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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시 석왕동 쌍릉 대왕묘.
익산시 석왕동 쌍릉 대왕묘에서 발굴된 신라계 적갈색토기.
쌍릉 대왕묘에서 출토된 여성치아.
기준조선.
위만조선으로 부터 기원전 195년 멸망후, 한반도 이주.
bc194년 마한국건설.
1.무강왕[武康王] 애왕[哀王]
-기준
bc194- 기준조선 마지막왕. 목지국[월지국]왕.
평양 상마한에서 낙랑국과 싸우다가 전사
[속설에는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분통해서 바다로 들어가 자살하였다고 전함]
2 강왕(康王) 기탁(箕卓) B.C 193년~B.C 189년
-천안 직산 중마한국시작.
3 안왕(安王) 기감(箕龕) B.C 189년~B.C 157년.
4 혜왕(惠王) 기식(箕寔) B.C 157년~B.C 144년.
5 명왕(明王) 기무(箕武) B.C 144년~B.C 113년.
6 효왕(孝王) 기형(箕亨) B.C 113년~B.C 73년.
7 양왕(襄王) 기섭(箕燮) B.C 73년~B.C 58년.
8 원왕(元王) 기훈(箕勳) B.C 58년~B.C 33년.-중마한국 멸망.
우평-고구려[황룡국/유리왕]로 망명-북원선우씨로 개명.
우성-백제[온조]로 망명- 덕양기씨로 개명.
우량-신라[탈해이사금]로 망명-상당한씨로 개명.
9 계왕(稽王) 기정(箕貞) B.C 33년~B.C 17년
기준조선>직산중마한국 멸망으로 계왕 익산 금마로 남하.
익산 마한인들이 계왕의 왕족을 내세워 bc17년? 하한[익산 금마연립마한국]을 건국.
무강왕(武康王)은 기준을 말하는 것으로,
기자조선의 후예인 기준조선이 위만조선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기준이 평양으로 이주하여 상마한을 건설하자, 평양의 낙랑국인들이 거병하여 전투로 기준이 전사하고,
아들 상장군 기탁이 천안으로 남하하여 직산 중마한국을 건설한다.
안성의 웅천 이북까지 장악하며 남하하던 백제의 온조에게 천안 직산 중마한국이 멸망당하자,
익산 금마로 남하하여 마한인들이 계왕의 왕족을 내세워 연립정권을 수립하고
하한[익산 금마 연립마한국]을 건설한다.
1917년 조선총독부에서 발굴조사를 하였으나 이미 부장품은 도굴되어 있었고
무강왕[武康王], 왕비로 판단되는 애왕[哀王]의(비)? 또는 또다른 애왕[哀王]의 치아와
신라계 그릇 몇점이 발견되었다.
[무강왕의 묘안에 또다른 애왕[哀王]을 급히 합장했을 가능성도 생각해 보아야함].
전주를 중심으로 하는 전나국[전라국]은
직산 중마한국이 온조백제에 멸망하고 익산으로 남하하자,익산 금마연립마한국[하한]을 전면에 내세우고
낙랑,가야,백제,후동진,양나라망인,신라등에 세금을 받게한다.
하한이 세금과 조공을 받아 차지하게 하고 하한을 내세워 전나국을 보호하는 안전판으로 이용하려고 하였다.
전라연맹체마한의 중심국인 전나국[전라국]이 한반도 주인으로서 소도역활을 하여
하한을 전면에 내세우고 각국에서 정치적으로 패한자들이 숨어 들어오면 보호해 주면서도
하한을 전면에 내세워 각국으로 부터 조공과 세금을 받게하였다.
온조 백잔 한성계로 이어지는 문주왕,삼근왕계를 1년마다 죽여 갈아치우고 왕위에 오르는
동성왕[반도출신/이잔계], 무령왕[왜에서넘어옴],성왕 이잔계의 뒤를 이어
대륙에서 넘어온 위덕왕[무왕,의자왕으로 이어지는 위구태백제]이 왕으로 오른다.
