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킨타이어 - 덕의 상실 (1996)

[물빛]

개인-공동체 넘어서는 곳에서

21세기 이끌 새 규범 모색

생태학의 파국은 도덕의 위기와 맞물려 있다. 기술과 도덕의 관계는 언뜻 쉽게 이해될 것 같지만, 문제는 그렇게 간단치 않다. 기술은 사용하는 사람의 의도에 따라 좋고 나쁨이 갈라질 뿐, 그 자체는 본래 가치 중립적이라는 오랜 편견을 상기한다면, 기술은 옮고 그름을 판단하는 도덕과 무관한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는 덕의 상실은 현대사회의 기술적 사유 방식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의심으로부터 출발해, 덕이 실종된 기술 시대에 어떻게 덕을 구할 수 있는가 하는 역설적 시도를 하고 있다.

영문 제목 <After Virtue>**가 암시하듯이 우리는 근본적으로 이중의 압박을 받고 있다. 우리는 어떻게 실종된 덕을 되찾을 수 있는가. 인간의 모든 행위를 비도덕적 관점에서 파악하고 정당화하고자 하는 기술의 명법이 지배한다면, 이런 질문은 절망적 인식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매킨타이어는 기술 시대에 가능한 도덕적 행위의 실마리를 "도덕은 덕이 아니다"라는 도발적 명제에서 발견한다. 도덕은 우리가 구체적 삶을 영위하는 지금과 이곳, 즉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인간 본성을 전제하고, 이 전제로부터 보편적 행위 규범을 이끌어낸다는 점에서 기술적 사유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근대의 기술적 사유 역시 시공간을 초월한 보편적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가!

인간의 다양한 삶을 하나의 보편적 진리로 환원하고자 하는 객관주의는 현대 기술과 도덕의 발원지다. 역사 없는 진리, 실천이 없는 도덕. 만약 21세기의 기술 시대가 여전히 이 두 명제로 특징지어진다면, 이를 뒤집는 것이 해결의 단초가 될지도 모른다. 과학과 기술을 인간적 삶이라는 관점에서 재조명할 수 있는 역사적 맥락의 회복은 우리를 추상적 실천으로 이끌 수 있는 길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역사적으로 형성된 공동체적 삶으로부터 유리된 기술인은, 매킨타이어가 정확하게 집어내고 있듯이, 하나의 '유령'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자연과 도덕의 위기가 비인격적 원리의 절대화에 기인한다면, 자연과 인간성의 회복은 우리의 삶으로부터 산출되고 또 거꾸로 영향을 미치는 인격적 규범을 통해서만 이뤄질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도덕이 비인격적 원리에 기반을 두고 있다면, 덕은 구체적, 역사적 삶에 침전된 인격적 규범을 토대로 한다. 덕이 "지금 그리고 여기" 살고 있는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도덕은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인 특성"을 정당화의 근거로 내세운다. 그러나 우리는 개인의 권리를 무시하고 공동선을 실현할 수 없으며, 공동체를 배제하고 권리를 주장할 수도 없다. 우리는 21세기를 이끌 새로운 규범을 오직 "개인주의와 공동체주의를 넘어서는 곳"에서 찾아야 한다. 이는 권리와 공동선, 개인주의와 공동체주의를 대립적인 것으로 파악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

정의는 결코 개인과 개인의 문제로 국한되지 않는다. 기술 시대의 정의는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 지금 여기 살고 있는 사람들과 인류 전체 역사와의 관계에서 파악돼야 한다. 인류의 역사는 다시 행위의 중심으로 들어와야 하지 않을까. 후세에 남길 만한 가치가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과학과 기술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우리가 살 수 있는 역사, 이것만이 개인주의와 공동체주의를 넘어서는 공동의 토대이다.

"역사는 이야기로 전해지기 전에 항상 삶으로 체험되는 법"이라는 매킨타이어의 말은 우리가 앞으로 들어야 할 기술 시대의 화두다. (이진우/1996.5)

*Alasdair MacIntyr

1929~. 공동체주의 윤리, 덕윤리의 대표 주자인 스코틀랜드 출신 철학자.

** 1996년 출간된 <덕의 상실>(문예출판사) 324쪽 인용

"나는 누군가의 아들 또는 딸이고, 누군가의 사촌 또는 삼촌이다. 나는 이 도시 또는 저 도시의 시민이며, 이 동업조합 또는 저 직업집단의 구성원이다. 나는 이 씨족에 속하고, 저 부족에 속하며, 이 민족에 속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 좋은 것은 이러한 역할을 담당하는 누구에게나 좋아야 한다. 이러한 역할의 담지자로서, 나는 나의 가족, 나의 도시, 나의 부족, 나의 민족으로부터 다양한 부채와 유산, 정당한 기대와 책무들을 물려받는다. 그것들은 나의 삶의 주어진 사실과 나의 도덕적 출발점을 구성한다. 이것은 나의 삶에 그 나름의 도덕적 특수성을 부분적으로 제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