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스페셜 ‘만주대탐사 2부작’ … 요하문명을 아시는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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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주대탐사 2부작 · 제1부 제5의 문명, 요하를 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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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역사스페셜 특별기획 · 제1부 제5의 문명, 요하(遼河)를 가다
요하문명 1 http://www.youtube.com/watch?v=Cn6FmBbW_Kk 요하문명 2 http://www.youtube.com/watch?v=8AWIZfyJGq0 요하문명 3 http://www.youtube.com/watch?v=Sr0ML3aa RCQ 요하문명 4 http://www.youtube.com/watch?v=yHaxnEd Hodk 요하문명 5 http://www.youtube.com/watch?v=va-V4O uPpX8 요하문명 6 http://www.youtube.com/watch?v=7Y-1Zd FEoA8 요하문명 7 http://www.youtube.com/watch?v=_ep8Fk bhoMw 요하문명 8 http://www.youtube.com/watch?v=wBpf9Z oILx0
만주대탐사 2부작 - 1부 제5의문명, 요하문명
BC 6000년, 만주 요하 지역에서 찬란한 문명이 꽃피기 시작했다. 황하문명보다 천년이나 앞선 고대문명. 특히, BC 3500년경 꽃 핀 홍산문화에서는 대규모 적석총, 제단, 신전이 발굴되었는데 이것은 이 지역에 이미 초기 국가 단계에 진입한 세력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요하유역을 무대로 문명의 새벽을 연 이들은 누구일까? 발굴 결과, 요하문명은 중국 중원과는 확연히 구별되며 오히려 우리 민족의 문화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이 드러나고 있다. 장장 4000㎞의 만주 탐사 대장정. 만주 땅에 아로새겨진 민족의 기원을 찾아간다.
이집트 · 메소포타미아 · 인더스 · 황하문명은 인류의 4대 문명으로 불려왔다. 그러나 1980년대 부터 발굴되기 시작한 요하문명으로 인해 세계사는 다시 쓰여져야만 한다. 요하문명은 이들 4대문명보다 시기적으로 1000년 이상 빠르다. BC 6000년, 요하문명의 새벽을 열었던 사해 · 흥륭와 문화에서는 빗살무늬 토기와 옥귀걸이가 출토되었다. 그런데 이 옥귀걸이와 꼭 같은 모양의 옥귀걸이가 강원도 고성군 문암리에서도 출토되었다. 대륙을 건너온 같은 모양의 옥귀걸이. 우리 민족의 시원(始原)을 밝혀줄 단서가 아닐까
요하문명의 꽃, 홍산(紅山)문화
요하문명은 홍산에서 그 꽃을 피운다. 홍산인들의 성도(聖都)인 우하량에서 여신묘가 발견되었다. 그곳에서는 두 눈을 푸른 옥으로 장식한 여신상도 함께 발굴되었다. 주변에 흩어져 있는 신체의 조각들로 봐서 사람크기와 2배, 3배의 여신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  | | ▲ 여신묘에서 출토된 흙으로 빚은 여신의 얼굴, 눈동자에 푸른옥이 박혀있다 | | |
또한 우하량 각지에서는 수많은 적석총이 발견되었다. 한 변이 60m가 넘는 거대한 피라미드형이다. 제단, 신전, 무덤이라는 정신문명의 삼위일체의 유적들과 매우 정교한 옥기의 대량 생산 등은 홍산인들이 이미 ‘초기국가단계’에 접어들었음을 보여준다. 홍산문화의 발견은 중국으로서는 커다란 충격이었다.
|  | | ▲ 우하량 적석총 | | |
흔들리는 중화사상, 중국의 새로운 국가 전략
중국은 예로부터 황하문명을 자신들의 시원으로 삼고, 만리장성 이남을 중원이라 믿었다. 그러나 오랑캐의 땅이라 여겨왔던 만리장성 이북의 요하지역에서 황하문명보다 천 년 이상 빠르고 이미 초기 국가단계에 진입한 요하문명이 속속 발굴되자, 수 천년간 지속되어온 중화사상은 크게 흔들린다. 중국은 새로운 국가전략으로 ‘통일적 다민족 국가론’ 을 내세웠다. ‘지금의 중국 영토 안에 있는 모든 민족은 예로부터 중화민족이며 그들의 역사도 중국 역사의 일부‘ 라는 것이다. 그 일환 으로 국가 주도의 역사공정에 착수했고, 그 핵심이 요하문명을 중국 문명의 시원 으로 확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요하문명이 중국 문명의 시원일까?
요하문명의 주도 세력은 누구인가?
BC 2000년 경, 홍산문화는 하가점 하층문화로 이어진다. 하가점 하층문화에서 발견되는 치를 갖춘 석성, 비파형 동검 등이 발견되는데 이는 중원의 것과는 확연히 구분된다. 이것은 요하문명의 주도 세력이 중화민족과는 다른 집단이라는 것이다. 치를 갖춘 석성은 고구려 성의 특징을 보여주며, 비파형 동검도 그 중원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요하유역과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하가점 하층문화는 완전한 국가단계라고 평가되는데, 기원전 2,000년 경 요하유역에 있을 수 있는 국가는 무엇일까? 모든 사서를 뒤져봐도 그것은 고조선 외에는 없다.
흥미로운 것은 홍산문화 우하량의 여신묘에서 곰의 턱뼈와 진흙으로 만든 곰의 발도 함께 출토되었다는 점이다. 또한 제사장으로 보이는 인골은 곰의 얼굴을 형상화한 옥룡을 가슴에 달고 있었다. 이는 홍산인들이 여신과 함께 곰을 숭배하는 곰 토템족이었다는 증거다. 우리 민족의 기원 신화인 단군 신화를 떠올릴 수 밖에 없다.
|  | | ▲ 여신묘에서 발견된 진흙으로 만든 곰발 소조상 | | | 그러나 주류학계에서는 단군신화를 신화로서만 인정할 뿐, 단군 조선이라는 역사적 실체는 부정해 왔다. 이제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한 ... 요하문명을 바탕으로 단군조선의 실체에 대해 적극적인 검토를 해야 할 때이다.

KBS 역사스페셜 특별기획 - 만주대탐사 2부작
| 만주대탐사 2부작 · 2부 금나라를 세운 아골타, 신라의 후예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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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금나라를 세운 아골타, 신라의 후예였다!
“금시조의 이름은 함보인데 처음에 고려에서 온 신분이다” (금사본기 제 1권, 세기) “여진의 추장은 신라인이고 완안씨는 중국말 왕과 같다”(송막기문)
금태조 아골타, 신라의 후예였다!
중원에서 최초로 한족을 밀어낸 금태조 아골타, 그의 시조는 놀랍게도 신라인 함보였다. 이것은 전설이나 야사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금나라의 정사인 <금사>와 금 건국 시 송나라에서 씌어진 <송막기문>에 명확히 나오고 있다.
 | | ▲ 금사 |
|  | | ▲ 송막기문 |
| 고려에서 온 신분이며 신라인인 금시조. 아골타의 출생년도를 고려해 계산해보면 금 시조 함보가 여진에 들어온 시기는 신라 말, 고려 초다. 당시 신라와 고려의 왕권교체기였던 한반도의 사정을 생각하면 두 사서는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아골타의 조상 함보, 그는 과연 누구일까?
함보, 그는 누구인가?
|  | | ▲ 금황실 계보도 | | | <동명해사록>에 함보의 9대손 아골타에 대한 이야기가 전한다. 김부(경순왕敬順王)가 비록 항복하여 고려왕이 합병하였으나 김부의 외손 완안아골타는 곧 권행의 후예로서 능히 중국을 갈라 다스려 백년동안 대를 이었으니... (동명해사록 1636년)
조선의 유학자 김세렴은 여진족의 아골타를 경순왕의 외손이며 조선최고가문 권행의 후예라고 하고 있다.그런데 권행의 본래 성은 金(김)씨였다. 김행의 아들이며 경순왕의 외손인 금의 시조. 당시 족내혼을 했던 신라 왕실의 관습을 고려하면,그의 성이 金(덧말:김)이며 신라의 후예인 것은 확실해 보인다. <동명해사록>의 금 시조와 <금사>의 함보는 과연 동일인인가?
신라 후예인 왕족과 발해 후손의 왕비족이 세운 나라, 금
함보를 시조로 둔 금 황실은 발해인을 왕비로 맞는다. 금나라의 성군 세종의 어머니, 4대 황제 해릉왕의 어머니는 모두 발해 여인이었다. 또한 아골타는 발해인을 신뢰하여 발해유민 장호를 새로운 수도 북경 건설 책임자로 등용한다. 발해는 대제국을 경영해본 경험이 있었다. 금나라는 이런 발해의 경험을 이용하여 국가체제를 확장해 나갔던 것이다
청 황실의 성씨도 김씨였다
|  | | ▲ 청태조 누루하치 | | | 금 멸망 후 1606년, 여진은 다시 중원을 장악했다. 바로 중국의 마지막 왕조 청이다. 그런데 청나라 황제 성은 아이신 줘러 였다. 아이신愛新)이란 금(金), 줘러覺羅)란 겨레(族)부족 씨 등을 뜻한다. 결국 금 부족, 김씨들 이라는 뜻이다. 신라 왕족인 경주 김씨, 그의 후예인 금 황실, 청 황실까지 그들은 모두 금을 뜻하는 김(金)씨들이었던 것이다.
만주역사는 중국의 역사가 아니다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 금나라, 청나라로 이어지는 만주의 역사는 우리 민족과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한족의 영토,중원을 만주대륙에 합병하여 오늘의 중국을 완성한 여진족, 그들 선조가 신라인이라는 사실에 주목하는 것은 국수주의적 우월감을 주장하자는 것이 아니다. 중국의 반역사적인 동북공정 논리에 정면으로 대응하고 우리 역사를 지켜내어 향후 동아시아와 한반도 지역에 평화의 논리적 근거를 재확인하자는 것이다.

요하문명은 중국 아닌 한국문명
“중국이 고조선 이전의 상고사까지 자국의 역사로 편입하려는 시도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요서(遼西) 지역 신석기 문화와 한반도의 관련성에 대한 연구가 필수적입니다.” 15일부터 10여 명의 고조선유적답사단을 이끌고 21일까지 네이멍구 (內蒙古)자치구와 랴오닝(遼寧) 성 북서부 지역을 둘러본 우실하 항공대 교양학부 교수. 그는 1999∼2002년 랴오닝대(遼寧大) 교수로 재직했다.
|  | | 고대 한민족 문화인 흥륭와(興隆窪)문화 (기원전 6200년~기원전 5200년) 유적에서 발굴된 세계 최초의 옥 귀고리 | | | 우 교수는 23일 “요하 문명은 중원에서 시작된 여타 문명과 별개로 중국 동북부 지역에 독자적으로 출현한 문명으로 한반도와 깊은 연관성을 갖고 있다”면서 이곳의 문명을 모두 중국 문명에 포함하려는 중국의 의도를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1983년 랴오닝(遼寧) 성 뉴허량(牛河梁)에서는 기원전 5500년 전의 제단 여신전 여신상(女神像) 적석총 등이 대거 발굴됐다. ‘3황 5제 시대’ 운운하는 신화시대였던 기원전 3500년에 이미 나라의 모습을 보여 주는 대규모 유적이 발견된 것은 고대 국가가 황허(黃河) 유역의 하(夏)나라에서 시작해 상(商)과 주(周)나라로 이어진다는 역사학계의 정설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이 때문에 뉴허량 유적은 훙산(紅山)문화, 나아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신석기 문명의 하나로 꼽히는 요하 문명의 꽃으로 불린다.
문제는 중국이 이런 발굴 성과를 바탕으로 요하 문명(遼河文明)의 주도 세력을 황제족(黃帝族)으로 설정하고 중화민족의 시조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우 교수는 “요하 지역에서 발원한 모든 고대 민족이 황제족의 후손으로 중화민족의 일원이라고 보는 역사 해석이 중국에 등장하고 있다” 며 “이런 논리라면 단군과 주몽은 당연히 황제의 후예가 된다” 고 걱정했다.
