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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9개월이 지난 1962년 2월 13일 중앙정보부장이었던 나는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월남을 방문했다.
당시 월남은 북쪽의 공산 월맹군과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튿날 북위 17도선의 최전선 1사단을 방문했다. 수도 사이공에서 1000㎞ 이상 떨어진 오지였다. 그곳엔 3년 뒤 대통령에 오른 응우옌반티에우(1923~2001) 사단장(대령)이 전쟁을 지휘하고 있었다. 티에우 사단장은 17도선 표지판을 가리키며 “이게 한국의 38도선과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10여 년 전 북한·중공군의 남침을 맨주먹으로 막아내던 6·25가 상기됐다. 38도선을 넘어온 북한군이 의정부 야산 일대를 개미 떼처럼 새카맣게 밀고 올라오고 정찰 나간 내 머리 위로 포탄이 펑펑 떨어지던 장면, 육사 8기 동기생 40%가 소대장·중대장으로 전사한 기억들이 떠올랐다. 북위 17도선을 설명하는 티에우의 눈빛은 ‘미국 등 유엔 참전국들의 도움으로 한국이 살아난 것처럼 월남도 당신 나라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듯했다.
1966년 10월 14일 월남에 파병된 비둘기부대를 찾은 김종필(JP) 공화당 의장이 현지 여성으로부터 월남모자를 선물받고 있다. 비둘기부대는 건설지원단으로 구성된 비전투 부대다. 김 의장은 이날 월남 국립묘지에 헌화·참배하고 전선(戰線) 인근의 월남인들을 만나 위문품을 전달했다. 왼쪽부터 신상철 주월 대사, JP, 김택수 의원(공화당), 채명신 주월한국군사령관.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이튿날 응오딘지엠 대통령을 예방했다. 그는 “한국군이 월남을 지원해주면 좋겠다”고 간절하게 요청했다. 나는 그 자리에선 “여러 가지 형편을 검토해보자”고만 답했다. 월남 파병에 대해 아무런 답을 줄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내심 ‘파병하면 좋겠다’는 마음이 일었다.
응오딘지엠의 첫인상은 퍽 부드러웠으나 그 속은 열렬한 민족주의자였다. 가슴 깊은 데서 우러나오는 애국심을 느낄 수 있었다. 응오딘지엠은 나와 만난 이듬해인 63년 11월 미국이 사주한 쿠데타 세력에 의해 살해돼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미국 정부가 응오딘지엠을 제거한 이유 중 하나는 그가 내건 민족자주 노선이었다. 그는 월맹과 전쟁을 하면서도 그쪽 지도자인 호찌민(胡志明)과 별도 비밀 접촉을 시도하고 있다는 정보를 미 중앙정보국(CIA)이 입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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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두 차례 외유(外遊)하는 동안 정치 지형은 빠르게 재편됐다. 구정치인 출신인 대구·경북(TK) 세력이 나의 빈자리를 치고 들어왔다. 1965년 말 나는 민주공화당 당의장으로 복귀하지만 이미 ‘4인 체제’가 당을 휘어잡고 있었다.
TK의 김성곤·백남억, 이들과 손잡은 길재호·김진만 이렇게 넷이다. 그중에서도 선두는 성곡(省谷) 김성곤(1913~75)씨였다. 경북 달성 출신으로 고려대 전신인 보성전문 상과를 나왔다. 80년대 재계 서열 5위였던 쌍용그룹의 창업자다.
김종필(JP)은 1965년 말 민주공화당 의장에 오르지만 성곡 김성곤(SK)을 필두로 한 ‘4인 체제’의 견제에 시달린다. 60년대 후반 4인 체제는 공화당의 재정·공천·운영을 좌지우지하는 실세 그룹이었다.
JP의 주류 세력과 대비해 공화당의 ‘신주류’로 불렸다. 4인 체제의 백남억 정책위의장, 김성곤 재정위원장, 김진만 원내총무, 길재호 사무총장(왼쪽부터)이 한자리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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