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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여행이었다.
6월29일에 중국 땅을 처음 밟았으니, 오늘이 78일째 되는 날이다.
짧은 시간 동안 너무 많은 지역과 사람들을 만나고 보니 여행 초기에 지나 온 지역과 만났던 사람들에 대한 기억이 아득하다.
언제 였던가 싶다.
힘들었던 시간도, 괴로웠던 시간도 ,즐거웠던 시간도 모두 하나 같이 행복한 순간으로 추억 속에 남아있다.
중국 도착지인 쿤밍에서 늦은 밤 숙소를 정하지 못하고 거리를 해맬 때, 여행 중 처음으로 부탁한 점원의 친절함이 우리의 중국 여행의 좋은 징후 였다.
퇴근 시간을 미루면서 핸드폰으로 주변의 숙소를 검색하여 추천해 준 숙소가 시ㅡ안이 경영하는 게스트 하우스였다.
더욱이 우리가 거리에 익숙하지 않다고 야심한 밤에 시ㅡ안과 만나는 장소까지 우리를 안내해 준 아가씨의 얼굴을 지금은 기억 할 수 없지만 우리에게 중국의 좋은 이미지로 남아있다.
자신은 게스트 하우스라는 숙소을 이용해 본 적이 없다고 하면서 혹시나 우리에게 불편한 숙소가 될까봐 걱정해 주던 고마운 아가씨다.
시ㅡ안의 게스트 하우스는 아파트 였다.
해발고도 1800인 쿤밍는 상춘의 도시답게 푸른 숲과 꽃의 정원 속에 있는 아파트였다.
쿤밍은 고층아파트가 밀접하게 있는 대도시이다.
시ㅡ안의 아파트는 주차장이 지하에 있어 지상은 곡선으로 이어지는 보도와 화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아파트 주차장 사용료가 비싸서 시ㅡ안은 사거리 상가 주차장을 이용하고 있었다.
게스트 하우스 환경 보다도 우리를 부모처럼 대해 주던 시ㅡ안이 더 좋았다.
20대 후반의 시ㅡ안은 영어도 우리말도 못한다 .
그러나 우리말을 배우려고 무던히 애쓰던 아이다.
아저씨 ,아줌마 하면서 우리를 부르던 시ㅡ안이였다.
석림으로 가는 현지투어를 신청하면서 60세 이상을 받지 않는다고 하니 우리보다 더 분개하던 아이다.
그리고는 자신의 차로 우리를 산 정상, 저수지가 있는 유원지로 같이 다니면서 관광을 시켜주고.
쿤밍에서는 꼭 먹어야 한다고 아파트 뒤 시장으로 가서는 국수를 사 주기도 했던 고마운 아이다.
한 달 보름이 지난 후 시닝에서 통화를 하니 자식보다 다 걱정하고 반가워 한다.
쿤밍에서 따리로 이동하면서 우리 여행은 본 모습으로 조금씩 정착하기 시작했다.
숙소는 따리 고성에 있는 3층 단독 주택의 게스트 하우스였다.
20대 중반의 젊은이가 건물을 임대해 운영하는 곳이다. 연 임대료가 8만원으로 기억한다.
3층 건물 전체 임대료가 월 120만원 정도라 놀랐던 기억과 젊은이들이 적은 자본금으로도 쉽게 시작 할 수 있는 사업이라 생각되었다.
숙소는 바이족 특유의 흰색 벽과 가볍게 하늘로 치켜 올라간 지붕을 한 가옥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여행 전기간 중 가장 비싼 숙박비를 지불한 곳이다.
하루에 90원씩 2인실에서 10일간 머물렀다.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만육천원이지만 여행이 끝나는 시점까지도 생각하면 수지엄마가 아까워 하던 지출이였다.
따리에서의 생활은 하루 하루를 축제 하듯이 보낸 10일 간 이었다.
우리를 엄마 아빠 라고 부르면서 같이 다니던 바우바우.
군대를 막 재대하고 무엇을 할지 찾기 위해 일 년 간 여행을 다니고 있는 23살 청년이다.
