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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덧없는 것, 시들기 전에 아름다움을 찾으라. |
Blue Girls John Crowe Ransom
Twirling your blue skirts, travelling the sward,
Tie the white fillets then about your hair
Practise your beauty, blue girls, before it fail;
For I could tell you a story which is true; |
푸른 처녀들 존 크로우 랜섬
푸른 스커트 펄럭이며,
하얀 리본으로 머리 묶고
푸른 처녀들아, 아름다움이 시들기 전에 아름다움을 찾으라;
내 그대에게 실화 하나 들려줄까; |
조선시대 평양은 미색이 출중한 기생(妓生)이 많기로 유명하였다. 철종(哲宗) 연간에 평양의 기생들은 이백 여 명에 이르렀다. 그런데 꽃이 만발했다 지는 것처럼, 기생들도 젊음을 잃고 늙어지고 결국에는 세상을 떠났다. 화류계에 있다가 죽은 이들은 평양성 북쪽 칠성문 밖의 선연동(嬋娟洞)에 묻혔다. 이 곳에는 기생들만의 공동묘지가 있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당대의 유명한 시인과 묵객이 이 선연동을 들렀다는 것이다. 지체높은 양반 선비들이 미천한 기생들의 유택(幽宅)을 방문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당시 사회 풍조가 기생을 예인(藝人)이자 인텔리겐챠의 반열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까닭에 기생의 문재(文才)를 아꼈던 여러 인사들이 옛 회포를 추억하기 위해 선연동에 들른 것이다. 실제로 평안 감사를 지냈던 임제(林悌:1549-1587)는 황진이(黃眞伊)의 묘소를 찾아가 술을 따라 다음의 시를 바치며 혼백을 위로하기도 하였다.
신윤복의 <미인도>(부분)
청초(靑草) 우거진 골에 자난다 누엇난다
홍안(紅顔)을 어듸 두고 백골(白骨)만 무쳤나니
잔(盞) 자바 권할리 업스니 그를 슬허하노라
이 곳을 정조(正祖) 때의 실학자 이덕무(李德懋:1741-1793)가 찾아서 시 한 수를 남겼다.
嬋娟洞草賽羅裙(선연동초새라군) 剩粉殘香暗古墳(잉분잔향암고분)
現在紅娘休言尼艶(현재홍랑휴이염) 此中無數舊如君(차중무수구여군)
선연동의 풀빛이 비단 치마 맞겨루니, 남은 분내 남은 향기 옛 무덤에 감도네.
어여쁜 아가씨야 고운 자태 자랑 마라, 그대 같은 미인쯤은 수도 없이 많다오.
기생은 당시 아름다움과 청춘의 표상이었다. 뭇 남정네들이 그 앞에 달려와 추파(秋波)를 던지고 숱한 재물을 뿌렸다. 그러나 그네들의 홍안과 향기는 이제 무덤 가의 풀빛으로만 남았다. 미모가 출중하던 기생들 마저 죽고 나면 덧없이 잊혀지고 마는데 여염집 여인들이 오죽하겠는가? 아름다움은 잠깐 피었다가 시드는 꽃이라 했으며 향기는 짙을수록 금세 잊혀진다 하였다. 위의 두 시에서 선비들이 읊었듯 여인의 아름다운 영화는 짧고 그 인생은 한바탕 꿈일 뿐이다.
<서른, 잔치는 끝났다>라는 책으로 유명한 시인 최영미 님은 '아도니스를 위한 연가'라는 시에서 다음과 같이 인생의 허무함을 그리고 있다.
너의 인생에도
한번쯤
휑한 바람이 불었겠지.
바람에 갈대숲이 누울 때처럼
먹구름에 달무리질 때처럼
남자가 여자를 지나간 자리처럼
시리고 아픈 흔적을 남겼을까.
너의 몸 골목골목
너의 뼈 굽이굽이
상처가 호수처럼 괴어 있을까.
너의 젊은 이마에도
언젠가
노을이 꽃잎처럼 스러지겠지.
그러면 그때 그대와 나
골목골목 굽이굽이
상처를 섞고 흔적을 비벼
너의 심장 가장 깊숙한 곳으로
헤엄치고프다, 사랑하고프다. 작자 미상, <젊은 여인(Jeune femme)> , 루브르 박물관 소장
모차르트(W.A.Mozart:1756-1791)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Le Nozze di figaro>에서 백작부인은 자신에 대한 백작의 사랑이 식어버렸음을 깨닫는다. 상심과 허무감에 가득차 그녀는 수잔나에게 백작에게 보낼 편지를 받아쓰게 하면서 '그리운 시절은 가고(Dovo sono I bei momenti)'라는 아리아를 부른다.
달콤하고 즐거웠던
아름다운 그 시절은
어디에 있나?
거짓된 그 입술의 맹세는
어디로 갔나?
나를 위한 모든 것들이
눈물과 고통으로 변하였다면
왜 그토록 행복했던 기억들은
내 가슴에서 사라지지 않는 것일까?
