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에 대한 연구: 그대 그릇 안에 있는 기름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마 25:3,4)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쉽게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진리와 일치된 삶을 사는 데 실패하며 진리의 감화는 지속적이지 못합니다. 그들은 등잔에 기름이 떨어졌던 미련한 처녀들과 같습니다. 기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을 통해 영혼 속에 들어오신 성령을 상징합니다. 많은 기도로 성경을 열심히 탐구하고, 확고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분의 계명을 순종하는 사람들은 슬기로운 처녀로 대표된 사람들 사이에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의 가르침은‘예’와‘아니오’가 아니라‘, 예’와‘아멘’입니다. 복음의 요구는 원대합니다. 사도는“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 3:17)“,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고 말합니다. 성경의 웅대한 진리를 마음의 바깥뜰에 놓는다면 실제적인 경건은 얻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성경상 신앙은 삶의 대소사에서 실천되어야 합니다. 미련한 처녀로 대표된 사람들에게 그렇게도 절실하게 필요했던 기름은 바깥에 부어져야 할 어떤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진리를 영혼의 성소 속으로 들여와, 그것이 우리의 영혼을 정결케 하고 정화케 하고 성화시키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이론이 아닙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불확실하고, 단절되는 교리들이 아니라 살아 있는 진리인 성경의 신성한 가르침입니다. 그것들은 그리스도 안에 중심을 둔 영원한 관심사들을 포함합니다. 그리고 그분 안에는 신령한 진리의 완벽한 체계가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한 영혼의 구원은 진리의 터전이요 기둥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참된 믿음을 행사하는 사람들은 품성의 거룩함과 하나님의 법에 대한 순종으로 그 사실을 드러냅니다. 그들은 예수 안에 있는 진리는 하늘에 다다르고 영원을 포괄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성령에 대한 연구: 보이지 않는 바람처럼 “바람이 임의로 불매…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3:8) 바람은 잎사귀와 꽃을 살랑거리게 만들며, 그 소리는 나뭇가지 사이에서 들립니다. 그러나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아서 그것이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성령이 사람의 마음에 역사하시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바람의 움직임을 설명할 수 없는 것처럼 이것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회심의 과정을 확실한 시간이나 장소를 대어 말할 수 없고, 그 모든 환경들을 자세히 추적할 수 없다 해도 이것이 그가 회심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되지는 못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바람과 같이 보이지 않는 능력으로 사람의 마음에 끊임없이 역사하고 계십니다. 받는 사람이 혹 의식하지 못할지라도 조금씩 영혼을 그리스도께로 이끌리게 하는 감명이 이루어집니다. 이러한 감명들은 그리스도를 명상함으로나 성경을 읽거나 실지로 목사의 말을 들음으로 받을 수도 있습니다. 갑자기 성령께서 더욱 직접적인 호소를 하실 때에 그 영혼은 기쁘게 자신을 예수께 바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가리켜 갑작스런 회심이라고 하지만 사실 그것은 하나님의 성령께서 꾸준하고도 오래 계속된 과정을 거쳐서 호소하신 결과인 것입니다. 바람 그 자체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보고 느낄 수 있는 결과를 드러냅니다. 그와 같이 영혼에게 역사하시는 성령의 활동도 그 구원하는 능력을 체험한 사람의 모든 행위 가운데서 나타나 보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을 때 생애가 변화됩니다. 죄악적인 생각은 사라지고 악한 행위와는 인연을 끊게 됩니다. 사랑과 겸손과 화평이 분노와 시기와 분쟁을 대신합니다. 기쁨이 슬픔을 대신하고 용모는 하늘의 빛을 반사합니다. 아무도 짐을 덜어 주는 손을 보지 못하며 빛이 하늘 조정에서 내려오는 것도 보지 못합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는 때에 축복이 임합니다. 그때에 인간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능력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새로운 피조물을 창조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한 연구: 갈라디아서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그 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십오 일을 머무는 동안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다 그 후에 내가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렀으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유대의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는 알지 못하고 다만 우리를 박해하던 자가 전에 멸하려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갈라디아서 1:11~24).”
갈라디아서에서 사도 바울은 복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요 사람에게서 받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하나의 계시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가 바울에게 어떤 것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그 자신을 바울에게 계시하신 것이라고 말입니다. 바울이 그리스도에 대해서 전하는 것이 아니었고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전파하고 계시하십니다.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고후 4:5). 하나님은 모든 사람 안에 그리스도를 나타내시기를 기다리시고 열망하십니다. 우리는 “불의로 진리를 막”으나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이는 것 같이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롬 1:18~20)인다는 말씀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진리(요14:6 참조)이시며 하나님의 능력(고전 1:24 참조)이시며 하나님의 신성(요 1:1 참조)을 가지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악인들이 막고 있는 진리이시며, 사람들이 믿음으로 살 수 있도록 그들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이십니다(신 30:14; 롬 10:6~8참조).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들 안에 계신다는 것은 우리가 살아있다는 사실에서 분명히 알수 있지만 우리가 막고 거스리기 때문에 그분을 알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안에 나타나게 되시기를 인내로 기다리시고 계십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말씀이 제 길을 가고 영광을 받으며 나사렛 예수의 완전한 생애가 죽을 육신에 나타나는 때가 오기를 간절히 바라고 계십니다. 이 일은 지금 아무리 죄 많고 타락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원하는 자”안에서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그렇게 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막고 거스리는 것을 멈추어야만 합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그의 자신에 관하여, 그의 과거 열심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믿는 바를 구약의 가르침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구약의 가르침은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만을 가리키는 하나님의 말씀이십니다. 그의 성령이 선지자들 속에 계셨고 그들의 마음을 감동하여 후에 사도들이 전하였던 꼭 같은 복음을 전파하도록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모세와 그의 글에 대하여는 조금도 정죄하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서기관들에 대하여서는 그들이 성경에서 읽고 명하는 것은 모두 따라야 하지만 그들의 본을 따라서는 안 된다고(마 23:2,3)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성경 말씀에 그들이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유대교는 율법과 선지자와 시편에서 가르치는 하나님의 말씀과는 전혀 다른 사람의 유전, 조상의 전통을 믿고 따랐습니다. 성경에는 모태로부터 필생의 사업에 택정함을 받은 삼손, 예레미야, 이방의 왕 고레스, 그리고 침례 요한의 예가 나와 있습니다. 이런 예는 단편적인 일이기는 하지만 모두 하나님께서 세상을 다스리시고 계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기 위한 목적으로 기록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살후 2:13)라는 말씀은 데살로니가 사람들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이십니다. 이와 같이 우리 모두는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딤전 2:4)는 하나님께서 마찬가지로 모두에게“각각 사무”(막 13:34)를 맡기셨습니다. 성령께서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서 소명하신 일을 하도록 이끌기 위하여 지금도 우리와 분투하고 계십니다. 사울은 지독한 핍박자였지만 큰 사도가 되었습니다. 