이공으로 일하던 대학생들이나 투숙하고 있는 여행객 모두 몇 일씩 묵으면서 축제의 주인공이 된 듯 보낸 날이었다.
여행 내내 만나게 되는 이공은 중국만의 특이한 제도이다.
방학 중 대학생들이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 멀리 떨어진 다른 지방의 숙소에서 기거하면서 숙식을 제공 받고 ,무료로 일정 기간 일을 하는 사람을 이공이라 부른다.
여행하는 동안 우리에게 다음 이동 장소의 숙소나 교통편을 예약해 주던 아이들이다.
여행 내내 입고 다닌 붉은색 바지를 산 곳이 따리이다.
여기에서는 누구나 자신이 좋아 하는 옷이나 악세서리를 하고 다닌다.
생화로 만든 화환을 머리에 쓰고 다니고 . 멋진 마도로스 모자를 쓰고 다녀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이상하지 않다기보다 그러기에 따리를 더욱 따리 답게 만들었다.
여행 중 구입한 물건을 거리에 펼쳐놓고 팔기도 하고,
거리의 악사도, 거리의 화가도, 노점상도 모두 따리의 한 부분이었다.
숙소에서 중국 양배추로 김치와 부추 부침도 만들어 주었다.
중국젊은이들이 한국을 생각하는 마음과 그들의 인생관을 조금 옆 볼 수 있는 기회를 갖었었다.
따리는 고성 안은 돌로 된 수로가 가로 새로로 흐르는 어른들의 놀이 동산같은 곳이다.
따리는 고성 앞으로 얼하이 호수가 내려다 보이고 뒤로는 높은 고산이 있는 일년 내내 꽃이 피는 곳이다.
따리에서 리장으로 이동했다.
쿤밍에서 따리는 기차로 5시간. 따리에서 리짱은 2시간 반.
이동 할 때 마다 매번 해발 고도가 조금씩 높아지고 있다.
리짱의 게스트 하우스 주인은 따펑과 그의 애인 그리고 한 살 위인 형과 세명이 운영하는 단독 3층 건물이다.
똥배이 3성인 할빈에서 온 20대 중반의 젊은이다.
자신의 고향은 걸어서 러시아 국경까지 갈 수 있는 곳이라고 한다.
서울보다도 더 먼 곳에서 와서 사업을 하는 젊은이 들이다.
실재로 여자 아이가 일을 하고 남자 아이들은 하루 종일 빈둥되면서 지낸다.
1층으로 쓰는 로비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 매일 오고 가는 아이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보냈다.
숙소에서 따리 고성까지는 버스를 타고 15분 정도로 가야하는 곳이라 시설에 비해 저렴한 가격에 있었다.
리짱부터는 티벳으로 가는 길목이라 히치하이커로 가는 대학생들이 많았다.
리짱 고성은 따리 고성보다 세련되고,건물도 잘 보존되어 있다.
고성을 관통하는 수로도 넓고 수량도 풍부 하지만 따리처럼 마음 풀어주는 편안함이 부족한 곳이었다.
따리고성은 따리시에서 버스로 30분 거리의 호숫가 마을인 반면 리짱은 도시 속에 고성이 있다.
리짱에 있는 동안 만난 사진을 전공하는 아이와 그림을 전공하는 아이 중 그림을 전공한 아이가 우리가 떠난 다고 하니 우리 초상화를 문 밑에 두었던 기억이 난다.
그 아이들은 루구호로 가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몇 일간 비가 계속와서 루구호 가는 길이 위험하다고 우리가 가는 것까지도 말리던 아이들이었다.
우리도 루구호 가기 전에 샹그릴라로 갔다 오면 날씨가 좋아 질 것이라는 기대로 계획을 변경하여 샹그랄라로 갔다.
샹그릴라까지 가는 기차가 없어 버스로 가야 한다.
해발고도가 3200인 샹그릴라는 티벳의 모습을 하고, 장족이 살고있는 운남성 서쪽지방이다.
