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한일(韓日) 친선강연(親善講演) - 5, 6월 일본(日本) 각지(各地)에서 행한 내용(內容)임
지금 소개받은, 한국에서 온 노입니다. 도시 소개의 가치가 없는 자입니다. 저는 종전 전 근 십 년 동안 동경 마루노우치(丸之內) 쓰카모토(塚本虎二) 선생 성서연구회에서 부족하나마 성서를 배웠으며, 그 사이 야나이하라( 矢內原忠雄) 선생 토요학교에도 수년 출석했고, 종전 전에는 마사이케(政池仁) 선생의 밀턴의 실낙원 독서회에도 나갔었습니다. 따라서 말하자면 일본은 나의 영의 고향입니다. 이번 일본에 와서 여러분을 대하게 되니 진실로 반갑습니다.
사실상 나에게도 국경을 초월한 이런 사랑이 있었나 하고 놀랐습니다. 원래 나는 그렇지 못한 자입니다. 나는 일제시대 중학시절에 한일 중학생 충돌 사건인 광주학생운동에 참가하여 1년 동안 투옥된 일도 있는 자로서, 이는 과연 우리의 구주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서만 받을 수 있는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임을 알고 그리스도와 하나님 앞에 깊은 감사를 금할 수 없습니다. 역시 자연인이란 사랑보다 증오, 애타(愛他)보다는 이기적 존재입니다.
나는 전일 북해도 낙농 대학에서 강연 후 재일(在日) 한국인 2세들로부터 선생에게는 한국인의 피가 없다고 비난을 받았는데, 그러나 내가 전날 자신의 일본에 대한 증오심을 이렇게 믿음으로써 극복할 수 있는 것을, 인류의 양식이 세계국가를 지향하는 이 우주 시대에 한없이 기쁘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나는 사실 요새 이런 생각에 잠겨 있습니다. 기독교 이외 유교나 불교 혹은 무슨 철학, 사상 등이 사람에게 이런 사랑을 발동시킬 수 있을까 하고. 그러나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그리스도 구속의 사랑만이 소위 이기적인 민족의 피까지 진정한 사랑으로 정화할 수 있는 것이라고 감히 말하는 바입니다. 나는 지금 그리스도가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냐”고 하신 말씀을 상기하는 바입니다.
나는 여기서 우선 간단히 나의 믿음의 경로를 여러분께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나의 고향은 한국에서도 제일 북쪽인 함북의 북만주와의 접경지대로 블라디보스토크에 가까운 곳입니다. 따라서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상이 센 곳이고, 한편 일제시대라 민족주의 사상도 심한 곳이었습니다. 나는 어릴 때부터 교회에 출입했습니다. 자의식이 듦에 따라 기독교와 공산주의의 관계, 혹은 기독교와 민족주의의 관계에 대해 저 나름으로 많은 고민을 겪었습니다. 결국, 공산주의나 민족주의가 나라와 민족을 위한 최선의 길이 아닌가 하고 고민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나는 일본인 가가와(賀川豊彦)의 책자를 읽고, 기독교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민족에 대해 봉사해야 할 것으로 생각하고, 위 형무소행으로 학업의 길이 끊어진 것을 기화로 서울 변두리에 있는 수백 세대의 빈민촌인 토막민(土幕民) 부락에 들어가 수년간 사회사업에 투신하게 되었습니다. 주로 근 3백 명의 무산 아동들을 오전, 오후, 밤, 3부로 가르쳤고, 노동조합 완장을 두르고 시내로 노동자들을 인솔하기도 하고, 병자들을 무료 진료소에 인도하기도 했습니다. 동네 공동변소 청소도 수년 동안 도맡아 했습니다. 동민의 존경을 받으며, 나는 사실 선행의 자부심으로 나날을 만족과 기쁨 가운데 살았습니다.
때로는 나는 심중 아동들의 교육을 위해서는 죽어도 좋다고까지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신앙적으로 생각할 때 이는 분명히 선행의 자부로 인한 무서운 교만이었던 것입니다. 내가 애들을 위해 죽어도 좋다, 죽자고 생각한 것은 그리스도와 같이 나도 죽자고 생각한 것으로, 자신을 그리스도와 동등한 자리에 놓은 실로 무서운 불신이요 교만이었던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도 남의 구원을 위해서 죽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사람은 다 자기의 죄 때문에만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이 인간의 교만의 절정에서, 하나님의 은혜인지 벌인지 비로소 자신의 죄를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 후 나는 이 자부와 교만과는 정반대로 자신의 죄의 문제, 양심 문제로 심한 도덕적인 고민에 빠졌던 것입니다. 그리고 나 자신의 문제뿐 아니라, 사회사업으로 사람 자체는 물론 사회 자체도 진정 좋게 될 수 없다는 점을 철저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직장이나 일을 주선해 주어 수입이라도 좀 오르면 동리에 싸움은 더 잦고, 술은 더 마시고, 도박은 더 성해졌습니다. 글자라도 배우면, 특히 여자 아이들은 더욱 불미한 곳으로 발을 들여놓는 것이었습니다. 이리하여 나는 사회사업으로는 사람의 심령 문제, 죄의 문제가 도저히 해결될 수 없음은 물론, 사회 문제 역시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 없음을 철저히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진퇴유곡의 사태에서 나는 당시 우치무라(內村)의 제자로서 성서조선지 주필이셨던 무교회주의 전도자 고(故) 김교신 선생을 찾게 되었습니다. 선생은 나에게 사회사업으로는 인간 문제, 죄의 문제가 도저히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 없음을 말씀하여 주시고, 가급적 일본에 가서 우치무라 선생 계통의 성서연구회에 나가 성서를 통해 복음과 믿음을 배우도록 권해 주시고, 구체적으로 쓰카모토·아제카미(轉上) 선생의 집회를 알려 주셨습니다. 이리하여 나는 1936년 2월 일본 군인들의 반란인 2·26사건 당시 도동(渡東)하여 쓰카모토 선생 집회에 참석했습니다. 그리고 그해 가루이자와(輕井澤)에서 열린 선생 하기 집회 고린도 후서 강의에서, 나의 양어깨에서 죄의 무거운 짐이 벗겨지는 작은, 그러나 놀라운 기독교의 회심을 체험하고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돌이켜 오늘날 세계를 볼 때 인류는 원자 우주 시대에 돌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원자 시대의 특징으로 크게 두 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인류가 자신을 능히 파멸시킬 힘을 소지하게 된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시간과 공간의 거리가 제거됨으로써 인류는 하나의 세계를 지향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원자 시대에는 과거와 같은 입술로만의 평화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실천성을 갖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습니다. 추상적인 평화론만큼 오늘날 무의미한 것은 없습니다. 현대란 바로 하나님이 원자탄으로써 인류에게 평화를 촉구하는 시대라고 하여도 잘못이 없을 줄 압니다.
