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내적 아이러니
자신을 먹이로 쫓던 새를 찾아가
그 새의 눈물을 빨아먹어야만 살아남는 나방이 있다
천적의 맥박에 맞춘 날갯짓으로
잠든 눈까풀을 젖히는 정지된 속도로
눈물샘에 긴 주둥이를 밀어 넣을 수 있었던 진화는
새가 단 한번 눈 깜빡이는 사이에 있다
그 사이는 목숨 그 너머를 수혈하기에 충분한 찰나
천적의 눈물에 침전된 염기를 걸러
제 정낭을 채운다는 미기록종 나방이여
상사빛 날개를 삼켜 다시 염낭을 채워야 하는 새여
너희들은 날개로 비행궤적을 지우는 고요의 동족
고요에 찔려 본 자만이 볼 수 있는 그 궤적은
내가 오직 한 사람을 그리워해 온 여태껏,
내가 가위눌린 몸짓으로 썼던 미기록종의 자음들
나방이여 새가 널 먹고 살아남으려 함은
이미 제 영혼인 네 자음을 썩힐 수 없는 유일책이기 때문
영혼을 찔린 안구가 움직이지 않더냐
새의 부리를 열고 울음통 속으로 들어가 보아라
차마 소리로 뱉지 못할 자음이 있어
모음만으로 울며 날아가는 궤적을 소리쳐 읽어보아라
― 차주일, 「어떤 새는 모음으로만 운다」 전문
뚫려 있는 것이 어둠인 것들이 있다
나를 뚫고 너를 뚫고 하늘을 뚫고 바다를 뚫고
바람은, 새들은, 물고기들은 그렇게 돌아다녔을 것이다
그들이라는 것들의 세계는, 뚫려 있으나 어둡다
터널을 뚫는 일이 어둠을 만드는 일임을
천성산의 도롱뇽들은 알고 있었을까
속도를 위해 기꺼이 몸을 내어주는 것들,
어둠으로 숭숭 뚫린
흙과 공기와 물들의 표정을 읽는 일이
언제부턴가 내 일처럼 느껴졌다
내 몸에는 얼마나 많은 터널이 존재할까
뚫려 있어서 어두운 것들의 역설로 인해
내 마음은 늘 불편하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불편한 마음이 터널을 만든다
나는 사랑하면 할수록 내가 사랑한 것들이 불편하다
그들 속에 내가 그동안 무수한 터널을 뚫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터널들로 인해서 시인이 되었다
불편했던 터널의 은유를 알게 되었다
어렴풋이 나는 느낀다
내 불편한 마음이 여전히 사랑해야 할 것은
무수한 터널을 뚫으며 어두워지는 것들이라는 것을,
멀리 새 한 마리, 터널을 뚫고 어디론가 날아간다
― 박남희, 「터널들」 전문
2) 외적 아이러니
1
국민학교 때 나는 학교 화장실 뒤의 콘크리트 정화조 안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개 한 마리를 보았었다.
지금도 나는 그 생각만 하면 눈에 눈물이 고인다.
아마 그 개는 그 정화조에서 끝내 빠져나오지 못했을 거다……
어른이 된 지금도 나는 똑같은 상황에서 어찌해볼 수도 없는 자신에 절망한다……
덥썩 잡아서 끌어올려야 하는 건데
그러나 개는 잡는 시늉만 해도 이빨부터 먼저 드러낸다 으르렁
2
나는 자본주의의 정화조에 빠진 한 마리 개이다.
― 박남철, 「목련에 대하여Ш」 전문
스물여덟 어느 날
한 자칭 맑스주의자가 새로운 조직 결성에 함께 하지 않겠냐고 찾아 왔다
얘기 말엽에 그가 물었다
그런데 송 동지는 어느 대 출신이요? 웃으며
나는 고졸이며, 소년원 출신에
노동자 출신이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순간 열정적이던 그의 두 눈동자 위로
싸늘하고 비릿한 유리막 하나가 쳐지는 것을 보았다
허둥대며 그가 말했다
조국해방전선에 함께 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라고.
