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수 21,4ㄴ-9; 요한 3,13-17
+ 찬미 예수님
모로코 지진으로 현재 2,901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합니다. 돌아가신 분들, 부상자들과 가족들을 위해 기도드립니다.
오늘은 성 십자가 현양 축일입니다. 전승에 의하면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인 헬레나 성녀께서 기원후 326년, 예루살렘 성지 순례를 하시다가 예수님께서 달리신 십자가를 발견하셨다고 합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한 성전이 예루살렘에 지어져 335년 9월 13일 봉헌되었고, 다음 날인 9월 14일, 예수님의 십자가가 성전 밖에 공개되어 신자들이 경배를 드렸다고 합니다.
오늘 입당송의 말씀은 제 서품 성구이기도 한데요, “나에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는 아무 것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라는 갈라티아서(6장 14절)의 말씀입니다. 서품 전에 어떤 분이 ‘왜 이렇게 힘든 구절을 택하느냐’면서, ‘좀 더 편안한 말씀 택하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제 십자가가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거든요.
오늘 1독서는 민수기의 말씀입니다. 민수기의 히브리어 제목은 ‘광야에서’인데요, 이집트를 탈출하여 약속한 땅으로 향하던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생활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광야에서 반복되는 사건이 있는데, 백성들의 불평입니다.
백성은 하느님과 모세에게 불평합니다. “당신들은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올라오게 하여, 이 광야에서 죽게 하시오?… 이 보잘것없는 양식은 이제 진저리가 나오.” 놀라운 것은, 그들이 한때 감사하고 찬미했던 대상에 대해 불평한다는 것입니다. 이집트 탈출, 만나, 메추라기 모두 감사와 찬미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모두 불평의 대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 또한 한때 감사했던 대상에 대해 불평하고 있지 않은지 되돌아보아야겠습니다. 첫 만남 때 너무나 감사해했던 가족에 대해 불평하기도 하고, 눈에 넣어도 아플 것 같지 않던 자식에 대해 불평하기도 합니다. 직장, 이웃, 교회 공동체에서 만나는 형제들 모두 처음에는 너무나 감사해했는데 이제는 그 대상들이 내가 불평할 거리가 되어버렸습니다.
우리의 시각이 이렇게 변하는 이유는,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당연하게 여기는 대상에 대해 감사해할 수 없습니다. ‘부당거래’라는 영화에 명대사가 나오는데요,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는 말입니다. 누군가 호의를 베풀면 처음엔 감사해하다가, 호의가 계속되면 자신의 권리인 줄 착각하다가, 그것이 중단되면 오히려 그에게 따집니다.
문제는 하느님께도 그러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원칙은, ‘이 세상에 당연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 점을 기억할 때 나에게 베푸신 하느님의 호의가 얼마나 대단한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백성들이 불평을 그치고 기둥 위에 달린 구리 뱀을 쳐다볼 때 살아났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불평을 멈추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십자가는 세상의 고통에 대해 하느님께서 어떤 태도를 취하셨는지를 보여주는 표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고통을 하소연하는 인간의 외침이 지겹다고 하지 않으시고 몸소 고통을 짊어지셨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함께 고통을 겪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 굶주리는 사람, 지금 우는 사람, 당신 때문에 박해받는 사람들이 행복하다 하시고, 부유한 사람, 지금 배부른 사람, 지금 웃는 사람, 모든 사람이 좋게 말하는 사람들이 불행하다 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대중문화는 예수님께서 불행하다고 하신 그 사람이 되라고 우리를 충동하고 있지 않은가 생각해 봅니다.
대중 매체가 앞장서서 누가 어떻게 돈을 벌었다더라며 부유한 사람이 되는 길을, 여기저기서 먹방을 내보내며 배부른 사람이 되는 길을, 때론 웃음을 강요하는 느낌마저 드는 프로그램들을 통해 가식적으로라도 웃는 길을, 그리고 누군가 나에 대해 혹은 내 자식에 대해 좋지 않게 말하면 참지 말고 보복하고 응징하라면서, 불행한 사람, 불행한 사회가 되는 길로 우리를 이끌고 있지는 않은지요.
우리는 아직도 광야의 길을 가고 있는 백성들입니다. 이 광야의 길을, 불평거리를 되뇌며 걸을 것인지, 아니면 십자가를 바라보며 우리와 이 세상을 지극히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하고, 하느님께서 가장 사랑하시고 아끼시는, 고통받는 이웃을 기억하며 함께 걸어갈 것인지 결단하고 선택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