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439)참수와 난도질
평안도 안주목 양덕현은 인구라야 1000명도 안되는 척박한 산골 고을이다.
이 양덕현의 현감 이시복(李時復)은 별로 할 일이 없어 <주역>을 공부하다가 풍수지리에 빠져들었다.
소문이 퍼져 조정의 부름을 받아 입궐했다. 궁궐에는 관상감이란 부서가 있었는데 천문 지리에 밝은
상지관이 7명 있었다. 궁궐터를 잡을 때, 왕족들의 태를 묻을 곳을 정할 때, 왕이나 왕비가 승하했을 때
묫자리를 잡는 것도 관상감에서 하는 일이다.
조선 23대 임금 순조가 1834년 11월13일 45세 나이로 승하했다. 8세 어린 손자가 왕위에 오르니
24대 헌종이다. 할머니인 순조비 순원왕후가 수렴청정했다.
순원왕후는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원조 김조순의 딸이다.
순조의 능을 잡기 위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상지관은 풍수에 밝은 이시복이었다.
임금이 죽고 나서 장례를 치를 때까지는 통상 몇달이 걸린다. 바지 끈을 졸라맨 뒤 이시복은
패철을 들고 이 산 저 산 몇켤레 짚신을 닳아 없애며 길지(吉地)를 찾아 헤매다가 파주
장릉(인조능) 왼쪽 언덕에 산릉(山陵)을 정했다.
산릉이란 하관하고 봉분을 올리는 장례를 치르기 전까지 잡아놓는 왕릉터다.
좌청룡 우백호에 배산임수(背山臨水)라 천하 명당이라고 무릎을 쳤는데 문제가 생겼다.
모든 걸 갖췄는데 단 하나 흙 색깔이 문제였다. 장지가 밝은 마사토가 아니고 칙칙한 검은 흙이었다.
수렴청정하던 순조비 순원왕후가 산릉 공사를 중단시키고 다른 길지를 찾을 것을 하명하고
이시복을 옥에 처넣었다. 좌의정 홍석조가 예당(예조의 당상관)과 상지관을 대동하여 현장을 답사했다.
능을 조성하느라 땅속에 묻어뒀던 돌이 땅 위로 올라오고 세워뒀던 뇌석에 금이 가고
천광(시신을 묻을 구덩이)의 흙을 속이려고 산릉 땅 위에는 여기저기 구멍이 뚫려 있었다.
좌의정 홍석조가 그대로 보고하자 이듬해 3월15일 옥에 갇혔던 상지관 이시복을 끌어내어
참수형에 처했다.
이튿날 궁궐에 소동이 일어났다. 왕릉을 잘못 잡은 상지관 이시복을 참수형에 처하라 명했는데
참수형이 아닌 참혹한 형을 집행하여 민심을 들끓게 했다는 죄명으로 승지 정예용이 어전회의에서
형 집행관들을 고발했던 것이다. 민심은 천심이라 했던가. 아니어도 그 시절엔 방방곡곡에서
민란이 일어나 나라가 뒤숭숭할 때였다.
왕실을 위하여 현감 자리를 두고 궁궐로 불려 와 상지관으로 있다가 순조가 승하하자 짚신
몇켤레가 닳도록 길지를 찾아 헤매다가 잡은 천광이 단지 흙 색깔이 좋지 않다는 단 한가지
이유로 전대미문의 참수형을 받을 일인가?
민심이 흉흉해졌다. 게다가 형 집행관들이 참수형의 명을 받고 월권을 행사했다는 것이다.
참수형이란 댕강 목을 자르는 형이다. 그런데 이시복이 참수형 이상의 부당한 형벌을 받았다는 게
형 집행을 참관한 가족들과 백성들의 원성이었다.
승지 정예용의 고발에 따라 실사가 이루어져 이시복의 관뚜껑을 열자 기절초풍할 일이 나타났다.
상지관 이시복의 전신이 난도질당한 참혹한 모습이 드러났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참수형을 받은 죄인의 목을 치는 건 망나니다.
망나니 일은 백정이 한다는데 이것은 틀린 얘기다.
백정은 세습이지만 망나니는 세습이 아니다.
망나니는 정신병자이거나 주정뱅이가 될 수밖에 없다.
자신과 아무 악연이 없는 사람의 목을 베어 피가 솟구치고 머리가 댕강 떨어지는 걸 보고 있노라면
아무리 강심장이라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미쳐버리든가 술독에 빠지고 만다.
이시복을 참혹하게 살해한 망나니도 정신병자가 되었거나 술주정뱅이가 되어 칼로 전신을 난도질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또한 이럴 경우도 있을 수 있었다. 망나니가 이시복의 유족들에게 고통 없이
참수해주겠다며 돈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자 고통스럽게 난도질했을 수도 있었다.
어린 헌종을 수렴청정하던 순원왕후는 민심을 달래려고 망나니와 의금부 집행관을 엄벌에 처했다.
헌종은 23세에 승하하고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꼭두각시 왕 강화도령 철종이 즉위하여 순조의
능을 인근 파주 교하리로 또 한번 천장(遷葬)했다.
철종 6년에 무슨 변덕인지 교하리 인릉을 또다시 지금의 서울 서초구 헌인릉 자리로 천장하고 나서
바로 이듬해인 1857년에 순원왕후가 승하하자마자 옆자리에 합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