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수행이야기]〈80〉과연 진심으로 제자를 지도할 수 있을까?
스승이라는 이름으로 쉽지 않은 현실
나는 ‘모른다’고 답할 수 있는 스승인가
객관주 주간객 주간주 객간객…경계 넘어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하네.
탐욕도 벗어놓고 성냄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이 선시는 고려 말 나옹 혜근(1320∼1376)의 작품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많이 애송하는 선시로 가수들의 작사곡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이 아름다운 선시의 저자 나옹혜근이 출가했을 때이다. 혜근은 출가 전에 어른들에게 이렇게 묻곤 했다.
“죽으면 어디로 갑니까?” 이런 질문에 제대로 해결해주는 분이 없었다. 혜근은 답답함을 풀고자 경북 문경의 공덕산 묘적암에 주석하고 있던 요연(了然)에게 출가하였다. 혜근이 선사와 처음 대면했을 때, 선사가 먼저 물었다.
“무엇 때문에 중이 되려고 하느냐?”
“삼계를 뛰어넘어 중생을 이롭게 하려고 합니다. 스님께서 제게 좋은 가르침을 주십시오.”
“네가 이곳에 온 것은 어떤 물건인고?”
“네, 능히 말하고 듣고 할 줄 아는 자가 왔습니다. 그런데 보려고 하면 볼 수 없고, 찾으려 하면 찾을 길이 없으니 답답함을 풀 데가 없습니다. 스님, 어떻게 닦아 나가야 알 수 있는 겁니까?”
“나는 아직 공부가 부족하다. 너의 질문에 답할 만큼 근기가 수승하지 못하다. 다른 훌륭한 선지식을 찾아가서 물어라.”
혜근은 요연 선사 문하를 떠나게 되었다. 아마 이때 선사가 혜근의 질문에 당황해 적당히 둘러대었다면, 우리나라의 위대한 한 선사는 그냥 묻혀 졌을지도 모른다.
또 중국 선종 5가 가운데 현재까지 법맥이 온전히 전하고 있는 선이 조동종이다. 이 조동종의 종조 동산 양개(807~869)도 출가할 당시 혜근과 유사하다. 양개는 처음에 고향의 작은 절에 출가하였다. <반야심경>을 다 외우자, 스승이 다른 경전을 암송하라고 하였다. 양개가 외우지 않겠다고 하자, 스승이 왜 그러느냐고 물었다.
“<심경>에는 눈ㆍ귀ㆍ코ㆍ혀ㆍ몸ㆍ뜻 6근이 없다고 했는데,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스승은 양개에게 “나는 그대의 질문에 답할 능력이 되지 못한다”고 고백한 뒤, 양개를 오설산(五泄山) 영묵(靈默, 747~818)에게 데리고 가 지도해 줄 것을 부탁했다. 이 인연으로 양개는 영묵을 스승으로 삭발하였다. 그는 영묵 문하에서 3년간 수행한 뒤, 운암 담성(772~841)을 만나 중국의 위대한 선사 가운데 한분이 되었다.
임제종에서는 스승과 학인간의 기용을 네 가지로 설하는데, 4빈주(四賓主)라고 한다. 학인이 뛰어나 스승의 기용을 간파하는 객관주(客看主), 스승이 학인의 기용을 간파하는 주간객(主看客), 스승과 학인의 기용이 모두 뛰어난 주간주(主看主), 스승과 학인의 기용이 모두 열등한 객간객(客看客)이 있다. 스승과 제자와의 기량이 비단 선(禪)에서만 언급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교육 현장에서는 얼마든지 4빈주 현상이 일어날 수 있다고 본다.
소납은 운문사를 졸업한지 25년이 넘었다. 강원 학인시절, 현 운문사 회주인 명성 강주 스님께 공부했었다. 경전 수업이 끝나고, 한국불교사 책을 읽는 시간이 있었다. 당시 어떤 내용인지 기억은 없지만, 한 학인이 스님에게 한국불교사에 실린 단어를 질문했었다. 스님은 잠시 주저도 없이 ‘모른다’고 하시며 웃으셨다.
당시 소납은 철없는 20대 초반이었는데도 스님의 그 모습이 인상 깊게 남아 있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 ‘스승’이라는 이름으로 쉽지 않은 현실이다. 진실함이 그대로 묻어나온 스승의 소탈함이 2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내 가슴 언저리에 머물러 있다. 소납도 가르치는 일을 하지만, 혜근과 양개의 스승처럼 그 경계에서 진실함으로 제자를 지도할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정운스님… 서울 성심사에서 명우스님을 은사로 출가, 운문사승가대학 졸업, 동국대 선학과서 박사학위 취득. 저서 <동아시아 선의 르네상스를 찾아서> <경전숲길> 등 10여권. 현 조계종 교수아사리ㆍ동국대 선학과 강사.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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