. <唐>遣使持節備禮, 冊命爲開府儀同三司<新羅>王. 王遣使入<唐>表謝. 원년 여름 4월, 작고한 왕의 부친을 문흥대왕, 어머니를 문정 태후로 추증하였다. 죄수들에게 대사령을 내렸다. 5월, 이방부령 양수 등으로 하여금 법령을 상세히 검토하게 하여 이방부의 법령 60여 조를 정리 보완하였다. 당 나라에서 지절사를 보내와 예절을 갖추어 왕을 “개부의동삼사 신라왕”으로 책봉하였다. 왕이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감사의 뜻을 표하였다. ○二年, 春正月, 拜伊湌<金剛>爲上大等, 波珍湌<文忠>爲中侍. <高句麗>與<百濟>․<靺鞨>連兵, 侵軼我北境, 取三十三城. 王遣使入<唐>求援, 三月, <唐>遣<營州>都督<程名振>․左右衛中郞將<蘇定方>, 發兵擊<高句麗>. 立元子<法敏>爲太子, 庶子<文王{文汪}>爲伊湌, <老且{老旦}>爲海湌, <仁泰>爲角湌, <智鏡>․<愷元>各爲伊湌. 冬十月, <牛首州>獻白鹿. <屈弗郡>進白猪, 一首二身八足. 王女<智照>下嫁大角湌<庾信>. 立鼓樓<月城>內. 2년 봄 정월, 이찬 금강을 상대등으로, 파진찬 문충을 중시로 임명하였다. 고구려가 백제 및 말갈과 군사를 연합하여, 우리 북쪽 국경을 침범하여 33개소의 성을 빼앗았다. 왕은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는데, 3월에 당 나라가 영주 도독 정명진과 좌우위 중랑장 소정방을 파견하여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맏아들 법민을 태자로 세우고, 서자인 문왕을 이찬, 노차를 해찬, 인태를 각찬, 지경과 개원을 각각 이찬으로 임명하였다. 겨울 10월, 우수주에서 흰 사슴을 바쳤다. 굴불군에서 흰 돼지를 진상하였다. 그 돼지의 머리는 하나, 몸체는 둘, 발이 여덟 개였다. 왕의 딸 지조가 대각찬 유신에게 시집갔다. 월성 안에 고루를 세웠다. ○三年, <金仁問>自<唐>歸, 遂任軍主, 監築<獐山城>. 秋七月, 遣子右{左}武衛將軍<文王{文汪}>, 朝<唐>. 3년, 김 인문이 당 나라에서 돌아오자, 그를 군주로 임명하여 장산성의 축조 공사를 감독하게 하였다. 가을 7월, 왕의 아들 우무위 장군 문왕으로 하여금 당 나라에 조회하게 하였다. ○四年, 秋七月, <一善郡>大水, 溺死者三百餘人. 東<吐含山>地燃, 三年而滅. <興輪寺>門自壞. □□□北巖崩碎爲米, 食之如陳倉米. 4년 가을 7월, 일선군에 큰 홍수가 났다. 이 홍수로 3백여 명이 익사하였다. 동쪽 토함산에서 땅에 불이 났다. 그 불은 3년이 지난 후에야 꺼졌다. 흥륜사의 대문이 저절로 무너졌다. (원문 3자 결자) 북쪽의 바위가 산산이 무너져 쌀로 변했다. 그 쌀을 먹어 보니 창고의 묵은 쌀과 같았다. ○五年, 春正月, 中侍<文忠>改爲伊湌, <文王{文汪}>爲中侍. 三月, 王以<何瑟羅>地連<靺鞨>, 人不能安, 罷京爲州, 置都督以鎭之. 又以<悉直>爲<北鎭>. 5년 봄 정월, 중시 문충의 벼슬을 이찬으로 바꾸고, 문왕을 중시로 임명하였다. 3월, 왕이, 하슬라는 지역적으로 말갈과 연이어 있으므로 백성들이 편안히 지낼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따라 경을 폐지하여 주로 만들고, 도독을 두어 그 곳을 수비하게 하였다. 