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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조카·女독립운동가, 안미생 흔적 75년 만에 찾았다"
[기고] '수지 안' 묘소, 미국 뉴욕에서 확인…'한국 떠난 이유' 등은 여전히 의문
프레시안 김창희 (언론인) | 2022.02.07. 12:22:44
해방 전에는 독립운동가였고 해방 후 신생 대한민국에서는 임시정부 계열의 주목받는 활동가였으나 그 이후 종적을 알 수 없던 안미생의 흔적이 처음으로 확인됐다.
1909년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동양평화의 적'으로 규정해 처단한 안중근 의사의 조카이자 대한민국임시정부 김구 주석의 큰며느리였던 안미생은 일제강점기 중국 대륙에서 펼쳐진 독립운동에서 비밀연락 및 공작원으로 활동해 온 여성이다. 우리나라 독립운동을 대표하는 두 가문의 결합으로 관심을 모은 당사자이기도 했다.
해방 이후 안미생은 자그마한 체구에 늘 생글거리는 표정으로 대중 앞에 섰다. 경우에 따라서는 시아버지 김구의 비서 자격으로 이 나라의 완전한 독립을 역설했고, 경우에 따라서는 여성운동가로서 자력에 의한 여성의 해방을 기회 있을 때마다 촉구했다. 어려서 홍콩에서 교육을 받아 영어와 중국어에 능통하다는 점도 큰 강점이었다.
▲1945년 해방 무렵 가장 널리 알려졌던 안미생의 사진.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이 1945년 11월 5일 환국을 위해 중국의 충칭을 떠나 상하이 강만비행장에 도착하던 때의 모습. 중앙의 김구 주석 오른쪽의 웃는 여성이 안미생이다.
그는 지나간 시대에 목숨 걸고 나라를 구하는 일에 매진했다면, 새 시대에는 과거의 분투를 바탕으로 새로운 국가 건설의 선두에서 뛰었다.
그러던 안미생이 1947년 가을 대중의 시야에서 홀연히 사라졌다. "미국으로 공부하러 간다"는 말을 남기고 떠난 뒤 소식이 두절됐다. 하나뿐이던 딸 김효자도 1965년 한국에서 대학을 마친 뒤 엄마 찾아 미국 간다고 떠나고선 똑같이 소식이 뚝 끊겼다.
김구의 입장에서 보자면, 큰아들 김인(1918~1945, 안미생의 남편)은 해방을 5개월 앞두고 중국 충칭에서 폐결핵으로 숨졌고, 며느리와 손녀까지 이렇게 절연되고 보니 장자 계열은 사실상 소멸해 버린 셈이었다.
임시정부 관계자와 해당 분야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안타까움이 컸다. 김구 또는 안중근 '가문'의 입장은 논외로 하더라도, 역사적 정당성과 시대적 소명의식을 두루 갖춘 유망한 일꾼의 실종은 신생 대한민국의 큰 손실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어디로 가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확인되지 않았고, 심지어 그가 왜 한국을 떠났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가 한국을 떠나는 소회를 주위 사람들에게 전혀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낱같이 확인되기 시작한 미국 내 흔적
▲국내 언론매체들은 1945년 11월 24일자로 그 전날 임시정부 요인들의 환국 사실을 미군정 소식통을 인용해 보도했다. 당시 안미생의 이름은 '安스산나'로 표기됐다.
그러던 중에 안미생의 소식이 최근 아주 실낱같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인터넷에서 그의 부음이 확인된 것이 출발점이었다. 미국이나 홍콩 등 영어권에서 안미생이 자신의 이름을 '수산나 안(Susanna Ahn)'으로 표기했다는 사실을 알아야 알아챌 수 있는 일이었다. 해방 직후 미군정 측도 임시정부 요인들 중 첫 환국자 15명의 명단을 알리면서 홍일점이던 그의 이름을 '안 스산나'라고 표기한 바 있다.
수산나 '수지' 안 1919 - 2008
유족으로는 아들 토마스와 그의 부인 메이, 손녀 올리비아가 있다. 수지는 <페니세이버>와 <노스포트 옵서버>의 상업미술가였다. 오랫동안 노스포트 지역에 살면서 활동했다. 수지는 노스포트 성당의 미술을 위해서도 일했다.
