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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출판 행복한 숲에서 발행한 <대념처경 주석서 3권>을 불교방송 순서대로 연재
붓다께서 45년 동안 설하신 법문은 이렇게 수행을 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이 가르침이 대념처경입니다. 붓다께서는 이것은 내가 경험한 유일한 길이니 모두 이 길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붓다의 가르침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면 왜곡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제자들은 가르침에 대한 주석서에 의지해서 가르침의 뜻을 지켜왔습니다. 처음에 붓다고사가 쓴 청정도론을 시작으로 많은 주석서가 가르침의 뜻을 계승하였습니다. 이런 역사적인 가르침의 뜻에 동참하고자 미천한 경험을 살려 대념처경 주석서 1권, 2권, 3권을 출판한 바 있습니다. 출판된 대념처경 주석서 중에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에 대한 부분을 좀 더 심도 있게 다루었습니다. 이제 대념처경 주석서 3권을 모든 수행자들이 보실 수 있도록 조금씩 옮겨 보겠습니다. 조금이라도 수행에 도움이 되시기를 삼가 기원합니다. 묘원합장
▣ 제138회 법문
오직 자신의 몸과 마음을 알아차린 결과로 얻는 지혜만이 자신을 청정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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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일어난 마음을 알아차리기’에서 선심의 대표적인 마음인 관용, 자애, 지혜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불선심과 마찬가지로 선심도 한 가지 마음만 있는 것이 아니고 여러 가지의 마음을 함께 포함하고 있습니다. 불선심을 대표하는 마음이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라고 했을 때 이와 반대되는 것으로 무탐無貪, 무진無瞋, 무치無癡라고 합니다. 이 말은 곧 탐욕 없음, 성냄 없음, 어리석음 없음입니다.
일반적으로는 탐욕 없음을 관용으로, 성냄 없음을 자애로, 어리석음 없음을 지혜로 말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탐욕 없음이 관용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성냄 없음이 자애를 말하거나 어리석음 없음이 지혜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일반적으로는 이렇게 반대로 비교할 수 있지만 수행을 할 때는 탐욕 없음, 성냄 없음, 어리석음 없음이 반드시 관용, 자애, 지혜는 아닙니다.
탐욕 없음은 단지 탐욕이 없는 상태의 수준이고, 성냄 없음은 단지 성냄이 없는 상태의 수준이고, 어리석음 없음은 단지 어리석음이 없는 상태의 수준입니다. 이때는 단지 탐욕이 없는 상태일 뿐이지 지혜가 포함된 관용의 수준과는 다릅니다. 의식에는 여러 가지의 지혜의 계층이 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대념처경』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에 의하면, 탐욕이 있는 마음과 탐욕이 없는 마음은 서로 반대가 아니고 별개로 구분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냄이 있는 마음과 성냄이 없는 마음도 별개로 구분하셨습니다. 어리석음이 있는 마음과 어리석음이 없는 마음도 별개로 구분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탐욕이 있을 때는 이 마음이 불선심이지만, 탐욕이 없을 때는 이 마음이 관용은 아닌 것입니다. 단지 탐욕이 없을 뿐이지 이 마음이 관용이 아닌 것을 말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냄이 있을 때도 이 마음이 불선심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냄이 없는 마음이 반드시 자애인 것은 아닙니다. 똑같이 어리석음이 있을 때는 이 마음이 불선심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리석음이 없는 마음이 지혜가 있는 마음은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기에 탐욕이 있다가 없으면 그것을 관용이라고 이해하기 쉽지만 정신세계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선한 마음이라고 할지라도 여러 가지의 마음이 복합되어 있기 때문에 어떤 마음이 함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마음의 종류도 다릅니다. 관용이 있는 마음도 지혜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다릅니다. 또 기쁨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다릅니다. 또 평온함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마음이 각기 다릅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이런 마음을 구별할 것 없이 탐욕이 있는 마음일 때는 그냥 탐욕이 있는 마음을 알아차리고, 탐욕이 없는 마음일 때는 그냥 탐욕이 없는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성냄이 있는 마음일 때는 그냥 성냄이 있는 마음을 알아차리고, 성냄이 없는 마음일 때는 그냥 성냄이 없는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리고 어리석음이 있는 마음일 때는 그냥 어리석음이 있는 마음을 알아차리고, 어리석음이 없는 마음일 때는 어리석음이 없는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처럼 일반적으로는 탐욕의 반대가 관용이지만 이것은 상대적 의미로 분류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행에서는 탐욕의 반대가 반드시 관용은 아닙니다. 이때 탐욕이 없는 마음은 단지 탐욕이 없는 마음이고, 수행을 해서 지혜가 생겼기 때문에 생긴 탐욕이 없는 마음이라야 비로소 관용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탐욕이 있는 마음일 때는 탐욕이 있는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다음에 탐욕이 없는 마음일 때는 탐욕이 없는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리고 관용이 있는 마음일 때는 관용이 있는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렇게 탐욕이 있고 없는 마음을 알아차릴 때 다음 세 가지로 마음을 분류해서 알아차릴 수 있는 것입니다. 수행자가 마음을 알아차릴 때 어떤 마음이거나 있는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알아차리는 힘이 생겨 다음 마음을 알아차릴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탐욕이 없는 마음을 알아차리면 다음에 관용이 있는 마음이 생깁니다. 마찬가지로 성냄이 없는 마음을 알아차리면 다음에 자애가 있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리고 어리석음이 없는 마음을 알아차리면 다음에 지혜가 있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래서 무탐, 무진, 무치를 알아차리면 자연스럽게 관용, 자애, 지혜라는 완전한 선심이 일어납니다.
지금부터 선한 마음인 관용, 자애, 지혜의 마음을 차례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관용이 있는 마음을 알아차리기입니다.
불선심인 탐욕이 있는 마음을 알아차리듯이 똑같이 선심인 관용이 있는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에서는 불선심과 선심을 모두 알아차려야 합니다. 불선심을 알아차리면 선심이 됩니다. 그리고 선심을 알아차리면 교만해지지 않고 지혜가 더욱 발전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나쁜 것만 알아차리지 않습니다. 좋거나 나쁜 것이나 모든 것들이 알아차릴 대상입니다. 이처럼 모든 것을 객관적인 입장에서 지켜보기 때문에 통찰지혜가 생깁니다. 그러므로 선심도 알아차려야 할 대상입니다.
우리가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원인은 많습니다. 그중에 좋은 것을 알아차리지 못해서 오는 고통이 사실은 더 큽니다. 갈애는 바라는 마음인데, 일반적으로 좋은 것을 바라는 마음입니다. 바로 이 갈애가 집착으로 발전하여 괴로움을 일으키는 행위를 하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좋은 것을 바라는 마음이 더 위험한 것이고 고통을 줍니다. 나쁜 마음은 자신을 스스로 보호하기 위해서 어느 정도 경계하기 마련인데 좋은 것은 이런 경계가 무너져서 알아차림을 놓치기 마련입니다.
바로 이때 감각적 욕망을 일으켜 괴로움의 원인인 갈애가 자리 잡습니다. 그러므로 나쁜 것이라고 판단되는 것 못지않게 좋은 것이라고 판단되는 것도 알아차려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최고의 지혜가 나셨지만 항상 자신의 지혜에 안주하지 않으시고 알아차림을 지속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위가 없는 지혜입니다.
그래서 수행의 세계에서는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없습니다. 어느 것이 되었거나 모두 알아차릴 대상에 불과할 뿐입니다. 관용은 탐욕이 없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단지 탐욕이 없는 것에 그치지 않고 대상을 받아들이고 베푸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관용에는 반드시 보시의 마음이 함께 있습니다. 이것은 자신에 대해서나 남에 대해서 모두 적용됩니다.
관용은 받아들이는 마음이기 때문에 바라는 마음이 없고,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움켜쥐려고 하지 않습니다. 바람이 없기 때문에 자신이나 상대에 대해서 부드러움과 관대함을 보일 수가 있습니다. 바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기꺼이 남을 위해서 베풀 수 있습니다.
관용은 선한 마음으로 유익하며 깨끗한 마음입니다. 그래서 항상 기쁨과 평온한 느낌이 함께합니다. 그러나 지혜가 있는 관용이 있고, 지혜가 없는 관용이 있습니다. 그리고 자극을 받지 않고 자발적으로 일어나는 관용이 있고, 자극을 받아서 유발되어 일어나는 관용이 있습니다. 이렇듯이 마음은 단순하지만 어떤 마음과 결합하여 일어나느냐에 따라서 다양한 형태의 마음으로 분류합니다. 그러나 수행자는 어떤 마음이 되었거나 일어난 그 마음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내가 있다고 하는 자아가 있으면 완전한 관용이 될 수 없습니다. 자아가 있는 관용일 때는 어떤 목적을 가진 마음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내가 없다고 해도 관용을 베풀고 알아차리지 못하면 자아가 생길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관용을 보이고도 알아차리지 못하면 관용의 공덕이 감소됩니다. 이렇듯이 유신견이 있으면 어느 때가 되었거나 선한 마음을 선하지 못한 마음으로 바꾸어 버립니다. 그래서 항상 알아차림이 필요한 것입니다.
