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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智異山)종주(성삼재-노고-벽소-천왕봉-중산리)사진14컷
*2001년10월2일~3일(火水)晴雲
해봉산악회(43명)
♠참 고
▲지리산[智異山]
위치 : 전북 남원시, 전남 구례군, 경남 산청군, 하동군, 함양군
높이 : 1915m
주봉우리 : 천왕봉
신라 5악의 남악으로 ꡐ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으로 달라진다ꡑ하여
지리산(地理山)이라 불렀고, 또 ꡐ멀리 백두대간이 흘러왔다ꡑ하여 두류산(頭流山)
이라고도 하며, 옛 삼신산의 하나인 방장산(方丈山)으로도 알려져 있다.
남한 내륙의 최고봉인 천왕봉(1915m)을 주봉으로 하는 지리산은 서쪽 끝의 노고단(1507m),
서쪽 중앙의 반야봉(1751m) 등 3봉을 중심으로 하여 동서로 100여 리의 거대한 산악군을
형성한다.
천왕봉에서 노고단에 이르는 주능선을 중심으로 해서 각각 남북으로 큰 강이 흘러내리는데,
하나는 낙동강 지류인 남강의 상류로서 함양․산청을 거쳐 흐르고, 또 하나는 멀리 마이산과
봉황산에서 흘러온 섬진강이다. 이들 강으로 화개천, 연곡천, 동천, 경호강, 덕천강 등 10여
개의 하천이 흘러들며 맑은 물과 아름다운 경치로 ꡐ지리산 12동천ꡑ을 이루고 있다.
지형은 융기작용 및 침식․삭박에 의해 산간분지와 고원․평탄면이 형성되어 있고 계곡은 깊은
협곡으로 되어 있다. 최고봉은 섬록암(閃綠岩)으로 되어 있고 주변은 화강암․화강편마암의
지질이 넓게 분포되어 있다.
화엄사, 천은사, 연곡사, 쌍계사 등 유서 깊은 사찰과 국보․보물 등의 문화재가 많으며,
800여 종의 식물과 400여 종의 동물 등 동식물상 또한 풍부하다.
1967년 국립공원 제1호로 지정되었다.
▲지리산 유래
지이산(智異山)이라 쓰고 '지리산'으로 부르는 이산은 옛부터 금강산,한라산과 더불어
신선이 내려와 살았다는 삼신산의 하나로 방장산(方丈山)이라 일컬어 왔다.
방장이란 중국에서 먼 옛날부터 동해 가운데 신선이 살고 불로초가 많다고 전해지는
미지의 신비경인 봉래,방장,영주 삼신산의 이름 하나를 따온 것이다.
고대 중국의 진시황이 불로초를 구하려 삼천 동자를 동해 건너 삼신산인
지리산으로 보냈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옛 문헌에는 지리산을 '地理山'으로 표기한 것도 있는데 이것은 불교에서 유래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고대 불료에서는 지리산을 문수도장으로 불렀다. 지혜의 보살 문수대성이 이산에
머물면서 불법을 지키고 중생을 깨우치는 도량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산을 文殊師利의 리(利)를 따서 '地利山'으로 표기했다고 한다.
지리산이라 함은 신의 땅에 오묘한 이치를 간직하고 있다는 뜻.
즉, '특이한 지혜를 간직한 산'이라는 뜻이다.
지리산은 색다른 일화도 지니고 있다.
이성계가 조선 창업의 큰 뜻을 품고 우리나라의 명산을 순례하며 기도를 드릴 때
지리산에서만 유독이 소지(燒紙)가 오르지 않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이성계는 등극한 뒤 지리산을 불복산(不伏山)또는 반역산(反逆山)이라
부르고 역적을 지리산록의 전라도로 귀양 보내는 율을 세울 만큼 원한을 품기도
했다는 것이다.
지리산은 또 하나의 불명예스런 이름인 적구산(赤狗山)으로 불리기도 했다.
여순사건에서 6.25전쟁을 거치는 동안 빨치산의 활동 근거지가 됨으로써 얻은
이름이다.
♣산행 코스
11:35=성삼재 출발
12:27=노고단
13:25=임걸령
14:45=삼도봉
15:10=화개재
15:50=토끼봉
17:25=연하천대피소
19:20=형제봉
19:50=벽소령대피소(일박)
*8시간15분
06:45=벽소령 출발
07:47=선비샘
08:55=칠선봉
09:38=영신봉
09:56=세석평전
11:45=연하봉
11:55=장터목대피소
12:16=제석봉
13:07=천왕봉
14:40=법계사
16:20=순두류 위령비
17:10=중산리주차장
*10시간25분
총 18시간40분
☞☞☞지난 1998년 6월 백두대간 종주, 마지막 구간으로 종주한 기억이
생생한 지리산 종주. 당시 성삼재에서 토끼봉까지는 깜깜한 야간산행을 했기
때문에 주변 경관을 제대로 캠코더에 담지 못해 아쉬웠는데
이번 지리산 종주 1박2일 코스는 그 구간을 깨끗이 담을 수 있는 기회가 되서
기대가 컸고 지리산 10경중의 하나인 벽소명월도 촬영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대에
부풀어 캠코더 2개와 구형캐넌을 챙겨 집을 나섭니다.
추석 연휴 탓인지 시민회관 앞은 원색의 등산복으로 인산인해고 버스안도
만원입니다. 예약자 한사람을 기다리다
08시10분, 부산교통관광버스는 시민회관 앞을 떠납니다.
정 대장이 마이크를 잡고 일박할 벽소령대피소에 예약과 지리산종주에 대한
자세한 안내방송을 합니다.
지난 백두대간 종주 시 촬영한 지리산구간 비디오를 감상하며 가다
‘문산휴게소’에 들리고 대진고속도로를 거쳐 함양군 마천을 지나
정령치 갈림길 전의 도로상의 달궁 매표소에서 인원점검도 받지 않고 단체
입장료를 지불하고 그냥 통과합니다.
달궁(達宮)의 유래는 우리 민족이 부족국가 사회를 이루고 있던 삼한시대에
부족 상쟁으로 크게 전쟁이 일어났는데, 이때 마한의 대군에 쫓기던 진한왕이
전쟁을 피하여 문무백관과 궁녀들을 이끌고 지리산으로 들어와 심원계곡에
왕궁을 세우고 적을 막으며 오랫동안 피난생활을 하였는데 당시 도성이 있었던
곳을 달궁이라 이름 지어 불렀다고 전해집니다.
급비탈의 갈지자 도로를 힘들게 올라가다
11시20분, 차량정체가 심한, 맑은 하늘의 성삼재에 올라섭니다.
