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핵심내용: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는 구절은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다시 이 땅에 오시려는 가장
확실하고 간절한 열망이 담긴 의지의 표현입니다. 사도 요한처럼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고백할 수 있는 준비의 나날보내겠습니다.
A. 오픈 말씀
마태복음 24 장은 재림의 징조에 관한 장, 마태복음 25 장은 재림 준비장이라 하듯이
누가복음 17 장(chapter)도 재림의 징조장, 눅 18 장은 재림 준비장이라 합니다. 양쪽 모두 재림의
준비장에다 비유를 기록하고 있는데요, 마태복음 25 장은 열 처녀, 달란트, 양과 염소의 비유를
그리고 누가복음 18 장에는 과부와 재판관, 바리새인과 세리 비유가 등장합니다.
마태복음의 재림 징조장 24:1-3 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감란산 위에 앉으셨을 때
제자들이 종용히 와서 가로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when)에 이런 징조가 있겠으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what)가 있겠습니까? 요한은 다른 제자들과
같이 시간과 때(when), 그리고 사건과 징조(what)에 대해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로부터
60 년 이상이 흐른 후, 요한은 마태복음 24 장에서 보인 반응과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어떤 반응이었나요?
내가 속히 오리라
∎*계 22:7 -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ερχομαι ταχυ ), I am coming soon!
∎*계 22:20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ναι ερχομαι ταχυ), Yes, I am coming soon!
예수님께서 “내가 속히 오리라” 말씀하시자, 요한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라고
화답합니다.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고대하며 바라는 초기교회 성도들의 구호 마라나타를 외치고
있습니다. 언제 오십니까? 무슨 사건과 징조가 지나야 오십니까? 라고 묻지 않았던 것입니다.
언제(when)라는 시간은 요한에게 있어서 쟁점이나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재림 약속에 대한
임박성과 확실성 그리고 약속 성취에 대한 강한 기대감이 그 사건의 순서보다 우선순위가
되었습니다.
B. 본문
1. 예수님의 열망과 의지표현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이 표현은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다시 이 땅에 오시려는
간절함과 확고한 열망과 의지가 담긴 표현입니다. ‘속히 오리라’ (ερχομαι ταχυ )라는 구절 또한
요한계시록에만 언급된 강조 표현입니다. 이런 문맥에서 우리는 성도들이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마음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려는 뜻이 훨씬 강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속히’(ταχυ-soon)라는 부사는 시간과 속도가 함축된 단어입니다. 임박한 시간에 맞추어 바쁘게
행동하고 움직이시는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 교회의 생명력과 사명에 대한 실행력은 하나님의
약속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지상의 교회가 주님의 약속을 얼마나 신뢰하고 붙드는 가에 따라
삶의 태도와 동기 그리고 헌신의 강도가 다를 것입니다.
2. 재림의 준비는 축복 중에 축복20
요한 계시록에 일곱 가지 축복이 기록되어 있는데요, 재림을 준비한 가운데 누리는
축복들입니다. ‘다시 오심’을 믿고 신실하게 준비하는 것이 복된 삶이라니! 이 얼마나 기쁜
복음입니까? 단순하게 미래에 대한 정보 나열만이 아니라 주의 오심을 준비하는데 실수 없도록
그분의 백성을 돕고 계시는 은혜를 기록한 것입니다.
1.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 듣는 자,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도다, 때가
가까움이라 (계 1:3)- 첫째 복(재림)
2. 주 안에서 죽는 자 복이 있도다 (14:13)- 둘째 복(재림)
3. 깨어 자기 옷을 지키는 자 복 (16:15) 도적같이 오리니 -셋째 복(재림)
4.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 입은 자 복 (19:9) -넷째 복(재림)
5.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 있다 (20:6) –다섯째(재림)
20 Rabach Symon Odek, The Promise “I Am Coming Soon” in Revelation, JATS, 25/1(2014): 75-
88.
6.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 복 (22:7) 속히 오리니- 여섯째 복(재림)
7. 두루마기를 빠는 자 복 (22:14)-성에 들어갈 권세 -일곱째 복 (재림)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말씀은 성도의 삶에 영향을 줍니다. 읽고, 듣고, 지키고
회개하고, 충성하게 합니다. 삶의 무게, 부피를 줄여 나가며 하늘 여행길에 힘을 더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며 살았던 아브라함의 생애도 <줄이는 삶>이었습니다.
창 22:2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으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피할 수 없는 명령이었습니다. 마음 아프게 삼일 길(약 70km) 걸으며 침묵하며 결론을
내렸지만, 똑 같았습니다. 서운하지도 섭섭하지도 않았던 것은 그것이 주님의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본토와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났고(창 12:1), 조카 롯과 헤어지고(13:5-18), 이스마엘
마저 떠나보냈던(17:17-18) 그였지만, 아무 소리 없이 뚜벅뚜벅 앞으로 걸어 나갑니다. 집안에
사병이 318 명, 권속들이 수두룩한데 아브라함이 직접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갭니다. 모리아산 도착해 사환들에게 아래서 기다리게 하고 이삭이 직접 짐을 나르게 합니다.
집에 건 밖에서 건 응당 사환들이 할 일인데요, 왜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요? 좀 이상하지 않나요?
그것은 이삭을 제단에 바치는 하나님의 지시가 너무나 엄중하고 중한데 혹여나 권속, 사환들이
일을 돕는 다 시피하고 <모리아산 이삭 번제> 계획을 눈치 채는 날에는 방해되어 그르칠 수
있다는 판단에 아예, 관련된 일 근처에는 얼신도 못하게 한 것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정말 길고 힘들었던 모리아산 여정 길에서 (창 22), 아브라함이 남겼던 대화는 고작 몇 마디
뿐, 나머지는 침묵하고 다만 행동할 뿐입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1 절), “내가 여기
있노라”(7 절), “내가 여기 있나이다.”(11 절)라는 대답만 그의 반응이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하고 자신의 생명 같은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드리라 하네요. 가족, 고향,
친척은 떠날 수 있었지만, 이삭만큼은 떠날 수 없다 생각했는데, 하나님 부르심에 그저 순종할
따름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14 절)라 외친 말이었습니다.
아브라함 신앙처럼 우리 또한 재림을 준비하는 이 땅이 “여호와 이레”되길 소망합니다.
<단풍 드는 날> 도종환 시인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순간부터
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
제 삶의 이유였던 것
제 몸의 전부였던 것
아낌없이 버리기로 결심하면서
나무는 생의 절정에 선다
C. 나눔과 적용
"오늘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서 있으면, 그리스도께서 오늘 오신다 해도
준비된 것이다" <HP, 227> 이 말씀을 묵상해 보세요.
요한 웨슬리(John Wesley)가 예수님께서 내일 오실 것을 안다면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라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실제로, “나는 자고 아침에 일어나 일을 계속할 것입니다.
왜냐면 그분께서 내게 명하신 일을 하고 있는 가운데 주님 뵙길 원하기 때문”이라
답했습니다.
웨슬리의 답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