관용은 선한 마음입니다. 그러나 선한 마음인 관용은 그냥 생기지 않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살아오면서 생긴 탐욕으로부터의 탈출입니다. 누구나 탐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관용은 부단한 노력 끝에 오는 것이지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렸을 때만이 고요함에 의해서 평온을 얻고, 이러한 평온으로 인해 기쁨이 함께합니다.
탐욕이 있을 때는 탐욕이 있는 마음을 알아차리고, 탐욕이 없을 때는 탐욕이 없는 마음을 알아차립니다. 그리고 관용이 있을 때는 관용이 있는 마음을 알아차립니다. 관용이 있는 마음은 알아차릴 대상입니다. 관용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다시 탐욕에 빠지거나 또는 자신이 너그럽다는 자만에 빠집니다. 이때의 관용은 지혜가 계발된 상태이지만 아직 완전한 지혜가 나지 않았기 때문에 관용이 있는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대상을 선한 마음으로 받아들인 그 마음을 다시 알아차리면 관용으로 인해 교만해지지 않고 더욱 지혜가 발전합니다.
둘째, 자애가 있는 마음 알아차리기입니다.
불선심인 성냄이 있는 마음을 알아차리듯이 똑같이 선심인 자애가 있는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자애는 성냄이 없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단지 성냄이 없는 것에 그치지 않고 사랑을 베푸는 마음입니다. 이 마음은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들이 번영과 행복을 바라는 마음으로 숭고한 사랑입니다.
자애의 대표적인 마음은 마치 어머니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하나뿐인 외아들을 보호하는 것과 같은 진정한 마음입니다. 이때의 자애는 어머니가 자식을 사랑하는 집착에서 오는 애정이 아니고 진심으로 자식이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자애로운 마음은 숭고한 사랑으로 가족, 사회, 인류, 존재계에 있는 모든 종류의 생명에게 편견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마음은 무제한적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런 장벽이 없습니다. 이처럼 차별이 없기 때문에 어머니가 자식을 사랑하듯이 무조건적으로 사랑을 베풉니다. 이런 마음일 때라야 비로소 엄청난 힘을 가진 성냄이 소멸될 수 있습니다.
성냄은 성냄을 통해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직 자애를 통해서만 성냄이 사라집니다. 자애로운 마음이 모든 생명을 향해서 무한한 사랑을 보낼 때 자신이 무시되지 않습니다. 나는 없고 오직 남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때 모든 생명 속에 자신도 하나의 생명으로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와 남이 따로 있지 않고 나와 남이 모두 포함된 무한한 사랑입니다.
자애는 네 가지의 무량한 마음과 함께 있습니다.
네 가지 무량한 마음을 한문으로는 사무량심四無量心이라고 합니다. 이 네 가지란 자애[愛], 동정[悲], 기쁨[喜], 평정[捨]으로 이 마음을 자비희사慈悲喜捨라고 합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자비라고 했을 때는 사랑을 뜻하는 자애와 연민의 정인 동정이 함께 포함된 말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우리는 자비희사의 사무량심으로 더욱 선심을 키워야 되겠습니다
▣ 제139회 법문
수행을 한다는 것은 새로운 선과보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 선과보 중에서 통찰지혜의 과보는 모든 것을 일거에 소멸시킬 수 있는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지혜가 생기면 어떤 번뇌에도 걸리지 않아 거미줄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자유롭습니다. 그 지혜란 모든 것은 원인과 결과이며, 내가 있어서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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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서 자애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불선심 중에서 가장 격렬하게 나타나는 성냄의 힘은 매우 큽니다. 그러나 그 힘과 대적할 만한 더 큰 힘이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단순한 사랑이 아니고 숭고한 사랑이라서 자애라고 합니다. 이러한 자애가 일어나면 자연스럽게 상대의 어려움을 동정하는 연민의 정이 생깁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제거해 주려는 숭고한 마음이 일어납니다. 동정심을 가진 마음은 꽃보다 더 부드러운 마음을 가지고 상대의 고통을 어루만져 줍니다. 그래서 자신의 희생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고통에 대해서 자애를 가질 때 남의 고통에 대해서 연민의 정을 가질 수 있습니다. 자애가 없으면 남의 고통에 연민의 정을 보내지 못합니다. 오히려 남의 고통을 즐기거나 잘된 일이라고 환영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악한 의도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남의 슬픔과 고통을 진심으로 이해해 줄 때 그 마음으로 그치지 않고 다음 마음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기쁨입니다.
이때의 기쁨은 함께 기뻐하는 숭고한 마음입니다. 자애와 동정심이 생기면 다음에 남의 기쁨에 대해서도 진심으로 함께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남의 기쁨을 함께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모두 경쟁적으로 살고 있으며, 누구나가 유신견을 가지고 살기 때문에 남의 성공을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자애와 연민의 마음이 있기 때문에 남의 기쁨에도 진심으로 동참할 수 있습니다. 남의 기쁨을 함께 기뻐하는 마음은 다른 사람에 대한 시기심을 제거해야 일어납니다.
이렇게 자애, 동정, 함께 기뻐하는 마음이 결합되면 다음에 더욱 숭고한 마음인 평정의 마음이 일어납니다. 평정을 평등이라고도 하는데 공평하게 바라보는 것을 말합니다. 대상을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마음 없이, 대상을 집착하거나 혐오하는 마음 없이 그냥 있는 그대로의 대상을 지켜보는 균형이 있는 마음입니다. 이것이 중도의 마음입니다.
이처럼 자애로부터 시작된 마음이 사마타 수행에 의해서 사무량심이 완성되면 더 높은 선정을 체험합니다. 사무량심은 사마타 수행이라서 아직 통찰지혜가 나지 않은 단계입니다. 그래서 선정의 단계에 있는 숭고한 마음입니다. 자비희사의 네 가지 무량한 마음이 완성되면 어떤 고난에서도 흔들림이 없이 평등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영향을 끼치는 여덟 가지 세속적인 조건들 속에서도 평등심을 유지하여 균형을 이루게 됩니다. 이익과 손실에서, 명예와 불명예에서, 칭찬과 비난에서, 고통과 행복에서 중도적 입장을 견지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단계에서 앞으로 더 높은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자애경』을 독송해 보겠습니다.
“남을 이롭게 하는 선행에 숙달된 사람으로서 평온의 경지를 얻고자 하는 사람은
능력이 있고, 정직하고, 성품이 고결하고, 말씨가 상냥하고, 친절하고, 겸손해야 합니다.
만족할 줄 알아서 남에게 보시하기 쉽고, 분주하지 않으며, 간소하게 살고, 감각기관이 고요하고,
슬기롭고, 교만하지 않으며, 세속의 일에 탐욕이 없어야 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에게 책망 받을 만한 아주 작은 잘못이라도 행하지 않으며,
모든 존재들이 안락하고 평화롭고, 행복하기를 기원해야 합니다.
살아 있는 것은 어떤 것이든 그들이 약하거나 강하거나, 길거나 짧거나, 크거나 중간이거나,
미세하거나 거칠거나 모두 예외 없이 행복하기를 기원해야 합니다.
눈에 보이거나 보이지 않거나, 가까이 있거나 멀리 있거나, 이미 태어났거나 태어날 것이거나
모두 예외 없이 행복하기를 기원해야 합니다.
누구이든 다른 사람을 속이지 않고, 어떤 경우에도 멸시하지 않으며,
서로 다른 생각 때문에 성냄이나 증오로써 다른 사람이 잘못되기를 바라서는 안 됩니다.
마치 어머니가 하나뿐인 외아들을 자신의 목숨처럼 보호하듯이
모든 존재들에게 한량없는 자애의 마음을 닦아야 합니다.
걸림 없이, 증오나 적의 없이, 한량없는 자애의 마음을
위로, 아래로, 옆으로, 사방으로 가득 차도록 널리 닦아야 합니다.
서 있을 때에도, 걸을 때에도, 앉아 있을 때에도, 누워 있을 때에도,
항상 깨어 있는 마음으로 자애를 닦아야 합니다.
그릇된 견해에 빠지지 않고, 계행을 지키고, 통찰력을 갖추어
감각적 욕망의 집착을 모두 버리니, 다시는 모태에 드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자애수행을 하면 어떤 공덕이 있는지 『자애공덕경』을 독송해 보겠습니다.
“수행자들이여!