하한에서 위덕왕에게 조공과 세금을 요구하자, 위덕왕이 이에 응하지않고 하한을 침략하고 돌아가자,
하한은 위구태 백제에 복수할 요량으로 마한부흥을 위해 신라에 세금과 조공을 요구한다.
신라 진지왕[眞智王 576~579/김춘추의 조부]은
백제 위덕왕이 익산 금마연립마한국[하한]을 침략하고 돌아간 사실을 알고 하한을 다시 침공한다.
하한[익산 금마 연립마한국]은 수도 금마 금성(金星)에서 알야산성으로 옮겨
최후까지 진지왕과 전투를 벌였으나 패하고 만다.
금마 금성과 알야산성에서 비수대전의 주역이었던 사안, 사현 장군의 사탁씨(사택씨), 사타씨가
하한으로 들어오고 환온, 환현가문의 일부는 하한으로 들어왔다가 동성왕, 진지왕, 위덕왕의 침공으로
나주의 금성(錦城)으로 들어가 예장라씨(나씨),나주라씨(나씨) 등으로 분화하며,
일부는 신라 금성(金星)으로 포로로 끌려가 금성라씨(나씨) 등으로 분화한다.
나주로 들어간 환온, 환현가문의 예장씨는 같은 지역임을 피하기 위해
금성(金星)에서 금성(錦城)으로 대체한다.
사안,사현가문은 산서성 장치시 장사지방,사탁지방에서 이주해오는 세력이라는 것을 한자로 증명해주고 있다.
사탁씨 일부는 여수,사천 등으로 남하한다.
사마예 가문의 후예였던 사마씨 황제 가문 일행은 일본으로 도해하여 성씨가 현재까지도 남아있다.
침미다례국의 일원이었던 여수, 사천의 사탁부가 진흥왕의 팽창기 때 신라 사탁부 영토로 들어간다.
여수,사천의 사탁부에서 신라 금성으로 들어간 진평이 신라 왕위로 오르면서
진지왕을 3년만에 폐위시키고 딸이 선화공주였기때문에 하한을 백제 위덕왕>무왕에게 돌려준다.
백제 무왕은 익산 왕궁리로 천도하려고 미륵사를 세우며 왕궁을 건설한다..
공교롭게도 익산 금마는 고구려가 멸망하고 안승의 후고구려인 보덕국이 세워지는 곳이기도 하다.
고구려지명은 익산 영등동,군산 영흥동,완주군 삼례등으로 현재까지 남아있다.
발해가 멸망하고 주류 왕가 10~30여만 명이 고려로 망명하여 들어오게 되는데
고려국에서 망명을 거부하다가 같은말을 사용하는 동족이라는 점에서 망명을 허용하여
10여만명이 평양 이북에 정착하게 하는데, 이때 남부지방으로는 나머지 발해인들이 고구려 후예가
다수 살고있던 익산지방으로 모여 들었을 가능성도 많다.
애왕[哀王]은
발해 제15대 마지막왕 이름[애왕/哀王 907~926 대인선]이기도 하다.
보장왕의 동생 안승의 후고구려>보덕국 후예들이 익산 금마에서
발해 제2대왕 무왕[719~737 대무예/大武藝]을 기리기위해 세웠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한다.
또한 발해 멸망후 고려 익산지방으로 들어온 망명인 잔여세력들이 세웠을 가능성도 있다.
무왕(대무예)은 대조영[고왕]의 아들로 산동성 등주시를 공격하여 세력권에 넣고,
당나라의 낙양,서안으로 들어가는 무역교통로이자, 전략적요충지인 대당무역로를 장악하고
대신라무역을 통제하여 상업무역을 독점하였다.
발해 문화에서 신라토기가 다량 발견되는것은 이런 연유이다.
