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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교육과 교과서 수필작품
- 바른 수필 교육을 위한 교과서 수필의 교체 필요성에 대하여 -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I. 열며
먼저 17차 부산수필학회 정기 워크숍을 개최하기 위해 그 동안 수고해 주신 부산수필학회 이사 여러분과 바쁘신 가운데서도 이 자리에 참여하신 문학 애호가 여러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존경하는 부산수필학회 회원 여러분, 에세이문예 구독자 여러분, 부산여성문학회 회원 여러분, 신라대 국어교육과 학생, 신라대 논술지도사 과정 여러분! 바쁘신데 어려운 걸음 해주셨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이 학회 워크숍은 어떻게 하면 수필계에 산적한 문제를 같이 고민해 보고 그 해결책을 내어 놓을 수 있을까 하는 차원에서 마련되었습니다. 본 행사에 앞서 먼저, 부산여성수필문학회 회원 여러분께 이 자리를 빌려 뜨거운 감사를 드립니다. 연말 부산수필인의 밤 행사는 물론 제1회 한중 수필 교류를 위한 국제수필학 세미나, 그리고 정기 워크숍을 여는 데, 우리 학회에 물적 지원을 많이 해주셨습니다. 여러분들의 성원이 있었기에 오늘과 같은 이런 행사가 열일곱 번째로 개최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모쪼록 이 자리가 우리 청소년들이 보고 배우는 교과서, 교과서에 실린 수필의 올바른 담론을 이끌어 내는 자리로 만들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II. 펼치며
제도 교육에서 쓰는 교과서는 한 사회의 미래와 연계하여 볼 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매체다. 과거보다 교과서를 보는 관점이 달라졌다고 해도 그 무게가 결코 줄어든 것은 아니다. 조선 오백 년 역사를 이끌어 온 유학 경전의 절대성, 대한제국 시절 학부에서 만든 교과서를 비롯해 십여 년 전까지 교육 현장에서 절대 군림하던 교과서가 아니기는 하지만, 아직도 교과서는 교육 현장 수업에서 모든 교육 자료의 근본이 되고 있다. 곧 교과서를 바탕으로 수많은 교수 학습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교과서를 기준으로 보충 자료들이 만들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교과서에 문학 작품을 싣는 목적은 무엇인가? 문학은 1)언어를 공부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2) 문학의 맛을 느끼게 하는 예술 작품으로서 3) 삶을 돌아보게 하는 방편으로 교과서에 실릴 수가 있다. 그러나 올바른 수필문학 교육의 측면에서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언어, 예술, 삶 가운데 아무래도 상위에 놓여야 할 것은 예술작품이라는 것이다. 학생들에게 언어를 배우게 하고 예술을 감상시키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풍부한 삶을 누리도록 하기 위한 것이고, 언어와 예술은 결국 따지고 보면 삶을 풍요롭게 가꾸기 위한 수단이지만, 삶을 중요시하는 인식 속에서 수필 장르의 정체성이 제 모습을 잃어 간다는 차원에서 볼 때, 우리는 교과서 수필 작품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필자는 제대로 된 예술 작품의 감상을 통해서 바람직한 삶의 모습을 구축할 수 있다고 본다. 안타깝게도 우리 교과서에서는 예술도 삶도 상위의 자리에서 밀려나 변방에 머물러 있다. 수필에 대한 바른 정체성을 끌어 올 수 없는 문학 작품에 의한 문학 교육은 상상하기만 해도 삭막하기 그지없다.
‘수필문학’ 영역의 학습은 제대로 된 수필 작품을 찾아 읽고 토론하는 학습 활동을 중시하여 수필의 정체성을 올바르게 인식하고, 작품에 나타난 인간의 삶을 총체적으로 이해하고 문학적 상상력이 향상되도록 해야 한다. 수필문학 교육이 인간의 삶을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통로가 되며 상상력을 키워주는 무엇이 되어야 한다는 진술이다. 뿐만 아니라 수필문학의 표준을 제시해서 앞으로 청소년들이 수필문학을 제대로 이해하도록 하는 데 도움이 되어야 한다. 다른 장르는 모르지만 수필 장르의 경우 문제가 있다. 인간의 삶을 총체적으로 이해하거나 상상력을 키워주는 수단으로서의 문학 교육도 강조하고 ‘문학을 제대로 공부를 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문학 교육도 동시에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제 7차 교육과정이 제시하고 있는 국어과의 교육 목표는 ‘1) 언어와 문학 본질의 총체적인 이해를 통한 다양한 국어 활용 능력 기르기 2) 정확한 국어사용의 원리와 작용 양상을 익혀 다양한 국어 자료를 비판적으로 이해하고 자신의 사상과 정서를 창의적으로 표현하는 능력 기르기 3) 흥미를 가지고 언어 현상을 탐구하여 국어 발전과 국어 문화 창조에 이바지하려는 태도 기르기’로 명시가 되어 있다. 이 가운데서 ‘제대로 된 문학 교육’을 강조하는 문맥은 전연 감지되지 않는다.
이 목표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결국 교과서가 추구하는 궁극적 목적은 국어사용 능력을 길러 국어 발전과 국어 문화 창조에 이바지하는 사람을 길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교과서 문학 작품과 학습 내용에 문제점은 없을까? 위에서 살펴본 대로 국어과 교육과정이 표방하는 목표가 ‘국어사용 능력 신장’과 ‘삶을 총체적으로 이해하고 상상력을 향상’하도록 하는 것이지만, 수필의 정체성을 바르게 주입시키는 데도 기여해야 한다. 그것은 삶을 탐구하도록 하는 온전한 수필문학 작품이면서 학습자의 바른 문학 이해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적절한 ‘언어 자료’에 가까워야 한다는 의미다.
이렇게 교과서에 실린 수필들은 수필문학의 정체성을 이해하게 하는 표준 작품이 아니라 ‘삶의 체험과 따뜻한 인간의 시선’을 느끼게 하는 영역 속에서 언어 교육의 본보기로만 기능한다. 교과서 집필자의 시각으로 보자면 지금까지의 교과서에 실린 수필작품들은 새로운 깨달음을 주는 문학, 정말 참다운 재미와 인간다운 따스함을 느끼게 하는 문학이거나 한낱 언어 활용법을 지도하기 위한 보기 글에 지나지 않는다. 교과서의 수필작품은 작품 자체가 지니고 있는 문학성으로 독자에게 다가가는 것이 아니다. 교과서에 실린 문학작품이 안고 있는 문제점은 바로 이런 -문학을 문학답게 가르치는 일이 어렵게 되어 있다는- 점에 있다.
