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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후의 두 번째 연설 마지막 부분(34:31-37)
하나님께서는 심판주십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의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잠자는 자들처럼 죄에 빠져 세월을 낭비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세속에 물들어 살아간다면 부끄러움을 당할 것입니다. 구원의 은혜를 입은 성도로서 하나님의 의를 따라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31○그대가 하나님께 아뢰기를 내가 죄를 지었사오니 다시는 범죄하지 아니하겠나이다 32내가 깨닫지 못하는 것을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악을 행하였으나 다시는 아니하겠나이다 하였는가 33하나님께서 그대가 거절한다고 하여 그대의 뜻대로 속전을 치르시겠느냐 그러면 그대가 스스로 택할 것이요 내가 할 것이 아니니 그대는 아는 대로 말하라 34슬기로운 자와 내 말을 듣는 지혜 있는 사람은 반드시 내게 말하기를 35욥이 무식하게 말하니 그의 말이 지혜롭지 못하도다 하리라 36나는 욥이 끝까지 시험 받기를 원하노니 이는 그 대답이 악인과 같음이라 37그가 그의 죄에 반역을 더하며 우리와 어울려 손뼉을 치며 하나님을 거역하는 말을 많이 하는구나(31-37)
이 부분은 엘리후의 두 번째 연설 마지막 부분으로 엘리후는 욥이 범죄하지 않았다는 말에 반박하며 다른 사람의 말을 인용하여 욥이 지혜가 없는 무식한 자라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1) 욥의 말과 엘리후의 대답(34:31-33)
엘리후 욥이 하나님께 범죄했다는 고백을 해야 하며,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고 맹세했는지를 묻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질문이 아니라 욥이 이렇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며 하나님께 용서를 구해야 하는데 그것을 하지 않은 것에 대한 비난입니다. 32절에서 “깨닫지 못한 것을 내게 가르치소서”라는 구절은 지혜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고 그에게 가르침을 받아 지혜로워져야 한다는 의미이며, 엘리후는 욥의 현재 상태가 지혜가 없는 상태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33절(“하나님께서 그대가 거절한다고 하여 그대의 뜻대로 속전을 치르시겠느냐 그러면 그대가 스스로 택할 것이요 내가 할 것이 아니니 그대는 아는 대로 말하라”)은 죄를 심판하고 그에 맞는 처벌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욥이 자신은 죄가 없고 자신에게 내려진 재앙은 부당하다고 말한 들 욥의 마음대로 그 재앙이 처리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엘리후는 자신의 말을 받아들이고 하나님께 죄 용서를 구할지, 아니면 계속해서 자신은 무죄하다고 주장할지 욥이 결정할 문제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욥이 어리석은 선택을 한 결과로 지금 고난을 받고 있으며, 전적으로 욥에게 책임이 있음을 분명히 하는 말입니다.
(2) 다른 사람들의 질문(34:34-35)
엘리후는 자신의 말의 객관성을 더하기 위해 슬기로운 자들과 자신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들의 말을 인용합니다. 자신의 말을 듣는 사람을 지혜로운 자라고 표현함으로 자신이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고, 또한 이들의 말이 옳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들이 말하기를 욥이 무식하며 지혜롭지 못하다고 말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엘리후는 이들의 입을 통해서 무죄를 주장하는 욥이 무식하며 지혜가 없다고 대놓고 비판을 한 것입니다.
(3) 엘리후의 대답(34:36-37)
두 번째 연설 결론으로 엘리후 욥이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무식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시험을 받기 원한다고 말합니다. 현재 받은 벌로 충분하지 않으며, 이것은 욥이 아직 하나님께 죄를 자복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37절에서 욥이 죄에다 반역을 더하고 있다고 말하는데, 그는 지금 욥이 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을 반역으로까지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두 번째 연설은 욥이 무식해서 죄가 무엇인지도 모르기 때문에 계속해서 그가 재앙을 받게 되기를 기원하는 말로 끝을 내고 있다. 참 잔인한 결론입니다. 비록 자신의 생각에 욥이 어리석고 고집스러워 지혜자의 조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해서 심각한 재앙으로 인해 고통 받고 있는 욥에게 고통이 계속되기를 원한다는 기원을 하는 것이 과연 지혜로운 자의 행동인지 생각해볼 일입니다.
엘리후의 세 번째 연설(35:1-16)
고난 당하고 있는 지체를 위로해주고 싶다면 어떤 말을 해 줄지 고민해 보는 것도 좋지만, 어떤 말을 피할지 심사숙고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우리 모두 사려 깊고 지혜로운 친구가 되어 주님의 영광을 가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인생을 아끼시는 하나님께서 계시고, 사려 깊은 말로 힘을 북돋워 주는 친구들이 있다면, 사람이 어떤 고난에 빠지든지 회복하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입니다.