나라가 멸망하고 새로운 신천지로 이주하면
왕궁을 건설하는 것보다도 가장 먼저 하는일이 국가의 정통성을 세우기위해 시조묘를 세우는 일이다.
현재 북한 평양에도 기자묘가 조성되어있고 천안 직산 중마한국에서 익산 금마로 남하하여
무강왕 기준의 마지막 후예인 계왕과 그 왕족들은 익산 마한인과 연립하여 하한을 세우고
나라의 정통성을 세우기위해 무강왕 기준의 시조묘를 가장 먼저 세우려 했을것이다.
그런 연유로 무강왕 기준과 왕비를 애왕으로 격상시켰거나
주변에 소왕릉을 두어 같이 모신것이 아닌가한다.
시조 합장묘였기때문에 오래도록 유지되면서 발견되는 것으로 보이며,
일개 왕중의 한명이었다면 소실될 가능성이 높았을것이다.
백제가 하한을 점령하고나서 반란을 무마시키기위해 무왕때 하한을 아우르려는 요량으로
무강왕 기준마한[하한]을 잇겠다고 말했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한다.
선화공주는 사택씨/사탁씨가문의 후예로 사택적덕 가문의 딸이었다.
그러므로 진평왕과 그의 딸 선화공주의 선조는 사탁씨/사택씨가문으로 기준마한에서 살고있다가
백제 동성왕시기 최초로 와해되었을때 남마한 침미다례국 여수,사천으로 남하하였다.
[백제의 성왕때 백제에 복속된 충북지방의 개별가야를 신라가 북한산주(여주, 이천, 광주, 충주)에 이어
점령해 들어오자, 성왕은 웅진 공주백제에서 20여만을 이끌고 수도를 사비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로 고치며 신라에 빼앗긴 충북지방을 모두 탈환하며 옥천, 보은, 영동지방까지 수복한다.
이때 익산 금마의 하한과 전북지방의 마한인까지 끌어들여 도움을 받아 회복했기 때문에
마한황제제왕(馬韓皇帝齊王)을 겸해 남부여왕으로 오른 것으로 판단된다.
고려 삼별초군이 제주 탐라에서 대마도와 오키나와로 피신하는데,
대마도로 피신한 삼별초군은 현지인과 삼등분해서 대마도에서 살아가고,
오키나와에서도 현지인들과 전쟁없이 삼등분해서 600년 유구왕국을 이어가는 것으로도
증명되고 있다].
하한을 동성왕때 멸망시켰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백제 역사 이야기이고,
하한에서는 동성왕의 침략을 인정하지 않고있었다.
그래서 하한에서 동성왕에 이어 위덕왕때 조공과 세금을 요구하였다가 또다시 침공당하는것이다.
동성왕[웅진 공주천도]이 문주왕과 삼근왕을 1년마다 죽여 갈아치우고 왕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하한이 백제 위덕왕에게 조공과 세금을 요구하였다가 침공을 받고,
백제에 복수할 요량으로 마한부흥을 위해 신라에도 조공과 세금을 요구하자,
신라 진지왕이 이 사실을 알고 하한을 침략하여 점령하고 돌아간다.
진흥왕팽창기때 신라영토로 들어갔던 여수,사천 사탁부의 진평계가 신라 금성으로 들어가
진지왕을 3년만에 폐위시키고 왕위에 올라 하한을 백제 위덕왕에게 돌려주게 되는것이다.
[진평의 셋째 딸이 선화공주, 위덕왕의 아들이 서동태자(무왕/마동태자)].
여인에게 대왕이라는말을 사용했을리는 만무하므로,
대왕이라는말은 시조를 말하는게 분명하며, 나라를 옮기거나 천도했을때의 시조묘는
의례히 합장으로 모시는게 그당시 관례였을것으로 판단된다.
쌍릉 대왕묘에서 여인의 치아가 발견되는것은 이런 연유가 아닌가한다.
시조묘를 지키는 역활을 하는 소왕릉을 주변에 두지 않았나 한다.
