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겨울 밤
김 민주
시꺼먼 하늘이 담장까지 내려와
눌려진 달은 밝지 않다.
먹구름 파도는 거센 바람을 타고
별들의 미소까지 흐트렸다.
제주의 겨울 밤
돌담집 나무창틀은 방정 맞았다.
그 창을 넘은 나뭇가지들이
바닥에 뿌려져 스산하다.
흐릿한 달빛 아래
바닷바람의 오케스트라
닫지 못한 방문 틈으로
그들의 밤의 축제를 엿봤다.
창틀에 눈이 소복하다.
햇살에 반짝거리다가
방바닥에 뿌려져
춤추던 나무들의 발자국을 녹였다.
제주 한달살이
김 민 주
책을 읽다가 요 부분만 아니 요기까지만 하다가 다 읽고 나서야 잠든 날이 언제였을까?
좋아해서가 아니라, 어쩌다 잡은 책이 잠 못 들게 한 적이 있었다.
결혼을 하면서, 서점은 아이들이 성장하는 동안 좋은 놀이터였다.
배가 고프면 읽고 싶은 책을 사서, 좋아하는 간식을 먹으며 주말을 보내는 시간이 아깝지 않았다.
그렇게 한 권씩 모인 책들이 끝까지 펼쳐지지 못하고 잠자고 있는 사이, 아이들은 커버렸다.
엄마를 부르는 일보다, 내가 찾는 일이 많아졌고, 서점 가는 길엔 딸아이가 운전을 한다.
퇴근하는 딸을 따라다니며 "컴퓨터가 이상하다", "멀쩡한 휴대폰이 고장 났다"라고 투덜거리면, 고집이 세고 성격이 급한 외할아버지와 엄마는 똑 닮아 시끄러워질 수 있으니, 빨리 들여다봐 준다.
솜털처럼 보송하고 통통했던 귓불이 갸름해지고, 눈가에 힘이 생긴 딸은 회사원이 된 지 3년이 지났다.
엄마 기념일에는 작고 반짝이는 예쁜 선물도 하고, 기능도 모르는 최신폰을 들고 다닌다.
이번 겨울, 매달 적금을 넣어 준비한 제주 한 달 살이는 큰 용기가 필요했다.
연말연시, 명절 등 고민이 많은 건 나였고, "좋겠다! 놀러 갈게! 다녀오면 팁 알려줘."라는 대답으로 망설임을 사치로 돌려받았다.
숙소와 배편을 예약하고, 쉽게 잠들지 못하는 밤들이 많아졌다. 그럴 땐 메모도 하고, 조용히 거실 바닥을 걸으며 서랍 속을 달그락거리며 필요할 것들을 작은 팩에 담아 하나씩 준비했다.
카페에서 커피가 식어 다시 주문할 만큼 소파와 한 몸이 되어보기
매일 바닷가를 큰 개와 산책하기
오름 도장 깨기
매일
일기 쓰기
읽기도 하고, 서예와 그림(시루)도 그리기
'시루 마음 동화', 만화 쓰기
화장 안 하고 옷 편히 입기
아침은 간단히 먹고, 맛있는 거 하나씩 먹으러 다니기
책방 바닥에 앉아 입이 나올 정도로 집중해보기...
일 년도 아니고 이사 가는 것도 아닌데, 점점 가방이 많아졌다.
차를 배에 실어 넣고 시린 발을 굴리며 매표를 기다리는 딸을 보고 있으니, 일본 여행에서도 내가 비행기 표 하나도 구매하지 못했던 일이 생각났다.
제주의 돌담집, 한 번은 살아봐야 한다더니 겨울밤 폭설이 내린 집에서는 돌담과 장독대 위치도 알 수가 없었다. 뉴스에 귀를 기울이고, 집주인이 준비해 준 웰컴 티와 간식으로 길 위의 눈이 녹기를 기다렸다. 거실 바닥에 이불을 돌돌 말고 누워 TV를 보다 잠들었다. 계획에 없던 일이었는데 행복했다. 창틀에 참새가 다녀가고, 전깃줄 위에도 아침 버스를 기다리는 직장인들처럼 참 바빴다. 한낮 햇살이 비춰 눈이 녹고, 큰길에는 차가 다닐 수 있다는 문자를 받고 마트부터 찾아 나섰다.
