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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오백년!
초롱초롱 박철홍의 역사는 흐른다! 45
중종반종과 기묘사화
갑자사화를 냉정하게 정치적으로 판단해보면 연산군이 폐비윤씨 문제를 핑계로 임사홍,신수근등 궁중세력이라는 새로운 측근 세력을 등장시켜 훈구세력의 경제 기반을 탈취하고자 일으킨 사화였다.
당시 연산의 호사스럽고 환락적인 생활로 궁궐재정은 바닥이 나 있었다.
그러나 구색을 맞추다 보니 이때 사림계열의 희생도 함께 있었다.
이와 같이 연산시절 두 차례의 사화와 연산의 공포정치가 거듭되는 동안 훈구, 사림 할 것 없이 많은 신하들이 희생되었다. 그리고 연산의 학정은 더욱 심해졌다.
연산 자신의 실정에 대한 직간을 멀리하고, 경연(經筵)과 대제학제도를 폐지하였으며, 창덕궁과 담을 사이에 두고 있는 성균관을 연락(宴樂)의 장소로 만들었고, 장악원을 개칭한 연방원(聯芳院)을 원각사(圓覺寺)에 두어 여기(女妓)들의 모임 장소로 삼았다.
이처럼 연산이 유희와 안락으로 세월을 보내며 국정을 도외시하자 이에 갑자사화로 큰 희생을 본 훈구파들도 연산을 더이상 견뎌낼 수 없었다. 훈구 세력을 중심으로 반정의 움직임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전 이조참판 성희안은 지중추부사 박원종, 이조판서 유순정, 군자감부정 신윤무 등과 함께 왕이 장단(長湍) 석벽(石壁)을 유람하는 날을 기하여 거사할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왕의 행차가 취소되면서 거사에 차질이 생겼다. 이때 호남 지역에서의 연산군 폐위 거사 격문이 서울에 나돌게 되면서 결국 당초 계획을 강행하였다.
그리하여 1506년 9월 1일, 박원종·성희안·유순정을 비롯하여 전 수원부사 장정, 군기시첨정 박영문, 사복시첨정 홍경주 등은 훈련원에서 무사를 규합한다.
그 무사들이 연산 왕비 신씨의 오라버니 신수근과 그의 아우들인 신수겸과 신수영 그리고 임사홍 등 연산군의 최 측근을 제거한다.
그리고 백관을 거느리고 경복궁에 들어가 자순왕대비의 윤허를 받아 연산군을 폐위하여 강화도 교동에 안치하였다. 중종반정의 성공이었다.
바로 다음날 진성대군이 경복궁 근정전에서 왕위에 오르니 그가 조선왕조 제11대 왕인 중종이다.
중종은 준비되지 않은 왕이었다.
중종반정 당일 날 중종 집 앞으로 군사가 밀려 오고 있디는 소리를 듣자 중종은 이복형인 연산군이 자기를 죽이러 보낸 군사인 줄 알고 자살하려 했다.
그러나 중종 부인 신씨 (연산군 궁중세력 대표인물 신수근의 딸 )가 집에 도착한 군사가 말머리를 어디로 향하는 가를 보고 나서 결정해도 늦지 않다며 자살을 만류했다.
신씨 말대로 군사들의 말머리는 중종 집 바깥 쪽을 향해 중종을 죽이러 온것이 아니라 보호하려 왔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이처럼 종종은 반정 당일까지도 자기가 왕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런 중종이기에 즉위 초는 아무런 역할도 할 수 없었다. 박원종, 성희안 등 반정공신 위세에 눌려 조용히 지내고 있었다.
대장금 드라마에 나오는 중종처럼 대장금이나 수랏간에서 만들어 준 음식을 먹으면서
" 음~ 맛있구나!"
말만 되풀이 하고 있었다.