이당시는 양심철학이 지구의 중심철학이었으므로 하한이남의 전나국[전라국]등은
한반도 원래 주인이라 낙랑,가야,백제,양나라(경기인),후동진,말갈,신라등이
정치적으로 패했을 경우를 대비하여 신성불가침구역으로 만들어놓고,
소도지역으로 피신하기위해 이용하려고 서로 침략하지 못하고 보호해 주고있었다.
신라는 마립간시대때 영토안에 소도를 설치하고 직접 운영하였다가, 지증 마립간 시대 때
왕권이 신권을 누르고 소도안으로 난입하여 정치적 패자들을 잡아가면서 소도의 기능이 쇠퇴한다.
익산 쌍릉 대왕묘에서 발견된 서기 600년대/7세기 전반의 신라토기는
시기상으로 보면 무왕[600~641]과 선화공주시대의 토기이다.
시조묘가 아닌경우에 이례적으로 남녀합장으로 모시거나 근처에 소왕릉을 두는 경우는
서동왕자와 선화공주의 사랑이야기 같은 아름다운 이야기가 남아있는 경우일것이다.
600년대 초반의 토기를 700~800년대까지도 특수층이나 상업무역세력이 사용했을가능성도
배제하지 않을수없다.
가문 대대로 내려오거나 선대가 상업무역으로 가치가 나가는 귀중한것을 구해서 보관해 오던것을
피장자가 묻힐때 함께 묻어주었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한다.
산동성 등주시를 장악하고 대당신라무역을 독점한 발해[요녕성/요양(조양,심양)~길림성 동모산,연해주]가
1~2세기전의 신라무역품을 가지고 있는 경우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발해가 멸망하고 10~20여만명(최대 30여만)이 고려로 망명하여 들어왔을때 한강이남으로 남하한
발해인들은 고구려 선주민이 살고있던 익산지방으로 가장 많은수가 이주해왔을 가능성도 높다.
소왕릉까지 발굴해야만 알수있지 않을까한다.
만약 발해의 제2대 무왕과 제15대 마지막왕 애왕[哀王] [907~926 대인선]부부의 시조/합장묘인것으로
밝혀지게된다면 이것은 엄청난 발견이 되는것이다.
발해에서 가장 위대한 무왕과 마지막 애왕 부부의 합장묘를 쌍릉과 소왕릉으로 모신것이 된다.
무왕 대무예때 처럼 다시한번 원대한 꿈을 위해 비상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담아
무너져가는 발해를 되살려 보기위해 애왕부부의 합장묘를 쓴것이 되기때문이다.
발해 왕조를 모시는 묘로 판명된다면 가장 가치가 높아질것으로 보여진다.
백제 무왕의 묘로 판명된다고 하더라도 일본 왕실로부터 가장 큰 관심을 받게될것이다.
무강왕[武康王]은 무로써 나라를 편안하게 만든 왕이고
애왕[哀王]은 나라를 잃어 슬픈 비애를 가진왕 이라는 뜻이다.
백제 무왕은 신라 70성을 공취하던 강성한 왕이었으므로 애왕이라고 불렀을리가 없다.
발해 마지막왕 애왕[哀王] 대인선은 제대로 들어 맞는 왕이름이다.
발해 2대 무왕[대무예]에서 애왕[대인선]의 왕비까지를 모신 시조/합장묘일가능성까지 염두에 두고
발굴해야 되지 않을까 한다.
발해 대건황(大虔晃)[일본에 장경선명력경(長慶宣明暦經)이라는 달력을전해준 12대왕]
859년 오효신(烏孝愼)등 104명의 사절을 일본에 파견하여 달력을 전해주고 일본의 문명화를
촉진시켜 주었는데,일본이 조선시대 임진왜란때 유일하게 호남지방만 점령에 실패하는것도
우연이 아닌 이유이다.