10여 년 전 미국의 한 부고에 등장한 노스포트(Northport)는 뉴욕시 교외 롱아일랜드의 한적한 마을이다. 한국인은 별로 살지 않는다. 안미생이 이곳에서 '수산나'라는 이름에 '수지'라는 애칭으로 '미술 활동'을 하다 2008년 90세로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지금까지는 그가 김인과 사이에 딸을 하나 둔 사실만 알려졌는데, 미국에 아들 부부와 손녀가 더 있다는 것은 새로운 사실이었다.
이렇게 안미생의 미국에서의 이름, 거주지, 사망시점 등을 알게 되자 그의 묘소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바로 그가 살던 노스포트의 가톨릭교회가 운영하는 성 필립 네리 공원묘지(St. Philip Neri Cemetery)에 묻혀 있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그는 죽어서도 교회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 주소를 들고 뉴욕의 지인이 지난 1월 이 묘지를 찾는 수고를 대신해 주었다. 직계 유가족 외에 한국인으로서 이 묘소를 찾은 것은 처음이었음이 분명하다. 안미생의 1947년 출국 이후, 비록 '사후'일망정, 그의 소재가 75년만에 처음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정갈하고 아늑한 그의 묘소
안미생의 묘소를 찾아가는 길은 의외로 간단했다. 미국 뉴욕의 중심가 맨해튼에서 출발할 경우, 교외의 롱아일랜드 중에서 노스포트 지역의 묘소까지는 약 44마일(70Km 정도) 거리였다. 주말에 도로만 막히지 않으면 승용차로 1시간 반이 채 걸리지 않았다.
악명 높은 뉴욕의 교통 사정을 감안하면, 주중에는 기차로 가는 것이 더 편할 수도 있다. 롱아일랜드 철도 중에서 뉴욕 중심가 맨해튼의 펜역(Penn Station)에서 롱아일랜드 스토니브룩의 제퍼슨항(Port Jefferson) 사이를 오가는 지선 가운데 펜역과 노스포트역 구간은 1시간 20분에 주파하게 되어 있다. 노스포트 역에서 내린 뒤 북쪽으로 5분만 걸으면 바로 이 묘지다.
이 아담한 공원묘지의 서남쪽 끄트머리쯤에 그의 자리가 있었다. 연한 갈색, 어쩌면 핑크빛에 더 가까운 화강암으로 제작된 묘비가 그의 생전 모습처럼 정갈했다.
▲최근 미국 뉴욕 지역에 눈이 많이 내린 어느 주말 오후의 안미생 묘소. '수지 안(Susie Ahn)'은 그가 미국에서 사용하던 이름이다. ⓒ홍영혜
사랑하는 어머니이자 할머니
수지 안
1919. 7. 13.
2008.11. 24.
늘, 그리고 영원히
우리 마음속에 머물기를
안미생은 자신의 세례명 수산나(Susanna)를 미국에서도 그대로 공식 이름으로 삼았지만, 이런저런 활동을 하면서는 수지(Susie)라는 애칭으로 불렸고, 후손들도 이 애칭을 그의 사후 이름으로 묘비에 새긴 것이다.
이 묘소와는 별개로 후손 중의 한 사람이 인터넷상의 추모공간에 올려놓은 수지 할머니의 미국 시절 모습도 지금까지 국내에 알려지지 않은 것이어서 관심을 끌 만하다. 젊은 시절의 안미생이 생글거리는 귀여운 분위기였다면, 중년 이후의 그는 그 인상을 유지하면서도 편안한 한국 할머니의 모습에 더욱 가까워져 있었다.
▲왼쪽은 안미생이 환국 후 1946년 연말 무렵에 시아버지이자 임시정부 주석인 김구 선생과 함께 촬영한 사진. 오른쪽은 안미생이 2008년 미국에서 숨진 이후 그의 한 후손이 추모 사이트에 올려 놓은 미국 시절 안미생의 모습.
안미생-김효자 모녀는 어떻게 살았을까?