각 사람이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을 따라 하나님을 증거하도록 택정함과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상을 깨닫고 결단할 때 그 생애에 새로운 의미가 주어질 것입니다. 이 진리를 아는 지식은 우리의 삶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우리 각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하여 간구하며 전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이끌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일에 충성하도록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혈육과 의논하지 않았다는 것에서 우리는 아주 귀한 교훈을 배우게 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스스로 성경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을 믿는 대신에 그저 목사나 다른 사람의 의견만을 맹목적으로 따른다면 그는 올바른 선택을 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때로는 너무나 분명한 하나님의 요구임에도 불구하고 내 자신에게 그 큰 일을 할 수 있는 지를 물어 보게 됩니다. 사실 우리가 의논할 수 있는 가장 위험한 혈육은 내 자신입니다. 진리의 문제에 있어서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으로 충분치 않습니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잠 3:5)“. 자기의 마음을 믿는 자는 미련한 자요 지혜롭게 행하는 자는 구원을 얻을 자니라”(잠 28:26).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지혜 있는 사람은 즉시 순종하며 심지어는 자기 자신의 마음과도 의논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본을 따라 예수님을 보았을 때에 즉시 자신의 주로 인정하고“주여 내가 무엇을 행하기를 원하시나 이까”라고 외쳐야 합니다. 우리는 진실한 마음으로“주의 계명을 지키기에 신속히 하고 지체치 아니하여”야 할 것이며“주께서 내마음을 넓히시오면 내가 주의 계명의 길로 달려가리이다”라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방인의 선지자였습니다. 사실 성경에서는 이교와 이방이라는 말 사이에 차이가 없습니다. 또 이 단어는 열방이라는 말과 같은 것으로 사용됩니다. 고린도전서 12장 2절에서“너희가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 갔는니라”고 말씀하시는데 이것은“이교도”라는 말에서 온 것이며 이 구절자체가 이방인은 곧 우상을 숭배하는 이교도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이 이교도들 가운데서 취함을 받았으므로(수 24:2 참조) 모든 이스라엘은 이방인 가운데서 취함을 받은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여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므로“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롬 11:25,26)을 것입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하나님께서 그의 진리를 어느 한 민족에게 국한시켰다고 말 할 수 없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롬 10:12). 이 분이 온 인류의 하나님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 된 자로서 하나님의 이름이 만약 우리로 말미암아 욕을 당한다면 그것은 우리 자신이 공공연하게 하나님을 욕하는 자들이 되는 것만큼 나쁜 것입니다. 우리는“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는 하나님의 간곡한 말씀을 가슴 깊이 새겨야 할 것입니다.
신앙1부: 어린 양의 성품을 준비하기 위하여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계 14:1).
성경은 구원받아 주님과 함께 하늘 시온산에 설 사람들의 성품을 어린 양의 성품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들의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써 있다는 의미는 그들의 생각과 마음과 성품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과 똑같다는 말이다. 사도 바울은 구원 얻을 자들의 상태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 5:23). 예수께서 이 땅에 재림하실 때에 그 앞에 설 자들은, 온전히 거룩하게 된 자들, 곧 영과 혼과 몸이 흠 없이 보전된 자들인데 이런 사람들만이 구원을 얻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흠 없는 어린 양의 성품을 준비할 수 있을까? 1) 성품이란 무엇인가? ‘성품’이라는 말에 대해 사람들은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무엇이 성품인지 구체적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드물다. 성품이란 무엇인가? 성품이 좋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성품은 생각을 통해 길들여진 행동과 그에 따른 감정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마음’을 말할 때 심장을 가리킨다. 그러나 사실 마음은 우리의 머릿속에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마음은 우리의 두뇌에 들어온 생각으로 일으켜지는 것에 대한 반응으로 만들어진다. 그러므로 좋은 성품을 가지기 위해서는 우리 두뇌 속에 좋은 생각이 머물러야 하고 좋은 감정이 우리 마음속에 있어야 한다. 성경 잠언 서에는 이에 대한 매우 적절한 언급이 나와 있다“.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잠 23:7). 이 말씀은, 사람의 마음의 생각이 곧 그 사람이라는 말이다. 즉 사람이 생각하는 그 자체가 그 사람의 됨됨이를 나타내는 것이며, 그것이 그 사람의 인격과 품성이라는 것이다. 예수께서도 이 주제에 대해 매우 적합하고 핵심적인 말씀을 해주셨다“.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의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눅 6:45). 예수께서도 마음의 생각이 어떠한가에 따라 속에서 나오는 것이 각각 다르다는 것 을 말씀하셨다. 선한 마음의 생각에서는 선한 성품이 나오고, 악한 마음의 생각에서는 악한 성품이 나온다. 그러므로 올바른 생각으로 사고할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이 선한 성품의 소유자가 되는 지름길이다. 요한 계시록 14장에 나오는 첫째 천사는“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고 외친다. 성경에서 영광은 하나님의 성품을 의미한다(출 33:18,19 참조). 그러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의미는 곧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올바른 성품을 가지는 것이다.
2) 성품은 만들어지는 것이다 올바른 성품은 우연히 만들어지거나 타고 나는 것이 아니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으로 우리 인간들은 죄로 기울어지는 연약해진 본성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러므로 죄로 쉽게 기울어지는 경향을 타고난 인간이 하나님의 성품을 가지기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심리학에서는 보통 어떠한 행동이 습관으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21일간의 연습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21일 동안 목표를 세우고 매일 그것을 반복하고 실천하면, 그것이 습관으로 자리 잡게 되고 자신을 다른 사람으로 바꿀 수 있다고 한다. 세상 사람들도 좋은 습관을 만들기 위해 힘든 훈련을 받으며 인내한다. 하물며 예수님의 성품을 가지고자 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얼마나 많은 노력과 인내를 가져야 할 것인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모본으로 삼아 그분의 행동과 생각과 말을 그대로 따른다면, 우리의 행동과 습관과 성품이 얼마나 달라질 것인가!
3) 인간 혼자서는 좋은 성품을 만들 수 없다 그런데 아무리 성품이 만들어지고 길러지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하늘에 가져 갈 수 있는 어린 양 예수님과 같은 성품, 곧 죄와 세상과 자아를 이기는 성품, 교만과 이기심이 없는 겸손하고 고상한 성품은 인간의 힘으로만은 얻을 수 없다. 물론 사람이 오랜 훈련과 연습으로 단정하고 예의 바른 행동을 하게 될 수는 있다.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자 하는 욕망으로 외적인 추한 행동과 모습을 피하게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이기심을 가진 사람도 겉으로는 너그러운 행동을 할 수가 있다. 타고난 성격이 착하거나 유전적으로 좋은 성향을 물려받은 사람도 있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착한 성품을 가졌다고 표현한다. 그러나 타고난 착한 성품만으로 영생을 얻기에는 부족하다. 우리로 구원과 영생을 얻게 하고 또 거룩한 천사들과 어울려 살 수 있게 하는 흠 없고 순결한 성품, 곧 하늘로 가져갈 수 있는 유일한 것인, 아름다운 성품은 우리의 힘으로만은 얻기가 불가능하다.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하다! 예수님의 은혜와 성령의 능력으로 새롭게 거듭난 마음만이 하늘을 상속 받을 수 있다. 그리고 한 번만의 거듭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지속적으로 성령의 지배하에 자아를 굴복시키고 매 순간 죄를 승리하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행하는 사람만이 어린양의 성품을 가질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일상생활에서 죄를 이기고, 죄의 유혹을 승리하며, 자아를 성령께 굴복하는 성품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성품의 근간을 이루는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마음을 잘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제부터 그러한 아름다운 성품을 기르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자.