7차 교육과정의 교과서 문학작품을 살펴보면서도 대부분의 작품이 종래의 이데올로기 주입, 교훈주의의 한계를 벗지 못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 이번에 새로 개정된 7차 교과서를 훑어보면서 다시 느끼는 것은 아직도 우리의 교과서 수필문학 작품이 수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의해 선정되고 있다는 점이다. 주제적 양식으로써 형상과 인식의 양면을 복합적으로 구축하고 있는 작품들이 아니고, 시대적 요구, 사회문제나 청소년들의 현실이 배제된 교과서의 모습을 떠올리면 아무리 생각해도 고개가 갸웃거려지지 않을 수 없다.
문학 영역과 관련된 학년별 학습 내용과 학습 활동을 살펴보면 우리는 교과서가 청소년들의 삶과 시대정신과 관련된 공부를 하게 하거나, 문학작품에 대한 잘잘못을 비판하거나 바르게 세우는 활동이 아니라 단순한 문학 지식을 익히는 데 이바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알 수 있다. 문학 교육을 통해 아이들의 태도를 변화시키는 것이라고는 고작해야 새로운 작품을 찾아 읽으려는 태도를 길러주는 정도뿐이다. 교과서에 실리는 수필은 지금까지 우리 수필을 오도해 온 ‘수필은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다’라는 개념 정의를 정면으로 거부하는 본격수필이어야 한다. 그리하여 수필이 결코 쓰기 쉽지 않은 ‘누구나의 문학’이 아니라 ‘누군가의 문학’이라는 인식을 심어 주는 데 기여해야 할 것이다.
교과서는 그 어느 책보다 ‘베스트 셀러적’이다. 아무리 많이 읽히는 책이라 할지라도 이 교과서를 따라잡을 만한 독자를 확보하지는 못해왔다. 읽을 것이 변변하지 않은 시절에 견주어 요즘 교과서들이 그 매력을 잃어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도 교과서는 그 어떤 경쟁자와도 대적할 수 있을 만큼 많은 독자 수를 거느리고 있으며 그에 걸맞은 권력을 지니고 있다. 아직도 많은 수의 학생들이 교과서 속에 실려 있는 수필작품을 통해 처음 수필문학과 만난다. 처음 만날 뿐만 아니라 그 속에 실린 작품들을 통해 수필이란 이런 거구나 하는 느낌이나 생각들을 다지며 더 나아가서 그 작품들을 통해 형성된 문학관을 평생의 문학관으로 갈무리하기도 한다.
따라서 교과서를 살펴보는 일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 문학 교육이 놓여있는 현주소를 살피는 일이기도 할뿐더러 우리 수필문학의 미래를 점치는 일이기도 하다. 학생들이 처음 우리 글을 배울 때 만나는 수필문학 작품이 정말 훌륭한 모습을 하고 있다면 우리는 수필문학의 앞날을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교과서가 자기가 거느린 독자 수와 권력에 걸맞게 어떤 ‘권위’가 될 만한 내용을 지니고 있다면, 다른 엉터리 수필들과 ‘경쟁 상대’가 될 만한 작품들을 엄선해서 싣고 있다면, 학생들은 우리가 우려하지 않더라도 자연스레 바른 수필문학관을 세워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 힘이 결국 우리의 수필문학을 살찌우며 우리 학생들의 삶을 풍부하게 하는 바탕이 되어 줄 것임은 물론이다.
우리 수필문학가와 수필비평가들이 해야 할 일이 늘 산더미 같지만, 국어 교과서를 가운데 두고 깊은 고민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교과서의 힘이 위대한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밖에 없기에 우리는 다시 한 번 교과서의 수필작품들을 찬찬히 들여다보아야 한다. 들여다보기만 할 것이 아니라 진정한 수필문학을 청소년들에게 알려 주기 위해 우리는 교과서집필진과 싸워야 한다. 교육과정이 표방한 목표와 싸워야 하며 그곳에 실린 수필들과 작품을 토해 표출되고 있는 이론들과 싸워야 한다. 또한 방법을 구안하는 일에 열심이어야 하며 기존의 교과서에 실린 작품을 비판하고 문제점을 지적하는 실천과 경험들을 쌓아갈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런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 먼저 해야 할 것은 지금까지 설정된 문학 이론에 대한 반성이 뒤따라야 한다.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문학을 가르치는 까닭을 지금처럼 안이하게 학생들로 하여금 자신의 삶을 아름답게 가꾸도록 하는 데만 두어서는 안 된다. 문학 교육의 목적은 일차적으로 올바른 문학의 이해여야 한다. 올바른 문학 이해를 통해 언어 능력을 길러주거나 문학 작품에 대한 안목을 기르도록 하는 것은 삶을 가꾸기 위한 목적이다. 문학을 가르치려는 교사는 우선 이 점에 대한 목적의식을 확고하게 점검해둘 필요가 있다.
이제는 비판을 넘어 수필문학 교육을 왜 하는가? 어떤 수필을 가르칠 것인가? 어떤 방법으로 수필을 가르칠 것인가? 과연 제대로 된 수필이론을 가지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가를 고민할 시점이 되었다고 본다. 이런 고민은 물론 개별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질 수 없다. 수필문학 교육에 대한 고민을 하는 수필 전공 학자들끼리 모여 토론하고 대안 자료와 방법들을 구안해내는 가운데 그 길이 찾아질 것이라 본다. 교과서만을 가르치라는 주문은 어느새 교과서로 가르쳐도 좋다는 주문으로 바뀌었다. 앞으로 그 주문은 교과서에 나오는 문학 작품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라는 것이 아니라 교사 스스로 좋은 작품을 선택해 가르치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것에 대비하자는 뜻에서 우선 우리 학생들에게 올바른 수필문학의 의미를 전해 줄 작품에 대해 고민해 보자. 이 자리가 그런 고민을 위한 출발점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 간절하다. 부산에는 등단 수필가가 300여 명에 이른다. 그 중에서도 교과서에 작품이 실릴 수 있을 만큼 수준 높은 작품을 쓰는 작가는 20여 명 정도 된다. 제한된 시간과 원고 분량으로 인해 우선 교과서 작품 대용으로 쓸 수 있는 정성화, 강숙련, 송명화 등 세 분의 작품 세 편을 준비했다. 왜 이들 작품이 학생들에게 수필의 견본으로 가르쳐져야 하는지 오늘 이 자리에서 함께 살펴보았으면 한다.