안미생의 사후 위치가 확인되면서 그 다음 관심은 자연스럽게 그가 미국에서 어떻게 살아 왔으며, 구체적으로 부고에 등장하는 후손들의 내력, 즉 안미생의 두 번째 결혼의 사연은 어떤 것인지 등에 쏠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 사연은 뭐라고 이야기하기 어렵다.
그런 베일에 싸인 사정은 안미생의 딸 김효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1943년 중국 충칭에서 태어난 김효자는 엄마 안미생과 함께 귀국하지 못하고 난징의 외조부모(안정근-이정서) 댁에 머물다가 1947년 여름 중국 공군에서 제대한 삼촌 김신(김구의 둘째 아들)과 함께 귀국해 경교장 등에서 생활했다.
안미생-김효자 모녀는 1947년 9월 초 김효자의 귀국과 안미생의 출국 사이의 지극히 짧은 기간만 국내에서 함께 생활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 뒤 모녀가 다시 만난 것은 김효자가 1965년 서울대 조소과를 졸업한 뒤 엄마 찾아 미국으로 갔을 때였다. 근 20년 만의 상봉이었다. 김효자도 안미생이 사는 롱아일랜드 지역의 다울링대(Dowling College)에서 미술 강사로 일하기 시작했고, 그 무렵 만난 미국인과 결혼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효자 역시 한국에서와는 전혀 다른 이름으로 생활하며, 한국인들과 거의 접촉이 없었던 점은 안미생과 마찬가지다. 올해 우리 나이로 80세인 그는 안미생-김효자 모녀의 인생유전(人生流轉)을 증언할 수 있는 유일한 당사자이지만 과연 그가 기억과 소회를 입 밖에 낼지는 알 수 없다. 그의 증언이 중요한 역사적 기록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의 결단을 기다릴 뿐이다.
▲김효자의 옛사진들. 왼쪽부터 (1) 안미생이 미국으로 떠난 뒤 1948년 무렵 할아버지 김구의 뷰익 승용차 앞에서 선우진 비서와 함께, (2) 1948년 12월 18일 남대문교회에서 열린 삼촌 김신의 결혼식에서 화동 역할을 하며, (3) 1960년대 말 미국 뉴욕의 다울링대 강사 시절 그가 제작한 이 학교 설립자 로버트 다울링의 흉상 앞에서 각각 촬영.
모전여전(母傳女傳)… 미술작가의 길
이렇게 안미생과 김효자의 미국내 행로에 대해서는 아직 알려진 것이 많지 않다. 수십 년 동안 노스포트에서 교사 생활을 했던 한국인에게 물어보아도 '안미생' 또는 '수지 안'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만큼 한인 공동체와는 담을 쌓고 살았다는 얘기다.
그러나 지금까지 확인된 것만 놓고 보아도 두 사람은 상당히 닮은꼴이다. 특히 미술 분야의 성향 또는 능력이 두드러진다.
딸 김효자야 서울대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미국에서 미술강사 생활까지 했으니 그렇다 쳐도 엄마 안미생의 미술 활동은 새로이 확인됐다. 뜻밖에 현지신문 <노스포트 옵서버> 1961년 8월 17일자의 한 르포 기사에서 그의 흔적이 발견됐다. 바닷가 휴양지인 노스포트 시가지는 여름이면 일부는 해산물 식당가로, 다른 일부는 미술‧공예품 시장으로 탈바꿈하곤 했던 모양이다.
(이 미술‧공예품 시장에는) 원근 각지에서 온 예술가들이 그들의 걸작들을 전시해 놓았다. 다양한 예술기법, 소재, 양식 등이 관람객들의 찬탄을 불러왔다. <노스포트 옵서버>의 수지 안(Susie Ahn)은 그녀의 대단히 매력적인 동양풍 작품들을 전시해 놓고 있었다. 극도의 단순한 형태로 비단에 그려진 그녀의 수채화는 전시품들에 다양성을 더하는 것이었다.