신앙2부: 마음의 문을 수비하라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잠 4:23). 현인 솔로몬은 사람의“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잠 23:7)하리라고 말하며 우리에게 마음을 지키라는 권면을 주고 있다. 그렇다! 하늘에 가져갈 만한 아름다운 성품을 기르려면 우리는 먼저 마음을 잘 지켜야 한다. 마음은 종종 격렬한 전쟁터가 된다. 사단은 인간의 마음을 정복하고 마음의 보좌를 탈취하기 위하여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힘을 쏟아 붓고 있다. 그러므로 사단이 영혼들을 탈취하려고 전쟁을 벌이는 장소인 마음을 지키는 것은 우리의 중요한 의무이다.
1) 마음은 영혼의 성채 마음은 영혼의 성채이며 몸의 수도이다. 전쟁을 할 때 끝까지 수비하는 것이 그 나라의 수도인 것처럼, 마음은 우리 몸에서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곳이다. 마음은 사람 전체를 통제한다. 선하건 악하건 우리의 모든 행동은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마음은 하나님께서 사람과 교통하며 하나님의 성령께서 거하시는 유일한 매개체가 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은 영적으로 끊임없이 깨어 있으면서 마음을 지키므로 영적 신앙 상태를 유지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 신실한 파수병처럼 잠시라도 경계를 늦추지 말고 영혼의 성채인 마음을 지켜야 한다. 바라봄으로써 우리는 변화된다. 사람이 깨어 기도하기를 그칠 때, 그는 성채인 마음을 지키기를 그치며 죄악에 참여하게 된다. 마음을 지키는 일은 영생 혹은 멸망을 판가름 짓게 하는 가장 근본적인 일이다.
2) 훈련을 받아야 하는 마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유 의지, 곧 선택의 능력을 주셨다. 올바른 선택을 하려면 올바른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생각과 상상력을 통제하는 훈련을 받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생애이다. 우리는 스스로 자신을 순결하게 하여 하나님의 뜻에 적합한 상태로 만들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기로 선택할 수 있고, 우리의 의지를 그분께 드릴 수는 있다. 그러면 그분께서는 당신의 기쁘신 뜻에 따라 우리 안에서 역사하실 것이고, 우리의 의지가 그리스도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이 훈련 받지 않은 상태, 곧 하나님의 성령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도록 방임하면 안된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 우리는 말씀을 연구하고 깨어 기도하며 우리의 마음과의지를 끊임없이 주님께 바치며 굴복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매일의 시험들을 통해 육적인 성향과 안일, 세속과 쾌락을 이기는 법을 배우고 훈련 받는다. 하나님의 은혜 아래서 훈련을 잘 받은 마음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옳고 그름 사이에서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훈련된 마음은 인생에 시련이 다가올 때 하나님의 말씀대로 생각하며 바른 것을 선택할 것이다. 우리의 의지가 성령께 지속적으로 바쳐질 때, 성령의 지배하에 잘 통제되고 있을 때, 우리는 죄를 승리할 수 있고 우리의 생각과 마음이 순결해질 수 있으며, 어린 양의 성품이 우리 이마에 꼴 지어질 수 있다. 사단은 우리로 하여금 강제로 악을 행하게 할 수 없다. 우리의 마음이 그의 지배에 굴복 당하지 않는 한 그는 우리를 지배할 수 없다. 의지가 승낙하고 믿음이 그리스도를 붙잡은 손을 놓은 이후에야 사단은 자기의 세력을 우리에게 행사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품고 있는 모든 죄 된 욕망은 사단에게 발판을 제공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표준에 이르지 못한 모든 점마다 사단이 들어와서 우리를 시험하고 멸망시킬 수 있는 열린 문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을 훈련하여 사단에게 내주지 않도록 마음의 문을 단단히 지켜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운명과 품성을 꼴 짓는 과정을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마음을 열심히 훈련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성품을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
3) 바라봄으로 변하는 마음의 법칙 마음은 자신이 명상하는 주제를 점점 닮아간다. 그것이 마음의 법칙이다. 바라봄으로 변화되는 것은 지성적 본성의 법칙일 뿐 아니라 영적 본성의 법칙이기도 하다. 사람의 마음은 깊이 생각하고 숙고하도록 허락된 사물에 점차적으로 적응되어 간다. 마음은 습관적으로 사랑하고 존경하는 것에 동화되는데, 무엇을 마음에 품고 애정을 가지는가에 따라 그 대상과 목표물처럼 변화되고 그것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그리하여 자신이 깊이 생각하고 바라보는 대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꼴 지어 지는 것이다. 사람은 자신이 가진 표준 이상으로 향상될 수 없다. 만일 우리가 자아를 혹은 세상의 어떤 표준을 이상으로 삼는다면, 자기 이상이나 세상을 능가하는 표준에 도달할 수 없을 것이며, 오히려 점점 더 퇴보되어 갈 것이다. 만일 마음이 계속 평범하고 세속적이고 일상적인 것들로만 가득 차 있다면 우리의 생각과 사상은 위축되고 연약해질 것이며, 결국 세속적이고 보잘것 없는 사람이 될 것이다. 우리가 지적으로나 영적으로 향상하기를 원한다면 높은 표준을 세우고 그것을 사모하고 마음에 품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표준과 이상으로 삼을 때 우리는 영적으로 무한히 성장할 수 있다. 그분의 생애와 말과 생각과 사명을 깊이 이해하고 그분의 성품을 닮고자 노력할 때 우리는 틀림없이 변화된다. 인간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유일하게 한 가지 밖에 없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은혜이다. 하나님의 은혜만이 사람을 향상시키고 변화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우리 자신이 무력한 "진흙"임을 깨닫는 자에게는 토기장이이신 하나님께서 이 일을 이루시겠다는 약속이 성경에는 얼마나 많은가!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 12:1).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골 3:2).
우리는 마음을 향상시키고 마음속에 순결하고 거룩한 사물을 항상 생각하게 해주시는 성령의 끊임없는 감화를 받아야 한다. 다음과 같은 다윗의 기도가 매일 모든 영혼의 탄원이 되도록 하자“. 하나님이여 내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 51:10).
신앙3부: 마음대로 떠도는 생각을 통제하라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근신하여…”(벧전 1:13).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생각을 통제해야 한다. 마음대로 생각을 내버려 두는 것은 사단에게 문을 열어주는 것이기에 그러하다. 그러므로 생각을 통제하는 훈련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의무이다. 우리의 생각은 성령의 지배하에 들어가 철저한 관리를 받아야 할 가장 우선적인 것이다. 생각에 대해 함께 살펴보자.