미안하지만 난 그와 함께 하지 않았다
십 수 년이 지나 요 근래
다시 또 한 부류의 사람들이 자꾸 내게
어느 조직에 가입되어 있느냐고 묻는다
나는 다시 숨김없이 대답한다
나는 저 들에 가입되어 있다고
저 바다물결에 밀리고 있으며
저 꽃잎 앞에서 날마다 흔들리고
이 푸르른 나무에 물들어 있으며
저 바람에 선동당하고 있다고
없는 이들의 무너진 담벼락에 기대 있고
걷어 채인 좌판, 목 잘린 구두
아직 태어나지 못해 아메바처럼 기고 있는
비천한 이들의 말 속에 소속되어 있다고
대답한다. 수많은 파문을 자신 안에 새기고도
말없는 저 강물에게 지도받고 있다고.
― 송경동,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 전문
내 직장은 명예퇴직 걱정이 없는 안전지대다
정년도 걱정할 필요가 없는 평생직장이라
이 공장에는 일흔이 훨씬 넘은 동무들 수두룩하다
무기수의 평생직장이 철창 안이듯
죽음으로 사표를 쓰지 않는 한 철밥통이다
다른 공장 사내들 밥줄에 전전긍긍 힘들 때마다
떄려치우고 우리공장으로 옮기겠다고 장담도 하지만
물정 모르는 객기야 때로는 힘이 되는 것,
농사는 오랜 숙련으로 쌓은 내공이 필요하다
그러나 연봉에 문제가 많은 우리는 비정규직이다
우리 연봉은 미리 책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해 강우량과 소비자들의 취향에 따라 달라진다
철저하게 외부요인에 의해 연봉이 책정되므로
우리 제품에는 희망소비자가격이 없다
수많은 직원들이 죽음으로 사표를 썼고 수리되었다
철밥통 이 공장도 구조조정 대상으로 전락되면서
논밭으로 출근하는 햇살과 바람도 낌새가 수상해졌다
― 이중기, 「나의 직장도 불안하다」 전문
3) 극적 아이러니
우리 집에 놀러와. 목련 그늘이 좋아.
꽃 지기 전에 놀러와.
봄날 나지막한 목소리로 전화하던 그에게
나는 끝내 놀러가지 못했다.
해 저문 겨울날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간다.
나 왔어.
문을 열고 들어서면
그는 못 들은 척 나오지 않고
이봐. 어서 나와.
목련이 피려면 아직 멀었잖아.
짐짓 큰소리까지 치면서 문을 두드리면
조등(弔燈) 하나
꽃이 질 듯 꽃이 질 듯
흔들리고, 그 불빛 아래서
너무 늦게 놀러온 이들끼리 술잔을 기울이겠지.
밤새 목련 지는 소리 듣고 있겠지.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간다.
그가 너무 일찍 피워올린 목련 그늘 아래로.
― 나희덕,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간다」 전문
어느 날 마술사가 곡예단을 이끌고 우리 마을에 들왔다. 아무도 그를 부른 사람은 없었다.
마술사는 서부의 무법자처럼 쌍권총을 차고 있었다. 신기한 그의 사격 솜씨는 단 한 발에 날아가는 새를 떨어뜨렸고, 500m 전방의 코카콜라 병뚜껑을 맞혔다.
하지만 이미 커크 더글라스가 나오는 영화를 본 사람들은 그의 묘기에 곧 싫증이 났다.
그러자 그는 자기의 목에다 대고 총을 쏘았다. 사람들은 놀랐으나 그는 죽지 않았다.
「저건 가짜총이다!」 한 사나이가 말했다.
「가짜총이라고 말한 분 나와 보시오.」 마술사는 웃으며 말했다.
마술사는 그 사나이에게 총을 쏘았다. 그 사나이는 대번에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살인이다!」 사람들은 외쳤다.