오죽하면 중종반정으로 역적이 된 신수근의 딸인 조강지처 신씨 자기 부인도 궁으로 데리고 갈 수 없는 처지로 있었다. 조강지처 신씨를 지척에 두고도 신씨가 죽을 때까지 궁으로 부르지 못한 채 중종 생전에는 보지 못하고 만다.
신씨가 중종이 궁궐에서 자기 치마라도 볼 수 있도록 인왕산에 자기가 입었던 치마를 항상 걸어 놨다는 애뜻한 인왕산 치마바위 전설만 생겨나게 된다.
중종이 즉위한 지 십년 쯤 지나 박원종등 반정공신들이 자연사하고 중종도 어느 정도 왕 노릇 하게 되자 중종은 반정공신들을 견제할 세력의 필요성을 느꼈다.
그때 중종은 당시 사림들의 대표격인 조광조를 이조판서 안당의 추천으로 등용했다.
먼저 원칙주의자이면서도 이상주의자인 조광조에 대해서 알아 보자!
조광조는 조선에 성리학적 이념을 정착시킨 사림파의 거두이다. 하지만 조광조의 근본은 훈구파에 더 가깝다.
조광조는 훈구파의 본산이라 할 수 있는 조선개국공신 중의 한 분인 조온(溫)의 5대 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광조 할아버지가 계유정란이 일어났을 때 수양이 아닌 다른 쪽으로 줄을 서서 집안이 몰락한다.
그러나 조광조 아버지 때 지방의 찰방(지금 6급정도의 말을 돌보는 일을 함 )이라는 조그만 벼슬을 얻어 조선의 최북단 현재 북한 핵기지 영변 부근인 '희천'이라는 곳으로 발령 받아 간다.
희천에서 조광조는 운명적인 만남을 가진다. 무오사화로 화를 입고 희천에 유배 중이던 사림파 이론가 김굉필(金宏弼)을 만나고 그의 수제자가 된다. 조광조 나이 17세 때였다
그 후부터 초야에서 독실하게 학문을 닦던 조광조는 학문의 성취를 사림으로 인정 받고 사림파 영수가 된다.
조광조는 조정에 나온지 3년 만에 초스피드 승진을해서 대사헌(오늘 날 검찰총장+감사원장)이라는 자리까지 오른다.
조광조와 중종은 처음에는 손발이 척척 맞았다.
중종은 조광조에 깊이 빠져 들었다.
둘 이는 신혼부부 같이 서로 열렬히 사랑했다.
조광조는 어려서부터 행실이 바르고 아이답지 않게 근엄하며 남의 실수를 용서하지 않는 엄격함을 보였다. 보통 사람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뜻을 높이 세우고 학문에 열중하는 그를 가리켜 사람들은 ‘광인(狂人)’이라거나 ‘화태(禍胎·화의 태반)’라고 할 정도였다.
조광조는 용모도 매우 빼어났던 것으로 보이는데, 조선 중기의 학자 유몽인이 쓴 ‘어우야담’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조광조는 얼굴이 뛰어나게 아름다웠다.
그는 거울을 볼 때마다 매번 ‘이 얼굴이 어찌 남자의 길상(相)이겠는가?’라고 탄식했다.”
중종에게는 정제되고 멋진 외모의 이런 조광조 모습이 처음엔 너무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이런 부류의 사람은 멀리서 보기에는 좋아 보이지만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었다. 너무 철저한 자기 절제와 관리는 주위 사람까지 숨막히게 한다.
중종과 조광조의 관계가 딱 그랬다.
조광조의 정치관은 유교를 정치와 교화의 근본으로 삼아 도학정치를 실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조광조가 추구한 도학정치는 조선시대의 풍습과 사상을 유교식으로 바꾸어 놓는 것이었다.
조광조는 일반서민들까지도 주자의 ≪가례 家禮≫를 지키게 하여 상례(喪禮)를 다하게 했다. 또 젊은 과부의 재가도 허락하지 않도록 했다. 즉 성리학에 기반을 둔 도덕적 이상주의 세상을 만들고 싶어 했다.
