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사 명장면] 31. 달라이라마와 활불정권
티베트불교 법통 보존 위한 ‘제도적 장치’
티베트불교는 불법승의 삼보에 라마를 더한 사보신앙이다. 그래서 티베트인들은 라마를 살아 있는 부처님으로 숭배한다. 그것은 라마를 부처님의 가르침을 계승한 생불로 여기기 때문이다. 특히 라마 중에서도 전생활불은 더욱 더 존경의 대상이 되고 있다.
# 전생활불제도의 성립
인도 ‘虹身사상’ 연원…카르마파서 첫 도입
티베트에서 활불제도가 성립된 것은 인도의 홍신(虹身)사상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이 사상은 인도에서 불사의 신체를 성취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부터 출발한다. 당시 티베트인들은 이 사상에 의거하여 왕이 죽으면 육체와 영혼이 천상세계에 전생(轉生)한다고 믿었다. 또한 육체와 영혼은 이 세상을 떠날 지라도 그 자체는 다른 장소로 옮겨 가서 활동을 계속한다고 생각했다.
이와 같은 사상에 의거하여 티베트 각 종파에서는 전생활불제도를 채용했다. 이 제도를 처음으로 도입한 것은 카르마파에서부터이다. 13세기에 이르면 티베트에서는 새로운 종파가 형성되고, 인도의 학승들이 속속 티베트에 들어오고 있었다. 티베트인들은 이때부터 자신들의 법통을 보전하고 법의 상승관계를 분명히 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생각해냈다. 이것이 바로 전생활불제도이다.
사진설명 : ‘달라이’는 몽골어로 바다를 의미하는데 이것은 티베트어의 쵸, 즉 바다와 같은 뜻이다. 달라이라마 제도는 혈연이나 지연, 학연을 초월한 것으로 티베트내의 정치적 상황이나 불교의 사상과도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사진은 달라이라마 14세의 모습. 불교신문 자료사진
이 제도는 혈연이나 지연, 학연을 초월한 것으로 티베트 내의 정치적 상황이나 불교의 사상과도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단 불교의 정통교리와 달리 전생이라는 말이 불교의 업사상에 기반을 둔 윤회와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자의 육체와 영혼이 무한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똑같은 성격을 지닌 존재로 반복 출생한다는 것이다.
겐뒨쵸 전생자인 쇠남쵸 ‘달라이라마 정권’ 기틀 마련
# 정교통괄 활불의 등장
14세기 중엽 총카파라는 인물이 등장했는데 그는 동부 티베트 암도지방에 있는 총카에서 출생 7세 때 출가하여 카담파, 카규파, 카르마파, 사캬파와 같은 티베트의 여러 종파에 속하는 라마들 밑에서 수학한 후 저명한 학승이 되었다. 그는 엄격한 계율주의를 기반으로 하여 인명, 율, 반야, 중관, 아비달마를 현교의 필수과목으로 하고, 그 뒤에 밀교수행을 수행자의 목표로 삼았다.
그는 흔히 겔룩파의 개조로 알려져 있으나 그를 신봉하던 사람들은 스스로 신카담파라고 했다. 그들은 중앙 티베트 동부에 근거지를 두고 있던 종래의 카담파를 사실상 개종, 합병하였다. 그리고 씨족 교단이자 활불교단을 형성하고 있던 카규파도 카담파의 계통이었는데 그 중에서 팍모두파와 팍모두 일족에 속해 있던 씨족의 무리가 차례로 신카담파의 교의에 동조하게 되었다.
15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팍모두파 내에서는 세력다툼이 일어났다. 이 세력다툼에는 외척인 링푼일족까지 가담하였다. 그들은 원래 팍모두파 일가가 지배하고 있던 창지방의 천령을 그들의 세력권하에 넣었다. 당시 중앙티베트의 동서부는 각각 우지방과 창지방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그 곳을 지배하는 사람이 어느 지역 출신이냐에 따라서 양자간의 한쪽은 상대적으로 불리한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 따라서 그들 서로간의 대립은 숙명적인 것이었다. 그 때 링푼가는 이미 창지방의 권익을 대표해서 우지방을 지배하려고 하였다. 같은 시기에 카르마홍모파는 세력을 가진 링푼가와 결탁하여 우지방의 게룩파를 제압했다.
15세기 말부터 링푼가는 군대를 동원하여 우지방을 강점하고 이어서 총카파의 발원으로 라사에서 행해지고 있던 정월달의 대기원법회에서 게룩파를 제거하고 서기 1517년까지 참가하지 못하도록 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등장한 것이 겐뒨쵸였다. 그는 서기 1512년 거의 적지나 마찬가지였던 창지방 게룩파의 승원인 타시룽포사의 승원장을 맡았으며, 팍모두파 정권이 링푼가를 제거하는데 다방면으로 협력하였다.
