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례 화엄사 대웅전 목조비로자나삼신불좌상
유일한 한국 고유 형식의 삼신불
희소성 인정 2021년 국보 지정돼
세 불상 모두 반장육상 규모 능가
청헌파·인균파 두 계파 협업불사
청헌·응원 등 조각승 18명 참여
구례 화엄사 대웅전에 봉안한 목조비로자나삼신불좌상.
체상용 삼대원리와 삼신불
노자는 〈도덕경〉 제42장에서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도생일 일생이 이생삼 삼생만물)’을 설했다.
도는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고, 셋은 만물을 낳는다. 이런 노장의 도가사상은 유가의 태극도설과도 통한다. 태극-음양오행-남녀와 만물화생의 흐름으로 이해하고 만물은 낳고 낳는 변화를 무한히 계속한다고 본다. 우주원리로서
본체인 도, 또는 태극이 있고 음양 스스로의 조화로움으로 우주만물이 생성되고 무한한 생명력을 가진다는 철학이다.
그것은 ‘체상용(體相用)’ 삼대(三大)원리와 통한다. ‘삼대’는 ‘세 가지 큰 것’으로 본질이 마음이기 때문에 크다.
삼대는 근본원리 혹은 진리의 본체로서 ‘체’,
과보의 결과로서 이룬 양상의 ‘상’,
체에 근거한 무궁무진한 작용으로서 ‘용’을 이른다.
체상용은 불가분의 삼위일체를 이룬다. 불교에서도 그 같은 사유체계가 나타난다. 삼신불(三身佛) 조형의 바탕에
체상용 삼대원리가 스며있다. 삼신(三身)은 세 가지 몸이다. 부처님의 현현을 세 몸으로 인격화하여 나눈 것이다.
진리를 인격화 한 법신(法身),
수행과 공덕장엄의 과보로 이룬 몸 보신(報身),
역사 속에 중생구제를 위해 나투신 몸 화신(化身)으로서
각각 체, 상, 용에 대응한다. 청정법신 비로자나불, 원만보신 노사나불, 천백억화신 석가모니불의 조화로
세계일화인 화엄의 연화장세계를 이룬다. 하나, 둘, 셋의 우주원리와 조화, 무궁무진한 자비작용으로
만유는 나와 타자가 연기법으로 연결돼 있는 일중일체다중일(一中一切多衆一)의 화엄의 통일을 이룬다.
삼신불이 곧 일체 화엄세계의 인격화다.
여래형 비로자나불과 보살형 노사나불 구성
삼신불 조형은 석가모니불-비로자나불-노사나불을 삼위일체로 구성한다.
그런데 한국불교에선 여래형 석가모니불-여래형 비로자나불-보관 쓴 보살형 노사나불의 독특한 형식으로 나타난다.
삼신불 조형은 칠장사 오불괘불탱(1645년), 갑사 삼신불괘불탱(1650년), 운문사 비로전 삼신불도(1755년),
통도사 대광명전 삼신불도(1759년) 등에서 보듯 대부분 불화 속에 등장한다.
단청이나 문자장엄 형식에선 범자 종자자(種子字)로 표현한다. 삼신불의 범자 종자자는 ‘옴아훔’이다. 〈제교결정명의론〉에서는
“훔 자는 법신이고,
아 자는 보신이며,
옴 자는 화신으로,
이 세 글자가 삼신을 포섭한다.”고 설명한다.
조각의 형식으로는 극히 드물다. 1628년 인목대비의 발원으로 조성한 남양주 수종사 금동불상군(18체) 중의 삼신불 정도다.
그나마 금동불상군은 팔각오층탑에 봉안한 불상이었다. 법당에 모신 삼신불 조각은 좀체 만나기 어렵다.
1626년에 현진 스님이 수화승으로 조영한 보은 법주사 대웅보전의 소조비로자나삼신불좌상은 한국 고유의 삼신불 구성과
유사하지만 보신불이 아미타여래 형상인 점에서 뚜렷한 차이가 난다. 한국 고유의 삼신불 구성으로 조각한 경우는 구례 화엄사
대웅전에 모셔진 목조비로자나삼신불좌상이 유일한 사례다. 희소성에 의해 2021년에 국보로 지정됐다.
법당, 불상, 후불탱 모두 국가문화유산
1636년 〈화엄사 사적기〉에는 화엄사 대웅전의 원래 이름이 ‘대웅상적광전(大雄常寂光殿)’이라고 밝히고 있다.
