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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1-31 (저울로 달아 심판하시는 하나님)
성경본문 : 다니엘 5: 1-31
요절: 다니엘서 5:24,25 "이러므로 그의 앞에서 이 손가락이 나와서 이 글을 기록 하였나이다. 기록한 글자는 이것이니 곧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
다니엘서 5장은 바벧론의 멸망에 관한 내용입니다. 그 영광과 권세와 부귀가 영원히 지속될 것 같았던 바벧론도 결국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서 바벧론 멸망의 역사적 교훈을 통하여 멸망의 길을 가지 않고 승리의 길을 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우리의 삶 전체를 저울로 달아 심판하시는 하나님앞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하루하루를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 벽에 글을 쓴 손가락(1-16)
(i) 벧사살왕의 큰 잔치(1-4)
다니엘 1-4장은 느부갓네살 통치기에 일어난 사건을 기록한 것입니다. 느부갓네왕은 바벧론 제국을 확장시키고 결속시켰습니다. 그러나 그는 B.C 532년에 죽었습니다. 그 후 바벧론 역사는 539년 메데와 바사에 의해 멸망하기까지 파쟁과 음모와 살인의 연속이었습니다.
느부갓네살왕이 죽은 이후 그의 아들인 "에윌 모르닥"이 왕위를 계승했습니다. 대개의 경우 강력한 지도자가 죽으면 정치적 혼란기가 뒤따르게 됩니다. "에윌 모르닥"은 2년간 통치후 느부갓네살의 사위인 "네르갈 사레셀"에 의해 살해당했습니다. 그는 왕권을 잡고 4년간 통치하다가 죽었습니다. 그를 이어 정신박약아인 그의 아들 "라바쉬 마르둑"이 왕이 되었으나 그는 두달만에 "나보니더스"에게 몰매를 맞아 죽었습니다. "나보니더스"는 느부갓네살 치하에서 누렸던 바벧론의 영광을 회복하고자 애를 썼습니다. 그는 재위 17년간 중 10년을 바벧론에 살지 않고 정복전쟁을 위해 원정을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그는 그의 아들 벧사살을 섭정왕으로 임명하여 다스리게 하였습니다.
그가 다니엘에게 나라의 셋째 치리자로 삼겠다고 한 것은 이러한 이유때문이었습니다.
또 본문에서 느부갓네살왕을 그의 부친이라고 한 것은 느부갓네살이 바벧론 제국을 세운 왕으로서 바벧론의 영광과 권세를 대표하며 또한 벧사살의 선조이기 떠문입니다.
겉으로 볼 때 바벧론은 아직도 강력하게 보였습니다. 벧사살왕은 전쟁시를 대비하여 요새마다 많은 곡물을 저장하여 20년은 견딜 수 있었습니다.
바벧론 수도는 유프라테스강에 의해 둘러 쌓인 천연적인 요새였습니다. 도시 주위에는 높이 10.6m, 폭 2.6m의 성벽이 세워져 있었고 이 벽 안쪽으로 800m떨어져 똑같은 높이의 성벽이 또 하나 있었습니다.
두 벽사이에는 78Km의 기름진 땅이 있어서 적이 도시를 포위할 때 식량을 공급하기 위한 장소로 이용되었습니다. 외벽 바깥에는 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9m깊이의 수로가 벽주위를 따라 파여져 있었습니다. 수도의 물은 유프라테스강에서 끌어오기 때문에 항상 풍부했습니다. 또 바벧론 제국은 막강한 군사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방어 체제로 인해 바벧론제국은 난공불락의 성같이 보였습니다. 그 어떤 막강한 적도 감히 이 방어선을 뚫고 들어올 수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항상 적은 내부에 있는 법입니다. 그것도 가장 깊숙한 마음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바벧론 제국은 영적 도덕적 부패로 인해 뿌리로 부터 썩어 붕괴되고 있었습니다.