또한 실직을 북진으로 만들었다. ○六年, 夏四月, <百濟>頻犯境, 王將伐之, 遣使入<唐>乞師. 秋八月, 以阿湌<眞珠>爲兵部令. 九月, <何瑟羅>州進白鳥. <公州><基郡江>中大魚出死, 長百尺. 食者死. 冬十月, 王坐朝, 以請兵於<唐>, 不報, 憂形於色. 忽有人於王前, 若先臣<長春>․<罷郞>者. 言曰: “臣雖枯骨, 猶有報國之心, 昨到大<唐>. 認得皇帝命大將軍<蘇定方>等, 領兵以來年五月, 來伐<百濟>. 以大王勤佇如此, 故玆控告.” 言畢而滅. 王大驚異之, 厚賞兩家子孫, 仍命所司, 創<漢山州><莊義寺>, 以資冥福. 6년 여름 4월, 백제가 자주 국경을 침범하므로, 왕이 백제를 공격하기 위하여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군사를 요청하였다. 가을 8월, 아찬 진주를 병부령에 임명하였다. 9월, 하슬라주에서 흰 새를 진상하였다. 공주 기군강에서 큰 물고기가 육지로 올라와 죽었다. 그 고기의 길이가 1백 자였는데, 이를 먹은 사람이 생명을 잃었다. 겨울 10월, 왕이 조정에 앉아서, 당 나라에 파병을 요청한 데 대한 회보가 없음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 때 갑자기 한 사람이 왕 앞에 나타났다. 그는 선대의 신하 장춘과 파랑 같아 보였다. 그는 “제가 비록 몸은 백골로 변하였으나 나라에 보답할 마음이 있기에, 어제 당 나라에 갔었습니다. 그 곳에서 당 황제가 대장군 소정방 등에게 내년 5월에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백제를 치도록 명령한 것을 알았습니다. 대왕께서 이토록 애타게 기다리고 계시므로 미리 말씀드립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말을 마치자 사라졌다. 왕이 크게 놀라고 이상히 여겨, 두 집안 자손들에게 후하게 상을 주고, 곧 해당 관청으로 하여금 한산주에 장의사를 지어 그들의 명복을 빌게 하였다. ○七年, 春正月, 上大等<金剛>卒. 拜伊湌<金庾信>爲上大等. 三月, <唐><高宗>命左武衛大將軍<蘇定方>, 爲<神丘>道行軍大摠管, <金仁問>爲副大摠管, 帥左驍衛將軍<劉伯英>等水陸十三萬□{軍}, □□{以伐}□濟{百濟}>, 勅王爲嵎夷道行軍摠管, 何{使}將兵, □□□□{爲之聲援}. 夏五月二十六日, 王與<庾信>․<眞珠>․<天存>等, 領兵出京, 六月十八日, 次<南川停>. <定方>發自<萊州>, 舳艣千里, 隨流東下. 二十一日, 王遣太子<法敏>, 領兵船一百艘, 迎<定方>於<德物島>. <定方>謂<法敏>曰: “吾欲以七月十日至<百濟>南, 與大王兵會, 屠破<義慈>都城.” <法敏>曰: “大王立待大軍, 如聞大將軍來, 必蓐食而至.” 方喜, 還遣<法敏>徵<新羅>兵馬. <法敏>至, 言<定方>軍勢甚盛, 王喜不自勝. 又命太子與大將軍<庾信>․將軍<品日>․<欽春>[春或作純]等, 率精兵五萬, 應之, 王次<今突城>. 七月九日, <庾信>等, 進軍於<黃山>之原, <百濟>將軍<堦伯{階伯}>, 擁兵而至, 先據嶮, 設三營以待. <庾信>等, 分軍爲三道, 四戰不利, 士卒力竭. 