그리고 자기 자신 부터 철저히 실천했다.
조광조는 중종의 신뢰를 바탕으로 현실정치의 실세가 된다. 그리고 유학의 이상정치를 구현하기 위해 미신 타파를 내세우면서 소격서(도교의 제천행사)를 폐지 한다.
지금도 상당히 남아 있지만 그 당시만 해도 풍수지리, 사주팔자 등 샤머니즘 비슷한 도교가 일반 서민들 뿐만 아니라 훈구파에게도 유교보다 더 강하게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있었다.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 설화에도 도교적인 내용이 강하게 남아 있다.
그런데 조광조는 우리 고유 전통 사상을 배척했다.
사실, 어떻게 보면 조광조의 개혁정치는 긍정적인 면도 있었지만 우리 고유 전통문화와 우리 민족의 기상을 위축시키고 백성들까지도 성리학 이념아래로 들어가게 한 것일 수도 있다.
요즘 우리가 초상치를 때나 제사를 지내는 실생활에도 조광조의 그런 사상이 여전히 남아 있다.
이런 조광조 도학정치의 옳고 그름은 읽는 분들 판단에 맡긴다.
이어 조광조는 현량과(賢良科)를 처음 실시하게 주장하여 신진사류 소장학자들을 뽑는다. 이들이 어느 정도 세를 형성하자 훈구세력인 반정공신을 공격하기에 이른다. 중종이 보기에는 이제 조광조와 신진사류들이 그 도를 넘기 시작한다고 생각했다.
조광조는 중종의 그런 마음의 변화를 전혀 눈치 채지 못한다. 조광조는 왕도 단지 도학정치의 한 일원으로민 보았다. 왕도 자기가 추구하는 성리학적 도학정치를 철저히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왕에 대한 경연을 더 강화시켜나갔다.
조광조는 중종이 경연에 지쳐 조금 쉬자고 하면 그 자리에서 "모범을 보여야 할 국왕이 그러시면 안된다" 고 면박을 주곤 했다.
또 경연 도중 중종이 하품을 하면 "국왕이 품행이 그러시면 안된다" 하고 조광조가 질문을 해서 중종이 잘 모른다고 하면 "그것도 모르시냐"면서 중종을 면전에서 비난하기를 서슴치 않았다.
조광조는 중종의 자기에 대한 애정을 철저히 믿고있었으니까 그런 행위가 가능했을 것이다.
중종은 조광조에 대힌 사랑이 넘쳐 있을 때 조광조의 이런 대범함을 멋지게 보고 웃어 넘겼다. 그러나 조광조가 너무 태연한 모습으로 신하들 앞에서 그러한 모습을 자주 보이자 중종은 조광조가 자기를 인간적으로 능멸한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사랑은 움직이는 것이다.
중종의 조광조에 대한 마음은 변한 정도가 아니라 이제 증오로 넘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눈치없는 원칙주의자 조광조는 그런 행동과 개혁정책을 중종에게 계속 밀어 부치니 중종은 조광조에 이제 인간적으로 진절머리를 내기 시작한다.
중종은 조광조와 신진사류가 반정공신들을 적당히 견제 해주기만 바랬을 뿐인데 아예 자기 머리 꼭대기 위에서 논다고 생각했다. 조광조와 신진사류가 훈구파보다 더 지나치게 신권을 강화시키고 왕권을 제약한다고도 보았다.
이런 상황에서 나온 것이 위훈삭제(僞勳削除)다.
조광조와 신진사류는 정국공신(靖國功臣)이 너무 많아 국가 재정을 축내고 있다면서 이의 실천 대안으로 반정공신 2·3등 중 가장 심한 것은 개정해야 하고, 4등 50여 인은 모두 공이 없이 녹을 함부로 먹고 있으므로 삭제함이 좋을 것이라는 위훈삭제(僞勳削除)를 강력히 주장하고 나섰다.