중국 이름으로 샹그릴라로 개명한 이상향의 도시이다.
호도엽을 지나 깍아지는 계곡을 오르는 길은 가히 위협적이었다.
9시간 버스로 찾아간 샹그릴라는 넓은 고산평지와 야크 농장 그리고 티벳인 장족이 살고 있는현대식으로 바뀐 고산 도시였다.
많이 실망했던 기억이 남아있다.
더욱이 머물던 4일 동안 거의 매일 비가왔다.
하루의 반의 밝는 날씨였다가도 나머지 반은 어김없이 비가왔다.
정작 샹그릴라 도시에서 느꼈던 실망감은 언덕 넘어에 있는 스카이 설산을 가면서 드넓은 평야에 점점이 방목하는 말과 야크를 보면서 샹그릴라의 본 모습을 보는 듯해서 하루 종일 스카이 설산 길을 걸었다.
하루에 두 세번 운행하는 시내 버스를 기다리기 보다 아득히 보이는 티벳 특유의 나무로 만든 건초 길을 같이 걸었 왔던 장족 의학을 전공하던 아가씨와도 짧은 만남을 가졌다.
눈덮인 매리 설산은 그냥 멀리서 보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여행 초기에 너무 무리하지 않으려고 무척 애를썼다. 3200미터에서 머무르는 있는 자체가 우리에게는 힘든 일인 셈이다.
문성공주가 시집간 티벳의 왕 송찬감포가 지은 절 송찬린스는 티벳 이외 지방에서는 가장 큰 티벳 절이라고 한다.
정문 앞까지 갔다 입장료가 너무 비싸 그냥 돌아 온 절이기도 하다.
다음 날 숙소 뒷산 절에 올라가 멀리서 전경을 구경하기는 했지만,
정작 송찬린스 입구에서는 계곡 안 전체를 차지하고 있는 절의 일부도 볼 수 없었다.
고도에서 오는 고산증은 특별이 없었지만 조금만 걸어도 쉬 피곤해지거나 ,
허리를 굽히기만 해도 숨이차는 불편함 때문에 일찍 따리로 돌아왔다.
돌아 오는 샹그릴라 버스 터미널에서 만난 스웨덴에서 온 중년 부부는 영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인 우리를 만나서 얼마나 안심이 되었던지 갑자기 격하게 포웅을 해서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중국 말을 한 마디도 못할 뿐아니라 글자마저 읽을 줄 모르는데 영어가 통하는 사람마저 없어 힘들었다고 하면서 너무 고마워 한다.
따리에서 다시 하루를 묵고 바로 루구호로 갔다.
버스로 9시간을 고산 도로를 간다.
오전 이른 시각에만 몇 대의 마이크로 버스가 운행한다.
산 사태로 길이 막히면 9시간이 13시간이 될수도 있고 그 이상 걸릴 수도 있는 험한 길이다.
실재로 몇 일 전 루구호에서 돌아 온, 우리가 만난 부부는 13시간 걸렸다고 한다.
루구호는 운남성과 사천성 경계에 있는 해발 2700미터로 ,고산으로 둘려쌓여 있는 호수이다.
오랫 동안 외부와 단절된 생활로 인해 이곳 모수족는 아직도 일처다부제 생활을 하고 있는 최후의 여인 왕국이라고 한다.
여기서 일처다부는 동시에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결혼을 하지 않고 일생 동안 다른 시기에 여러 명의 남자와 살다가 나이들어 만난 마지막 남자와 노후를 같이 산다.
마지막으로 해어진 남자 후에 다른 남자를 만나지 못하면 혼자 살아야 한다.
실재로 해어지는 순간에는 이 이별이 마지막이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혼자 늙어가는 여자도 있다.
지금까지는 다른 지방으로 이동 할 때 미리 숙소를 예약하고 떠났다.
그러나 루구호는 알아 본 숙소가 몇 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숙박료가 너무 비싸 그냥 현지에서 구 할 생각으로 떠났다.
세상 끝으로 가는 버스를 타는 기분이였다.
