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㉔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㉕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㉖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 하니, 나로 가게 하라.”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㉗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㉘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㉙야곱이 청하여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그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㉚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함이더라. ㉛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 ㉜그 사람이 야곱의 허벅지 관절에 있는 둔부의 힘줄을 쳤으므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금까지 허벅지 관절에 있는 둔부의 힘줄을 먹지 아니하더라.”
야곱이 혼자 남았다. 자신에게 힘을 줄 것으로 믿었던 식구들은 강을 건넜다. 그리고 자신감을 주었던 재산도 강을 건넜다. 지금 자기 옆에는 아무것도 없다. 내일 죽을 수도 있다는 위기감은 적막감과 함께 야곱을 옥죈다.
이때 어떤 사람이 야곱에게 나타났다. 그리고는 다짜고짜 씨름을 하자 한다. 이때 야곱의 나이가 거의 100세에 이르렀을 때이다. 씨름할 나이가 아니다. 야곱은 몸으로 하는 것을 즐기지 않는다. 조용히 자기 자리를 지키는 스타일이다. 씨름을 즐기지 않는다는 말이다. 평소에 하지도 않던 것을, 지금 이 상황에서 왜 하겠는가? 그것도 생면부지의 사람과!
그 사람이 얼마나 집요하게 야곱에게 씨름을 요구하던지, 결국 야곱도 씨름을 하기 위해 나섰다. ‘씨름’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먼지를 일으키다.’이다. 땅에 먼지가 일어날 만큼, 아주 격하게 움직이는 몸부림을 의미한다. 다른 하나는‘단단히 붙잡다.’이다. 승부가 날 때까지는 절대로 손을 놓지 않는다. 잡은 손을 풀지 않는다. 그래서 ‘씨름’이라 부른다.
막상 시작된 씨름의 결과는 의외로 야곱의 승리로 끝났다. 정말 예상 밖의 결과였다. 좋아하지도 않는 씨름, 평소에 하지 않았던 씨름인데도 말이다. 계속해야 할 이유가 없다. 그 사람은 씨름을 그만 두려 하는데, 야곱은 도무지 포기할 줄을 모른다. 다시 하잔다. 이번에도 야곱이 이겼다.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또 다시 하잔다. 그렇게 씨름은 계속 되었다.
이 상태로 밤새도록 씨름을 계속 할 수는 없잖은가? 그 사람이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내리쳐서 부러뜨렸다. 자기가 도무지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 여겼던 탓이리라. 이제는 씨름을 그만 끝내자는 뜻이다. 씨름을 한 번해서 끝내야지, 씨름을 죽기 살기로 해야 할 이유가 있겠는가?
야곱은 도무지 서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야곱은 포기하지 않는다. 여전히 씨름을 해야만 한단다. 자기 혼자서는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는 사람이, 100세가 된 노인이 숨을 헐떡거리며 서 있다. 온 몸은 땀투성이다. 상처투성이다. 그 모습이 그려지는가?
왜 씨름을 계속 해야 하는 걸까? 포기할 법도 한데, 포기할 순간인 것만 같은데, 이토록 씨름해야만 하는 이유가 뭘까? 한쪽이 일방적으로 지고 있고, 그 사람조차도 씨름을 그만 두자고 하는 판에 말이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눅 22:44) 야곱의 씨름을 보면,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던 모습이 생각난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께 한 번 물어보자. “예수님, 왜 이렇게까지 기도하세요? 땀이 핏방울이 되어 떨어지잖아요!” 예수님께서 뭐라 말씀하실까?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다. “이렇게 기도하는 것 말고, 다른 모습으로도 기도할 수 있니?”