1) 생각과 뇌의 기전 생각이란 참 신기한 것이다. 생각이 어떤 방향으로 한번 가면 그 방향으로 길을 낸다. 그래서 이어지는 생각을 멈추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이다. 이런 현상을 생리학적으로 보면, 우리의 뇌 속에는 수천억 개의 뉴런(신경 세포)들이 있다. 그런데 이 수많은 뉴런은 서로 연결된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한 간격을 두고 떨어져 있다. 이 떨어져 있는 뉴런과 뉴런 사이의 접합 부분을“시냅스”라고 부르는데, 시냅스는 아주 미묘한 작용을 한다. 뇌에 어떤 자극이 오면 그 자극이 신경 세포에 전달되고, 그러면 서로 미세한 간격을 두고 떨어져 있던 뉴런이 시냅스를 통하여 그 흥분을 전달하게 된다. 이런 전도를 통해 두뇌 신경계의 활동이 이루어지는데, 신경 전달 과정에는 아세틸콜린 같은 신경 전달 화학 물질들이 개입되어야 가능하기는 하지만, 떨어져 있는 신경 세포 사이에 있는 시냅스를 통해 뇌의 자극이 전달되기 때문에 시냅스 연결은 매우 중요하다. 인간의 뇌에는 수천억 개의 뉴런이 있어서 수백 조 개의 시냅스 연결이 만들어지는데, 이 시냅스 연결은 뇌에 수많은 회로를 만들어낸다. 그런데 이 회로가 연결되고 만들어지는 양상이 마치 뇌에 뿌리가 생기고 길이 만들어 지는 것 같다고 과학자들은 실험을 통해 논증하고 있다. 그런데 흥미 있는 것은, 시냅스는 성격상 한 방향으로만 흥분을 전달하는데, 그 다음에 자극을 받으면 한 번 만들어진 회로 쪽으로 쉽게 연결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시냅스 연결 회로에 의해 뇌에 뿌리가 내려지고 그 뿌리에 의해 뇌에 길이 새겨지면, 자극은 이미 만들어진 회로 쪽으로 흘러가 그런 쪽으로 생각하고 반응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정적이고 좋지 않은 생각을 하거나 습관을 반복하면 뇌에 그런방향으로 회로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유명한 뇌신경 학자“조지 루드”는 흥미로운 사실을 발표했는데, 그는 말하기를“인간의 뇌 속의 시냅스연결이 변화하면 그 사람의 성격도 변할 수 있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매번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 그 생각하는 방향으로 뇌에 길이 생기고, 그렇게 되면 그 다음 자극을 받을 때 우리의 생각은 이미 나 있는 길로 쉽게 흐르게 되며, 그런 생각은 반복되어 행동을 낳고 우리의 성품을 만드는 것이다.
2) 생각이 내는 길 앞서 언급한 뇌의 기전을 읽고 나서 한 번의 생각도 조심스럽게 해야 함을 느꼈을 것이다. 우리의 마음처럼 생각도 잘 훈련을 받아야 한다. 앞서 언급된 뇌에 회로가 생기는 생리학적 기전을 보아 알 수 있듯이, 어떤 생각은 한 번 하게 되면 그 방향으로 계속 가게 되어 있다. 특히 부정적이고 악한 생각은 더 강한 자극과 반응을 일으켜 뇌에 쉽게 길을 낸다. 예를 들어, 섭섭하고 원망스러운 생각을 한 번 하게 되면, 그 생각은 뇌에 길을 내어 섭섭하고 원망스러운 생각을 계속하게 되다가 나중에는 그 섭섭한 감정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게 된다. 또한 좋지 않은 것을 상상하거나 복수하고 싶은 생각이 들 때 그 생각을 단호하게 끊어버리지 않으면, 곧 우리 자신이 그 생각을 조절하거나 지배하지 않으면, 그 생각에 한 없이 끌려가게 되고 결국은 그 생각의 지배를 받게 된다. 사려 깊지 못하고 부주의하거나 악한 생각들은, 그런 생각이 들도록 계속 방치하거나 그 생각대로 끌려가도록 버려두면, 점점 강해져 그 생각대로 행동하게 하고 습관을 형성하며 결국 그렇게 성품이 꼴 지어지게 만든다. 우리 주위에서 남을 비판하거나 흉을 잘 보는 습관을 들인 사람이 계속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을 목격하게 되지 않는가? 그 좋지 않은 습관이 벌써 성품으로 자리 잡은 것을 보게 되지 않는가? 부주의한 생각대로 마구 행동하는 사람은 현명하지 못한 행동과 실수를 자주 하게 되고 사단이 좋아하는 대로 죄의 길에 쉽게 발을 들여 놓게 된다. 생각을 제어하지 못한 채, 느껴지는 감정에 따라 반응하고, 그 감정에 따라 변덕스럽게 생겨나는 생각대로 따라가는 것은 마치 덩굴 식물의 덩굴손과 같다. 사방으로 뻗치도록 방치된 덩굴손이 자기 손에 닿는 대로 어떤 잡동사니든지 움켜잡고 아무 것이나 감아 올라가듯이, 방치되고 지배 받지 않은 생각은 마음껏 이리 저리로 뿌리를 내리며 한 없이 방황한다. 부정적이거나 좋지 않은 생각, 그리고 악한 생각은 한 번에 그치지 않고 계속 뿌리를 내리며 계속해서 악하게 되는 것이다.
3) 떠도는 생각을 성화된 이성으로 지배하라 생각을 지배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의무이다. 우리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생각, 특히 부정적이고 좋지 않은 악한 생각을 방치해 두어서는 안 된다. 그 생각이 행동으로 옮겨지고 그 행동이 반복되어 습관으로 굳어버리기 전에, 그리하여 그것이 성품으로 꼴 지어지기 전에, 그런 좋지 않은 생각을 멈추고 더 좋고 새로운 생각으로 대체하여 뇌에 생긴 회로를 바꿔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큰 노력과 인간의 힘을 능가하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요구한다. 곧 초자연적인 하늘의 능력이 임하지 않으면 그 일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물론 연습과 훈련을 통해 생각을 바꾸고 마음을 훈련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하지만, 마음과 생각이 근본적으로 바꿔지기 전에는 어렵다. 우리는 생각을 지배하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우리의 의지를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 좋지 않은 생각, 곧 원망, 질투, 쓴 뿌리, 교만, 질시, 복수하고 싶은 욕망 등의 생각들을 끊어버리고, 새로운 동기, 새로운 마음에서 나오는 좋은 생각들로 대체하기 위해서 우리의 의지를 굴복하여 하나님께 바치고, 그분의 원하시는 뜻대로 살겠다고 결심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생각이 과거에 닦아놓은 회로대로 부정적이거나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려고 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구해야 한다. 우리가 비록 올바른 쪽을 선택할 힘이 없을지라도, 우리 자신의 뜻과 고집을 포기하고 하나님께 순복하여 하나님의 도움과 능력을 구하면, 하나님께서 새로운 마음을 창조해주셔서 악한 생각을 멈추고 새롭고 좋은 생각을 할 수 있도록 변화를 주신다. 그것이 바로 인간 스스로가 성취할 수 없는 하나님의 역사, 곧 성령의 역사와 재창조의 기적인 것이다!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생각을 지배하기를 원하여 간구하는 모든 영혼 속에 새로운 생명을 일으키시며 생각과 욕망을 그리스도께 복종하도록 이끄셔서, 모든 악한 생각과 부정적인 생각을 멈추게 하시고 그 대신 아름답고 선한 생각을 넣어주신다. 의지를 바치는 일에는 훈련이 필요하다. 그것은 단번에 되는 것이 아니며 부단한 연습과 과정이 필요하다. 철저한 자아와의 싸움은 물론,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매 순간 필요 되는 과정인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올바른 생각과 명상할 만한 적절한 주제를 가지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마음을 항상 하나님 편에 두어야 한다. 거룩하고 영원한 사물이 우리의 생각을 지배하도록, 또한 생각이 올바른 방향으로 작용하고 잘 수립된 계획을 따르도록 우리는 마음의 허리를 늘 동여야 한다. 