얼마나 험한 길을 갔는지 운전수보다 오른 발에 힘이 더 들어갔다.
커브를 틀 때마다 천길 낭떨어지기다.
낭떨어지기에 이르기 전에 내가 먼저 브레이크를 밟듯이 힘을 주곤 했다.
리짱 숙소에서 만난 우리보다 20분 일찍 출발한 아가씨 3명과 루구호 터미널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2명은 교사이고 한명은 티벳에서 근무하는 공무원이다.
공무원인 아가씨가 몸살을 앓고 있으면서 잘 따라 온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서는 언제 아팠냐는 듯이 행동한다.
어제만 해도 터미널에서 식은 땀을 흘리면서 밥도 못 먹던 아이였다.
루구호 터미널에서 만나 같이 구한 숙소는 5명이 한 방을 110원에 사용하는 모수족 할머니가 운영하는 호텔이었다.
3층 건물의 ㅁ자로 된 건물이다.
다른 방은 더블배드나 투윈배드의 호탤식 구조를 갖추고 있으나 우리가 묵은 방은 맨 바닥에 매트리스만 3개를 깔아 놓은 배낭여행객을 위한 숙소였다.
주인 할머니 두분은 실재로 결혼을 하지 않고 젊어서는 여러명의 남자와 살다가 나이들어 마지막으로 만난 남자와 같이 사는 동생부부와 그 마지막 남자를 보내고 새로 다른 남자를 만나지 못해 혼자 살고 있는 할머니가 운영하는 집이다.
호텔 이름도 모수족호텔이었다.
고산의 투명한 호수는 하늘을 담고있는 듯한 몽상적인 분위기였다. 정확하게 백두산 천지와 고도가 같다.
어디를 사진 찍어도 그림이 되는 천상의 호수이다.
호수 위에는 점점이 하얀 꽃이 피어있다.
물속 깊은 곳에 뿌리를 대고 실처럼 가는 줄기로 꽃만 수면 위에 떠있는 수생식물이다.
물빛이 투명한 보석이라 수정 위에 흰 꽃가루를 뿌려놓은 듯하다.
꿈같은 3일을 같이 보내고 ,그 아이들은 다시 리짱으로 돌아가고 우리는 서창으로 갔다.
서창은 스찬성 고산도시이다.
루구호에 오기 전까지는 이름도 모르던 도시이다.
수지엄마가 몸살 기운도 있고, 더욱이 우리가 가고자 하는 청두까지는 20시간 이상 버스로 가야한다.
서창부터는 기차을 타고 갈 수 있다고 해서 중간 지점에서 쉬어 갈 생각으로 선택한 곳이 서창이다.
루구호에서 서창 오는 길은 계곡을 따라 내려오는 평범한 길이었다.
리짱에서 루구호 가는 길은 운남성이고 ,서창으로 오는 길은 스찬성이다.
산세가 많이 부드러워졌다.
서창으로 오는 도로 변에 호두를 파는 사람들이 많다.
올 처음 수확한 호두라고 한다.
속껍질까지 벗겨서 먹는 젖은 호두이다.
떠나는 오늘까지 매일 입에 달고 살았던 견과류의 시작인 셈이다.
서창의 숙소로 예약한 곳이 등빠 게스트 하우스이다.
등빠와의 운명적인 만남의 시작이 서창인 셈이다.
서창은 상당히 큰 도시였다.
기차역에서 큰 짐을 지고 인터넷으로 알아 본 등빠를 찾아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시내버스를 갈아타야 하고, 두번째로 탄 버스 종점에 있는 게스트하우스 였다. 도시를 완전히 벗어나 외진 시골에 있었다. 버스 종점에는 숙박시설이 있을 만한 곳이 아니었다.
비까지 내리는 거리에는 이동하는 사람마저 찾기 쉽지 않았다.
항상 그랬듯이 처음 찾아 가는 숙소는 지나 가는 사람에게 숙소로 전화를 부탁해서 , 구체적으로 가는 길을 알아 보든지 아니면 그들이 우리를 찾아 오도록 했다.