그는 국경이 없었던 시절 과거 문명 주도세력이 어디로 이동했는지를 중심으로 파악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요서에서 발견된 적석총, 피라미드식 적석총, 빗살무늬토기, 비파형 청동검은 중원에서는 거의 나타나지 않고, 한반도와 일본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됐다. 바로 요하 문명이 중원에서 발상한 문명과는 달리 주로 한반도를 거쳐 일본까지 전래된 동북아 문명의 시원(始原)이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우 교수는 “요하 문명은 동북아 모든 국가의 공통적 시원 문화로 21세기 동북아 문화공동체 형성을 위한 근원으로 삼을 수 있다”고 말했다
中 역사 수정 연구 · 우실하교수 인터뷰
중국이 전면적인 국사수정공정(國史修訂工程)에 나선 것과 관련 요하문명 연구가인 항공대 우실하 교수는 이는 중국이 오랜 기간 준비해온 역사 관련 국가 공정의 완결판이라며 그 의도가 상고사의 전면 재편을 통해 중국 문명의 시원(始源)을 황화(黃華)에서 요하(遼河)로 끌어올리는 데 있다고 규정했다.
그는 2015년 국사수정공정이 완결되고 이를 바탕으로 국사교과서가 출간되면 그간 '오랑캐'의 역사로 분류됐던 중국 동북지역의 요하문명이 중국 문명의 기원이 되고 요하 문명에서 파생한 모든 고대 민족은 요하문명을 건설했다는 중화민족의 시조인 '황제' 의 후손이라는 학계 차원의 그간의 주장이 국가 공인의 정사(正史)가 될 것으로 전망했다.
중국 동북의 요하문명에서 발원한 고조선과 고구려 등 우리 민족의 시조는 중국측 논리에 의하면 자연스럽게 황제의 후손이 되고 우리의 상고사(上古史)가 송두리째 중국 역사에 편입되는 것이라며 우리 학계의 관심을 촉구했다.
다음은 우교수와의 일문일답.
--중국 국사 수정 공정은 언제부터 추진됐고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
▲ 중국은 1958년부터 1978년까지 20년에 걸친 작업 끝에 전설의 제왕인 '황제' 부터 명(明)이 멸망한 1644년까지 중국 역대 왕조의 역사를 기술한 24사(史)와 청나라의 역사인 청사고(淸史稿)를 정리한 점교본(点校本)을 정사로 채택, 공인 역사서로 출간했다. 32년 만에 이뤄지는 정사 기록에 대한 수정은 이미 2005년부터 2년간 기본 자료 수집을 마쳤고, 2007년부터 본격적인 수정작업에 들어가 2015년에 출간될 예정이다.
--국사 수정 공정의 핵심은 무엇인가.
▲ 국내 학자들은 단순히 역사적 오류 등을 수정하는 정도로 알고 있는데 그렇지 않다. 전면적인 고대사 재정비를 통해 중국 문명의 시원(始源)을 황화문명보다 앞서는 요하문명으로 삼는 것이 핵심이다. 요하문명은 1980년대 이후 전모가 밝혀지고 있는 요서 지역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문명이다. 현재 진행중인 국사수정공정의 핵심은 요하문명을 중화문명의 실질적인 시발지로 삼고, 이 일대에서 발원한 모든 민족을 중화민족의 시조라는 '황제'의 후예들로 보며, 이들이 이룩한 모든 역사를 중국사에 편입하는 것이라고 본다.
--중국 역사 수정 작업을 구체적으로 설명한다면.
▲ 중국은 황화문명을 중화민족의 기원으로 삼았다. 동북 등 변방지역은 중화민족과는 다른 오랑캐로 여겼다. 그러나 1980년대 들어 요하 일대에서 황화문명보다 훨씬 앞선 시기에 초기 국가형태를 띤 요하문명 유적들이 대량 발굴됐다. 중화문명이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라며 자부심에 찼던 중국 학계는 충격과 당혹감에 빠졌다. 그러다 1990년대부터 요하문명을 중화민족의 문명으로 삼으려는 시도가 이뤄졌다. 즉 요하문명의 주도세력이 동이족이나 예.맥족이 아니라 '황제족'이라는 논리를 개발한 것이다. 이제 이 논리는 중국 학계의 정설로 굳어졌다. 중원 지역의 상(商) 왕조는 요하에서 갈라져 나온 황제의 후예가 하(夏)를 정벌하고 건립한 것으로 정리됐다.
--중국 역사를 수정하는 것인 만큼 우리와는 관계없지 않나.
▲ 요하문명의 핵심인 홍산문화 유적지에서는 각종 곰 형상물과 곰 형상의 옥기들이 발견된다. 홍산문화의 주 토템이 곰이고 이는 우리의 웅녀족과도 연결될 가능성이 있다. 동이족, 부여족, 예맥족, 고조선, 부여 등은 바로 이 요하 일대에 건설되었다. 다시 말해 요하문명은 우리 민족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요하문명을 세운 세력이 황제의 후예라면 이 일대에서 활약했던 동이족과 예.맥족은 물론 고조선을 세운 단군 역시 황제의 후손이 되는 셈이다. 고조선 이후에 출현한 고구려는 말할 것 없이 자연스럽게 황제의 자손이 세운 국가가 돼 논쟁의 여지조차 없어지게 된다. 우리의 상고사가 송두리째 사라지거나 중화민족 역사에 편입되는 것이다.
--우리 학계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 주류 학계는 여전히 고조선의 기원을 평양으로 보고 있다. 당연히 요하문명이나 중국 상고사 수정은 남의 일일 뿐이다. 그러나 요하문명은 황하문명과는 전혀 다른 북방계통의 문명으로 우리와도 밀접하다. 계단식 적석총, 빗살무늬토기, 비파형동검, 치(雉)를 갖춘 석성 등의 유물들이 요하문명 지역에서 발굴된다. 황화문명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유물들이다. 다시 말해 요하문명의 적통은 몽골-만주-한반도-일본으로 이어지는 북방계 민족이다. 안타까운 것은 국내에서는 요하문명에 대한 연구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한.중간 역사 갈등을 넘어 올바르게 접근할 방법은 뭔가.
▲ 세계를 놀라게 한 요하문명이 새롭게 발견됐으니 중국이 상고사를 다시 쓰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요하문명이 중화민족의 시조인 황제의 영역이었고 요하 지역에서 파생한 모든 민족을 황제의 후예로 보는 시각이다. 이런 관점은 주변국 상고사를 중국사에 편입하려는 '대중화(大中華)주의'에서 비롯된 발상이다. 요하 문명은 명실상부한 동북아시아 시원(始源) 문명이다. 그 당시에는 지금과 같은 국경도 없었다. 한국과 중국, 일본, 몽골 등 관련국이 국가적 이해관계를 떠나 공동으로 연구하고 토론한 뒤 역사적 사실에 기초해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규명해야 한다.
- 중앙일보 2010.09.01

`中역사 수정되면 韓 민족은 황제의 후예`
|  | | ▲ 상고사를 전면 재편, 중국 문명의 기원을 황화에서 요하로 끌어올리려는 중국의 국사 수정 공정이 본격화되고 있다. 사진은 요하문명의 핵심인 홍산문화 유적지 니우허량 보호 시설 조감도. [연합뉴스] | | |
… 요하문명 연구가 우실하 교수 `中 고대사 전면 재편 의도`
중국이 30년 만에 자국의 고 · 근대사에 대한 대대적인 수정에 나선 것은 고대사 에 대한 전면적인 재편을 통해 '오랑캐의 역사' 로 터부시했던 요하(遼河·랴오허) 문명을 중국 문명의 기원으로 삼으려는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렇게 되면 중국 문명의 기원은 지금까지의 정설이었던 황하(黃河)문명보다 2천500년 거슬러 올라가게 돼 세계 4대 문명 발상지 가운데 최고(最古)가 될 뿐 아니라 요하에서 발원한 우리 한(韓)민족도 중국 선조의 후예가 되는 셈이다.
중국의 공인 역사서를 발행하는 중화서국(中華書局)은 2015년 완성을 목표로 중국 검정 역사서를 수정.보완키로 지난 9일 공식 발표했다. 1958-78년 이뤄졌던 첫 검정 역사서 완성 이후 30년 만에 추진되는 역사 수정에 대해 중화서국 쉬쥔(徐俊) 총편집은 "문화대혁명이라는 역사적 격동기에 이뤄지면서 정치적 영향 등으로 객관적이지 못하게 정리된 부분이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요하문명 연구가로, 최근 요하 일대 유적지 답사를 위해 중국을 방문 했던 항공대 우실하 교수는 1일 연합뉴스 기자와의 이메일을 통한 인터뷰에서 "1996년 '하상주단대공정(夏商周斷代工程)' 을 시작으로 14년간 계속된 '국사수사공정(國史修訂工程)' 이 완성됐음을 의미하는 것" 이라며 "그 핵심은 상고사의 전면 재편" 이라고 밝혔다. 하상주단대공정과 우리에게도 익숙한 '동북공정(東北工程.2002-07년)', '중화문명탐원공정(中華文明探源工程.2003년-현재)' 등을 통해 상고사 재편 작업을 거친 끝에 완결판인 '국사수사공정(國史修訂工程)' 단계로 진입했다는 설명이다.
1980년대 랴오닝(遼寧)성 요하지역에서 황화문명보다 훨씬 앞서는 문명이 존재 했던 사실이 밝혀지면서 중국 문명의 기원을 황하에서 요하로 끌어올리는 작업에 착수했다는 게 우 교수의 설명이다. 그는 "요하 일대에 황하문명보다 2천500여년 앞선 기원전 7천 년에 이미 신석기문화 (요하문명의 일부인 홍산(紅山)문화)가 존재했음을 알리는 유물들이 속속 발견되고 있고 기원전 3천500-3천년(홍산문화 후기)에는 이미 초기 국가형태가 갖춰졌음이 규명됐다" 고 전했다.
우교수는 이어 "홍산문화 주도세력을 오랑캐인 동이족이나 예 · 맥족의 것으로 치부했던 중국 역사계는 1990년대 후반 들어 전설의 인물이었던 황제의 후예들이 홍산문화를 건설한 것으로 정리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결국 세계 최고(最古)의 문명인 홍산문화 주도세력이 황제족이며 홍산문화가 중국 문명의 기원인 만큼 중국 내 모든 민족의 시조는 황제라는 논리가 안착된 것" 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이렇게 되면 요하를 발원지로 하는 웅녀족과 고조선의 단군 등 우리 민족의 선조 역시 자연스럽게 황제의 후예가 된다" 며 "중국의 국사 수사 공정은 동북아시아 문명, 더 나아가 세계 문명의 기원을 통째로 바꾸려는 거대한 고대사 재편 작업" 이라고 지적했다.
중국은 국사 수정 공정과 병행해 중화민족의 시원(始源)으로 삼은 요하문명 유적지 정비와 홍보에도 적극적이다. 2006년 신축된 랴오닝성 박물관은 요하문명을 중화문명의 기원지로 알리는 '요하문명전'을 상설 운영하고 있으며, 요하 문명 발굴지인 츠펑(赤峰)과 아오한치(敖韓旗) 등에는 요하문명을 알리는 대규모 박물관들을 잇따라 개관했거나 건설 중이다. 또 홍산문화의 핵심 유적지로, 초기 국가가 출현했음을 알리는 천단(天壇) 등이 발굴된 니우허량(牛河梁) 유적지 전체를 돔 구조물로 덮은 채 대형 박물관을 건설하고 있으며 이 유적지를 세계문화유산 등재 신청을 해놓고 있다.