날마다 생각은 훈련을 받아야 하며 방향을 가리키는 나침반처럼 항상 목표에서 벗어나지 않아야 한다. 생각을 순결하고 아름답게 만들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있다. 그것은 우리의 생각과 명상의 주제를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랑에 두는 것이다. 죄인들을 위해 하늘의 가장 귀중한 보화이신 독생자 예수 님을 주신 하나님의 아버지의 사랑! 우리를 위해 모든 고난과 시험을 이기시고 생명을 바쳐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신 예수님의 사랑! 그리고 우리를 깨우치시고 회개하게 하시기 위해 무한한 관심과 사랑을 쏟아 부으시는 성령님의 역사! 또한 우리를 섬기기 위해 쉴 새 없이 봉사하는 천사들의 수고! 만일 우리가 이런 주제들을 매일 명상하고 감사한다면, 우리의 생각은 분명히 아름답고 순결한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신앙4부: 오관을 지키라(Ⅰ) “나는 비루한 것을 내 눈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이요, 배도자들의 행위를 미워하니, 이것이 내게 붙접지 아니 하리이다. 사특한 마음이 내게서 떠날 것이니 악한 일을 내가 알지 아니하리로다. 그 이웃을 그윽히 허는 자를 내가 멸할 것이요,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한 자를 내가 용납지 아니하리로다”(시 101:3~5). 앞에서 우리는 어린 양 예수님의 순결한 성품을 가지기 위하여, 또 죄를 승리하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마음과 생각을 지키며 훈련시켜야 할 필요성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런데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마음에 이르는 길, 마음의 통로를 잘 지켜야 한다. 마음에 이르는 길이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의 오관, 즉 우리의 오감이다. 마음은 오관을 통해서 영향을 받는다. 오감인 시각·청각·후각·미각·촉각의 감각 기능들을 통해서 모든 정보를 받아들이며, 외부 세계의 상태와 변화를 지각하는 것이다. 마음은 오감이 들여온 정보에 의해 생각을 만들어내며, 생각은 우리로 행동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오관을 통해 좋지 않은 정보들이 들어와 나쁜 생각을 만들어내지 않도록, 그리고 나쁜 생각 때문에 좋지 않은 성품이 형성되지 않도록 오관을 잘 지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사단이 인간을 유혹하며 범죄하게 만들기 위해 자주 사용하는 것이 오감이다. 그리스도인이 죄를 승리하기 위한 성품을 기르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일은 안에서 일어나는 유혹과 밖에서 들어오는 유혹을 이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감을 수비하고 통제할 뿐만 아니라 사단이 우리의 오감에 대해서 승리를 얻지 못하도록 그것들을 잘 지켜야 하는 것이다.
1) 시각, 보는 것을 지킨다 사단의 유혹을 물리치고 그의 계책에 빠지지 않기 위해 영혼의 통로를 잘 지켜야 하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 우리는 불순한 생각을 일으킬 소지가 있는 것을 보고, 읽는 일을 피하여야 한다. 1. 텔레비전과 인터넷과 영화 사단은 범죄와 타락한 습관을 퍼뜨리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는데, 특히 시각을 통해 사람들을 범죄하게 하려고 애쓰고 있다. 죄의 유혹은 시각, 곧 보는 것을 통해 강하게 온다. 엔터테인먼트와 오락 지향적인 현대 사회에서 시각을 통해 받는 영향은 지대하다. 가정마다 안방에 자리잡고 있는 텔레비전과 개인마다 소장하고 있는 컴퓨터의 인터넷의 영향은 심각하다. 인터넷을 통해 무한한 정보의 바다에 노출될 수 있는 현대인들은 자신의 시각을 잘 지키기 위해 기도로 무장하고 인터넷에 들어가야 할 것이다. 안방에 버젓이 방영되고 있는 TV프로그램이나 드라마 속에서 활개치는 선정적이고 세속적인 스토리들은 정욕과 세상에 대한 사랑과 허영을 자극하도록 꾸며진 자극적인 이야기들이다. 현대인들은 매일 악하고 잔인한 범죄에 대하여 너무 많이 보고 듣기 때문에, 한때는 그런 장면을 보기를 두려워하던 부드러운 양심이 영화나 드라마 같은 것들을 자꾸 접하게 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이 죄에 익숙하도록 길들여지게 된다. 사단은 영화를 통해서 인간의 정욕을 흥분시키고 악한 습관과 사상을 조장하고 찬양하는 일을 해왔다. 그는 TV나 인터넷을 통하여 매혹적인 과시와 안목의 정욕을 자극하는 장면들, 그리고 사치와 허영과 유행에 사람들을 옭아맨다. 현대인들에게는 훌륭한 위인들의 생애보다 드라마 속 주인공의 라이프 스타일과 생각구조가 대표적인 표본이 되고 있으며 드라마 속의 삶은 사람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다. 세상의 많은 남녀들이 드라마의 환상 속에 빠져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요즈음 세상 사람에게서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사람들 사이에서까지도 영화와 드라마들이 인기를 끌고 있다. 아무리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세속적인 프로그램이나 드라마 영화를 자꾸 보게 되면 점점 비현실적인 성향을 가지게 되고,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영생에 대한 영원한 관심사에 눈이 멀게 되며, 특히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 성경에 대한 흥미를 잊어버리게 되어 하늘“만나”를 먹으려는 욕망을 잃어버리게 된다. 자극적인 드라마의 내용을 많이 접하게 되면, 고상하고 굳세게 되어야 할 정신이 연약해지고 병적인 상상력이 키워지며 실생활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모본으로 삼아 거룩하게 살려는 욕구가 없어진다.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 이기신 것처럼 승리하려는 강하고 열렬한 소망의 불이 꺼지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눈을 악으로부터 지키자! 보는 일로 범죄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는 그분의 참 백성이다. 굳어져서 점점 더 자극적이고 충격적이며 선정적인 내용들을 원하게 되었다. 2. 독서 사람은 정신적으로 섭취하는 양식에 의하여 마음의 생각이 크게 영향을 받는다. 독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사상에 깊은 영향을 끼친다. 세속적인 잡지들을 보거나 연애 소설이나 자극적인 이야기, 공상 소설 같은 것을 읽는 일은 정신에 불건전한 흥분과 헛된 상상력을 유발시키며 정신의 유용성을 떨어뜨린다. 사상은 마음에 공급된 양식과 동일한 성격을 가지게 되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정신력에 힘을 주지 못하는 쓸데없는 이야기와 헛된 서적으로 마음을 번거롭게 하지 말아야 한다. 해로운 독서는 영성을 약하게 하며 영적 활동에 부적합하게 만들므로 불건전한 독서로 세상의 매력에 빠져 마음의 건전성을 잃으면, 귀중한 진리가 지루하게 느껴지며 성경을 읽는 일과 영적인 것에 싫증을 느끼게 된다. 나쁜 독서 습관에 빠진 사람들은 그들이 즐기는 마음의 양식 때문에 정신력이 불구가 되어 바른 도덕적 취향이 파괴되고, 계속 쓸데없고 불건전한 양식을 먹지 않는 한 마음이 만족을 얻지 못하는 비정상적인 상태에 빠지게 된다. 부절제한 독서의 습관은 음식의 부절제가 신체에 좋지 않은 영향을 주듯 두뇌에 치명적인 영향을 준다.