전화 통화를 못하고 결국 시골 할머니가 가르켜 준 언덕 위로 올라가니 의외로 큰 호텔이 있다 .
낮선 거리에서는 길도 건물도 잘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머물 수 있는 곳이 아니다. 호텔로 들어가는 길옆 가게에서 젊은이에게 전화를 부탁했다.
통화가 됐다. 근처라고 한다.
조금만 더 올라가면 된단다.
호텔 옆 골목 안쪽으로 몇 개의 작는 숙소가 있었다.
등빠게스트 하우스는 중국 전역에 체인점이 있는 기업형 숙소이다. 한국 종로에도 분점이 있다고 한다.
다음날 아침에 보니 서창 등빠게스트 하우스는 큰 호수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에 숙박 업소가 모여있는 곳에 있었다.
첫날은 농촌 봉사활동을 온 학생들과 어울리고, 호수가를 산책하면서 3일를 보냈다.
처음 계획대로 쉬면서 보낸 3일이다. 말이 3일이지 오는날 떠나는 날을 제외하면 하루를 쉰 셈이다.
이 곳에서 어메이까지 기차로 12시간을 가야한다.
침대 기차는 다행이 거의 비어있었다. 3층 중 1층에만 사람들이 있다.
깊은 계곡은 대부분 터널로 이어 길을 만들었다.
어메이에서도 숙소는 등빠 게스트 하우스로 정했다. 8인실에 60원이다.
여행 중 우리의 평균 숙박비인 셈이다. 약 우리돈 만원인 셈이다.
어메이는 어메이산으로 가는 도시 이름이다.
어메이산은 도교와 불교의 성지이다.
높은 산 정상, 깍아지른 절벽 위에 넓은 터를 잡고 절집을 짓고 앞 마당에 코끼리를 타고 있는 부처상은 가히 중국다운 크기였다.
그리고 어메이 숙소 앞에서 버스로 두 시간 거리에 있는 낙산 대불은 강가 절벽을 통체로 이용해서 석불을 만들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석불이란다.
크기에 압도 당하기 보다는 왜 저렇게 큰 불상을 만들었을까 하는 의도가 궁굼했던 기억이 있다.
어메이 교통대학, 절집 그리고 정상을 다녀 온 후 낙산 대불을 보고 청두로 출발했다.
청두는 어메이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대 도시이다.
청두는 스찬성의 수도로 삼국시대 유비의 촉나라이다. 산에는 주종이 대나무라 펜더의 주무대인 곳이기도 하다.
유비와 펜더의 고향이고 스찬음식으로 유명한 곳이다.
숙소는 지하철을 이용하면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에 있는 블렉스미스 청년 유스호텔이다.
주택가 이면도로에 있는 오래된 3층 단독 건물이다.
큰 재래 시장이 가까이에 있어 아침마다 과일을 사고 식사를 그 곳에서 해결했다.
유비사당, 재갈공명 ,노자 그리고 장자의 도교사원을 보고 도시관광을 하면서 비교적 편하게 보낸 날들이었다.
더욱이 도시 내 공원이 많아 공원 순례를 하던 중, 그 동안 수지엄마가 쓰던 노트를 분실했다.
관리 사무소를 찾아갔다.
비가 오는 공원을 노트를 찾아 주겠다고 쓰레기 통까지 일일이 뒤지면서 애쓰던 공원 관리 아줌마의 성실함이 다시 우리에게 중국의 좋은 이미지로 남아있다.
펜더공원 방문과 구채구를 가려던 처음 계획을 포기했다.
펜더는 더위 때문에 거의 밖으로 나오지 않고 입장료만 비싸다고 한다.
또한 구체구는 아름다운 경치를 구경 할 수있는 풍경구이지만 지금이 성수기라 사람이 많고 숙박비가 비싸 경치보다 실망할 일이 많을 것이라고 한다.
더욱이 시안을 가려면 다시 청두로 돌아 와야 하는 외진 곳이다.
