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제 13 대왕 명종대왕 이 환은
1534 년 갑오년 ( 말띠 ) 중종 29 년 5 월 22 일 무자일
대궐에서 중종대왕의 제 2 자로 태어났다
명종대왕은 중종대왕이 48 세에 낳은 늦동이이다
모친은
중종의 세 번째 왕비인 문정왕후 파평윤씨로
파산부원군 윤 지임의 여식인데 시집와 딸만 넷을 내리 낳다 명종을 낳았다
명종은 을사년 1545 년 12 세에 경원대군에 봉되고
그 해 7 월 인종이 승하하자 12 세로 왕위에 올랐다 ( 이복형 인종보다 19 살 연하다
명종은 정묘년 1567 년 명종 22 년 6 월 28 일 신해일에
경복궁 양심당에서 승하하니 재위가 22 년이요 수가 34 세이다
명나라에서 받은 시호가 공헌이라 공헌대왕이라 부른다
능은 노원의 강릉으로 모친 문정왕후의 능인 태릉 동쪽에 있다
그 해 9 월 22 일에 장사 하였다
명종비는 인순왕후 청송 심씨로 영의정 청릉부원군 심 강의 여식이다
소헌왕후의 부친 심 온의 직계손이다
1575 년 을해년 선조 8 년 1월 2 일 임인일 창경궁 통명전에서 44 세로 졸하여
그 해 4 월 28 일 강릉에 장사 하였다
인순왕후 청송 심씨소생
순회세자 이 부 ____명종의 외 아들이다
명종 6 년 1551 년 신해년에 왕비 심씨가 낳았다
명종은 총명한 순회세자가 6 살이 되자
조정 대신중 학행이 높은 안 현 조 사수 임 호신 이 준경을 세자 보양관으로 뽑아
가르치게 하였다
순회세자는 10 살에 참판 윤 옥의 여식 무송 윤씨와 가례를 올렸다
이 때 왕의 외숙 윤원형이 자신의 족질 황대임 딸을 세자빈
삼으려 했다 황씨는 중병에 걸린 상태 였다 결국 식을 올리지 못했다
순회세자는1563 년 명종 18 년 계해년 후사 없이 13 세로 요절 하였다
명종내외는 세자빈 공회빈 즉 덕빈 윤씨를 내보내지 않고 데리고 살았다
선조가 등극 한 뒤에도 대우 받으며 대궐 어른으로 살았다
대궐 내명부중 그의 가르침을 받지 않은 이가 없었다
임진왜란이 선조 25 년 1592 년 4 월 13 ( 14 일 )일에 일어 났는데
공회빈이 3 월 2 일에 죽어 관에 안치 되어 있었다
임금이 급히 4 월 30 일에 피난 하게 되자
대궐 후원에 윤씨를 임시 가매장 하라고 지시 하였다
관을 들고 가던 관원들이 왜군이 대궐에 임박 했다는
소문을 듣고 마음이 급하여 땅을 파다 그대로 모두 도망을 가고 말았다
한편 다음 해 10 월 임금이 서울 수복후 돌아와 종묘사직에 제사하고
덕빈의 시신을 파내어 장사하려고 지시 하니
마침 성종 중종릉이 파헤쳐져 시신이 훼손되는 일이 발생 하였으므로
그 처럼 되어 감쪽 같이 사라졌다고 거짓 보고 하여
선조가 시신 없이 순회묘에 같이 장례를 치렀다
그러나 마지막 목격자 한 궁녀가 증언하였다
임금이 떠나고 조금 후 성난 시민 일부가 대궐에 들어와 불을 질렀고
윤씨의 관도 같이 타버렸습니다
생전에 불교신자 였던 마마가 세상에 흔적없이 가고 싶어 죽거 든 화장 해 달라고
말하곤 했는데 소원대로 되었습니다
그런데 인조때 병자호란에 또 순회세자묘 신주가
불에 타 버려 다시 만들어 올렸다
아무튼 기대가 컸던 순회세자를 잃고 명종내외는 날마다 울고 또 울었다
하루는 문득 임금이 눈물을 닦으며
내가 울어 무엇하리 을사년에 충성스럽고 어진 신하들이 죄 없이 떼 죽음을 당할 때
( 남의 자식을 )명색이 임금인 내가 말리지 못하였으니
어찌 내 집안에서 대대로 군왕이 나오길 바랄 수 있겠는가 하고 마침내 울지 않게 되었다
명종이 12 살로 보위에 오르 던 해
인종의 외숙 윤 임과 인종조 충신을 몰아내려고
인종의 관이 아직 대궐에 있을 때 명종 외숙과
간신들이 을사사화를 일으켜 그 과정에서 100 여명의 사람이 죽고 다친 일을
평생 통탄하여 한 말이다
명종은 풍류와 여색 음주 오락을 싫어하여 후궁을 두지 않았다.