자애를 가까이하고, 자애수행을 하며, 자애를 항상 지니고, 자애를 수레바퀴처럼 굴리며,
자애를 기본으로 삼아 몸에 익히며, 자애를 쌓아가고, 훌륭하게 성취하여,
자애수행으로 높은 경지에 이른 이에겐 어떤 공덕이 있는가요?
행복하게 잠들고, 행복하게 일어나며, 잠잘 때 악몽을 꾸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다른 존재들에게 사랑을 받습니다.
또한 천인들의 보호를 받으며, 불과 독약, 재난의 위험에서 벗어납니다.
쉽게 마음을 집중할 수 있으며, 얼굴 표정이 부드럽고 고요합니다.
불안한 마음 없이 죽음을 맞으니,
비록 최상의 열반은 얻지 못해도 천상의 세계에서 태어나게 됩니다.”
성냄이 있을 때는 성냄이 있는 마음을 알아차리고, 성냄이 없을 때는 성냄이 없는 마음을 알아차립니다. 그리고 자애가 있을 때는 자애가 있는 마음을 알아차려야 하겠습니다.
자애가 있는 마음은 알아차릴 대상입니다. 자애를 알아차리지 못하면 다시 성냄에 빠지거나 또는 이기심에 빠집니다. 이때의 자애는 지혜가 계발된 상태이지만 아직 완전한 지혜가 나지 않았기 때문에 자애가 있는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대상을 사랑하는 그 마음을 다시 알아차리면 자애로 인해 악한 의도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셋째, 지혜가 있는 마음 알아차리기입니다.
불선심인 어리석음이 있는 마음을 알아차리듯이 똑같이 선심인 지혜가 있는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지혜는 ‘아는 마음’입니다. 아는 마음을 ‘앎’ 또는 ‘이해’라고도 합니다. 지혜의 반대는 무지입니다. 무지는 모르는 마음입니다. 지혜가 나면 어둠에서 밝음으로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물의 자명한 이치를 깨닫습니다. 사물의 이치란 무상, 고, 무아를 아는 것입니다. 무지는 모르기 때문에 어둠이라서 대상의 성품을 모릅니다.
하지만 지혜는 환히 밝은 마음이라서 대상의 바른 성품을 봅니다. 존재하는 것들이 모두 무상, 고, 무아의 성품이 있다는 것을 알아 유신견이 사라지고 집착을 끊습니다. 그 결과로 해탈에 이릅니다. 그래서 지혜는 알기 때문에 어리석음을 끊는 특성이 있습니다.
지혜는 불교의 완성이자 구도자의 완성입니다. 수행의 모든 길은 지혜를 향해서 갑니다. 팔만사천법문도 모두 이 지혜를 얻기 위한 방편입니다. 그러므로 지혜는 팔정도의 정견과 정사유를 완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곱 가지 깨달음의 완성입니다.
지혜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최종적으로 내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 집착이 끊어지는 것이 전부입니다. 이 과정에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어 다시 태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윤회가 끝나는 것입니다. 삶에 아무런 미련이 없기 때문에 다시 태어날 원인을 만들지 않아서 태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범부의 입장에서는 이것을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길은 누구나 가기 어려운 길이라서 원하는 자만 가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이 길을 가기 위해서는 선업의 공덕으로 지혜가 나야 합니다. 지혜가 나야 비로소 사는 것이 불만족이라는 것을 알아 이런 속박에서 벗어나고 싶은 지혜가 나서 수행을 합니다. 그러므로 지혜가 나서 지혜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그 지혜는 반드시 선업의 공덕으로 생깁니다.
지혜는 그냥 생기지 않습니다. 반드시 통찰지혜 수행인 위빠사나 수행을 해야 얻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을 팔정도라고 하는데 시작은 계율을 지키는 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알아차림에 의해 청정한 계율이 지켜지면 다음 단계로 집중력이 생깁니다. 이때의 집중이 찰나집중입니다. 그런 뒤에 찰나집중의 힘으로 지혜를 얻습니다. 이러한 과정이 바로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입니다. 이 계정혜를 팔정도八正導 또는 중도中道라고 말합니다.
지혜는 어느 날 화들짝 전광석화처럼 한 번에 오지 않습니다. 무수한 시간을 거치고 오랜 노력에 의해서 차츰 단계적으로 계발됩니다. 물론 부처님이나 아라한의 지혜는 사다함에서 아라한이 될 때 한순간에 이루어지지만 이것이 처음부터 오는 것은 아닙니다. 처음에는 여러 단계의 과정을 거쳐서 마지막에 부처의 지혜를 얻습니다. 이것은 누구나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나 자기 수준의 지혜가 한순간에 일어나서 차츰 더욱 계발되는 과정을 거칩니다.
지혜는 일반적으로 세 가지 과정을 거쳐서 성숙됩니다.
처음에는 듣거나 읽는 것으로 지혜의 초석을 다집니다. 첫 번째 지혜는 입으로 전해진 앎입니다. 이것을 문혜聞慧라고 합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경전이 없었기 때문에 법문을 듣는 것으로 지혜에 입문합니다. 그래서 이때는 많이 들은 사람을 유식한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지금은 경전이 있어서 법문을 듣거나 경전을 읽는 것을 통해서 불교에 입문을 합니다. 문혜는 처음에 지식을 얻는 수준입니다. 그래서 앎이라고 하거나 이해하는 단계입니다.
두 번째 지혜는 생각으로 일어나는 앎입니다. 이것을 사혜思慧라고 합니다. 사혜는 생각하는 것, 사유하는 것으로 사변적인 것입니다. 이 수준에서는 아직 관념적인 것에 머뭅니다. 몸과 마음에 대한 실천적 수행을 통해서 아는 단계가 아닌 오직 사유의 수준에서 대상을 봅니다.
두 번째 지혜의 단계가 서양의 사변적인 철학입니다. 서양의 철학은 사변적이고 관념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무상, 고, 무아를 통찰하는 지혜가 없습니다. 물론 인도의 힌두교도 관념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열반을 성취하는 통찰지혜가 없습니다.
세 번째 지혜는 수행을 통해서 얻는 수승한 지혜입니다. 이것을 수혜修慧라고 합니다. 자신의 몸과 마음을 있는 그대로 통찰하여 최종적인 지혜인 삼법인三法印을 아는 것입니다. 이러한 수혜를 통해서 수다원의 도과를 성취하고, 다음에 사다함의 도과를 성취하고, 다음에 아나함의 도과를 성취한 뒤에 마지막에 아라한의 도과를 성취합니다.
수혜는 오직 부처님의 가르침에만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류 역사에 그 누구도 열반을 말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오직 부처님이 출현하셨을 때만 열반에 이르는 문이 열립니다. 언젠가 알 수 없지만 말법시대가 오면 다시 열반에 이르는 문이 닫힙니다. 그리고 다음 부처님의 출현에 의해서만 다시 열반의 문이 열립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법시대에 살고 있는 행운을 얻은 것입니다. 만나기 어려운 것 중에서 부처님의 정법이 있는 시대에 태어나기가 어렵고, 정법을 만나기 어렵고, 정법수행을 하는 바른 스승을 만나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 제140회 법문
내 것, 내 몸, 내 마음이라는 자아가 강하면 강한 만큼 괴롭습니다. 괴로울 때 괴로움을 없애려다 더 고통을 받는 자가 있고, 괴로워서 수행을 하는 자가 있습니다. 괴로움을 일으키는 힘이 강하면 괴로움을 없애려는 힘도 강합니다. 두 가지는 같은 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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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는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서 도과를 성취하는 지혜의 과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의 지혜는 청정과 함께 계발됩니다. 그래서 칠청정과 열여섯 단계의 지혜의 과정을 거쳐서 열반에 이릅니다. 이러한 과정은 수행자의 근기에 따라서 늦고 빠른 차이가 있을 뿐이지 누구나가 거쳐 가야 하는 길입니다. 칠청정과 열여섯 단계의 지혜가 서로 맞물려 계발되는 과정을 차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여기서 청정은 첫째, 둘째로 하고, 지혜는 하나, 둘로 부르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지계의 청정입니다.
둘째, 마음의 청정입니다.
하나,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입니다.
셋째, 견해의 청정입니다.
둘,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입니다.
넷째, 의심에서 벗어나는 청정입니다.
셋, 현상을 바르게 아는 지혜입니다.
넷, 생멸의 지혜입니다.
다섯째, 바른 길을 아는 청정입니다.
여섯째, 수행과정의 지혜와 통찰에 의한 청정입니다.
다섯, 소멸의 지혜입니다.
여섯, 두려움에 대한 지혜입니다.
일곱, 고난의 지혜입니다.
여덟, 혐오감에 대한 지혜입니다.
아홉, 해탈을 원하는 지혜입니다.
열, 다시 살펴보는 지혜입니다.
열하나, 현상에 대한 평등의 지혜입니다.
열둘, 적응의 지혜입니다.
열셋, 성숙의 지혜입니다.