게스트 하우스에서 만난 중칭에서 온 젊은 아이의 추천으로 예정에 없던 중칭으로 갔다.
중칭은 스찬성 내에 있는 도시이지만 성에 속해 있지 않는 특별시이다.
인구가 2천만이 넘는 중국의 4대 도시 중에 하나이다.
여행의 즐거움을 만끽한 중칭 여행이 되었다.
게스트 하우스 주인 임위를 만난 것과 중칭으로 우리를 오게한 중칭맨의 고마운 배려 때문이다.
중칭맨이 찾아 준 게스트 하우스는 다운타운에 있지만 오래된 너무나 오래된 건물이었다.
농담으로 김구 선생님이 이곳에 계셨을 것같다고 했을 정도로 낡은 건물이었다.
다음날 중칭맨이 다시 찾아 준 곳이 임위가 운영하는 곳이다.
중칭맨은 이혼한 엄마와 같이 곡물상을 하는 조니뎁처럼 생긴 쾌활한 29살의 청년이다.
우리보다 하루 늦게 청두에서 중칭으로 돌아와 자신의 봉고차로 저녁 늦은 시각까지 우리를 가이드 해 준 고마운 아이다.
새로 사귀었다는 여자 친구와 함께 황하강이 내려다 보이는 고지구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
야경이 아름답다는 붉은색 강과 초록색 강,0 두 강이 합류하는 오패라 하우스에서 늦게까지 이야기를 하다 우리를 숙소 앞까지 바래다 주고 돌아갔다.
두 강물은 농도의 차로 인해 합류한 후에도 상당히 오랫동안 선명한 경계를 보이면서 흘러간다.
내일부터는 일을 해야하기 때문에 같이 다닐 수 없다고 미안해 하던 아이다.
게스트 하우스 주인 임위는 곱상하게 생긴 20대 후반의 젊은이다.
역 앞 아파트를 개조한 개스트 하우스를 운영한다.
정원에 수영장이 있는 신축한 아파트라 모든 것이 잘 구비되어있었다.
중칭에서 반드시 먹어야 하는 음식이라고 추얼 추얼을 사주고 늦은 저녁 시간에 우롱으로 가는 예매한 기차표를 미리 받아와야 안심이 된다고 같이 역까지 갔다오기도 하던 성실한 젊은이다.
가끔 오신다는 50대 초반인 어머니와 같이한 시간은 중국인들의 삶의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일제 식민지 와 국공 대립시 순직한 열사묘를 관람하면서 중국인들의 역사관을 엿볼 수 있는 기회를 갖었다.
장계석과 모택동의 대립은 새로운 중국의 태동을 알리는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다.
모택동은 아직도 중국인들에게는 신처럼 떠 받드는 존재이다.
중칭임시정부를 방문한 기억도 새롭다.
티벳 여행을 대신 할 곳으로 깡딩을 선택했다.
중칭에서 15시간 버스를 타고 갔던 강띵여행의 너무나 좋았던 기억은 우리 긴 중국여행의 하이라이트다.
티벳은 외국인에게는 까다로운 허가증을 발급 받아야 갈 수있는 지역일 뿐아니라 현지에서도 가이드의 동반없이는 다닐 수 없는 곳이다.
관람할 수 있는 곳이 매우 제한적이라고 한다.
그래서 티벳의 문화와 장족의 생활을 가장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도시를 추천 받은 곳이 강띵이다.
아침에 출발해서 저녁 12시가 되어서 도착한 강띵은 먼 거리만큼이나 우리에게 소중한 경험을 하게해 준 곳이다.
높은 산 계곡에 격류를 사이에 도고 좁은 터에 길게 자리한 강띵은 오래된 마을이다.
깡딩의 백미는 마을을 관통해 흐르는 계곡물이다. 흐른다는 표현은 옳지 않다.
폭포처럼 쏱아져 내린다. 온 계곡에 물 소리로 가득하다.
이 곳에서 티벳으로 가는 많은 젊은 이들을 만났고,
중의학을 전공한 아이와 이틀을 같이 보낸 시간도 해발 4200미터의 홍해호와 고원 초원 지역에서 만난 장족의 생활도, 하루 하루가 즐거운 시간이었다.