성삼재는 삼한시대에 마한군에 밀리던 진한왕이 전란을 피하여 지리산
심산유곡으로 찾아들어 달궁 계곡에 왕궁을 세우고 피난할 때, 북쪽 능선에
8명의 장군을 배치하여 지키게 하였으므로 팔랑재, 서쪽 능선은 정 장군으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으므로 정령재, 동쪽은 황 장군이 맡아 지키게 하였으므로
황영재, 그리고 남쪽은 가장 중요한 요지이므로 성이 다른 3명의 장군을 배치하여
방어케 하였으므로 성삼재라 부르게 되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관광버스는 부산으로 돌아가고 초만원의 주차장을 지나
노고단 진입 임도의 지리산등산안내도간판 앞에 집결, 캠코더 한개는
후미담당 김 홍팔군에게 촬영하라고 인계합니다.
정 대장의 인원파악과 상견례로 ‘반갑습니다!’를 외치고
11시35분, 가족유산객들의 아이들 울음소리로 소란한 임도를 따라 노고단으로
출발합니다. 아이들을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를 일깨워주는 건 좋은데
이렇게 울리면서까지 다리고 간다는 건 좀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널찍한 임도를 따라 올라가다 왼편으로 크게 돌아 올라가는데 지름길로
오르는 직선 비탈을 철망으로 막아 놓았는데도 그 옆으로 곧장 치고
올라가는 유산객과 일부등산객들의 어처구니없는 심뽀는 무엇일까요?
다시 왼편으로 크게 돌아가면서 화엄사 갈림길 이정표(성삼재1.5km),
오른편으로 화엄사 계곡과 화엄사를 캠코더에 담으며 올라갑니다.
돌계단에서 한 지체장애자가 나무지팡이를 짚으며 힘들게 올라가는 광경을
캠코더에 담으며 많은 것을 배우고 감동을 받습니다.
벽돌 골조만 흉물스럽게 서있는 외국인 휴양소와 해발1370m 노고단 대피소 앞을
지나 회원들은 잠시 약수터에서 목을 축이고 돌계단을 거쳐
12시28분, 좌우 돌탑이 있는 노고단(지남24-05)에 올라섭니다.
(우측에 멀리 있는 본래의 노고단 돌탑 쪽은 출입금지구역)
노고단(老姑壇,1,506m)은 지리산의 3대 주봉 중 하나로서 종주 능선상의 서쪽
기점을 이루고 있으며 등행 교통의 요지로서 화엄사, 천은사, 만복대, 피아골,
뱀사골 등 산행 코스는 모두 이곳을 경유하게 됩니다.
노고단 정상은 길상봉이라 불리며 정상에서 완만한 경사가 서향으로 이루어진
30만평의 넓은 고원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신라시대부터 지리산의 산신 선도성모
(仙桃聖母)를 모시는 남악사가 있었던 민속신앙의 영지로서 성모신을 국토수호의
성신으로 받들어 나라에서 해마다 봄, 가을이면 국태민안을 비는 제사를 모셔
왔으며 그 유풍은 신라 고려 조선에 걸쳐 전승되어 왔다고 합니다.
노고단 아래에 자리하고 있는 구례군 고유의 민속 명절인 곡우절(매년 4.20일),
약수제 민속제전도 이에서 유래하며, 노고단이라는 명칭도 지리산 신령인
선도성모를 마고(麻古)할미로 존칭하여 부르게 된데서 연유한다고 합니다.
신라시대에는 이곳이 화랑들의 심신 수련의 도장으로 이용되었으며 일제
30여년 유럽인 선교사들의 피서용 별장이 50여 동이나 있었던 곳으로서
한여름에도 차가운 샘이 솟고, 기온이 서늘하며 고원의 경관이 아름다워 동양
제일의 피서지로 유명하였으나, 전쟁으로 인하여 별장이 모두 불타버려 별장을
노고단 서남능선 약 15Km지점의 왕시루봉(해발 1,231m)으로 옮기게 되었고,
특히 봄 철쭉, 여름 원추리, 가을 단풍, 겨울 설화의 아름다운 경관은 모두
노고단을 지상 낙원으로 꾸며 주며, 그 주위에는 종석대, 관음대, 집선대, 문주대,
청연대, 만복대등 명승지가 있습니다.
그리고 남해에서 운무가 파도처럼 밀려오는 날이면 갑자기 구름바다가 운평선을
이루는 노고운해의 장관을 이루는데 이 경관은 지리산의 10경중의 하나로 꼽습니다.
오늘은 그런 운해 대신 바로 11시 방향으로 반야봉(般若峰)이 편안하게 앉아 있고
이틀에 걸쳐 찾아갈 천왕봉이 맑은 하늘에 지척인 듯 편안하게 누워있는 풍광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잠시 이런 행운을 캠코더에 줌으로 담았다 풀어놓고 배낭에서
무거운 구형 캐넌을 꺼내어 소중하게 한 컷 촬영합니다.
동내산악회의 회장을 맡고 있다는 주 회원이 깎아주는 시원한 배 한 조각으로 목을
축이고 12시35분, 본격적인 종주 길을 따라 통나무 계단을 내려갑니다.
회원들은 작은 바위돌이 깔려있지만 평탄한 등산로, 짧은 너들을 따라 가벼운
걸음들로 가볍게 움직입니다.
짙푸른 하늘에 두둥실 떠있는 뭉게구름들.
간간이 나타나는 붉은 단풍잎이 시선을 끌고 얼마나 걸었을까
잠시 뒤돌아 울긋불긋 단풍으로 물이든 노고단자락을 바라봅니다.
13시14분, 헬기장을 지나
한때 멧돼지들이 무수히 서식했다는 돼지평전을 거쳐
13시25분, 피아골 갈림길 이정표(피아골대피소2.5km 천왕봉29.1km 노고단2.7km)
를 통과합니다.
피아골은 핏빛 같은 붉은 단풍으로도 유명한데 지리산의 관문인 노고단의 등 너머서
섬진강으로 향하는 물줄기가 동남쪽으로 깊이 빠져나간 큰 계곡입니다.
6.25동란 직후 피아골이란 영화 작품이 나왔던 탓으로 흔히들 동란 때 이곳에서
동족상잔의 피를 많이 흘려 피아골이라 부르게 된 것으로 잘못 알고 있으나 오랜
옛날부터 불려 내려오는 유서 깊은 이름입니다.
옛날, 속세를 버리고 한적한 이곳, 선경을 찾은 선객들이 이곳에서 오곡 중에
하나인 ‘피’를 많이 가꾸었던 연고로 자연히 피밭(稷田)골이라 부르게 된 것이
그 후 점차적으로 그 발음이 피아골로 전화된 것이라 합니다.
작은 오르막을 넘어 목책이 등산로를 인도하는 왼편으로 잘 가꾸어놓은
임걸령 약수터에서 시원한 약수로 다시 목을 축이고 나오는데 건너편 푸른 하늘에
탐스러운 뭉게구름이 거대한 빙산처럼 덩그렇게 떠있는걸 캠코더에 덥석 담으며
배경음악으로 나훈아의 ‘영영’을 떠올립니다.