지난해 만리장성의 동쪽 끝을 산해관(山海關)에서 단둥(丹東)의 고구려 박작성 (중국명칭은 후(虎)산성)까지 연장한 것이나 발해를 말갈족이 건설한 중국 변방 국가로 규정하고 발해 후기의 왕궁인 헤이룽장(黑龍江)성의 상경용천부 유적을 2015년까지 대대적으로 복원키로 한 것도 국사 수정 공정 완성을 위한 준비 작업인 셈이다. - 연합뉴스 2010.09.01
동북공정의 결정판 ‘요하문명론 (遼河文明論)’
- 우실하 (한국항공대 교양학부 교수, 사회사상, 한국문화사)
1. ‘동북공정’의 후속으로 ‘요하문명’을 새롭게 설정 …
동북공정에 대해서 많은 이들이 분노하고 있는 사이에, 중국에서는 그 후속 논리 로 요동과 요서를 포함한 만주지역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요하문명권’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물론 그 요하문명권 내의 모든 고대 민족들은 모두 중화민족이라는 전제가 깔려있다.
결국, 하상주단대공정(夏商周斷代工程)→중화문명탐원공정(中華文明探源工程)→동북공정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역사관련 공정들의 최종 목표는 세계 최고(最古)의 ‘요하문명’ 을 바탕으로 ‘대중화주의’ 를 완료하는 것이라고 보인다. 모든 공정이 완료되는 순간 고구려, 발해는 물론이거니와 이 지역에서 발원한 고조선까지도 완벽하게 중국사에 편입되는 것이다.
2. 만주지역 ‘요하문명권’을 세계 최고(最古)의 문명권으로
이제까지 중국은 중국 역사의 근원을 북경원인의 출토지인 북경 인근의 구석기 시대와 황하 중류의 신석기시대 앙소문화(仰韶文化)를 포함하는 ‘황하문명권’ 으로 잡고 있었다. 앙소문화는 기원전 3000년까지 올라가는 농경 신석기문화로, 유목을 바탕으로 한 북방문화와는 구별된다. 예로부터 중화민족은 만리장성을 ‘북방한계선’ 으로 하여 북방 민족들과는 분명한 경계를 두었었다.
그런데 20세기 중반이후 장성 밖 동북 만주지역에서 중원문화보다 시기적으로 앞서고 더 발달된 신석기문화가 속속 확인됐다. 이 지역 신석기문화인 소하연 (小河西)문화는 기원전 5500년, 사해(査海)문화는 기원전 5000년까지 올라간다. 특히 기원전 3500년까지 올라가고 대규모 적석총과 제단이 확인된 요하(遼河) 일대의 홍산문화(紅山文化)의 발견은 중국으로서는 충격이었다.
요하 일대의 각 유적에서는 중원문화권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한반도에서 많이 보이는 빗살무늬토기, 고인돌, 적석총, 비파형동검, 다뉴세문경 등이 대량으로 발굴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모두 내몽골-만주-한반도로 이어지는 북방문화 계통이었던 것이다. 한반도는 이 ‘요하문명권’을 바탕으로 중원문명을 흡수하며 역사를 형성해 왔고, 중국은 이러한 요하문명권과 한반도의 연계성을 단절하고, 요하문명권을 세계 최고(最古)의 문명권으로 만드는 작업을 국가의 전략으로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80년 초 ‘통일적다민족국가론’을 바탕으로 ‘현재의 중국 국경 안에 있는 모든 민족의 역사를 중국사에 포함’하려는 중국은, 황하문명권보다 이르고 발달된 ‘요하문명권’ 을 중화문명의 발상지의 하나로 재정립하고 있다. 곧, ‘중국의 요하문명권’ 이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보다 이른 세계 최고(最古)의 문명이라는 논리를 만들어 가고 있다.
2005년 7월 24-31일까지 적봉에서는 홍산문화 명명 50주년을 기념한 <홍산문화 국제학술대회>가 열렸다. 중국학자 100여명과 외국의 학자 15명을 초대하여 50여 편의 논문이 발표되었다. 중국 학자들도 홍산문화의 주인공을 예맥족의 문화로 본다. 그러나 이런 학술대회를 통해 중국의 홍산문화를 주도한 예맥족들이 남하하여 고구려 등을 세운다는 논리를 전파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2006년 6월부터 9월까지 심양 요녕성박물관에서 <요하문명전>이 열리고 있다. 이 전시의 핵심 주제인 ‘화하일통(華夏一統)’은 중국(華夏)이 요하문명권을 통일(一統)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상론한다.
이런 요하문명권을 확립하기 위한 선행 작업으로, 9차 5개년 계획인 ‘9.5계획(1996-2000)’에서는 ‘하상주단대공정’이 진행되었다. 대대적인 발굴, 연대 측정, 일식·월식 기록의 비교 연구 등을 통해서 하(夏)·상(商)·주(周)의 존속 연대를 공식적으로 확정지었다. 하(夏)나라 존속연대( B.C. 2070 - B.C. 1600)의 공식화는 중국의 ‘역사시대’를 무려 1229년이나 끌어 올린 것이다.
‘하상주단대공정’의 후속 작업으로 ‘10.5계획(2001-2005)’의 일환인 ‘중화문명탐원공정’을 시행하고 있다. ‘중화문명의 근원을 탐구한다’는 ‘중화문명탐원공정’은, (1) 신화와 전설의 시대로 알려진 ‘3황 5제’의 시대까지를 중국의 역사에 편입하여 중국의 역사를 1만 년 전으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1) 황제이 손자인 고양씨(高陽氏) 전욱(顓頊)과 고신씨(高辛氏) 제곡(帝嚳) 두 씨족 부락이 지금의 하북성과 요녕성이 교차하는 유연(幽燕)지역에서 살면서 모든 북방 민족들의 시조가 되었으며, (2) 만주지역 ‘요하문명권’의 핵심인 홍산문화는 고양씨 전욱 계통에 의한 문명이며, (3) 고주몽의 ‘고’씨 성도 고양씨의 후예이기 때문에 붙은 것이라고 본다. 결국 이집트나 수메르 문명보다도 오래된 ‘세계 최고(最古)의 문명’임을 밝히려는 거대한 프로젝트인 것이다.
‘요하문명권’을 통해 21세기 ‘대 중화주의’의 청사진을 그려가려는 중국의 입장에서 가장 시급한 과제는, 역사적으로 한민족과 경계를 다투던 만주지역을 확실하게 중국사로 편입해서 한반도 통일 이후에도 논란이 일지 않을 정도로 확실하게 ‘대 한국(혹은 한반도) 전략’의 수립하는 것이었다. 그 구체적인 전략이 동북공정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보인다.
3. <요하문명전> 각 전시실의 주제 및 핵심적인 내용
우리가 주의해서 보아야할 것은, (1) 제1전시실에서 보듯이 ‘중화문명의 첫 번째 서광이 요하 유역에서 일어났다.’ 고 보는 시각과, (2) 제2전시실에서 보듯이 이 지역이 ‘상 · 주 시대부터’ 중원왕조에 속해 있었고, 이 시기에 소수민족들은 이미 ‘다원일체(多元一體)’ 의 관계로 중화민족 안에 들어왔다는 시각, (3) 제3전시실 에서 보듯이 진(秦) · 한(漢) 시대를 기점으로 이 지역이 중원왕조의 판도에 들어 왔고, 이 시기에 고구려를 포함한 각 소수민족들이 ‘중국역사상 가장 규모가 큰 민족 대융합’ 을 통해 ‘중화민족으로 통일’ 되었다는 시각이다.
이런 요하문명권 논리를 바탕으로 동북공정을 실질적으로 주도하고 있는 학자 가운데 하나인 경철화(耿鐵華: 통화사범대학 고구려연구소 부소장 겸 교수)는 “요서 지방에서 발생한 홍산문화가 서쪽으로 가서 은(商)나라를 세우고, 동쪽으로 옮겨와 고구려와 부여 같은 나라의 기원이 되었다.” 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중국에서는 아즈텍문명, 마야문명을 일으킨 이들도 상나라의 후예들이라는 논리도 개발하고 있다.
4. 요하문명의 진정한 주인은 누구인가?
‘하상주단대공정 → 중화문명탐원공정 → 동북공정’ 으로 이어지는 역사관련 공정들은 거대한 ‘대(大) 중화주의’ 건설 전략의 일부이다. 동북공정은 ‘대 중화주의’의 청사진인 ‘요하문명’의 밑그림을 그려 가는데 방해가 되는 동북지역의 논란거리를 제거하기 위한 것으로, 정치 경제 문화 역사를 망라한 종합적인 국가 전략의 일부분에 불과할 뿐이다.
일련의 역사관련 공정들이 정리되면, ‘중국’의 ‘요하문명권’은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를 제치고 1만년의 역사를 지닌 ‘세계 최고(最古)의 문명’으로 거듭나게 될 것이고, ‘민족적 자긍심을 높이기 위해’ 하상주단대공정을 건의했다는 청화(靑華)대학 송건(宋建) 교수의 꿈이 이루어질 지도 모른다. 우리는 무었을 해야 할 것인가? 새롭게 출범할 동북아역사재단은 요하문명권의 진정한 주인이 누구인지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

‘제5의 문명’ 요하는 ‘중화’ 역사엔 없었다
[한민족 시원, 만주] 제2강 동방 르네상스를 꿈꾸다 (1)
용 옥 토기 주거지 등 중국문화 최초 상징 뿌리 BC 6천년 한반도-요하 단일 문화권, 유물 증거
일본강점기까지 ‘만주’라고 불렸던 중국의 동북 3성인 랴오닝성, 지린성, 헤이룽장성은 고조선은 물론 고구려, 발해 등의 터전이었고, 일제강점기에는 항일독립운동이 펼쳐진 우리 민족의 주요한 활동무대였다. ‘민족의 성산’ 백두산 곳곳에는 한민족의 숨결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최근 만주 일대에서는 고조선과 관련이 있는 유적과 유물이 잇따라 발굴되고 있다. 그런데 중국은 만주에서 펼쳐진 우리 민족의 역사를 자신들의 역사로 복속하려는 동북공정을 추진하고 있다. 자칫 웅대하게 펼쳐졌던 우리 민족의 역사가 증발할 위기에 처한 것이다.
평화인권단체인 좋은벗들(이사장 법륜스님)은 해마다 우리 역사의 뿌리를 찾아 ‘만주 역사기행’에 나서고,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역사특강을 개최한다. 지난해 11월 서울 서초구 평화재단에서 다섯 차례에 걸쳐 열린 역사특강 ‘청년, 역사를 만나다’는 동북아 문명의 시원인 요하문명으로부터 시작해 고조선, 고구려, 발해의 역사와 항일독립운동의 발자취를 따라갔다.
<한겨레>는 법륜 스님 등 다섯 명의 특강 내용을 11차례로 나눠 영상과 함께 <인터넷한겨레>에 싣는다. 우리 민족사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다잡고 역사적 지평을 넓히는 길안내다. (편집자)
최근에 요하문명에 대해 사람들이 많이 궁금해 하기 시작했다. 한국방송 ‘역사스페셜’(<제5의 문명 요하를 가다> 2009년 8월29일 방영)이 방송된 뒤에 많은 사람한테 전화를 받았다. 어떤 역사 교사가 전화를 해서 “학교에서 어떻게 가르쳐야 되느냐”고 묻더라. 아직 역사 교과서에는 단군이 신화로만 나오는데, 단군의 실체에 대해 학생들이 물어보고, “요하문명이 우리 문화와 연결돼 있는데, 왜 우린 그런 것을 배우지 않느냐”고 묻는다는 것이다. 교사들도 혼란스럽다고 한다. 이제까지 아무도 모르고 어떤 기록에도 없는 새로운 문명이 발견되었으니까 혼란스러운 것도 당연하다.
500년 앞선 하모도문화 발견에 중국이 난리 나 기원론 수정
우리는 지금까지 교과서를 통해 황하문명이 세계 4대 문명의 하나라고 배웠다. 중국문명뿐만이 아니라 한반도를 포함한 동아시아 문명의 시발점이 황하문명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1973년에 장강하류에서 하모도문화라고 명명된 어마어마한 신석기 유적이 새롭게 발견된다. 이 하모도문화는 기원전 4500-4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앙소문화(황하문명의 중심적 신석기시대 유적)보다 최소 500년에서 1천 년이 앞선다. 중국 전체가 난리가 났다. 그래서 이를 장강문명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때부터 중국에서는 중화문명은 황하문명에서 출발했다는 단일기원론이 아니라 황하문명과 장강문명 두 곳에서 시작됐다는 다기원론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두 군데에서 문명이 시작됐다고 보기 시작한 것이다.