2) 청각, 듣는 것을 지킨다 듣는 것을 주의하고 가리는 일은 죄의 유혹을 이기기 위해 필수적인 것이다. 악한 것을 보지 않는 것만큼 악한 소리를 듣지 않는 것 또한 중요하다. 세상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듣지 말아야 할 악한 소리들로 가득차 있다. 그것들은 대부분 우리의 육적인 성정을 자극하여 세상의 죄악에 참여하게 하고 우리의 성향을 죄 된 방향으로 흘러가게 만드는 소리들이다. 요즈음 세상에서 우리가 흔히 들을 수 있는 말, 특히 드라마 속에서나 오락 프로그램에서 들리는 말들은 대부분 경쟁을 부추기거나 승부욕을 고취시키는 것들이며, 악한 것을 도모하고 보복하는 것, 혹은 다른 사람을 파멸시키는 악한 묘책으로 가득한 내용의 말들이거나 아니면 경박한 농담과 쓸 데 없는 우스갯소리들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거룩하지 못한 담화나 속된 말들, 특히 다른 사람을 비판하거나 음모나 술수를 꾸미거나 계략을 세우는 악한 일들과 말을 피하고 그런 자리에 참여하지 말고 떠나야 할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과 함께 시온산에 설자들에 대해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오직 의롭게 행하는 자, 정직히 말하는 자, 토색한 재물을 가증히 여기는 자, 손을 흔들어 뇌물을 받지 아니하는 자, 귀를 막아 피 흘리 려는 꾀를 듣지 아니하는 자, 눈을 감아 악을 보지 아니하는 자”(사 33:15). 귀를 막아 악한 소리에서 떠나는 것이죄와 죄의 유혹을 이기는 지름길이다. 우리의 귀에 성령의 파수꾼을 세우셔서 옳은 소리와 특히 진리의 말씀을 가려서 들을 수 있는 힘을 주시기를 기도하자. 듣는 일에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이 또 있는데, 그것은 유행하는 음악을 듣는 일이다. 요즈음 음악의 가사와 춤들은 매우 선정적이며 육욕적인 것들이다. 우리를 경박한 흥분이나 나약한 감상주의에 빠지게 하는 멜로디나 가사들로 이루어진 유행가들은 우리의 정신을 연약하게 하고 산만하게 흩어놓아 사단이 마음에 역사하도록 수문을 열어 놓는다. 우리의 정신을 고상하게 하고 거룩한 사물로 우리의 주의를 이끄는 아름답고 순결한 음악들을 즐겨 들음으로 우리의 영성을 고취시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예수님을 사모하게 만드는 영적인 가사와 감화 있는 찬양은 우리의 마음을 하늘로 이끌어 줄 것이다. 소리를 가려 들음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소리들만 우리 귀에 들여보내도록 노력하자.
신앙5부: 오관을 지키라(Ⅱ)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 곧 그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육 칠 가지니, 곧 교만한 눈과 거짓된 혀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과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과 및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니라”(잠 6:16). 야고보는 혀의 말의 중요성을 이렇게 피력하고 있다“.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어떻게 작은 불이 어떻게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불에서 나느니라.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며 벌레와 해물은 다 길들므로 사람에게 길들었거니와,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약 3:5~8). 우리의 오관 중 입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자.
1) 식욕 식욕을 통한 시험은 인류에게 주어진 제일 첫 번째 시험이었다. 하와가 선악과를 먹음으로 범죄한 것처럼 식욕은 인간이 대항해야 할 가장 강한 유혹 가운데 하나이다. 식욕의 방종은 신체를 쇠약하게 하고 감각기관들을 마비시켜 거룩하고 영원한 사물들을 분별하지 못하게 하며 도덕적 힘을 왜곡시킨다. 아담의 시대부터 그리스도의 시대까지 자아에 대한 방종은 식욕과 정욕의 세력을 점점 증가시켜, 마침내 그것은 무제한으로 사람을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사람은 타락되고 병들어서 스스로의 힘으로는 그것들을 극복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을 대신하여 가장 혹심한 시험을 견디시고 이기셨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굶주림이나 죽음보다 더 강한 자제를 행사하셨다. 그리스도께서 광야에서 긴 기간을 금식하신 큰 목적은 우리에게 자아 부정과 절제의 필요를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었다. 절제는 우리 식탁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하며 생애의 모든 면에서 엄격히 실천되어야 한다. 우리는 예수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식욕과 정욕을 정복하는 자가 되고 모든 면에서 승리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많은 부모들은 자녀들의 입맛을 길러 주고 그들의 식욕을 형성시켜 준다. 어떤 어머니들이 자녀에게 먹도록 장려하는 강한 양념을 친 육류나 자극성 음식들은 더 강한 자극제를 갈급하는 길을 마련해 준다. 만일, 그리스도인들이“절제”에 관심을 가진다면, 우리가 이생에서 형성하는 습관이 우리의 영원한 이익에 영향을 미치고, 우리의 영원한 운명이 엄격한 절제의 습관에 달려 있음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먹고 마시는 일에 있어서 엄격히 절제하게 될 것이다. 왜곡된 식욕을 만족시키기 위해 육신의 입맛의 욕구를 따라가지 말고 그리스도께서 광야에서 보여주신 모본을 따라 식욕과 정욕의 방종을 이기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자.