임걸령(林傑嶺:1,320M)은 노고단에서 반야봉으로 이어지는 능선 상 중간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높은 고령(高嶺)인데도 불구하고 우뚝 솟은 반야봉이 북풍을
막아주고 주능선이 동남풍을 가려주니 녹림(綠林) 속에 자리한 아늑하고 조용한
천혜의 요지이며 이곳은 옛날에 녹림호걸(綠林豪傑)들의 은거지가 되었던 곳으로
의적(義賊)두목인 임걸(林傑)의 본거지였다 하여 '임걸령'이라 부르게 되었고
샘터에서 피아골 쪽 암벽 밑에 막(幕)터가 있으니 이곳을 '황(黃) 호랑이 막(幕)터,
라 부르며 옛날에 약초꾼 황(黃)장사가 눈이 내리던 겨울밤에 이곳에서 천막을
치고 자다가 지혜와 용기로 큰 호랑이를 잡았다는 전설이 숨어있기도 합니다.
이제 바위돌이 혼재한 오르막으로 이어집니다.
유산객 가족팀 중에 꼬맹이 둘이 힘들다며 올라가기 싫어 떼를 피우는 걸
캠코더로 촬영하면서
“어~이구~ 잘 올라가네!”
하며 칭찬하자 금방 앞서가는 누나를 앞질러 기운차게 올라갑니다.
이래서 칭찬은 마력을 가졌나 봅니다.
다시 긴 통나무계단을 거쳐 반야봉으로 오르는 노루목을 지척에 두고
14시7분, 선두그룹이 둘러앉아 식사하고 있는 현장에 합류합니다.
약 10분간의 식사와 농담으로 휴식을 취하고 다시 일어섭니다.
14시23분, 노루목에 당도합니다.
지리산 종주를 위해 평소 근교산 산행과 헬스클럽에 다니며 체력을 키우고
이번에 도전했다는 보수동 장년 팀 중 일일회원이 국제시장의 이 회원의
소개로 참여했다는데 컨디션이 안 좋은지 저 대신 신 회장님이 사암침으로
치료를 해주고 있습니다.
노루목은 반야봉에서 내려지르는 산줄기가 산중턱에서 잠깐 멈추었다가 마치
노루가 머리를 치켜들고 피아골을 내려다보는 것 같은 천연의 암두(岩頭)전망대
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오른편으로 전망대가 보여 암반위에 올라 삼도봉과 길게 뻗어 내린
불무장등을 캠코더에 담고 뒤돌아 노고단을 촬영하고 되돌아 내려갑니다.
시간이 없어 올라가지 못하는 반야봉(般若峰,1,728m)은 지리산 3대 주봉 중의
하나로, 반야란 불교의 반야심경에 나오는 지혜를 뜻하는 말이고 지리산의
중심부에 위치, 수려 장엄한 이 산의 전경을 고루 한눈에 전망할 수 있으니
정상에서 바라보는 광대한 산세의 기상은 장산 거악임을 실감케 하며,
반야봉에서 바라보는 낙조의 장관은 지리산 10경중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정상에서 북쪽으로 약 600m거리에 있는 반야봉의 북봉은 아름드리 구상나무
거목의 상록 원시림 지대를 이루고 있어 창연한 경관 속에 태고의 정적이 깃들어
있고 반야봉 남쪽 중턱 경사진 고원에 군락하는 철쭉 꽃밭은 지리산에서 세석평전
다음가는 철쭉지대로서 5월 하순경 꽃이 만발하면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절경을 이
룬다고 합니다.
통나무계단을 거쳐 왼편으로 반야봉 자락을 끼고 가다
14시37분, 반야봉갈림길 이정표에서 오른편으로 꺾어지고 깨끗이 벌초한 봉분을
발견합니다. 어느 후손이 백두대간위에 모셔 놓은 게 부끄러워서인가 그 흔한
묘비석도 보이지 않습니다.
14시45분, 삼도(전라남북도, 경상남도)경계를 표시한, 많은 등산객들이 꼭지를
얼마나 많이 만졌는지 반들반들 윤이 난 작은 피라미드형의 동판이 박혀있는
삼도봉에 올라섭니다.
삼도봉(三道峯)은 반야봉 바로 아래 해발 1,550m로 지리산의 수많은 준봉
가운데 특이하게 눈에 띄는 봉우리는 아닙니다.
원래 이 봉우리는 정상 부분의 바위가 낫의 날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해
낫날봉으로 불렸습니다. 낫날이란 표현의 발음이 어려운 탓에 등산객들 사이에선
'낫날봉'이 '날라리봉'으로 더 알려져 있었고 반야봉의 그늘에 가려 별다른 특징을
찾을 수 없는 산세지만 지리산을 삼도로 구분하는 기점이라는 데서 그 의미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지난날 전반에 백두대간 구간종주도 했든 헤피 문양이 갈증이 심한지 경계동판
앞에 삼도를 깔고 앉아 물병으로 나팔을 불고 캠코더 앞에서 활짝 웃으며
“파이팅!”을 외칩니다.
전면은 언젠가 다녀간 불무장등(佛母長嶝)으로 내려가는 길목,
왼편으로 대간 길로 내려가는 시그널이 나뭇가지에 달려있는데
그 위 바위위에 등산객들이 앉아 주변의 풍광을 즐기고 있는게 캠코더에 잡힙니다.
멀리 천왕봉과 곧 찾아갈 토끼봉을 캠코더와 캐넌에 담고 토끼봉을 향해 출발합니다.
좌측으로 빨간 단풍잎을 드리운 암벽을 끼고 내려가다
근간에 만든 나무계단에 두터운 고무깔판을 까라 종주 팀에게는 마치
일급호텔 융단처럼 발바닥에 느끼는 감촉이 너무 좋습니다.
그전에는 된비알의 긴 바위길 내림과 오름으로 진을 빼든 난코스중의 하나였는데...
15시10분, 좌측으로 뱀사골로 이어지는 헬기장인 해발1315m의 화개재에 내려섭니다.
이정표는 ‘천왕봉19.2km’라고 표시해 놓았고 좌측으로는 뱀사골대피소로 내려가는
등산로가 보입니다.
뱀사골의 유래는 뱀사골 계곡 초입에 있는 석실 건너편에 배암사란 사찰에서 이름을
따온 것으로 배암사 역시 정유재란 때 불타 없어져 버렸다고 합니다.
뱀사골은 용이나 뱀과 관련된 이름을 가진 명소가 많은 것으로 유명합니다.
요룡대는 용이 머리를 흔들며 승천하는 모습을 의미하는 곳이며, 탁용소는 큰 뱀이
탈피하여 용으로 변신하는 장소, 뱀소는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가 살던 곳을 뜻합니다.