당시에 메대와 바사가 연합하여 신흥 강대국으로 부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나보니더스왕이 주력 부대를 이끌고 먼 나라로 원정간사이에 바벧론을 점령하고자했습니다. 메대와 바사의 연합군은 바사의 장군인 고레스의 지휘아래 바벧론에 진격하여 바벧론을 격파하고 성를 포위하였습니다. 벧사살왕과 바벧론의 운명은 풍전등화와 같이 되었습니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는 목숨을 내놓고 싸울 임전태세를 갖추고 깨어 경계를 해도 부족하였습니다.
그런데 벧사살왕은 큰 잔치를 배설하고 허세를 부렸습니다. 그는 적군이 철통같은 방어망을 뚫고 넘어올 방법은 전혀 없다고 생각하고 방심하였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자신의 권세를 과시하기 위해 바벧론 역사상 가장 거창한 잔치를 열었습니다. 그는 바벧론 중에서 중요한 인물 일천명을 초대하였습니다. 그는 잔치를 통해 장군들과 귀인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고자 하였습니다. 잔치에 왕후들과 빈궁들이 참석한 것을 보면 잔치 분위기가 얼마나 음란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방심과 방탕은 멸망의 전조입니다. 벧사살왕이 거나하게 취하여 술기운이 오르자 처음에는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러나 곧 자제력을 잃고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술은 이성의 조절기능을 마비시켜 본성과 본능대로 행하게 만듭니다.
성경을 보면 술취함으로 엄청난 실수를 저지른 사람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중 한 사람이 헤롯왕입니다. 헤롯이 자기 생일날 연회를 배설하였을 때 헤로디아의 딸이 요사스럽게 춤을 추었습니다. 만취한 헤롯은 그 춤에 매료되어 여러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무엇이든지 원하는데로 주겠다고 헛소리를 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그 딸은 세례요한에게 원한이 사무쳐 있던 헤로디아의 사주를 받아 요한의 머리를 달라고 하였습니다. 결국 헤롯왕은 의인의 무죄한 피를 흘리는 무서운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노아도 술 때문에 큰 실수를 하였습니다. 노아는 의인이요 그 시대에 완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도 포도주를 많이 마시고 취하여 그의 막내 아들로 하여금 큰 죄를 짓게 하였습니다. 술은 의인이나 악인이나 가리지 않고 죄를 짓게 만듭니다.
술취한 벧사살왕은 명하여 그 부친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전에서 취하여 온 금,은기명을 가져오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귀인들과 왕후들과 빈궁들로 더불어 그것으로 술을 마셨습니다. 느부갓네살같은 위대한 왕도 감히 거룩한 성전 기명에 손을 댈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것들이 지극히 거룩하신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 속한 것이므로 가까이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벧사살은 자기뿐만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 죄를 범하게했습니다. 십계명에 비추어 볼때 그는 신성모독죄를 범했습니다. 신성모독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공공연히 모욕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그 뿐만아니라 벧사살은 금,은,동,철,목,석으로 만든 신들을 찬양하였습니다. 그는 겉으로는 담대한 척 하였지만 속두려움때문에 우상들을 섬겼습니다.
우상숭배는 또다른 신성모독죄입니다. 그는 방탕함과 신성모독죄를 범하므로 스스로 멸망의 무덤을 파고 있었습니다. 술에 취하여 음란해지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욕되게하는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그 생명이 오래가지 못하고 비참하게 죽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만홀히 여김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ii) 하나님의 글자(5-16)
벧사살왕과 그 귀인들이 잔치를 벌이며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이 때 이들앞에 두려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나서 왕궁 촛대 맞은편 분벽에 글자를 쓰는데 왕이 그 글자 쓰는 손가락을 본지라." 벽에 나타나 글을 쓰는 것은 사람전체가 아니요, 붓도 아니요, 손가락뿐이었습니다.