가. 대상 작품
교과서 작품의 선정에서 첫 번째로 고려해야 될 것은 그 작품이 학생들이 배우기에 적절한가를 따져 보는 것이다. 효과적인 문학교육이 되기 위해서는 우선 대상 작품이 문학적으로 훌륭하고, 학생들의 수준에 맞고, 또 학생들의 흥미를 끌 만한 내용을 지닌 것이어야 한다. 특히 수필 작품의 경우는 지금까지 알려져 온 수필의 개념을 깨는 본격수필이 실려야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 교과서 수필의 최대 약점은 ‘이것이 수필이다’는 기준에 맞는 작품이 적을 뿐만 아니라 내용 역시 '있는 것', ‘있었던 것’만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데 있다. 교과서 개혁이 요구되는 최대의 이유는 교과서 작품들이 특정 계층의 정서와 사상을 반영하는 편협성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문학은 리얼리즘 계열의 '삶의 문제'를 이야기하는 작품보다는 모더니즘 계열의 그렇지 않은 작품에 편향되어 있다. 아주 편협한 자세가 아닐 수 없다. 교과서의 편집 방향이 보수 우파적 계층을 대변하는 데 너무 충실하다는 것이다. 자생적 근대가 시작된 조선 후기로부터 특히 제국주의 세력의 침탈이 전개된 20세기 이후의 문학 유산 가운데 상당량을 아예 접할 수 없거나, '금기'의 감옥 속에 가두어 둔 채 문학 교육을 받은 우리 사회 구성원들의 정서적 불균형을 해소해야 하는 것도 문학 교육의 한 과제라는 것을 뼈아프게 직시해야 할 것이다.
지금 우리의 관심은 '있어야 할 것'이다. 지식인으로서 작가의식이 부족한 반민중적인 피천득의 ‘인연’을 통해 아사코와의 만남을 말할 게 아니라 우리 사회에 속한 청소년들이 자신의 삶을 교과서를 통해서 만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것은 그들의 권리이자 교과서를 만드는 사람의 의무이고 교사의 의무이다. 우리 사회의 중요한 한 계층으로 자리 잡을 그들이 현재 자신의 삶을 사랑하고 미래의 모습을 충분히 그려볼 수 있는 내용들이 교과서에 들어와야 한다. 물론 그런 작품은 수필의 정체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교본적이고 전형적인 본격수필이어야 한다. 그런데 교과서 작품 집필자들은 이런 데에는 별 관심을 보이고 있지 않다. 그들의 관심은 '현재'를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고 있으며 현재를 딛고 '있어야 할' 모습을 고민하고 있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부산 수필가들의 작품 중에는 ‘지금 바로 여기’를 말하는 작품, 당위적 명제를 제시하는 본격 수필 작품이 많다. 세 작품을 예로 들어 살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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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금 쟁 이
정 성 화
경북 칠곡 출신
경북대 영어교육학과
<부산일보> 신춘문예 당선
에세이문학 동인
한 달 후에 보자며 남편은 내게 악수를 청해왔다. 육만 톤의 광탄선이 대어있는 부두 앞에서였다. 대사를 잊은 남녀 주연배우처럼 우리는 그냥 말없이 서로의 손을 잡았다.
그 때 멀리서 차 한 대가 우리를 보았는지 더 속력을 내어 달려오고 있었다. 나를 시외버스 주차장으로 데려다줄 차였다. 갑자기 마음이 급해졌다. 이럴 때는 남편의 얼굴을 한번이라도 더 봐두는 게 좋을지, 아니면 잡고 있는 남편 손의 감촉을 똑똑히 기억하는 게 더 나을지 몰라 나는 허둥대고 있었다.
나를 태운 차가 쏜살같이 내달리는 동안, 나는 뒷유리창으로 남편을 계속 바라보았다. 그는 바지주머니에 양손을 찌른 채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까만 근무복을 입은 그의 뒤편으로 푸른 바다가 점점 넓어지고 있었고, 이제 그는 물 위에 떠있는 소금쟁이처럼 작아 보였다.
소금쟁이는 ‘소금장수’라고도 불린다. 무거운 소금자루를 지고 일어서기 위해 다리를 양쪽으로 벌린 채 힘을 쓰는 소금장수의 모습과, 물에 빠지지 않기 위해 다리에 안간힘을 쓰고 있는 이것의 모습이 닮았다 하여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소금쟁이처럼 수면(水面)을 생활의 터전으로 삼고, 소금쟁이처럼 물 위에서 균형을 잡아야 하는 남편. 내 앞에서는 마치 수상 스키 선수처럼 한껏 폼을 잡지만, 바다 위에서는 한시도 긴장을 늦춘 적이 없었을 것이다. 눈앞의 바다뿐 아니라, 외로움과 쓸쓸함의 바다, 그리움과 안타까움의 바다 등, 그의 앞에는 언제나 건너야할 바다가 있었으므로.
남편은 헤어지면서 내 손을 꽉 잡았다. 아기를 낳아 처음으로 품에 안았을 때의 일이 불현듯 떠올랐다. 배냇저고리 소매 안으로 보이는 아기의 손을 조심스레 만져보는데, 아기가 눈을 감은 채 내 손가락을 잡았다. 의외로 강한 힘이었다. ‘엄마를 믿고 이 세상에 왔어요’라는 의미로 느껴져 나는 그 때 눈물이 핑 돌았다. 남편의 손도 아마 그런 말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아내 당신을 믿고 이제 저 바다로 달려 나가겠다는 말을.
