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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평구선생] 한일(韓日) 친선강연(親善講演) - 5, 6월 일본(日本) 각지(各地)에서 행한 내용(內容)임(1967년 7·8월 제155호)
박상익 추천 0 조회 54 26.09.01 12:40 댓글 7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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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26.09.01 12:41

    첫댓글 마사이케(政池仁) 선생의 밀턴의 실낙원 독서회에도 나갔었습니다. --> 새롭게 알았습니다.

  • 작성자 26.09.01 12:41

    일본의 식민 정책은 모든 면에서 한국 중심이 아니라 일본 중심이었습니다. 총독부 시책 중에 한국 산미증식계획(産米增殖計劃)이란 것이 있었는데, 나는 중류 이상의 의사의 집에 태어났어도 소년 시절에 별로 쌀밥을 먹어 본 일이 없습니다. 총독부는 쌀은 다 일본으로 운반해 보내고 한국인에게는 순전히 만주의 좁쌀을 먹인 것입니다. 현재 일본에는 60만의 백의민족이 있어 일본 사람에게 황충이처럼 미움을 받고 있습니다. 이 역시 전날 총독부의 이 경제 착취가 빚어낸 결과에서 나온 것입니다.

    --> 일제의 식민지 정책에 대한 체험적 증언이네요.

  • 작성자 26.09.01 12:41

    가령 교육에 대해서만 봐도, 경성제국대학 의과 100명 모집에 처음부터 한국인 학생은 20명밖에 뽑지 않는 방침이었습니다. 이 의학부에는 정형외과를 두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군사 의학이기 때문에 한국 학생에게는 이를 습득시키지 않는다는 방침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그 시대 한국 식자 중에서는 미국이나 유럽에서 서양사를 연구하면 무조건 요시찰 인물의 낙인이 찍히곤 했습니다.

    --> 1세대 서양사학자 김성식 선생(1908~1986, 규슈九州제국대학 법문학부 졸업)도 서양사 전공 선택 이유를 항일 정신에 기반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지요.

  • 작성자 26.09.01 12:42

    나는 이중교(二重橋)에 폭탄 하나만 던지면 이런 문제는 대번에 해결을 볼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으나, 이는 역시 기독자가 취할 길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 이중교는 일본 천황 궁성 입구의 다리지요. 노평구 선생의 성품으로 미루어 기독교 신자가 아니었다면, 아나키스트 고토쿠 슈스이처럼 천황 암살을 능히 결행했을 것입니다.

  • 작성자 26.09.01 12:42

    해방 전 일본의 자랑 가운데 하나는 전차나 기차 속에서의 독서열, 비록 노동자나 하녀의 신분일지 라도 이와나미문고(岩波文庫)의 책을 읽었다고 기억됩니다. 그런데 이번 와서 섭섭하게 느낀 것은 이런 모습을 별로 볼 수 없었던 것이며, 더러 있다고 하여도 신문 정도, 그것도 스포츠 신문 정도인 듯했습니다.

    --> 1967년에도 이미 일본의 독서 열기는 식고 있었네요. <독서국민의 탄생>에서 보듯이 메이지 시대 일본 국민의 독서열기는 정말 뜨거웠지요. 유럽도 18세기에 독서 국민의 탄생을 경험했습니다. 한국은 아직 그런 역사적 경험을 하지 못했고요.

  • 작성자 26.09.01 12:42

    우치무라 선생은 그의 저작 혹은 청년 시절의 전도 관계로 보아 동북 지방을 심중 깊이 사랑하고 있었던 듯한데, 여기에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중대한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소위 문화에 외진 이 지방의 현실적인 빈천(貧賤) 속에 진정한 기독교 수용의 토양으로서의 일본인 본래의 그 순박한 정신성을 본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번 저는 사실상 동북 지방에 가서 과거의 일본이 여성들의 모습에까지 남아 있는 것을 보고 기뺐으며, 또한 이런 생각을 더욱 깊이 한 바입니다.

    --> 김교신 선생이 "《성서조선》아, 너는 소위 기독교신자보다도 조선혼을 가진 조선사람에게 가라. 시골로 가라, 산촌으로 가라. 거기의 나무꾼 한 사람을 위로함으로써 너의 사명을 삼아라."고 한 것과 같은 맥락이네요. 소록도 문둥이들에게서 희망을 본 것도 마찬가지였고요.

  • 작성자 26.09.01 12:43

    마사이케(政池仁) 선생은...밀턴 독서회의 개회 기도를 늘 선생이 하셨는데, 매번 일본이 하루속히 패전하고 평화가 오기를 빈 것이었습니다. 나는 대단한 기도라고 생각하며 아멘으로 이에 회답했었습니다. ...선생은 나의 은사 되시는 고 김교신 선생과 우치무라 문하의 신앙 동지십니다. 김 선생이 태평양전쟁 말기에 ‘성서조선사건’으로 신앙 박해 가운데 투옥되었을 때에도 많은 걱정을 하셨습니다. 김 선생이 동경고사(東京高師)를 졸업하시고 귀국하실 때에도 선생은 김 선생의 손을 잡고 조선의 독립을 빈다고 작별 인사를 하셨다고 합니다.

    --> 놀라운 에피소드네요. 진정한 기독자의 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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