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월당 시집 제2권 2-5 2 회구懷舊 옛을 생각한다
5
여사가정與四佳亭 조격이구阻隔已久 사가정四佳亭과 못 만난 지 벌써 오래인데
탐상득시이수探箱得詩二首 상자를 뒤지다가 시 두 수를 얻었으므로
요억미다遙憶彌多 멀리 생각함이 더욱 많아
인화기운因和其韻 그 운자韻字에 화답하다
채약산중춘부추采藥山中春復秋 산중에서 약 캐는 사이 봄이 가고 다시 가을이 왔으나
일신무희역무수一身無喜亦無愁 내 한 몸엔 기쁨도 없고 근심도 없어라.
요지륙가구치자遙知六街驅馳者 멀리서 알 수 있는 것은 육조六曹 거리 달리는 이
불각홍진몰백두不覺紅塵沒白頭 더러운 티끌이 흰머리를 덮어도 제 모르리.
창투조양수일훤窓透朝陽受日暄 아침볕이 창에 들어 햇살이 따뜻한데
소연단좌욕무언翛然端坐欲無言 으젓하게 단좌(端坐)하여 말도 하지 않으려네.
유마증루문수인維摩曾漏文殊印 유마거사維摩居士는 일찌기 문수文殊의 인가印可 잃었는데
운만춘산풍만헌雲滿春山風滿軒 구름은 봄 산에 가득하고 바람은 난간에 가득하구나.
►사가정四佳亭
조선 성종成宗 때 대제학大提學 서거정徐居正(1420-1488)의 호號.
►육가六街 광화문 앞에 육조六曹가 있던 큰 거리이다.
►유마거사維摩居士 석가여래 부처님의 제자 유마힐維摩諾.
인가印可라는 말은 허가한다고 증명하는 것이다.
●문수文殊와 보현普賢
문수는 문수사리文殊師利의 준말. 문수보살文殊菩薩. 문수사리보살文殊師利菩薩.
문수文殊는 묘妙의 뜻이고 사리師利는 길상吉祥의 뜻.
보현보살普賢菩薩과 짝하여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의 보처寶處로서
왼쪽에 있어 지덕智德과 체덕體德을 맡고 있다.
보현普賢(Samantabhadra) 편길遍吉이라고도 번역.
보현보살은 여래의 오른쪽에서 이덕理德, 정덕定德, 행덕行德을 맡고 있다
석가의 양협시脇侍로서 좌문수左文殊, 우보현右普賢으로 하는 삼존형식三尊形式.
이것은 수행의 근본이 知行合一임을 나타낸다.
절간에 부처(覺者)는 없다
문수와 보현도 없다
내 몸이 부처고 뇌가 지혜라면 몸짓은 行이다
어디 깨달음이 있다고 똥자루 안고 쏘다니지 마라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냄새 풍긴다.
●서거정의 금오정사 제시題詩
서거정은 자가 강중剛中, 호는 사가정四佳亭 또는 정정정亭亭亭이다.
사시가흥여인동四時佳興與人同 사계절 멋진 흥취를 남들과 함께 하네
에서 뜻을 취하여 ‘사가四佳’라는 호를 사용하였다.
사계절이 각각 자신의 공을 이룬 뒤 물러나는 것처럼 은둔하겠다는 뜻을 담은 것이다.
김시습은 1465년(세조11)
4월 서거정을 찾아 금오정사의 제시題詩를 청하였다.
서거정은 당시 정계의 향방과 관련하여 마음이 불편한 상태였으므로
병을 핑계로 인사를 끊고 수락산 부근 전장田莊에 있던 참이었다.
서거정은 김시습의 그간 소식을 몰랐으나 불쑥 찾아가서 이렇게 청하였다.
저는 계림 남산에 땅을 가려 서너 칸 되는 정사를 짓고 도서를 좌우에 벌여두고
그 사이에서 소요하고 음영하고 있습니다.
산중 사계절의 맛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이지요.
저는 그곳에서 장차 늙을 예정이고 또 그곳에서 입적할 예정입니다.
근자에 천리 멀리 여행길을 떠났다가 서울에 당도했는데 내일이면 지팡이를 돌릴 예정입니다.
부디 선생님께서 한마디 기념될 말을 내려주셔서 제 정사를 빛내주시길 바랍니다.
서거정은 금오정사의 경치를 총괄하여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하년정사측금개何年精舍側金開 어느 해에 정사를 돈 들여서 세웠던가
만리강산입좌래萬里江山入座來 만리 강산을 방안에서 볼 수 있다지
오극천저연한해鰲極天低連瀚海 하늘이 나지막한 금오산은 바다로 이어지고
계림일출근봉래鷄林日出近蓬萊 해가 뜨는 계림은 봉래산에 가깝다네
반월성두황엽락半月城頭黃葉落 반월성에는 누런 잎 지고
첨성대하백운퇴瞻星臺下白雲堆 첨성대 아래는 흰 구름 모이리라.
상인일척건곤안上人一隻乾坤眼 상인께서 건곤을 궤뚫어 보는 독안으로
좌감동명소사배坐瞰東溟小似杯 동해를 작은 술잔처럼 보시네.
서거정은 김시습의 요청에 의하여 김시습이 거하는 금오정사에 대한
제시題詩를 지어준 것과 더불어 송별의 뜻을 아래와 같이 말하였다.
불견상인금삽년不見上人今卅年 스님을 못 본 지 30년
중래면목총의연重來面目摠依然 다시 봐도 얼굴이 안 변하셨군.
유방시상삼생원遊方始償三生願 방외에 노닐어 삼생의 바람을 보상하였고
면벽회참일미선面壁會參一味禪 면벽하여 일미선에 참여하셨다지.
교유아욕동지둔交遊我欲同支遁 나는 지둔과 방외지교를 맺듯 하고
시구사응계선권詩句師應繼善權 선사의 시는 선권을 이었군요.
거거고산하일도去去故山何日到 가고 가서 옛 산을 어느 때 이를까
야지송언상방전也知松偃上方前 상방 앞 누운 소나무가 눈에 보일 듯하네.
►일미선一味禪 모든 분별이 끊어진 순수한 수행.
►지둔支遁(314-366) 동진시대의 승려. 속성은 관關. 자는 도림道林,
주로 반야 계통의 불전을 연구하고 그의 반야의 “空”의 해석은
<즉색의卽色義>라고 하였는데 거기에는 노장사상의 영향이 강력하게 인정된다.
►선권善權 송나라 때의 승려.
홍주洪州 정안靖安 사람이고 俗姓은 高씨, 자는 손중巽中.
외모가 맑고 여위어 사람들이 수권瘦權이라 불렀다.
세상사에 초탈했고 술을 좋아했다.
시를 잘 지어 승려 조가祖可와 어깨를 겨루었는데 함께 江西詩派.
/김시습 평전 심경호/돌베개