아, 언제나 사랑을 갈망하는
내 변함없는 의지가
그의 무정한 마음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이라도
내게 전해 준다면…
여성에게서 가장 충만하고 아름다운 황금시기는 너무나 짧고 순식간에 지나간다. 마치 꽃이 아침에 활짝 피었다가 저녁에 시드는 것처럼, 아침이슬이 영글었다가 햇볕에 타버리는 것처럼 허무하게 끝나 버린다. 그래서 여인의 전성기는 더욱 값지고 숭고하다. 대체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여인의 황금기는 14세를 전후한 시기에 시작되어 22세를 오르내리면서 마감된다. 그야말로 이팔청춘의 시기이다. 춘향과 이도령이 만난 때도 16세였고, 로미오와 쥴리엣이 사랑을 맹세한 때도 15세와 16세였다. 가장 아름다움이 충만한 시기이지만 쉽게 퇴색되고 빠르게 무너질 수 있는 시기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이 15-16세의 시기를 '악마의 미'에 속하는 기간이라 일컫기도 한다. 이 시기는 동.서양이 거의 동일하다.
이 시기를 지나면 여인의 아름다움은 퇴색되기 시작한다. 여인은 이 시기를 지난 후부터 화장에 신경을 쓰고 미모가꾸기에 매달린다. 전성기를 지난 여인에게 아름다움은 정체성과 자존의 문제이다. 그래서 비싼 화장품을 구입하고 몸매 가꾸기에 열중한다. 그러나 옛 시절에 비해 얼굴은 초라해지고 몸매는 예전의 긴박성을 잃어버린지 오래이다. 지나간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는 일이다. 재주도 잃고 사회적 평판도 사라진다.
로제티(Rossitti)작, <Venus Verticordia>
요즈음 많은 돈을 들여서 성형을 받고 몸매 관리에 시간과 노력을 아끼지 않는 여인들이 많다. 그러나 젊음이 사그라드는 것은 세상의 원리이며 자연의 순리이다. 인위적으로 젊음을 유지하려 하기보다 차라리 느긋하게 오늘의 젊음을 즐기며 마음껏 향유하는 것이 현명한 삶의 방식이다.
아름다운 여인들은 남자의 찬탄과 숭배의 대상이다. 그들은 좌중을 미모로 압도하며 뭇 남성들을 몰고 다닌다. 그러나 인생은 공평하고 신의 저울은 차별이 없어서 아름다운 여인이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는 순간 또한 짧다.
시의 말미에 등장하는 '입이 험한 여인'은 육체의 아름다움 뿐 아니라 행실의 아름다움까지 사라진, 이름뿐인 미녀이다. 그녀는 미모를 뽐내고 재주를 자랑하며 다녔다. 마치 젊음이 영원할 것처럼 생각하며 방탕한 생활을 즐기며 호사롭게 삶을 보냈다. 결국 그녀의 얼굴에 교양미가 사라지고 미소는 공허해졌다. 그녀는 젊은 시절을 미모를 가꾸는 데에만 열성을 보였다. 내면의 교양미나 인문적 성찰을 배제한 채 외모에만 매달렸다. 그 결과 그녀는 지혜와 경륜도 쌓지 못하고 아름다움도 잃고 말았다. 우리 젊은 베아트리체들은 이와 같은 전철(前轍)을 밟아서는 안 될 것이다.
이 시의 저자 존 랜섬(John Crowe Ransom:1922-1971)은 미국의 시인 겸 비평가이다. 그는 테네시주(州) 퓰래스키에서 출생하여 1903년 내슈빌시(市)의 밴더빌트대학교에 입학한 후 다시 1910년에 영국으로 건너가 옥스퍼드대학교에서 공부하였다. 귀국하여 모교의 영문학 교수가 되고 잡지 《퓨지티브 The Fugitive》를 창간하였다. 이후 이 잡지를 중심으로 모인 문인들을 퓨지티브 그룹이라고 불렀으며, 남부 문학운동의 지도자가 되었다. 이 무렵 그는 남부의 토지재분운동(土地再分運動)을 시작하였고 농본주의(農本主義)를 역설하였다. 잡지는 3년 만에 휴간되었으나 1939년 《케니언 리뷰 The Kenyon Review》를 창간하여 편집자가 되고, 또 케니언대학교의 교수로도 활약하였다. 이후 1958년 70세로 은퇴할 때까지 교수와 잡지편집자로서 문단에 크게 기여하였고, 뉴크리티시즘의 중심인물로서 1930년대부터 평생 동안 문학의 분석적 비평의 확립을 위하여 크게 공헌하였다. 저서에는 《세계의 육체》(1938) 《신비평(新批評)》(1941)이 있다. 시인으로서는 주지적인 작풍으로 엄격히 통제당하는 이미지, 긴밀한 구성 등이 특히 눈에 띈다. 시집으로 《신에 관한 시 Poems about God》(1919) 《한기(寒氣)와 열병(熱病) Chills and Fever》(1924) 《시선집 Selected Poems》(1945)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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