열넷, 도의 지혜입니다.
열다섯, 과의 지혜입니다.
일곱째, 지혜통찰의 청정입니다.
열여섯, 회광반조의 지혜입니다.
이상이 부처님으로부터 모든 성자들이 가신 청정과 지혜의 단계입니다. 이때 어느 단계에서도 머물러서는 다음 단계로 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반드시 스승들의 가르침을 받아야 합니다.
이러한 일곱 가지 청정과 열여섯 단계의 지혜는 부처님께서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역대 모든 성자, 모든 아라한들이 가신 길을 부처님이 찾아내신 것입니다. 이러한 길은 어느 특정한 사람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인간이 최고의 지혜를 얻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거쳐야 되는 불가피한 단계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 과정을 부처님이 만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주는 의미는 매우 큽니다. 부처님도 인간이십니다. 단지 최고의 법을 보아서 열반을 통해 해탈을 하신 분이라는 사실이 우리와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부처님의 이 고귀한 가르침을 받아서 늘 함께해야 되겠습니다.
지혜도 알아차릴 대상입니다. 지혜에 빠지면 간교해집니다. 그래서 지혜가 난 다음에 계속해서 알아차려야 다음 단계의 지혜로 나아갈 수 있으며, 간교해짐으로 인해 다시 무지에 빠지지 않습니다.
이렇게 많은 지혜의 과정이 있는데 이것은 결코 스스로 혼자서 올라갈 수가 없습니다. 오직 혼자서 이런 지혜의 단계를 아신 분이 부처님 한 분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 외에는 이러한 길을 스스로 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서 이 지혜의 단계를 거친다고 해서 이러한 제자들을 성문聲聞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부처님은 스스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서 ‘삼마삼붓다’라고 불립니다.
어리석음이 있을 때는 어리석음이 있는 마음을 알아차리고, 어리석음이 없을 때는 어리석음이 없는 마음을 알아차립니다. 그리고 지혜가 있을 때는 지혜가 있는 마음을 알아차립니다. 지혜가 있는 마음은 알아차릴 대상입니다. 지혜를 알아차리지 못하면 다시 무지에 빠지거나 또는 간교해집니다.
이때 지혜가 계발된 상태이지만 아직 완전한 지혜가 나지 않았기 때문에 지혜가 있는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완전한 지혜가 나셨어도 항상 지혜가 난 마음을 알아차려서 지혜에 빠지지 않으셨습니다. 이상으로 선한 마음인 관용, 자애, 지혜를 살펴보았습니다.
다음에는 관용, 자애, 지혜를 얻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실천방법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선한 마음인 관용, 자애, 지혜가 생기면 선한 행위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보시, 지계, 수행이라는 세 가지를 실천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선하다고 할 때는 막연하게 착한 것만을 말하지 않고, 사실은 이런 행위가 뒤따라야 비로소 선한 마음인 것입니다.
선한 마음을 갖추기 위해서는 반드시 보시, 지계, 수행이 따라야 합니다. 이때의 보시가 관용입니다. 선한 마음은 탐욕과 악한 의도가 없기 때문에 대상을 받아들이는 마음입니다. 받아들인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베푸는 마음이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이때의 자애가 지계입니다. 그리고 지혜가 바로 수행입니다. 선한 마음을 실천하기 위해서 필요한 세 가지 실천 덕목을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로 보시普施를 해야 합니다. 보시는 남에게 베푸는 마음입니다. 그냥 단순하게 베푸는 것이 아니고 그간에 내가 받은 많은 은혜를 모든 사람에게 갚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베푼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받았으면 갚는 것이 당연한 일이기 때문에 단지 할 일을 한 것입니다. 보시는 관용이 있는 마음에 의해서 생기는 자연스러운 마음입니다. 그래서 관용과 보시는 같은 의미입니다.
보시는 바라밀 공덕의 첫째 항목입니다. 보살이 부처가 되기를 서원을 세우고 제일 처음에 하는 덕목이 바로 보시입니다. 보시는 이기적이고 비도덕적인 생각을 억제합니다. 그리고 오직 남을 위하는 마음을 일으킴으로써 두 가지의 기쁨을 줍니다.
보시를 하는 마음은 조건 없이 남을 도움으로써 스스로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욕망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누구나 감각적 욕망을 제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남에게 헌신적인 보시를 함으로써 내면의 욕망이 제어됩니다. 그리고 보시를 하는 선한 마음이 도덕에 기초한 것이라서 고요함과 지혜가 옵니다. 이것은 한 가지의 행위로 두 가지 이익을 얻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순수한 보시를 하는 마음은 보시를 받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병자이거나 가난하거나 고통 속에 빠진 사람이라는 등 누구를 가리지 않기 때문에 평등한 마음을 갖습니다. 바라지 않는 마음으로 보시를 하면 보시는 받는 사람도 빚으로 생각하기 않고 편안하게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이런 측면에서도 두 가지 이익이 있습니다.
굶주린 자에게 음식을 베풀어서 살도록 하고, 병들고 고통을 겪는 자를 정성스럽게 보살펴주고, 가난하고 외로운 자들과 함께 따뜻한 마음을 나누고, 청정하게 수행을 하는 자를 뒷바라지하는 네 가지 보시는 부처님께 직접 하는 보시나 다름이 없습니다.
보시를 할 때는 보시를 하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갖추어야 할 마음가짐이 있습니다. 먼저 보시를 하는 사람이 가져야 할 마음가짐은 보시를 하기 전에 즐거운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그리고 보시를 하는 동안에도 만족해야 합니다. 그리고 보시를 한 뒤에도 기쁜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시작할 때도 좋아야 하고, 하는 중에도 좋아야 하고, 하고 나서도 좋아야 합니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청정한 보시를 해야 합니다.
다음에 보시를 받는 사람이 가져야 할 마음가짐이 있습니다. 보시를 받음으로 인해 탐욕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보시를 받음으로 인해 성냄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합니다. 보시를 받음으로 인해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합니다. 이렇게 보시를 행하는 사람이나 보시를 받는 사람이 해야 할 의무를 다하면 그 보시의 공덕의 과보가 더욱 커집니다.
보시에는 네 가지의 유형의 보시가 있습니다. 첫째, 보시를 베푸는 자에 의해서 청정하게 되는 보시입니다. 보시를 하는 사람이 계행이 청정하지만 받는 사람이 계행의 청정이 없는 경우입니다. 둘째, 보시를 받는 자에 의해서 청정하게 되는 보시입니다. 보시를 하는 사람이 계행이 청정하지 않지만 받는 사람이 계행이 청정한 보시입니다. 셋째, 보시를 베푸는 자나 보시를 받는 자나 청정하게 되지 않는 보시입니다. 보시를 하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 모두 계행이 청정하지 않은 보시입니다. 넷째, 보시를 하는 자나 보시를 받는 자에 의해서 청정하게 되는 보시입니다. 보시를 하는 사람이나 보시를 받는 사람이 모두 계행이 청정한 보시입니다.
이렇게 네 가지 청정한 보시가 있는데 보시를 행하는 자나 보시를 받는 자가 모두 계행을 청정하게 함으로써 보시의 과보가 달라집니다. 보시를 행하는 사람의 마음이 청정하고 보시물이 정당한 것일 때 그리고 보시를 받는 사람의 마음이 청정하고 그 보시물을 바르게 사용할 때 보시의 공덕이 더 커집니다.
일반적으로 보시를 행했으면 그것이 어떻게 쓰이건 상관하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선하게 쓰이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일이지만 한번 보시를 했으면 그 쓰임새는 받은 사람이 할 일입니다. 만약 좋은 곳에 쓰이면 더 좋겠지만 원하지 않는 곳에 쓰였어도 관여해서는 안 됩니다. 다른 곳에 쓴 과보는 쓴 사람이 받는 것입니다. 만약 보시를 하고 자기 뜻대로 사용하지 않았다고 반환을 요구하거나 화를 낸다면 이것은 자신의 공덕을 삭감하는 것이며, 오히려 선한 보시로 인하여 불선행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단 보시를 했으면 그것은 이미 나의 것이 아닙니다.