2) 말 악한 소리를 듣지 않는 것만큼 악한 말을 하지 않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하다. 사람은 자신이 하는 말에 의하여, 그 말이 진심이든 아니든 영향을 받게 되어 있다. 곧 자신이 한말이 뇌에 저장되고 자기가 하는 말을 들으므로 더 강조되어 그 말이 몇 배의 효력을 발생하기 때문이다. 말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우리 신체 중에 귀가 둘이고 입이 하나인 이유는 듣기는 속히 하고 말은 적게 하라는 이유에서이다.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약 1:19). 말과 행동이 일치된 그리스도인이야 말로 하나님의 가장 강력한 증인이며 참 신앙의 모본이다. 입에 실수가 없는 사람은 완전한 사람이다. 마지막 성도인 십사만 사천의 특징도“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계14:5)라고 기 록되어 있지 않 은가? 비 난하거나 정죄하는 말, 불쾌한 감정과 거친 말을 주고받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절대로 해서는 안 될 일이다. 이와 같은 정신이 나타나는 곳에는 그리스도께서 쫓겨나고 사단이 주도권을 잡기 위하여 들어올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품성이 보여지지 않는 말이나 불친절한 말은 어떤 것이나 입 밖에 내도록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께서는“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고 분명히 말씀하셨다(마7:2). 그리스도인들은 혹독한 말과 결점을 찾아내는 일을 그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형제들을 사랑함으로 험담과 비난에 대하여 벙어리가 되어야 한다. 험담과 고자질하는 정신은 사단이 불화와 싸움을 키워 친구 사이를 이간하고 진실한 사람들 사이의 믿음을 흔들기 위해 사용하는 특별한 수단 중의 하나이다. 날카로운 말을 하는 것은 인간의 성정이지만, 이러한 성향에 굴복하는 사람들은 사단이 그들의 마음에 들어와서 그들로 남의 잘못과 과실들을 재빨리 기억하게 하도록 문을 연다. 그래서 사람들의 잘못들은 오래 기억되고 결점들이 주목된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찾는 일과 성급하고 불친절한 말을 그치기를 원하신다. 예수를 믿는 신앙은 아무리 완고하고 거친 성격이라도 유하게 만들며, 행실이 아무리 괴팍할지라도 상냥하게 만든다. 또한 말과 태도를 온순하고 우아하게 만든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성급히 말하는 대신 인내와 부드러움과 사랑으로 충만한 말을 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노력하자. 그리스도에게서 순결하고 고결한 정신과 명랑함을 결합시키는 법을 배우도록 하자. 그리스도인의 친절한 말과 예의는 그리스도교를 옹호하는 가장 힘 있는 논증이 된다. 부드럽고 애정이 넘치는 말을 하며 참된 겸손과 그리스도인의 예절을 나타내는 이들은 영혼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할 것이다. 우리의 말은 영혼들을 예수께로 인도하는 생명을 주는 향기가 되거나 멸망에 이르게 하는 냄새가 된다. 사도 바울은 그 사실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고후 :15,16). 신앙기사: 마치면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부패된 세상에 살지만 순결하고 깨끗한 백성이 되기를 원하신다.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죄악이 가득한 세상에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린 양 예수님의 흠없는 성품을 닮기 위하여 마음의 생각과 오관을 잘 지켜야 한다. 주님과 같은 성품을 가지려면 그 모든 것을 철저하게 지키는 우리의 헌신과 의지의 굴복과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가 필요한 것이다. 연못 한가운데 피어 있는 아름다운 흰 수련화를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 탐스러운 꽃은 주위의 더러움과는 상관없이 아름답게 피어나, 사람들로 하여금 저렇게 더러운 곳에서 그토록 아름다운 수련화가 필 수 있는지 놀라게 한다. 그런데 물밑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그 꽃의 줄기는 오물을 빨아들이지 않고 물밑에 깔려있는 황금빛 모래로뻗어 내려가서 수련화에 영양을 공급하는 가장 순수한 물질만을 모아 순결하고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이것은 우리에게 좋은 교훈이 된다. 우리 주변에는 온갖 죄악들이 넘쳐나지만, 우리 스스로 자신을 지키려고 결심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능력으로 마음의 생각과 오관을 지키며 세상의 죄악과는 상관이 없는 순결한 생애를 살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이다. 지금은 우리의 성품을 준비할 때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우리는 흠 없는 성품을 소유할 수 있다. 매일 매순간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그분을 바라보며 그분을 우리의 본으로 삼으면, 또한 우리의 오관에 성령께서 파수꾼을 세워주시기를 간구하여 세상의 죄악이 우리 마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한다면, 그리고 늘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고 죄를 승리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재창조의 능력을 경험하면서 산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아름다운 성품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이 일을 위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하는 동시에 이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간구해야 한다. 하늘에 가져갈 수 있는 아름답고 흠 없는 성품을 이루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드린다.
사랑의 편지: 꽃잎에 새겨진 십자가 가는 곳 마다 꽃 천지입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노란 유채꽃밭은 노랑 빛으로 온통 땅을 물들이고 작은 오솔길엔 이름 모를 봄꽃이 피어 마음을 봄 색깔로 칠해줍니다. 봄꽃이 지기 전에 기억에 담고 싶어 들길을 나섰습니다. 여기 저기 파란 장다리가 꽃대를 올려 노랑 하양 보라 꽃을 피워내고 키 작은 좁쌀 냉이가 하얗게 피어 미소를 던지는 길엔 보랏빛 작은 별꽃들도 별을 뿌려 놓은 듯 소복이 피어 있습니다. 봄 들꽃 속을 윙윙 날아다니는 벌들이 부러워 냉이 꽃대 하나 잎에 물고 눈높이를 꽃과 맞추었더니 벌처럼 내 눈 앞에도 황홀한 노란 세상이 펼쳐집니다. 그런데 걸으면서 유심히 들여다 본 꽃들은 모두 꽃잎이 네 개였습니다. 네 개의 꽃잎이 십자가 모양을 하고 있는 “십자화”들이었습니다. 유채꽃, 배추꽃, 무꽃, 냉이꽃, 황새냉이꽃, 꽃다지꽃, 미나리 냉이꽃 하나 같이 돌아가며 들쳐봐도 모두 십자가 모양이었습니다. 영어 이름도“cruciate flower”인 꽃잎 네 개의 십자화! “십자가에 못 박다”라는“Crucify”의 뜻을 가진 십자화! 바람에 흔들리는 흐드러지게 피어난 십자화들을 보며 걷다가 갑자기 길에 피인 꽃들이 모두 십자가로 눈앞에 다가왔습니다. 나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방울에 십자가가 하나씩 담겨졌습니다. 십자가가 영혼을 살리듯이, 십자 꽃을 피워내는 십자화과 식물은 사람을 살립니다. 부로컬리, 양배추, 컬리플라워, 꼬마양배추, 케일, 순무 등에는 강력한 항암 물질“피이토”(phyto) 성분이 들어 있어 암을 치료합니다. 특히 유황함유 물질“설포로판”은 암세포가 생겨나는 것을 막아주지요. 십자 모양의 꽃도 예쁜데 치료제도 되는 신기한 십자꽃 식물! 그날, 십자 꽃 가득 핀 길을 걸으며 죄로 죽었던 내 영혼을 살려내신 주님의 십자가를 내내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꽃잎에 새겨진 십자가를 보던 그날, 내 눈물방울 하나하나에 담겨졌던 십자가는 아름다운 색깔로 내 마음 속에도 새겨졌습니다. 글/강영은
바이블맨에게 물어보세요: 어떻게 하면 즐거운 마음으로 계명을 지킬 수 있나요? 이 질문은 그리스도인 신앙과 양심에서 그 중심에 있는 질문일 것입니다. 부모님의 은혜와 희생을 아는 자녀라면 그 마음 중심에 깊은 감사가 있을 것이고 그런 자녀는 부모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매우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하나씩 순종하기로 하게 되는 것은 그 시작과 과정이 모두 자연스럽게 이루어집니다. 멸망이 두려워 억지로 하거나, 체면 때문에 위선적으로 하지 않을 것입니다. 신앙은 열매입니다. 열매는 나무가 스스로 열매를 맺으려고 노력해서 달리는 것이 아니라, 뿌리에서 양분과 수분을 빨아올리고, 햇볕을 받음으로써 자연스럽게 맺히게 됩니다. 야곱이 라헬을 사랑했기 때문에 7년이라는 긴 기간을 그녀의 아버지를 위해서 일하기로 약속했던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우리의 모든 말과 행동이 그분의 말씀과 진리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게 되며, 우리의 모든 애정이 그분을 중심으로 쏟아지게 될 것입니다. 그분께서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최고의 관심을 기울이며, 그분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것은 절대로 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는 일이 자연스럽지 않을까요? 더욱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생명을 바치신 그분의 사랑과 희생을 생각할 때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이나 위험한 일일지라도 기꺼이 감당하게 될 것이며, 그분께서 다시 우리를 데리러 오시겠다는 재림의 약속을 몇 년이 되든지 상관하지 않고 기다리지 않겠습니까? 그러한 사랑이 우리 마음속에 있다면, 자신이 바친 어떠한 희생과 봉사에 대해서도 부족함을 느낄 것이며, 그것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자만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율법에 순종하는 행위는 마음속에 있는 순결한 사랑의 뜨거움을 드러내는 증거에 불과합니다. 사랑이 우리로 하여금 율법을 지킬 수 있게 하는 강력한 능력입니다. 바로 이러한 사랑이 죄인의 마음에 새겨지도록 역사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은혜로 인하여”구원을 얻는다고 말씀합니다(엡 2:8).