오래 전의 일이다. 추적추적 늦가을비가 내리던 어느 날, 부산 외항(外港)에 정박중인 남편의 배에 가기 위해서 통선장에 갔을 때다.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 처마 밑에 러시아 선원으로 보이는 세 사람이 쭈그리고 앉은 채 컵라면을 먹고 있었다. 비에 젖은 몸을 덥혀보려는지 그들은 연신 뜨거운 국물을 들이켰다, 그저 자신의 그릇만을 들여다보면서. 그들은 비에 젖어 떨고 있었고, 나는 삶의 뒷모습이란 저토록 애절하고 허기진 것이던가 싶어 몸이 떨렸다. 마음속으로 ‘주여, 부디 저 국물이 천천히 식게 해 주옵소서’ 라는 기도를 올렸다. 내 남편도 이국 땅 어느 낯선 거리의 처마 밑에 저렇게 쭈그리고 앉아서 더운 국물을 들이켰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소금쟁이 남편을 만나러 갈 때가 되면, 나는 한 마리 물방개가 된다. 생긴 내 모습이 동글동글 올록볼록 한데다, 마음까지 한껏 부풀어 오르니 영락없는 물방개다. 찰밥을 한 통 해 담고, 떡은 쉬지 않게 얼려서 넣으며, 밤과 땅콩은 삶아서 넣고 고구마는 날 거로 몇 개 집어넣는다. 그리고 식혜까지 한 병 보따리에 찔러 넣으면 제법 큰 부피가 된다.
남편에게로 가는 길은 꽤 긴 시간이 걸린다. 그래도 보따리를 보면 힘이 난다. 내가 보따리를 들고 가지만, 때로는 보따리가 나를 달래며 먼 길을 함께 가기도 한다. 살아가는데 자식이 짐이라고 말할 때도 있지만, 때로는 자식 때문에 힘을 낸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늦은 밤 업무를 마치고 선실에 올라온 그가 출출할 것 같아 생고구마를 깎아 건네주었더니, 어머니가 다시 살아 돌아오신 것 같다고 했다. 그럼 다음에는 머리를 길러 아예 비녀까지 찌르고 오겠다고 했더니, 마음대로 하라며 남편이 소리 내어 웃었다. 어머니에 대한 얘기만 나오면 금세 얼굴이 환해지는 사람이다.
아내의 역할 중에는 남편에게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 주는 부분이 들어있지 않을까 싶다. 불교에서는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를 전생(前生)에서 친정엄마와 딸의 관계였다고 한다는데, 그렇다면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조금씩 닮아 가는 것은 아주 자연스런 일이라 하겠다. 닮았다는 것보다 닮아간다는 것에 나는 큰 의미를 둔다. 그것은 어떤 노력 없이 되는 일이 아니며, 투박한 내 자신을 조금씩 다듬어 가는 일이므로.
사랑의 반대말은 무관심이다. 소가 닭 보듯 데면데면한 부부 사이는 마치 안전핀이 낡은 폭탄처럼 위태로워 보인다. 나와 상대방 사이에 겹치는 부분이 많으면 많을수록 살기가 편하겠지만, 만일 나와 영 다른 사람이라면, ‘내게 없는 부분을 그가 갖고 있어 다행이구나. 이래서 우리는 서로의 짝이 되었구나.’ 라고 생각해야 마음이 편해진다. 인내란 가장 훌륭한 기도라고 하지 않는가.
잠든 남편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발목이 왠지 시려 보인다. 가족이라는 사슬, 밥벌이라는 사슬이 걸려있는 자리여서일까. 잘난 남편, 강한 남편의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관념도 그에겐 또 하나의 사슬이었으리라. 빗물에 젖는 소금쟁이의 지친 발목을 기억해야 하는 것처럼, 쇠사슬 철렁거리는 그의 발목을 이젠 두 손으로 감싸주어야 할 것 같다.
이런 저런 말로 남편의 기를 꺾는 것은 소금쟁이의 다리 하나를 부러뜨리는 일이다. 더 빨리 달려보라고 자꾸 다그치게 되면 멀쩡하던 다리도 힘없이 뚝 떨어져 나가게 된다. 다리를 잃은 소금쟁이는 달리지도 걷지도 못한 채 흔들리는 물살에 제 몸을 맡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혼탁한 세상 속으로 어쩔 수 없이 우리는 뛰어들지만, 더러운 웅덩이를 보게 되면 발을 담그지 않으려고 조심하며, 그리고 가끔은 더러움을 피해 먼 길을 돌아가기도 한다. 그러나 자신의 것이면서도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다리 때문에 절망할 때는 또 얼마나 많은가. 그러고 보면 우리 모두가 이 세상을 정처 없이 떠도는 소금쟁이가 아닌가 싶다.
동요 ‘달 마중’에 나오는 소금쟁이는 행복하다. 비단 물결이 남실남실 어깨춤을 추고 머리 감은 수양버들이 거문고를 타는 밤에, 소금쟁이는 달빛을 받으며 냇가에서 즐겁게 맴을 돈다고 했다. 무엇이 그토록 소금쟁이를 행복하게 할까. 그것이 바로 내가 알아내어야 할 소금쟁이의 비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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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소 리
강 숙 련
경남 마산 출신
부산예대 문예창작과
<문화일보> 신춘문예
동백수필 동인
누가 시(詩)를 언어로 그린 그림이라 했다. 밀레의 ‘만종’ 앞에 서면 ‘소리로 그린 감동’이란 표현으로 그 말을 써 보고 싶어진다. 문화의 차이는 감성의 차이도 만든다는데, 종소리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비슷한 공감대가 형성되는 것 같다.
때로는 격렬하게, 때로는 감미롭게 다가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 중에 종소리만한 것이 있을까. 형체도 없는 것이, 잡아 가두려야 가둘 수도 없는 것이 마치 청동의 꽃에서 나는 향기라고나 할까. 교회나 사찰의 새벽종소리를 들으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통도사 절 밑에 있는 어느 호텔로비에서 제야의 종소리를 들었다. 경영주인 지인(知人)이 술잔을 가볍게 부딪치며 덕담을 건넸다.
“올해는 좋은 글 많이 쓰십시오. 수필이란 종소리 같은 글이겠지요?”
어쩜, 저런 말씀도 다 하실까! 그래요, 수필이란 종소리 같은 글일 거예요. 문득 내 가슴속에도 수필이란 종루(鐘樓)하나가 서 있음을 깨닫고 뭉클한 감동이 인다.
내가 쓰는 글-. 언어의 재료로 어설픈 종 하나 만들어 달고 어둠 속에서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본다. 마음의 빗장을 열어 놓고 가만가만 소리를 따라 나서 보기도 한다.