하모도문화권에서 어떤 유적들이 발굴됐을까? 그때 이미 물을 가두어 농사를 지었다. 논둑을 만들어 물을 가두고 씨를 뿌렸던 것이다. 모를 길러서 심는 이양법을 제외하면 현재 우리가 하는 논농사와 다를 바가 없다. 그런 유적이 대규모로 나온다. 그것이 기원전 5천 년까지 올라가는 하모도문화다. 이것은 황하문명과는 다른 문명이다.
‘오랑캐 땅’ 의 앞선 문명인 옥기시대에 중국 더 큰 혼란… 세계도 깜짝
장강문명이 새롭게 발견되었을 때만 해도 중국학계의 혼란은 그렇게 크지 않았다. 어차피 중국 땅에 있으니까…. 중국 사람들은 만리장성 밖은 다 야만인의 세계로 보았다. 실제로 만주 일대에서 변변한 문화 유적이 발견된 적도 없었고, 새로운 유물이 발견되면 모두 황하문명 지역에서 전파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1980년 초 만리장성 북쪽 요서 지방 일대에서 어마어마한 신석기 유적이 무더기로 발굴되기 시작했다. 그게 요하문명이다. 현재까지 발견된 것은 기원전 7천 년까지 올라가는 소하서문화가 가장 이른 시기인데, 그보다 더 이른 시기의 유적과 유물이 나올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우리 인식 속에 요동, 요서, 만주를 생각하면 말 달리던 선구자 생각나고, 수렵 · 목축하는 유목민을 떠올리는 정도일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어마어마한 새로운 신석기 유물이 계속 나오니까 중국뿐 아니라 전 세계가 깜짝 놀랐다. 홍산문화(紅山文化·기원전 4,500~3,000년) 단계에 오면 이미 초기 문명단계, 초기 국가단계에 진입한다고 이야기를 한다. 문명이라는 말은 아무 데나 붙이는 것이 아니다. 문명이라고 불릴 정도라면 그 문명단계가 성립할 대표적인 유물과 유적이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청동기가 나오든지, 문자가 나오든지, 권력분립이 일어났다든지 하는 여러 가지 징표들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아직까지는 요하문명의 꽃이라고 불리는 홍산문화 시기에서는 청동기나 문자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청동기나 문자가 없는 문명단계, 국가단계는 세계 역사에서 많다. 단적인 예로 몽골제국은 전세계를 제패한 대제국이었지만 문자가 없었다. 제국 형성 이후에 필요에 의해서 새롭게 문자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중국학자들은 이제까지 우리가 서양의 역사를 중심으로 시대를 구분했던 타제석기, 마제석기, 청동기, 철기라는 시대 구분은 동북아시아에서 적용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동북아시아의 경우에는 신석기시대를 대표하는 타제석기와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청동기 중간에 옥기시대를 새롭게 넣어야 한다는 것이다.
모순에 빠진 중국이 역사 재편 작업 들어간 것이 동북공정
이렇게 신석기 문화를 발견한 것까지는 좋은데, 발굴하고 나니까 중국 입장에서는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오랑캐의 땅이라고 했던 지역에서 황하문명보다 시기도 더 앞서고, 문화의 발전수준도 더 높은 유물이 무더기로 쏟아지니까 기존의 역사학계에서는 난감했던 것이다. 오랑캐의 땅에서 중화문명의 중심인 황하문명보다 앞선 유적들이 나오니까….
결국 중국은 요하문명의 발견과 더불어서 상고사에 대한 전체적인 재편 작업에 들어갔다. 중화문명은 요하문명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중국은 “요하 일대는 원래 중화민족의 시조라는 황제의 영역”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여기가 황제가 활동하던 곳이고, 황제가 여기서 문명을 건설하고 내려오면서 또 중원에서 문명을 이뤘다고 주장한다. 이런 이유로 요하 일대에서 발원한 모든 소수 민족은 모두 황제의 후예라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중국의 일부 학자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의 기라성 같은 학자들이 다 그렇게 이야기를 한다. 수많은 논문들이 요하문명을 전설적인 인물인 황제와 연결하고 있다.
최근 고구려사가 중국사라고 한 동북공정 때문에 말이 많다. 동북공정은 고구려 공정이 아니다. 동북공정의 진짜 의도는 동북지역의 모든 소수민족의 역사를 전부 중국사로 만들려는 것이다. 신화부터 시작해서 요하 일대에서 기원한 고조선, 단군, 해모수, 주몽 전부 다 황제의 후예라는 것이다. 우리 한민족은 황제의 후예인가? 단군의 후예인가? ‘그래 너희는 단군의 후예인데, 단군이 바로 황제의 후예다.’ 이런 논리로 가고 있다. 지금, 요하문명 때문에 중국의 상고사와 고대사가 모두 재편되고 있다.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요하문명 세력이 진짜 중국 황제의 후손이었나?
자 그럼 이 지역에서 무엇이 발견되었는지, 사진 자료 중심으로 보여주겠다. 그 문명의 주도세력은 누구였는지? 진짜 황제의 후손이었는지 확인해 보도록 하자.
요하문명은 요하를 끼고 형성된 문화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요하 상류는 내몽고자치구의 동북쪽에서 랴오닝성 발해만에 이르는 큰 강으로 수많은 지류를 지니고 있고, 이게 발해만으로 흐르는데 ‘ㄱ’자 모양이라고 보면 된다. 요하를 중심으로 신석기 문화인 △소하서문화(기원전 7,000~6,500년) △흥륭와문화(기원전 6,200~5,200년) △사해문화(기원전 5,600~) △부하문화(기원전 5,200~5,000년) △조보구문화(기원전 5,000~4,400년)가 형성되었다. 홍산문화는 전기와 후기로 나뉘는데, 전기는 신석기시대(기원전 4,500~3,500년)로 출발해 후기에 석기와 청동기가 혼재된 문화(동석병용시대·기원전 3,500~3,000년)로 발전하였다. 홍산문화 후기에 들어 초기국가단계로 진입한다.
| | » 요하지역 중요 신석기문화 지역 분포도 (출처: 우실하 ‘고조선의 강역과 요하문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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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석병용시대는 소하연문화(기원전 3,000~2,000년)에서도 발견되었고, 이후 초기 청동기시대인 하가점하층문화(기원전 2,000년부터)를 거쳐 고급 문명사회로 발전하게 된다. 이렇게 구분하는 것은 유물이 최초로 발견된 지역의 지명을 따 붙인 것이고, 지금도 수없이 많은 유물이 발굴되고 있다. 홍산문화만 하더라도 지금까지 발견된 지역이 500곳이 넘는다. 한 예로 홍산문화의 중심지인 적봉시 인근 오한치박물관에 가면 하가점-하층문화가 발견된 지역만 2천 곳이 넘는다.
중국 본토에선 없던 고조선 상징 비파형동검, 한반도에선 무더기로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홍산문화와 하가점-하층문화다. 홍산문화는 요하문명의 꽃이다. 요하문명이라고 하면 소하서, 흥륭와, 사해문화 등을 모두 포함하지만 문명단계로 진입하는 시기가 홍산문화이기 때문에 가장 중요하게 친다. 홍산문화가 요하문명의 꽃이라면 우하량 유적지는 홍산문화의 꽃이다. 여기서 제단터와 여신상 등 홍산문화를 상징할 유적과 유물이 쏟아졌다.
나를 포함해서 많은 학자가 하가점-하층문화가 고조선과 연결된다고 보고 있다. 이 지역에서 고조선의 상징인 비파형동검이 대량 발굴되었기 때문이다. 비파형 동검은 요동과 요서지역에서 폭넓게 발굴이 되었고, 산둥반도에서 1~2개가 나온다. 그 다음 한반도에서 무더기로 나온다. 중국 본토나 다른 곳에선 전혀 나오지 않았다. 이제부터는 요하지역 중요 신석기문화 지역에서 발견된 주요 유적들을 시기별로 살펴보자.
세계 최초 요하 옥기와 비슷한 유물 전남 여수에서도 발굴
| | » 흥륭와문화의 ‘세계 최초의 옥 귀걸이’ 발굴 모습. 우실하 교수 제공. 그래픽 문석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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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륭와문화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이 옥기다. 이 지역에서 옥결(옥 귀거리)이 인골과 함께 출토되었다. 기원전 6천 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니까 세계 최초로 인간이 가공한 옥기다. 그런데 흥륭와문화와 같은 모양의 옥결이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문암리유적에서 나왔다. 기원전 6천년까지 올라간다고 보고 있는 유적이다. 2007년에 전남 여수에서도 비슷한 옥결이 인골과 함께 발굴되었다. 모양이 흥륭와문화 옥결과 똑같다. 이들 유물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을까?
| | »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문암리 문암리유적에서 나온 옥 귀걸이(사적 426호). 기원전 6,000년 이상으로 연대가 추정된다. 우실하 교수 제공 | |
| | | 흥륭와에서 나온 옥결이 중국 내에서 어떻게 전파되었는지 연구한 사람이 있다. 홍콩 중문대학의 등총교수는 세계적인 권위를 인정받는 옥기 전문가다. 그의 논문을 요약하면 이렇다. “기원전 6000년께 요서지역 흥륭와문화에서 시작된 옥결은 기원전 5000~4000년께 장강유역에 전파되고, 기원전 2500년께 중국 광동성 광주 근처 주강유역까지 퍼졌다. 옥결은 기원전 2000년께 더 남쪽인 베트남 북부까지 전파되고 기원전 1000년께 운남성 일대와 베트남 남부까지 시간 차를 두고 확산되었다.”
한반도에도 비슷한 시기에 옥결이 유입되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흥륭와 옥의 성분을 분석했더니 직선거리로 400km 떨어진 랴오닝성의 수암이라는 지역에서 생산된 옥으로 밝혀졌다. 수암에서 조금만 더 가면 압록강이고 두만강쪽으로 동해를 타고 내려오면 문암리로 연결된다. 흥륭와 일대에서 발견되는 빗살무늬토기도 문암리 유적에서 똑같이 나온다. 이게 뭘 의미하느냐? 기원전 6천년에 흥륭와문화 단계에서는 한반도 북부지역과 요서, 요동 지역이 하나의 단일 문화권이었다는 이야기다.
| | » 전남 여수시 안도패총유적에서 나온 귀걸이와 발굴 당시 사진. 안도패총의 귀걸이는 화산지역에서 나오는 흑요석도 나오는 것으로 보아, 장강하류를 통해서 보다는 백두산 지역에서 백두대간 동쪽 동해안을 통해 내려온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 남해안의 흑요석은 일본 화산지대의 것이라는 연구결과도 있다. 성분 분석이 필요하다. 우실하 교수 제공. 그래픽 문석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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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상식을 깬 집단 거주지와 농경문화
흥륭와문화지에서 눈여겨볼 또 하나의 유적은 신석기시대 집단 주거지역인 ‘화하제일촌(중국 전체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집단 주거지)’이다. 이 주거지는 놀랍게도 해자 혹은 환호(외적이나 맹수의 접근을 막으려고 주거지 주변을 빙 둘러서 참호를 판 것)가 있는데, 폭이 4m, 깊이가 2m나 된다. 여기에서 150여 가구가 집단으로 거주했다는 것이다.