그러면 평화의 구체적인 실천이란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가? 그것은 각기 가까운 국가, 민족 사이에서부터 구체화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이 점에서 한국과 일본은 제일 가까운 나라입니다. 청명(晴明)한 날이면 부산에서 대마도(對馬島)가 보입니다. 하네다(羽田)에서 제트기로 서울까지 두 시간입니다. 지리적으로 가까울 뿐만 아니라 양국은 역사적으로, 인종적으로, 문화·언어적으로 가장 가까운 관계에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특히 2차대전의 종전을 계기로 양국은 비정상적이었던 과거의 불행한 관계를 떠나 각각 새 출발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일본에서는 침략적인 제국주의 체제가 붕괴되고 새 민주 체제가 섰습니다. 한국도 새로 독립을 획득하여 역시 민주 체제하에서 부족하나마 국가 건설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지난날의 양국 관계란 지배나 피지배나 간에 다 명예스러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니, 치욕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절대 평화를 지상과제(至上課題)로 하는 원자 우주 시대에서는 양국은 하루속히 지난날의 불행과 악의와 증오, 원한을 극복하고 진정한 새로운 평화 관계, 친선 관계, 협력 관계에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양국 관계란 과거의 식민지 지배, 피지배의 불행한 관계로 어렵다고 합니까? 과연 오늘날 정치적으로는 국교가 회복되었다고 하지만, 역시 양국민 사이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불신감과 무관심의 감정인 것도 사실입니다. 실로 평화 관계란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그리스도의 구속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의 말입니다.
나는 감히 말합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어려워도 우리 기독자는 이를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못 한다면 우리는 ‘평화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하나님의 최대 축복에 아직 접하지 못한 자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과연 평화를 우리는 세상 사람에게, 정치가에게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나는 이번 일본에 와서 양국의 이 깨진 평화 가운데 서서 예수의 산상수훈의 팔복(八福)을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나는 이 팔복의 최대의 축복은 하나님의 아들 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혹은 위로받는, 혹은 하나님을 보는 것 이상으로 이 하나님의 아들 되는 축복이야말로 분명히 최대의 축복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최대의 축복은 결국 평화케 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평화케하는 자’의 아이레노 포이오스, peacemaker 란 그 내용이 무엇인가? 보통 이를 깨어진 평화에 대한 조정자로 생각합니다. 나 자신도 그렇게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보다는, 요새 예방의학이 발달하고 있지만, 역시 평화가 깨어지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조정자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는 평화 이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 즉 남을 미워할 줄 모르는 자, 즉 평화성의 인간을 말하는 그것이 본래의 깊은 뜻이 아닐까 합니다. 구약에서 이 평화, 샬롬의 뜻을 보면, 이는 원의(原意)가 건강을 뜻합니다. 즉, 내적인 정신적인 건강, 영의 건강을 의미하며, 결국 증오, 살상 등 인간의 죄성과 깊이 관계되고 있는 듯합니다.
구약 특히 이사야에서 우리는 평화의 위대한 환상, 이상을 봅니다. 이사야의 평화는 어떤 평화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젖먹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는 평화이며, 사자와 송아지가 함께 풀을 먹는 평화입니다. 만국의 백성들이 시 온 산에서 여호와를 경배하는, 그래서 공평과 정의가 우주를 덮는 평화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절대 평화가 인류에 의해 이 인류의 현실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가? 아닙니다,
이는 이사야에게도 끝날의 평화, 즉 인류 종말의 평화로서 신적(神的)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사야의 예언에서 이 위대한 평화의 주장과 함께 또 한 가지 병행되는 위대한 주장이 있습니다. 그것은 곧 메시아의 예언인 것입니다. 그리고 53장에서 이 메시아의 고난과 죽음이야말로 인류의 죄를 구속하고 인류 위에 하나님의 의가 쏟아지게 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신약에 와서 우리는 메시아로서의 그리스도의 강세(降世)가 인류에게 구체적으로 평화를 가져온 사실에 접하는 것입니다. 누가는 이를 그리스도의 탄생이 인류에게 평화를 가져오고, 이가 하늘에서 하나님 앞에 영광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죄의 구속자로서 우리의 심중에 평화를 가져왔을 뿐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 민족과 민족 사이에, 그리고 나아가 인류와 우주 만물 사이에 평화를 가져온, 실로 히브리서 기자의 말대로 평화의 왕인 것입니다. 묵시록의 신천신지(新天新地)의 완성이야말로 그대로 그리스도에 의한 이사야의 평화의 완성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평화는 결코 고대 세계의 로마의 평화 Pax Romana도, 중국의 천자사상(天子思想), 또는 오늘날 통제주의나 공산주의 사상에서 오는 정치 권력적인 평화가 아닌 것입니다. 혹은 러셀·토인비 등이 말하는 세계국가의 성립에서 오는 평화도 아닙니다. 산 피에로·칸트·크로체 등의 국제법 실천에서 오는 평화도, 힐티·슈바이처 등의 인류의 이성적인, 도덕적인 평화도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인하여 인류의 증오와 투쟁성이 제거된 평화성의 인간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과거 일본 지배하에서 우리 사이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당시 동경제국대학 경제학부 교수였던 무교회 기독자인 에바라(江原萬里) 씨가 우리 한국의 같은 신앙 선배였던 안학수 씨에게 동양 특히 한국에 대해 근세 일본이 범한 대죄(大罪)를 사과했을 때 안 씨는, “귀하가 사죄를 청함은 도리가 아니다. 나는 도리어 근세 초기 동양의 역사적 전환기에 있어서 한국 자신이 그 중대한 역사적인 임무와 책임을 다하지 못한 죄를 동양 전체에 대해 깊이 사과한다.”라고 했습니다. 나는 안 씨의 이 태도야말로 진정한 기독자의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안 씨의 은사인 우치무라 선생 역시 소위 태평양전쟁 발발 전인가 가루이자와(輕井澤)에서 수많은 서양인 선교사를 상대로 행한 강연에서, “만일 금후 日美戰爭이 일어난다면 나는 솔선하여 제위 앞에 서서 일본 군인의 총탄을 받고 죽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야말로 기독자의 태도라고 생각됩니다.