將軍<欽純{欽春}>謂子<盤屈>曰: “爲臣莫若忠, 爲子莫若孝, 見危致命, 忠孝兩全.” <盤屈>曰: “謹聞命矣.” 乃入陣, 力戰死. 左將軍<品日>, 喚子<官狀>[一云<官昌>.], 立於馬前, 指諸將曰: “吾兒年纔十六, 志氣頗勇, 今日之役, 能爲三軍標的乎?” □□{<官狀/官昌>}曰: “唯!” 以甲馬單槍, 徑赴敵陣, 爲賊所□{擒}, □□{生致}<□伯{階伯}>. <堦伯{階伯}>俾脫冑, 愛其少且勇, 不忍加害, 乃嘆曰: “<新羅>不可敵也, 少年尙如此, 況壯士乎!” 乃許生還. <官狀>告父曰: “吾入敵中, 不能斬將搴旗者, 非畏死也.” 言訖, 以手掬井水飮之, 更向敵陣疾鬪. <堦伯{階伯}>擒斬首, 繫馬鞍以送之. <品日>執其首, 流血濕袂. 曰: “吾兒面目如生. 能死於王事, 幸矣!” 三軍見之, 慷慨有死志, 鼓噪進擊, <百濟>衆大敗, <堦伯{階伯}>死之, 虜佐平<忠常>․<常永>等二十餘人. 是日, <定方>與副摠管<金仁問>等, 到<伎伐浦>, 遇<百濟>兵, 逆擊大敗之. <庾信>等至<唐>營, <定方>以<庾信>等後期, 將斬<新羅>督軍<金文穎>[或作<永>.]於軍門. <庾信>言於衆曰: “大將軍不見<黃山>之役, 將以後期爲罪. 吾不能無罪而受辱, 必先與<唐>軍決戰, 然後破<百濟>.” 乃杖鉞軍門, 怒髮如植, 其腰間寶劒, 自躍出鞘. <定方>右將<董寶亮>躡足曰: “<新羅>兵將有變也.” <定方>乃釋<文穎>之罪. <百濟>王子使佐平<覺伽>, 移書於<唐>將軍, 哀乞退兵. 十二日, <唐․羅>軍□□□□{圍}<義慈>都城, 進於<所夫里>之原. <定方>有所□□□{忌不能}前, <庾信>說之, 二軍勇敢, 四道齊振. <百濟>王子又使上佐平致𩟀餼豊腆, <定方>却之. 王庶子<躬>與佐平六人謂{詣}前乞罪, 又揮之. 十三日, <義慈>率左右, 夜遁走, 保<熊津城>, <義慈>子<隆>與大佐平<千福>等, 出降. <法敏>跪<隆>於馬前, 唾面罵曰: “向者, 汝父枉殺我妹, 埋之獄中, 使我二十年間, 痛心疾首, 今日汝命在吾手中!” <隆>伏地無言. 十八日, <義慈>率太子及<熊津方>領軍等, 自<熊津城>來降. 王聞<義慈>降, 二十九日, 自<今突城>至<所夫里城>, 遣弟監<天福>, 露布於大<唐>. 八月二日, 大置酒勞將土{士}, 王與<定方>及諸將, 坐於堂上, 坐<義慈>及子<隆>於堂下, 或使<義慈>行酒, <百濟>佐平等群臣莫不鳴咽流涕. 是日捕斬<毛尺>. <毛尺>本<新羅>人, 亡入<百濟>, 與<大耶城><黔日>同謀陷城, 故斬之. 又捉<黔日>, 數曰: “汝在<大耶城>, 與<毛尺>謀, 引<百濟>之兵, 燒亡倉庫, 令一城乏食致敗, 罪一也. 逼殺<品釋>夫妻, 罪二也. 與<百濟>來攻本國, 罪三也.” 以□{四}支解, 投其尸於江水. <百濟>□{餘}賊□{據}<南岑>․<貞峴>□□□城, 又佐平<正武>聚衆庄<豆尸原>嶽, 抄掠<唐>․<羅>人. 二十六日, 攻<任存>大柵, 兵多地嶮, 不能克, 但攻破小柵. 九月三日, 郞將<劉仁願>, 以兵一萬人, 留鎭<泗沘城>, 王子<仁泰>與沙湌<日原>․級湌<吉那>, 以兵七千副之. <定方>以<百濟>王及王族臣寮九十三人, 百姓一萬二千人, 自<泗沘>乘船廻<唐> . <金仁問>與沙湌<儒敦>․大奈麻<中知>等偕行. 二十三日, <百濟>餘賊{兵}入<泗沘>, 謀掠生降人, 留守<仁願>出<唐>․<羅>人, 擊走之. 賊退上<泗沘>南嶺, 竪四五柵, 屯聚伺隙, 抄掠城邑, <百濟>人叛而應者二十餘城. <唐>皇帝遣左衛中郞將<王文度>, 爲<熊津>都督. 