이처럼 보시의 공덕은 베푸는 사람의 마음가짐과 보시를 받는 상대에 따라서 공덕이 달라집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했다면 바람이 없는 만큼 그 공덕의 과보가 큽니다. 만약 바람이 있다면 있는 만큼 보시의 공덕이 반감됩니다. 이것은 순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같은 것을 보시했을 때도 마음가짐에 따라서 과보는 다르게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이처럼 보시는 단순한 보시에 그치지 않고 행하는 자와 받는 자의 마음의 상태에 따라서 다양한 형태의 공덕의 과보가 있습니다
▣ 제141회 법문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는 유구한 세월 동안 단 한 가지의 진실이 있다면 모든 것이 변한다는 것입니다. 변한다는 것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입니다. 변한다는 것은 원인이 되는 조건에 의해 결과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변하는 과정에는 다른 어떤 힘도 개입되지 않습니다. 단지 자체의 원인과 결과로 진행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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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서 보시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누구에게 보시를 했는가에 따라서 공덕의 과보가 다릅니다. 예를 들면 성스러운 사람에게 보시를 했다면 성스럽지 못한 사람에게 한 보시의 공덕보다 훨씬 과보가 큽니다. 성스러운 사람은 그 보시물을 통해서 더 좋은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공덕이 증장되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고 나쁜 사람에게 보시를 했다면 그가 그 보시로 인해 나쁜 짓을 했을 것이기 때문에 그만큼의 공덕이 상쇄될 것입니다. 물론 나쁜 사람에게 한 보시도 그 공덕은 있습니다. 단지 그 공덕의 과보가 증장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보시는 행한 대로 그 공덕이 따릅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짐승에게 보시를 하면 백 배의 선과보를 받습니다. 계율을 지키지 않는 사람에게 순수한 마음으로 보시를 하면 천 배의 선과보를 받습니다. 계율을 지키는 사람에게 순수한 마음으로 보시를 하면 십만 배의 선과보를 받습니다. 선정수행을 해서 감각적 욕망에서 벗어난 사람에게 순수한 마음으로 보시를 하면 천억 배의 선과보를 받습니다. 수다원 도과를 성취한 수행자에게 보시를 하면 헤아릴 수 없는 큰 선과보를 받습니다.
그러니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 벽지불, 부처님께 보시를 하면 과연 얼마나 더 큰 선과보를 받겠습니까? 최고의 보시공덕은 아라한에게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라한을 응공應供이라고 합니다. 응공이란 말은 공양을 받을 자격이 있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아라한은 모든 번뇌를 해결했기 때문에 어떤 불선심도 없이 오직 남을 위해서 사는 것이 마지막 남은 인생의 목표입니다. 그러므로 최고의 공덕으로 치는 것입니다.
이처럼 보시는 선한 사람에게 하는 것이 유익합니다. 그중에 수행을 하는 사람에게 하는 보시는 가장 좋습니다. 수행자는 보시를 받아서 수행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단순한 보시의 공덕으로 그치지 않아 그 힘이 계속 증장됩니다. 예를 들어 수행자에게 공양을 올렸을 때 수행자가 공양을 들면서 알아차리고 먹으면 수행의 공덕이 생깁니다. 그가 한 보시물로 상대가 수행을 해서 지혜가 생겼다면 당연히 그 공덕의 과보는 더 크게 돌아갑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기 전에 수자타가 올린 유미죽을 드시고 깨달음을 얻으셨는데 이 유미죽을 올린 수자타의 공덕은 그 무엇으로도 비견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보시의 공덕이라는 것이 바로 이렇습니다.
보시는 법보시와 재물보시가 있습니다. 이 중에 법보시의 가치가 더 뛰어납니다. 법보시는 깨달음을 얻은 부처님, 아라한, 성자들의 훌륭한 말씀을 사람들이 듣고자 할 때 법을 설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큰 보시의 공덕입니다. 이러한 법보시를 함으로써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 믿음을 주고, 계행이 청정하지 못한 사람에게 계행이 청정하도록 하고, 인색한 사람에게는 베푸는 것의 공덕을 가르치고, 잘못된 견해를 가진 사람에게는 바른 견해를 갖도록 해야 합니다. 어떤 것이 되었거나 가장 훌륭한 바라밀 공덕을 쌓는 것입니다.
미얀마에서 비구들이 탁발을 할 때 여러 가지의 보시물을 올리지만 그중에 갈증을 해소하라고 물을 한 잔씩 올리는 보시도 있습니다. 보시는 재물을 베푸는 것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따뜻한 말 한마디, 다정한 미소, 자애로운 눈길도 사실은 모두 보시에 속합니다.
수행자가 보시를 할 때는 먼저 ‘지금 무슨 마음으로 보시를 하는가?’ 하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만약 이렇게 알아차려서 바라는 마음이 있다거나 과시를 하는 마음이 있다면 즉각 보시를 중단해야 합니다. 이런 상태에서 보시를 하면 보시의 공덕이 줄어듭니다. 그리고 선한 보시로 인해서 다른 나쁜 마음을 먹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지금 무슨 마음으로 보시를 하는가?” 하고 다시 알아차립니다. 이렇게 보시하는 마음을 새로 알아차리면 그때는 아무것도 바라는 마음 없이 순수한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때 보시를 하는 것이 좋습니다.
보시에도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하는 보시에 개입을 해서 상대가 보시를 하지 못하도록 해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어 가까운 도반이 얼마를 보시하겠다고 말했을 때 무심히 왜 그렇게 많이 하느냐고 보시금액을 깎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상대의 보시공덕을 가로막는 것이라서 불선업이며, 자기 자신이 인색하게 굴어서 불선업을 짓는 것입니다. 때로는 아예 남이 보시를 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은 질투심으로 인한 불선업입니다. 그러므로 상대가 보시를 하는 문제로 상의했을 때는 당신이 원하는 만큼 기쁜 마음으로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하라고 조언을 해주어야 합니다.
남이 보시를 할 때 매우 훌륭한 일이라고 칭찬을 해주면 상대가 보시를 해서 받는 공덕을 똑같이 나누어 가질 수가 있습니다. 보시는 재물로만 하는 것이 아니고 마음으로 하는 것도 포함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선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이렇게 돈이 없어도 바라밀 공덕을 쌓을 수가 있습니다. 남이 하는 보시에 동참하여 기쁜 마음으로 그를 칭찬해 준다면 보시를 행한 자가 받는 바라밀 공덕의 과보를 똑같이 받습니다.
보시를 받을 때는 반드시 보시를 하는 사람의 입장을 배려해야 합니다. 계행이 청정하지 않은 보시를 제외하고는 반드시 받아야 합니다. 가령 자신이 싫어한다고 해서 거절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에게 필요 없는 것이나 자기가 먹지 않는 것이라고 해서 싫다고 거절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주는 자의 공덕을 가로막는 것입니다.
보시를 받은 뒤에 자기가 어떻게 사용하건 그것은 받은 이후에 자신이 결정할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남의 보시를 받지 않음으로써 남의 공덕을 방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 자신의 입장만 내세운다면 이것은 어린아이의 마음과 하등에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무심히 먹을 것을 주었을 때 ‘나는 싫어’라고 말하지 말고 그냥 받아야 합니다. 만약 이런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먼저 상대방의 입장을 물어서 주는 것도 바람직할 것입니다.
미얀마에서 비구들이 보시를 할 때는 반드시 각기 필요에 따른 의식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는 돈이나 먹는 것은 쟁반에 받쳐서 비구 앞에 놓고 비구가 손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돈을 손대지 않는 것이 비구의 계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용품일 경우에는 쟁반에 받쳐서 올리면 쟁반에 손을 대서 받는 의식을 취합니다. 그리고 “이 보시의 공덕으로 도과를 성취하기를 바랍니다” 하고 축원을 해줍니다. 물론 상황에 따라서 다양한 축원을 합니다.
이렇게 주고받는 의식을 행함으로써 주고받음이 분명하게 끝납니다. 그러면 보시를 행한 자나 보시를 받는 자가 서로의 역할을 한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다음에 보시를 한 것으로 인해서 생길 수 있는 잘못된 마음가짐이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의식에서는 주는 자와 받는 자가 서로 빚이 없습니다. 주는 자는 자신의 공덕을 쌓고, 받는 자는 받은 것을 잘 사용하여 보시를 한 자에게 더 큰 공덕이 돌아가도록 유익하게 사용합니다. 이것이 보시의 바른 관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시를 했다고 해서 개인적인 특별한 친밀감을 나타낼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보시를 한 사람이 보시를 받은 사람의 태도에 대해서 바라는 것이 없어야 합니다. 만약에 보시를 했는데 상대가 감사하게 여기지 않는다고 불쾌해 하거나 당연한 것처럼 받는다고 언짢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보시를 했는데 다음에 만났을 때 말이 없거나 몰라준다고 섭섭하게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주고받음에는 각자의 역할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 받은 것을 지나치게 감사하게 여기면 다음에 다시 보시를 받기를 바라는 마음을 보이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상대가 부담을 갖습니다. 그러므로 주고받음에도 일정한 예절이 필요합니다. 만약 보시를 하고 그 사람을 지배하려고 했다면 이는 오히려 불선업을 짓는 것입니다.
보시는 선한 행위로 누구에게나 반드시 필요한 덕목입니다. 남에게 베푸는 것은 자신을 위한 가장 큰 복을 얻는 것이며, 받는 사람에게도 복을 주는 것입니다. 순수하게 베풀 때의 마음은 기쁘고 즐겁습니다. 이것이 주고받는 사람이 즉석에서 받는 공덕의 과보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기쁜 마음으로 보시를 할 생각을 해야 합니다. 남을 위해서 사는 것이 자신을 위해 가장 바람직하게 사는 것입니다.