이밖에도 병 모양의 병소, 암벽이 병풍을 두른 듯 한 병풍소, 산신제를 올리던 곳이라는
제승대, 소금장수가 소금가마니를 물속에 빠뜨렸다는 간장소, 뱀사골의 상류 일대를
지칭하는 들돌골 등이 유명합니다.
다시 토끼봉을 향해 오르막을 탑니다.
중간쯤 올라갔을까. 중간그룹이 퍼질고 앉아 휴식을 하고 있습니다.
그중에 노루목에서 침 치료를 받든 보수동 장년회원이 당찬 여장부 허 회원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재출발하면서 워킹에 대해 설명을 들으며 일어섭니다.
“올라갈 때 그렇게 걸으면 안되고 팍!팍! 걸어야지!”
“그럼, 니가 한번 걸어봐라 누가 그걸 몰라서 그러나...”
“여기서부터 헉! 헉! 하면 어떠카요! 힘두었다 어디 쓸낀교!!”
어느 사이 허물이 없어졌는지 악의 없는 농담에 주변에서 폭소가 터집니다.
오랜 세월 빗물에 흙이 씻겨 내려가 얼기설기 뿌리가 노출된 지점을 거쳐
15시50분, 널따란 해발1533m의 토끼봉, 헬기장에 올라섭니다.
이정표는 ‘천왕봉18.1km 노고단7.5km’라고 표시해 놓았습니다.
토끼봉이란 봉명은 방위 개념에서 비롯됐습니다.
지리산의 상징적 봉우리인 반야봉 정상에서 정동 쪽에 위치해 있다는 뜻으로
24방위의 정동(正東)에 해당하는 묘방(卯方) 12간지의 토끼라해 묘봉,
즉 토끼봉으로 이름 지어진 것입니다.
동북쪽 등산로 우측의 암반위에 올라섭니다. 확 트인 조망에 더욱 선명히 가까이
닥아 온 뭉게구름이 드리운 천왕봉자락의 짙은 그림자에서부터 시계방향으로
돌아가며 낙남정맥 삼신봉,
불무장등 멀리 노고단과 삼도봉과 반야봉까지 장엄한 풍광을 캠코더에 숨을 죽이고
천천히 담아나가며 서편제의 ‘천년학’을 떠올립니다.
잠시 기념촬영을 마치고 다시 종주 길로 들어섭니다.
내리막과 ‘위험지역’표시가 걸린 오르막 너덜지대를 지나 다시 집단휴식을
취하는데 동내산악회 회장을 한다는 J 회원이 자기산악회 이름과 모 국회의원의
이름이 적힌 시그널을 달고, 시즌에는 관광버스가 약10대 움직인다고 자랑합니다.
그리고 구수한 입담으로 회원들 중에 영감님들이 많아 초반에 술에 떡이 되어
정상으로 올라가는 회원은 1/10도 안되는 등 배꼽 잡는 에피소드를 늘어놓으며
오늘의 한심한 사회상에 크게 웃습니다.
그리고 허 회원이 보수동 장년회원에게 출발하자고 하자 소개한 이 회원이
“앉으라, 서라, 가라, 오늘 훌륭한 선생님 밑에서 교육 자알 받는다.”
며 다시 웃습니다.
16시55분, 해발1586m의 명선봉(明仙峰)허리는 언제 지나쳤는지 모른 체 나무계단
입구 이정표(천왕봉16km 연하천1km 토끼봉2km)를 지나 나무계단을 오르고
17시12분, 또 다른 이정표(천왕봉15km 연하천0.6km 노고단9.9km)를 지나
오름 끝의 내림의 좌우가 자연보전이 잘 되어있는 숲 속의 나무계단을 내려가
17시25분, 해발1440m의 연하천대피소에 내려섭니다.
고산지대임에도 불구하고 숲 속을 누비며 흐르는 개울의 물줄기가
구름 속에서 흐르고 있다 하여 연하천(烟霞泉)이라 부르게 되었다는데
백두대간 종주 시에 보았든 물이 풍부한 약수터, 건물 벽에서 배어나오는
연기는 여전한데 진도개가 보이지 않아 관리인에게 행방을 물으니 관리공단의
지시로 내려 보냈다고 합니다.
잠시 헤피 문양, 주 회원과 간식을 하고
17시40분, 출발하여 주목 군락지를 보호하기 위한 철망 사이 길로 돌아가는데
염려했든 보수동 장년회원이 다시 쥐가 내려 정 대장은 파스 스프레이를 뿌려주고
신 회장은 무릎을 지압해 주고 있습니다. 신 회장이 참여 안했으면 내 수지침과
삼능침이 수고했을 겁니다.
주 회원은 자신의 무릎 보호대와 스틱을 사용하라며 선 듯 건네줍니다.
오른편으로 조망되는 평지를 노을을 바라보며 가다
18시2분, 두 번째 고사목 한 그루가 서있는 전망대에서 먼 산 능선을
조망하고 일박할 벽소령대피소까지 아직 한 시간 반이 남아있어 발걸음을
재촉합니다.
우측 암벽을 끼고 빗긴 바위 옆 통나무 길의 ‘위험지역’표지판을 지나 암괴사이
내리막길을 거쳐 다시 암괴사이를 가로질러 내려서니 오른편으로 다시 멀리
능선을 조망하다 너들의 오름을 탑니다.
네 번째 조망지에서 한 무리의 등산객들과 함께 하는데 그 중 부녀등산객이
누워서 무릎관절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뒤에 알고 보니 서울의 ‘H산악회’회원
인데 여기서부터 그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동반산행을 합니다.
밧줄이 걸려있는 지점을 지나
18시33분, ‘지리01-26’지점 말뚝에서 또 다른 H산악회 회원들과 섞여 가다
건너편 능선위로 떠오르는 월출을 캠코더에 담는 대단한 행운을 얻습니다.
지리팔경중의 하나인 벽소령 월출을 벽소령을 못 미쳐서 잡은 샘입니다.
나 혼자 흥분하며 조용히 줌으로 당겼다 서서히 놓으면서 황홀한 순간순간을
장시간 캠코더에 담습니다.
밧줄이 걸려있는 암괴사이를 내려가다 형제봉을 돌아 내려갑니다.
높이 10m가 넘는 두 개의 바위가 서로 등을 맞대고 있는 이 입석바위를
형제바위라고 하는데 옛날 성불수도하던 두 형제가 산의 요정, 지리산녀(智異山女)
의 유혹을 경계하여 도신(道身)을 지키려고 서로 등을 맞대고 오랫동안 부동자세로
서 있었기 때문에 그만 몸이 굳어버려 지금의 모습이 됐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이 바위 옆으로 조금 내려가면 자그마한 동굴이 자리 잡고 있는데 비박하기에
괜찮은 관통굴이라고 합니다.
이제 주변은 완전히 어둠에 잠기고 서울 팀의 앞뒤 플래시 도움을 받으며 촬영하며
조심조심 내려갑니다.