재작년입니까? 한국 교회의 지도자 제씨가 일본에 와서 일본의 교회 지도자들에 대해 앞으로 양국 교회의 친선을 위해 하여간 일본 교회가 한국 교회에 대해 과거를 사과해 달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일본 지도자들은 공적인 사죄는 할 수 없다고 거절했다고 들었습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사과를 요구한 한국 교회나 이를 거절한 일본 교회나 다 같이 신앙적 태도는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신자는 타인의 죄를 운운할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사람에게 죄의 문제는 절대적일 수 없습니다. 상대적인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도 자기를 죄인의 괴수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죄의 책임을 타에 전가하고 있는 한 과거의 불행을 극복하고 새로운 출발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기독자는 이미 하나님 앞에서 죄를 용서받은 자로서, 양국 관계에서도 무조건 새로운 친선 관계에 들어가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안 씨나 우치무라 선생의 태도는 다 신앙자의 이 태도를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나 역시 나의 조국 한국이 저 근세 초기 동양사(史)의 격동기에, 특히 동양의 발칸인 지리적인 요충(要衝)에 자리잡고 있는 자신의 책임과 사명을 진정 자각하여 확고히 서 있었다면 동양사의 방향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 자국의 죄를 깊이 뉘우치는 바입니다.
그러나 나는 과거 양국의 관계를 상식적인 관점에서 돌아다보더라도 감히 극복할 수 없는 것으로는 생각지 않습니다. 불행한 양국의 관계라고 하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대체로 16세기 도요토미(豊臣秀吉)의 한국 침범 이후의 일로서, 천년 이상 계속된 양국의 관계에서 볼 때 그렇게 긴 시간은 아닌 것입니다. 직접 식민지 지배라고 하여도 공작 시기를 넣어서 반세기 좀 더 되는 정도입니다. 그 이전의 양국의 긴 역사는 대체로 칸트가 말하는, 장사에 의한 평화적인 교류였던 듯합니다. 아니, 박사 왕인(王仁)의 문자 전달에서 보는 것같이 정신적인 문화의 교류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아니, 그 이상 불교 유교 등의 전달에 의한 종교적인 교류요 친선 관계였습니다.
거금(距今) 1400년 전 불교는 한반도의 백제를 통해 일본에 전달되었습니다. 그 후 신라 시대도 불교의 전성시대였습니다. 이의 일단을 우리는 현재 경주의 불교 예술을 통해 엿볼 수 있습니다. 이 시대의 명승(名僧) 원효(元曉)의 불교 사상은 일본의 대승불교에 전적으로 영향을 끼쳤습니다. 일본 동대사(東大寺)의 건축 및 벽화, 불상 등이 한국 불교와의 긴밀한 협조에 의한 것은 양국 학자가 공인하는 사실입니다. 저는 이번 나가노(長野)에서 선광사(善光寺)를 봤습니다. 이야말로 한국 불교의 일본 도래와 관계되는, 일본에서 가장 오랜 초교파적인 사원으로, 현재도 연중 전국 불교 신도의 참배가 끊이지 않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내려와 조선조(朝鮮朝) 시대에도 역시 양국간에 유교를 통한 잦은 교류가 있었던 것입니다. 조선조 최대의 사표인 유학자 이퇴계(李退溪)의 사상은 일본의 야마사키(山崎) 파 주자학(朱子學)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일본의 마쓰다(松田甲) 씨에 의하면, 퇴계의 유교적 윤리 사상은 명치 일본의 교육칙어에서까지 그 영향을 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나는 이렇게 종교적인 교류를 가졌던 우리들의 조상에 대해 깊은 존경을 금할 수 없는 바입니다.
이때 이렇게 동양 문명이 한국을 통해 일본에 전달되었다고 하여도, 이것이 무슨 한국의 자랑이 될 수는 없습니다. 냉정하게 생각해서 이는 역사적인 하나의 필연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신(神)의 역사 지배의 섭리였습니다. 고대 동양 문명은 인도로부터 중국에, 중국에서 한국에, 그리고 한국에서 일본으로 동점(東漸) 코스를 취한 것입니다. 그리고 한국은 이때 최소한도-나는 감히 최소한도라고 말합니다만-자신의 책임을 다한 것을 심중 기쁘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근세 동양의 서양 문명 수용(受容)에서는 사태가 달라졌습니다. 서양 문명은 기독교도 희랍 문화도 다 역사상 서진(西進) 코스를 취했습니다. 기독교만을 보더라도 바울의 소아시아 전도에서 무지야에서 아시아로 가려고 한 그의 계획이 환상에 의해 깨어지고, 복음은 마케도니아를 거쳐 서양 세계로 들어간 것입니다. 즉, 섭리에 의한 서진 코스입니다. 이리하여 정통 서양 문명은 서쪽으로 방향을 잡고 유럽에서 대서양을 넘어 미국에 건너갔으며, 여기서도 서쪽으로 몰려가 결국 동부 샌프란시스코로부터 태평양을 넘어 일본에 온 것입니다. 이리하여 이제 일본이야말로 서양 문명의 동양에 대한 전달자가 된 것입니다.