二十八日, 至<三年山城>, 傳詔, <文度>面東立, 大王面西立. 錫命後, <文度>欲以宣物授王, 忽疾作便死. 從者攝位畢事. 十月九日, 王率太子及諸軍攻<尒禮城>. 十八日, 取其城置官守, <百濟>二十餘城震懼, 皆降. 三十日, 攻<泗沘>南嶺軍柵, 斬首一千五百人. 十一月一日, <高句麗>侵攻<七重城>, 軍□{軍主}<匹夫>死之. 五日, 王行渡<雞灘>攻<王興寺><岑城>, 七日乃克, 斬首七百人. 二十二日, 王來自<百濟>, 論功, 以<罽衿>卒<宣服>爲級湌, 軍師<豆迭>爲高□{高干}. 戰死<儒史知>․<未知活>․<寶弘伊>․<屑儒>等四人, 許職有差. <百濟>人員幷量才任用, 佐平<忠常>․<常永>, 達率<自簡>授位一吉湌, 充職摠管; 恩率<武守>授位大奈麻, 充職大監; 恩率<仁守>授位大奈麻, 充職弟監. 7년 봄 정월, 상대등 금강이 사망하였다. 이에 따라 이찬 김 유신을 상대등에 임명하였다. 3월, 당 고종이 좌무위 대장군 소정방을 신구도행군대총관으로 삼고, 김 인문을 부대총관으로 삼아, 좌효위 장군 유백영 등 수륙군 13만 명을 거느리고 백제를 치게 하였다. 이와 동시에 칙명을 내려 왕을 우이도행군총관으로 삼아 장병을 거느리고, 그들을 지원하도록 하였다. 여름 5월 26일, 왕이 유신, 진주, 천존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서울을 출발하여, 6월 18일 남천정에 머물렀다. 소정방은 내주에서 출발하였다. 그는 천리에 달하는 병선을 이끌고 수로를 따라 동쪽으로 내려왔다. 21일, 왕이 태자 법민으로 하여금 병선 1백 척을 거느리고 덕물도에 가서 소정방을 맞이하게 하였다. 소정방이 법민에게 “나는 7월 10일 백제 남쪽에 도착하여, 대왕의 군사와 만나 의자의 도성을 격파하려 한다.”고 말했다. 법민은 “우리 대왕께서는 지금 대군이 오기를 고대하고 계십니다. 만일 대장군의 도착 소식을 들으신다면, 틀림없이 잠자리에서 식사를 하시고라도 달려 오실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정방은 기뻐하며 법민을 돌려 보내 신라의 병마를 징발하게 하였다. 법민이 돌아와 정방의 군세가 매우 성대하다고 말했다. 왕은 기쁨을 금치 못하고, 태자와 대장군 유신, 장군 품일, 흠춘[춘을 순이라고도 한다.] 등으로 하여금 정병 5만을 거느리고 가서 응원하게 하였다. 왕은 금돌성에 머물렀다. 가을 7월 9일, 유신 등이 황산벌로 진군하였다. 백제 장군 계백은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먼저 중요한 지형을 차지하고, 세 곳에 군영을 설치한 채 기다리고 있었다. 유신 등은 군사를 세 갈래로 나누어 네 번 싸웠으나 승리하지 못했고, 병사들도 기진맥진하였다. 그러자 장군 흠순이 그의 아들 반굴에게 “신하가 되어서는 충성이 제일이요, 자식이 되어서는 효도가 제일이니, 이러한 위기를 당하여 목숨을 바친다면 충성과 효도를 모두 다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반굴이 대답하기를 “삼가 분부 말씀을 알아 들었습니다”라고 말하면서 곧 적진으로 달려 들어 최선을 다하여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이렇게 되자 좌장군 품일이 아들 관장[관창이라고도 한다.]