이 르포 기사는 자기 신문에서 일하는 미술가 '수지 안'이 해변의 미술‧공예품 시장에서도 '동양화 분위기의 수채화'로 관심을 끌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위에 소개한 그의 부고기사에서도 비슷한 표현('상업미술가')이 있었던 것을 보면, 그 무렵 안미생은 지역신문에서 삽화가와 같은 역할을 하는 동시에 지역민들을 상대로 자신의 그림을 팔아서 생활했던 것 같다.
그의 회화는 지역사회에서 상당히 인정받는 수준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몇 년 뒤 같은 매체(1963년 1월 31일자)에 안미생이 한 차례 더 등장했다.
노스포트의 오션사이드 코트(Oceanside Court)에 사는 닉 수테라 씨와 그 부인은 수지 안(Susie Ahn)에게 자기 집의 벽에 벽화를 한 점 그려달라고 의뢰한 바 있다. 봄꽃 양식이 선정되었다. (…) 수지는 현재 이 크랩메도우 해변의 한 장소에서 동양풍의 영원한 봄 모습을 그리느라 여념이 없다.
안미생이 약 60년 전 겨울에 열심히 그렸다는 '봄꽃 벽화'가 지금도 남아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적어도 그가 미국에서 생활의 방편으로 그려 팔았다는 견사(絹紗) 위의 동양화풍 수채화는 꽤 남아 있지 않을까 생각되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국내에도 안미생의 그림이 여러 점 남아 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임시정부 부주석 김규식 선생은 영문학자이기도 해서 환국 직전(1945년 10월 10일) 충칭에서 그 동안 중국 각지에서의 독립운동 과정을 담은 영문장시 <양자유경(揚子幽景, The Lure of the Yangtze)>을 탈고한 바 있다. 이 원고의 앞에 붙은 '저자의 말(apology)'을 보면 "삽화의 대부분(14점)을 그려주신 안 수산나 양(Miss Susanna An)에게 심심한 사의를 표하여 마지 않는다"고 감사의 뜻을 밝히고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안미생이 1945년 가을, 환국 직전의 분주하던 시기에 이 영문 장시를 읽으면서 삽화 10여 점을 그리던 정황을 유추해 볼 수 있다. 그는 중국 대륙의 이곳저곳에서의 독립운동 과정을 되돌아보며 그해 3월 타계한 남편의 생각도 했음직하다.
국내에서 뒤늦게 출간된 <양자유경>(한울, 2000년)에는 그 삽화들이 흑백 이미지로 소개되어 아쉬움을 더한다. 이와 관련, 김규식 선생의 손녀 김수옥 씨는 자신이 안미생의 컬러본 원작품들을 직접 보기도 했고 그것들이 지금 국내에 있는 것도 알지만 그 작품을 가져간 사람이 어디 두었는지 잘 모르겠다고 해서 아직 돌려받지 못해 아쉽다고 토로했다.
그런가 하면 홍소연 전 백범김구기념관 자료실장은 안미생의 '미술 활동'과 관련한 김신 씨(김구 선생의 둘째 아들)의 또 다른 증언을 소개해 눈길을 끈다.
"1953년쯤의 일이었다고 한다. 생전의 김신 장군 말씀에 의하면, 자신이 미국 공군대학 연수 중에 뉴욕에 가서 형수(안미생)를 한 차례 만났다고 한다. 형수는 그때 중국인들이 많이 다니는 성당에 다니고 있었고, 어떻게 사느냐고 물었더니 "넥타이 같은 데에 그림을 그려서 생활하고 있다"고 하더라는 것이다."
▲안미생과 시동생 김신이 1953년경 미국 뉴욕에서 만나 찍은 사진. 안미생의 얼굴이 상당히 핼쓱해 보인다.
한국과의 절연, 왜?