소리는 저만큼 비켜나도 가슴 한 귀퉁이에 잔잔한 파장이 남아 있어야 제대로 된 종이다. 아무리 커다란 함성이라도 그의 몸속에 담기면 일단 숨을 죽이고 더 깊이, 더 맑게 가라앉아야 한다. 터져 나오는 울분을 삭이지 못하고 각혈하듯 토해 내는 생소리라면 종이 아니고 다만 쇳덩어리의 마찰음일 뿐이다.
수필 또한 마찬가지다. 치는 대로 울리는 종이 아니라 온 몸으로 소리를 가두었다가 육신을 덩덩 울려서 사람의 심금을 흔드는 종이 수필일 것이다. 오관을 통해서 느낀 감동을 지그시 가두었다가 언어의 떨판에 얹어 가만가만 되돌려 내놓을 때 제대로 된 글이 될 것이다.
어찌 수필만 그럴까. 사람들의 삶 또한 그와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해 본다. 모두가 저마다의 가슴속에 제각각의 종을 매달고 사는 것이리라. 예술가는 예술가대로, 교육자는 교육자대로, 사업가는 사업가대로 쉼 없이 자신의 종을 지키고 사는 종지기가 아닐는지.
연 전에 경주에서 에밀레종을 보았다. 옛 서라벌의 태평성대를 지키던 성덕대왕의 신종이다. 더 깊고 더 맑은 소리를 얻기 위해, 더욱 은은한 맥놀이의 여운을 얻기 위해 어린애기를 바쳤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었다. 34년간의 주조기간을 보내고도 소리다운 소리를 얻지 못하다가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을 제물로 삼고야 건져내었다는 종소리. 새벽마다 울려오는 그 애련한 소리를 듣고 서라벌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신라인들이 에밀레종에 쏟은 성심(誠心)이 근접하기 어려운 불가사의로 느껴질 뿐이다.
나는 가끔 상상 속에서 종을 친다. 소리의 끝을 따라 끝없이 가다보면 어느새 미궁 속을 헤매고 있는 나를 보게 된다. 얼마나 더 공을 들여야 제대로 된 소리를 갖게 될까. 내가 쓰는 글이야말로 얼마나 더 성심을 쏟아야 할 것인가. 목숨보다 더 귀한 자식을 바쳐서 건져낸 여음이라는데, 나는 무엇을 얼마나 더 버릴 수 있을까.
어릴 적, 교회당의 종탑 밑에서 예배시간을 알리는 타종을 지켜 본 적이 있다. 뾰족한 탑을 세우고 그 끝에 매달린 쇠종을 긴 줄에 연결하여 수없이 안벽을 때리는 서양종이었다. 거리낌 없이 쇠몽둥이추에 제 몸을 부딪치는 종을 올려 보다가 그 큰 소리에 얼이 빠져 버리곤 했다.
매달아 놓고 때려서 소리를 내기는 절간의 범종도 마찬가지다. 청동기 문화가 발달했던 우리나라의 전통악기인 편종도 쳐서 소리를 내기는 마찬가지다. 종이란 무릇 자신을 고통 속에 버림으로 은혜 같은 소리를 내는 악기인가 보다.
종을 치듯 수필을 쓰고 싶다. 어설픈 종루(鐘樓)일망정 정성을 다해 소리를 지키는 종지기가 되고 싶다. 아니 차라리 부딪쳐 고통 받는 종이면 어떨까. 깨어지고 또 깨어지는 순간들을 거치고 나면 나에게도 향기 같은 종소리가 여울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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孤島
송 명 화
경남 남해 출신
부산교대 대학원 국어교육과
<전남일보>, <교육신문> 신춘문예
계간 에세이문예 편집주간
다스림 동인
방학이 다가오면 교사들은 생활지도에 더욱 관심을 쏟는다. 올해는 예년에 없던 항목이 하나 더 늘었다. 아이들에게 엘리베이터를 혼자 타지 말라고 당부한 것이다. 유괴나 성폭행이 걱정되어 부모들이나 교사들은 아이들이 눈앞에 보이지 않는 시간 내내 좌불 안석이다. 간곡하게 지도를 하고 하교시켰다. 텅 빈 교실에 혼자 앉아 곰곰이 생각하니 씁쓸하기 이를 데 없다.
우리 조상들은 집안 어른들뿐만 아니라 동네 어른들의 가르침에 힘입어 행동거지를 바로 잡았다. 어른이라면 누구나 자기 아이, 남의 아이 할 것 없이 가르치고 관심을 가지고 돌보아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이 대대로 내려온 우리 민족의 사고방식이었다. 잘못된 행동을 하면 동네 어른들이 나서서 치죄하기도 하고, 좋은 일이 있으면 동네 잔치를 벌여 함께 기뻐하였으며, 재주 있는 아이는 내 자식과 함께 가르치기도 하였다. 단지 아무개의 아이가 아니라 우리 집안, 우리 동네, 우리 고을의 아이였던 것이다. 오늘 조심하라고 말한 대상은 과연 누구인가. 한 아파트에 사는 이들조차 경계하라고 가르친 셈이다.
만학의 한 대학생이 아무도 모르게 죽었다. 부모를 떠나 자취를 하면서 학비를 벌기 위해 노동을 하다가 허리를 다쳐 몸져눕고 말았다. 절대 절명의 위기 앞에서 옆방 학우들의 문을 두드리는 것이 그렇게 힘들었을까. 허리에 복대를 하고 영양실조의 상태로 유명을 달리 하였다. 한 줌 흙으로 돌아가는 수순을 자연스레 밟지 못하고 오 개월 동안이나 어두운 방안에 버려진 이승의 육신이 안타까워 그의 영혼은 그 방을 떠나지 못하였을 것이다. 얼굴도 모르는 그의 슬픈 최후가 눈에 선하다. 그가 찬 방바닥에 쓰러져 마지막 숨을 몰아쉰다. 점점 힘이 빠지고 고향에 계신 부모님과 형제들, 친구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이 파노라마처럼 떠오르는데 그 이름들을 부를 힘이 없다. 주위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을 삶의 군더더기로 여겼던 탓에 이 시간에 자신을 찾아줄 이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한스러워 한 줄기 눈물이 바닥을 적신다. 그리고 눈을 감는다.