이웃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롬 13:8) 많은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을 이런 것은 하지 말고 저런 것은 금한다는 부정적인 측면으로만 이해합니다. 이런 자세로 하나님의 법에 접근하는 것은 사단이 가장 좋아하는 태도인데, 사단은 사람이 하나님의 법에 대해서 부정적인 견해를 가질 때에 구원에서 멀어질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모든 자녀 주위에 세워 놓으신 사랑의 울타리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처럼, 우리가 그분을 사랑한다면, 그분의 법률을 즐겨 순종하는 마음으로 삶에 적용하게 될 것입니다.
온 율법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갈 5:14) 하나님의 율법에 기록된 10개의 계명(십계명)을 4개의 글자로 줄인다면 그것은“사랑하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율법인 십계명을 친히 두 개의 돌비에 기록해서 주셨는데, 첫째 돌비에는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사랑이 4개의 계명에 나뉘어 기록되어 있고, 둘째 돌비에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사랑이 6개의 계명에 나뉘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않을 것이며(첫째 계명), 우상을 만들지도 않을 것이고(둘째 계명),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도 않을 것이며(셋째 계명),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킬 것입니다(넷째 계명). 또한,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사람에 대한 여섯 계명을 자연스럽게 순종하게 될 것입니다. 온 율법은“사랑하라”는 한 말씀에 함축되어 있습니다. 마음속에 참사랑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일에 아무런 어려움을 느끼지 않으며 오히려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어떤 교수님과 신학생들의 강의 중 대화를 들어보겠습니다. 학생: 교수님,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알고 계십니까? 교수: 그럼 잘 알고 있지. 학생: 그렇다면, 교수님은 교수님의 아내를 죽이지 않기 위해서 하루에 몇 번이나 결심하십니까? 교수: 나는 전혀 그런 결심을 하지 않는다네. 학생: 그러면 아내의 물건을 도적질하지 말라는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 얼마나 열심히 노력하십니까? 교수: 전혀 노력하지 않고 있지. 학생: 나는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날마다 있는 힘을 다하여 노력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많 이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진지하게 맹세하고 결심하고 노력하지만, 한결같이 결국에 가서는 죄를 범하 게 된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런데 교수님께서는 교수님의 아내에 대한 계명들을 지키기 위해서 전혀 노력 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전혀 어렵지도 않다고 대답하셨는데, 무엇이 그러한 차이를 만들어 냈습니까? 교수: 나는 내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하기 때문일세.
이 간단한 예화는“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의 의미를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은 자기 자신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결코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를 범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남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한, 결코 다른 사람에게 죄를 범하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죄의 기초는 자기숭배에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자아를 부인하고,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써, 예수님을 마음에 받아들이기만 하면 승리는 항상 우리의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나 자신보다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면, 어떤 경우나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법을 지킬 수 있습니다. 사랑은 모든 친절과 관대함의 근원이며 희생의 원동력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아들까지 우리를 위해서 주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죄인의 마음에 새겨지게 될 때, 그 죄인은 멸망에서 영생으로 옮겨지게 됩니다. 누가, 무엇이 사랑을 소유한 사람에게 죄를 짓게 할 수 있을까요? 건강 기사: 성취감은 건강을 부른다 같은 일이 주어져도 어떤 사람은 적극적으로 그 일을 성취하기 위해 투지를 불태우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느긋하게 여유를 부린다. 흔히 이것을 두고 '성격 탓'이라고 돌리는데, 그 속에는 신기한 비밀이 있다. 미국“밴더빌트”대학 신경과학 전공 대학원생들이 '버튼 누르기' 게임을 통해 도파민의 분비량과 업무에 대한 성취욕의 상관관계를 밝혀냈다고 미국 시사주간지“타임”지가 보도했다. 연구팀은 25명의 젊은 참가자들에게‘버튼 누르기 게임’을 통해 어려운 과제와 쉬운 과제에 도전하도록 했다. 과제를 해내면 참가자는 돈을 받게 되어 있는 게임이었는데, 쉬운 과제는 버튼을 쉽게 누를 수 있는 둘째 손가락을 사용하고 1달러를, 어려운 과제는 움직이기 어려운 새끼손가락을 사용하고 4달러를 받게 되어 있었다. 연구팀은 참가자들에게 돈을 딸 확률에 대해 미리 설명했고 게임 시작 전과 후에 뇌를 촬영했다. 그 결과, 돈을 딸 확률이 낮더라도 움직이기 어려운 새끼손가락으로 과제를 수행하려고 했던 참가자들의 뇌에서 도파민의 분비량이 많게 나타났다. 반면 쉬운 과제를 택한 참가자들은 도파민 수치가 낮았다. 즉, 어려운 과제를 수행한 사람들은 무난한 길을 선택한 이들보다 뇌에서 도파민이 많이 분비된 것이다. 이 실험을 통해 도파민은 사람이 어떤 어려운 과제를 수행하여 성취감을 느꼈을 때, 또한 그것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흥분을 느꼈을 때 분비된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이렇게 분비된 도파민은 또한 건강을 증진시킨다. 성취감은 인간이 스스로 선택하고 노력하는 여하에 따라 느낄 수 있게 되어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죄를 이기고 극복하는 과정은 그 사람에게 성취감과 행복감을 줄 수 있다. 그 때 뇌에서는 도파민이 분비되고 그 과정은 건강을 증진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마음의 악한 성향들을 극복하기 위하여 열렬하게 노력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에 우리의 노력과 극기와 인내는 성품의 변화를 이루어낼 것이며, 그 과정에서 느끼는 성취감과 행복감은 건강이라는 선물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어떤 승리도 자아를 이기는 승리보다 더 고귀한 것은 없다. 자아를 정복해 가는 과정이 어렵고 힘들다고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 과정에서 느끼는 성취감은 도파민을 분비하게 하여 건강과 행복을 가져오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열성 있는 신앙생활의 과정 속에서 구원과 건강을 함께 얻을 수 있다니, 이 얼마나 큰 그리스도인의 특권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