이런 집단 주거지가 흥륭와 일대에서 3곳이 발굴되었다. 해자나 환호는 적과 사나운 짐승으로부터 주거지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이때부터 완전한 형태는 아니지만, 기초적인 정착생활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 불에 탄 조와 기장이 무더기로 발굴되었는데, 이미 농경이 시작되었다는 명백한 증거다. 야만인의 땅이라고 믿어온 만주일대에서 기원전 6000년에 집단 거주지와 농경문화가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역사적 상식을 깨는 것이다.
| | » 신석기시대 집단 주거지역인 ‘화하제일촌’. 아래 부분에 사람이 들어가 있는 곳이 해자 혹은 환호이다. 우실하 교수 제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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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흥륭와문화 유적지에서 발견된 치아 수술 흔적. 우실하 교수 제공. 그래픽 문석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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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6천 년 이미 인공적인 치아 수술 흔적
위 사진은 흥륭와에서 발견된 치아 수술 흔적이다. 중국, 일본 학자들이 이것을 발굴하고 4년을 고민했다고 한다. 진짜 수술 흔적 같기는 한데, 기원전 6천년 흥륭와문화 시대에 치아 수술을 했다는 것이 도저히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 학자들이 이 유골을 가져가서 4년간 집중연구를 해 2008년 2월 정식으로 기자회견을 했다. 틀림없이 인공적인 치아수술 흔적이라는 것이다. 두개골이 그대로 나왔고, 치아에 뚫린 구멍의 직경이 모두 같고 도구를 이용한 연마흔적도 발견되었다.
현미경 사진을 찍어봤더니 나선형 연마흔적을 발견했고 이것은 인공적인 도구를 사용하여 구멍을 뚫은 것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충치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 인공적으로 뚫은 것이다. 그래서 정확한 수술 흔적이라고 보는 것이다. 두개골 수술은 유럽에서 기원전 7천 년으로 추정되는 유물이 발굴되었고, 중국에서도 기원전 4,500년 두개골 수술 흔적이 발견되었다. 이렇게 이른 시기에 치아 수술 흔적이 발견된 것은 흥륭와 유적지가 유일하다.
| | » 사해문화시대 집단 주거지인 요하제일촌(사진 위)와 마을 한가운데 돌로 쌓은 용 형상물(사진 아래). 중국 학자들은 중화제일용이라고 부른다. 우실하 교수 제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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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해문화는 흥륭와문화 보다 시기는 조금 뒤지지만 연대는 거의 비슷하다. 두 문화가 비슷해서 보통 사해-흥륭와문화 또는 흥륭와-사해문화라고 함께 부르기도 한다. 사해유적 가운데 대표적인 곳이 요하제일촌이다. 이 집단 주거지가 발견돼 사해문화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 여기도 해자 혹은 환호가 있고, 100여 가구가 살았다.
이 유적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마을 한가운데 있는 용 모양의 조형물이다. 주먹보다 조금 큰 돌을 쌓아서 용 형상물을 만들었다. 길이가 19.7m, 폭이 넓은 곳은 2m, 좁은 곳은 1m다. 중국학자들은 ‘중화제일용’이라고 부른다. 사해유적에서는 용문 도편도 나온다. 뱀이 똬리를 튼 그림이 새겨진 토기 조각이 발견되었는데 중국학자들은 이게 용에 대한 최초의 유물이라고 주장한다.
조보구문화 시대에는 최초의 봉황이 등장한다. 기원전 5,000년께 새 형상 그릇이 발견되었는데, 중국학자들은 이를 ‘중화제일봉’이라고 부른다.
채색 토기, 황하문명은 서역 전래설…요하문명은 독자적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조보구의 채도(채색으로 장식한 토기) 존형기다. 그릇 형태가 특이하고 매우 정교한 그림이 그려져 있다. 앙소문화에서 채도는 아주 넉넉하게 잡아도 기원전 4,500년인데, 조보구의 채도는 앙소문화보다 최소한 500년이 더 앞선 것이다.
앙소문화의 채도는 단순 기하문이거나 고기나 사람 얼굴을 그렸다면 조보구의 채도는 디자인이 훨씬 뛰어나고 정교하다. 채도를 평면으로 펴보면 현대적 디지인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거기에 사슴, 돼지, 새 등의 머리를 한 용이 그려져 있다. 녹수룡, 저수룡, 조수룡이라고 부른다. 아마도 조보구문화 시대에 신성시 했던 주요 토템 동물들일 것이다.
| | » 조보구문화 소산유적 존형기의 신령도안. 우실하 교수 제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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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도 존형기가 의미하는 것은 요하문명이 독자적인 토기문화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황하문명을 대표하는 앙소문화의 채도가 서방에서 전래했을 것이라는 ‘채도서역전래설’이 세계 고고학계의 상식이다. 앙소문화 채도와 거의 똑같은 것이 서남아시아, 메소포타미아, 중앙아시아에서 기원전 6,000년경부터 발견된다. 지금까지는 채도가 서방에서 들어와 앙소문화 지역을 거처서 요서 지방 일대로 넘어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조보구 채도가 그릇의 모양도 다르고 500년이나 앞서 있는 것을 보면 새로운 유입 루트를 상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처럼 오늘날 중국문화를 상징하는 최초의 옥, 최초의 용, 최초의 주거지, 최초의 토기, 최초의 치아 수술 흔적 등이 모두 요하문명에 뿌리를 두고 있다. 우실하 교수, 정리=박종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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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실하 교수(사진)는= 한국항공대학교 인문자연학부 교수. 중국 요녕대학 한국학과 교수 역임. 문화사와 사상사, 문화종속론, 문화이론, 동양사회사상 전공. 주요 저서로 ‘오리엔탈리즘의 해체와 우리 문화 바로 읽기’(1997), ‘전통문화의 구성원리’(1998), ‘동북공정의 선행 작업과 중국의 국가전략’(2004) , ‘전통음악의 구조와 원리’(2004), ‘동북공정 너머 요하문명론’(2007), 등 7권의 단독 저서와 ‘고대 동북아 연구’(2008), ‘동북공정과 한국학계의 대응논리’(2008) 등 8권의 공저가 있다. 우리민족의 문화와 사상의 원류를 밝히는 연구를 하고 있고, 상고사를 복원하는 일에 관심이 남다르다. 홈페이지 www.gaonnuri.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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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보다 앞선 문명, 하늘 열고 평화국가로
[한민족의 시원, 만주] 제1강 대한민국 청년에게 고함 (2)
‘전설 따라 삼천리’가 아닌 역사 유물 쏟아져 북한 고립-남한 상실, 열린 민족주의로 가야
역사특강 1부 보러가기
우리 민족 상고사를 위부터 다시 정리하면 환인의 한나라, 환웅의 배달 나라, 단군의 고조선이다. 구전되어 오던 상고사를 기록한 <환단고기>에 따르면 환인의 한나라는 약 3,300년간 지속됐다.
그럼 이 시대의 왕은 몇 명이나 됐을까? 이 기간이면 최소 70~80명은 되어야 한다. 그런데 현재 전해 내려오는 이름은 7명밖에 없다. 7명이 통치한 나라의 역사가 3,300년이나 되니까 1명당 약 500년씩 통치한 셈인데 그러면 논리적으로 맞지 않다. 그 수많은 통치자 중에 워낙 오래된 얘기라 현재까지 이름이 남아있는 사람은 7명밖에 없다고 이해해야 한다.
환인의 한나라가 어디쯤 있었겠느냐? (어디에서 왔을까?) 현재까지는 알 수 없다. 설은 여러 가지다. 바이칼 호 근방에서 남하했다는 설과 중국 서북쪽 톈산산맥 부근에서 이동해 왔다는 설이 있다. 환인 시대에 이어 환웅이 세운 배달 나라는 현재 여러 가지 고고학적인 유물과 결합시켜 보면 발해만 연안지역으로 보인다.
| | » 환웅세력 이동 추정도. 바이칼호 근방에서 남하했다는 설과 중국 서북쪽 톈산산맥 부근에서 이동해 왔다는 설이 있다. 그래픽 문석진 | |
| | | 그래서 요즘은 멀리서 이동해 온 것이 아니고, 바로 가까이(발해만 연안지역 인근)에서 기원했을 것이란 설도 제기된다. 그 당시에 수만 리를 이동해 가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객관적인 사료의 부족으로 환인의 한나라의 위치가 어디인지는 아직 추정하기 어렵다. 그냥 옛날 기록으로만 말한다면 하늘나라, 신의 나라로만 인식되었다.
▶환인 시대, 민족의 근원이지만 시작은 아니다
황웅 무리가 이동해 온 경로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환웅은 “천손이다. 하늘에서 왔다”고 주장했다. 문화수준도 토착민들에 비해 월등히 높았고, 옷도 잘 입으니까 원주민들은 저 사람들은 하늘에서 내려온 신의 후예들이라 믿었을 것이다. 어쨌든 문화사적으로 보면 좀 더 선진 문명을 가진 지역에서 발해만 연안지역으로 이동해 왔다고 볼 수 있다.
이를 미국 역사와 비교해 설명해 보자. 미국은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날로 나라의 역사를 따지면 200년밖에 안 되는 역사다. 그런데 청교도들이 영국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온 역사까지 따지면 더 올라갈 수 있다. 그렇다고 미국과 영국을 같은 나라로 보진 않는다. 뿌리는 같지만, 엄격히 다른 나라다. 영국에 뿌리를 둔 나라는 캐나다, 뉴질랜드도 있다. 그런 것처럼 한 나라에 뿌리를 둔 나라와 민족은 우리만이 아니라 여러 나라가 있을 수 있다. 그래서 한나라에서 시작해 12갈래로 민족과 나라가 갈라졌다거나 9갈래로 갈라졌다는 설이 있다.
| | » 동아시아 인종 분포도. 한나라로 시작해 12갈래로 민족과 나라가 갈라졌다거나 9갈래로 갈라졌다는 설이 있다. 그래픽 문석진 | |
| | | 따라서 한나라가 우리 민족사의 근원이라고 말할 순 있지만 우리 민족사의 시작을 한나라부터 잡기는 어렵다. 우리 민족사의 시작은 환웅이 이동해 와서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에 새로운 나라를 연, 신시를 연 때부터로 잡아야 한다. 이를 개천(開天)이라고 한다.
▶고대 동북아의 중심지, 발해만 연안의 ‘신시’
중국의 랴오닝성 서쪽, 허베이성 동쪽, 몽골자치구 남쪽이 만나는 발해만 연안지역은 동북아 문명의 중심지였다. 요하강 상류지역에 위치하고, 아래 대릉하가 흐른다. 환웅이 내려와서 처음 나라를 세우고, ‘신시’를 건설했다고 할 만한 지역이다. 신시는 새로운 나라를 세웠다는 의미에서 신시(新市)라고 할 수도 있고, 신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라고 해서 ‘귀신 신’(神)자를 써서 신시라고 할 수도 있다. 신시를 세웠다는 말은 새 나라를 세웠다는 것이다.
보통 선진 부족이 후진 부족에 와서 나라를 세울 때는 주로 정복 국가를 세운다. 토착민을 다 정복해서 노예로 부리고 영토를 뺏어서 나라를 세운다. 그런데 이 나라는 고도의 문명이 발달한 평화국가였다. 토착민들을 이롭게 하기 위해, 그들을 돕기 위해, 문화 수준을 높이기 위해 나라를 세웠다고 했다. 그게 홍익인간(弘益人間)이다. 국가를 세우면서 ‘선진문명을 가진 부족이 후진문명의 지역에 와서 그들의 이익을 위해 나라를 세웠다’고 선포한 것은 인류사에 드문 일이다. 나중에 실제로 그랬는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몇 천 년 전 원시적인 문화를 가진 집단들이 그렇게 선포했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다. 이게 홍익인간 정신이다.
| | » 환웅시대 신시 추정도. 중국의 랴오닝성 서쪽, 허베이성 동쪽, 몽골자치구 남쪽이 만나는 발해만 연안지역으로 추정된다. 그래픽 문석진 | |
| | | 두 번째, 재세이화(在世理化)다. 쉽게 말하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이 땅에서도 이루어질지어다’라는 성경 구절과 과 같은 의미이다. 하늘이란 것은 선진문명이다. 그 법치, 문명, 도덕을 원시인들이 사는 미개한 나라에 와서 그대로 실현하겠다는 통치철학이다. 이는 이치를 말하는데, 이치란 곧 하늘의 법도다. 홍익인간, 재세이화는 그것 자체로 종교가 될 수 있을 정도로 굉장한 이야기다. 이렇게 신시가 탄생했다.