건강한 음식을 먹는 것도 계획이었고, 운동하는 것도 마찬가지였는데, 컵라면부터 담고 혹시나 하는 생각에 간단히 먹을 초코과자와 빵을 찾았다. 바람이 거세져 드라이한 머리가 아깝지만, 해가 지기 전에 돌담집을 다시 찾았다. 냉장고 정리를 해놓고, 마트 입구에서부터 유혹하던 군고구마를 봉투째 바닥에 놓고 찢어 고픈 배를 채웠다. 까만 손가락을 한참 들고 여유를 부렸다.
겨울밤은 길었다.
까마득히 보이지 않던 건너 바다에 불빛이 보이고, 낮게 뜬 달이 무섭지 않았다.
요란하던 나무 창 소리, 검게 흔들리던 나뭇가지들에게도 "바람 따라 다녀야 꺾이지 않는다"고 전했다.
순간의 여유로움 속에서 많은 질문을 나에게 던졌다. 걱정도 많았다. 그러다 해가 저물었다.
새벽이 오기 전, 까만 하늘과 바람이 가벼운 만큼 날카로웠다. 집 안에서 할 수 있는 아침 시간을 위해 책방을 찾았다. 천장이 낮고, 나무 난로가 굴뚝으로 연기를 뿜어내지만, 실내에는 입김이 났다. 그 책방에는 오래전 TV에서 보던 공중전화가 있었는데, 다가가니 전화벨이 울렸다. 수화기를 들고 한참을 듣고 있자니 목이 메었지만, 수화기를 내려놓을 수 없었다. 여기는 나를 알지 못하는 제주 섬... 신경 쓰지 않고 참았던 숨을 내쉬고, 눈물을 흘려 내렸다. 엄마와 딸의 대화였다. 내가 해보지 못한 말, 전하고 싶었던 이야기들이었다. 그 딸은 엄마에게 다음 생에는 자기 딸로 태어나 달라고 했다. '난 아닌데... 엄마처럼 못 살아...‘
전기장판에 기대 앉아 책을 보던 주인에게 할인은 안 되지만, 예쁜 책갈피 두 장을 챙겨 가벼워진 마음으로 책을 사서 나왔다.가는 길에도 바다가 보이고, 오는 길에도 바다가 보였다.
집에서 차로 10분 정도 가면 돈가스와 우동이 맛있는 집이 있다. 면을 외식으로 먹는 일은 거의 없지만, 테이블 세 개인 작은 식당은 일본에서 먹던 맛이 났다. 이른 저녁인데 줄 서 있는 사람들 사이로 예약을 하고, 작은 창 속에서 새어 나오는 노란 불빛과 주방에서 나는 튀김 냄새가 기다림과 허기를 더했다.
바다가 보이는 한 달 살이 집에는 햇살이 내리는 날엔 봄이 와 있고, 태풍이 몰아 파도가 밀려오는 날엔 검은 바위와의 다툼이 밤새 계속되었다.농협 공판장처럼 높고 큰 소리들이 이틀이 지난 밤에는 자장가가 되었고, 고요한 아침엔 잠을 깼다. 그렇게 공기처럼 다가와 있었다. 산책을 하기엔 어두운 바닷가의 아침이다. 거친 파도가 겨울바람에 어디로 철석거려야 할지 몰라 숲에는 이름 모를 짐승들의 날카로운 눈빛이 사냥을 마치지 못한 듯했다.
육지보다는 늦은 아침을 시작했다.
강아지와 함께 가까운 오름부터 하루에 하나씩 도장깨기를 시작했다. 관광지는 부지런히 움직여야 편히 다닐 수 있다.겁이 많은 검정 개 시루를 무서워하는 사람들이 있기도 하고, 아무도 없는 산에서는 맘껏 뛰게 해 주고 싶었다. 새별오름은 가을 억새가 유명하다. 한겨울 눈이 쌓이면 오르기도 쉽지 않지만, 남은 억새와 해를 보는 데 한 시간이면 충분하다. 이른 시간 주차장 끝에 차를 세워두면 바로 차에 다시 오를 수 있으니 말이다. 우다다 숨을 참고 따라오르면 잠시 정신이 나가버린다. 혀를 내밀고 기다려주는 검정 개는 까만 눈을 반짝이며 응원한다.
