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대원군에 대한 비평

[낙민]

흥선대원군에 대한 비평

저자	김정희
출전	『완당전집』 '석파의 난권에 붙여(題石坡蘭卷)'

인간의 경지를 넘어선 묵란화

난은 가장 그리기 어려운 소재다. 예부터 그림 소재로 즐겨 쓰인 산과 강, 매화와 대나무, 꽃과 나무, 짐승과 물고기 등을 능숙하게 잘 그리는 사람들이 매우 많았다. 그런데 난 그림을 잘 그렸다고 이름을 알린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

예를 들어 송나라와 원나라 시대 이후 중국에서 이름을 떨친 화가들의 명단을 뒤져 보면 산수화를 잘 그렸다는 사람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러나 이들을 대표할 만한 왕숙명이나 황공망조차 산수화와 더불어 난을 잘 그렸다는 말을 들어 보지 못했다. 또 대나무 그림으로 유명한 문징명이나 매화 그림으로 명성을 떨친 양보지 역시 난을 잘 그렸다는 말은 전해오지 않는다.

난 그림은 송나라 사람인 정소남에서 시작되어 조이재를 으뜸으로 쳤는데, 이 그림은 인품이 높고 빼어나지 않으면 그릴 수 없었다. 그 후 문형산에 이르러 남쪽에서 크게 유행했다. 그러나 문형산은 글과 그림이 매우 많아, 그가 그린 난은 작품 열 중 한둘에 불과했다. 그 또한 난 그림만은 많이 그릴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요즘처럼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일 정도로 난을 누구나 아무런 거리낌 없이 마구 그리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

내가 일찍이 정소남의 난 그림을 본 적이 있는데, 지금 세상에 남아 있는 것은 단 하나에 불과하다. 그 그림 속의 잎과 꽃은 요즘 난을 그린다고 떠드는 사람들과는 너무나 차이가 나, 함부로 모방하거나 본받을 수 없는 수준이다. 조이재 이후로는 그 신비스러운 형상과 행적을 따라갈 수는 있지만, 또한 모방하거나 본받으려고 하면 불현듯 불가능한 일로 다가오곤 한다. 정소남과 조이재의 높고 빼어난 인품이 난의 화풍에 배어 있기 때문에, 보통 사람은 아무리 쫓아가려고 애를 써도 이룰 수 없다.

근대에 와서 명나라의 진원소와 청나라의 승려 백정, 석도부터 정판교와 전택석 등은 난 그림에 공력을 쏟았는데, 모두 인품이 뛰어나 그 무리들 속에서도 빼어났다. 그림의 품격 역시 인품의 높고 낮음에 따르므로, 그림의 품격을 따로 떼어 내어 논할 수는 없다. 그림의 품격은 형상을 비슷하게 그리는 것에 있지 않고 또한 계경(契經, 석가모니의 가르침)에도 있지 않다. 그리고 화법만으로 난을 그리려고 해서는 절대로 안 되며, 헤아릴 수 없이 많이 그려 본 다음에야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부처의 경지에 이르는 성불이란 당장 이룰 수 없고, 맨손으로는 결코 용을 잡을 수 없는 법이다.

9천9백9십9분을 얻었다고 해도 나머지 1분은 가장 이루기 어렵다. 9천9백9십9분을 얻는 일은 가능하겠지만, 나머지 1분은 사람의 힘으로는 가능하지 않고 또한 사람의 힘이 아닌 다른 곳으로부터 얻을 수도 없다.

지금 우리나라 사람들이 난을 그리면서도 이런 의미를 알지 못하니, 모두 아무것도 모르면서 무턱대고 그려대는 그림에 불과할 뿐이다. 석파(石坡, 흥선대원군 이하응)는 난 그림에 조예가 깊다. 하늘로부터 타고난 재주가 맑고 우아하고 기묘하다. 장차 나아갈 곳은 이 나머지 1분의 공력일 뿐이다.

나는 몹시 둔하고 미련한 데다 신세조차 뒤집어져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헤매느라 난을 그리지 않은 지가 어느덧 20여 년이 지났다. 사람들이 더러 찾아와 난을 그려 달라고 부탁이라도 할라치면 모두 거절했다. 마치 마른 나무와 차갑게 식어 버린 재가 다시는 불씨를 되살릴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석파의 난 그림을 보니 오랫동안 사냥하는 재미를 잊고 지내다가 갑자기 사냥꾼을 보고 기쁜 마음이 들었다는 정명도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래서 스스로 그림을 그리지는 못하나 예전에 알고 있던 것들을 근거 삼아 경솔하게도 이 난권(蘭卷)을 써 석파에게 부친다. 또한 앞으로 나에게 난을 그려 달라고 부탁할 요량이면, 나를 찾아오지 말고 석파를 찾아가는 것이 옳다.

• 메모

'하늘이 도와야 한다'는 말은
무한한 책임과
무한한 성실과
무한한 노력을 요구합니다.

'무한'은
마지막 위에 눈물을 보태는 것
마침표 뒤에 물음표를 찍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