▶환웅시대, 청동기 문명으로의 전환
이 시대의 문명은 이미 상당한 수준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환웅이 신시를 건설할 때 3,000명의 무리를 끌고 왔다고 했다. 당시 씨족, 부족이 고작 몇 십 명, 몇 백 명 단위였으니 엄청나게 큰 무리다. 이 사람들은 원시 채집의 수준을 훨씬 넘어서는 문명을 가졌다. 벌써 형벌을 관장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은 법률, 규칙이 있었다는 것이고, 곡식을 관장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농경을 했다는 증거다. 원시부족이 아니고, 초기 국가의 형태를 띤 문명을 가졌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 시대 사람들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징표가 있었다. 그게 ‘천부인’(天符印)이다. 천부인은 청동거울, 청동검, 청동방울이다. 이들이 발달한 청동기 문화를 가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당시는 신석기 시대로 청동기는 상상도 하기 어려운 때였다. 초기에 청동기는 제사 지내는 도구였다. 워낙 귀해서 신이 주신 선물이라 제사 지내는데 썼고, 제례를 지내는 제사장의 징표였다. (당시 제정일치 사회였다가 시대가 흘러가며 국왕과 제사장의 기능이 분화되고 제사장의 지위는 점차 약화되었다. 오늘날 무당이 굿을 하면서 방울과 칼을 흔드는 풍습은 당시 제사장이 지녔던 천부인의 징표에서 유래한다.) 청동기를 가졌다는 것은 천손이라는 징표이고 주변보다 월등한 문화를 가졌다는 상징이다.
| | » 환웅시대 천손이라는 징표가 천부인이다. 천부인은 청동거울, 청동검, 청동방울이다. 그래픽 이규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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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고사 기록에 얽힌 비밀
환웅시대는 1대 환웅천왕으로부터 18대 거불단환웅까지 1,565년이나 지속했다. 18명의 통치자가 있었다는 것인데, 일인당 80년씩 통치했다는 말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딱 18명이라기보다는 남아 있는 이름이 18명이다고 볼 수 있다. 첫 번째와 끝은 사람들이 확실히 알고, 중간에 확실히 행적 있는 사람만 기록에 남는 것이다.
먼 훗날에도 우리가 조선시대 27명의 왕을 다 기억할 수 있나? 처음의 이성계와 끝의 고종은 기억할 것이고, 태종, 세종, 영조, 정조 정도만 기억할 것 아닌가. 예컨대 사료가 다 불타고 내가 조선시대 역사를 우리 후손들에게 남겨준다고 하면 다 기록을 못 하고, 이성계가 나라 건국한 것 좀 쓰고, 태종 좀 쓰고, 세종 좀 쓰고, 세조 때 쓰고, 중간에 빼먹고, 영조·정조 좀 쓰고, 나머지는 지나간다. 이게 세월이 더 흐르면 태조와 고종만 남는다.
그런데 일연이 삼국유사를 쓸 때는 자료가 다 없어진 후니까 환인 시대에는 환인 한 사람, 환웅 시대에는 환웅 한 사람만 쓰고, 단군시대에는 단군 한 사람만 쓰고…. 그럼 환인 아들이 환웅이고, 환웅 아들이 단군이고, 그럼 환인은 3천 년 살아야 하고, 환웅은 천오백 년 살아야 하고, 단군은 2천 년 살아야 한다. 그러니까 이 세 개의 나라가 3대가 된 거다. 비유하자면 고주몽 아들이 왕건이고 왕건 아들이 이성계라는 식으로 상고사가 기록되었다는 것이다. (웃음) 그러다 보니 우리의 상고사 기록이 전설 따라 삼천리처럼 신화 속 이야기로만, 후대 사람들이 지어 낸 과학적 사실이 아닌 허구로만 인식되어 왔던 것이다.
▶환웅시대의 영웅, 14대 치우천왕
환웅시대에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건 14대 자오지 환웅, 치우천왕이다. 이 치우천왕은 청동기를 가지고 제기로만 쓴 게 아니라 무기로 썼다. 청동기로 무기를 만들고 갑옷을 만들고 전쟁에 나가니까 돌 창 들고 싸우는 사람들과 상대가 안 됐다. 그래서 중국 사람들은 치우천왕과 싸워서 황제가 백전백패했다고 기록했다. 청동 투구를 썼으니 머리에 뿔이 났다고 한다. 싸울 때 불이 나고…. (쇠가 부딪히니까 불이 났다고 봤을 것이다.) 그 당시엔 천하무적이었다.
| | » 중국 심양시 요녕성 박물관에 소장된 청동 투구와 청동기 무기. 환웅시대 14대 환웅인 치우천왕은 앞선 청동기로 중국 황제와 싸워 백전백승했다고 전해진다. 조현 기자 | |
| | | 그리고 이때 이런 환웅이 세운 나라가 배달 나라다. 그래서 우리가 ‘배달의 자손’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개천 즉 하늘을 처음 열었다는 개천절은 누구에서 유래한 것일까? 개천절, 홍익인간·재세이화를 단군의 것이라고 기억하는 것은 역사적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단군이 아니라 환웅천왕이다.
▶ 성골에서 진골로 왕위가 바뀐 단군시대
| | » 중국 심양시 요녕성 박물관에 전시된 여신상. 단군신화와 관련이 있는 곰을 섬기는 부족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현 기자 | |
| | | 환웅시대에 선진 천왕족들이 결국은 토착민들의 여자, 토착 귀족의 여자와 결혼을 했을 것이다. 그래서 생긴 자손들은 아버지는 천왕족인데, 어머니를 보면 천왕족이 아니다. 같은 천왕족도 1등급 2등급이 있는 것이다. 처음엔 천왕족만 왕이 되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아버지가 천왕족이고 어머니가 토착민인 자손들도 부족장이 될 수 있었다.
그래서 후대의 부족장들은 순수 천왕족은 없었다. 또 배달 나라가 부패하면서 주변 부족장 중에 뛰어난 사람이 왕이 되었다. 그 사람이 단군이다. 아버지는 천왕족이지만 어머니는 곰족이라고 했다. 이는 곰을 신으로 섬기는, 여신으로 섬기는 부족의 어머니를 둔 아들이라고 할 수 있다. 신라의 경우 왕위가 성골에서 진골로 바뀌었듯, 단군도 이런 식의 왕위 계승 과정을 거쳤다고 봐야 한다.
▶가림토 문자·어아악·조천무… 민족 문화의 원형질이 형성되다
단군왕검은 왕위를 계승하면서 부패한 것을 새롭게 일신했다. 수도를 아사달로 옮기고, 환웅천왕의 신시를 다시 복원하겠다고 말했다. 신시의 옛 법도를 다시 세웠다. 나라 이름도 조선으로 바꾸고, 임금의 칭호를 환웅에서 단군으로 바꿨다. 그렇게 단군의 조선 나라를 세우고, 배달 나라의 역사를 기록했다. 이것을 <배달유기>라 한다.
환웅시대에는 문자가 나왔다고 한다. 사슴의 발자국 무늬를 가지고 글자를 만들어 ‘녹도문’이라고 한다. 단군시대에는 녹도문을 더 발전시켜 한글의 원형인 36개의 가림토 문자를 썼다. 이 문자로 배달의 역사를 기록했다. 그리고 하늘에 제사지낼 때는 ‘어아악’을 부르고, 춤은 조천무를 추었다. 제례 음악과 제례 춤이 생겼다. 우리 민족 문화의 원형질은 단군시대에 만들어졌다.
▶문명의 쇠락과 상고사의 유실
이런 시대(상고사)의 우리 역사는 중국의 역사보다 훨씬 더 앞섰고 앞선 문명을 가졌다. 역사의 법칙이란 중심문명으로 자리 잡은 선진문명이 점점 쇠퇴하고, 변두리에서 영향을 받은 문명이 나중에 번성하는 것이다. 변방은 늘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고, 중심은 몰락한다.
우리가 중국보다 앞선 상고사 문명을 가지고 있었으나 우리의 문명이 쇠락하면서 그것의 영향을 받은 중국 쪽 문명이 새롭게 빛나기 시작했다. 이렇게 나온 게 중국의 한나라다. 한나라가 등장할 땐 이미 조선은 쇠락의 길을 걸었다. 문화수준은 우리가 높았지만 문명이 쇠락할 땐 무력이 약해진다. 신흥강국은 경제력과 무력이 강하다. 결국 중국 한나라의 침공을 받게 되었다. 그 이후에는 우리와 중국의 문명 수준이 비슷해지며 서로 영향을 주고 받다가 최근 1천년 동안은 우리가 거꾸로 중국의 영향을 받았다.
문명이란 것은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 흘러갔다가 도로 흘러오기도 한다. 중국과 우리는 가깝기 때문에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 최근까지 천년 이상을 우리가 중국에 영향을 받았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 문명이 중국 문명의 아류처럼 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를 과장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런 인식이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규명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몇 년 전만 해도 이런 주장은 허황된 이야기였는데, 최근 우리의 상고사를 복원할 유적이 만주 일대에서 잇따라 발굴되고 있다. 환웅, 단군 시대 이야기가 전설 따라 삼천리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임을 증명할 수 있는 엄청난 유적과 유물이 쏟아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요하문명이다.
▶요하문명과 역사공정의 축소판 요하문명전
| » 요하문명전이 열리고 있는 중국 심양시 요녕성 박물관에 길게 줄을 서 있는 관람객들의 모습. 이 박물관에서 가장 인기가 있는 전시는 우리 민족 상고사와도 밀접한 연관이 있는 요하문명전이다. 최근 요녕성 등 만주일대에서 상고사와 관련이 있는 유물들이 잇따라 출토돼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요하문명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전시를 관람하려고 중국인들이 긴 줄을 서 있다. 조현 기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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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문화에 대한 열등의식의 뿌리는?
우리는 왜 중국에 대해 문화적 열등의식을 가졌을까? 고구려가 멸망하면서 우리의 옛 역사, 배달시대, 단군 조선시대 역사가 다 없어졌다. 당나라는 고구려에 한이 맺혀 있어서 고구려를 멸족시키려고 했다. 역사책을 하나도 남김없이 불살랐다. 그래도 발해가 건국되면서 그 사료를 일부 복원했다. 그런데 발해도 이민족에 멸망했다. 특히 발해역사는 깡그리 유실되었다. 우리 스스로도 발해의 역사를 민족사에서 제외했을 정도였으니까. 우리가 신라의 역사를 계승했다. 그러나 신라 역사에 배달시대, 단군 조선시대, 부여시대 얘기가 없다. 신라는 고구려와 싸웠기 때문에 고구려 시대 역사도 별로 남기지 않았다. 그래서 상고사가 유실될 수밖에 없었다.
고려는 고구려의 후예인 발해의 유민들이 들어왔고 고구려를 계승한다고 했기 때문에 전해들은 이야기를 중심으로 옛 역사를 기록으로 많이 남겼다. 그러나 고려도 원나라의 침입을 받아 100년 가까이 싸우면서 굴복했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자료가 거의 소실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자발적으로 사대를 취했다. ‘중국은 역사가 오래된 위대한 국가’라며 스스로 사대를 취했는데, 옛날 고기를 보니까 우리 역사가 더 길고 문명도 더 높았다는 것이 나오므로 이걸 중국이 알면 큰일이라 생각해서 금서가 됐다. 그러면서 우리의 역사도 민족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갔다.
일본강점기에는 일본 사람들이 이 금서 목록목록에 있는 도서 등을 싹 뽑아서 갔다. 우리가 역사를 복원하려고 보니 남은 책이라곤 삼국사기와 몇 권의 역사 책밖에 없었다. 그마저도 삼국사기는 삼국시대 이후를 기록한 것이다. 당연히 고구려 이전의 해모수의 부여와 단군의 조선, 환웅의 배달에 대한 기록은 남은 게 없다.