현대를 소외의 시대라 한다. 시간을 쪼개 쉴 새 없이 움직여야만 잘 사는 것이라는 생각이 팽배해 있어 다른 이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 지 무슨 생각을 하는 지 돌아볼 여유를 갖지 못한다. 현대라는 시시때때로 생경한 시간 속에서 나와 다른 수많은 다양함을 숨쉬며 현기증을 느낀다. 지하철을 타고서 같은 시간에 같이 흔들리는 사람들의 표정을 살펴본 적이 있는가. 동행이 아니라면 사소한 눈인사나 인사말도 삼간다. 아무런 말을 눈에 담지 않고 타인을 쳐다보는 것이 예법처럼 굳었다. 화려한 무대에 서지만 오로지 옷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얼굴 표정을 지워야 하는 패션모델들처럼 사람들은 타인을 향한 자신의 표정을 모두 죽였다. 차디찬 이미지를 밖으로 내세우고 안으로는 얼음장처럼 쪼개진 날을 세우고 세련되게 보다 세련되게 우리는 몸을 부대끼면서도 타인을 그냥 지나친다.
공익광고의 한 장면이다. 한 소년이 책가방을 메고 집을 들어선다. 엄마의 반김에는 아랑곳없이 무표정하게 방으로 들어가 컴퓨터를 두드린다. 갑자기 화면에 엄마가 아들에게 보낸 메시지가 뜬다. 놀라는 아들에게 하는 엄마의 대사가 의미심장하다. ‘우리 아들하고 대화하려고 엄마가 배웠지.’ 엄마의 자식을 향한 사랑이 대단하다거나, 직접 화를 내지 않고 엄마가 지혜롭게 대처하였다거나 현대의 엄마는 저렇게 하여야 한다거나 어른이 먼저 마음을 여는 것이 중요하다는 등의 생각보다는 가슴이 괜히 헛헛하였다. 내게도 아들이 있다. 녀석도 컴퓨터를 하고 있는 동안에는 내가 외출했다가 들어와도 등을 보이고 있는 것이 예사다. 아직 어리지만 얘도 광고 속의 아이처럼 자라면 내 눈앞을 무표정하게 그저 스쳐 지나치지 않을까. 사람들은 텔레비전을 바보상자라고 부르지만 어떤 수필가는 컴퓨터를 미친 상자로 부르고 싶다고 하였다. 컴퓨터가 가진 순기능보다는 역기능이 더욱 활개를 치고, 직접 경험하고 부딪히기보다는 가상공간에 숨어 자신의 자리를 꾸미는 요즘 세태를 그는 걱정하였다.
그 대학생의 부모가 집주인과 함께 세상과 단절된 그 방문을 열었을 때의 놀라움을 생각한다. 오랫동안 소식이 끊긴 아들을 찾아 온 어머니의 놀라움은 과연 어떠하였을까. 가출을 했던 것도 아닌데 부모와 미혼의 자식간에 그토록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지 않았다는 것이 너무나도 의아스럽다면 내가 심한 것일까. 집주인은 돈을 받고 단지 방을 빌려주었을 따름이었다. 그 대학생과 맺은 새로운 인연은 그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우리도 어느 날 그 대학생처럼, 카프카가 우리에게 예언했던 “변신”의 주인공이 되어 있을 지 모른다. 마음 속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 몸부림쳐도 자신의 말은 남들이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소리나 신음으로만 존재한다. 남들은 나의 말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결국 그 대학생도 자신의 말을 안으로 삼키며 절망이라는 세계 속에 유폐되어 주인공 그레고르처럼 쓸쓸히 떠나지 않았는가.
차가운 컴퓨터 앞에 앉아 가상의 세계에서 미지의 대상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익숙해진 사람들은 남과 같이 있는 순간을 못 견뎌한다. 입을 다물고 그 시간을 견디기 위해 고군 분투하다가 혼자만의 성으로 돌아오면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가상세계 탐험에 빠져든다. 극단적인 고독 속에 있으면서도 고독을 느끼지 못한다는데 그 심각함이 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명제는 그 해석을 이제 수정해야할 시점에 섰다.
아침저녁으로 엘리베이터를 탄다. 남과 공유해야하는 그 공간이 너무 좁아서 벽 쪽으로 바짝 붙어 서서 변화하는 층 표시 숫자만 올려보고 서 있다. 마음 속에 갈등이 인다. ‘우리 라인에 사는 분이신 것 같은데 인사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이 사람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내리면서 기어드는 소리로 안녕히 가시라고 인사하였다. 엘리베이터 안에 남은 이가 뜻밖이라는 듯 인사를 받는다.
이사를 하였다. 두 달이 지났는데도 대문을 마주한 앞집 아저씨를 대면하지 못하였다. 서로의 바쁜 생활을 배려하는 마음도 조금 있었고, 남의 생활을 들여다보기 싫은 마음도 있었으며, 우리의 생활을 방해받기 싫은 마음도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쑥스럽고 용기가 없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다. 차 한잔, 맥주 한 잔 같이 하며 이야기를 트는 것이 예전에는 이렇게 힘들지 않았다. 열 평 짜리 작은 복도식 아파트에 살 때, 우리 층 사람들은 자주 모여 음식도 나누고 누군가 아프면 서로 반찬도 마련해주고 매일 같이 안부를 확인하며 한 식구들처럼 정답게 지냈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사회적인 성취에 마음 뺏기면서, 먼저 손 내미는 것을 잊어버리고 살았다. 외로운 이웃에 대한 뉴스를 자주 보지만 정작 내가 이 세상에서 고도로 변해가고 있다는 것은 깨닫지 못하고 있다. 모두들 섬으로 변해버리면 생을 마감하는 순간이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으랴. 사람은 혼자서 왔다 혼자서 간다고 한다. 그러나 인간이 비록 태어날 때에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 세상에 던져졌다하더라도 갈 때는 누군가의 배웅을 받으며 떠나야 하지 않을까.
나. 작품 해설
교과서에 실릴 수필이라면, 고급 내지는 본격수필이어야 한다. 이런 차원에서 교과서 수필은 미학성과 작품성을 갖추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바른 글이어야 한다. “바로 이거다” 하고 결정하는 데 갈등이 없어야 한다. 일반 문인과는 다른 신선한 느낌, 자신만의 새로운 문장력, 소재의 참신함, 독자의 시선을 빨아들이는 흡인력 있는 문체를 구사해야 한다. 작품의 완성도가 높아야 하며 평범한 소재라도 신선한 감각이 번득여야 한다. 지성과 감성이 동시에 빛나는 글이어야 하고, 단 한 줄의 달고 차디찬 샘물 같은 글로서 ‘이것이 수필이다’는 탄성을 자아내게 해야 한다. 교과서 수필은 어떤 경우든 이 시점의 한계 아래 놓인다. 예술이라는 측면에서 미학성과 문학이라는 측면에서 작품성을, 글이라는 측면에서 문법성을 확보하지 않으면 그 수필은 본격수필로서의 가치를 잃게 된다.