정유재란때 전주가 점령되지만 완주군 이서지방까지만 추격당하고 익산지방으로는 넘보지 못하였던 것도
무의식적으로 은혜를 원수로 갚으면 안된다는 것을 느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가기도 한다.
고려말 왜군선 500여척이 군산 앞바다로 들어왔다가 최무선의 화약발명으로 고려 수군 100척에 의해
진포대첩으로 섬멸을 당하는데 육로로 달아나던 왜군은 이성계에 궤멸당하고,
이시기에 아시발도가 이끄는 정규군화된 1만5천이 넘는 왜군이
양광도[경기동부,충청북부,충북,경북북서부]를 유린하며 북상하다가 이성계에게 패하자,
왜군이 3군으로 나누어 한무리가 호남을 약탈하기 위해 충남 논산을 거쳐
전북 함열군[익산시 함열읍] 황등면으로 들어온다.
(함열 황등 황산~ 남원 운봉 황산까지를 황산대첩이라고 함)
이때 본군을 이끌고 왜군의 퇴로를 차단하려고 평탄코스를 이용하여 배후로 돌아가던 이성계에게
다시 패하고, 왜군이 지리산으로 후퇴하여 집결한후, 남원시 운봉면 황산대첩으로 궤멸되는데,
절묘한 시점에 익산으로 들어오다가 이성계에게 패하는것도 보통 우연이 아닌 이유이다.
무강왕[武康王]의 강[康]은 강회지방,회수지방에서 이주해 왔다는 뜻이며,
이곳은 안휘성 서화[구 하남성 상구현],몽성지방에 있던 기자조선의 후예를 말하며,
기자조선은 서불한우로국으로 이어지며 서국이 건설된다.[서국 수도 이름이 서라벌]
서불한우로국[서국,불국,한국,우국,로국]을가리켜 일명 강회신라라고 하였다.
강회지방은 안휘성 서화에서 강소성 서북부의 회수까지를 말한다.
강소성 남경[南京/난징/견강]은 동진의 수도였으며 수도 이름이 건강[建康]이었다.
전진의 부견이 영가의 난을 일으키고 동진을 침공하여 남북조 천하통일전쟁을 일으킬때
견강부회[牽强附會-흉노(회계)따위가 동진의 수도 견강을 갖다 붙이려함]라는 말이 처음으로 나온다.
-가당치도 않은 말을 억지로 끌어대어 자기에게 유리하게 이치나 조건을 맞추다.
p/s
삼국사기만 봐도.
660년 백제 멸망기때 광주지방은 전주를 중심으로 하는 전나국[전라 마한연맹체]에 포함되어 있다가
우르>우륵6가야의 무진주[茂鎭州/무주,진안,장수/왜까지 연결하는 실크로드 교통로]가
신라에 점령되자, 무진주[茂鎭州]인들이 전나국까지 점령될것을 예상하고 광주지방으로 피신하여
무진주[武珍州]로 알려진다.
[전나국이 한반도 원 소유주라 북으로는 백제, 신라가 익산 금마의 하한까지만 침략하고
전라 동북으로는 대가야, 신라가 임실슬치,진안웅치,완주 이치까지 점령하고
전나국은 침략하지 못하고 있었음.
이 당시에는 양심철학이 지구의 중심철학이었던 시대였기 때문에, 국가간 전쟁이나
자국내 정치투쟁에서 패했을때 피신하기 위해 소도가 필요하였으며,
본래 원 소유주를 치게 되면, 자국내에서 이웃의 땅과 재산을 빼앗아도 된다는 논리가 형성되기 때문에,
기초질서 붕괴로 자국이 혼란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차마 침공하지 못하고 있었음].
그래서 대가야가 마한 동부 우르가야 지방을 점령하여 임실 슬치,진안 웅치,완주 운주 이치 고개에서
국경을 정하고 최첨단 무색청자를 생산하여 각제국에 팔면서 실크로드 중간교통로를 차지하고 부를 형성하자,
왜로의 실크로드 교통로를 차지하기 위해 신라가 562년에 대가야를 멸망시키고 차지한다.