이 일본의 역사적 사명을 분명히 한 것이 우치무라 선생이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선생은 특히 서양 문명의 본질을 분명히 했습니다. 서양 문명의 본질은 기독교로서, 일본은 무엇보다도 우선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일본이 만일 이 서양문명의 본질이 아니고 그 외면적인 물질주의 혹은 그 정치형태·군사·학술·경제제도·철학·사상 등 문물(文物)에만 눈이 팔려 그 핵심체인 종교, 즉 기독교를 버리고 돌아보지 않는다면, 이는 일본의 사명과 더불어 일본의 장래에 대해 중대한 문제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또한 선생은 문명의 본질인 이 기독교에 대해 루터의 개혁의 재개혁(再改革)을 꾀하여 무교회주의(無敎會主義)를 제창했습니다. 또 철저한 비전(非戰) 평화의 길을 택했습니다. 그리고 이는 결국 동양의 서양 문명 수용 및 일본의 이의 전달 사명과 깊이 관계되는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서양 근세 사(史)의 외적 특징은 봉건제도의 붕괴에 의한 민족국가의 출발이며, 민족국가의 특징은 그 힘의 집결로서, 그 결과 이는 자연히 제국주의적인 침략주의를 근세사의 전면에 등장시켰습니다. 그리고 동양에서의 서양 문명의 전달자인 일본도 이 사례를 벗지 못하고, 봉건적인 구일본(舊日本)에서 메이지유신(明治維新)에 의해 근세 민족국가로서의 힘의 집결에 의해 동양 천지에 제국주의적인 침략주의를 쏘아 올린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2차대전에 의해 이 종교 진리와 도덕을 부정한 일본이 전면적으로 붕괴된 것이야말로 바로 우치무라의 예언의 적중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한편 일본 붕괴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기독교 국가 미국에 의한 원자폭탄의 투하는 바로 서양 기독교의 자기 폭파로서, 자살 행위가 아니었을까요? 우치무라의 종교 개혁의 재개혁적인 복음 이해와 더불어 그의 절대 평화를 생각할 때 많은 문제를 생각하게 됩니다.
이상 양국의 역사적인 관계와 사명을 돌아볼 때, 우리들 양국은 이제 2차대전의 종식과 더불어 절대 평화가 요청되는 이 원자 우주 시대에 동양에서의 기독교 수용과 인도(人道)·도덕적인 문명 발전을 위해 아주 새로운 역사적인 단계에 들어간 것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 양국의 진정한 친선을 위한 우호적인 노력은 바로 역사의 지상명령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양 국민 사이에 아직도 불신, 무관심이 지배적인 오늘날, 우리는 중대한 이 평화의 임무를 이 세상 사람들에게 기대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특히 이 세상 정치가나 사업가들은 역시 기브앤 테이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선 양국의 우리 기독자가 평화케 하는 자로서 양국민의 불신과 무관심 사이에 서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브라우닝의 시엔가 ‘넘어짐은 일어나기 위한 것’이라는 말이 있는 듯합니다. 우리는 기독교의 사랑으로서 지난날 우리의 조상들이 긴 세월에 걸쳐 불교 유교 등의 신앙으로 쌓아 올린 귀중한 양국의 친선 관계를 회복해야 할 임무를 졌다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한국 속담에 ‘미운 놈에게 떡 하나 더 주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불화로 말미암아 더욱 친밀해질 수 있다는 진리를 속담화한 것입니다. 나는 감히 말합니다. 양국의 불화, 불행은 우리가 너무도 가까운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일어난 형제 싸움 같은 것이었다고. 따라서 더 친밀하게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치무라 선생 글에, 아프리카의 존재 이유는 인류의 도덕성의 진보를 위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양국의 불화도 그렇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아니, 이는 오늘날 우리 기독자들의 사랑과 믿음을 테스트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을까요?
그러면 구체적으로 양국의 친선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제 결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날 양국의 적의와 원한과 혹은 불신감, 무관심 등은 결국 과거 양국의 많은 사람의 악의가 빚어낸 결과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일본의 많은 사람이 과거 식민지 한국에 나가 악의를 발동시킨 결과 빚어진 감정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앞으로 이에 상응하는 일본 여러분의 선의가 한국에 대해 발동되어야 하겠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감히 여기서 여러분 일본의 기독자에 대해 금후 여러분의 복음적인 선의가 한국에 대해 발동되기를 절실히 희망하는 바입니다.
다음 일본의 여러분에게 가급적 선의를 갖고 동정으로 한국을 대해 달라고 부탁하고 싶습니다. 수년 전 귀국의 여론 조사 결과 일본 사람들이 제일 싫어하는 나라가 소련과 한국이라고 발표되었을 때, 이것이 한국에서 큰 문제가 되었던 일이 있습니다. 일본의 제 친구들이 한국에 와서 첫째 걱정하는 것이, 도시 변두리 산 쪽에 있는 많은 빈민촌이며 또 철도변에서 한눈에 볼 수 있는 농촌의 가난한 생활입니다. 그래서 이로써 한국의 정치 혹은 한국의 국민성에 대해 심한 비판의 말을 보냅니다. 나 자신 물론 이에 대해 일언의 변명이 있을 수 없으며 부끄러운 생각뿐입니다만, 이는 사실은 일본 식민지 시대보다는 다소 나아진 상태인 것입니다. 도시 산턱의 빈민촌에는 전에는 토막(土幕) 생활자가 많았고, 산촌에는 더욱 처참한 생활 상태의 화전민(火田民)들이 많았던 것입니다.