사막의 낮은 영상 50℃를 넘곤 한다. 사막의 밤은 영하 3~4℃까지 내려간다. 사막의 밤을 맞이하며 아무런 준비가 없다면, 얼어 죽을 수도 있다. 그런 밤에 운동을 하는 것도 아니고, 단지 무릎만 꿇고 계시다. 그 상태에서 기도하는데, 땀이 흐른다고?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신교대에서 훈련 받을 때의 일이다. 날씨가 아주 추웠다. 잠을 자는 중, 교관이 전부 일어나란다. 이유도 없이 치약을 꺼내게 하고는, 치약 뚜껑 위에 머리를 박으란다. 무슨 잘못이 있는 것도 아니다. 군대에서 얼차려를 가하는데, 무슨 이유가 필요하겠는가? 조금 있다가, 그 이유를 설명해준다. 밖이 너무 춥단다. 기온이 많이 내려갔기 때문에, 땀을 흘려서 수온주의 온도를 올려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상황은 이것도 아니다. 무릎만 꿇고 계실 뿐이다. 그런데 땀이 흐른다. 단순히 땀만 흐르는 것이 아니다. 그 땀이 피가 되어 땅에 떨어진다. 이걸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걸까? 그 예수님께서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시다. “이렇게 기도하는 것 말고, 다른 모습으로도 기도할 수 있니?”
우리나라 믿음의 선배들은 유독 산기도를 좋아했다. 산기도 올라가면서 한 마디씩 한다. 이번에는 나무뿌리 하나씩 뽑겠다고. 산에 있는 나무들은 쉽게 뿌리를 드러내지 않는다. 얼마나 깊이 박혀있는지 모른다. 기도하다보면 어느 새 나무뿌리가 뽑혔다. 그것도 모르고 나무를 붙잡고 기도한다. 그러다보면 산기슭 아래로 굴러 떨어진다. 그것도 모른다. 기도가 끝나고 나면, 그제야 자신이 산에서 구른 것을 안다.
선배 목사님들이 우리를 보면서 안타까워하는 부분이다. 이렇게 기도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기도하지 않고, 어떻게 목회를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면 후배 목사님들은 이렇게 응수한다.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그런 방법으로 목회를 하느냐고. 기도 말고도 해야 할 것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아느냐고.
솔직히 선배 목사님들보다 후배 목사님들이 똑똑하다. 많이 배웠다. 그렇지만 후배 목사님들은 선배 목사님들만큼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경험하지 못한다. 왜 그런지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벌써 대답하셨다.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막 9:29)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5) 이 말씀은 이렇게 바꿀 수 있을 것 같다. “기도의 모양은 있으나, 기도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신년이 되면, 기도원에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새해를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시작하고 싶은 사람들이다. 지금의 이야기가 아니다. 과거의 이야기이다. 어느 기도원을 가도, 이제는 사람들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변화가 없으시다. 그러나 사람들은 너무 많이 변했다. 기도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아프면 의사를 찾으면 된다. 답답하면 상담사를 찾으면 된다. 즐거움을 원하면 여행이나 놀이동산을 찾으면 된다. 하나님의 대답은 느리다. 그러나 세상이 주는 대답은 빠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나의 생명이다. 그러나 세상은 나의 생명을 만족시켜 준다.
한 시간 동안 무릎 꿇고 기도하지만, 답답한 마음일 때가 얼마나 많은가? 하루가 지나도, 일주일이 지나도, 어떤 경우는 몇 년이 지나도,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지 않으신다. 그런데 인터넷은 내가 궁금해 하는 것들에 대하여 즉각 대답한다. 멈칫하는 경우가 없다. 하나님의 음성을 알아듣기가 힘든데, 인터넷은 아주 확실하게 알아들을 수 있다.
야곱은 답답하다. 외롭다. 죽을 것만 같이 무섭다. 해야 할 것이 무에 있을까? 기도밖에 없었다. 무릎을 꿇었다. 이때 하나님께서 야곱을 찾아오셨다. 씨름을 시작했다. 마치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하던 것처럼, 그렇게 야곱은 기도한다. 지루한 싸움이다. 안타깝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한 기도가 계속 된다. 무릎을 펴고 일어나야만 할 것 같다. 응답이 없는데, 아무 소용도 없는 것 같은데, 굳이 이렇게 힘든 기도를 계속 해야 하겠는가?