그러나 조광조와 신진사류들의 주장은 쉽게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 이미 반정공신들은 기성 귀족이 되어 있었고 현실적으로 원로가 된 훈구세력을 소인배로 몰아 배척하려는 급격한 개혁주장은 아직 그들 힘에 벅찼다.
그리고 중종도 위훈삭제만은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다. 사실 이 위훈삭제는 어떻게 보면 중종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중종의 지지기반을 뿌리 채 뽑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광조와 신진사류는 눈치없이 끝까지 밀어부친다. 이에 중종도 어쩔 수 없이 위훈삭제를 일부 받아들이지만 중종은 조광조에 마음 속 깊이 앙심을 품는다.
그리고 이러한 급진적인 개혁은 훈구파의 강한 반발을 야기시킬 게 뻔한 일이었다.
훈구파들은 중종의 마음이 조광조에게 이미 떠나 있음을 눈치 챈다. 아마 중종이 그들에게 미리 눈치를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훈구파들이 반격에 나선다.
훈구파 중 홍경주(洪景舟)·남곤(南袞)·심정(沈貞)등이 제목이 잘 기억나지 않은 드라마에서 "메야? "로 유명한 경빈 박씨(敬嬪朴氏) 등 후궁을 움직여 왕에게 신진사류를 무고하도록 하였다.
그들은 대궐 나뭇 잎에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글자를 꿀로 발라 벌레가 파먹게 했다. 그런 다음에 궁녀로 하여금 이를 따서 왕에게 바쳐 조광조가 역심을 품고 있다는 의심을 중종이 하게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이 이야기는 조선실록에도 나오는 이야기이지만 믿을 것은 못된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 글자로 꿀을 발랐다고 해도 벌레가 어떻게 그 글만을 나오게 파 먹겠는가?
실록에 나왔다고 해서 그게 정설은 아니다. 실록은 가끔 유언비어같은 이야기도 그런 말이 시중에 떠돌았다하면서 기록하기도 한다.
어쩌든 이런 저런 이유로 조광조는 역적으로 몰려 귀양가서 사사를 당하고 조광조와 같이한 신진사류들도 같은 화를 당하는데 바로 이것이 기묘사화였다.
이처럼 기묘사화는 그 당시 사림파 영수인 조광조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아니 조광조를 한 개인을 죽이기 위한 사화였다. 거기에 조광조를 따르던 사림들까지 큰 피해를 본 것이었다.
조광조와 신진사류들이 기성세력인 훈구파를 축출하고 새로운 정치질서를 이루려던 계획은 이처럼 실패하고 만다.
후에 조광조의 후예들인 율곡 이이나 퇴계 이황은 이들의 실패 원인을 그들이 대부분 젊고 또 정치적 경륜도 짧은 데다가 개혁을 급진적이고 너무 과격하게 이루려다가 노련한 훈구세력의 반발을 샀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조광조가 눈치없이 지나치게 원칙만 따지며 현실을 제대로 보지 않고 이상만 추구했다는 것은 맞지만 또한 연인관계 같았던 중종과도 소통하지 않고 중종의 사랑만 믿고 중종의 입장을 전혀 고려 하지도 않은 채 밀어 부치기만 했다. 조광조의 중종에 대한 눈치없는 일방적인 사랑이 더 큰 문제였다고 보여진다.
실록에 나온 것을 보면 훈구파 신하들까지도 조광조를 귀양정도 보내고 그쯤에서 끝내기를 간청하지만 중종은 조광조를 끝까지 사사 할 것을 고집한다. 그러면서 중종이 지금까지 조광조에게 인간적 모멸감을 심하게 느꼈다며 속내를 말한다.
사랑이 엄청난 증오로 변한 경우이다.
사랑은 고무줄 놀이라는 것을 조광조가 당시 조금만 알았더라면 기묘사화 같은 비극은 없었을 까?^^♡
다음은 을사사화 편이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