모친의 권유로 억지로 후궁을 두었으나 딸 조차 얻지 못하였다
후궁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없어 생략한다
명종은 침실 좌 우에
마음을 맑게 가지고 욕심을 적게 하라
보는 것은 분명히 듣는 것은 넓게 하라
정성 공경 화평 근면하고 어진 사람을 좋아하고 학문을 즐기자
라는 구절을 써 붙이고 스스로 반성 하였다
일찍 일어나고 밤 늦게 잠 들며 정무를 복 틈나는 대로
경전 역사를 열람하고 점잖게 종일토록 앉아 있으며 비록 피곤하여도
기대거나 비스듬히 앉지 안았다
명종 임금 내외는생전에 욕심 없기로 유명 했는데
그저 시호로 밝을 명자 하나 얻으면 족하다 했다고 전한다
재위 기간 내내 모친 문정왕후와 외가에 의해 정치가 좌우되니
간신이 득세 하여 현명하고 선량한 신하들은 귀양 가거나 죽었다
그러나 여러차례 상소를 받고 임금이 점차 깨달아 군자와 소인의 실정을 파악하게 되자
오직 공정한 언론만 받아 드리기 시작 했는데
마침 문정왕후 마저 세상을 떠났고
외숙들을 물리쳐 모두 밝은 정치를 기대 하였다
중종때 기묘사화에 억울하게 죽은 조광조등 많은 사림의 신원을 복위 시켜
원한을 풀어주고 현량과를 다시 실시 하여 어진 선비를
많이 등용 하기 시작하자 백성들이 임금에 거는 기대가 커서
나라가 희망에 차 있었는데 2 년 만에 34세로 승하하였다
명종대왕은 친정 하게 되자 정치를 잘 해 보려고
2 년 동안 무진 애를 썼으나 병약 하였던 것이다
모친인 문정왕후 윤씨는 중종 보다 13 살 아래로 세 번째 왕비다
6 품 관직으로 있던 윤 지임의 여식으로
왕비 간택단자에 오른 뒤 병이 나서 대궐 간택식에 못 갔다
중종은 다른 사람으로 정 했다가 마음을 돌려
윤 지임 딸 윤씨가 병이 낫 거든 함께 다시 보자고 명 하였다
얼마 지나 중종이 면접 한 후 결국 문정왕후 윤씨가 선택 되었다
문정왕후가 간택되기 전 일화가 하나 더 있다
당시 최고 명성을 날리던 점장이가
새벽에 기도하고 하루 점을 치고 나서 오늘은 귀한 손님이 제일 먼저 올 것이니
깨끗이 마당을 쓸거라 하고 종자에게 일렀다
과연 조금 후 행색이 허름한 선비가 들어오므로
그 종자가 겨우 하인 하나 거느린 사람이 무슨 귀인이람하고
중얼 거리며 인사도 대충 하였다
그 선비는 방안으로 들어와 술사에게 종이를 내 밀며
이게 시집 갈 내 딸 사주이니 봐 주시게 하였다
찬찬히 들여다 보던 술사가 갑자기 일어나 큰 절하고
따님은 왕비의 사주를 타고 나 곧 귀하게 될 것입니다
하였는데 얼마 후 왕비가 되었다
윤 원로 윤 원형형제는 중종의 처남들로 문정왕후의 친정 오라버니와 남 동생인데
세자 인종을 모함하고 해 하려 하니
인종의 외임과윤 임과 인종의 누님인 효혜공주의 시아버지 김 안로 등이
세자보호를 자처 하고 나서 대윤 윤 임파 소윤 윤 원형파가 대립 하였다
문제는 윤 임과 김 안로가 충심으로 인종을 호위 한 것이 아니고
권력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들로 소윤과 다를 것이 없었기 때문에
인종에게 힘이 되기는 커녕 오히려 짐이 되었다
마침내 중종이 죽자 하루도 거르지 않고 유언비어를 조작하여