대가야인 일부는 왜로 이주하고, 일부는 현지에 남고, 상당수는 호남 중동부 지방으로 밀려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무진주[茂鎭州]는 그당시 최첨단 도자기[청화백자의 선조인 무색청자]를 굽는 지방으로
하한,전라 연맹체 마한[전나국], 양나라/진나라[경기인],낙랑을 아우른 후동진,
[하한과 나주이남으로 남하],
침미다례국 [나주~여수,사천의 사탁부],백제,신라,고구려와, 금관가야를 통해
왜까지 무역로를 연결하는 실크로드 교통로 지방이었다.
장수군 장계면에는 우르가야 시대 최대의 철생산지가 있어 왜까지 실크로드 교통로를 연결하였다.
알렉산더가 시리아 서북부의 파르티아 지방을 점령하고 내몽고 서부 사라선맹 지구에서
실크로드 무역을 위해 머물렀던 아랍 사라센인이 세운 아케메네스 제국을 무너뜨리고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를 점령하여 셀레우코스 왕조를 세우자, 대월지가 감숙성과
내몽고 시라선맹에서 거병하여 사마르칸트 [서역, 동유럽이 만나는 실크로드 중간 물류 기착지]를
점령한다.
팔레스티나 갈대아 가나안지방까지 진출했었던 우르(우륵) 6가야인은
이라크 남부 우르국[서역, 동유럽, 아프리카 이집트를 연결하는 철의 삼각주]에서 동방으로 회귀하면서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로 들어갔다가 대월지가 다시 중원으로 초원의 길을 개척하면서
사천성 보주로 들어가 신나라와 비단길/초원의 길 무역을 독점할 때, 사마르칸트에서
가장 오래까지 남아있다가 북월지가 되어 내몽고 서부 시라/사라선맹지구로 들어와
실크로드 번외무역로를 개척한다.
[산서성 장치시 장사지방,사탁지방 루트,내몽고 사라선맹지구 루트,산서성 대동시 대동지구 루트,
하북성 북경지구 루트,요녕성 조양,심양(요양)루트, 한반도>왜/구주 루트 개척]
북부여[고구려]의 광개토/장수왕에 밀려 요녕성,길림성을 거쳐 반도로 들어와
대가야 지방으로 들어가 실크로드 중계무역을 담당하며 교통로를 왜까지 연결한다.
전진,북위,고구려에 밀려 양나라[경기인],낙랑/후동진,가야,백제, 패려신라, 강회신라가
민족 이동에 따라 한반도와 왜로 이주하자, 실크로드 교통로인 대가야 지방에서
중계 무역로를 차지하고 왜까지 연결하는 것이다.
1597년 정유재란 때 남원성 전투 패배로 1만 포로와 함께 왜로 끌려가는 남원 도공들이
다시 한번 증명해 주고 있다.
[풍신수길(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경도(교토) 에도 막부도 동이족의 주 거주지였고
도자기 터를 가지고 있었던 경도 동부지방의 나라천(가나가와)을 장악하고
족리존씨(이시카가 다카우지) 가야계 정권을 무너뜨리고 전국을 통일한 후 조선을 침략하는 것임]
무진주[광주/武珍州]는 660년 신라군으로 합류하고,
전북 정읍 태인지방 부터는 백제군과 백제 부흥군으로 합류하며,
661년부터 562년에 멸망했던 옛 대가야군[호남 중동부지방/상주,거창,함양,산청~진주지방]이
백제 부흥군으로 활동한다.
[562년 대가야가 신라에 멸망당할 때 무진주[茂鎭州]인들이 광주로 선진 문물을 가지고
피신해 들어가서 660년 백제 멸망기 때 무진주[武珍州]로 알려지는 것임.
상주의 견훤이 후백제를 세우는 것도 이런 연유임].
