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미 슈나이더 (Romy Schneider,1938~1982)
오스트리아 출신의 영화배우. 오스트리아 빈(Vienna) 태생으로 부모가 유명 배우였던
영향으로 '로미 슈나이더' 는 열다섯 살에 <흰 라일락이 필 때, 1953)로 영화계에 입문
하였다. 어머니와 함께 출연한 이 영화에서 그녀는 배우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주면서
<여왕의 소녀시절>(Madchenjahre einer Konigin, 1954)에서는 젊은 빅토리아 여왕을
연기해서 큰 인기를 끌었다.
1955년 '슈나이더' 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엘리자베스’ 왕비에 관한 영화
‘씨씨 3부작’에 출연하면서 유럽 전역에 이름을 알렸다. ‘씨씨 3부작’은 명랑하고 자유
분방한 소녀 '씨씨'가 왕비가 되어 엄격한 왕실 생활에 적응하면서 완고한 시어머니와의
갈등을 겪고 성숙해가는 과정을 다루었다. '슈나이더' 는 '씨씨' 역을 통해 오스트리아
국민들의 사랑과 지지를 받으며 큰 인기를 누렸다.
같은 해 <리벨라이>(Liebelei, 1933)를 리메이크한 <사랑은 오직 한길>(Christine,
1958)에 출연하면서, '슈나이더' 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미남배우 '알랭 들롱' 과 운명적인
만남을 하게 된다. '슈나이더' 와 '알랭 들롱' 은 사랑에 빠진 연인으로 호흡을 맞추면서
실제로 사랑에 빠졌다. 이후 그녀는 '알랭 들롱' 과 파리로 떠났고, 그곳에서 연기활동을
지속했다. 프랑스에서 '로미 슈나이더' 는 이탈리아의 '루키노 비스콘티', 미국의 '오손
웰즈'같은 세계적인 거장들과 협업하였다.
'비스콘티'는 그녀를 파리의 연극 무대에 오르게 하여 연기력을 다진 뒤 <Boccaccio
'70, 1962)에 캐스팅했다. 이 영화는 '로미 슈나이더' 가 프랑스에서 배우로 입지를
다지는데 기여했다. '프란츠 카프카'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오손 웰즈'의 <심판>
(Le proces,1962)에서는 비서 '레니'를 맡아 좋은 연기를 선보였다.
1964년 '알랭 들롱' 과의 결별은 '로미 슈나이더' 의 이력에 큰 상처를 남겼다.
1966년 그는 연극 연출가인 'Harry Meyen'과 결혼 후 <La piscine, 1969>를 통해
'알랭 들롱' 과 재회했다.
이 영화에서 '슈나이더' 는 관능적이고 매혹적인 여인 '마리안느'로 분해 '알랭 들롱'과
연인관계를 연기하였다. 한 인터뷰에서 “『알랭 들롱』을 잊지 못해 내 삶은 추락했다”
라고 했을 만큼 그와의 관계는 '슈나이더' 의 삶에 큰 영향을 주었다.
1970년대 '로미 슈나이더' 는 'Claude Sautet' 감독과 인연을 맺으면서 지속적인 협력
관계를 유지하였다. 'Claude Sautet' 와 함께 한 작품들로는 <Les choses de la vie,
1970> <Cesar et Rosalie, 1972>, <Une histoire simple, 1978> 등이 있다.
'로미 슈나이더' 는 독일어권을 대표하는 여배우 중 한 명이다. 미국의 영화산업지
‘버라이어티’(Variety)는 '슈나이더' 를 “영화 감독들의 자석”이라고 묘사하기도 했다.
1970년대 프랑스 영화계의 기념비적인 스타였던 '슈나이더' 는 가장 아름다운 만인의
연인으로 다수의 작품에서 경력을 쌓아가면서 유럽과 할리우드를 오가며 활동하였다.
1975년 '슈나이더' 는 첫 번째 남편이었던 '해리'와 이혼하고 자신의 비서 'Daniel
Biasini'와 결혼했다. 그런데 1979년 전 남편 '해리'가 자살하면서 큰 충격을 받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1981년 그녀는 아들 'David Christopher' 마저 사고로 잃게
되는 불운을 맞게 되었다.
극심한 충격에 빠진 '로미 슈나이더' 는 술과 약물에 의존하기 시작했고, 두 번째
남편인 '다니엘'과도 이혼했다. 이후에도 우울증과 슬픔에 괴로운 시간을 보내던
그녀는 1982년 5월 29일 프랑스 파리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