내용상으로 미국 지역언론에 소개된 것과 같은 맥락의 이야기다. 그리고 이런 증언을 보면 안미생이 시가 식구들과 적어도 그 무렵까지는 연락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안미생이 그 동안 살아온 방식을 보면 그는 아마도 자신의 한국에서의 활동상이나 친가 또는 시가의 역사적‧정치적 배경과 관계없이 완전히 자력으로 생활하기로 결심했던 것 같다. 그것만으로도 그가 한국과 절연하려 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특히 김인이 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받고, 1990년 한국 정부가 이를 건국훈장 애국장으로 재서훈했음에도 불구하고, 안미생과 김효자가 한국 정부에 가족 등록을 하지 않은 것도 그런 심증을 더욱 굳게 한다. 이로 인해 김인의 포상증은 편의상 동생 김신이 1992년 수령해 보관하고 있지만, 보상금(연금)은 직계 가족이 확인되지 않아 지급되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안미생이 자신의 독립운동 활동상을 바탕으로 서훈 신청을 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다.
이런 상황을 알면 알수록 그의 '미국행'의 배경이 더욱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즉, 무엇이 그토록 싫었기에 단칼에 한국의 모든 인연으로부터 벗어나는 결단을 내렸느냐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안미생 본인의 입으로 남긴 이야기는 지금까지 확인된 바 없다. 다만 주위 사람들이 간접적으로 추측하는 이야기가 조금 있을 뿐이다.
"중경이란 곳은 외국 사람들이 3년 이상 더 살지 아니하는 곳이다. 호흡기가 나빠지고 폐결핵이 잘 걸리는 곳이다. 그리하여 우리 젊은이들도 더러 빼앗겼다. 그 중의 하나가 김인이다. 인은 리즈바(李子垻)의 중앙대학 재학 중 웨이하이웨이(威海衛)에서 온 안미생과 만나 어린 딸을 낳았다. (…) 그 후 들으니 인이가 몸에 병이 났단다. 그때 폐결핵이면 미제 약[페니실린]을 써야 했다. 들은 즉, 김구 선생께서, 내 자식의 병을 고치겠다고 지금 이 전시에 그 비싼 약을 어찌 쓸 수 있겠느냐고 하시면서 며느리의 애달픈 심정도 아랑곳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투약도 제대로 못하다 보니 해방 전에 운명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 김효숙,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나>(1996, 미간행 수기) 중에서
말하자면, 안미생이 남편의 병을 고치기 위해 시아버지에게 페니실린을 구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완곡하게 거절당했고, 귀국 후에도 그에 따른 섭섭한 감정이 남았다는 이야기다. 이는 결국 정서적으로 극복하기 어려운 장벽이 되어 남편 없는 국내를 떠나게 만들었다는 추정으로 이어진다. 이와 비슷한 취지의 설명 또는 추측을 몇몇 사람이 남겼다.
이 설명은 맞을 수도 있고, 과잉해석일 수도 있다. 죽은 사람의 기억은 검색할 수 없기 때문에, 안미생의 직접 증언이 발견되지 않는 이상 우리가 알 수 있는 길은 없다. 이는 앞으로 김효자 등 미국의 유족을 통해 조금 더 확인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는 왜 그토록 아팠던 것일까?
안미생이 한국을 떠나기로 결심하게 된 이유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그런 결심을 하던 무렵의 정황만은 몇 가지 확인된다. 그 중 하나는 그가 1947년 5~8월 무렵 건강이 상당히 좋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여성신문> 1947년 6월 1일자에 실린 안미생의 기고 '(미소)공위에 보내는 여성의 말'(왼쪽)과 <부인신보> 같은해 8월 13일자에 실린 김구 주석의 차남(김신) 귀국 예고기사(오른쪽). <여성신문>에는 "1개월 전 강원도 홍성(홍천의 오류:편집자)에 갔다 왔다"는 내용이 있고, <부인신보>에는 "안미생 여사는 그 동안 병환으로 홍천에서 정양중"이라는 내용이 있다.
▲안미생이 국내에서 마지막으로 남긴 사진. 김구 등 임시정부 관련 인사들이 1947년 7월 24일 경교장을 방문한 조지 피치 박사 부부와 함께 촬영했다. 뒷줄 중앙에 수척한 모습의 안미생이 서 있고, 그의 오른쪽으로 한 사람 건너 선 이가 당시 김구 선생의 비서로 함께 근무하던 사촌오빠 안우생이다.