19시20분, ‘지리01-28’지점을 지나 ‘미끄럼 추락주의’를 통과하고 서울 팀의 한 장년
회원이 플래시를 들고도 발을 헛디뎌 가벼운 부상을 입습니다.
19시50분, 플래시를 비추며 닥아 오는 이 종원 회원의 마중을 받는데 환자와 동행
중인 후미 팀으로 보내고 곧 보안등을 밝힌 벽소령 대피소에 당도합니다.
세석대피소까지 간다는 서울 팀에게 변변한 고맙다는 인사도 나누지 못하고 우체통이
있는 앞마당에서 왁시글왁시글하게 저녁준비 중인 회원들과 합류합니다.
벽소령(碧宵嶺)은 일명 뱁십령으로 달밤이면 푸른 숲 위로 떠오르는 달빛이 너무
희고 맑아서 오히려 푸르게 보인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
지리산 종주 등반코스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1970년대 초 화개에서 마천까지
38km의 지리산 중앙부 남쪽과 북쪽을 연결하는 작전도로로 만들려고 공사했으나
산을 사랑하는 산꾼들과 여론에 의해 폐기, 깊은 상흔만 남겨놓았습니다.
이제 라면이 끓고 별도의 버너위에는 불고기가 익어 가는데 주 회원의 걸쭉한
입담이 흘러나옵니다.
“야~~이거 불고기 아이가, 그것도 엘에이 갈비라 카네~~”
소주잔을 기울이고 캬~~하는 기성을 발한 뒤 고기한점을 입에 넣습니다.
이런 정겨운 관경을 캠코더에 담는데 뒷전에 앉아있든 점잖은 H병원원장 회원이
미소지어며 종이컵을 건네며 어서 들라고 합니다.
자신은 체면 차리며 주저앉아 있기만 하고...
라면 한 젓가락, 소주한잔에 불고기 한점 들고 벽소령 보름달을 담기위해 대피소
왼편으로 갑니다. 이미 달은 많이 올랐지만 달무리가 너무 짙은데다
기대가 너무 큰 탓인가 조금은 실망하며 캠코더에 담습니다.
후미가 많이 쳐진 탓인가 아직 도착하지 않고
내일의 종주를 위해 집행부의 안내로 예약한 대피소 안으로 들어갑니다.
벌써 대피소안은 초만원으로 통로마루까지 들어차있고 지정된 이층으로 올라갑니다.
원목으로 깨끗이 꾸민 실내는 ‘정숙’이라 쓴 목각판이 걸려있고 훈훈한 방안에서
모포 한 장씩을 받아 자리를 잡는데 한 중년회원이 자기는 두장 더 달라고 하며
집행부 김 군과 시비를 하고 있습니다.
내용인즉 성삼재에서 하차할 때 침구까지 챙기려는 걸 집행부 김 군이 짐을
들어주기 위해 침구는 산장에서 지급한다 했고, 중년회원은 그래서 그냥 왔으니까
집행부에서 책임져야 할 게 아니냐는 것. 자기는 모포 한 장으로 잘 수 없다면서....
결국 중년회원이 억지라는 걸 자각했는지
“다음부터는 그라지 마십시오.”
로 시비는 끝이 납니다.
우선 내일의 촬영준비로
배터리충전을 위해 전에 장터목 대피소에서 근무했든 집행부 강 군에게 충전기와
캠코더를 넘겨 충전을 부탁하고 고생한 후미 팀이 도착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잠자리에 듭니다.
하지만 젖은 속옷에 마신 술이 깨면서 몸이 어시시해 속옷을 바꾸어 입고 귀마개를
한 뒤 다시 눕습니다. 남자들의 코고는 소리와 여자들의 꿍꿍 앓는 소리를 가볍게
들으며 깊은 잠에 빠집니다.
이튼 날, 10월3일 05시50분에 일어납니다.
일출은 구름 때문에 별로이고 하늘은 어제와 같이 맑지 않지만 산행에는
최적일 것 같습니다. 컨디션도 가뿐 거뜬합니다.
아침식사는 주황색 우체통이 보이는 마당에서 정 대장 부부가 권유해 젓가락
하나 걸쳐 해결하고 보수동 장년회원등 일행 7명은 신 회장이 인솔하여 의신으로
탈출한다는 소리를 들으며
06시45분, 해발1328m의 벽소령 이정표(세석대피소6.3km 의신6.8km)에서
천왕봉을 향해 출발합니다.
군사작전도로로 만들었다 중단하여 방금이라도 바위가 떨어질 것 같은
‘낙석주의’간판의 왼편 암벽과
‘위험 미끄럼 추락주의’간판이 걸려있는 오른편 돌 축대의 산국이 활짝 웃고 있는
평탄한 능선 길을 거쳐
07시10분, ‘음정(마천)’갈림길 이정표(음정8.4km 세석대피소5.7km)에서
비알로 올라갑니다.
뒤따라 허 회원과 보수동 팀을 안내하여 왔다는 이 회원이 올라오는데
이 회원이 많은 사람들에게 폐를 입혀 미안해 죽겠고 그들을 다리 고 온 게
후회막심이라고 합니다.
뒤에 알았지만 어제 밤에 보수동 장년회원 때문에 함께 수고한 한의사 김 회원이
가벼운 걸음걸이로 미소지어며 올라옵니다.
07시40분, 덕평봉 아래의 ‘선비샘’이정표(세석산장3.9km)에 당도하여 차가운
약수로 더위를 식힙니다.
‘선비샘’은 수량은 비록 적으나 마르는 일이 없고 그 주위가 평탄하고 넓어서
야영하기에 적합하다.
그 샘터 위에 초라한 고분이 하나 외로이 자리 잡고 있는데 이 무덤과 샘에
얽힌 한 화전민의 서글픈 사연은 지금도 우리들에게 연민의 정과 쓴 웃음을
자아내게 합니다.
옛날 덕평골 아랫마을에 이씨 노인이 살고 있었는데 노인은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화전민의 자손으로서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가난하고 배우지 못하여 무식한 데다
인상마저 좋지 않아 주위 사람들로부터 천대받으며 살아야 했습니다.
노인은 평생에 한번이라도 사람들에게 선비 대접을 받아 보았으면 하는 소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늙어 세상을 떠나면서 아들 형제에게 자신이 죽거든
그 시체를 샘터위에 묻어 달라고 부탁. 효성스런 아들들은 아버지의 유해를 샘터
위에 매장했습니다.
그 후 지리산을 찾는 등산객들이 이곳을 지날 때는 샘터에서 물을 마시게 되고
물을 마실 때면 반드시 노인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고 절을 하는 형국이라 노인은
생전에 한이 되었던 선비 대접을 무덤 속에서 받으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고 후일
이 동네 사람들이 이 샘을 ‘선비샘’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모퉁이에서 깔깔대며 오는 두 아가씨와 조우하여 그 모습이 보기 좋아 촬영하며
인사를 건네니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다 들킨 사람마냥 깜짝 놀랍니다.