교과서 수필은 문학 본질의 차원에서 형상과 인식의 복합체인가를 고려해야 하며, 수필문학의 특성상 주제가 간접화되어 있는가, 미적 구조와 인식구조의 차원에서 쾌락성과 교훈성을 주고 있는가, 지성, 정서, 상상의 측면이 고루 충족되고 있는가, 언어예술이라는 차원에서 참신성, 함축성, 형상성, 탄력성의 네 가지 속성을 작품이 가지고 있는가, 작품의 가치 평가에서 수필이 가지는 여섯 가지 구성 성분, 구성과 형식적 측면 등 일곱 분야 차원에서 다양하게 그 가치가 평가받아야 한다. 그리고 1) 삶에 대한 통찰력, 2) 사물을 보는 안목, 3) 투명하면서도 깊은 울림, 4) 풍부하면서도 절제된 감성, 5) 평이하지만 신선한 문체, 6) 개성 있는 시각, 7) 미의식 등이 녹아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격조 있는 사유가 있어야 한다.
위의 측면에서 이 세 작품의 가치를 따져 보면 대체적으로 만족할만한 수준이다. 정성화의 <소금쟁이>는 형상과 인식이 절묘하게 조화된 작품이다. 선원인 남편과의 이별하는 장면에서 사용된 ‘소금쟁이’는 플로베르가 말한 그야말로 일물일어의 적절한 비유다. “끼만 근무복을 입은 그의 뒤편으로 푸른 바다가 점점 넓어지고 있었고, 이제 그는 물 위에 떠있는 소금쟁이처럼 작아보였다”는 진술을 통해서 정성화의 뛰어난 언어적 감각을 엿볼 수 있다. ‘소금쟁이’의 상징을 다의적 심상으로 변주해가면서 감동의 진폭을 확장해 나가는 솜씨에 긴장감을 갖고 글을 읽다 보면, 우리는 어느새 고급수필의 맛을 진하게 느끼게 된다. 그녀의 모든 수필이 대체적으로 합격점을 능가하는 문학성을 보이고 있다면, 이 수필은 최고의 정점에 놓일 수 있는 수작이다. 관념과 추상으로 여울진 부부간의 정과 그리움을 형상미학으로 구축하고 있는 이 작품은 그가 신선한 언어 감각으로 그려내는 회화성으로 인해 휴머니티가 소금의 결정처럼 문맥의 곳곳에 반짝인다. 부부간의 정이 무엇인지, 사랑이 어떠해야 하는지, 기다림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오늘날 가장의 역할과 아내의 자리에 대해 성찰해 볼 수 있는 여지를 준다는 측면에서 인식구조로서의 문학적 가치를, 문장의 세련된 활용과 신선한 감각의 표현은 미적 구조로서의 쾌락성을 잘 살려내었다 하겠다.
강숙련의 <종소리>는 교과서에 실려 있는 피천득의 <수필>을 대체할 작품으로 손색이 없다. 수필이 어떠한 특성의 글이라는 것을 지식으로 머리에 전달하지 않고 정서적 감동으로 가슴에 전달할 수 있다면, 이는 학습 효과는 물론이거니와 문학적 울림까지도 전달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교과서 수필로 매우 적합하다 할 것이다. 전달력이 강한 문학적 기법으로 수필의 본질과 특성에 대해 수필로 쓴 수필론인 피천득의 <수필>은 잘 쓴 글이지만 바른 글은 아니다. 문장론적으로 교육적 가치가 떨어질 뿐만 아니라 구성이 산만하고 문단이 예시와 일반화로 축조되지 않아 학생들이 수필의 특성을 하나로 이미지화해서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준다는 측면에서 한계를 지니고 있는 작품이 바로 피천득의 <수필>이다. 그러나 강숙련의 <종소리>는 피천득의 <수필>과는 대조적으로 수필의 특성을 ‘종소리’라는 특수한 제재로 구체화해서, 그 유사성을 문학적 표현으로 의미화 하였기 때문에 주제적 양식이라는 수필의 갈래에 절묘하게 부합된다.
이 수필이 교과서에 실림으로써 얻게 되는 장점은 무엇보다도 본격수필의 전개적 기법을 전달할 수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글감과 제재를 씨줄 날줄처럼 교차시키면서 전개함으로써 바슐라르가 말한 이미지의 구축을 통해 독자들로 하여금 문학이 주는 진정한 감동에 이르게 할 수 있다. 좋은 종소리의 특성을 묘사함으로써 좋은 수필의 지향점을 선명하게 전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그녀의 탁월한 문학적 능력을 보여준다. 이런 작품을 감상하다보면, 문학 작품의 감상은 의미를 재구성하는 작업이라는 데에 수월하게 귀착된다. 수필의 본질과 특성을 독특한 시선으로 자기화해낸 이 작품이 교과서에 실린다면, 수필을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 아니라는 걸 학생들이 잘 이해하지 않을까 싶다. 피천득의 <수필>이 주제를 구축하는 종속제재를 다양화해서 수필의 특성을 오히려 어렵게 했다면, 강숙련의 <종소리>는 수필이 어떤 본성을 가지고 있는지를 수필의 종차를 잘 함축하고 있는 ‘종소리’를 통해 선명하게 나타내고 있다는 점에서 피천득의 <수필>보다 한 수 위의 작품이라고 하겠다.