광주라는 지명이 무진주로 바뀐다는 것은 무진주인들이 광주 마한인보다도
더욱 앞선 선진 문물을 가지고 들어갔다는 뜻임.].
661년 신라군과 합류한 무진주[광주/武珍州]군은 정읍 태인으로 북상하다가 숙박할 때,
태인군이 백제 부흥군을 치러간다는 사실을 알고, 야밤에 잠을 자는 사이에 신라군을 모조리 도륙하며
승전하면서 백제 부흥운동의 첫 불씨가 타오른다.
[1945년 광복이후 현대에 들어와서
태인 지방은 물과 산수가 좋지않다는 풍수지리설로 유언비어를 퍼트려 신태인으로 옮겨간다.
정읍 고부군 [정읍시 고부면]은 기대승이 독살로 동인 주리학파로부터 정치적 타살을 당한 곳이며 ,
태인지방은 주기학파 이항이 주기철학을 전파하면서 수많은 문무관을 길러낸 곳으로
주기학파 사상철학의 근간인 근대이성철학을 깨우친 이항의 제자들이 임진왜란, 정유재란을
승리로 이끌며, 호남을 방어하는 원동력이 되었던 지방이었다.
전봉준과 동학농민군 60만명이 처음으로 집결하여 봉기하였던 완주군 삼례읍과 함께
정읍 고부군수 조병갑을 쳐내고 신분질서 타파등 폐정12조개혁을 이끌어내며 집강소를 설치하고
동학 농민운동이 일어나는 지방이기도하다].^^
전주 한옥지구 뒷편에는 기자촌이 현존하고 있고,
이성계의 4대조 이안사(목조)가 경기전에서 태어난 곳이며 경기전 뒷편 기자촌에서
170여가구를 이끌고 배를타고 남해를 돌아 삼척을 거쳐 함흥으로 이주한다.
기자>기준의 평양 상마한>기탁의 천안 직산 중마한국>익산 금마 마한인 중 기자>기준조선 후예가
피신하여 정착한 곳 중에서 현재까지 지명이 남아있는 곳은 전주 경기전 오목대 기자촌이다.
[이에 대한 반발로 기자조선설을 밀어내고 위만조선설이 나온 것임].^^
"택도 없다"라는 말이 산서성 장치시 장사지방,사탁지방에서 피난해온 沙宅積德(사택적덕/사탁)세력이
전진 부견의 100만 대군에 밀려 서진, 동진을 세웠다가 하한(익산 금마 연립마한)의 수도 금성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나온 말이었다.
사택 (사탁)세력이 실크로드에서 가지고 온 물건에 비해 형편 없거나 제품의 질이 턱없이 부족했을 때
"택(宅)도 없다 (어림 반푼어치도 없다)"라는 말이 나온 것이었다.
무색청자 손잡이나 주둥이 머리 부분이 없는 =턱이 없는 도기(턱주가리 아래 턱이 없는 도기)
[주로 물, 음식을 담는 옹기/항아리]보다도 제품의 질이나 가치가 형편없을 때
"턱없이 부족하다"라고 함.
[마한 원주민이 빗살무늬토기 같은 원시 토기를 들고 장(부여장/무왕)에 나가 팔려고 했다가
우르가야가 백제와 거래하거나, 실크로드에서 가지고 온 청화백자의 선조 무색청자와 비교해 보면
어림 반푼어치도 없었을 것임].^^
[어라하 ~ 임유관[림유관/섬서성(陝西省) 유림시(榆林市) 유림관(楡林關)/임치),
어라하~임치(림치).>어림 반푼어치도 없다(어림없다)의 유래.
어라하-산서성 서부와 섬서성의 경계를 남북으로 흐르는 황하강.
욱리하-하남성 정주시 한성백제 앞을 흐르는 황하강.
그래서 조선시대까지 이어져 도소매업을 하는 곳을 임방(림방)이라고 부르는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