▶일본강점기 실증주의 사학의 대물림
일본강점기 때 우리나라에 대학이 생겼는데, 교수들은 다 일본 사람이었다. 그때 역사 공부했던 사람들은 일본 교수들이 서명한 합격 논문을 받아야 했다. 일본 교수들은 역사는 실증주의를 해야 한다고 했다. 그 자체는 좋은 것이다. 그런데 (실증주의를 하려고) 우리 역사기록을 뒤지다 보니 아직까지 남아 있는 것이라곤 거의 없고 중국의 기록에만 일부 남아 있었다.
그래서 중국 책를 찾아서 그 책에 기록된 우리 역사의 편린을 찾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삼국지’란 것은 위나라, 오나라, 촉나라의 이야기다. 삼국지 가운데 ‘위지동이전’이라는 것이 있다. 위나라 동쪽 오랑캐에 대한 기록이다. 거기에 기록된 걸 보고, 우리 옛날에 이런 일도 있었다고 연구하는 식이다. 중국 책에서 뽑아서 우리 상고사를 정립하다 보니 우리 민족의 역사가 형편없는 역사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 역사를 우리가 배우다 보니 우리 마음속에 이미 우리 민족의 역사를 중국의 변방사로 인식하게 되어 민족적 열등의식이 자리잡게 된 것이다.
이것을 극복하려면 우리는 상고사를 복원해야 한다. 그런데 왜 바뀌기 어려운가? 그 선생의 제자가 선생이 되고 그 제자가 또, 선생이 된다. 자격이 있는 사람만이 교과서를 쓰는데 이 자격이 있는 사람들은 다 그 물줄기에 있다. 이것이 상고사를 다시 정립하는 데 있어 아직도 뛰어넘을 수 없는 한계에 부딪히는 이유다. 그래서 상고사에 대한 새로운 정립이 필요하고, 이 상고사가 정립이 돼야 우리가 중국에 대한 열등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다. 우리가 중국보다 낫다는 우월주의가 아니라 우리 무의식 속에 남아 있는 민족적 열등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말이다.
▶북한은 고립, 한국은 자기 상실…열린 민족주의로 가야
역사를 왜곡하자는 게 아니라 바로 잡자는 것이고, 과대하자는 게 아니라 잃어버린 걸 되찾자는 것이다. 우리가 잊어버린 것을 다시 새기자는 것이다. 우리가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우리의 역사와 우리 민족의 정체성에 대해 알아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자신감이 있고 그래야 일본역사도 중국역사도 다 존중할 수 있다. 우리가 열등의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남을 인정해 주기 싫은 것이다. 우리가 역사의 정체성이 있어 당당하면 상대방의 역사를 인정해줄 수 있다. 이는 세계화 시대의 시대정신과도 통한다. 세계화로 나아가는데 있어서 두 가지 편향이 있다. 세계화하려다 와해 흡수되는 경우와 자기 것을 잃어버리지 않으려다 고립되는 경우다. 지금 보면 북한은 고립되는 방향으로 가고 있고 남한은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쪽으로 가고 있다. 둘 다 문제다. 자기 정체성이 확고할 때 열린 마음을 가질 수 있고 그래야 흡수되지도 고립되지도 않을 수 있다. 다시 말해 폐쇄된 민족주의가 아닌 열린 민족주의로 가야 한다. 그때 가장 중요한 것이 민족사관의 정립이다. 그런 측면에서 역사를 새롭게 바라보는 인식 전환과 생생한 현장 중심의 학습이 병행되어야 한다. 감사합니다.
법륜 스님, 정리 박종찬 기자

“요하문명은 중국, 한국 누구의 것도 아니다”
[한민족 시원, 만주] 동방 르네상스를 꿈꾸다 (3)
국경도 나라도 없던 시절… 동북아 시원문명 일뿐 역사란 흐름과 교류의 역사…민족주의 매도 안돼
중국은 하상주단대공정, 중화문명탐원공정, 동북공정 등 일련의 역사 공정을 통해 요하일대에서 중화문명이 발생했다고 보기 시작했다. 중화문명이 요하 지역에서 시작되었고, 이 일대 모든 민족들이 황제의 후예라는 것이다. 이것이 ‘요하문명론’의 실체다.
중국 심양시 요녕성 박물관에서 가장 인기 있는 전시 가운데 하나인 <요하문명전>을 보면, 요하문명의 실체와 중국의 의도를 쉽게 간파할 수 있다. 요하문명전은 지난 2006년 6월에 처음 시작하면서 3개월만 전시를 하기로 했는데, 지금은 영구전시로 바뀌었다. 안내 도판인 ‘5제(帝) 시대의 3대 집단’이라는 큰 틀을 중심으로 시기별로 5개의 전시실로 구성되어 있다.
▶상고사의 주역을 3대 집단으로 재편…“모두가 황제의 후예”
| | » 중국은 요하문명이 발견되면서 상고사의 주역을 3대 집단으로 재편했다. 중원의 화하족을 화족과 하족으로 분리해 앙소문화 지역만을 염제 신농씨의 화족으로, 산동반도 인근의 전통적인 동이족 지역과 그 남부의 전통적인 묘만족 지역을 묶어서 하족으로, 요동과 요서를 포함한 지역을 황제족으로 명명했다. 우실하 교수 제공 | |
| | | ‘5제 시대의 3대 집단’ 도판은 중국 상고사의 주역을 새롭게 3대 집단으로 재편하는 것으로 요하문명론의 가장 기초가 되는 시각이 담겨 있다. 기존의 모든 사서들은 중원의 화하족을 중심으로 동이, 서융, 남만, 북적이 있었다는 식으로 역사를 기술했었다. 화하족이 가운데 있고 나머지 동서남북에 오랑캐, 야만인들이 있었다는 것이 중국의 정통적인 역사관인 화이관(華夷觀)이다. 그런데 이런 전통적인 화이관을 깬 것이 요하문명의 발견이었다. 중원문명보다 앞서 있고, 발달된 문명이 발견되었는데 여전히 그들을 야만인이라는 식으로 이야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고대 중국사를 이끈 집단을 다시 재편했다. 이 3대 집단이란, △중원의 화하족을 화족과 하족으로 분리해 앙소문화 지역만을 염제 신농씨의 화족으로 △산둥반도 인근의 전통적인 동이족 지역과 그 남부의 전통적인 묘만족 지역을 묶어서 하족으로 △요동과 요서를 포함한 지역을 황제족으로 재편한 것이다.
이것은 동아시아 상고사 전체를 재편하는 아주 무서운 전략이다. 기존의 동이, 서융, 남만, 북적 등을 모두 중화민족에 넣은 것이다. 신화시절부터 요하일대는 모두 황제의 땅이라는 것이고, 북방의 모든 소수 민족은 황제와 그 손자뻘인 고양씨 전욱과 고신씨 제곡의 후예라는 주장이다. (기존에는 황제는 북경 부근, 고양씨 전욱은 황하 중류의 위쪽, 고신씨 제곡은 황하 중류의 아래쪽이 세력권이라고 보았다.) 그렇게 되면 이 지역에서 발원한 단군, 웅녀, 해모수, 주몽 등은 모두 황제의 후예가 되어 버린다.
▶“고구려와 수·당의 싸움은 전쟁이 아니라 내전”
| | » 요하문명전 제1전시실 문명서광. 중화문명의 서광이 요하에서 비치기 시작했다는 것이 핵심 내용이다. 조현 기자 | |
| | | 제 1전시실 ‘문명서광’(文明曙光)의 핵심 내용은 중화문명의 서광이 요하에서 비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 이전 중국은 최초의 원시촌락사회를 ‘앙소문화의 반파유적’으로 보았고, 문명의 서광을 장강유역의 하모도문화로 보았다.
제2전시실 ‘상주북토’(商周北土)는 요하문명 지역이 상나라, 주나라 시대부터 중원 왕조에 속해 있는 북쪽의 영토였으며, 이 시대부터 이미 북방의 모든 소수 민족은 중화민족의 일원이라는 것이 뼈대다. 제3전시실 ‘화하일통’(華夏一通)은 진나라, 한나라 시대를 기점으로 만주 일대가 중원 왕조의 판도 안에 들어왔고 이 지역의 모든 민족은 화하족(중화민족)으로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 핵심내용이다. 따라서 이 시대에 고구려와 수나라가 싸우고, 고구려와 당나라가 싸운 것은 전쟁이 아니라 내전이라고 주장한다. 전쟁은 독립국가끼리 하는 것이고 지방정부와 중앙정부가 싸운 것은 전쟁이 아니라 내전이라는 것이다. 최근 중국에서 고구려를 말할 때 항상 ‘동북지방정권 고구려’라고 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 | » 요하문명전이 열리고 있는 중국 심양시 요녕성 박물관 내부의 모습. 맨 위가 제 5전시실이다. 조현 기자 | |
| | | 4, 5전시실 주제는 각각 ‘거란왕조(契丹王朝)’와 ‘만족굴기’다. 거란과 만주족 청나라의 역사가 모두 중화의 역사라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중국인들은 칭기즈칸(1162~1227)을 중국인이라고 주장한다.
중국이 벌이는 역사 공정은 기본적으로 통일적다민족국가론에 뿌리를 두고 있다. 현재 중국 국경 안에 있는 모든 민족은 신화시절부터 중화민족이고, 그들의 역사는 중국사라는 것이다. 이런 역사관을 한국인이나 몽골인이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요하문명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그럼 진짜 요하문명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앞으로 끊임없는 연구를 하고 토론해야 할 부분이다. 그러나 명확한 것은 요서와 요동을 포함한 만주지역은 중원과 전혀 다른 문명권이었다는 사실이다.
동북아시아 지형도를 보면 신석기시대 4대 문화가 왜 만주와 한반도로 전파되었는지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새로운 문화는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를 통해 몽골초원을 거쳐 전파되었다. 몽골초원에서 대흥안령 남단을 거쳐 요서·요동지역으로 넓게 이어진 초원 길을 두고, 사막과 강과 산맥을 넘어서 중원지역으로 내려갈 이유가 없었다. 북방 유목 민족은 광대한 초원을 동서로 넘나들며 동·서 문화를 뒤섞었다. 그 동쪽 끝에 만주와 한반도가 있었다.
| | » 신석기 시대 4대 문화권 지도. 만주일대와 한반도 주역은 신석기 4대 문화권이 모두 중첩되는 세계 유일한 곳이다. 출처 정수일 ‘고대 문명 교류사’(사계절 출판사 2002. 70쪽) 그래픽 문석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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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하문명에서 발견한 유물과 유적 가운데 중원에서 하나도 발견되지 않는 것이 있다. 빗살무늬토기, 피라미드식 적석총, 치를 갖춘 석성, 비파형동검 등이 그것이다. 이는 요하문명을 주도한 세력이 중원 세력과 다른 집단이며, 주맥이 만주와 한반도, 일본으로 이어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문화권은 신석기시대를 대표하는 4대 문화인 빗살무늬토기문화, 거석문화, 채도문화, 세석기문화를 모두 수용하고 융합했다. 요하문명 세력들이 앞선 새로운 문명을 개척할 수 있었던 것은 다양한 문화를 흡수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렇게 신석기시대 4대 문화권이 중첩되고 융합되는 곳은 전 세계적으로 이 지역이 유일하다.