일본의 식민 정책은 모든 면에서 한국 중심이 아니라 일본 중심이었습니다. 총독부 시책 중에 한국 산미증식계획(産米增殖計劃)이란 것이 있었는데, 나는 중류 이상의 의사의 집에 태어났어도 소년 시절에 별로 쌀밥을 먹어 본 일이 없습니다. 총독부는 쌀은 다 일본으로 운반해 보내고 한국인에게는 순전히 만주의 좁쌀을 먹인 것입니다. 현재 일본에는 60만의 백의민족이 있어 일본 사람에게 황충이처럼 미움을 받고 있습니다. 이 역시 전날 총독부의 이 경제 착취가 빚어낸 결과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 점 야나이하라 선생은 1927년 총독부의 이 산미증식계획과 관련하여, 영국의 아일랜드식의 조선 의회 설치의 급선무를 역설하고 조선 통치는 조선 민족 중심으로 행해야 된다고 강력히 주장했던 것입니다.
가령 교육에 대해서만 봐도, 경성제국대학 의과 100명 모집에 처음부터 한국인 학생은 20명밖에 뽑지 않는 방침이었습니다. 이 의학부에는 정형외과를 두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군사 의학이기 때문에 한국 학생에게는 이를 습득시키지 않는다는 방침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그 시대 한국 식자 중에서는 미국이나 유럽에서 서양사를 연구하면 무조건 요시찰 인물의 낙인이 찍히곤 했습니다. 이러한 조선 총독부의 암적인 정책은 실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모든 방면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식민지 통치 전 기간에 걸친 경찰 무단통치(無斷統治)는 말할 것도 없고, 특히 태평양전쟁 중에 취해졌던 민족동화정책, 즉 황민화운동(皇民化運動)으로 인한 단말마적인 한국어 말살 정책, 신도(神道) 강요, 신사 참배에 의한 기독교 탄압, 일본식 성씨개명(姓氏改名) 정책 등은 실로 한국인의 가슴 속에 일본에 대한 쉽사리 씻을 수 없는 감정의 파열을 가져온 것입니다.
나는 당시 일본에 있었습니다. 나는 이중교(二重橋)에 폭탄 하나만 던지면 이런 문제는 대번에 해결을 볼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으나, 이는 역시 기독자가 취할 길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역사적인 관련에서 이를 좀 더 크게 결론적으로 말하면, 일단 한국인이 오늘날까지 통한사(痛恨事)로 여기는 것은, 근세 초 일본 중국 한국 3국은 같은 시기에 소위 개화기(開化期)를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는 이가 일본에 의해 장해를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역시 일본은 한국의 현실에 대해 혹종의 도덕적인 책임을 느껴야 하며, 이 점 일본인 중 종종 침략을 미화(美化)하는 자가 있으나 이는 망발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나는 앞으로 양국의 친선을 위해 현시점에서 최소한도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몇 가지 사항을 조목별로 제시하려고 합니다. 첫째, 앞으로 양국 사이에 문화 협정이 맺어질 때 일본은 형식적으로 하지 말고 가급적 많은 한국의 유학생을 받아 주기 바랍니다. 이들에게 오늘날 좋은 의미의 민주 일본이 이해될 때 앞으로 양국 친선의 중심적인 힘이 될 것입니다. 다음, 현재 한국에 진출하여 소위 일확천금을 꿈꾸는-이들은 사실상 현재도 탈세 행위 등으로 양국 관계에 금을 내는 자들입니다-악덕 상인들에 대해, 수는 적어도 좋으니 신사적인 크리스천 상인의 진출이 절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은 이 악덕 상인들 자신 혹은 저들의 부정에 대해 견제력이 될 것입니다. 셋째, 가급적 동경에 한일 회관을 세워 양국간의 선의의 이해를 위한 교류를 돕고 한국어나 한국 문화 연구 등의 중심이 되게 하였으면 합니다. 넷째, 한국 유학생의 도일(渡日)과 함께 일어와 학문 연구에 도움을 주고, 그리고 일반 문화 사업과 교류 등에 대한 일본인, 특히 지성인의 참가와 협력을 빌고 싶습니다. 이것이 일본에 대한 한국인 전체의 불신감 해소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위에서도 누누이 지적한 바이지만, 현시점에서 진실로 양국의 친선에 이바지할 수 있는 것은 우선 평화케 하는 자로서의 기독교인만이 잘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양국 기독자의 진지한 노력에 대해 전날의 적의가 사랑으로, 악의가 선의로, 착취가 공동 번영으로 변하는 날이 하루속히 올 수 있기를 간절히 비는 바입니다.
그리고 다음 대단히 실례지만, 이번 나의 짧은 여행에서 얻은 소감을 여러분께 올리고 싶습니다. 장님의 코끼리 더듬기에 불과할 줄 압니다만 이는 일본에 대한 나의 거짓 없는 사랑으로, 구체적으로는 외적 문명에 대한 것과 내적으로는 기독교의 소화에 대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는 깊이 상호 관계를 갖는 것으로, 특히 앞으로 동양의 서양 문명 수용 내지는 이의 전달자로서의 일본의 사명에 대한 것입니다.