정유재란으로 소실된 ‘대웅상적광전’이 1630년경에 벽암 각성 스님 주도로 재건되면서 ‘대웅전’ 현판으로 바꿔 달았다.
같은 시기 보은 법주사의 ‘대웅대광명전’을 ‘대웅보전’으로 변경한 것과 같은 현상이다.
목조삼신불은 향좌측부터 석가모니불-비로자나불-노사나불의 구도로 배치했다.
세 불상마다 각각의 독립된 닫집을 갖췄다.
후불탱화도 목조삼신불 배치와 배대해서 삼신불탱화로 짝을 맞췄다.
삼신불후불탱화는 1757년에 조성된 3폭 불화로 높이가 4.4m에 이르는 대형불화로서
18세기 최고의 화승 의겸 스님이 13명의 화승들과 협업으로 완성한 생애 마지막 작품으로 알려진다.
의겸 스님 화파의 고유한 특질인 색채에서 양록과 주홍의 한난대비가 드러난다.
삼신불탱화도 보물로 지정돼 대웅전(국보)-목조삼신불(국보)-삼신불후불탱(보물)으로 연결됨으로써 통일적이면서
불가분의 성보 문화유산의 유기성을 갖추게 됐다. 화엄사 대웅전에서처럼 불전건축, 불상, 후불탱(목각탱)
모두 국가문화유산인 경우는 강진 무위사 극락보전, 예천 용문사 대장전 등이 있다.
화엄사 목조삼신불좌상은 목조불상으로선 대형급이다.
비로자나불 높이는 276cm, 노사나불은 268cm, 석가모니불은 248cm나 된다.
대좌 높이를 제외한 불상 자체만의 크기다. 크기가 법신, 보신, 화신의 순서대로다.
세 불상 모두 장육상의 절반 크기인 ‘반장육상(半丈六像)’ 규모를 능가한다.
장육은 16척에 이른다. 1척을 30cm로 잡으면 장육상의 크기는 4.8m 정도다.
목조불상이 반장육상의 크기를 능가하는 사례는 흔하지 않다.
그 정도 규모의 불상은 대개 나무 틀에 흙으로 빚은 소조상 형식으로 조영한다.
복장유물서 나온 책자 형식의 〈시주질〉
목조 비로자나삼신불좌상의 세 불상 중에서 석가모니불과 노사나불에서 복장유물이 나왔다.
2015년엔 석가모니불에서, 2020년엔 노사나불에서 나온 복장유물을 조사했다.
두 불상에서 공통적으로 후령통과 오방경, 다라니, 시주질, 경전을 포함한 전적류 등이 나왔다.
석가모니불 복장에선 62점이, 노사나불 복장에선 78점이 확인됐다. 두 불상에서 나온 전적류를 분류해보면 다음과 같다.
△경전류는 〈묘법연화경〉, 〈원각경〉, 〈능엄경〉, 〈대승기신론소〉, 〈화엄경현담회현기〉 등이 있으며,
△강원 교재류는 〈치문경훈〉, 〈선요〉 등이 있고,
△불교의식집은 〈청문〉, 〈수륙무차평등재의촬요〉 등이 있다.
복장유물 중에서 특별한 역사적 가치로 조명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시주질〉이라는 제목을 가진 기록물이다.
〈시주질〉은 보통의 시주질, 연화질 기록처럼 낱장의 넓은 한지에 조영 내력을 기록한 형식과는 전혀 다르다.
아예 책자 형식이다. 석가모니불 복장에서 나온 〈시주질〉은 22페이지, 노사나불의 것은 38페이지에 이른다.
마치 삼신불상 불사에 대한 종합보고서처럼 기록하고 있다. 불상 제작 시기, 발원, 시주 물품과 시주자 명단,
조각승과 증명, 화주의 기록, 봉안 장소 등의 기록을 망라하고 있다.
〈시주질〉에 의하면 목조삼신불상은 1634년 3월에 불사를 시작하여 다음해 1635년 가을에 완성하여 대웅전에 안치하였다.
노사나불 〈시주질〉에서는 극락왕생과 함께 “모든 사람들이 이 불상을 보면 보리심을 내서 악을 금하고 선행을 닦기를
원합니다.”라고 발원하고 있다. 그와 함께 “주상전하성수만세, 왕비전하수제년, 세자저하수천추”로 왕실 축원을 덧붙였다.