베풀 때는 편견이 없이 베풀어야 하고, 좋고 나쁨을 가리지 말고 베풀어야 합니다. 이익을 바라고 베풀면 오히려 정신적․물질적 손실이 옵니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순수하게 베풀어야 합니다. 그렇게 베푸는 마음이 선한 종자가 되어 고스란히 자신에게 돌아옵니다. 바라지 않을 때 더 큰 공덕의 선과보가 돌아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사람들의 선한 행위와 선하지 못한 행위는 하는 순간에 일어나서 사라지지만 자기가 한 선과보와 선하지 못한 과보는 사라지지 않고 상속됩니다. 이것이 바로 윤회입니다. 그래서 선과보와 불선과보는 지금 이후에도 상속되고, 죽은 뒤에도 상속됩니다.
보시를 할 기회도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우리가 보시를 할 시간도 그렇게 많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다음에는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지금 베푸십시오. 순수한 마음으로 널리 베풀면 사람들의 칭찬이 따르고 두려움 없이 살 수 있으며, 누구에게나 미움을 받지 않습니다. 베푸는 사람의 마음은 항상 청정하여 하는 일이 잘 되고 행복하며, 다음 생까지 이 행복이 상속됩니다. 그러니 우리가 베풀지 않고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두 번째로 지계가 있어야 합니다. 지계는 계율을 지키는 행위입니다. 계율은 빨리어로 실라sīla라고 합니다. 이 말은 본성, 습관, 도덕, 도덕적 의무, 도덕적 실천, 계戒라는 뜻으로 쓰입니다. 그러므로 불교에서의 계율은 매우 자율적인 것이며 탄력적인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절대자로부터 계시된 것이 아니고, 인간이나 집단이나 간에 선한 삶의 목표를 위해서 합의에 의해 조성된 약속입니다.
계율은 선한 의도라고 합니다. 그래서 선한 마음의 작용을 계율이라고 합니다. 또한 계율은 잘 막아서 보호하고, 범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계율은 무엇을 억지로 하지 말아야 한다는 강압적이기보다는 나와 남의 행복을 지켜주는 울타리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선한 마음의 의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계율은 깨끗한 것이며 아름다운 것입니다. 사람들은 계율 안에 있을 때 상호신뢰하게 되고, 그래서 편안하고 행복합니다. 지계는 선한 마음을 갖는 데 반드시 필요한 덕목입니다. 계율을 지키는 행위는 도덕적인 것이며, 자애와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계율을 지키는 것은 절제하는 것으로 정신적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계율을 지키는 것을 훈련처럼 하지 않으면 계율주의자가 되어 오히려 계율에 함몰되어 버립니다. 그러므로 피안으로 가는 수단으로 계율을 지켜야 합니다. 계율이 목적이 되면 계율을 지키지 못하는 것을 배척합니다. 그러면 스스로 계율에 속박당합니다. 그러므로 계율은 훈련이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계율은 강제적인 의미도 있지만 이상을 가진 사람들이 선택하는 도덕적 의무가 있습니다. 그래서 계율은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수행자에게 가장 우선하는 근본입니다. 계율에 기초하지 않으면 고요함이 생기지 않아 지혜가 계발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계율은 수행의 시작입니다
▣ 제142회 법문
바라지 않고 분명하게 알아차릴 때만이 시간을 뛰어넘는 결과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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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계율을 딱딱하게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계율은 가장 부드러운 것입니다. 그것이 도덕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계율은 막아서 보호하는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가장 필요한 것입니다. 계율이 딱딱하게 느껴지는 것은 자유분망한 마음이 침해받는다는 잘못된 생각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계율이 있기 때문에 자신의 자유분망한 마음이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계율은 자신을 억제하여 자신을 보호하고 자신으로 인해서 남이 피해를 받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입니다. 계율의 가장 큰 이익은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란 번뇌의 싹을 자른다는 것입니다.
무엇이나 좋은 일어남은 좋은 사라짐이 있습니다. 그것처럼 나쁜 일어남이 있으면 나쁜 사라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자신에게서나 우리 주위에서 항상 볼 수 있는 크고 작은 많은 현상들입니다. 좋은 일어남은 좋은 출발이고, 계율이 있는 출발입니다. 그리고 팔정도에 입각한 출발입니다. 그리고 선업을 행하는 것으로 출발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출발이 좋으면 결과도 좋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출발이 좋지 않으면 반드시 결과가 좋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계율 안에 있을 때가 가장 안전하고 편안하고 행복한 것입니다.
그래서 선업의 과보는 매 순간 받는 것이고, 일생을 통해서 받는 것이고, 다음 생에도 받는 것이고, 그래서 온통 원인과 결과라는 과보밖에 없는 것입니다. 선업이 이러하니 악업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남는 것은 계율밖에 없습니다. 이 말은 죽어서 가지고 가는 재산은 물질이 아니고 선업과 악업의 과보인데, 계율을 지켰을 때는 선업의 과보를 가지고 가고, 계율을 지키지 못하면 악업의 과보를 가지고 간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지은 대로 받는 것입니다. 얼굴이 예쁜 것은 전생에 남을 비난하지 않아서 칭찬을 한 아름다운 마음이 있었던 것이며, 부자는 전생에 남에게 베풀었던 결과이며, 병이 많거나 단명한 것은 전생에 살생을 많이 했던 결과입니다. 무엇이나 원인이 없는 결과는 없습니다. 바람이 불어야 나뭇잎이 흔들립니다. 이것을 조건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므로 계율은 우리 생존의 기본 골격과 같은 것입니다. 특히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선업의 과보로 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다음 생에도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사람으로 태어나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경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오늘을 산다는 절실한 의미는 새로운 선업을 쌓아서 좋은 원인을 만들고, 현재 있는 선업의 의식을 더 고양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현재도 행복하고, 다음에도 행복을 보장합니다. 이것이 나의 행복과 남의 행복을 함께 일으키고 지켜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축생과 다르다는 것은 일정한 계율의 바탕에서 산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런 원인으로 지고의 행복인 열반을 성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행위를 하는 것을 수행을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계율은 왜 지켜야 하는 것일까요? 계율은 몸과 마음이 들뜨지 않고 편안하게 하기 위해서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괴롭지 않고 기쁨이 생기기 위해서 지켜야 합니다. 노력과 알아차리는 힘이 생기게 하기 위해서, 선정수행의 집중력을 키우기 위해서, 위빠사나 수행의 찰나집중을 위해서, 혐오스러워하지 않기 위해서, 통찰지혜로 알기 위해서, 선한 행위로 집착을 소멸하기 위해서, 사성제의 진리를 알기 위해서, 열반을 체험하기 위해서 계를 지켜야 합니다. 이런 모든 것들의 바탕에 항상 계율이 있습니다.
주석서에서는 지계의 이익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첫째, 세상에서 지계가 구족한 이는 잊어버림이 없는 마음으로 흐리지 않아서 큰 재산을 모을 수가 있습니다.
둘째, 지계가 구족한 이는 좋은 소문이 널리 퍼집니다.
셋째, 지계가 구족한 이는 왕들의 모임이나 지혜로운 브라만 대중, 거부장자, 비구, 수행자, 대중 등에게 가더라고 두려운 마음이 없이 밝은 얼굴이 될 수 있습니다.
넷째, 지계가 구족한 이는 임종 시에 허둥대지 않으며, 맑은 정신과 기쁜 마음으로 임종을 맞이합니다.
다섯째, 지계가 구족한 이는 죽은 다음에 선업이 있는 이들이 가는 곳, 행복한 곳에 태어납니다.
이외에도 계율을 지키면 건강이 좋아질 것이고, 사회적으로 신망을 얻어 정신적인 지도가 될 것이고, 늘 알맞은 이윤을 남겨 재산이 오래 유지될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사실은 모두 계율에 기인한 것입니다. 그래서 수행자에게 가장 우선하는 것이 계율입니다.
인간으로 살아가는 데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다섯 가지 계율이 있습니다.
첫째, 살생을 하지 않는 것,
둘째, 도둑질을 하지 않는 것,
셋째, 문란한 성생활을 하지 않는 것,
넷째,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
다섯째, 술을 마시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계五戒입니다.
하나,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지 말아야 하는 것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생명은 누구에게나 소중한 것입니다. 내가 다른 생명을 빼앗을 권리를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생존을 위한다는 미명하에 불필요한 살생을 즐깁니다. 취미가 다른 생명을 죽이는 것이라면 이는 매우 잘못된 취미입니다. 다른 생명을 죽인 과보는 고스란히 자기가 받습니다. 작은 곤충조차도 살아갈 권리를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지구는 인간들만의 것이 아닙니다. 여러 생명이 공존하는 공간입니다. 모두 살기 위해서 태어났는데 그것을 죽인다면 그것은 삶을 역행하는 것이고, 그 과보는 고스란히 자신이 받습니다.
