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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오리건주에 살던 해리 홀트(1905∼1964년)와 버사 홀트(1904∼2000년) 부부는
1954년 어느 날 마을 고교 강당에서 월드비전 창립자 밥 피어스 목사가 한국 전쟁고아들의
실상을 카메라에 담은 다큐멘터리 '잃어버린 양'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폭격으로 폐허가 된 시가지 속에서 울부짖는 어린이들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한국의 전쟁고아를 돕는 것이 소명임을 깨닫고 입양에 나섰다.
"어린이는 사랑받을 때 가장 아름답게 자란다"는 소신에 따라 긴급구호나 지원보다 가정을
만들어주는 게 절실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홀트 부부는 자녀 6명까지 식구 수대로 8명의 고아를 거두어 키우기로 했다.
그러나 2차대전 직후 유럽 전쟁고아를 돕기 위해 제정된 미국의 난민구호법은 한 가정의 외국인
입양아를 2명까지로 제한했다. 홀트 부부는 각계에 호소해 이 제한을 푸는 '전쟁고아 구제를 위한
특례법', 일명 홀트 법안을 연방의회에서 통과시킨 뒤 1955년 한국으로 건너갔다.
전쟁고아 12명을 비행기에 태워 미국으로 돌아온 부부는 8명을 자녀로 맞고, 4명을 다른 집으로
입양을 주선했다. 이제 자녀가 모두 14명이 된 것이다. 이날이 10월 12일이었다. 65년 전
'모든 아동은 가정을 가질 권리가 있다'는 이념으로 세워진 홀트아동복지회의 시작이다.
미국 사우스다코타주에서 태어난 해리 홀트는 오리건주에서 농장을 경영하던 중 아이오와대에서
문학과 간호학을 전공한 부인을 만나 결혼했다. 남편은 1950년 심장마비로 죽음 직전까지 갔다가
살아난 뒤 하나님 은혜에 보답하는 인생을 살기로 마음먹었다.
목재소를 차려 번 돈으로 사회사업에 뛰어든 뒤 한국 전쟁고아 입양 사업을 시작했다.
1956년 2월 서울 중구 정동 구세군 대한본영에 들어선 홀트씨해외양자회는 1960년 9월
재단법인 홀트씨양자회로 출범한 뒤 1972년 사회복지법인 홀트아동복지회로 이름을 바꿨다.
넘쳐나는 고아들을 수용하기 위해 1958년 서울 은평구 녹번동에 보육시설을 지은 데 이어
1962년 경기도 고양시에 보육·지체장애인 시설인 일산원을 세웠다.
일산원은 홀트일산복지타운과 일산요양원으로 발전했다. 1975년에는 장애인 특수학교
홀트학교도 문을 열었다.
우리나라는 1958년부터 해외 입양인 통계를 수집했는데, 지금까지 약 17만 명에 이른다.
전문가들은 해방 후부터 1958년 이전의 숫자를 합치면 20만 명은 훌쩍 넘을 것이라고 추산한다.
이 가운데 홀트아동복지회가 8만603명의 고아에게 해외에 가정을 만들어줬다.
홀트아동복지회는 입양뿐만 아니라 시설아동 지원, 아동·청소년 주거·교육·의료 지원, 학대피해
아동 보호와 예방, 비혼 한부모 주거와 양육 지원, 어린이집 운영, 장애인 특수학교와 직업재활시설
운영, 대학생 장학금 지원, 입양과 나눔 인식 개선, 결혼이주여성과 다문화 자녀 지원, 북한과 해외
아동 지원 등 다양한 사업을 펼치고 있다.
해리 홀트는 1964년 4월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버사 홀트는 남편의 유지를 받들어 한국의
홀트아동복지회와 함께 미국에 본부를 두고 10개국에 지부를 거느린 홀트인터내셔널로
발전시켰다. 부인은 2000년 7월 오리건주 유진시에서 96세의 나이로 숨진 뒤 유언에 따라
고양시 일산의 남편 곁에 묻혔다.
한국 정부는 이들 부부에게 1995년 국민훈장 가운데 최고 영예인 무궁화장을 수여했다.
홀트 여사는 1974년에도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고 1966년 세계의 여성상, 2000년 키와니스
세계 봉사상 등을 받았다. 키와니스 세계봉사상은 테레사 수녀, 여배우 오드리 헵번, 미국 대통령
부인 로잘린 카터와 낸시 레이건 여사 등이 수상한 권위 있는 상이다.
홀트 부부의 셋째딸 말리 홀트도 부모의 뜻을 받들어 한국에서 봉사의 길을 걸었다.
오리건대 간호학과를 졸업한 1956년, 한국에 간호사가 필요하다는 부모의 말을 듣고 태평양을
건너 홀트아동복지회 영아원과 보육원에서 일했다. 1960년대 경남과 전남북을 돌며 무의촌
주민 보건에 힘을 쏟는가 하면 뇌성마비 등 특수재활의학에 큰 관심을 갖고 미국에서 연구하기도
했다. 홀트복지타운 원장, 홀트아동복지회 이사와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그는 결혼도 하지 않은 채 60여 년 동안 한국에서 장애인과 고아의 친구로 지내며 '말리 언니'란
친근한 이름으로 불렸다. 2012년 골수암 판정을 받고 투병하다가 지난해 5월 17일 84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국민훈장 석류장, 대한적십자사 인도장, 펄벅재단 올해의 여성상, 노르웨이
왕실 훈장 등을 받았다.
홀트 부부와 딸은 평생을 한국에 헌신했으나 고아를 팔아 돈을 번다는 비난을 한몸에 받기도 했고,
한때 우리나라에 '최대 아동 수출국'이란 오명을 안겨준 장본인으로 지목받았다.
그러나 보육시설이 부족하고 가부장제 전통과 혈통 중심 문화로 국내 입양이 부족한 형편에서
홀트아동복지회의 기여를 깎아내릴 수만은 없는 일이다.
해외 입양아들은 양부모의 학대나 방치로 고통받기도 하고 이중의 정체성 혼란으로 방황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양부모의 보살핌 속에 건강한 사회의 일원으로 성장한다. 프랑스 장관을 지낸
장 뱅상 플라세나 플뢰르 펠르랭, 토리노 동계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따낸 미국의 토비 도슨 등이
대표적이다. 모국으로 돌아와 비혼모와 고아를 위해 봉사하거나 버려진 아이를 입양하는 사례도
많다. 입양동포 최초로 2009년 홀트인터내셔널 회장이 된 미국의 브라운 김은 한국 출신 아이
두 명을 입양했다, 이른바 선한 영향력이 파급 효과를 낳은 것이다.
보건복지부 통계에 따르면 2019년 전체 입양아(704명) 가운데 45%(317명)가 국외 입양이었다.
1995년 발효된 헤이그 국제아동입양협약은 "원 가정 보호가 원칙이며, 원 가정 보호가 불가능할
경우 국내에서 보호할 수 있는 가정을 찾고, 그래도 없으면 국제입양을 추진한다"고 못 박았다.
홀트아동복지회의 국제입양 사업이 필요 없게 될 날을 기대해본다.
- <2020년 10월 5일 연합뉴스 [이희용의 글로벌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