「살인이라고 말한 분 나와 보시오.」 마술사는 엄숙하게 말했다. 아무도 선뜻 나서지 못했다.
「나는 불사신이오. 나를 믿지 못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게 될 것이오.」 마술사는 위협적으로 말했다.
그때부터 마을 사람들은 매일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억지로 재미없는 마술을 구경해야만 했다. 경건한 자세로 대오를 맞춰 서서, 그의 마술이 끝날 때마다 일제히 박수를 치고 열광적인 환성을 울려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곡예단원들이 채찍을 휘둘렀다.
그의 쌍권총 한 자루는 진짜총이고, 한 자루는 가짜총이라는 것을 곧 알게 되었지만 아무도 그런 말을 입 밖에 내지 못했다.
드디어 이 장기 흥행의 소문이 퍼져, 세무서에서 관리가 나왔다. 마술사는 우리에게서 매일 거둔 구경 값으로 세금을 냈다. 경찰서에서 경관이 오자 마을 사람들은 마술사를 쫓아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경관은 「단속할 법규가 없다.」고 그냥 돌아갔다.
이제 우리에겐 자조와 협동의 길밖에 남지 않았다. 그리하여 내일부터는 아무도 마술을 보러가지 않기로 결정했다.
과연 그렇게 될지 우리는 가슴을 두근거리며 내일을 기다리고 있다.
― 김광규, 「재미없는 마술사」 전문
이른 아침 6시부터 밤 10시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그는 의자 고행을 했다고 한다.
제일 먼저 출근하여 제일 늦게 퇴근할 때까지
그는 자기 책상 자기 의자에만 앉아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그가 서 있는 모습을 여간해서는 볼 수 없었다고 한다.
점심시간에도 의자에 단단히 붙박혀
보리밥과 김치가 든 도시락으로 공양을 마쳤다고 한다.
그가 화장실 가는 것을 처음으로 목격했다는 사람에 의하면
놀랍게도 그의 다리는 의자가 직립한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그는 하루 종일 손익관리대장경과 자금수지심경 속의 숫자를 읊으며
철저히 고행업무 속에만 은둔하였다고 한다.
종소리 북소리 목탁소리로 전화벨이 울리면
수화기에다가 자금현황 매출원가 영업이익 재고자산 부실채권 등등을
청아하고 구성지게 염불했다고 한다.
끝없는 수행정진으로 머리는 점점 빠지고 배는 부풀고
커다란 머리와 몸집에 비해 팔다리는 턱없이 가늘어졌으며
오랜 음지의 수행으로 얼굴은 창백해졌지만
그는 매일 상사에게 굽실굽실 108배를 올렸다고 한다.
수행에 너무 지극하게 정진한 나머지
전화를 걸다가 전화기 버튼 대신 계산기를 누르기도 했으며
귀가하다가 지하철 개찰구에 승차권 대신 열쇠를 밀어 넣었다고도 한다.
이미 습관이 모든 행동과 사고를 대신할 만큼
깊은 경지에 들어갔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30년간의 장좌불입이라고 불렀다 한다.
그리 부르든 말든 그는 전혀 상관치 않고 묵언으로 일관했으며
다만 혹독하다면 혹독할 이 수행을
외부압력에 의해 끝까지 마치지 못할까 두려워했다고 한다.
그나마 지금껏 매달릴 수 있다는 것을 큰 행운으로 여겼다고 한다.
그의 통장으로는 매달 적은 대로 시주가 들어왔고
시주는 채워지기 무섭게 속가의 살림에 흔적 없이 스며들었으나
혹시 남는지 역시 모자라는지 한 번도 거들떠보지 않았다고 한다.
오로지 의자 고행에만 용맹정진했다고 한다.
그의 책상 아래에는 여전히 다리가 여섯이었고
둘은 그의 다리 넷은 의자다리였지만
어느 둘이 그의 다리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고 한다.
― 김기택, 「사무원」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