살생을 하지 않는 마음에는 자애와 연민의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살생을 하는 마음에는 자애와 연민의 마음이 없습니다. 살생을 하는 동물적 본능을 가지고 산다면 그는 사람이 아니고 동물과 다름이 없습니다. 동물과 다름이 없다면 그의 다음 생은 동물이거나 동물보다 낮은 단계의 세계에 태어날 것입니다.
자신의 목숨을 끊는 것도 살생입니다. 자신의 목숨을 끊으면 더 큰 살생의 과보를 받습니다. 이는 가장 어리석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죽어서 괴로움을 끝낼 수만 있다면 자살을 하는 것도 상관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생명을 끊었기 때문에 어리석은 과보로 인해 더 가혹한 고통을 겪어야 합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니 자신의 목숨을 끊는 것은 지금보다 더 혹독한 고통을 스스로 찾아서 가는 것입니다. 과연 이것보다 더 어리석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더 큰 고통을 찾아간다는 것은 분명히 어리석은 일입니다.
누구나 선한 마음이 있어서 선행을 했습니다. 그리고 선하지 못한 마음이 있어서 선하지 못한 행위를 했습니다. 만약 고통스러운 일이 있다면 그것은 불선행의 과보를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머지않아 선행을 한 과보도 올 것입니다. 그러니 기다려야 합니다. 내가 당한 고통이 아니고 단지 지금 이 순간의 마음이 괴로울 뿐입니다. 이것은 내가 당한 수모가 아닙니다. 단지 이 순간의 마음이 경험했을 뿐입니다. 그러니 괴로움을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절망하지 말고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지금 내가 괴로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괴로울 때는 괴로워하는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래서 괴로움을 객관화시켜야 합니다. 괴로움은 한낱 느낌일 뿐입니다. 그 느낌은 감각기관이 느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느낌은 일어난 순간에 사라집니다. 그러나 이 느낌이 나의 느낌이라고 생각하고 이 느낌이 항상 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순간적으로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맙니다.
둘, 주지 않는 물건을 갖지 않아야 합니다.
남이 주지 않는 물건을 갖는 것은 도둑질입니다. 그리고 남에게 주어야 할 것을 주지 않는 것도 도둑질에 속합니다. 남의 것을 훔치면 고요함이 생기지 않으며, 남에게 손실을 입히는 것입니다. 도둑질도 그렇습니다. 내가 남의 물건을 훔치지 않는 것은 남도 내 물건을 훔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내가 남에게 줄 것을 주는 것은 남도 내게 줄 것을 주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계율은 상호적인 것입니다.
주지 않는 것을 갖지 않는 것에 대한 기준은 다섯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절도입니다. 남의 소유의 물건을 집에 침입하여 훔친다거나 소매치기를 하는 것입니다.
둘째, 강도입니다. 남이 소유한 물건을 폭력을 써서 강제로 빼앗거나 협박을 해서 빼앗는 것입니다.
셋째, 날치기입니다. 남이 소유한 물건을 반항할 틈을 주지 않고 갑자기 낚아채는 것입니다.
넷째, 사취입니다. 남이 소유한 물건을 자기 것이라고 거짓으로 속여서 차지하는 것입니다.
다섯째, 속임수입니다. 상대를 눈가림으로 속여서 이익을 취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행위는 반드시 행한 대로 과보를 받습니다. 훔친 물건의 가치에 따라서 불선과보가 생깁니다. 매우 소중한 것일수록 그 불선과보가 큽니다. 다음에 피해자의 도덕적 자질에 따라서 과보가 다릅니다. 피해자가 정신적 수준이 높으면 그것에 따라서 불선과보가 더 큽니다. 그리고 탐심으로 했는지 복수심이나 증오를 가지고 했는지에 따라서 불선과보가 다릅니다. 만약 단순한 탐심이 아니고 소유한 사람을 해치려는 의도를 가지고 했다면 불선과보가 더 큽니다.
셋, 삿된 음행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누구나 배우자가 아닌 사람과 불륜행위를 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부모 형제, 친척들로부터 보호를 받는 사람, 여자 죄수 그리고 남과 약혼한 여자들과도 관계를 가져서는 안 된다고 경전에서 말합니다. 출가수행자는 독신생활을 함으로써 이욕離慾을 통하여 정신적 함양을 꾀해야 합니다. 재가수행자가 음란한 성행위를 하지 않는 것은 결혼관계를 보호하고, 부부가 상호간에 정신적 유대감을 가져 행복을 추구하는 목적을 지키는 것입니다.
남자에게는 세 가지 종류의 여자들과 부적절한 관계를 가져서는 안 됩니다. 다른 남자와 결혼한 여자, 아직 보호를 받고 있는 여자, 전통적으로 금지하고 있는 여자입니다. 여자에게 두 가지 종류의 남자들과 부적절한 관계를 가져서는 안 됩니다. 결혼한 남자, 독신을 선언한 남자입니다.
넷,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실이 아닌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거짓말을 하는 것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하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진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모두 이루어져야 비로소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실천하면 스스로나 남에게 믿음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도, 남의 이익을 위해서도 또는 어떤 이익을 위해서도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되고 그리고 진실을 말해야 합니다.
거짓말에는 소극적인 경우와 적극적인 경우가 있습니다. 소극적인 측면일 경우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이고, 적극적인 경우에는 진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거짓말은 남을 속이려는 의도로 하는 것이지만 거짓말의 동기가 다릅니다. 탐욕으로 거짓말을 하는 경우가 있고, 미움으로 거짓말을 하는 경우가 있고, 미혹으로 거짓말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거짓말의 종류에 따라서 그 과보가 다릅니다. 특히 성스러운 승가를 분열시키는 거짓말은 그 과보가 매우 크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성스러운 사람을 속이는 것이 그 과보가 크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 제143회 법문
오직 현재의 몸과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위를 보는 것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생각하는 것이며, 아래를 보는 것은 이미 지나간 과거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오직 현재에 있는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현재에 있는 것만이 실재하는 것이며, 실재하는 것에 법의 성품이 있어서 지혜가 계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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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서 선업의 두 번째 지계(持戒)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다섯,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술이나 약물을 먹지 않아야 합니다. 술을 빨리어로 수라메라야맛자suraamerayamajja라고 합니다. 수라sura는 곡주穀酒이고, 메라야meraya는 과주果酒, 화주花酒, 목주木酒이고, 맞자majja는 술을 뜻합니다. 이와 같은 술은 사람을 취하게 합니다. 그래서 술은 마시면 정신이 흐려집니다. 약물도 이와 같습니다.
상좌불교에서 오계를 지키겠다는 서원을 세울 때 술에 관한 것에서는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의 원인이 되는 곡주, 과일주 등의 술을 마시지 않는 계행을 지키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때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의 원인이 되는 술’이란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결국 술을 마시지 말라는 것은 술이 알아차림을 방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알아차림이 없을 때는 술을 먹은 것과 같다는 말도 됩니다. 우리가 살면서 행한 크고 작은 잘못에는 술 때문에 생긴 일들이 많습니다. 모든 것이 느낌이듯이 술도 느낌입니다. 술을 마시는 것은 즐거운 느낌을 얻기 위한 것입니다. 느낌은 항상 더 좋은 느낌을 부릅니다. 이것이 바로 갈애입니다. 그래서 술이 술을 부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술을 마시고 싶을 때는 먼저 취하고 싶은 느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술을 마시려는 순간의 느낌은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고 싶어 하는 마음입니다. 이때의 느낌은 짧은 순간에 일어나는데 이 유혹을 물리치지 못하기 때문에 술을 습관적으로 마시게 되고, 나중에는 술이 술을 마시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육체적인 즐거움에서 정신적인 즐거움으로 발전한 것입니다. 사실 이런 감각적 쾌락은 짧은 한순간의 느낌을 알아차리는 훈련을 하면 이내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가 있습니다.
그 짧은 한순간의 느낌을 알아차리지 못하기 때문에 반사적으로 술을 먹는 행위로 발전합니다. 이처럼 반사적인 행동을 하는 것은 과거에 술을 마시고 이완했을 때의 느낌을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과거에 술을 마시고 실수를 하고 고생을 했던 때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야 술을 마시고 싶은 느낌을 제어할 수 있습니다.