바람만이 친구인 끝없이 푸른 초지만 있는 고원에서 텐트 생활을 하면서 야크를 방목하는 장족 가족은 부인이 3명이었다. 아직도 이런 생활을 하고 있는 지역이 있다는 사실이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 남기위해 현실이 만들어 낸 지혜로운 제도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강띵의 숙소도 역시 등빠였다.
장족이 운영하는 등빠는 자전거나 히치하이커로 티벳으로 가는 젊은이가 주로 이용하는 숙소이다.
중국 젊은 대학생들은 무전여행의 일종으로 히치하이커를 이용한 오지 여행을 많이 한다.
남자 아이보다는 여자 아이들이 훨씬 많다.
중국의 억센 여자들이 이렇게 만들어 지는구나 싶었다.
우리는 방을 이용하지 않고 일층 로비에 있는 10개의 테니블 긴 의자 중 두개를 붙어서 만든 임시 침구를 사용했다.
점장인 장족 아줌마를 수지엄마는 문성 공주 라고 불렀다.
당나라 때 티벳의 왕 송찬라마에게 시집간 공주이다.
중국의 모든 사람들이 좋아 한다. 장족 역시 좋아하는 공주이기도 하다.
중국의 서쪽 오지를 여행하다보니 어디를 가든지 문성공주의 일화가 남아있다.
문성공주와 항상 가방을 가지고 다니는, 일하는 장족 아가씨와 식구처럼 보낸 일주일이었다.
여름에 경험하는 추위는 사람을 몸살나게 한다.
어느날 저녁 나들이를 가기위해 수지엄마는 바지를 3겹으로 입기도 했다.
결국 추위에 쫓기 듯이 아름다운 강띵을 떠나게 되었다.
강띵에서 청두까지는 버스로 9시간 거리다.
두 번째로 방문하는 청두는 감숙성 천수로 가는 기차를 타기위해 잠시 거처가는 길이라 다시 불렉스미스에 숙소를 정했다.
도착하는 날 , 밀린 빨래를 하고 다음날 아침 일찍 출발하였다.
천수까지 기차역에서 기다리는 시간까지 합해 22시간 이동을 했다.
4시간 연착으로 인해 대기실에서 5시간을 기다린 후에 다시 17시간을 간다. 우리 자리는 침대차의 2,3층 칸이었다.
천수에 가까워 지면서 고산지역이 사막 지역으로 바뀐다.
천수는 맥적산을 가기 위해 찾아간 곳이다.
황하강을 중심으로 위쪽과 아래쪽으로 두 개의 도시가 별개로 나누어져 있다.
흙탕물과 초록색물이 합치지 않게 넓은 강에 뚝으로 두 강물을 분리해 놓았다.
중국다운 발상이다.
흙탕물은 그냥 흘러가게 하고, 초록물은 아래쪽에 뚝을 만들어 시민들이 물놀이 장소이다.
나무 한 구루 없는 주름투성이 산을 보면서 천수에서 난주 그리고 시닝 여행이 이어진다.
난주는 감숙성의 수도이다.
공해가 심하고 모래 바람으로 시내가 젯빛을 띄고 있다. 특별히 볼 곳에 있는 곳이 아니다.
시닝으로 가기위해 거처가는 도시이다.
장안을 떠난 실크로드 대상들이 첫번째 머무는 도시이기도 하다.
멀고 먼 로마로 이어지는 옛 상인들의 길 위의 도시이다.
감숙성의 긴 하서회랑을 지나 천산 산맥으로 이어지는 길이 중국내 실크로드이다.
난주에서 시닝은 기차로 5시간 거리다.
시닝은 청해성의 수도이다.
천수 ,난주, 시닝 모두 회족이 많이 사는 지역이다.
회족은 이슬람족을 의미한다.
숙소는 아파트를 개조한 유스호스텔이다.