그 무렵 국내 몇몇 신문에는 안미생이 강원도 홍천에서 '정양중'이라거나 홍천에 다녀왔다는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또 그런 이유 때문이었는지 안미생은 국내에서 마지막으로 남긴 그해 7월 말의 사진에서 전례 없이 핼쓱한 모습이었다. 그 전의 모습과 비교하면 병색이 완연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의 '병환' 또는 '핼쓱한 모습'과 그의 '떠남' 사이의 인과관계는 아직 단정하기 어렵다. 즉, 병환이 있어 국내 및 당시의 정치 현장을 떠나기로 한 것인지, 아니면 그렇게 떠나려고 하다 보니 몸과 마음에 병이 생긴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아무튼 그가 국내에 있던 마지막 시점에 건강이 상당히 좋지 않았던 것만은 분명하다.
안미생의 마지막 임무
또 한 가지는 다소 미묘한 내용이다. 안미생이 시아버지 김구로부터 중요한 비밀지시를 받고 중국으로 떠났다는 당시 미군정의 정보보고가 그것이다. 이는 당시 격심하게 요동치던 국내외 정세와 그에 대응해 시시각각 입장을 조정해 나가던 국내 각 정파의 입장을 입체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고선 해석하는 일 자체가 불가능한 자료다. 이 정보보고는 제목부터 대단히 도발적으로 '김구의 한국전쟁 계획'이라고 되어 있다. 이 보고서의 앞부분을 그대로 옮기면 이런 것이다.
▲주한미군사령부(USAFIK)의 정보참모부(G-2)가 작성한 '주간정보요약' 제112호(1947년 11월 6일) 중
'김구의 한국전쟁 계획' 일부.
"(…) 김구에 따르면, 한국 문제가 유엔에서 만족스럽게 처리된다 해도 북한과 남한 사이에는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고 한다. 이 전쟁을 방지할 최선의 방법은 한국인들이 중국의 중앙군에 가담해서 만주의 공산군에 대항해 싸움으로써 그들을 그 지역에서 몰아내고 북만주를 점령하며, 나아가 한국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이다.
(이같은 계획은) 장개석의 승인을 얻어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이청천(전 광복군 총사령)과 전 일본군 대좌 김석원(이청천의 일본육사 후배)은 비밀리에 상의해서 김구의 며느리 안미생을 장개석과의 협상을 위해 중국으로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안미생은 김구의 메시지를 휴대하고 임무 수행차 지난 9월 초 중국으로 떠났으며, 그렇게 접촉하는 데에는 거의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그녀는 김구와 함께 충칭에 있을 때 마담 장(장개석의 부인 송미령)과 좋은 친교를 맺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이 보고서가 작성된 1947년, 우리나라는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식민지 상황에서 벗어나긴 했지만 다시 미군정 치하에서 신탁통치-총선거 실시-분단의 극복 등의 문제로 소용돌이 치고 있었던 반면, 중국은 여전히 국공내전의 혼란 속에 있었다. 그때 김구 등 상당수의 임정계열 인사들은 만주 지역의 한국인들을 군대로 재조직해 중국 국민당 편으로 내전에 참여하고, 그 전쟁에서 공산군을 몰아낸 뒤 여세를 몰아 북한 지역까지 밀고 들어가 통일을 이룬다는 구상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만주계획'으로 불렸고, 실제로 김학규 장군의 회고 등을 통해 위와 같은 취지로 구성된 '장연지구 민주자위군'의 실체가 사실로 확인되기도 했다. 여기서 '장연지구'는 조선족이 밀집한 '장백-연길 지구'를 가리킨다.
한 마디로, 반공산주의의 전제 위에 구성된 호전적인 통일관이다. 이 무렵 동북아 정세와 한반도 상황을 보는 김구의 시선과 노선이 이러했다. 그러나 중국 내전의 상황이 일정부분 정리되고, 국내에서는 제2차 미소공위가 파탄으로 끝나면서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불가피해지는 1947년 말~1948년 초, 김구의 노선은 선회했다. 남북협상과 대화에 의한 통일 노선으로 돌아선 것이다. 이승만과의 우파 연합을 깨고 중간파 김규식과 연대하는 것도 바로 이때였다.