1엘리후가 말을 이어 이르되 2그대는 이것을 합당하게 여기느냐 그대는 그대의 의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말이냐 3그대는 그것이 내게 무슨 소용이 있으며 범죄하지 않는 것이 내게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고 묻지마는 4내가 그대와 및 그대와 함께 있는 그대의 친구들에게 대답하리라 5그대는 하늘을 우러러보라 그대보다 높이 뜬 구름을 바라보라 6그대가 범죄한들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겠으며 그대의 악행이 가득한들 하나님께 무슨 상관이 있겠으며 7그대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가 그대의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 8그대의 악은 그대와 같은 사람에게나 있는 것이요 그대의 공의는 어떤 인생에게도 있느니라 9○사람은 학대가 많으므로 부르짖으며 군주들의 힘에 눌려 소리치나 10나를 지으신 하나님은 어디 계시냐고 하며 밤에 노래를 주시는 자가 어디 계시냐고 말하는 자가 없구나 11땅의 짐승들보다도 우리를 더욱 가르치시고 하늘의 새들보다도 우리를 더욱 지혜롭게 하시는 이가 어디 계시냐고 말하는 이도 없구나 12그들이 악인의 교만으로 말미암아 거기에서 부르짖으나 대답하는 자가 없음은 13헛된 것은 하나님이 결코 듣지 아니하시며 전능자가 돌아보지 아니하심이라 14하물며 말하기를 하나님은 뵈올 수 없고 일의 판단하심은 그 앞에 있으니 나는 그를 기다릴 뿐이라 말하는 그대일까보냐 15그러나 지금은 그가 진노하심으로 벌을 주지 아니하셨고 악행을 끝까지 살피지 아니하셨으므로 16욥이 헛되이 입을 열어 지식 없는 말을 많이 하는구나(1-16)
이 부분은 엘리후의 세 번째 연설로 욥이 제기한 문제들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고 있다. 욥의 말의 인용과엘리후의 반박이라는 형식으로 연설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1) 욥의 말을 인용(35:1-3)
엘리후는 욥의 주장에 대해서 두 가지 문제를 제기합니다. 하나는 욥이 정말 정의롭냐는 문제이고 또 하나는 의로운 것이 아무런 유익이 없다는 주장입니다. 첫째 문제는 욥이 죄가 없는 상태에서 재앙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말합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정의인 인과응보대로 행하지 않으셨다는 말이며, 그럼 하나님이 불의하고 욥이 더 정의롭다는 말이 됩니다. 그리고 둘째 문제는 9:22에서 욥이 제기한 무죄한 자나 악인이 동일하게 멸망 당한다는 문제로, 21:15에서 인용한 악인들의 무례한 말을 근거로 하여 욥이 의로운 것이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주장한 것을 문제 삼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욥의 말에 대한 명백한 과장이며, 엘리후가 욥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거나 혹은 일부러 곡해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2) 엘리후의 반박(35:4-8)
4절에서 엘리후는 욥뿐만 아니라 욥과 지금까지 함께하며 토론하였던 세 친구들까지 자신의 연설 대상에 포함시킵니다. 엘리후는 욥의 친구들의 말이 자신보다 덜 지혜로워서 욥을 설득하지 못하였다고 생각하고, 그들에게도 한 수 가르치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엘리후는 하늘의 구름을 예로 들며 하나님께서 얼마나 인간 세상에서 멀리 계신지를 표현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죄를 짓거나 의로운 행위를 해도 결코 하나님께 영향을 미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죄를 짓는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해를 당하는 것도 아니고 인간이 의를 행한다고 해서 하나님에서 상을 받거나 이득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엘리후가 말하고 싶은 것은 8절로 인간의 행동은 오직 인간에게만 영향을 미치며, 의로운 행동의 목적은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엘리후는 욥이 하나님을 통해 자신의 의로움을 입증하여 자신의 억울함과 고난에서 벗어나려는 것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3) 죄인의 부르짖음의 헛됨(35:9-13)
엘리후는 하나님께서 왜 욥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시지 않는지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사람들이 학대가 많고 권력자들의 힘에 눌려 도와달라고 소리를 지르는 상태에 있는데도 구원을 못 받은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10-11절에서 보면, 그들은 시편 기자들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하나님을 향하여 외치고 탄원하던 기도를 전혀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둘째는 12-13절에서 교만한 악인들이 부르짖으면 응답하지 않으신다고 말하는데, 악인들의 부르짖음은 헛된 것이며, 이런 헛된 것에 하나님은 듣지도 관심을 가지시지도 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돌아보다’라는 단어는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3) 엘리후의 결론(35:14-16)
엘리후는 욥에게 이 두 가지 문제가 모두 있다고 언급합니다. 첫째는 죄를 자복하며 부르짖지도 않으면서 하나님의 판단을 기다릴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아직도 욥은 하나님께 벌을 받고 있는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엘리후 생각에는 욥은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 앞에 죄를 짓고 있으며, 지금 받고 있는 고난만으로도 벌을 다 받은 것으로 보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16절에서 이렇게 죄인으로 하나님의 관심도 받기 어려운 욥이 계속해서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하는 것은 지식이 없는 태도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엘리후는 세 번째 연설에서 욥이 스스로 주장한 의로움에 대해 철저하게 비판을 하고, 그가 죄인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을 아끼시는 하나님께서 계시고, 사려 깊은 말로 힘을 북돋워 주는 친구들이 있다면, 사람이 어떤 고난에 빠지든지 회복하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도움을 받을 수도 있고 줄 수도 있습니다. 주님을 중심으로 관계를 맺어 갈 때, 우리는 함께 고난을 통과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