이를 본 왕은 질겁을 하였습니다. 호탕하게 웃으며 담대한 척하던 왕은 얼굴이 잿빛으로 변하였습니다. 그 생각은 두려움으로 번민하여 넓적다리가 녹는듯하였고 그 무릎이 서로 부딪혔습니다. 죄를 짓던 그는 직감적으로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알고 무서워 떨고 있습니다. 이를 볼때 그가 방탕하게 연회를 즐기고 하나님을 대적할 때는 아주 용감해 보이고 즐거움이 넘치는 것 같았지만 실상은 그 내면에는 죄의식과 심판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차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자는 잠간동안의 죄를 즐기지만 밤에는 악령에 시달리며 심판에 대한 두려움때문에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합니다.
작은 어려움에 부딪히더라도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식하고 절망에 엎드려집니다. 로마서 2:9절은 말합니다.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라". 그러나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습니다.
벧사살의 허세에 가득찬 잔치를 아무도 막을 수 없었습니다. 그 누구도 그의 오만함과 극악무도함을 감히 간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손가락이 나타나자 순식간의 죄악된 잔치는 끝이 나고 엄숙한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되었습니다. 죄악된 사람들은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하나님의 심판이 어디있느냐하며 기롱합니다. 그리고 죄짓기를 멈추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도를 넘어 하나님의 인내가 다하게 되면 하나님의 심판이 도적같이 임하여 쾌락은 끝이나고 즐거움은 슬픔과 탄식으로 바뀌게 됩니다.
벧사살왕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크게 소리하여 술객과 갈대아 술사와 점장이를 불러오게했습니다. 그리고 "무론 누구든지 이 글자를 읽고 그 해석을 내게 보이면 자주옷을 입히고 금사슬로 그 목에 드리우고 그로 나라의 세째 치리자를 삼으리라"하였습니다.
그러나 왕의 박사가 다 들어왔지만 그 해석을 왕에게 알게하는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벧사살왕은 크게 번민하여 그 낯빛이 변하였고 귀인들도 다 놀랐습니다. 결국 그 잔치는 사단의 카니발이 되고 말았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바로 이때 태후가 왕과 그 귀인들의 공포에 떠는 소리를 듣고 잔치하는 궁에 들어왔습니다. 태후는 비상한 슬기의 소유자로서 사람을 보는 눈을 가졌습니다. 그는 글자의 뜻을 알지 못해 번민하는 왕에게 우선 안심하도록 한 다음, 그에게 다니엘을 추천하였습니다. 그가 다니엘을 추천하는 이유로는, 그는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는 사람이요, 그 부친때 부터 국사를 섬기던 자로서 명철과 총명과 지혜가 있어 신들의 지혜와 같은자이기 때문입니다. 태후는 다니엘을 영적인 사람으로 보았습니다.그리고 어떤 어려운 일도 다니엘에게 맡기면 해결되지 못할 일이 없음을 알았습니다.
현재 다니엘은 나이가 80이 넘어 기력이 쇠하여 영력을 상실하기 쉬웠습니다. 그러나 그는 세상풍조에 조금고 요동치 않고 변함 없이 하나님앞에서 말씀에 순종하며 기도하는 생활을 감당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소년시절이나 청년시절이나 장년시절이나 노년시절에도 변함없이 영력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했을 때 그는 불신세계에서도 인정을 받고 위기의 때에 문제의 해결자로 부름을 받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과 타협하며 적당히 신앙생활을 합니다.
이렇게 하면 세상사람들로 부터 인정받을 것 같지만 실상은 이중인격자로 낙인찍히고 하나님께로부터도 또한 세상으로부터도 버림받게 됩니다. 그러나 좀 어려움이 있더라도 분명하게 하나님편에 서서 믿음으로 살면 결국은 세상에서도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사람이 됩니다. 다니엘이 부름을 받아 왕의 앞에 나오자 왕은 다니엘에게 글을 읽고 해석해 주면 나라의 세째 치리자를 삼겠다고 하였습니다.