송명화는 기본기가 가장 튼튼한 작가 중의 한 사람이다. 그녀의 수필 <고도>는 문장론적 측면에서나 문법성 측면에서 완벽성을 자랑하며, 수필 쓰기의 출발점이 되는 인식의 차원에서도 모범이 되는 작품이다. 무엇보다도 이 작품이 교과서 수필로 적합한 이유는 수필 <고도>에는 ‘있어야 할’ 당위적 가치가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발상의 측면에서 작가가 보이는 비범성은 수필을 전략적 글쓰기의 본보기로 삼는 데 충분하다고 하겠다. 그런데 그 제재의 발견이라는 것이 주제의 함축과 상징을 도와줌으로써, 이 작품을 본격수필로 승화시키고 있다는 데서 가치를 더한다. 미적 경로를 거쳐 진술되는 한 마디 한 마디 문장은 깔끔하게 절제되어 긴장감을 주는 것도 송명화 수필의 장점이다. 사실을 눈에 보이는 그대로 그려낸다면 자기만의 발견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국어교육을 전공한 교사이기 때문에 누구나 결속성을 갖춘 수필을 쓸 수 있는 건 아니다. 신춘문예 출신의 글이라고 해서 글이 반듯하게 체계화되지는 않는다. 바른 글에 대한 따가운 인식이 작품보다 더 앞서 있기 때문에 그녀의 수필은 하나같이 바르다.
송명화는 단 한 줄짜리 대학생이 굶어 죽은 사건에 관한 신문기사를 놓치지 않음으로써, 주제를 내면화하고 있는 ‘고도’라는 제재를 얻었다. 몸은 움직일 수 없는데, 아무에게도 요청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다가 눈물만 흘리는 대학생을 상상하다가 작가는 눈물이 흥건한 방 안을 바다로, 죽어버린 시신은 움직일 수 없는 섬으로 의미화하여, 비정한 현대사회의 모순을 묘파한 것이다. 주제의식을 구체화하기 위해 도입된 삽화의 하나인 광고 장면과 외출해서 돌아오니 등을 보이는 아들의 모습을 그려낸 것은 전략적 글쓰기의 필요성을 새삼 느끼게 한다. 물론 수필이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 아니라고 가르치는 데 적용될 수 있는 작품이다. 이웃과 단절된 현대 사회의 모순과 비정함을 잘 형상화한 작품으로 청소년들이 자신의 모습을 작품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도 적절한 텍스트가 아닐 수 없다.
본격수필이 주제의 내적 연출을 그 이상을 삼는다면, 이들 작품은 본격수필의 창작 과정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멋진 제재의 형상화로 주제의식을 구축했다는 데서 돋보이는 작품들이다. 이 작품들은 인식을 형상을 껴안는 지성의 정서화가 완벽하게 구축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사회를 비추는 거울과 사회를 이끄는 수레, 그리고 어둠을 밝히는 횃불로서의 문학적 이상을 견지하고 있기에 교과서 수필로 손색이 없다고 하겠다. 거기다고 두 작품은 리얼리스틱한 우리 시대의 삶의 그늘과 온기를 동시에 조명하고 있고, 그 속에는 독자 자신인 청소년들의 자화상과 부모들의 사랑과 이별이 물결치고 있기 때문에 청소년의 정서를 살찌우는 데도 기여할 것으로 보기 때문에 교과서 수필로 적합하다고 하겠다. 늘 보는 것일지라도 애정을 갖고 보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세상의 만물은 달리 보이기 마련이다. 이들 세 작가는 이러한 제재에 대한 애정 부여가 스파크를 일으키게 되면서 남다른 작품을 창출하는 데 성공했다고 하겠다.
III. 나오며
나는 늘 좋은 수필을 교과서 작품목록에 올릴 수 없음을 아쉬워한다. 그래도 괜찮은 작품이라고 해서 실린 교과서 수필, 온 국민들이 수필의 아버지라고 추앙하는 원로 수필가를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비판해야 하는 내 자신이 안타깝다. 교과서 수필이 수필작품을 처음 접하는 청소년들에게 좋은 문학을 만나게 하는 디딤돌이나 징검다리 노릇을 해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를 가로막는 철조망이나 함정 노릇을 단단히 해 왔기 때문이다. 때문에 나는 이 자리에 서기까지 교과서에 실린 수필문학 작품에 대한 문제 제기를 해 왔고, 나아가 그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 왔다. 지금도 수필가 등단 과정에서 공부하고 있는 학생들에게 또는 대학의 국문학도들에게 문학 강의를 통해 교과서에 실린 문학 작품에 대한 비판을 서슴지 않고 있다. 교과서에 실린 문학 작품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이 비판을 바탕으로 오늘 이 자리에서 발표를 하게 되었다. 무비판적으로 수필을 배워온 사람들에게는 상당한 충격이 되었으리라 본다.
이상과 같은 우리의 노력이 교과서에 실리는 문학 작품 선정 기준에 일정한 영향을 끼치기를 기대한다. 교과서 집필과 편찬에 관계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우리 학회에서 선정한 작품 가운데 좋은 작품이 많다는 것에 동의하리라 믿는다. 따라서 우리 학회는 앞으로 교과서에 실려야 할 수필들을 계속 찾아서 발표할 것이고, 자료집을 만들어 관계자들에게 발송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학회가 선정한 좋은 수필문학 작품들이 교과서에 실리는 경우는 아주 드물 것임을 잘 안다. 교과서 작품 선정이 주로 서울대나 교원대 출신 국어학자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고, 실제로 작품 발견 작업은 대학원 과정의 학생들에게 맡겨지기 때문이다. 교과서 문학 작품에 대한 비판은 여기저기서 하고 있다. 나는 우리 학회가 권장하는 작품이 모든 다른 작품에 우선해서 교과서에 실려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수백만 청소년들이 배우는 교재인 교과서에 실리는 문학 작품을 선정할 때는 최소한 수필이 뭔지 제대로 공부하고 연구한 사람의 감수나 의견 수렴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가능하면 수필가로 정식 등단한 작가들의 작품을 찾아보라고 말하고 싶다. 이 정도 관심은 갖고 열린 마음으로 수필 작품을 선정해야 한다고 하지 않겠는가. 그래야 진정으로 우리 청소년들한테 좋은 수필문학을 읽을 수 있는 기회를 줄 수 있는 열린 교과서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오늘 여러분들은 이 자료에 실린 주요 작품을 보며 교과서 수필이 어떻게 바뀌어야 되는지 그 까닭을 자세히 알았으리라 믿는다. 이 자리가 이렇게 ‘닫힌 교과서’에 대한 비판을 넘어서 ‘열린 교과서’를 만들 수 있는 길을 제시하는 장이길 바란다. 이후 수필학회의 워크숍은 비판의 벽을 넘어 새로운 대안의 길을 찾는 데 주력할 것이다. 부산수필학회 워크숍이 청소년들이 바른 수필관을 정립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하는 데 디딤돌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수필인 여러분들의 많은 협조를 당부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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