자신의 키만큼 배가 나온 20대 후반의 젊은이가 운영하는 곳이다.
이미 방학이 끝나 후러 5일 내내 우리 둘과 장기 투숙하는 여자아이까지 3명이 8일실을 사용했다.
따리 ,리짱 ,루구호에서 보았던 다양한 색과 문양을 한 화려한 소수민족의 의상은 이곳에서 심플한 회족의 흰색 의상으로 바뀌었다.
회족은 이슬람을 믿는 아랍계통의 민족이다.
당나라 때 부터 중국으로 이주해 온 사람들이라 사용하는 언어는 중국말 뿐일 꺼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천년이 지난 지금도 그들은 자신들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아마도 종교가 그들의 정체성을 유지하게 했을 듯싶다.
귀덕에서 돌아오는 길에 사막을 지나는 갓길에 자가용을 세워 놓고 도로변에 작은 깔판을 펴 놓고 혼자서 매카를 향해 절을 하고 있는회족을 본적이 있다.
시닝시에는 청진사라고 하는 이슬람 모스크가 있다.
농촌에도 장족의 백탑처럼 둥근 모스크가 눈에 띄었다.
천수의 맥적산 석굴. 귀덕의 황하강 원류를 찾아갔던 일 그리고 청해호의 천상의 하루를 보내고 드디어 시닝에서 시안으로 들어 왔다.
시닝에서 시안까지는 가차로 12시간 거리이다.
우리 여행의 마지막 일주일을 보낸 곳이 시안이다.
시안의 옛이름은 장안으로 세계 3대 고도시 중 한 곳이다.
이집트 와 같은 고대 유물이 많은 도시이다.
진시왕의 병마용, 양귀비의 화정지, 중국 오악 중 하나인 도교 사원인 화산,
그리고 대안 소안탑. 여행 중 처음으로 많은 서양 관광객을 보게 되었다.
떠나 오던 날 게스트하우스 주인과 점장은 해어지기 아쉬어 눈물을 감추려고 애를 쓴다.
정이 많은 아이들이다.
많은 경우 게스트 하우스 주인이 우리에게 받은 돈 만큼 우리에게 식사 대접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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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는 소안탑과 시안 박물관을 다녀왔다.
4시경에 내일 귀국하기 전 어머니 선물로 묵주를 사려고 나가려고 하니 유스호텔 주인이 자신이 골라주겠다고 같이나선다. 외국인인줄 알면 바가지를 씌운 다고 하면서 우리보고는 일체 상인 앞에서는 말을 하지 말라고 한다.
크고 좋은 상점이나 거리 노점상이나 가짜와 진짜를 구별하지 못한다고 하면서 진짜라도 가짜라고 생각하고 사라고 한다.
10원씩 파는 물건은 분명히 가짜이지만 몇 백원에 파는 물건도 가짜라고 생각하고 사라는 말이다. 좀 정교하고 진짜처럼 보일 뿐이란다.
관광객을 대상으로 문방사구와 불교 예물을 파는 거리로 갔다.
전체 거리를 다 돌아보고 나오는 길에 150원 염주를 100원에 구입했다.
돌아오는 길에 시안 음식을 사 주겠다고 해서 국수를 먹고 귀가하니 투숙하고 있는 스님이 저녁을 준비해서 기다리고 있다.
성의를 생각해서 다시 한 그릇을 비웠다.
야채수프 같은 절 음식이라 부담이 덜했다.
다시 장기투숙하는 증권을 한다는 아저씨가 과일탕을 만들어 주어 장안에서 마지막 저녁으로 다양한 음식을 먹었다.
이번 여행은 수지엄마의 중국 현지인 처럼 구사 할 수 있는 중국어 능력이 우리 여행을 가능하게 했다.
707년에 지은 소안탑. 내부를 통해 올라 갈 수 있다.
측전무후
소안탑
소안탑 정문앞 유명한 만두집
당나라 유물
북위 시대 관.
시안 박물관 중앙홀
문방사구.불교 예물을 파는 거리
엿으로 새를 만들고 있는.
시안성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