을 불러 말 앞에 세우고 여러 장수들에게 보이며 말했다. “내 아들이 나이 겨우 열 여섯이지만 기백이 자못 용감하다. 네가 오늘 전투에서 삼군의 모범이 될 수 있겠는가?” 관장은 “예!”라고 말하고는, 갑옷을 입고 말을 탄 채, 창 한 자루를 들고 적진에 달려 들었다. 그러나 그는 적군에게 생포되어 계백 앞에 서게 되었다. 계백이 갑옷을 벗겨보고, 그의 나이가 어림에도 불구하고 용감한 것을 가상하게 여겨 차마 죽이지 못하고 탄식하면서 말했다. “신라와는 대적할 수 없겠구나. 소년도 오히려 이런 정도이니, 황차 장정들은 어떻겠는가!” 계백은 그를 죽이지 않고 돌려 보냈다. 관장이 아버지에게 말했다. “제가 적진에 들어가서 장수의 목을 베지 못하고 깃빨을 뽑아 오지 못한 것은 죽음이 겁나서가 아닙니다.” 관장은 말을 마치자 손으로 우물물을 떠 마시고, 다시 적진으로 나아가 힘차게 싸웠다. 계백은 그를 붙잡아 머리를 베어 말안장에 매어 보냈다. 품일이 그 머리를 쳐들자 피가 흘러 소매를 적셨다. 그는 “내 아들의 얼굴이 살아있는 것 같구나. 나라를 위하여 죽을 수 있었으니 다행이로다!”라고 말하였다. 삼군의 군사들이 이를 보고 비분강개하여 죽음을 각오하고, 북을 치고 함성을 울리며 진격하였다. 이 전투에서 백제 군사들은 대패하였고, 계백도 전사하였으며, 좌평 충상, 상영 등 20여 명이 포로가 되었다. 이 날 정방이 부총관 김 인문 등과 함께 기벌포에 도착하여 백제 군사와 마주쳤다. 그는 백제병과의 전투에서 크게 승리하였다. 유신 등이 당 나라 군영에 도착하니, 정방은 유신 등이 늦게 왔다는 이유로 군문에서 신라 독군 김 문영[‘潁’을 ‘永’으로도 쓴다.]의 목을 베고자 하였다. 유신은 군사들 앞에서 “대장군은 황산 전투를 보지도 않고, 늦게 온 것을 죄주려 하는구려. 나는 죄도 없이 치욕을 당할 수는 없으니, 결단코 먼저 당 나라 군사와 결전을 한 후에 백제를 쳐부시겠소.”라고 말하고, 곧 군문에서 도끼를 집어 들었다. 그의 노기 서린 머리털이 뻗뻗히 서고 허리에 찼던 보검이 칼집에서 저절로 튀어 나왔다. 정방의 우장 동보량은 발을 구르며 “신라 군사들의 마음이 장차 변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리되자 정방이 문영의 죄를 문제삼지 않았다. 백제 왕자가 좌평 각가로 하여금 글을 당 나라 장군에게 보내 철군할 것을 애걸하였다. 12일, 당과 신라 군사가 (원문 3자 결자) 의자의 도성을 포위하기 위하여 소부리 벌로 진격하였다. 정방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어 진격하지 않았다. 유신이 이를 달래어 신라와 당의 군사가 용감하게 네 방향에서 일제히 진격하였다. 백제 왕자가 다시 상좌평을 시켜 음식과 많은 선물을 보냈으나 정방은 이를 받지 않았다. 백제왕의 서자인 궁이 좌평 여섯 사람과 함께 정방의 앞에 나아가 용서를 빌었다. 