대비의 귀에 들어 가니 문정왕후는 명종과 자신의 목숨을 보장하라고
호통치고 울고 불고 시위 하는 등 하루도 대궐이 편할 날이 없었다
소윤들은 아침 저녁으로 당장 큰 일이 일어 날 것 처럼 저쪽
( 인종과 대윤 )에서 언제 반격을 하여 문정왕후와 어린 명종을 제거 할 지
모른다고 부추겨 말하여 불안하게 했다
인종 임금의 인품은 세상에서 다 인정하는 터라 모두 탄식였으나
아무도 세력 없는 임금을 위해 목숨걸고 나서지 않았다
부친상으로 건강을 해친 인종이 밤 이슬 맞으며
새 어머니 문정왕후에게 석고 대죄 하기를 여러 차례 하였다
마침내 왕이 건강을 해쳐 8 개월 만에 죽고
명종이 12 세로 왕위에 오르자 문정왕후가 대비되어 수렴청정하였다
명종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모친 문정왕후에게 회초리를 맞을 때도 있었다
사람들은 때때로 힘이 하나도 없이 눈물 자국이 남은 채로 나오는 임금을 보아야 했다
밖으로 네가 누구 땜에 임금이 된 줄 아느냐
모두 나와 내 오라버니들 힘이다 힘 하는 대비의 목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세자 시절 인종이 밤에 잠 자고 있을 때 세자궁에 불이 났는데
세자가 밖으로 나가 길 거부하여 세자빈이 연유를 물으니 그냥 타죽고 싶다
어머니의 뜻을 거스를 수 없다는 말을 하므로
세자빈이 기가 막혀 어찌 할 바를 모르고 발을 동동 굴렀다
이윽고 중종대왕이 큰 소리로 세자를 부르며 달려와 세자가 목숨을 건진 적도 있었다
문정왕후는 명종이 20 세가 되자 수렴청정을 거두었으나
막후에서 여전히 정사에 간섭하였다
불교를 지나치게 숭상하여 보우를 중용하여
불사를 자주 일으키니 국고를 낭비 한다는 지적을 받았다
보우는 자신이 주지로 있는 광주 봉은사 (현 강남 봉은사 )옆으로 중종능을 이장 하였는데
비가 오면 물이 차서 훗 날 문정왕후는 지금의 태릉에 묻히고
중종능은 왕릉은 두 번 이상 옮기지 못한다 하여 그대로 두었다
정릉이 물에 잠기는 흉지라서 명종의 후사가 끊겼다고 하나
결국 선조는 중종의 손자이니 그 말도 헛 된 말이다
명종 7 년 나라의 기강이 해이 한 틈을 타서
대도 임꺽정이 활개를 쳤는데 3 개월 만에 체포 되었고
명종은 명종 8 년 부터 친정 하게 되자
외숙과 모친을 견제 하기 위해
자신의 배위 인순왕후 심씨의 외숙인 이 량을 중용하였으나
그 또한 권력을 남용하여 조정에 폐를 끼쳤다
명종 10 년 무렵에는 왜구와 여진족이 번갈아 가며 조선을 침략 하였다
명종 20 년을축년 1565 년 사월 초파일에
회암사에서 무차대회를 열 예정이었다
무차대회란 중을 불러 공양하는데
중의 수를 제한 하지 않고 오는 대로 받아 주는 행사를 말한다
역시 왕사 보우가 주관하였다
이 행사를 보려고 전국에서 승려와 백성들이 분주히 몰려 들었다
허약한 명종대왕을 위한 기도 행사이기도 했지만 백성들의 비난의 목소리가 높았다
4 월 7 일날 밥 하는데 밥의 색깔이 핏 빛으로 변 하여 모두 괴이 하게 여겼다
그런데 그 다음 날 식에 참석하러 거둥 하던 문정왕후가 쓰러져 졸 하고 말았다