무엇보다 먼저 이번 나는 20년 만에 동경에 접하고서 물질문명의 발전으로 매머드화한 모습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는 또한 명치 시대 아래의 일본의 서양 학술·제도·문물 등의 소화에서 온, 말하자면 이의 개화(開花)로서 놀랍게 생각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고층 건물 밑에서 개미 떼같이 움직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너무나 피로해 보였습니다. 해방 전 일본의 자랑 가운데 하나는 전차나 기차 속에서의 독서열, 비록 노동자나 하녀의 신분일지 라도 이와나미문고(岩波文庫)의 책을 읽었다고 기억됩니다. 그런데 이번 와서 섭섭하게 느낀 것은 이런 모습을 별로 볼 수 없었던 것이며, 더러 있다고 하여도 신문 정도, 그것도 스포츠 신문 정도인 듯했습니다. 역시 동경 같은 데서 보면 차 안에서 아침부터 조는 현상이 많은 듯했습니다. 나는 이를 결국 물질문명의 피로에서 오는 것으로, 결과적으로는 또한 물질문명에 따르는 정신성의 저하를 보여 주는 것이 아닌가 걱정되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두드러진 현상은, 특히 동경 같은 도시에서 심했습니다만, 전체 여성들이 예외없이 미국화한 모습이었습니다. 이는 수년 전 일본 대사로 왔던 라이샤워의 글에도 있었던 듯합니다. 라이샤워는 이를 칭찬으로 쓴 듯합니다만, 나는 여기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정신의 저하와 함께 이것은 좋은 의미의 전날 일본인의 내적 성격과 정신에까지 불미한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라면 문제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즉, 문명 수용에 있어서 내외로 자주성 없는, 정신성 없는 천박한 외적 모방 내지는 단순한 물질문명에 그칠 염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나는 문명이란 단순한 모방이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의 급속한 파행적인 외적 물질문명의 발전과 더불어 이것이 전날의 일본 민족의 좋은 의미의 정신성까지 파괴한다면 앞날의 일본에 대해 크게 화가 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우려되는 면이 없지 않습니다. 이 점 서양 문명 특히 서유럽 문명이 종교, 도덕, 철학, 사상, 학문 등, 그리고 문화, 문물, 제도의 순서로 발전된 것을 오늘날 일본은 반대로 걷는 것 같으며, 여기에 앞으로 전체 동양에서 서양 문명 내지는 이의 발전상(發展上)의 가장 큰 문제점이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렇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우치무라가 지적한 대로 서양 문명은 기독교 문명인 것입니다. 따라서 그는 일본이 서양의 외적 제도와 문물에 앞서서 우선 기독교 자체를 받아들여야 할 것이라고 강력히 주장한 것입니다. 그리고 특히 그는 자기의 기독교를 일본적 기독교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일본인의 자주적인 기독교의 진정한 소화를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나아가서 그것이 일본의 기독교화와 관계되는 것으로, 구체적으로는 기독교가 일본인의 최선의 정신적인 유산, 도덕적인 면과 깊이 결부되는 것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때 중대한 문제는 오늘날 일본인의 이 내적 면이 천박한 물질 문명화 내지는 불미하게 미국화된다면 우치무라가 생각한 의미의 진정한 일본의 기독교 소화 자체가 어려울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되는 면이 있습니다.
우치무라 선생은 그의 저작 혹은 청년 시절의 전도 관계로 보아 동북 지방을 심중 깊이 사랑하고 있었던 듯한데, 여기에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중대한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소위 문화에 외진 이 지방의 현실적인 빈천(貧賤) 속에 진정한 기독교 수용의 토양으로서의 일본인 본래의 그 순박한 정신성을 본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번 저는 사실상 동북 지방에 가서 과거의 일본이 여성들의 모습에까지 남아 있는 것을 보고 기뺐으며, 또한 이런 생각을 더욱 깊이 한 바입니다.
나는 우리 동양의 기독교 수용에서, 기독교를 단순히 모방적으로 교리나 형식, 의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금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종교는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도덕적인 변화를 가져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외적 형식적인 종교신앙의 모방은 도저히 이런 변화를 가져올 수 없는 것입니다. 이는 오직 과거 불교 유교 등 동양 종교에 의한 깊은 동양인의 고유한 심령의 옥토 위에 기독교의 생명과 진리의 씨가 파종되어, 발아(發茅)하고 성장해서 50배, 100배의 열매를 맺을 때만 비로소 가능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 점 나는, 주로 서양 기독교의 외적 모방이나 형식주의를 지양하지 못하는 오늘날의 교회 기독교로써는 동양의 진정한 이 도덕적인 변화와 더불어 진정한 의미의 개종(改宗)이나 문명의 형성이 어려울 것으로 생각합니다.
따라서 일본의 진정한 의미의 기독교 수용 내지는 기독교화란 결국 우치무라의 무교회 신앙에 의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그리고 무교회 신앙 역시, 동북 지방의 민중들과 같은 좋은 의미의 순수한 일본인의 심령 속을 통해 새롭게 싹이 틀 때 비로소 우치무라가 기대한 순수한 무교회 신앙이 될 것이며, 기독교가 진정 일본의 종교가 될 것으로 생각하는 바입니다. 이 점 대단히 외람된 말이나, 나 자신은 우치무라 선생 역시 교양면에서 혹은 시대적인 면에서 볼 때 민족적인 의미의 순수한 일본인이었다고 보기는 곤란하다고 생각합니다. 일본 불교에서 본다면 그는, 천태종(天台宗)으로 일본 불교의 토대를 놓은, 40세에 중국에 갔던 구카이(空海) 같은 존재라고 보고 싶습니다. 구카이의 토대 위에서 그 후 신란(親鸞), 호넨(法然),니치렌(日蓮) 등의 인물에 의해 비로소 불교가 일본적으로 심화되고 또 일본이 불교화된 것같이, 일본의 기독교화 역시 이 우치무라의 토대, 우치무라의 무교회 정신 위에서 이의 민중화에 대한 노력 여하에 달린 것으로 생각하는 바입니다.
구카이 이후 많은 불교 개혁자들의 배출을 생각할 때, 앞으로 일본의 기독교화 역시 제2, 제3의 많은 우치무라의 배출에 의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여기 일본 무교회의 중대한 앞날의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아니, 앞날의 이 위대한 사업을 위해 오늘날 무교회 신앙자 여러분의 책임이 중대하다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우치무라의 신앙 사상의 핵심은, 오늘날까지 인류가 종교에 대해 가졌던 태도, 즉 기독교마저 형식이나 외적인 것으로 생각한 것을 종교 본래의 심령적인 면에서 생명과 진리로서 파악하여, 이를 고도로 도덕적으로 인류의 절대 평화의 상태에까지 발전시키려고 하는 종교 개혁적인, 인류적인 주장인 것입니다. 이는 실로 인류 사적인 거창한 사업이라고 생각됩니다. 따라서 일본인의 모든 정신력을 여기 경주(傾注)해야 할 것으로, 기독교를 진정 일본적으로 소화함으로써 비로소 인류적인 출발이 가능할 것입니다. 나 자신은 보잘것없는 자이지만, 선생의 이 기독교의 개혁적인 사상으로 한국 민족의 진정한 영적인, 도덕적인 기독교 소화를 꾀하려고 하는 바입니다.