그러나 정방은 이를 뿌리쳤다. 13일, 의자왕은 좌우의 측근들을 데리고 밤을 틈타 도주하여 웅진성을 지켰다. 의자왕의 아들 융은 대좌평 천복 등과 함께 나와서 항복하였다. 법민이 융을 말 앞에 꿇어 앉히고 얼굴에 침을 뱉으며 꾸짖어 말했다. “예전에 너의 아버지가 원통하게도 내 누이를 죽여 옥중에 파묻었다. 나는 이 일로 인하여 20년 동안 가슴이 아팠었다. 그런데 오늘은 네 목숨이 내 손에 달렸구나!” 융은 땅 바닥에 엎드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18일, 의자는 태자와 웅진방의 영군 등을 데리고 웅진성에서 나와 항복하였다. 왕은 의자가 항복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29일에 금돌성으로부터 소부리성에 도착하여, 제감 천복을 보내 당 나라에 전공을 보고하였다. 8월 2일, 주연을 크게 베풀어 장군과 병사들을 위로하였다. 왕은 정방 및 여러 장수들과 함께 대청에 앉고, 의자와 그 아들 융은 마루 아래에 앉게 하였다. 그리고 가끔 의자로 하여금 술을 따르게 하였다. 이에 백제의 좌평 등 여러 신하들이 목이 메어 울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 날 모척을 잡아 참수하였다. 모척은 본래 신라 사람이었으나 백제로 도망가서 대야성의 금일과 공모하여 신라의 성을 점령한 적이 있었으므로 참수한 것이다. 또한 금일을 잡아 죄를 일일이 따져가며 “네가 대야성에서 모척과 함께 공모하여, 백제 군사를 이끌고 와서 창고를 불질러 없앴다. 이로 말미암아 성 안에 식량이 떨어져 마침내 패배를 당하였다. 이것이 첫번 째 죄이다. 네가 품석의 부처를 협박하여 죽였으니, 이것이 두번 째 죄이다. 네가 백제와 함께 와서 본국을 공격했으니, 이것이 세번 째 죄이다.”라고 말했다. 그의 사지를 찟고 시체를 강물에 던졌다. 백제의 남은 적병이 남잠, 정현(원문 3자 결자)성에 웅거하였다. 좌평 정무는 무리를 모아 두시원 산에 진을 치고, 당과 신라 사람들을 약탈하였다. 26일, 임존의 대책을 공격했으나, 적병이 많고 지세가 험준하여 승리하지 못했다. 다만 소책을 공격하여 격파하였다. 9월 3일, 낭장 유인원이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사비성에 남아 진을 쳤다. 왕자 인태와 사찬 일원과 급찬 길나가 군사 7천명으로 그를 도왔다. 정방이 백제왕 및 왕족, 신하 93명과 백성 1만 2천 명을 배에 태우고 사비로부터 당 나라로 돌아갔다. 김 인문이 사찬 유 돈, 대내마 중지 등과 함께 동행하였다. 23일, 백제의 잔적들이 사비에 들어와 항복한 사람들을 약탈하려 했다. 유수 유인원이 당 나라와 신라 사람들을 출동시켜 이들을 격퇴하였다. 적들은 퇴각하여 사비의 남령에 올라가 너댓 군데에 목책을 세우고 주둔하면서 기회를 노려 성읍을 약탈하였다. 백제의 20여 성이 신라를 배반하고, 그들에게 호응하였다. 당 황제가 좌위중랑장 왕문도를 웅진 도독으로 임명하여 보냈다. 28일, 문도가 삼년산성에 도착하여 조서를 전하였다. 문도는 동쪽을 향하여 서고, 대왕은 서쪽을 향하여 섰다. 