. 벧사살에게 진리를 증거하는 다니엘(17-31)
(i)왕의 교만을 책망하는 다니엘(17-24)
다니엘은 왕에게 글자의 뜻을 해석해 주기전에 먼저 자신의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자세를 분명히 밝혔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다니엘이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왕의 예물은 왕이 스스로 취하시며 왕의 상급을 다른 사람에게 주옵소서. 그럴지라도 내가 왕을 위하여 이 글을 읽으며 그 해석을 아시게하리이다." 다니엘은 왕이 제시한 엄청난 상급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다만 그 해석을 하겠다고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그가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그는 여러 왕들을 섬겨오면서 세상권세와 명예가 풀의 꽃과 같이 얼마나 하잘 것 없는 것인가를 잘 알았습니다.
그가 하나님께서 주신 영적 통찰력으로 볼 때 현재 왕좌에 앉아 있는 벧사살왕도 그 죄때문에 곧 멸망당할 불쌍한 죄인에 불과하였습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겨주신 예언자의 사명이었습니다. 대개 사람들은 하나님과 그 사명보다 상급을 목적으로 삼습니다. 상급에 따라 사명을 평가합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하나님 한 분을 즐거워하였으며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그의 존재의미요 목적이었습니다. 그는 이런 분명한 영적가치관을 소유하고 있었으므로 죄악된 세상에서 세상 사람들을 섬기면서도 조금도 영적눈이 흐려지지 않고 혼탁한 시대에 선지자의 사명을 끝까지 능히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다니엘은 글자를 해석하기 전에 먼저 손가락이 나와서 벽에다 글자를 기록한 이유가 무엇인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18-21절에서 벧사살왕의 선친 느부갓네살왕의 사을 상기시키므로 역사교육을 시켰습니다. 이를 기초로 그의 교만을 책망했습니다.
느부갓네살왕은 벧사살왕과는 비교가 안될 만큼 큰 권세와 영광과 위엄을 받았습니다. 그는 임의로 죽이며 임의로 살리며 임의로 높이며 임의로 낮출수 있는 절대적인 권세를 가졌습니다. 그러나 이런 그가 마음이 높아지며 뜻이 강퍅하여 교만해졌을 때 하나님은 그를 사정없이 낮추셨습니다. 하루 아침에 왕위에서 쫓겨나 그 영광을 다 빼앗겼습니다. 그는 인생중에서도 쫓겨나서 짐승과 같이 되었습니다. 그는 이런 하나님의 겸손훈련을 통하여 비로소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우시는 줄을 깨달았습니다. 그가 이 사실을 깨닫고 우러러 하늘의 하나님을 바라보았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다시 그의 지위를 회복시켜주셨습니다.
이러한 역사가 말해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통치권을 인정하고 하나님앞에서 겸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는 철저히 낮추시고 겸손한 자는 높이시는 분이십니다.
벧사살왕은 느부갓네살왕에게 일어난 사건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사가 말해주는 교훈을 마음깊이 새기고 마음을 낮추는 투쟁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역사의 교훈을 무시하고 더 큰 악을 행했습니다. 그는 하늘의 주재를 거역하고 성전 기명으로 술을 마시고 또 헛된 신상들을 찬양하였습니다. 그렇게하므로 그의 호흡을 주장하시고 그의 모든 길을 작정하시는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그가 느부갓네살왕에게 일어난 사건을 다 알고도 이렇게 한 것은 고의적이었습니다. 고의적인 것은 모르고 지은 죄보다 더 심각한 죄입니다. 그가 고의적으로 역사의 교훈을 무시한 것은 교만때문이었습니다. 교만은 그에게서 배우는 마음을 빼앗아갔습니다. 배우고자하는 마음이 없을 때 그는 무지한 사람이 되고 결국 이상한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역사는 객관적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그 교훈은 정확하고 진실됩니다. 역사의 교훈을 겸손하게 배우는 자는 과거의 죄악된 전철을 밟지 않고 옳은 길을 가게 됩니다.