간격을 두고 두 젊은 남자가 뒤따라옵니다.
얼마가지 않아 오른편으로 조망하고 ‘위험 미끄럼주의’간판 지역을 넘어
내리막을 타고 바위와 너덜 길의 오르내림을 거쳐
다시 ‘위험지역’간판에서 밧줄이 걸려있는 오르막을 올라
08시16분, 중간이정표(벽소령3.1km 세석대피소3.2km)를 통과합니다.
08시24분, 다시 오른편으로 조망되는 지점에 올라서는데 휴식하고 있든
정 대장 부인이
“남선생님! 처음으로 찍히는 게 아닙니까?”
하며 웃습니다.
위를 쳐다보니 집행부 김 홍팔군이 또 다른 캠코더로 날 촬영하고 있습니다.
단풍나무가 발갛게 웃고 있는 바위 길에 밧줄이 내려져 있는 바위사이
오름길에 집행부 강 군이 커다란 배낭을 멘 체 시원시원 올라오고 있습니다.
08시37분, 우로 보이는 조망대에서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건너편에 보이는 영신봉에서 멀리 촛대봉과 장터목대피소, 그리고 민둥
제석봉과 우뚝 솟은 천왕봉을 반시계방향으로 캐넌과 캠코더로 교대로 담습니다.
잠시 내려가다 다시 오름을 타면서 내려오는 네 명의 중년 종주 팀과
조우하며 인사를 나누고 오른편 암괴에 작은 코끼리바위와 스쳐가다 다시
내리막을 타다가 다시 올라갑니다.
작은 7개의 암봉이 높은 능선 위에 자리 잡고 아름다운 선경을 이루어 마치
일곱 선녀가 한자리에 모여서 노는 형상 같다 하여 부르게 된 이름의
칠선봉(七仙峰:1,576m)을 오릅니다.
08시55분, ‘지리01-38’지점 암괴 앞의 이정표(세석2.1km 천왕봉7.2km)를
지나치고 빨갛게 물든 단풍나무와 쓰러진 고사목 한 그루, 건너편 산자락은
단풍으로 채색되어 울긋불긋 조락의 가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한의사 김 회원은 밧줄을 잡고 올라가는데 한 젊은이는 그냥 올라갑니다.
더욱 가까워진 영신봉을 조망하며 가다가 오른편 나뭇가지에 산뜻한 분홍빛
시그널이 시선을 끕니다.
‘순천북초등학교 지리산종주 2001.9.27.~9.29. 세계를 품안에, 극기, 도전, 사랑’
이라고 쓰여 있는데 바로 몇일 전에 지나친 모양입니다.
어린학생들도 대견하지만 제자사랑, 자식사랑의 지도교사와 그 부모들을 더
칭찬해 주고 싶습니다.
좌로 철주에 케이블로 가드레인을 친, 긴 오르막 코스를 거쳐 철 계단을 오르고
다시 철주에 케이블로 가드레인을 친, 오르막을 왼편으로 꺾어져 오르니
연 이언 암괴 끝에 우측 암괴에 양방향 화살 표지를 해 놓았고 올라서니
우축 조망에 천길 낭떠러지의 철주 케이블 가드레인에 ‘위험 출입금지’라고 쓴
눈에 익은 작은 간판이 걸려있습니다.
잠시 옆으로 돌아 지나온 능선을 조망하며 짧은 휴식을 취합니다.
이제 다 올라 내리막을 예상하지만 평지를 우측 암괴를 돌아가는데 암괴에 걸친
철 계단이 나타납니다.
계단을 올라 암괴를 너머면서 더욱 가까워진 천왕봉을 바라보고 뒤돌아
노고단에서부터 지나온 능선을 일별하고 내리막을 거쳐
9시38분, 이정표(세석대피소0.9km 벽소령5.4km)를 지나치고
영신봉(靈神峰)(1651.9m)자락을 왼편으로 끼고 돌아가니 평탄하고 널따란
등산로가 이어집니다.
9시47분, 왼편으로 낙남정맥이 시작되는 영신봉이, 오른편으로 철망이 쳐져있는
이정표(세석대피소0.6km)앞에서 건너편에 보이는 촛대봉과 세석평전을 바라봅니다.
세석평전(細石平田:1,400~1,714m)은 잔돌이 많은 평야와 같다하여 예부터
세석평전이라 일컬어 왔습니다.
세석고원의 최고봉인 촛대봉에서 서남방향으로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펼쳐지는
광활한 세석평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고원으로서 그 주위가 12km나 된다고
하며, 상,중,하로 식물분포가 구분되어 있습니다.
상층은 황량한 초원지대로서 지보초, 좁쌀풀, 산새풀 등 여러 종류의 초생(草生)
종류가 군락을 이루고 있으며
중간층은 철쭉이 군락하는 관목지대이며,
하층은 구상나무와 물참나무 즉 상록수와 활엽수가 혼유림을 이루고 있어
등고선별 식물생태의 자연분포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마사토가 깔린 완만한 내림을 거쳐
9시56분, 오른편으로 내려다보이는 큼직한 세석대피소로 내려가지 않고
촬영으로 잃은 시간을 보충하기 위해 직진하며 등산로 오른편에 핀 외로운
쑥부쟁이와 인사를 나눕니다. 지리산 관리공단에서 마련했는지 쑥부쟁이
안내간판이 앙증스럽게 다정하게 설명하며 앉아 있습니다.
중간갈림길 이정표(거림6km 장터목대피소3.4km)가 서있는데 좌측으로 내려가면
한신계곡으로 떨어집니다.
10시20분, 촛대봉이정표(장터목대피소2.7km 천왕봉4.4km)에 올라서는데
어제의 호기와 달리 힘들게 올라가든 허 회원이 백두대간 종주 때를 생각하는지
지친 목소리로
“2년2개월만이네요...”
합니다.
턱에 올라 바로 이마위에 있는 천왕봉을 줌으로 바삭 당겼다 서서히 놓으면서
제석봉을 촬영하고 내려가는데
등산로 저 아래에서 힘들어하는 여식아이를 격려하며 올라오는 젊은 아버지의
가족등산객들을 발견하고 촬영하며 이야기합니다.
“얼마 안 남았어! 힘내!”
힐끗 쳐다보든 아빠가 반색하며 소리칩니다.
“KBS, MBC, SBS, 다~ 나온다!”
“몇 살이야?”
하고 물으니 빤히 쳐다보다 아빠가 열 살이요. 하니까
“열 살!”
하고는 수즙은 듯 웃는 걸
“어이구! 장하다이~~”
했더니 금새 힘차게 올라갑니다.
그리고 아빠는 느닷없이
“너무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시간되십시오!”