술을 마시고 싶을 때 먼저 마시고 싶어 하는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리고 술을 마시고 싶어 하는 마음이 사라진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런 뒤에 가슴에서 일어난 느낌을 주시해야 합니다. 마음은 비물질이라서 보이지 않지만, 몸을 통해서 느낌으로 알 수 있습니다. 가슴이 약간 두근거린다든가, 가슴이 뛴다든가, 어떤 형태로든 가슴에 느낌이 있습니다. 이 느낌은 거칠 수도 있고, 미세할 수도 있습니다. 어느 느낌이거나 가만히 주시해야 합니다. 얼마 동안 이렇게 주시하면 술을 마시고 싶은 생각이 한결 약해져서 제어될 수 있습니다. 술을 마시지 않고 알아차림으로 극복했다면 이때는 알아차리는 힘이 증장한 것입니다.
가슴에서 느낌을 알아차리기가 어려우면 가슴의 호흡을 알아차려도 좋습니다. 가슴에는 이런 유의 여러 가지 느낌과 호흡과 맥박, 진동이 있습니다. 느낌이 강하면 느낌을 알아차리고, 아니면 몸에 있는 다른 것이라도 대상으로 삼아서 알아차려야 합니다. 가슴에 느낌이 없는데도 반드시 가슴을 알아차려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대상의 위치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무 곳에서나 강한 느낌이 있으면 그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괴로운 일이 있을 때 마시는 술은 때로는 유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괴로움을 술로 해결하는 것은 최선의 방법은 아닙니다. 수행자에게는 괴로움이 알아차릴 대상일 뿐입니다. 괴로움을 알아차리면 오히려 지혜가 납니다. 그래서 괴로움의 도피처가 술이 되면 알코올 중독자가 되기 때문에 괴로움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이 더 유익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수행자는 언제나 좋거나 싫거나 나타난 어떤 대상도 피하지 않습니다. 그냥 온몸으로 마주쳐서 알아차려야 합니다. 사실 피한다는 것은 현명한 대처가 아닙니다. 피할수록 더 문제를 일으키게 됩니다. 어떤 대상이나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 사실 별것도 아닙니다. 괴로움이 두려워서 피하려 하기 때문에 사실은 더 괴로운 것입니다. 이렇게 알아차리는 것이 계율을 지키는 것이고, 선업입니다.
불교의 계율은 매우 자율적으로 정해졌습니다. 『율장』을 보면 부처님께서 계율을 임의로 정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떤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비구들이 모여서 해결의 방편으로 자연스럽게 계율이 정해진 것입니다. 이렇게 합의된 상좌부 불교의 비구 계율이 227계입니다.
불교에서는 여러 가지 계율이 있지만 수행자에게는 알아차림 하나면 계율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알아차림은 선한 행위이기 때문에 모든 선하지 못한 마음을 방어합니다. 그래서 알아차리는 것이 계율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계율을 의식하면 수행자가 스스로를 속박할 수 있습니다. 계율은 막아서 스스로와 남을 보호하는 의미가 있기 때문에 그냥 알아차리는 것이면 됩니다. 부처님께서도 계율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계율은 청정한 수행을 하기 위한 수단이어야 합니다. 선업을 행하는 보시, 지계에 이어서 세 번째로 수행을 해야 합니다.
수행은 마음을 계발하는 것입니다. 수행을 명상이라고도 합니다. 수행은 대상을 알아차리는 행위입니다. 특히 수행을 한다는 것은 노력과 알아차림과 집중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수행이 잘 안 된다면 노력과 알아차림과 집중이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 가지 중에서 무엇이 부족한지 그리고 지나치지는 않았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대상을 알 때는 알아차림이라는 행위가 없이 그냥 습관적으로 압니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수행은 대상을 생각으로 아는 것이 아니고 깨어서 알아차리는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알아차려야 비로소 선입관 없이 있는 그대로의 대상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을 수행이라고 합니다.
수행의 종류는 대상과 하나가 되는 집중을 통해서 고요함을 얻는 사마타 수행이 있고, 대상을 분리해서 알아차리는 찰나집중을 하는 위빠사나 수행이 있습니다. 사마타 수행은 선정의 고요함이 있고, 위빠사나 수행은 지혜를 얻어 열반을 성취합니다.
사마타 수행은 40가지가 있는데 모두 대상과 하나가 되어서 선정을 키우는 것입니다. 사마타 수행은 색계 선정과 무색계 선정이 있습니다. 사마타 수행을 해서 색계 1선정일 때 현재에도 색계 1선정이 되고, 죽어서도 색계 1선정의 세계에 태어납니다. 선정은 무색계 4선정까지 있고, 그 위에는 없습니다. 선정의 세계는 윤회하는 세계이기 때문에 그곳에서 죽으면 다시 다른 세계에서 태어납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몸, 느낌, 마음, 법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그래서 현재 몸과 마음이 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수행은 먼저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대상에 마음을 보내는 알아차림이란 행위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아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처럼 세 가지 조건이 성숙되었을 때 비로소 위빠사나 수행을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때 대상과 아는 마음 사이에 알아차림이라는 행위가 있어서 비로소 수행이 성립됩니다.
그러므로 알아차림이 있는 것을 수행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이라는 말은 대상을 분리해서 통찰한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대상을 알아차려야 하고, 다음에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을 지속해야만 합니다. 단순하게 알아차리는 것으로는 통찰지혜가 나지 않기 때문에 알아차림을 지속하는 것까지 포함되어야 비로소 위빠사나 수행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의 모든 방편이 먼저 대상을 알아차리고, 다음에 알아차림을 지속하기 위한 것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지혜수행으로 칠청정과 열여섯 단계의 지혜가 계발되어 탐욕, 성냄, 어리석음의 번뇌를 불태우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 열반에 이릅니다. 그래서 그 끝인 윤회가 끝나는 것입니다. 누구나 괴로움에서 벗어나서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수행을 해야 합니다.
선한 일은 생각으로는 안 됩니다. 실천하는 수행이 아니면 사변에 그치고 말기 때문에 선한 마음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지식으로 아는 진실은 완전하지 못해 두려움과 고통이 따릅니다. 그러나 지혜가 있는 자는 진실을 알기 때문에 두려움과 고통이 없습니다. 이렇듯이 수행을 하지 않고서는 선(善)에 이르기 어렵기 때문에 관용을 갖기 위해서는 반드시 위빠사나 수행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바람이 있는 수행은 반쪽짜리 수행이라서 바람이 없는 위빠사나 수행을 해야 완전한 관용을 가질 수 있습니다.
수행을 하지 않는 사람은 감각적 쾌락에 빠져서 살기 때문에 관대한 마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무엇인가를 성취하기 위해서 극단적 고행을 하는 사람도 관대한 마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극단적인 것에는 항상 반대급부가 따르기 마련이라서 관용이 생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수행은 대결하는 것이 아니고 알아차려서 수용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수행을 할 때 남을 의식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까지는 남의 눈치를 보면서 자신 있게 할일을 못했다면 이제는 자신의 길을 가야 합니다. 남을 의식하면서 살면 남의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상대의 일은 상대의 일이라서 내가 상관할 것이 없고, 내 일은 내 일이라서 남이 상관할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알아차리면 상대의 어떤 행위도 단지 상대의 일로 보여서 알아차리는 힘을 온전하게 자신의 내면으로 돌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남의 눈치를 볼 것이 없고, 아울러 남과 시비할 것도 없어야 합니다. 바른 알아차림이 있으면 자연스럽게 자신의 내면을 향할 수가 있습니다.
수행을 하려면 노력을 해야 합니다. 수행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수행이란 마음을 계발하는 것이라서 전에 없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재의 습관적인 마음과 선하지 못한 마음을 뛰어넘을 수 있는 노력이 따라야 합니다. 이러한 노력에는 인내가 함께해야 합니다. 노력을 조금만 하고 큰 결과를 얻으려고 하는 것은 탐욕이지 관용이 아닙니다. 인내는 참고 견디는 것을 말하지만 수행에서는 노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노력한다는 것은 마음을 기울이는 것으로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이며, 알아차림을 지속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새로 내서 수행을 하고자 하는 의지를 갖는 것이 노력입니다. 대상에 빠져서 알아차림을 놓쳤을 때는 즉시 알아차리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수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알아차림과 집중인데, 이것들이 모두 노력으로 되는 것입니다.
노력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좌선을 할 때는 현재의 마음가짐을 알아차리는 것이나 자세가 바른가, 몸에 힘은 들어가 있지 않은가, 하는 것들을 살피는 것도 노력입니다. 수행을 할 때 무조건 참는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수행자는 무엇이나 참아야 하지만 이것보다 더 좋은 것은 대상을 분명하게 알아차려서 알아차림을 지속하는 것입니다. 알아차림을 지속하면 자연스럽게 대상을 수용하게 됩니다. 이것이 관용이고, 수행의 미덕입니다.
지금까지 선하다고 하는 것을 말하는 보시, 지계, 수행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이 세 가지는 선심인 관용, 자애, 지혜를 실천하기 위해서 필요한 실천 덕목입니다. 완전한 선심을 갖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상의 세 가지를 선행해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