나는 여행 중 일본의 청소년들로부터 ‘일본은 동양의 유럽’이라는 자부에 넘치는 발언에 여러 번 접했습니다. 그러나 유럽 문명은 단순한 물질문명이 아닙니다. 유럽 문명의 본질은 우치무라의 지적대로 기독교 문명인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그 도덕성에 있는 것입니다. 인도성(人道性), 휴머니티에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의미의 문명이란 자유의지에 의한 도덕적인 창조 능력의 발휘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단순히 이기적인 본능욕의 발휘나 혹은 정치가의 국책적인 통제로써 이루어지는 것은 문명의 이름에 해당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바벨탑일 뿐입니다. 이 점에서 저는 오늘날 이 눈부신 일본의 물질문명 밑에 종교로 도덕적인 활력을 불어넣는 그것이야말로 긴급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치무라 선생이 서양 문명의 단순한 문물과 제도의 수입을 극력 배격한 것도 이런 데 깊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종교는, 특히 기독교는 도덕 이하로 아주 땅에 떨어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의 죄의 문제와 양심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도덕적인 활력을 제공하여, 자발적으로 진정한 문명을 창조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문명의 비문명적인 성격을 파괴적인 전쟁 문명에서 단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비도덕적인 문명의 종착이 언제나 전쟁에 의한 자타의 파괴로 끝난 것도 역사가 말해 주는 사실입니다. 이 점 특히 나는 일본의 현실적인 사명을 동양에 서양 문명을 전달하는 것으로 보는 만큼, 일본의 도덕성을 중대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 없이는 진정한 문명의 창조뿐 아니라, 이의 진정한 전달 역시 불가능하리라 생각합니다. 진정한 의미의 문명 전달은 이기적인 상행위(商行爲)로 추진되는 것이 아니고 자발적인 사랑의 발동에 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나는 일본의 이 도덕성의 창조는 우치무라의 무교회 신앙에 의해서만 가능할 것을 확신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선생의 생애는 내외로 오직 이를 위해 바쳐진 것으로 믿는 바입니다.
끝으로 지금까지의 나의 부족한 말씀을 끝냄에 앞서 이번 나의 도일(渡日)의 기회와 더욱이 한일 친선의 실(實)을 위해 여러분과의 친교 및 면담의 기회를 마련해 주신 마사이케(政池仁) 선생께 깊은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치무라 선생의 사후 선생의 복음적인 절대평화주의를 생애 계승, 견지하여 오늘에 이른 분입니다. 선생은 근일 건강이 많이 나빠지셨습니다. 그래서 이번 5, 6월 ‘성서일본’에도 유언으로 평화 문제를 쓰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진정한 의미에서 노벨평화상을 받을 수 있는 분은 세계에서 선생 한 분뿐이라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마샬이나 처칠이 받는 노벨평화상은 사실은 선생께는 필요 없는 것입니다. 선생께는 진정한 의미의 평화상이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에 의해 준비되고 있는 줄로 믿습니다.
제가 일본 와서 선생을 처음 대한 것은 1937년쯤인데, 선생이 평화 문제로 시즈오카(靜岡) 고등학교를 그만두시고 잡지 ‘농촌(農村)의 일본(日本)’으로 이미 전도를 시작하신 때였습니다. 그때에도 선생은 지상(誌上)을 통해 초대 기독자들이 로마의 기독교 박해에 대해 철저한 무저항주의로써 승리한 사실을 높이 평가하셨습니다. 저는 소위 태평양전쟁 말기 수년을 선생이 댁에서 지도한 밀턴의 ‘실락원’독서회에 참석했습니다. 최후는 대체로 심한 공습하에서 행해졌습니다만, 이때 선생은 심한 빈궁 속에 계셨던 것으로 압니다. 현관에 ‘영수지도(英數指導)’라는 조그만 간판이 붙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러나 학생은 별로 없는 듯했습니다. 한두 번 한 사람을 상대로 가르치는 것을 본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때의 일로 지금도 잊히지 않는 것은, 밀턴 독서회의 개회 기도를 늘 선생이 하셨는데, 매번 일본이 하루속히 패전하고 평화가 오기를 빈 것이었습니다. 나는 대단한 기도라고 생각하며 아멘으로 이에 회답했었습니다. 또 거의 매주 ‘성서의 일본’에 쓰신 기사 때문에 경시청에 호출을 받으시는 듯해서 걱정도 했으나, 끝내 감금되신 일은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선생은 나의 은사 되시는 고 김교신 선생과 우치무라 문하의 신앙 동지십니다. 김 선생이 태평양전쟁 말기에 ‘성서조선사건’으로 신앙 박해 가운데 투옥되었을 때에도 많은 걱정을 하셨습니다. 김 선생이 동경고사(東京高師)를 졸업하시고 귀국하실 때에도 선생은 김 선생의 손을 잡고 조선의 독립을 빈다고 작별 인사를 하셨다고 합니다. 나는 두 분 선생의 이 신앙적인 교제 가운데서 진정한 기독자의 우정을 보고 기뻤습니다. 수년 전 아직 양국이 국교 정상화되기 전입니다. 선생은 한국에 대한 일본의 사죄를 위해 내한하셔서, 남한 여러 곳을 찾아 일본의 사죄와 함께 믿음에 의한 양국 친선에 진력하셨습니다. 그때는 마침 양국간에 정치적인 타결을 위한 교섭이 한창 진행되는 가운데 차츰 이에 대해 반대 여론이 일기 시작한 때로, 일본서는 선생의 우인(友人)들과 제자분들이 선생 신상(身上)의 위험을 느껴 극력 선생의 방한을 만류하여 후일로 연기할 것을 종용했으나, 선생은 내가 죽어 과거 일본의 죄에 대해 사과가 된다면 더욱 원하는 바라고 이를 뿌리치고 내한하셨던 것입니다.