그러나 아직은 그렇게 노선전환을 하기 직전인 1947년 9월, 중국에서 한국인 군대를 구성하는 문제에 장개석의 동의와 지원을 얻기 위한 대표로 안미생이 중국에 파견되었다는 얘기다.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미국에서 발행되던 <신한민보>에 실린 안미생의 동정. 왼쪽은 1949년 5월 26일자로서 미국에 체류하던 안미생이 그해 2월경 다시 중국 상하이에 갔다가 5월 돌아왔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아버지 안정근 선생의 병문안 및 장례식 참석을 위한 출국이었다. 오른쪽은 1950년 3월 23일자로서 안미생의 시카고 방문 소식을 알리는 가운데 그가 뉴욕 '폿햄 유니버씨티', 즉 포덤 대학(Fordham Univ.)에서 신문학을 전공하고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다. 과연 안미생이 송미령을 통해서 장개석을 만났는지, 또 장개석을 만나서 김구 등의 생각을 전하고 동의와 지원을 받아냈는지 등은 모두 확인되지 않고 있다.
김구의 '만주계획' 자체가 1948년 2월 이후 폐기된 마당에 그런 사실들을 확인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되물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당시 동북아의 정치‧군사 구도 재편과 그에 따른 임시정부 그룹 내부의 동요와 갈등, 나아가 김구의 암살이라는 비극적 사건 등이 사실은 모두 한 줄에 꿰인다는 점에서 1947년의 역사적 사실들을 확인하는 일은 결코 작지 않은 의미를 갖는다. 이 문제는 앞으로 국내외의 자료 발굴을 통해 보다 입체적으로 천착해야 할 작업이다.
향후 자료 발굴 때 확인할 것을 전제로, 미리 몇 가지 질문을 던져볼 수 있겠다. 즉, 안미생은 김구의 만주계획의 실현을 위해 중국으로 나가면서 과연 그 계획에 동의했을까? 혹시 그의 남편 김인, 환국 후 경교장에서 함께 근무한 사촌오빠 안우생 등 상당수 주변 인물이 아나키스트 성향을 가졌던 점으로 미뤄 김구의 동북아 정세관과 통일론이 그의 고민과 신병의 원인은 아니었을까? 어쩌면 부자 간에도 세상을 보는 관점이 다르고, 부부 간에도 걷는 길이 똑같으란 법이 없는 게 세상 이치이니 이 무렵 안미생의 생각과 행로를 보다 정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그의 한국과의 절연도 바로 그런 검토 과정을 통해서만 설명의 단서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지금 상황에서는 어느 것도 분명하지 않다. 어떻게 말해도 소설일 뿐이다. 그렇게 난이도가 높은 작업은 뒤로 미루고, '안미생 흔적찾기'의 1단계 작업을 마무리하는 차원에서 그 동안 추가 확인된 출국 직후의 사실 몇 가지를 일지 식으로 정리하면 이렇다.
1947년 9월 초순 부산에서 선편으로 중국으로 출국
1948년 5월 23일 중국 상하이에서 미국 선적 매킨리호로 출항
1948년 6월 12일 미국 샌프란시스코 입항
1949년 4월 28일 중국 상하이에서 미국 선적 윌슨호로 출항
1949년 5월 14일 미국 샌프란시스코 입항
▲1949년 3월 세상을 떠난 아버지 안정근의 묘소에 안미생(오른쪽)이 어머니 이정서와 함께 참배하고 있다. 당시 이곳은 상하이 만국공묘였지만 그해 말 중국 공산화 이후 가족들이 돌보지 못해 이제 정확한 묘소 위치를 찾을 길이 없다.
1947년 중국으로 간 뒤 거기서 다시 미국으로 가기까지 무려 9개월이 걸린 점을 눈여겨 볼만하다. 아마도 이 기간 중에 안미생은 그때까지 상하이에 머물며 신병을 치료 중이던 아버지 안정근 등 친정 식구들과 만나 회포도 풀고, 모처럼 자신의 건강도 편하게 챙겼을 것이다. 그러면서 중국의 내전 상황은 현장에서, 한국 국내의 상황은 한 발자국 떨어져서 각각 살펴보는 기회를 갖기도 했다. 즉, 1947년 말부터 중국 공산군의 기세가 오르면서 내전의 흐름은 완전히 달라졌고, 그 와중에 김구는 만주계획을 포기하고 남북협상에 나섰지만 1948년 4월 평양행에서 돌아온 김구의 손에는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었다.