▶“요하문명은 동북아의 시원문명이다”
그렇다고 요하문명 세력들이 전부 한반도로 내려왔다고 볼 수는 없다. 당연히 중원으로도 들어갔다. 요하문명을 놓고 ‘중국 것이다, 한국 것이다’라고 싸우는 것은 의미가 없다. 고대로 올라갈수록 ‘역사란 흐름과 교류의 역사다’라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옛날에는 국경도 나라도 없었다. 현재 중국 땅에 있기 때문에 중국이 (요하문명을) 독자적으로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는데, 이는 ‘역사 민족주의’라고 비판받을 수밖에 없다. 주변국과 공유하며 공동으로 연구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나는 요하문명을 ‘동북아시아 시원문명’이라고 부른다. 다시 말하지만 요하문명을 중국 것, 우리 것이라고 다투는 것은 의미가 없다. 명실상부한 동북아시아 시원문명이다. 이런 공통의 인식 위에서 새롭게 동북아문화공동체를 만들 수 있다.
| | » 요하문명에서 출토된 유물과 유적.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우하량의 여신상, 빗살무늬토기, 비파형 청동검, 거대 피라미드 적석총, 우하량 제2지점 1호총의 묘와 부장된 옥기. 사진 조현 기자, 우실하 교수 제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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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상고사 연구를 위한 방향
요하문명은 중국뿐 아니라 우리 민족의 상고사 연구에도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한국 상고사 연구에 대한 재정립이 필요하다. 우선, 단군 신화를 적극적으로 재검토하고, 동북 민족과 우리 민족을 연결하는 새로운 역사의 기틀을 짜야 한다. 우리도 중국인처럼 북방 민족을 야만인으로 보는 시각이 있는데, 우리부터 소중화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 둘째, 만주 일대가 유목과 수렵문화라는 선입견을 버려야 한다. 이 지역에서 6천 년 전 흥륭와문화부터 조와 기장을 중심으로 한 농경을 한 흔적이 발견되었고, 홍산문화 후기에 오면 대규모 농경이 이루어진 가장 앞선 선진문명을 가졌다는 것이 발굴을 통해 증명되었다.
셋째, 요하문명이 중원문명과 전혀 다른 ‘제5의 문명’으로 등극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는 역사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요하문명은 황하문명보다 앞섰고, 세계 어디에도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문명이기 때문이다. 넷째, 한반도 중심의 역사관을 만주, 몽골 초원, 중앙아시아 지역까지 넓혀야 한다. 마지막으로 요하문명 지역에서 출토된 신석기와 청동기, 특히 옥기를 연구할 학자를 길러야 한다.
▶‘동방 르네상스’를 위한 제안
서구문명이 한계에 이르자 서구인들은 ‘그리스·로마문명’의 전통에서 ‘고대로부터의 빛’을 발견했고, 이를 ‘르네상스’로 재구성하였다. 르네상스를 통해 새로운 문화적 피를 수혈해 승승장구하던 서구문명은 20세기를 지나면서 또다시 근본적인 문제에 직면하였다. 이제 20세기 문명의 한계를 넘을 ‘고대로부터의 빛’은 동방에서 시작될 것이다. 그것이 ‘동방 르네상스’다. 문명의 뿌리를 함께 공유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진정한 동방 르네상스 시대를 열 수 있다. 한·중·일·몽골이 함께 열어갈 동방 르네상스를 꿈꾸며 몇 가지 제안을 하려고 한다.
| | » 우실하 항공대 교수가 지난해 11월 서울 서초구 평화회관에서 열린 ‘청년 역사를 만나다’ 특강에서 요하문명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 영상화면 캡쳐. 박종찬 기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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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21세기 동북아 문화공동체를 이루려면 ‘어디까지가 우리 땅’이라는 식의 역사관을 넘어, 역사를 ‘흐름과 교류의 과정으로 보는 새로운 역사관’과 ‘열린 민족주의’를 한·중·일·몽골이 공유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특히 상고사에 대한 인식에서는 더욱 그렇다.
둘째, 요하문명이 탄생할 때는 중국도 한국도 일본도 없었다. 주변의 모든 국가가 요하문명을 ‘동북아 시원문명’으로 삼아 공동으로 연구해야 한다. 이를 21세기를 위한 ‘동북아 문화공동체’의 근원으로 삼아야 한다.
셋째, 한·중·일·몽골의 학자가 연계해야 한다. 그래서 동북아 고대문화에서 새로운 희망의 빛을 찾고, 21세기를 향한 새로운 문화철학을 가꾸어 가야한다. 이런 문화철학을 바탕으로 ‘동방 르네상스’를 준비해야 한다. 그래야 7천년, 8천 년 전 요하문명처럼 동북아시아에서 찬란한 문화의 꽃을 다시 피울 수 있을 것이다.
우실하 교수(한국항공대학교 인문자연학부) 정리 박종찬 기자
심양의 요하문명전 블로그중계
중국심양에 위치한 요녕성박물관의 요하문명전시장을 찾았습니다. 작년 7월에 열린 요하문명전은 화하일통(華夏一統)의 정신을 기본으로 동북공정의 완결을 공식적으로 선언한 전시회입니다. 그 후 박물관 3층에서 상설전시를 하고 있는데 저는 어제 처음으로 박물관을 찾았습니다.
그들이 전시장입구에 걸어논 화하일통, 상주북토 등의 간판은 동북지역의 요하문명을 황하문명의 범위에 포함시키려는 슬로건으로 느껴졌습니다. 중국은 만리장성을 단동(신의주)까지 확장시키고 단군신화까지 중화문명에 포함시키는 등 동북공정의 현실화를 급속하게 추진하고 있습니다.
중국이 이렇게 열정적으로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완성할 동안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안타깝군요. 우리가 좀 더 정신을 차리고 북한과 함께 적극적으로 대응해야할 때라 여겨집니다. 심양에 계시는 분이나 여행차 심양에 오신 분들은 한 번 시간을 내서, 한인타운인 서탑에서 택시로 5분거리인 요녕박물관에 들러서 현장을 보시기 바랍니다.
요하문명전을 2백5십여장의 사진을 슬라이드로 구성해보았습니다. 2층의 명, 청전시관부터 들러서 사진을 촬영하느라 순서가 복잡해졌습니다박물관의 2, 3층엔 명청문화, 도자기, 고대문명, 고구려발해문명, 거란, 만족 등의 전시관등으로 구분이 되어있지만 사진상으로는 구분이 잘 안되어 있습니다. 어두운 조명에서 플래쉬없이 사진을 찍느라 다소 선명치 못한 사진도 있습니다만.... 끝까지 감상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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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대한국인(大韓國人)입니다 유대민족은 아브라함의 후손입니다. 한족은 태호복희의 후손입니다. 그렇다면 대한국인은 누구의 후손입니까? 혹시 누구라고 답해야 할 지 망설여지십니까?
100년전 ...조선인들은 유구한 역사적 자부심과 문화에 대한 긍지가 높아 통치하기가 어렵다. 그들을 대 일본제국의 식민지로 만드는 방법은 그들의 가장 큰 자긍심인 역사를 각색하여 피해의식을 심는 것이다. 조선인을 뿌리가 없는 민족으로 교육하여 그들의 민족을 부끄럽게 하라. 문화 역시 일본의 아류임을 강조하여 교육해야한다. 그렇게 될 때 그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잃고 스스로 대 일본제국의 시민으로 거듭나고 싶어할 것이다. 창씨개명을 통해 먼저 조상 단군을 부정하게 하라. 그것이 식민국민을 식민국민답게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 일본 총독부 조선식민통치사 中-
1910년 8월 28일 일제에 의한 굴욕적인 한일합방이 이루어졌다. 당시의 어린 학생들은 현대의 어린이들이 구구단을 외우듯 단군 47대의 역사를 외우고 있었다. 조선을 강탈한 일제는 전국의 모든 소학교에서 교과서를 강제 수거하여 전량 소각조치하였다. 조선 총독부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취임 후 1년 2개월 동안 단군조선관련 교과서 20만권을 수거하여 모두 불태웠다. 1916년 왜왕의 명에 의해 조선사편수회가 설립되고 본격적인 역사 왜곡작업에 착수하였다. 그 결과 총 35권 2만4천여쪽의 [조선사(朝鮮史)]가 발행되었으며, 한민족의 역사는 일제에 의해 다시 쓰여졌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 단군 이야기를 설화형식으로 기술한 역사서만을 의도적으로 남겨두어 허구성을 부여하고 [단군 신화]라는 단어가 최초로 쓰이기 시작하였으며, 마치 역사가 아닌 지어낸 이야기처럼 구전되기 시작했다.
이 모든 일들의 목적은 단 하나. 단군 조선을 역사에서 삭제하라! 단군 조선이 사라지면 조선의 역사는 일본보다 짧아진다. 그 후에 일본이 조선에 문화를 전한 것으로 알려라. 역사와 뿌리를 잃는다면 조선인들은 정체성을 잃고 방황할 것이다. 일본은 떠나갔지만 역사적 식민지는 계속되고 있다. - 조선사 편수위원 이마니시 류 경성제국대 교수(1875~1932)
조선사편수회는 조선총독이 관리. 1937년에 이르기까지 16년이라는 기간을 필요로 하였고 그 동안의 사업비는 무려 100만 엔의 거액에 달했다. (- 조선사편수회 사업개요 中) / 조선사편수회고문으로 권중현, 박영효, 이완용. / 한국은 동양화란(東洋禍亂)의 원천이기 때문에 동양의 평화, 인민의 복지 증진을 위해 병합된 것이다. 이 병합의 목적을 진실하게 편찬할 생각이다.
그의 한국인 제자들은 대학 교수가 되어 [조선사]의 내용을 그대로 가르치게 된다. 歷代王朝의 檀君제사 日帝때 끊겼다. "堯와 함께 開國... 기자보다 앞서... 三國史記 이전 古記등 記錄 믿어... 檀君은 神話아닌 우리 國祖. 熊女는 곰 토템族 여자 天神族 환웅과 결혼. - 원로 문헌사학자 이병도씨 조선일보 특별기고 - 그중 서울대학교 이병도 교수는 생을 마감하기 전 잘못을 인정하고 단군 조선이 실제했으며 한국 상고사를 새로 써야함을 알렸다. 허지만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의 역사는 반토막 나버렸다.
1985년 염보현 서울시장은 88올림픽을 준비하며 세계에 한국의 역사를 알리기 위해 사직공원내의 단군성전을 확장 개축하겠다고 발표하였다. 하지만 일부 기득권 세력이 [결사반대운동]을 벌인 끝에 계획은 백지화 되고 말았다. 1999년 IMF라는 국가부도의 위기 앞에서 다시 한 번 민족의 구심을 세워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시민들의 힘을 모아 전국 369기의 [통일기원국조단군상]을 건립하였다. 하지만 이 중 63기의 단군상이 목이 잘리거나, 코가 잘리거나, 얼굴이 파헤쳐지거나, 산산조각이 되어 훼손되었다.
우리는 이제.. 우리의 아이들에게 어떠한 역사를 가르쳐야 하는가? 우리는 조상도, 국조도, 역사도, 민족정신도 가져서는 안되는가? 우리의 아이들은 이 땅의 역사와 문화를 이어갈 수 있을까?
단기 4340년(서기 2007년) 드디어 국사교과서에 단군조선이 역사로 편입 되었습니다. 역사를 되찾고자하는 많은 분들의 노력의 결실입니다. 이제 우리는 국조를 되찾았고 뿌리를 되찾았습니다. 우리는 누구의 후예인가? 하는 질문에 당당히 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47대의 단군의 역사와 고구려, 발해, 부여... 이제 우리는 이 역사들이 우리의 역사임을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 네, 이제 우리는 걸음마를 시작했습니다. 중국은 우리의 역사를 빼앗아 가고 있습니다. 일본은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면서 위안부 범죄는 없던 일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거짓말을 하는 것인가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은 단군이 통치하던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의식은 결코 한반도 안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됩니다. 단군의 후예답게 보이지 않는 지도 밖의 세상에 단군의 홍익정신을 알려주십시요. 간도와 만주 중앙아시아 지역 고대 우리의 선조들이 말을 달리던 파미르고원, 바이칼 호수. 5000년 전 대륙을 호령하던 단군의 홍익인간 이념처럼 온 인류를 평화롭게하는 위대한 한민족이 됩시다. 아직 우리가 곰의 자식이라고 알고 있는 주위의 분들에게 이야기해 주십시오. 당신은 자랑스런 단군의 후예입니다. 일어나라 ! 단군의 후예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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