당 황제의 명령을 전달한 후, 문도가 황제의 선물을 왕에게 주려다가 갑자기 발병하여 사망하였다. 이에 따라 문도의 시종들이 대신하여 의식을 마무리 하였다. 10월 9일, 왕이 태자와 군사들을 거느리고 이례성을 공격하였다. 18일, 그 성을 점령하고 관리를 두어 수비하게 하자, 백제의 20여 성이 두려워 하여 모두 항복하였다. 30일, 사비 남령군의 목책을 공격하여 1천 5백 명의 머리를 베었다. 11월 1일, 고구려가 칠중성을 침공하였다. 군주 필부가 전사하였다. 5일, 왕이 계탄을 건너 왕흥사 잠성을 공격하였다. 왕은 7일 만에 승리하였다. 이 전투에서 7백 명의 머리를 베었다. 22일, 왕이 백제에서 돌아와 전공을 논하여, 계금의 군졸 선복을 급찬, 군사 두질을 고간으로 삼았으며, 전사한 유사지, 미지활, 보홍이, 설유 등 네 사람에게는 공의 정도에 따라 관직을 주었다. 백제 사람도 재능에 따라 다음과 같이 임용하였다. 좌평 충상, 상영과 달솔 자간에게는 일길찬의 위품과 총관의 직위를 주었으며, 은솔 무수에게는 대내마의 위품과 대감의 관직을 주었고, 은솔 인수에게는 대내마의 위품과 제감의 관직을 주었다. ○八年春二月, <百濟>殘賊來攻<泗沘城>. 王命伊湌<品日>爲大幢將軍, 迊湌<文王>․大阿湌<良圖>․阿湌<忠常>等副之. 迊湌<文忠>爲<上州>將軍, 阿湌<眞王>副之. 阿湌<義服>爲<下州>將軍, <武欻>․<旭川>等爲<南川>大監, <文品>爲誓幢將軍, <義光>爲郞幢將軍, 往救之. 三月五日, 至中路, <品日>分麾下軍, 先行往<豆良尹[一作伊.]城>南, 相營地. <百濟>人望陣不整, 猝出急擊不意, 我軍驚駭潰北. 十二日, 大軍來屯<古沙比城>外, 進攻<豆良尹城>, 一朔有六日, 不克. 夏四月十九日, 班師, 大幢․誓幢先行, <下州>軍殿後, 至<賓骨壤>, 遇<百濟>軍, 相鬪敗退. 死者雖少, 先{失}亡兵械輜重甚多. <上州>郞幢遇賊於<角山>, 而進擊克之, 遂入<百濟>屯堡, 斬獲二千級. 王聞軍敗大驚, 遣將軍<金純>․<眞{眞欽}>․<天存>․<竹旨>․<濟師>救援. 至<加尸兮津>, 聞軍退至<加召川>, 乃還. 王以諸將敗績, 論罰有差. 五月九日[一云十一日.], <高句麗>將軍<音信{惱音信}>與<靺鞨>將軍<生偕>合軍, 來攻<述川城>, 不克. 移攻<北漢山城>, 列抛車飛石, 所當陴屋輒壞. 城主大舍<冬陁川>使人擲鐵蒺藜於城外, 人馬不能行, 又破<安養寺>廩廥, 輸其材, 隨城壞處, 卽構爲樓櫓, 結絙網, 懸牛馬皮綿衣, 內設弩砲以守. 時, 城內只有男女二千八百人, 城主<冬陁川>能激勵少弱, 以敵强大之賊, 凡二十餘日. 然糧盡力疲, 至誠告天, 忽有大星, 落於賊營, 又雷雨以震, 賊疑懼解圍而去. 王嘉獎<冬陁川>, 擢位大奈麻, 移<押督州>於<大耶>, 以阿湌<宗貞>爲都督. 六月, <大官寺>井水爲血, <金馬郡>地流血廣五步. 王薨. 諡曰<武烈>, 葬<永敬寺>比{北}, 上號<太宗>. <高宗>聞訃, 擧哀於<洛城門>. 三國史記卷第五. 8년 봄 2월, 백제의 잔적이 사비성을 공격하였다. 왕은 이찬 품일을 대당 장군으로 임명하고, 잡찬 문왕과 대아찬 양도와 아찬 충상 등으로 하여금 그를 돕게 하였다. 