다니엘은 왕에게 왕의 호흡을 주장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요 또 왕의 모든 길을 작정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심을 증거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앞에서 마음을 낮추고 겸손해야합니다. 그러나 벧사살왕은 모든 것이 자기 것인양 교만을 떨었습니다. 그의 교만은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하는 무서운 것이었습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왕이라할지라도 그의 교만을 한치의 타협이 없이 분명하게 책망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분명한 자세가 있었습니다.
(ii)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25-31)
다니엘은 왕의 교만을 책망한 후 글을 읽고 그 뜻을 해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25절을 보십시오. "기록한 글자는 이것이니 곧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 그리고 다니엘은 즉시 이 글의 뜻을 해석해 주었습니다. '메네'는 세어보았다는 뜻으로서 하나님이 이미 왕의 나라의 시대를 세어서 그것을 끝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 해동안 그의 날을 세어보시다가 "이제 너의 시대는 끝났다"하고 정지 신호를 내리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끝났다고 선언하시면 우리는 하던 모든 것을 중지해야합니다. 벧사살왕이 교만하여 하나님을 대적했을 때 하나님은 그의 날을 끝나게 하셨습니다. '데겔'은 '무게를 달아 보았다'는 뜻으로 왕이 저울에 달려서 부족함이 뵈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의 시대를 끝내실 수 밖에 없는 이유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저울로 그의 영적무게를 달아보니 전혀 무게가 나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벧사살이 지금까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 것들, 그의 삶전부를 하나님의 저울에 달아보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그는 대 바벧론 제국의 왕으로서 마땅히 헤비급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도덕적 타락과 우상숭배의 죄 때문에 초 경량급인 모기(mosquito)급도 안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보실 때 아무 가치가 없는 쓸모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니 있으면 해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베레스'는 무게를 잰 결과로 왕의 나라가 나뉘어서 메대와 바사 사람에게 준바되었다는 뜻입니다. 벧사살의 죄 때문에 바벧론은 메대와 바사에 의해 멸망당하고 벧사살도 죽임을 당케된다는 것입니다. 그는 용감하게 죄를 짓다가 결국 그가 맺은 죄의 열매를 따먹는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이상에서 볼 때 하나님은 우리의 행동을 달아보시는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저울은 사람의 저울처럼 시대나 환경이나 민족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 어디서든지 누구에게나 공정하게 적용되는 절대적인 것입니다. 사람들의 평가는 상대적입니다. 다시말하면 절대기준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평가는 개개인에게 적용됩니다. 하나님은 이 저울을 가지고 우리의 영적무게가 얼마나 나가는지 재어보십니다. 아무리 그 사람이 인간적으로 훌륭하고 업적을 많이 남기고 큰 일을 많이 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저울에서 무게가 나가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저울앞에 겸허하게 서서 평가를 받을 준비를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며 사람들의 저울에 내 인생을 맡길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평가에서 A학점을 받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평가가 F학점이 나오면 그 인생은 실패한 것입니다. 우리는 비록 사람의 저울에서는 무게가 나가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저울에서 무게가 나가는 사람이 되고자 투쟁해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평가 기준은 무엇입니까?
첫째로, 인생의 목적입니다.
하나님의 평가기준의 대 원칙은 그 사람이 무엇을 위하여 살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2:6-8절은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여기서 당을 짓는 다는 것은 자기유익을 구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그 인생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데 있는가?
자기유익과 자기영광을 구하는 데 있는가? 하는 것을 평가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순간순간의 실수와 허물을 일일이 따지지 않으십니다. 근본적으로 그 사람의 인생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면 그 사람을 높이 평가하십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아무리 선한 일을 많이 한다할지라도 그 동기와 목적이 자기유익을 구하고 자기영광을 나타내는 것이라면 이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큰 악을 범하는 것입니다.