라는 인사로 감격하며 여식아이의 뒤를 따라 올라갑니다.
고된 산행, 힘든 촬영에 지치려는 심신의 저도
생기를 느낍니다.
바위사이 내리막길과 철 계단 내리막을 거쳐 내려가는데 벌써 빨간 단풍잎이
낙엽으로 떨어져 있고 다시 바위사이 오르막을 올라 뒤돌아보니
세석대피소에서 휴식하고 오는 정 대장부부가 다정하게 올라옵니다.
다시 내리막을 타는데 이번에는 5,6명의 어린이를 거느린 가족등산객이
올라와 그 중 꼬맹이를 촬영하며
“몇 살이야?”
하고 물으니 쳐다보기만 하자 옆의 아빠가
“여섯 살입니다 해야지~”
하니까 힘없이
“여섯 살...”
합니다.
“그~레~ 어이구! 장하데이~~”
하고 격려하자
장난스럽게 캠코더를 들여다보든 주변의 꼬마들과 기운차게 올라갑니다.
뒤따라 올라가는 엄마에게 뒤늦게
“목표가... 어디까지 갑니까?”
하고 물으니 잘 못 들었는지
“대구입니다!”
라는 응답이 돌아옵니다.
다시 철 계단을 올라 오른편으로 돌아가는데 고사목 한 그루가 줄기는
죽었는데 위쪽 가지에는 잎이 무수히 달려있어 그 강인한 생명력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직박구리 한 마리가 나무 가지에 앉아 짖어대며 먹이를 찾아 해매고
단풍잎은 붉게 떨어져 있는가 하면 이제 물들기 시작하는 단풍잎도 있습니다.
11시20분, 일출봉(日出峯)이 2시 방향으로 조망되는 꽁초봉(골초 산꾼들이
주변을 조망하며 담배를 피웠다 버린 꽁초가 많아 붙인 이름인가?)인 바위
위에 올라섭니다. 뒤따라 올라온 강 군이 저기가 일출봉이라고 알려줍니다.
그리고 뒤돌아 멀리 노고단에서부터 반야봉 영신봉 촛대봉을 담고 천왕봉을
쳐다본 뒤 철 계단을 내려갑니다.
목책 가드레인이 널따란 등산로를 따라 완만하게 이어지고
11시35분, 중간이정표(장터목대피소0.8km)를 지나면서 연화봉을 가볍게
넘고 오른편으로 일출봉이 보이는데 밑동만 남은 괴기한 고사목을 신중하게
촬영하는 사진작가를 캠코더에 담습니다.
11시54분, 헬기장이 있는 장터목대피소에 내려섭니다.
장터목(場基項)은 옛날에 천왕봉 남쪽 기슭의 시천주민과 북쪽 기슭의 마천
주민들이 매년 봄가을 이곳에 모여서 장(場)을 세우고 서로의 생산품을 물물
교환한데서 지어진 이름입니다.
먼저 도착한 허 회원이 반야봉을 올라갔다 내려왔다는 차 회원을 비롯한 8명의
회원이 유암폭포 쪽으로 탈출하겠다며 함께 가지 않겠냐며 물어보는데 미소로만
답한 뒤
심호흡 한번하고 가파른 제석봉으로 오르다 잠시
뒤돌아 장터목 대피소를 내려다봅니다.
목책 가드레인이 황량한 제석봉을 더욱 을씨년스럽게 하는데 그나마 있든
괴기 삭막한 고사목도 그사이 많이 줄어있습니다.
6.25전쟁까지만 하더라도 아름드리 전나무, 구상나무들이 울창하였던
제석봉(帝釋峰)은 자유당 말기 당시 농림부 장관의 삼촌이라는 자가 권력을
등에 업고서 제석단에 제재소를 차려놓고 거목들을 베어내면서부터 수난을
당했는데 이 도벌사건이 여론화되고 말썽이 나자 증거를 인멸할 양으로
제석봉에 불을 질러 나머지 나무들마저 지금과 같이 횡사시켰다는 어처구니없는
우리국민의 한심한 역사를 보여주는 현장입니다.
12시16분, 중간이정표(천왕봉1.2km)에서 내리막으로 이어지고 바위사이와
취나물 군락지의 넉넉한 잘록이를 거치면서 다시 뒤돌아 제석봉을 바라보고
처음으로 배낭을 내려놓고 ‘자유시간’ 한 개와 물 한 모금 마시며 휴식을 취합니다.
바위옆길과 가벼운 오르막으로 이어지다 환봉가드레인을 친 통천문을 바라봅니다.
간판이정표(천왕봉0.5km 장터목대피소1.2km)앞을 지나
通天門이라고 쓴 암괴 옆으로 뚫린 공간으로 철 계단이 나선형으로
이어져 올라갑니다.
작은 바위에 음각한 희미한 이름이 보이지만 진작 본인은 후세 어떤 평가를 받고
싶어 이렇게 새겼을까요?
다시 나타나는 철 계단과 가드레인, 밧줄, 너덜겅과 다시 나타나는
철 계단을 오르고 가파르게 이어지는 너덜겅에
오른편으로 환봉가드레인이 이어져 올라갑니다.
좌측으로 몇 년전에 내려갔든 철선계곡 갈림길에 목책으로 막아놓았고
13시7분, 낯익은 하늘기둥이라는 ‘天柱’라고 새긴 암봉에 올라서니 바로
‘韓國人의 氣像 여기서 發源되다’라고 음각한 정상비가 보입니다.
전면에는 ‘智異山 天王峰 1915m' 라고 새겨놓았고 근처에 어느 애국자가 꽂아
놓았는지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습니다.
벽소령에서 7시간22분, 성삼재에서 15시간37분이 걸린 셈입니다.
이곳 정상에는 아득한 옛날부터 지리산 신령을 봉안했던 성모사가 자리해 있었으나
속인들의 욕심으로 자취를 감추고 빈자리만 덩그렇게 남아 있는데 성모상은
훼손된 채 사라졌다가 다행히 한 스님에 의해 발견되어 중산리 천왕사에 모셔져
있으나 제자리로 돌아오기란 쉽지 않은 모양입니다.
진주의 산악인들이 세운 오석 표지석이 있었는데 남명(南冥) 조식(曺植)선생의
'만고천왕봉천명유불명(萬古天王峰天鳴猶不鳴)'‘하늘이 울어도 아니 우는 뫼’란
뜻의 글귀가 새겨져 있었고 높이 1.5의 현재의 표지석은 82년 초여름, 당시
경남 도지사 이씨와 민정당 실력자 였던 권씨 등이 참석한 가운데 경상남도가
세워 뒷면을‘영남인의 기상’운운으로 새겨 한때 정상비가 경상도와 전라도사이의
알력으로 정상비 뒷면이 지우고 새기고를 거듭하는 수난을 당했는데
‘韓國人’으로 정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오나가나 정치인들의 지방색 장난이 문제입니다.