그러나 겐뒨쵸가 세상을 떠나자 궁지에 몰린 게룩파에서는 카르마파를 결속시키는 구심점이 전생활불제도에 있다는 것을 알고, 겐뒨쵸의 전생자를 자파의 활불로 내세우려 했다. 그래서 카르마파의 본거지인 퇴룽의 호족 중에서 전생자를 선발하기로 했다. 그 때 선정된 사람이 쇠남쵸였다.
그는 10세에 데풍사의 승원장이 되고, 게룩파의 단결을 도모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게룩파의 전생자는 주위의 상황에 걸맞지 않을 정도로 매우 평화적이면서도 강력한 인물로 부각되었다. 이때부터 정치와 종교의 힘을 배경으로 한 달라이라마정권의 기틀이 마련되는 것이다.
# 정교일치정권의 등장
독특한 지방색의 씨족들 ‘종교 중심’ 통일
달라이라마 14세 망명지 인도서 聖俗 관장
당시 티베트인들은 이와 같은 사상을 제도화하여 정치, 종교계에 반영하였다. 그들은 독특한 지방색을 띠고 있던 씨족들을 종교적인 하나의 핵을 중심으로 통일하고 서로간의 반목을 불식시키려고 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모두가 평등하고 누구라도 티베트 내에서 정치, 종교적인 지도자의 자리에 설 수 있다는 것을 인식시켜야만 했다. 여기서 속계와 성계를 대표할 수 있는 인물이 필요했던 것이다.
또한 제도적 장치를 통하여 각 파는 내적인 불안을 해소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제도 중에서도 세간에 널리 알려진 것이 게룩파의 전생활불제도이다.
전생활불은 전생라마라고도 불리는데 활불은 각종 의식절차를 거쳐 상속되고 있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달라이라마와 판첸라마이며, 그 외에 린포체라는 활불의 상속제도도 있다. 전생활불은 선대의 활불이 입적한 후 49일 이내에 수태되어 태어나는 것을 전제조건으로 하고 있으나 상황에 따라서는 수년 뒤에 태어난 사람이 전생자로 선발되는 경우도 있다. 달라이라마 5세나 14세가 이런 경우에 속한다. 그들이 선발되는 기준은 먼저 정부의 관리들이 전생자가 있는 곳을 찾아내고, 다음에 전생자로 지목된 자가 있는 곳에 찾아가 실제로 적격자인지를 확인한다. 이어서 달라이라마의 경우는 정부 내의 회의를 거처 후임 전생활불을 확정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절차는 객관적인 기준이 될 수 없었기 때문에 후대에는 전생활불의 선정에 참가한 자들을 매수하여 자신의 친인척 가운데에서 전생자를 내세우려고 하는 귀족들도 나타났다. 또한 섭정자들이 전생라마의 입적을 은폐한 다음 자신이 원하는 자를 선발하여 교육시킨 다음 달라이라마에 즉위시키는 경우도 있었다.
여기서 달라이라마란 명칭은 몽골과 직접 관계가 있다. 달라이라마는 원래 관세음보살의 화신으로 티베트의 정계와 종교계를 지도하는 인물인데 달라이라마라는 명칭이 처음 사용된 것은 16세기 제3세인 쇠남초 때부터이다. 그는 몽골을 방문했을 때 알칸 칸으로부터 달라이라마라는 칭호를 받았다. 달라이란 몽골어로 바다를 의미하는데 이것은 티베트어의 쵸, 즉 바다와 같은 뜻이다. 이때부터 게룩파에 전생활불제도가 도입되었는데 원칙적으로 쇠남쵸가 1세 달라이라마가 되는 것이 당연하지만 5세 달라이라마에 이르러 달라이라마 제도가 정착되면서 1세 달라이라마를 총카파의 제자인 겐둔둡으로 하고, 2세에 겐둔쵸를 설정한 다음 쇠남쵸를 3세 달라이라마로 하였다.
5세 달라이라마는 17세기 중반 자신의 권위를 내외에 과시하기 위해서 포탈라궁전을 축조하고, 그 곳을 정교를 관장하는 중심으로 삼았다. 이 궁전은 사원, 승방과 집무실 및 묘탑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백색의 궁전과 홍색의 궁전으로 나뉜다. 백색의 궁전은 승방, 달라이라마의 집무실 등이 있으며, 홍궁에는 관세음보살의 성전을 중심으로 역대 달라이라마의 묘탑들이 있다.
5세 달라이라마 이후, 포탈라궁전은 1959년 달라이라마 14세가 인도의 다람사라로 망명하기 전까지 정교양권을 관장하는 중심지가 되었다.
현재에도 달라이라마는 포탈라궁전은 아니지만 망명지 인도의 다람사라에서 활불로서 티베트인들의 숭앙을 받고 있다.
허일범/ 진각대 교수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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