야곱의 기도가 쉽지 않다. 어떻게 기도했기에,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부러지기까지 했을까? 딱히 이름붙일 만한 것이 없어서‘씨름’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런데 야곱에게는 ‘씨름’이라는 이름만으로는 부족하다. 전쟁이다. 죽기 전에는 포기할 수 없는 전쟁이다.
어떤 사람이 겨울등산을 하다가, 그만 바위에서 미끄러져 아래로 떨어졌다. 떨어지다가 무엇인가를 움켜잡았는데, 그것은 바위틈에서 자란 나무의 뿌리였다. 두 손으로 잡을 수 없을 만큼의 작은 나무여서, 온 힘을 한 팔에 모아 나무를 움켜잡고, 살려달라고 소리를 쳤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떨어지면 시체조차 찾을 수도 없을 것 같은 천길 만길 낭떠러지였다. 몸을 가볍게 하기 위하여 등에 매었던 배낭도 벗어 버렸다. 그의 손에는 그의 생명을 건 나무뿌리뿐, 다른 가치 있는 무엇을 준다 해도 잡을 수도, 잡아서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다행이 가까이에 구조대가 있어서, 그는 쉽게 구조되어 목숨을 건졌다. 나중에 보니, 얼마나 나무를 세게 움켜잡았던지, 손바닥에 피가 흥건하였다. 피가 나도록 나무를 움켜잡고 있었기에, 그는 살아날 수 있었다.
‘씨름’은 ‘단단히 붙잡다’라는 뜻이 있다. 등산객이 절대로 손을 놓을 수 것처럼, 야곱은 하나님의 손을 절대로 놓을 수가 없었다. 등산객이 손을 놓는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야곱이 기도를 포기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기도한다. 100세의 노인이 허벅지 관절이 부러져 가면서까지 기도한다. 처절하다는 말이 제일 적당할 듯싶다. 야곱의 기도는 그러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신다.“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막 9:29)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25절)사람이 하나님을 이길 수 있을까? 절대 그럴 수 없다. 그런데 성도에게는 하나님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이 한 가지 있다. 기도이다.“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기도로는 야곱을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하셨다.
‘허벅지 관절’은 사람의 몸을 받쳐주는 물리적 힘의 생성(生成) 부분으로 종종 생명과 힘의 근원을 상징한다. 하나님께서는 ‘허벅지 관절’을 부러뜨리심으로 야곱의 생명을 위협하셨다. 그런데 야곱은 기도를 포기하지 않는다. 왜? 이유는 간단하다. 야곱에게는 포기할 수 없는 기도의 제목이 있기 때문이다.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시 91:15) 간구해야만 한다. 간구하는 자만이, 간절한 기도만이 하나님의 응답을 받는다. 환난을 만난 자가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구원하신다. 그리고 그를 영화롭게 하신다. 그래서 기도한다.
기도하는가? 예수님께서 당연하게 여기시는 기도하는 모습이 내게 있는가? 왜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겠다 말씀하시는데, 기도하지 못하는가? 왜 하나님께서 나를 영화롭게 하겠다 말씀하시는데, 기도하지 못하는가? 이유가 무엇일까?
이유는 너무 간단하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는데, 나의 기도를 들으시는데, 어떻게 기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왜 기도하다 쉽게 포기하는가? 하나님 말고도 구원 받을 다른 방법이 있기 때문이다.
난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인생이다.
난 하나님 없이는 살지 않을 인생이다.
난 허벅지 관절이 부러져도 일어서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구하고 야곱이 기도했던 것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할 것이다. 내가 무릎을 펴는 순간은 기도가 응답되었을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