지리산 천왕봉은 황홀한 일출 등 이미 수차례 올라와 보았지만 오늘은 또 다른
감회를 느낍니다.
어제 출발했든 노고단에서부터 반야봉, 촛대봉으로 돌아 천왕봉까지의 능선을
캠코더와 캐넌에 담고 시간에 쫓기어
95년 신년해맞이 산행 때 밀린 인파로 장엄한 일출대신 원색등산복 인파만 촬영하고
중봉, 유평리 쪽으로 하산했든 기억을 되살리며
13시12분, 이정표(중산리5.4km 대원사11.7km 장터목1.7km)에서 하산 길로
접어듭니다.
급비탈의 너덜겅에 긴 밧줄이 내려져 있고 철 계단을 거쳐 다시 밧줄이 걸려있는
지점을 지나
13시30분, 암벽에서 흘러내리는 해발1850m 천왕샘(법계사1.7km 중산리5.1km)
에 내려섭니다. 많은 등산객들이 바위를 타고 흘러내리는 약수를 받아 마시고
삼삼오오 모여앉아 점심식사를 하고 있습니다.
밧줄이 걸린 바위사이 내리막을 지나
13시53분, 해발1700m의 개선문을 지나치고 철 계단을 거쳐 다시 밧줄이 걸려
있는 곳으로 내려갑니다.
키보다 높은 대형배낭을 메고 무릎을 짚으며 힘들게 올라오는 두 중년등산객들과
인사하고 스쳐 내려갑니다.
환봉가드레인을 지나 철망문을 빠져나오니 바로 너럭바위 조망대가 나타나고
오른편으로 꺾어지며 좌로 철주 가드레인을 박은 빗긴 너럭바위 위를 내려갑니다.
다시 나타나는 너럭바위 위에서 문창대와 헬기장을 캠코더에 담고
14시42분, 몇 번 둘러본 법계사 앞을 지나칩니다.
법계사[法界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2교구 본사인 해인사의 말사입니다.
지리산 천왕봉동쪽 중턱, 해발 1400m에 있는 한국에서 가장 높은 사찰,
544년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창건, 1405년 정심선사(正心禪師)가 중창하였고
그 뒤부터 수도처로 알려져 고승들을 많이 배출하였다고 합니다.
6.25전쟁 때 불에 탔지만 워낙 높은 곳에 있어 재건을 못하고 토굴로 명맥을
이어오다 그 뒤 법당이 세워졌고 고려시대에 만든 것으로 보이는 법계사 삼층
석탑(보물 제473호)이 법당 왼쪽에 거대한 암석을 기단으로 세워져 있습니다.
로타리산장 약수터에서 라면을 끓여먹고 있는 이 총무와 회원들을 만나 정 대장이
건네는 시원한 캔 맥주와 따끈한 라면 맛은 한동안 못 잊을 것 같습니다.
마침 한의사 김 회원이 내려오자 후미담당 홍팔군의 짝지가 무릎관절통을 호소,
진맥과 체질 침 시술을 하는 걸 보면서
로타리 산장 헬기장에 올라 뒤돌아 법계사와 웅장한 천왕봉 자락을 담고
몇 번이나 오르내렸든 칼바위코스를 두고 되돌아 산장 화장실 옆으로 나있는 아직
한번도 타보지 못한 공비토벌의 아픈 역사가 숨어있는 순두류 코스로 하산합니다.
완만한 숲 속 내림 길이지만 너덜과 바위돌길이 이어지고
15시26분, 처음으로 흙길을 밟습니다.
15시30분, 중간이정표(순두류2.1km 법계사0.7km)를 지나 계곡물에 세수하는
등산객이 나타나고 올라오는 두 스님과 조우하며
15시54분, 중간이정표(중산리4.7km 천왕봉3.1km 법계사1.1km)를 지나
일단의 등산객들이 계곡물에 멱 감는 철교 위를 넘어갑니다.
16시, 중간이정표(순두류1.1km 법계사1.7km)를 지나 약 3분 뒤 연속 간이
철교를 건너고
16시13분, 화장실이 보이는 이정표(중산리3.4km 법계사2.4km 천왕봉4.4km),와
순두류0.7km 이정표를 지나치며 평탄한 임도로 변합니다.
16시20분, 위령비와 자연학습원 갈림길 이정표(법계사2.8km 자연학습원400m)가
서있는 아스팔트포장도로에 오릅니다.
포장도로를 따라 지루한 내리막길이 약 30분간 이어지다
16시55분, 칼바위코스로 올라가는 갈림길에 당도하고,
기다리고 있는 정 대장부부, 한의사 김 회원과 함께 매표소로 동행,
기다리고 있는 승합차(주차장식당용으로 관광버스 배기사가 운전)에 승차,
17시10분, 장터목에서 탈출한 B팀 등 전원 무사히 주차장까지 하산하여
10시간25분의 산행이 끝났는데 지리산 비디오 촬영하며 한 거북이종주는
총 18시간40분이 걸린 셈입니다.
17시15분, 중산리 주차장을 떠납니다.
정 대장의 인사가 끝나자 정 대장에게 오늘 처음 참여하여 많은 환자를 치료한
한의사를 전 회원들에게 소개하고 감사의 인사를 하라고 귀띔을 해줍니다.
17시48분, 오늘 새벽 벽소령대피소에서 신 회장의 리더로 의신으로 하산한
C팀이 무사히 단천 갈림길에서 승차하고 달리는 차중에서 정 대장이 회원들의
노고와 무사산행을 한데 감사의 인사를 표하고 수고가 많았든 한의사를
소개합니다.
“김용대 회원님 잠시 일어나 주시겠습니까?
이틀간 산행 중에 컨디션이 안 좋은 회원들을 침 치료해주신 회원이십니다.
이분의 도움을 받으신 분이나 안 받으신 분이나 고맙다는 감사와 격려의 박수를
부탁드립니다.”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터져 나오는 가운데
버스 안은 화기애애해지고 회원들은 어떤 성취감에 행복해 합니다.
대진고속도로를 거쳐 남해고속도로를 달리다
정체가 심해 국도로 빠져나왔다 다시 고속도로로 들어가는 등,
19시50분, 완주 했다는 기분에 들뜬 해피문양을 비롯한 회원들 각자
제마다의 보람과 행복, 추억 가득실고 서부산T/G를 빠져나왔습니다.
우리는 자연의 도움을 받아가며 살아갑니다.
산에서는 남녀노소가 모두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벗입니다.
우리는 산행을 하면서 자연의 고마움과 아름다움을 느낍니다.
그런 자연 속에 산행을 하면서 남을 도와주고 칭찬하며 행복해 합니다.
그런 고마운 자연을 우리 산 친구들이 사랑하며 보전하지 않으면 누가
하겠습니까.
산 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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