그 동기와 목적이 비뚤어질때 모든 것이 잘못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동물과는 달리 하나님의 형상을 주시고 거룩한 사명을 주시며 축복하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도록 하기위함이었습니다. 다시말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고귀한 존재로 지음받았습니다. 벧사살왕에게 큰 영광과 권세를 주신 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도록 하기 위함이요, 우리에게 신령한 축복을 넘치도록 주신 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도록함입니다.
하나님은 부족하지만 하나님을 기쁘시게하고자 애를 쓰는 자를 기뻐하시고 귀하게 쓰십니다.
둘째로, 믿음입니다.
사람들의 평가기준은 그 사람의 신분,학력,권세,부,타이틀과 같은 외모와 소유에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평가기준은 전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그런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 중심의 믿음을 보십니다.
아브라함은 사람들의 평가기준으로 보면 별 볼일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신분도 확실치 않았으며 학력도 없었습니다. 경력도 화려한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실수와 허물이 많습니다. 그렇다고해서 많은 양을 친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딸 자식하나 없는 그에게 하늘의 뭇별과 같은 많은 자손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창15장). 13년동안이나 소시민적인 생활을 한 뒤에도 하나님께서 열국의 아비가 될찌라 하셨을 때 그는 이를 믿고 할례를 받았습니다. 와! 그의 믿음은 정말 놀랍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믿음을 기뻐하시고 그를 하나님의 벗이라고 칭하셨습니다( 사41:8). 그리고 그와 영원한 언약을 맺으셨습니다(창22:18).
하나님은 이 사무엘 선교사님의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기뻐하시고 오늘날 우리 모임을 이렇게 크게 축복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간조건이나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보다 내면의 믿음을 보시고 이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믿는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셋째로, 인생의 열매로 평가하십니다.
예수님은 마태 7:20절에서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열매는 진실하기 때문에 과정을 속일 수 있으나 열매는 결코 속일 수 없습니다. 사람이 태어나서 이 세상을 살게되면 어떤모양으로든지 열매를 맺게 됩니다. 우리는 의의 열매를 맺지 않으면 죄의 열매를 맺게 되고 성령의 열매를 맺지 않으면 육체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열매는 높은 자리에 앉아 있다고 해서 크고 무게 나가는 것을 맺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위치에 있든지, 자신을 낮추고 겸손하게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자는 성령의 열매를 맺을 것이요, 육체의 소욕을 따라 행하는 자는 육체의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교만은 육체의 열매중의 하나요 겸손은 성령의 열매중의 하나입니다. 겸손한자는 하나님앞에서 스스로 자신을 낮추는 투쟁을 하므로 자연히 무게가 많이 나가지만, 교만한 자는 스스로 자신을 높이기 때문에 무게가 나가지 않게 됩니다. 벧사살왕은 스스로 자신을 하나님의 위치에까지 높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저울에서 체중미달이 되어 그의 인생은 끝장나고 말았습니다. 그가 고의로 하나님을 대적하여 교만을 떨었을 때 그날밤에 죽임을 당하였고 바벧론 왕국도 역사의 무대에서 막을 내렸습니다.
반면에 다니엘은 하나님을 기뻐하고 그 삶에서 하나님을 높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뜻에 어긋날 때는 왕이라 할지라도 그의 죄를 분명하게 지적하고 책망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하나님께서 보실 때 super-heavy급 챔피언과 같이 무게가 나가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를 기뻐하시고 그를 높이셨습니다(29). 세상 사람들은 풀의 꽃과 같이 잠간 이 세상의 영광을 누리다가 허무하게 사라졌지만 다니엘은 하나님의 역사에 믿음의 사람으로 영원히 남게 되었습니다.
결론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세상역사의 주관자시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저울로 달아보시고 세우실 자는 세우시고 패하실자는 패하십니다. 이 하나님앞에서 벧사살왕과 같이 자신을 스스로 높이므로 망하는 인생을 살지 않고 다니엘과 같이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함으로 영적무게가 나가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함으로 하나님께서 쓰실만한 중량급 영적인 종으로 성장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출처 한서노회(http://cafe.daum.net/harns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