그때 선생은 각지에서 강연하시며, 산상수훈 중 “화해 후에 예물을 바쳐야 한다.”라는 예수의 말씀대로 한국을 찾아 사죄하기 전에는 기도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고 심중을 고백하셨습니다. 한일 친선 세미나도 벌써 수년 전부터 선생의 주동으로 개최되어 온 것은 물론, 이번 저의 친선 여행도 모든 것이 선생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저는 다만 수동적으로 이를 받기만 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주 안에서 선생의 건강과 일본의 번영을 비는 바입니다. 또 선생 생애의 복음적인 고귀한 평화의 노력이 하나님의 축복으로 전 동양적으로, 세계적으로 결실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부족한 말씀을 여러분이 경청해 주신 데 대해 깊이 감사하는 바입니다.
(1967년 7·8월 제155호)

첫댓글 마사이케(政池仁) 선생의 밀턴의 실낙원 독서회에도 나갔었습니다. --> 새롭게 알았습니다.
일본의 식민 정책은 모든 면에서 한국 중심이 아니라 일본 중심이었습니다. 총독부 시책 중에 한국 산미증식계획(産米增殖計劃)이란 것이 있었는데, 나는 중류 이상의 의사의 집에 태어났어도 소년 시절에 별로 쌀밥을 먹어 본 일이 없습니다. 총독부는 쌀은 다 일본으로 운반해 보내고 한국인에게는 순전히 만주의 좁쌀을 먹인 것입니다. 현재 일본에는 60만의 백의민족이 있어 일본 사람에게 황충이처럼 미움을 받고 있습니다. 이 역시 전날 총독부의 이 경제 착취가 빚어낸 결과에서 나온 것입니다.
--> 일제의 식민지 정책에 대한 체험적 증언이네요.
가령 교육에 대해서만 봐도, 경성제국대학 의과 100명 모집에 처음부터 한국인 학생은 20명밖에 뽑지 않는 방침이었습니다. 이 의학부에는 정형외과를 두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군사 의학이기 때문에 한국 학생에게는 이를 습득시키지 않는다는 방침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그 시대 한국 식자 중에서는 미국이나 유럽에서 서양사를 연구하면 무조건 요시찰 인물의 낙인이 찍히곤 했습니다.
--> 1세대 서양사학자 김성식 선생(1908~1986, 규슈九州제국대학 법문학부 졸업)도 서양사 전공 선택 이유를 항일 정신에 기반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지요.
나는 이중교(二重橋)에 폭탄 하나만 던지면 이런 문제는 대번에 해결을 볼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으나, 이는 역시 기독자가 취할 길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 이중교는 일본 천황 궁성 입구의 다리지요. 노평구 선생의 성품으로 미루어 기독교 신자가 아니었다면, 아나키스트 고토쿠 슈스이처럼 천황 암살을 능히 결행했을 것입니다.
해방 전 일본의 자랑 가운데 하나는 전차나 기차 속에서의 독서열, 비록 노동자나 하녀의 신분일지 라도 이와나미문고(岩波文庫)의 책을 읽었다고 기억됩니다. 그런데 이번 와서 섭섭하게 느낀 것은 이런 모습을 별로 볼 수 없었던 것이며, 더러 있다고 하여도 신문 정도, 그것도 스포츠 신문 정도인 듯했습니다.
--> 1967년에도 이미 일본의 독서 열기는 식고 있었네요. <독서국민의 탄생>에서 보듯이 메이지 시대 일본 국민의 독서열기는 정말 뜨거웠지요. 유럽도 18세기에 독서 국민의 탄생을 경험했습니다. 한국은 아직 그런 역사적 경험을 하지 못했고요.
우치무라 선생은 그의 저작 혹은 청년 시절의 전도 관계로 보아 동북 지방을 심중 깊이 사랑하고 있었던 듯한데, 여기에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중대한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소위 문화에 외진 이 지방의 현실적인 빈천(貧賤) 속에 진정한 기독교 수용의 토양으로서의 일본인 본래의 그 순박한 정신성을 본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번 저는 사실상 동북 지방에 가서 과거의 일본이 여성들의 모습에까지 남아 있는 것을 보고 기뺐으며, 또한 이런 생각을 더욱 깊이 한 바입니다.
--> 김교신 선생이 "《성서조선》아, 너는 소위 기독교신자보다도 조선혼을 가진 조선사람에게 가라. 시골로 가라, 산촌으로 가라. 거기의 나무꾼 한 사람을 위로함으로써 너의 사명을 삼아라."고 한 것과 같은 맥락이네요. 소록도 문둥이들에게서 희망을 본 것도 마찬가지였고요.
마사이케(政池仁) 선생은...밀턴 독서회의 개회 기도를 늘 선생이 하셨는데, 매번 일본이 하루속히 패전하고 평화가 오기를 빈 것이었습니다. 나는 대단한 기도라고 생각하며 아멘으로 이에 회답했었습니다. ...선생은 나의 은사 되시는 고 김교신 선생과 우치무라 문하의 신앙 동지십니다. 김 선생이 태평양전쟁 말기에 ‘성서조선사건’으로 신앙 박해 가운데 투옥되었을 때에도 많은 걱정을 하셨습니다. 김 선생이 동경고사(東京高師)를 졸업하시고 귀국하실 때에도 선생은 김 선생의 손을 잡고 조선의 독립을 빈다고 작별 인사를 하셨다고 합니다.
--> 놀라운 에피소드네요. 진정한 기독자의 우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