보우는 도망가다 잡혀 제주도에 유배 되었고
목사 변 협에게 타살 되었는데 듣는 사람들이 동정 하지 않고 통쾌하게 여겼다
대비 동생 윤 원형의 첩 정난정은 본 처를 내쫓고 정경부인이 되었고
문정왕후와 통하며 온갖 악행을 저질렀다
그의 집 앞은 뇌물을 바치려고 우마에 선물을 싣고 온 사람들로
붐벼 마치 저자거리 ( 시장 )와 같았다
한양 도성안에 있는 집 만 16 채에 달했다
정난정은 쌀 두섬으로 밥을 지어 말에 싣고가 두모포 강가에서
물고기에게 밥 주는 행사를 일년에 두서너번 하였는데 사람들이
백성의 밥을 빼앗아 물고기 밥으로 준다며 비난 하였다
을축년 어느 날 그 곳 두모포 어부가 배 만한 물고기를 잡아
임금에게 바치니 한 사람이 물고기가 바다에서 강으로 와 죽으니 이는
윤원형의 형자는 다닐 행과 물고기 어자가 합친 것이니
곧 윤 원형이 죽을 조짐이다 라고 풀이 하였다
그러더니 그 해 곧 문정왕후가 느닷없이 급사 하고 윤 원형은 그 즉시 몰락하여 죽었다
명종은 그 후 바른 정치를 해 보려고 애썼으나
건강이 악화 되어 2 년 만에 승하하고 말았다
명나라에서 받은 시호가 공헌이다
명종대왕을 별칭으로 강릉 혹은 공헌대왕으로 부른다
명종은 인종의 비 즉 형수 공의대비 박씨가 을사년 이 후에는
변고 없이 잘 지내도록 살펴 주었고 ( 을사년 인종이 죽고 명종이 등극한
해 궁녀 6 명은 거짓 자백을 강요 당하였으나
끝내 상전인 왕비를 위해 모진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버티다
가슴을 둔기로 맞고 피를 토하고 죽었다 )
( 그 사건 때 명종은 12 세로 임금이나 아무것도 몰랐었다 )
또 인종의 외숙 윤임이 억울하게 죽었고 부친 윤 여필도 삭탈관직 되었으나
끝까지 녹봉을 지급하고 윤 임의 아들들이 귀양가거나
죽었는데 복작 시켜 주었다
또 중종의 소생들을 대궐에 자주 불러 우애를 나눴고
특히 덕흥군의 아들 3 형제를 총애 하여 대궐 사부에게 공부 시켰다
명종비 인순왕후 청송 심씨는 명문가 태생으로 욕심이 없고 바르고 엄정하여 신망이 있었다
대궐 웃 어른으로 우대 받았으며 훗 날 양자 선조의 극진한 효도 받았고
선조 8 년 44 세로 졸 하였다
조선 개국공신 청성백 좌의정_____심 덕부
심덕부의 5 남 영의정 세종대왕의 국구 ( 장인 )____심 온 즉 세종배위 소헌왕후의 부친이다
심 온의 2 남 영의정____심 회
심 회의 아들 내자시 판관____심 원
심 원의 아들 사헌부 장령____심 순문___연산군에 죽임 당하였다
심 순문의 아들 증 영의정___심 연원
심 연원의 아들 영의정 명종대왕의 국구___심 강( 8 남 2 녀 )
심 강의 장녀 명종대왕 왕비____인순왕후 심씨
심 인겸
심 의겸_____청양군 서인의 영수 대제학을 역임 했다 심수현 심환지 심순택이 영의정 지낸 후손이고 또 심택현 심풍지 심경택이 판서 지냈다
심 예겸
심 지겸
심 신겸
심 충겸____병조판서 아들이 영의정 심 열이고 6 대손녀가 장희빈 소생 경종대왕 왕비 단의왕후 심씨다
심 효겸
심 제겸
청송 심씨___임 영로에게 출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