또한 잡찬 문충을 상주 장군으로 임명하고, 아찬 진왕으로 하여금 그를 돕게 하였으며, 아찬 의복을 하주 장군, 무훌‧욱천 등을 남천 대감, 문품을 서당 장군, 의광을 낭당 장군으로 임명하여 사비성을 구원하게 하였다. 3월 5일, 중도에 이르자 품일이 자기 군사의 일부를 나누어 두량윤[‘윤’을 ‘이’라고도 한다.]성 남쪽에 먼저 가서 진지를 만들 곳을 살펴 보도록 하였다. 백제 사람들은 우리 진영이 정리되지 않은 것을 보고, 갑자기 예상하지 못한 급습을 해왔다. 우리 군사들이 놀라 패주하였다. 12일, 대군이 고사비성 밖에 와서 진을 치고 있다가 두량윤성을 공격하였으나, 한 달 엿새가 되도록 승리하지 못하였다. 여름 4월 19일에 군사를 철수하면서 대당과 서당을 먼저 보내고, 하주의 군사를 뒤따라 오게 하였다. 그들이 빈골양에 이르렀을 때, 백제 군사를 만나 싸웠으나 패배하였다. 사망자는 비록 적었으나 병기와 군수품을 상당히 많이 잃었다. 상주 낭당은 각산에서 적을 만나 공격하여 승리하고, 마침내 백제의 진중으로 들어가 2천 명을 참살하였다. 왕은 군사가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놀라서 장군 김순, 진흠, 천존, 죽지, 제사를 보내 구원하게 하였다. 그들이 가시혜진에 도착했을 때, 적군이 가소천까지 퇴각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되돌아 왔다. 왕이 여러 장수들의 패전 책임을 물어 정도에 따라 벌을 주었다. 5월 9일[11일이라는 설도 있다.], 고구려 장군 뇌음신이 말갈 장군 생해와 군사를 합쳐 술천성을 공격했으나 승리하지 못했다. 그들은 방향을 바꾸어 북한산성을 공격하였다. 그들은 포차를 벌려놓고 돌을 날려 보냈다. 그 돌에 맞은 담장과 집은 번번히 무너졌다. 성주인 대사 동타천은 성 밖에 마름쇠를 던져 놓아 사람과 말이 다니지 못하게 하고, 또한 안양사 창고를 헐어 그 재목을 가져다가 성 안의 무너진 곳마다 망루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곳에 굵은 밧줄로 그물을 얽고, 마소의 가죽과 솜옷을 걸어매고, 그 안 쪽에 노포를 설치하여 성을 지켰다. 이 당시 성안의 남녀가 2천 8백 명 뿐이었는데 성주 동타천이 어린이와 힘 못 쓰는 자들까지도 격려하여 20여 일 동안이나 강한 적과 대치하였다. 그러나 식량이 떨어지고 힘이 다했다. 그는 정성을 다하여 하늘에 기도하였다. 그 때 돌연 큰 별이 적진에 떨어지고 우레가 울리고 비가 오면서 천지가 진동하였다. 적들은 겁이 나서 포위를 풀고 돌아갔다. 왕은 동타천을 가상하게 여기고 대내마로 발탁하였다. 압독주를 대야로 옮기고, 아찬 종정을 도독으로 임명하였다. 6월, 대관사의 우물물이 피로 변하고, 금마군에서는 땅에 피가 5보 넓이로 흘렀다. 왕이 별세하였다. 시호를 무열이라 하고, 영경사 북쪽에 장사지냈으며, 태종이라는 시호를 올렸다. 당 고종이 부음을 듣고 낙성문에서 추도식을 거행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 5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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