각성 스님 화주와 두 계파 협업으로 조성
불상은 누가 제작하였을까?
삼신불의 대형 목조불상 조각공정임을 반영이라도 하듯 조각승 18명이 동원됐다.
중심 승장은 청헌, 응원, 인균 스님이다. 17세기 전기 최고의 조각승으로 평가되는 현진 스님 계보의
청헌파와 응원-인균파의 두 계파가 협업으로 진행한 불사였다.
학계에선 비로자나불과 석가모니불은 청헌파가,
노사나불은 응원파가 조각한 것으로 추정한다.
두 유파의 조각풍을 그대로 반영한 듯이 비로자나불과 석가모니불은 근엄하고
선이 비교적 경직된 반면 노사나불은 상호도 한결 부드럽고 선도 유연해서 대비가 된다.
그런데 어떤 배경으로 둘 이상의 유파가 한 자리에 모여 협업으로 불상을 조영할 수 있게 된 것일까?
왕실발원 등에 의한 대형불사가 추진되거나 불사의 모든 조직, 노동, 자금을 통솔하는 화주(化主)의 강력한
중심력과 축적된 신뢰에서 가능할 것이다. 하나를 덧붙인다면 열악한 사회경제적 조건 속에서 파탄난
민중의 삶이 될 것이다. 17세기 조선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정묘호란 등 계속된 전쟁으로 초토화 지경이었다.
그런 상황에선 유파의 경계를 따질 처지가 아니었을 것이다.
17세기 전후복구와 불사의 중심에 강력한 한 분이 계셨다. 화엄사에 주석했던 벽암 각성 스님이다.
벽암 스님은 구례 화엄사,
완주 송광사,
보은 법주사,
합천 해인사,
하동 쌍계사 등의 전후 사찰 재건에서 부동의 중심에 있었다.
불상 조성에서 당대 최고의 조각승인 현진, 청헌, 무염, 해심, 응원, 인균 등을 동원했다.
스님은 대공덕주였으며, 모든 일을 주관하는 사람이라는 뜻의 새로운 칭호 ‘판거사(辦擧事)’라고 칭해졌다.
불사 시주명단에 이름 올린 왕실인물
두 불상의 〈시주질〉에서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시주자 명단이다. 계급과 계층, 성속을 망라한다.
중복명단을 포함해서 노사나불의 시주질에선 1400여 명, 석가모니불 시주질에선 1300여 명에 이른다.
그 중에서 왕실 관련 시주자는 24명으로 보인다.
7명은 왕실 사람이고,
17명은 왕실에 종사하는 상궁이다.
왕실인물 7명은 선조의 아들 의창군 이광 부부,
선조의 사위 신익성 부부,
인조의 아들 소현세자 부부 등이다.
숭유억불의 조선사회에서 왕실인물의 시주명단 등재는 놀라운 변화다.
왕실의 적극 후원과 2000여 명의 시주행렬, 벽암 각성 스님의 강력한 통솔력,
당대 최고의 조각승이 결집하여 이룬 목조삼신불좌상. 그 모든 인연 조건들은
한국의 목조불상 걸작이 탄생하는 필요충분조건으로 작용했다.
화엄사 목조삼신불상은 두 가지 측면에서 한국의 불교미술사에서 기념비적 걸작으로 평가된다.
첫째, 석가모니불-여래형 비로자나불-보관 쓴 보살형 노사나불로 구성한
한국 고유의 삼신불상으로서 국내유일의 조각 삼신불상이라는 점.
둘째, 보관 쓴 보살형 노사나불 조각상 역시 국내 유일의 성보라는 점이다.
보살형 노사나불은
공주 신원사 괘불탱,
예산 수덕사 괘불탱,
부석사 오불회 괘불탱,
화엄경 변상도 등에서 종종 볼 수 있지만 조각으로는
화엄사 대웅전 목조노사나불이 유일하다.
더구나 제작연도와 조각자,
왕실 시주자 명단까지 갖추고 당대 최고의 조각승의 협업까지 더해졌다.
▶ 한줄 요약
화엄사 목조삼신불상은 두 가지 측면에서 한국의 불교미술사에서 기념비적 걸작으로 평가된다.
첫째, 석가모니불-여래형 비로자나불-보관 쓴 보살형 노사나불로 구성한 한국 고유의 삼신불상으로서
국내유일의 조각 삼신불상이라는 점.
둘째, 보관 쓴 보살형 노사나불 조각상 역시 국내 유일의 성보라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