안미생이 1947년 9월 국내를 떠나며 미국행까지 결심하고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어쨌거나 그가 미국행을 '최종' 결심한 것은 이렇게 중국에서 9개월을 보내며 국내외 상황을 면밀하게 살펴본 뒤의 일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게 해서 그는 1948년 5월 10일 국내에서 남한만의 정부를 구성하기 위한 제헌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진 직후인 5월 23일 상하이에서 샌프란시스코행 배에 올랐다. 그 시점에 국내의 정세도, 그의 삶도, 비유하자면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넜다고 할 수 있다.
1948년에 한 번, 다시 1949년에 또 한 번 미국 입국 기록이 남은 이유는 1948년 첫 입국 후 1949년 아버지 안정근 선생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중국 상하이로 나갔기 때문으로 보인다. 정확한 날짜는 확인되지 않지만, 안미생은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대략 2월 말쯤 미국을 떠나 중국에 갔고, 시간을 잘 맞췄으면 3월 17일 아버지의 임종도 했을 것 같다. 그 뒤 4월 말쯤 다시 중국을 떠나 5월 중순, 석 달 만에 미국에 돌아온 것으로 보인다. 당시 미주의 한인신문에도 안미생의 이런 동정이 보도되었다.
첫 미국입국 기록에는 그의 직업이 '학생'이라고만 기재되어 있었지만, 두 번째 입국 기록에서는 아예 '포덤 대학(Fordham Univ.)'이라고 재학중인 학교 이름이 쓰인 것으로 보아 1948년 가을 학기에 뉴욕 브롱크스 지역에 있는 이 학교에 등록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학업 때문에라도 중국에 더 체류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낯선 곳에서 일군 새로운 삶
화불단행(禍不單行). 안미생이 두 번째 미국에 입국한 다음달인 1949년 6월 26일. 이번엔 시아버지 김구가 비명에 가고 말았다. 경교장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그는 달려가겠다고 했다. 김구도 그의 아버지였기 때문이다. 시동생 김신이 귀국하면서 아버지를 지근거리에서 모시는 역할을 그에게 물려주고 떠나 왔지만 아버지의 장례에 가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장례는 열흘간의 국민장이었다.
그러나 경교장의 어른들이 말렸다. 보름 내지 스무 날 걸려서 와봐야 이미 장례는 다 끝난 뒤라는 것이었다. 승강이 끝에 그는 조전을 보내는 것으로 문상을 대신했다. 이렇게 하고서 그는 다시는 한국 땅을 밟지 못했다.
이 무렵 그는 낯선 곳에서 두 번째 삶을 시작하기로 보다 적극적으로 마음먹었던 것 같다. 두 아버지를 앞세우는 혹독한 시련 끝에 익숙한 세상과 마침내 결별했다. 그것이 그가 꼭 원했던 길이었는지 우리는 아직 알지 못한다.
아무튼 이제 그 삶은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개척하고,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길이었다. 실제 안미생은 그렇게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았다. 그 징표들 가운데 하나는, 그가 미국에서 새로 얻은 후손들에게 자신의 '안씨' 성을 물려주었다는 사실이다. 딸 효자는 효자대로 자신의 독립적인 삶을 개척해 가는 가운데 안씨 가문이 별도로 창설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안미생은 미국에서 두 가문의 원조가 되었다. 고국의 어느 누구도 모르는 가운데 그와 그 후손들의 독립적인 삶은 미국 땅에서 '봄꽃'처럼 이어져가고 있다.
▲안미생의 묘소 전경. 그는 고국의 어느 누구도 모르는 가운데 미국에서 자신의 삶을 새로이 개척해 가다 뉴욕 근교에 마지막 안식처를 마련했다. 뒤늦게나마 '수산나(수지) 안'의 명복을 빈다. ⓒ홍영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