내려오는 눈길은 목줄을 잡고 있으면 썰매를 타는 기분이다. 억새 숲 사이로 움직이는 고라니가 시루를 보고 달아나자, 화들짝 놀란 시루도 뛴다. 누가 누구인지 같이 뛰어다니는데, 돌아오지 않을까 겁이 났지만, 휘파람 소리에 바로 달려와 주었다. 그렇게 반쯤은 엉덩이로 내려왔다. 금오름은 가수 뮤직비디오에 나와서 유명한 곳인데, 숲길을 걸을 수 있어 찾았다가 큰 들개 세 마리가 따라와 내 검정 롱패딩을 펼쳐 겁을 주고는, 시루와 내 평생 가장 빠른 달리기를 했다. 문도지 오름에서는 말들이 따라와서 오르지 못한 오름이었다.
도두봉은 제주공항 북쪽 도두동 해안가에 위치해 있다. 도두봉에서는 공항에서 출발하는 비행기가 줄을 서서 기다리다가 출발하면 날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딸들이 번갈아 다녀가면 공항에 딸을 내려주고, 곧장 도두봉에 올라 인사를 했다. 열심히 찍은 비행기 영상이 잘못 찍히기도 했고, "이거다!" 하고 찍으면 초점이 흐려 무엇을 찍은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작은 딸이 오후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가는데, 멋진 시루와 인사하고 싶어 도두동에 주차하고 정신없이 올랐다. 해가 저무는 바다와 공항의 불빛들이 헐떡이는 숨을 멈추게 했다. 시루 사진도 멋지게 찍고, 작은 딸을 실은 비행기도 잘 찍어 보냈다. 겨울밤이 찾아오려는데, 어둑해지는 산속은 무섭기보다 남은 여운으로 내려오는 길이 해피엔딩 영화를 본 느낌이었다.
차가 가까이 오면 사이드 미러가 열려야 하는데, 차 키의 배터리가 다 되었나? 하고 키를 찾았지만 없었다. 개를 데리고 산을 다시 오를 수가 없어 나무에 묶어 둘까 고민하다가, 해가 지고 있어 들개들이 또 나타날까 걱정이 되어 큰딸에게 전화를 했다. 원격으로 차문을 열어 개를 태워놓고 다시 산을 올랐다. 개랑 뛰어오른 길을 되짚어 걸으며 더듬어 보고, 휴대폰 불빛을 켰지만 키를 찾을 수 없었다. 걱정이 된 딸이 택시를 타고 숙소로 돌아가라고 했지만, 큰 개를 태워 줄 택시가 쉽게 잡히지 않았다. 차문은 열렸지만 히터를 켤 수 없으니, 겨울밤의 추위에 서러움이 느껴졌다. 밥때를 놓친 시루는 눈을 반짝이며 헥헥거리며 혀를 내밀었다.
혼자 오래 둔 것 같아 뒷자리에 앉아 시루를 쓰다듬다, 목덜미에 기대니 너무 따뜻했다.
택시를 기다리는 동안 시루에게 물을 먹이려고 차에서 내렸다. 차 뒤쪽 바위에 시루를 올려놓고 남은 간식도 먹였다. 주차장에 많던 차들은 사라지고, 화장실 불도 꺼졌다. 차에서 기다리려고 일어나는데, 앉아 있던 바위에서 반짝이는 뭔가가 느껴졌다. 차 열쇠였다. 차 번호가 같이 달려 있었는데, 누군가 주워서 주차된 차 뒤쪽 바위에 올려둔 것이었다. 어두운 산과 파도 소리가 무섭기도 했지만, 눈물이 났다. 고마운 마음에 온몸이 따뜻해졌고, 바보같이 흘리고 다닌 내가 창피하고 미웠다.
걱정하고 있을 딸에게 전화를 하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는 나에게 음악도 들려주고 싶지 않았다. 배고픔도 몰랐고, 시루에게 사료를 주고 뜨거운 물에 샤워를 하고 나니 이불 속에 빨리 숨고 싶었다. 거센 파도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수정 후 다시 올렸습니다. 부족함이 많아서 ... 매번 부담스럽습니다.
제주의 겨울밤... 제...자가 빠졌어요...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